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넨베르크 조직신학 1
2장 하나님 개념과 그 진리성의 질문 - 5.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자연적인” 앎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로마서 1장 19-20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로마서 2장 14-15절
1. 하나님은 창조로부터 모든 인간에게 알려져 있다. 이것은 자연신학의 진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한 하나님의 계시의 빛으로부터 수립되 인간에 대한 주장이다. (cf. 스토아적 우주신학과 자연법이론)
2. “타고난 하나님 인식” 하나님에 대한 앎이 선천적으로 인간의 영혼에게 주어져 있다는 생각은 테르툴리아누스 이래로 서방 그리스도교 신학에 잘 알려져 있다. 아벨라르두스 이후 타고난 양심에는 자연법을 통해 종교의 토대는 물론 하나님에 대한 앎도 보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3. 루터 역시 로마서 강의에서 창조로부터 알려져 있는 하나님에 대한 보편적인 앎에 관한 사도적 본문을 하나님의 법이 인간의 ‘마음속에 쓰여져’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을 말하는 본문(롬 2:15)과 연결시켰다. (+멜란히톤, 키케로)
첫 번째로 우리의 주목을 끄는 주제는 키케로의 ‘자연법’ 사상이다. 신의 섭리를 강조한 스토아 철학에 영향을 받은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키케로는 자연법을 철학적 사유를 넘어 제도적 표현으로까지 설명하려던 최초의 정치사상가다. 무엇보다 인간의 재능으로 고안할 수 없는 자연 이성이 부여한 신과 인간의 법(lex divina et humana)이 존재하고, 이 법은 인간의 올바른 이성(recta ratio)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으며, 이런 자연법에 기초한 도덕 원칙은 정치사회적 경계를 넘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주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을 도덕적으로 평등한 인격체로 인정하고, 다수의 의견이나 사회적 관습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자연법이 정의가 기초해야 할 근거라는 견해는 지금도 널리 수용되기 때문이다. - 정치철학, 곽준혁
4. 하나님에 대한 ‘습득된 앎’보다 ‘타고난 앎’에 대한 강조는 루터나 초기 멜란히톤에게서 나타나는 불신 곧 원죄에 “빠져 현혹된” 이성에 대한 불신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루터는 우상숭배가 이성이 타고난 앎(마음속에 기록되어 지워질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앎)으로부터 잘못 작용하여 다른 것과 혼동하며 일어나는 것이라고 보았다.
멜란히톤 : 루터와 함께 독일의 종교개혁을 이끌고 루터 사후에도 열심히 활동함. 12살에 하이델베르크 대학 입학, 21살 비텐베르크대학에 그리스어교수로 임용되면서 95개조 반박문을 쓰고 1년 뒤인 루터와 인연을 맺게 됨. 1521년 보름스 칙령이 내려지고, 소르본느 대학에서 루터를 이단으로 규정하자 멜란히톤은 ‘파리의 멍청한 신학자들의 광포한 칙령을 논박함’이라는 글을 쓰면서 루터를 옹호하고 소르본느의 신학자들은 비판했다. 멜란히톤은 루터종교개혁의 브레인 역할을 하며 개신교 최초의 조직신학서이며 루터교 최고의 신학서적이라고 평가받는 신학총론을 집필한다. 루터는 “이 작은 책은 반발할 여지가 없는 불멸의 고전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루터는 에라스무스와의 자유의지 논쟁에서도 루터는 이 책을 가지고 논쟁에 임했다. 루터가 카를 5세의 제국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자 멜란히톤은 루터대신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제출하기도 한다. 멜란히톤은 삼위일체 같은 본질을 수호하되, 비본질에는 자유를 이야기하자고 했지만 이를 통해 수정주의자로 낙인찍힌 그는 루터파에서 축출된다. 루터가 선두에 서면 멜란히톤은 길을 닦고 사상을 정초했다. - 배덕만
5. 루터와 멜란히톤의 구(舊)프로테스탄트 교의학은 타고난 앎과 하나님에 대한 실제적인 앎(습득된 앎)을 연결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요한 무제우스 이후로 타고난 앎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에 관한 앎에 대한 성향이나 자연적 본능뿐이지 실제적인 앎은 아니라는 견해가 나왔고, 실제적인 앎은 유한한 사물들과 제일 존재자이신 하나님 사이의 구분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세계 경험의 맥락에서 획득된다는 것이다. 이후 인간이 하나님을 보편적으로 알 수 있다는 교리의 무게중심은 타고난 앎에서 습득된 앎으로 이동한다.
스토아학파 : 자연학을 또한 인간 행위의 합리성이 대자연의 합리성에 근거한다는 저에서 윤리적인 목적을 띠기도 한다. 자연학적 관점에서 볼 때 스토아주의의 선택의 근간에 있는 자신과의 정합성을 이루려는 의지는 물질적 실재 가운데서 일종의 근본적인 법칙처럼 나타난다. 이 법칙은 모든 존재들과 존재들 전체에 내재한다. 생명체는 실존의 첫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과 조화를 이룬다. 생명체는 자신을 보전하고 그 자신의 실존을 사랑하고자 한다. 그러나 세계 그 자체도 하나의 살아있는 존재로서 자신과 화합하며 정합성을 이루고자 한다. 체계적이고 유기적인 단일체 내에서와 마찬가지로 세계 내에서도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들과 관계를 이루고 있고 모든 것이 모든 것 안에 있으며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을 필요로 한다. -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 피에르 아도
스토아학파는 덕은 이성에 따라서, 즉 로고스에 따라서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로고스는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했다시피 우주의 핵심 원리이다. 스토아학파는 이 원리를 신, 신성한 불 혹은 운명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로고스에 스스로를 개방할 수 있고, 이로써 그들의 영혼은 조화를 이루고 우주와 일치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영혼은 일정하게 우주를 지배하는 질서와 조화를 반영한다. 가장 중요한 통찰은 모든 것이 현명한 질서하에 있으며 일어나는 일들에 개입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안다는 점을 깨닫는 것일 것이다. 모든 것은 로고스, 즉 신에 의해 인도된다. ··· 스토아학파의 법사상의 출발점은 모든 개인에게 현존하는 보편적 이성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이성의 다른 표현인 “신성한 불”의 불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스토아학파는 이 보편적 이성으로부터 자연법을 도출해냈다. 키케로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이 공통의 본성인 보편적 이성이 법의 원천이다. 서양철학사, 군나르 시르베크·닐스 길리에
6. 종교개혁 신학에 대해 제기된 실제적인 문제는 오늘날도 양심의 현상에 관여하지 않고서는 적절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게르하르트 에벨링은 양심 개념에 대한 중요한 논문을 통해 양심의 경험에서 발생하는 하나님, 세계, 인간에 대한 중요한 논문을 통해 양심의 경험에서 발생하는 하나님, 세계, 인간의 상관성을 강조했다. 여기서의 양심은 타고난 양심이다. (cf. 스토아학파의 양심 이해)
7. 양심은 감정의 삶으로부터 양심과 삶 전체 사이의 비주제적인(unthematisch) 관계가 생성된다. 비주제적 관계란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지 않고 서로 포괄된 관계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초기에 개체적으로 생성될 때, 엄마의 몸에서 경험하는 “공생적 영역”, 즉 무자아적 정착을 볼 수 있다. 이렇듯 하나님·세계·자아가 아직 구별되지 않았던 초기의 차원들의 분리는 경험의 산물이며 양심의 경험은 이와 같은 자기 관계가 최초로 주제화 되는 형식이다. 이렇게 서술된 주제는 신학과 철학의 전통 속에서 타고난 앎의 의미로 하나님에 대한 자연적인 앎을 주장했던 진술과 관련된다.
8. 루터는 자연적인 앎에 타고난 양심 속에서 믿음과 어떻게 관계되는지 질문한다. 루터에게 믿음은 신앙적 지성으로서 참된 하나님 인식의 형식이었다. (타고난 양식 속에서 인식되는 하나님에 대한 앎과 믿음은 동일하지 않음) 루터의 믿음은 보다 넓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일례로 루터는 “오직 마음의 신뢰와 신앙만이 하나님과 우상을 만든다.”라고 이야기했다. 마음의 신뢰와 신앙이 하나님이든, 우상이든 의지하게 한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전제는 인간은 모든 경우에 자신의 신뢰를 어떤 것에 고정해야 하며, 자신의 마음을 거기에 두고 의지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삶의 탈중심적 형식’도 포함된다. 인간은 무조건 자신의 밖에 놓인 무엇인가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
9. 신뢰는 자아와 세계의 차이에 대한 최소한의 퇴화된 의식을 전제하고, 이것보다 선재하는 것은 개체가 공생적 삶의 관계성 속에 놓이는 것이다. 공생적 삶의 관계성은 개체가 자신에게 도달하여 자신의 곁에서 자기 자신을 의식하게 됨에 따라 그와 동시에 자신의 현존재를 무규정적으로 능가하면서 그의 의식 안에서 존재하게 된다. 인지적 발달과 차별화의 과정과 함께 비로소 신뢰할 수 있는 대상들이 구분될 수 있으며, 그것들 사이의 선택 역시 가능하게 된다.
10. 그럼에도 인간은 시초부터 자신을 능가하는 비밀 속에 세워져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범접할 수 없이 침묵하는 현실의 무한성이 비밀로서 지속적으로 다가오는” 방식으로 비밀 안에 있다. 이 비밀은 개인이 지닌 삶의 역사에서 최초로 관계를 맺는 인물과 마주하면서 구체화된다. 엄마와의 관계를 예로 들 수 있으며, 엄마는 아이로 하여금 깊은 신뢰 속에서 세계 전체로, 삶으로 창조자·보존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해준다. 이 과정이 “비주제화 된 하나님의 앎”과 관계된다.
11. 이런 과정을 ‘모든 경험에 우선하는’ 분명한 하나님 의식이라는 의미의 종교적 선험(a priori)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칸트 - 트뢸치 - 오토) 태고적 의식은 “전적 타자”나 “거룩한 것”에 대한 의식이 아니다. 영원한 것, 거룩한 것들은 경험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성찰에 속하는 사유가 핵심이다.
12. 인간의 원초적 상태에 속하는 앎, 하나님에 대한 “주제화 되지 않는 앎”은 비주제적이기에 자기 자신 안에서 이미 하나님에 관한 앎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적 활동성의 형식이다. 현실에서 인간은 언제나 이미 자신의 실존적 “질문”에 대한 잠정적인 “대답들”로부터 살아간다. 경험을 통해 자아와 세계가 구분되면서 질문이 시작된다.
13. 태고적 의식은 어떻게 하나님에 관한 앎으로 지칭될 수 있는가? 하나님은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출 6:3)” 이 말씀처럼 인간들이 인식하지 못하였어도 태초부터 모든 개인에게 현재하시고, 모두에게 알려져 있다.
14. 롬 1:20, 바울에 의하면 “세계의 창조 이래로” 하나님은 “그가 지으신 만물을 통하여” 알려져 계신다. 이것은 타고난 앎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습득된 앎, 즉 세계의 경험과 결합되어 있고 그 경험을 통해 획득되는 앎에 관계된다.
규정되지 않은 절대자에 대한 직관은 세계 경험과정 속에서 유한한 사물들과 구분된다(예를 들면 유한한 시간 속에서 무한함을 사유). 이 같은 세계 경험과정에서 창조의 작품들을 통해 신성의 활동과 본질의 의식에 도달한다. 철학적 자연신학은 “세계의 창조 시” 이미 존재했던 선험적인 개념이 아니며 오히려 인류의 역사 속에서 항상 다양한 방식으로 명시적인 하나님 의식이 먼저 형성되었다. 이 의식이 창조의 작품들의 경험과 결합되면서 철학적 자연신학이 등장한다. 따라서 창조의 작품(타고난 양심)들을 통한 하나님 인식에 대한 바울의 진술과 종교들 사이의 관계는 미리 우상숭배로 판단되어서는 안 된다. 그 중에는 분명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에 도달한 것도 있고, 불멸의 하나님을 피조된 사물들과 맞바꾸려는 인식도 있을 것이다.
핵심 : 타고난 앎, 비주제적인 관계, 습득된 앎
'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입문자를 위한 기독교 추천도서 112권 (2) | 2019.08.25 |
---|---|
아나뱁티스트(Anabaptist), 급진 종교개혁, 종교개혁 좌파, 메노나이트(Monnonites)에 대해 (2) | 2018.04.05 |
송용원, 『칼뱅과 공동선』, IVP, 2017을 읽고 (2) | 2018.03.13 |
창조론자들 - 과학적 창조론에서 지적 설계론까지(The Creationists), 로널드 넘버스, 새물결플러스, 2016 서평 (0) | 2018.03.13 |
[서평] 윤철호의 인간 - 하나님의 영원한 삶에 참여하기 (0) | 2017.1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