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人文學)은 정말 위기일까? - 내가 생각하는 인문학
인문학(人文學)은 정말 위기일까? - 내가 생각하는 인문학
몇 년 전부터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한국사회에 하나의 강박이다. 유교경전을 외우고 시를 써서 나라를 다스리던 조선시대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한 때 잘나가던 이른바 문학·사학·철학 책이 읽히지 않고 인문대학 커트라인이 떨어져서인지 한국사회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 아니 강요하고 강박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말 인문학은 위기를 맞이하고 있을까? 나의 대답은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지금의 인문학은 위기가 아니기도 하고 맞기도 하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인문학은 풍요이자 빈곤이다.
인문학의 위기?
먼저 인문학이 위기가 아닌 이유부터 생각해보자. 아마 당신이 20대 중반 이상의 나이라면 2010년 한국사회에 닥쳤던 ‘정의란 무엇인가’ 대란을 기억할 것이다. 나는 한국사회의 지적인 지형이 정의란 무엇인가를 기점으로 변화를 겪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정의란 무엇인가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약 150만 부 이상 팔렸다. 사실 철학서적, 그것도 딱딱한 정치철학서적이 그 정도의 판매고를 기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작 본토에서는 10만 부가 팔린 책이 한국에서 150만 부 이상 판매된 것은 아이러니였고 사람들은 이런 기현상의 원인을 나름 분석했다. 그것은 지적빈곤,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응전이라는 결론을 만들어냈다. 그 이후로 한국사회는 번번이 모든 사회문제를 “기-승-전-인문학 위기”로 풀어냈다. 지금도 그런 문법은 익숙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구글 트렌드에 따르면 현재 한국은 가장 인문학의 인기가 뜨거운 상황이다. ‘인문학 특강’, ‘인문학 강의’, ‘인문학이란’ 따위 검색어가 연관 검색어로 기록된다. 인터넷에서의 상황만이 아니다. 2015년, 인문학 서적은 최초로 소설의 판매량을 넘어섰다. 한국은 적어도 양적으로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역사상 가장 양적인 풍요 속에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지핀 인문학의 불씨에 한국사회는 빠르게 태워졌다. ‘인문학? 어렵긴 해도 한번쯤은 공부해봐야지’, ‘인문학 공부는 필요해’하는 정도의 생각은 어렵지 않게 공유되었고 그런 수요에 부응하기 시작한 것이 일명 양산형, 요약형 인문학의 시작이다. “처음 배우는”, “시작하는”, “한 권으로 끝나는”, “하룻밤 만에 읽는” 등의 이름이 붙은 인문학 서적들의 시작이다. 이들은 한 권의 책에 소크라테스 - 플라톤 -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철학자들의 사상을 간단하게 요약, 나열하는 책들이다. 이런 양산형 인문학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입문, 요약, 처음, 교양, 지식 같은 것들이다. 이런 책들의 목적은 간단하다. 교양 있는 사람들 되기 위해 그럴싸하게 말하는 것을 소비하고 지식으로서 인문학을 소비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고자 한다. 인문학이란 무엇일까?
인문학?
국어사전에서는 인문학을 ‘언어, 문학, 역사, 철학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한다. 교육학사전에서는 ‘인간의 사상 및 문화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영역’이라고 인문학을 말하고 이것들보다 조금 더 친절한 위키백과에서는 인문학을 ‘인간과 인간의 근원문제, 인간의 사상과 문화에 관해 탐구하는 학문, 자연·사회과학이 경험적 접근을 주로 사용하는 것과 달리 분석적이고 비판적이며 사변적인 방법을 폭넓게 사용한다.’라고 쓰였다. 여기서 말하는 인문학이 가진 공통 키워드는 인간, 본질, 분석, 비판, 사유 같은 것들이다. 그렇다면 양산형 인문학은 인문학의 진정한 키워드들 인간, 비판, 사유 같은 것들을 우리의 삶에 끌어들였는지 생각해봐야한다. 내가 말한다고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생각했을 때는 아니라고 답하고 싶다. 그렇다면 인문학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나는 인문학도는 아니지만 나의 나름의 고민을 적어본다.
내가 생각하는 인문학
내가 생각하는 인문학은 인간학(人間學)이다. 학창시절 도덕, 윤리 같은 과목과 친하지 않아도 맹자의 성선설(性善說), 순자의 성악설(性惡說), 고자의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은 대충 들어봤을 것이다. 나는 인문학의 시작은 결국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에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성선설이나 성악설이니 하는 것들도 결국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의 대답하기 위한 것이다. 동양철학에서는 공자를 서양철학에서는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결국 학문의 탐구대상을 자연에서 인간 중심으로 변화시켰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인간 존재에 대한 고민은 우리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착하고 나쁘고 하는 것들은 춘추전국시대라는 답이 필요했던 시기에 해답의 출발이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이고 어떤 존재라면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제 과학의 발달로 사회과학은 인간의 행동에 대해 탐구하고 자연과학은 발달하면서 인간을 구성하는 물질적 작용에 대해 탐구하면서 인간에 대한 비밀이 하나하나 풀려가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 여지는 있다. 나는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에 인문학의 시작이 있고 변화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 내가 생각하는 인문학은 자유학(自由學)이다. 기독교 신약성서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가르침을 전한다. 자유란 무엇일까? 자유란 스스로 自에 말미암을 由를 사용한다. 스스로에게 이유가 있는 것이 곧 자유이다. 외부적인 구속이나 억압,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이유가 있는 것 그것이 자유다. 제멋대로 행동하고 거리낌이 없는 상태는 자유라기보다는 방종(放縱)에 가깝다. 따라서 인문학은 단순히 교양이나 지식으로 소비되기보다는 자신에게 이유를 가지게 되고 상황에 이끌려 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강제하는 상황이나 구조 속에서도 내가 어떤 이유를 가지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나는 인문학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교양 있는 사람이 되고 그럴싸한 이야기나 어떤 특정 지식을 아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에서 기업에서 시행하는 인문학 평가도 굉장히 쓸모없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역사의 순서를 배열하고 철학자의 이름을 맞추고 시의 시대상을 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인문학은 거기에서 의미를 찾아야하고 그 의미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주체성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나는 인문학이 자유학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생각하는 인문학은 싸움이다. 인문학은 현실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고담준론들이나 추상성 높은 이론들, 지적유희 같은 것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문학은 현실에 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절에 가면 온화한 미소를 품은 불상(佛像)을 볼 수 있다. 석가모니로 유명한 고타마 싯다르타는 자비의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기원전에 이미 ‘모든 인간에게는 불성(佛性)이 있다고 선언했다.’ 이 말이 별스럽지 않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사실 약 2500여년 전에 모든 사람은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싯다르타는 카스트제도와 강력히 반대했다. 그리고 싸웠다. 인문학이 현실과는 유리되어 사회에는 대답하지 못하면서 단순히 위기의 인문학을 이야기하는 것은 모순적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겨울철에 실험을 하다 병을 얻어 죽기도 하였다. 사마천은 생식기가 잘려나가는 치욕적인 형벌인 궁형(宮刑)을 당하면서도 역사책을 서술해나갔고 동양의 역사학을 정립하는 불세출의 학자가 되었다. 그들의 인문학은 삶이었고 싸움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고수하다가 사형당한 학자는 물론이고 무덤이 파헤쳐진 학자들도 부지기수이다. 하지만 쏟아지는 인문학 서적들에서 그들의 자리를 찾아볼 수는 없는 것 같다. 결국 인문학은 삶이며 싸움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 이 말을 곱씹어보면 이것은 곧 앎은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이고 앎으로 인한 우열의 관계가 생길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전근대의 폭력은 무지(無知)에서 나왔다면 근대 이후의 폭력은 오히려 앎, 즉 아는 것에서 나왔다. 따라서 단순히 안다는 것은 어쩌면 폭력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인문학은 단순히 알고 지식을 쌓고 교양을 아는 데에 사용하는 것은 인문학의 풍요 속에 진정한 의미를 찾지 못하는 역설적 상황을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인문학이 위기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것 같다고 말한 것이다. 지금 사회의 인문학에 대한 열망과 관심은 제대로 쓰일 때 중요한 것 같다. 무엇을 아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알고 왜 알아야하며 그것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그것이 중요할 것이다. 아는 것이 힘이기에 어쩌면 인문학은 어느 철학자의 말 속이나 서점에서 터져 나오는 책들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 속에서, 내 주변과의 관계 속의 갈등하는 지점, 그것에 대한 고민 그 곳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2016.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