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1. 플라톤의 생애와 역사적 배경


고대 그리스 여러 작은 도시국가, 폴리스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중 페르시아 전쟁(BC 492~BC 448)에서 주도권을 쟁취한 것은 아테네라는 도시국가였다. 이 전쟁은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전쟁이었고 이 전쟁에서 아테네가 승리함으로써 아테네는 그리스 전역의 맹주로 발돋움되었다. 아테네는 국가적 지위가 올라간 만큼 국민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그리고 그때에 페리클레스(Perikles, B.C 498~429)라는 지도자가 나타났다. 페리클레스는 종래의 귀족정치를 대신하여서 민주정치를 시작했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는 민주주의가 왕성해졌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으로 권력의 방향이 정해진다. 이런 까닭으로 당시 아테네는 웅변과 수사학이 유행했다. 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언변을 가진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주요한 요직을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소피스트(Sophist)들이다. 이들은 정치지도자를 지망하는 사람들에게 웅변과 수사(Rhetoric)를 가르치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진리성이 내포된 주장에 초점을 두었기보다는 당장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가에 초점을 둔 것으로 파악되곤 한다. 이런 소피스트들은 민주정치의 산물이었다. 이들은 철학의 대상을 인간중심으로 옮겨놓았다는 것에 의의를 가진다. 또한 이들은 프로타고라스(protagoras)의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는 명제로 대표되는 상대주의적 진리관을 내세웠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아테네의 번영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바로 펠레폰네소스 전쟁(BC 431∼BC 404) 때문이다. 펠레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와 그리스가 동맹 시(市)들을 이끌고 치른 전쟁이다. 이 펠레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의 패배로 끝나고 이것은 그리스 쇠퇴의 원인이 된다. 이 펠레폰네소스 전쟁의 시대적 상황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플라톤(BC 428~347)이다. 플라톤은 민주주의 체제의 아테네의 전성기가 아닌 쇠락기에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플라톤은 민주정치의 혼란기를 경험한 사람이다. 또한 특히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했던 자신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사형에 처하게 한 민주주의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플라톤의 정치사상은 역사적인 상황 가운데 이러한 기존정치의 혼란과 실패 속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아테네의 명문 귀족 가문에서 출생했다. 20살 때에는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어 큰 영향을 받는다. 플라톤은 본래 정치가를 희망했다. 그러나 아테네의 민주제에 대한 회의로 포기하게 된다. 결국 철학자로 일생을 보내게 된다. BC 387에는 아카데메이아(Akademeia)를 설립한다. 그 이후 시칠리아에서 현실정치에 도전하는 듯 했지만 이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종료된다. 그 후 플라톤은 사망할 때까지 아카데메이아에서 강의와 저술에 전념하며 살았다.


본론


2. 플라톤 정치사상 요약


플라톤 정치사상에 들어가기 앞서 그의 철학에 대해 알아보겠다. 우선 플라톤의 인간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플라톤에 철학에 있어 덕은 탁월성이다. 플라톤은 인간의 존재가 다른 존재에 비해 탁월한 점이 ‘이성’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이런 플라톤의 관점은 대화편 국가 7권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인간의 육체는 어두운 동굴에 사슬에 묶인 상태에 비유된다.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은 동굴 밖 세상이 아닌 동굴 안에 비춰진 그림자의 세계에 살고 있다. 동굴 밖에는 생존하는 존재들이 있다. 그러나 사슬에 묶인 육체는 그 존재들이 동굴의 벽에 투영하는 그림자들 밖에 볼 수 없으며 여기서 얻어진 지식은 이러한 이유로 참된 사유로 볼 수 없다. 보통의 사람들은 이 동굴에서 탈출할 수 없다. 그러다가 어쩌다가 사람들이 일부 그 사슬을 끊고 자유롭게 되어서 동굴 밖의 세상으로 나가게 되면 태양이 비추는 진정한 세계로 진출할 수 있게 된다. 동굴 밖으로 나온 것은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고 밝은 지식의 세계로 나아간 것이다. 태양이 비추는 동굴 밖의 세계는 진리의 세계, 다시 말해 이데아의 세계이다. 그 이데아 중에서는 가장 높은 이데아는 태양에 비유되는 선의 이데아이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 자신의 이성주의, 이상주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전개시켜나간다고 볼 수 있다. 플라톤에게 있어 영혼은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플라톤은 영혼이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영혼불멸설과 상기설을 주장한다. 인간은 전생에 영혼으로 존재하며 그 영혼은 참된 관념들을 소유한다. 그러나 영혼이 육체와 결합하는 순간 참된 지식은 망각된다. 그래서 현실세계에서의 인간은 살아가면서 사물들을 관찰하고 지식을 쌓으며 망각했던 참된 지식을 상기시킨다.

플라톤은 영혼 3분설을 주장한다. 이것은 즉 각 개인의 영혼은 이성, 기개, 욕망으로 이루어져있다는 이야기이다. 플라톤에게 있어 이성은 헤아리는 능력이다. 이것은 이성적 분별이나 사유를 가능하게 하고 합리적인 덕목이다. 기개는 갈등하는 능력이고 즉각적으로 반응되며 합리성과 비합리성을 모두 내포한다. 또한 욕망은 헤아릴 줄 모르는 것이고 욕구는 충족시키는 것이며 비합리적인 적이다. 플라톤은 지적 수련을 통해 이성, 기개, 욕망을 각각 지혜, 용기, 절제의 덕으로 발현할 것을 주장한다. 이 주장은 국가철학에 적용된다.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또는 장인)의 세 신분이 있다. 플라톤은 이 세 신분이 각자 자기 역할을 하고 다른 신분을 침해하지 않을 때 국가는 가장 국가다운 면모를 갖추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기능주의(functionalism) 관점의 효시(嚆矢)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에 있어서 국가의 정의는 국가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자기의 기능을 다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가 정의롭기 위해서는 개인들이 자기 본분을 다하는 정의의 덕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개인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 본분을 다하면 국가는 저절로 자기의 기능을 다하는 국가, 정의로운 국가가 됨을 의미한다.

플라톤은 국가를 통해서 세상의 정치체제를 5개로 구분한다. 최선자정체(aristokratia), 명예지상정체(timokratia), 과두정체(oligarchia), 민주정체(dēmokratia), 참주정제(tyrannis)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정치체제 속에서도 최선자정제(aristocracy)를 최고의 정치체제로 주장한다. 여기에서는 최선자란 귀족을 의미하고 플라톤에게 최선자는 철인왕(philosopher king)이다. 플라톤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나라를 구성하는 계층을 세 개로 분화했다. 통치자 계층은 머리의, 수호자 계층은 가슴의, 생산자 계층은 배의 덕을 잘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3주덕과 연관성이 있고 이 3개의 덕이 조화를 이룰 때 정의라는 덕목이 실현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통치자는 개인의 미덕으로 지혜와 용기, 절제의 미덕을 고루 갖춘 정의의 덕을 지녀야 한다. 국가이성으로는 지혜의 덕을 요구한다. 또한 수호자 계층은 국가의 보호와 질서를 필요로 한다. 용기의 덕을 지녀야한다. 또한 생산자(또한 장인) 계층은 절제의 미덕을 필요로 한다. 이 계층은 보통 대중에 해당되는데 이들에게는 물질적 요구를 충족시켜 쾌락을 누리는 것이 최상의 가치가 된다.

플라톤은 또한 철인(哲人) 정치를 주장했다. 여기서의 철인은 단순이 지혜로운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현상을 초월해 이데아를 인지할 수 있는 자’를 뜻한다. 플라톤은 많은 저작들에서 주지주의적 사상을 표현한다고 한다. 이렇듯 통치자 또한 ‘정치’에 대해 아는 자만이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초기 플라톤의 저작에서 철인왕은 보통 일방향적인 통치자이다. 이런 면에서 엘리트주의를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후기 저작에서는 정치가에서 법률로 넘어가며 피통치자에 대한 소통도 전제하고 있다. 플라톤이 철인정치에 대해 논한 것들을 상당히 진보적인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모든 사람의 평등한 교육권이나 공정한 인재선발 등 당시 시대적 상황과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플라톤은 또한 국가에서 공직자 윤리에 대한 부분을 지적한다. 플라톤에 있어 통치계급은 사유재산을 소유할 수 없다. 그리고 자식에 대한 사적 교육도 금지될 뿐 아니라 공동양육은 주장하기도 하고 아내를 공유하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지배계층을 일종의 공산주의적(communism) 제도로 운영해 사적이익이 공적인 영역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다. 이것은 당시 시대적 정황으로 보았을 때 매우 급진적인 사상임을 알 수 있다.

3. 플라톤의 영향 및 의의

플라톤은 상대적 진리관이 대세이던 시대에 절대적 진리를 제시했던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또한 소크라테스가 전해지는 자료들 모두 플라톤의 저서이므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영향이나 철학에서 유리(遊離)하여 생각할 수 없는 사상가이다. 소크라테스는 절대적인 진리를 제시했다. 그리고 플라톤은 그것을 이데아로 구체화했다. 플라톤이 민주정에 대한 염증을 느낀 것도 자신이 동경했던 스승 소크라테스를 사형으로 몰아넣은 사건의 영향이 클 것이다. 이외에 플라톤은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의 일자론,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 등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플라톤은 아케데메이아에서 또 하나의 위대한 사상가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르쳤다. 그리고 후에 중세 교부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을 전개하는 지적도구로서 플라톤 철학은 사용되었다. 또한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은 직·간접적으로 서구 철학 그중에서도 이성주의에 큰 영향을 끼쳤다. 화이트 헤드라는 철학자는 "전통적 유럽 철학의 가장 안전하고 일반적인 정의는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로 구성된 것이다."라고 그의 사상을 평가하기도 했다. 그는 기능주의에 대한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결론


4. 플라톤 사상과 현대적 의의


나는 플라톤 사상이 현대에 주는 의의를 크게 2가지로 생각해본다. 우선 민주주의에 대한 반론이다. 현대의 다수의 사회는 민주주의 체제로 구성되어 있다. 민주주의는 다수에 의한 다수의 지배를 의미한다. 민주주의가 현대사회의 가장 많이 채택된 정치체제인 것에 대해서 민주주의 자체에 일종의 합리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플라톤의 사상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당위성을 인정받고 있는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하나의 반론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민주주의 최대의 실수는 아마도 나치를 선택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 플라톤이 민주정을 중우정이라고 비판했듯이 당시 다수의 바이마르 국민들은 나치당을 선택했고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 등의 반인류적인 사건을 일으킨 나치당의 선택에 기반이 되었다. 이렇듯 플라톤의 관점은 다수의 생각이 진리가 아님을 현대적으로 의의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플라톤은 공직자 윤리에 있어 엄격한 조건을 제시한다. 이에 대한 사상은 현대의 통치자들에 대한 성찰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있는 전문성과 연관성이 없는 보상식 인사 처리를 생각해보면 지식과 전문성 있는 통치자의 덕을 주장한 플라톤의 사상이 적용될 수 있다. 또한 공적 결정을 할 때에 사적이익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플라톤 철학은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국가에 나오는 것처럼 사유재산 철폐나 공동양육 등의 아이디어는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행위이다. 하지만 공적인 목적을 위해 사적이익을 배제하는 덕목은 부정부패의 온상으로 지목되고 국민적 환멸의 분위기를 받고 있는 우리나라의 정치현실에 적용되어야 할 항목이라고 생각한다.


참고자료

박동천, 2012, “플라톤 정치철학의 해체”, 모티브북

플라톤 저/이환 편역, 2010, “국가론 : 이상국가를 찾아가는 끝없는 여정”, 돋을새김


2015.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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