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가정폭력에 관하여 레이철 루이즈 스나이더, <살릴 수 있었던 여자들>

피에르 부르디외 2021. 8. 14. 22:17

가정폭력에 관하여 <살릴 수 있었던 여자들>
 
미국의 가정폭력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의 원제와 번역본 제목이 이 책을 읽는 키워드가 될 것이다. 책의 원제는 “보이지 않는 멍No Visible Bruises”이고, 역서의 제목은 “살릴 수 있었던 여자들”이다. 이 책은 어떤 절박함을 가지고 있는 책이다.
 
앞서 말한 대로 이 책은 가정폭력의 문제를 다룬다. 하지만 가정폭력이란 단어는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문제를 제대로 지칭할 수 없는 용어이기도 하다. 가정폭력이 문제화된 이후 여러 운동에서는 가정폭력을 ‘아내에 대한 폭력’으로 대체하고자 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정확히 아내에 대한 남편의 폭력을 다루는 책이다.
 
아내에 대한 폭력의 역사는 유구하다. 전통사회에서 아내는 가장에게 언제든 폭력을 당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이런 역사는 그리스나 로마를 포함한 고대의 역사에서부터 현대의 역사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길거리에서 사람을 구타하면 바로 가해자가 구속되지만, 가정에서 아내를 구타하면 가해자는 구속되지도 처벌되지도 않던 시대가 존재했다. 가장이 아내를 구타하는 것은 가정의 일이자 가장의 권한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는 이런 인식이 개선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이런 뿌리 깊은 습속은 사회에 잔존하고 있기에 아내에 대한 폭력은 한국의 경우, 법으로 제정된 것이 1990년대 후반이며, 그 이후에도 처벌의 수위는 동일한 수준의 다른 폭력에 비해 현저히 낮은 실정이다.
 
이 책, <살릴 수 있었던 여자들>은 미국에서의 가정폭력 문제를 다루고 있다. 2000년에서 2006년까지, 6년 동안 군 복무 중 사망한 군인은 3,200명인데 반해, 가정 내 살인 사건으로는 1만 600명이 사망했다. 법제도 역시 기존의 가부장적 습속에서 제정되었기에, 남편이 아내를 구타하다가 사망한 경우에는 ‘과실치사’가 되고, 가정폭력에 대항하여 아내가 남편을 살해하면 ‘살인’이 적용된다. 이렇듯, 우리의 인식은 사회의 오래된 규범 속에 자리하고 사회의 법, 인식, 제도의 변화는 더디다.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이 책은 가정폭력이라는 ‘보이지 않는 멍’을 가시화하는 작업이다. 저자 레이철 루이즈 스나이더는 문학적 저널리즘을 통해 보이지 않는 폭력을 보이는 폭력으로 가시화하고, 미국 사회 가정폭력의 근간을 이루는 메커니즘을 추적한다. 이를 파악함으로써, 보이지도 않는 멍을 가지고 죽어간 가정폭력의 희생자, 즉 “살릴 수 있었던”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던 여자들을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는지 고민하며,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문제를 삼으면 문제가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가정폭력은 특히 여성 이슈 내부에서도 잘 다루어지지 않는 보이지 않는 문제이기도 한데, 이 책을 통해 이런 문제가 기존보다 가시화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