이런 책이 나왔다. 인스타를 통해 문장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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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뮈의 부조리. 어릴 때 논술 준비하며 주워듣고는 멋있어서 부조리가 뭔지 떠들어댄 적이 있었다. 이젠 그 기억만 남고 한참이 지나서 부조리가 뭔지 생각도 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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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니힐리즘, 우리시대의 형이상학으로서의 니힐리즘, 니체가 각인시킨 그 세계를 베버는 탈주술화와 가치 다신(多神)주의로 명명한다. 니체의 세계에서 신은 죽었다면, 베버의 세계에선 그 죽은 신들이 모두 무덤에서 기어나와, 영원한 투쟁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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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주의마저도 절대적인 체위를 잃고, 따라서 우리는 내게 있어 악마가 무엇이고 신이 무엇인지 언제나 투쟁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절대적 가치를 잃은 우리는 이 니힐리즘에서 일상을 견뎌야 한다. 어떤 이들은 근대의 가혹한 의미의 폐허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기 위해 신비로 숨어들어가 삶을 재주술화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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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영원회귀는 이전 시대의 형이상학으로서 기독교의 시간관을 성좌에서 끌어내렸고, 까뮈는 그것을 시지프 신화로 형상화했을까. 니체주의자였던 베버는 아마도 그 테마를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통해 이야기했던 것 같다. 요컨데, 근대사회의 인간으로서의 무쓸모함. 근대인의 삶이 다시는 아브라함의 그것과는 같을 수 없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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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의미있는 현상일까. 베버는 모든 것들이 끊임없이 농축되어 가는 근대의 과정 속에 있는 근대 문화인은 생의 포만감을 느낄 수 없다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근대 문화인은 ‘최종적인 것’이 아닌 끊임없는 진보 속에서 극히 작은 부분만을 낚아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근대인들에게 죽음은 의미 없는 것일 뿐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시조 아브라함이 신의 영원에 참여하며 삶에서 만족감을 느낀 것과는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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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버는 합리화가 진행될수록 비합리성도 커진다는 역설을 남겼다. 그에게 최고의 가치는 ‘자유’였는데, 그는 이 가치를 초월적으로 정당화하지도, 실체화하지도, 낙관하지도 않고, 구원의 길로 만들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스스로 태양이 되어야 하는 것, 그렇게 이 역설적인 현실, 의미의 무덤에서도 의미의 작은 길을 찾기를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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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인간의 덧없음과 우연함과 하찮음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의미를 창조할 수 있는지 도전하는 책이다. 까뮈는 이제 기억도 안 나고 토마스 네이글은 처음 들었고 철학도, 반대신론anti-theism 역시 모르지만 이 도전은 어떤 신을 무덤에서 기어나오게 하며, 어떤 태양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또 베버로부터 얼마나 앞서 나갔을지, 궁금하기에 천천히라도 꼭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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