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새로운 노동 이해, <일과 성령>, 미로슬라브 볼프
기독교의 새로운 노동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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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는 또 다른 한편으로 기업가의 화폐취득도 ‘소명’으로 해석함으로써 이와 같이 특별한 노동 의욕을 가진 자들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했다.” - 막스 베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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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윤리는 극빈층의 수를 ‘확실하게 줄’이려는 움직임에 물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게 이바지했다. 그 윤리는 결국 특정 형태의 삶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아무리 비참하다고 해도 노동에 대한 임금으로 지탱되는 삶이라면 도덕적이라는 것이다.” - 지그문트 바우만
막스 베버는 유명한 종교사회학 논총 서문에서 자신은 신학이 아니라 신학이 만들어내는 인간들의 사회적 행위를 인식하고 연구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처럼 저 역시도 종교사회학적 관점에서 종교의 노동윤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번에 독특한 책이 하나 나와서 살펴봤습니다. 이 책, 미로슬라브 볼프의 『일과 성령』은 일(work)의 신학을 새롭게 구축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입니다.
1. 핵심: 루터부터 시작된 기존 일의 신학의 한계와 자본주의 사회의 특성이라는 문제 속에서 볼프는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에서 착안한 종말론과 자신의 성령론 이해를 통해 새로운 일의 신학을 구성하며 신학적 갱신을 하는 책입니다.
2. 저자: 20세기 신학의 거장이자 ‘희망의 신학’을 창안한 위르겐 몰트만의 제자 볼프는 ‘노동’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예일대의 교수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신학자입니다.
3. 문제의식: 종교개혁자 루터로부터 시작된 소명, 즉 일과 노동에 관학 신학이 앞선 사회학자들의 관찰처럼 불평등과 착취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 있으며, 신학적으로도 한계를 가지고, 또한 16세기에 형성된 사상이기에 현대사회에 적용하기는 어렵다는 신학적 문제의식과, 불평등·착취·자연파괴 등의 문제를 안고 있는 현대사회의 현실성 사이에서 새로운 일의 신학을 모색합니다.
4. 구성: 이런 문제의식과 함께 1부에서 볼프는 일의 역사적 변천과정과 아담 스미스·칼 맑스를 통해 일에 관한 기본적인 내용들을 소개합니다. 그중에서도 볼프는 맑스가 제기한 소외(Entfremdung)을 중요하게 다루는데, 여기서 소외란 (저는 소외개념만 반학기 배웠지만..) 간략하게 노동을 주체로 해야하는 인간이 되려 노동에 의해 억압되어 인간의 창조성과 주체성을 박탈당하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런 현실을 기반으로 2부에서 본격적으로 일의 신학이 구성됩니다. 볼프는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에서의 종말론으로서 ‘새 창조’를 이어받아 물질성을 긍정하고 바로 이 물질세계를 종말의 완성인 새 창조의 장소로 규정하며 지금 사는 이 세계 자체를 보존·변혁하기 위해 신과 협력하는 것이 곧 ‘일’이라고 정의합니다. 뒤이어 볼프는 성령론을 통해 기존 루터의 소명론이 가진 문제점들을 지적하며, 성령이 주는 선물인 다양한 카리스마(은사)를 통해 이를 극복하고 현대사회에 적합한 노동신학을 인간론·여가·환경 등의 구체적 장소에서 논합니다. 끝으로 볼프는 앞서 제기했던 소외의 문제를 마지막으로 다루는데, 여기에서 볼프는 성서가 소외의 문제를 비판하며, 노동의 개인적·구조적 변화를 추구하는 것 역시 긍정합니다.
5. 느낀점: 내용이 많은 책을 축약하다보니 중언부언이 심했네요. 관찰자로서 제가 보기에 이 책은 20년 전 책이지만 일에 관한 균형잡힌 시각을 원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고요, 저는 일부러 (동의와 상관없이) 다양한 스펙트럼의 종교담론들을 분석하는데 이 책은 비슷한 주제의 책 중에 가장 준수한 것 같습니다. 기존의 기독교의 소명이해는 너무 보수적이었고, 폭력적이기도 했죠. 이 책은 그런 문제들을 잘 돌파하는 것 같습니다. 책에 맑스가 호명되지만 볼프는 복지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정도의 온건한(?) 스탠스라 지향에 상관없이 널리 읽혀도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책이 개신교 내부에서 새로운 담론을 형성하고 개신교인들의 새로운 종교행위를 추동할 수 있는지 지켜볼 생각입니다.
곁가지로 덧붙이자면, 박득훈 목사가 쓴 해설은 최악이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볼프가 의도한 바가 아니라 자신이 그랬으면 하는 바를 볼프에게 강제하는 식이다. 형편없는 이해에서 나온 것. 저분이 이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인가 여러 번 읽어도 감상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