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을 더욱 풍성하게 읽기 위해서는 부르디외 사회학의 개념을 아시면 좋다고 생각을 해서 이야기를 조금 나눠보려고 하고요, 제가 소설에 관해 설명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포일러가 걱정되더군요. 스포가 있으니 참고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부르디외는 그의 마지막 저작으로 <자기분석을 위한 소묘>를 남깁니다(자기분석에 대한 초고로 번역). 자서전이라는 장르를 무척이나 비판했던 부르디외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사회학을 통해 스스로를 분석합니다. 죽음을 앞에 그는 자신이 청소년기에 받은 상처가 ‘치유 불가능한 것’이어서 ‘인생의 매 순간’ 끊임없이 고통을 주었다고 회고하고, 다른 곳에선 “나는 결코 대학의 구성원으로서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루이의 이 책은 “유년기에 관한 그 어떤 행복한 추억도 없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죠.

부르디외의 사회학에는 많은 개념들이 존재하나 이 책을 읽을 때, 밀접한 개념은 아마도 하비투스(Habitus)와 문화자본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비투스란 일종의 사회적인 습관·버릇입니다. 개인은 사회적 습관을 체화한 존재고 그렇기에 개인의 행위는 순수하게 개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역사적이고 집단적이며 계급적인 것이죠. 저는 하비투스를 일종의 사회적 함수라고 이야기하는데요, 함수의 공식이 있으면 어떤 변수가 들어와도 일정한 방식으로 처리됩니다. 그런 것처럼 어떤 동일한 하비투스를 체화한 집단의 개인은 서로 다르지만 생활할 때 어느 정도 동일한 반응과 행위로 대응을 합니다. 하비투스는 열린 성향의 체계이기도 하지만 이정도만 이야기드립니다.

부르디외는 자본을 문화·사회영역으로 확장시킵니다. 문화자본에도 여러 층위가 있지만, ‘체화된 문화자본’이 중요합니다. 체화된 문화자본은 경제자본이 외부에 축적된 자원인 것과는 다르게 소유에서 존재로 이행된 것으로 교환도 불가능하죠. 문화자본은 사회화 과정에서 개인에게 내화되며, 신체와 결합된 한 성향으로서 존재하는 개인의 능력이 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취향·교육·몸짓 등의 다양한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예를 들어 고급스러운 문화자본은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동일한 예술품을 평가할 때는 전혀 다른 견해가 나오고 언어의 사용, 일상적인 몸짓에서도 문화자본의 차이는 드러나죠. 흔히 아는 고상한 언어와 천박한 언어의 차이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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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의 끝>은 빈곤과 폭력을 다루는 시종일관 불편한 책이고, 야만적인 폭력으로 가득한 책입니다. 에디에게 폭력을 가하는 사람들은 야만적인 하비투스를 가진 사람들로서 폭력이 폭력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야만은 자연스러운 것이지 폭력이 아닌거죠. 그곳의 하비투스를 가진 에디 역시 그것이 문제라고 반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비투스와 맞는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하죠. 어떤 고급스러운 취향도 찾아볼 수 없는 이 동네는 원색적인 폭언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반지성주의의 하비투스는 근대의료에 대한 불신, 몰지각한 위생관념 같은 이야기로 형상화됩니다.

너무나도 적나라하고 야만적인 폭력을 보여주는 이 책은 결국 폭력의 장소인 피카르디를 떠나 도시의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끝이 납니다. 그게 바로 ‘에디의 끝’인데요, 책의 마지막은 상급학교에서의 새로운 형태의 폭력의 시작을 암시하며 마무리됩니다. ‘에디의 끝’이 시골의 원시적인 폭력의 ‘끝’을 의미했다면, 에필로그는 도시·부르주아 사이에서의 세련된 형태의 폭력을 암시하면서 끝이 납니다. 그건 에디의 끝이면서 동시에 에디의 시작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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