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1. 통치의 근거로서 ‘정당성’
막스 베버(Max Weber)는 기념비적인 종교사회학 논문 <세계종교와 경제윤리>를 통해 신정론(theodicy)이 가진 사회적 기능에 관해 설명한다. 불평등한 복(재산)의 분배는 그 자체로서 인정을 받을 수 없었다. 의미를 추구하기 위한 뿌리뽑힐 수 없는 욕망을 가진 문화인간으로서 인간은 자신의 상황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는 살 수 없었다. 누군가는 자신이 가진 행운이 정당한 것임을 정당화해야 했고, 누군가는 자신의 비참한 삶의 이유를 해명하며 자신의 삶과 화해해야 했다. 정의롭고 전지전능한 신의 섭리 속에서 문화인간으로서 인간들은 각자 삶의 비참과 행운을 이해해야 했다. 나의 가난은 신분제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신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신정론, 즉 전능하고 정의로운 신의 통치 아래 이유 없는 악과 고통의 문제를 다루는 신학의 주제는 사회의 비참을 정당화하는 기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베버의 카리스마는 통치를 위한 정당성에 관한 문제가 되고,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발전시키는 상징자본은 베버의 카리스마와 같다. 상징자본이란 피지배자의 인정(부르디외에 의하면, 오인)을 얻게 된 정당한 권위를 의미하게 된다. 그렇기에 능력주의(meritocracy)의 문제를 이해할 때도 지배 질서의 정당화에 관한 감각이 필요하다. 능력주의는 단순히 능력을 통해 대우받는 사회가 아니라, 능력을 통한 지배 질서가 정당성을 얻는 통치의 개념이라는 것을. 능력주의라는 말을 처음 창안한 마이클 영(Michael Young)의 <능력주의(The Rise of The Meritocracy)>를 보면, 능력 있는 자, 정확히는 능력 있다고 여겨지는 자의 지배가 정당화되는 것이 서술되며, 능력이 없는 자 즉 피지배계층의 부모는 윤리적 수준에서 자식에게 능력주의의 정당성을 내면화시키기도 한다. 즉, “능력 없는 자가 지배계층이 되는 것은 비윤리적인 것”이라고.
2. 마이클 샌델의 문제의식
마이클 샌델의 신작, <공정하다는 착각(The Tyranny of Merit: What’s Become of the Common Good?)>은 능력주의에 관한 비판적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작업이다. 하지만 이것은 다분히 미국의 상황에 의한 것이다. 마이클 샌델이 능력주의의 문제를 전면화한 것은 이른바, 포퓰리즘의 부상과 그로 인한 트럼프의 당선, 브렉시트 등의 상황과 연결된다. 한국의 상황과는 다른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다. 포퓰리즘의 준동은 아마도 미국 지식인에게 큰 충격을 남겼던 것 같다. 포퓰리즘, 트럼프 당선, 브렉시트라는 “위기 상황”에 미국 리버럴이 응답한 것이 (지형을 명확히 그릴 수는 없지만)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의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Identity: The Demand for Dignity and the Politics of Resentment)>, 마크 릴라(Mark Lilla)의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The Once and Future Liberal)> 등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공정하다는 착각>은 미국 정치의 위기에 상황에 관한 공화주의/공동체주의 정치철학자의 응답이라고 볼 수 있다.
책에서 이뤄지는 일관된 문제의식은 이것이다. 즉, 포퓰리즘의 준동, 트럼프의 당선과 같은 정치적 위기 상황의 근원에는 능력주의의 전제정치(The Tyranny of Merit)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정치철학자들이 위기 상황의 원인으로 ‘정체성 정치’를 지목하는 것과 다르게 샌델은 능력주의의 문제를 전면화한다. 하지만 샌델과 그들이 동일하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감정과 존엄성”에 관한 것이다. 샌델은 능력주의에 의한 전제정치, 즉 전문인/엘리트의 독재정치가 비엘리트 시민에게 굴욕의 감정을 선사했다고 한다. 마이클 영의 문제의식과 동일하게 이들은 윤리적 층위에서도 비윤리적 모욕을 받게 된다. 이런 굴욕이 포퓰리즘으로 발현되었고, 이런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샌델은 공화주의의 해결책을 제안한다.
3. cracy‘들’과 통치에 관한 감각과 제목 ‘The Tyranny of Merit’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가 한국에 200만 부 정도 팔렸다고 한다. 샌델은 한국에서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하지만 그는 본질적으로 정치철학자이다. 그렇기에 샌델의 인식적 관심은 언제나 희소가치 분배의 문제, 통치에 관한 것이다. 책에는 여러 가지의 ‘cracy’가 나온다. aristocracy(귀족정), meritocracy(능력주의), technocracy(기술관료적 정치), 그리고 cracy라는 접미사는 없지만, tyranny(전제정치)까지 포함해야 한다. 지배를 의미하는 영어 접미사 cracy는 그리스어 kratia에서 유래되었다. 우리가 민주주의(democracy)를 이해할 때, 이는 그리스어 demos(인민)+kratia(지배)에서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인민에 의한 지배를 의미하는 통치체제이다.
그러니, 책에 나오는 수많은 ‘cracy들’에서는 통치에 관한 감각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정치철학의 전통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6가지의 정체(政體, 통치 형태)를 제시하는데, 여기에는 귀족정(aristocracy)과 전제정(tyranny)이 이미 제시되어있다. 귀족정은 단순히 귀족에 의한 통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귀족이라는 신분·혈통을 통한 정당성이 인정되는 통치체제라는 감각이 필요하다. 다시 능력주의로 돌아가면, 능력주의란 귀족정이라는 하나의 통치체제를 근대적으로 변환시킨 하나의 통치체제가 된다. 그러니까 신분·혈통을 통해 정당화되던 지배 질서가 근대의 계몽주의·합리주의의 영향을 통해 능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통치 형태로 변환되었다는 것이다.
샌델은 지금의 위기 상황의 원인을 미국 리버럴의 능력주의 통치에서 찾는다. 특별히 그가 정치 현실에서 겨냥하는 것은 오바마 행정부의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 책의 번역에 따르면 기술관료적 정치이다. 21세기 정치학대사전에 의하면, 테크노크라시란 “기술이나 과학적 지식의 소유로 사회나 조직의 사상 결정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형태를 가리킨다. 테크노크라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테크노크라트(technocrat ; 기술관료)”라고 한다. 샌델은 미국의 능력주의가 약 반세기 동안 사회의 근본원리로 작용했으며, 이른바 오바마 정부의 ‘진보 엘리트’를 통해 테크노크라시, 기술관료적 정치로 구현되었다고 본다. 미국 자유주의자의 능력에 대한 강박과 그를 통한 능력의 신성화는 비엘리트의 소외로 이어졌다. 능력을 공인받은 명문대 출신의 엘리트는 자신의 능력이 온전히 자신의 성과라는 논리로 자신을 정당화했고, 이런 논리로 사회를 옭아매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논리는 능력을 공인받지 못한 자의 삶을 부도덕한, 비윤리적인 층위로까지 끌어내렸고 이 굴욕의 감정은 위기 상황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자신의 전문성과 능력을 통해 민주적 절차를 옹호하기보다는 전문성과 능력이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정치에 배제함으로써 민주적, 공화주의적 가치를 훼손하며, 전제정치를 실행한다. 이것이야말로 마이클 샌델이 제목, “The Tyranny of Merit”를 통해 겨냥한 “능력에 의한 전제정치”, “능력주의의 독재정치”이다. 책의 제목을 “공정하다는 착각”으로 옮긴 것이 판매를 위한 전략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책을 통해 샌델이 제안하는 것은 단순히 “당신의 능력이 ‘공정하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이 정당성을 얻는 통치체제의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4. 책의 흐름
이 책은 서론과 결론을 포함해 약 9장으로 구성되어있다. 서론은 미국의 입시비리로 시작한다. 능력주의 사회에 대한 문제 제기다. 이어지는 1장은 샌델의 문제의식이 더욱 구체적을 제시된다. 이어지는 2장에서는 능력주의 도덕의 역사를 간략하게 다루는데, 성서, 막스 베버, 근대의 정치철학을 통해 능력주의의 기원을 살핀다. 이 부분은 흥미롭고, 능력주의에 익숙하지 않을 독자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이어지는 3·4장은 미국에서 통용되는 능력주의의 형태를 설명한다. 사회적 상승, 높은 지위를 성취한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성공을 능력을 통해 정당화하는지, 즉 자신의 능력에 어떻게 능력주의의 광채를 덧입히는지를 분석한다. 이런 능력주의는 학력주의(credentialism)과 연동되는데, 미국에서의 학력주의가 정치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흥미롭게 보여주는 편이다.
5장은 정치철학자로서 샌델을 생각할 때 7장과 함께 이 책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데, 샌델은 능력주의와 함께 연동되는 자유주의 정치철학을 비판한다. 샌델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자유주의는 두 갈래인데, 하나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로 대변되는 자유시장 자유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존 롤스(John Rawls)로 대변되는 복지국가 자유주의(혹은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이다. 자유주의는 일견 능력주의적 질서를 옹호할 것 같지만, 샌델은 오히려 이 두 자유주의 전통이 본질적으로는 능력주의를 부정한다고 밝힌다. 하지만 샌델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자유시장 자유주의와 복지국가 자유주의는 명시적으로 능력주의를 부정하나 현실 속에서는 이 사상의 특정 측면이 능력주의적 성공관을 사회에 되살아나게끔 한다고 분석한다. 샌델이 20세기를 지배했으며,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자유주의 정치철학을 비판하는 부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어지는 6장은 미국 대학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신분제적 질서를 대항해 만들어진 대학이 왜 불평등을 해결하는 데 실패했는지 분석한다. 이어지는 7장은 결론과 함께 마이클 샌델의 대안과 공화주의 정치철학을 중심으로 문제 상황에 관한 해답을 제안한다. 샌델은 “일의 존엄성”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른바 비엘리트 시민계층, 노동자에게 다시금 정당성을 부여해야 미국 정치가 다시 위기상황에 봉착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이는 공동선과 공동체적 가치를 강화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사실 7장에서 아쉬운 건, 샌델이 전면에 내세우는 해결책이자 7장의 제목 “recognizing work”가 단순히 “일의 존엄성”으로 번역되었다는 것이다. 이 장에서 샌델은 악셀 호네트(Axel Honneth)를 원용하며 인정(Anerkennung, recognition)이라는 개념어는 사용하는데, 번역은 그 의미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5. 한국적 맥락
가장 먼저 베버를 언급하면서 봤듯, 나는 정당성의 근거에 다분히 종교적이며 믿음에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능력주의의 한국적 맥락을 고려했을 때, 샌델의 책은 다분히 미국적 문제의식이라 그렇게 효과가 있을까 싶다. 한국에서 ‘공정성’은 대개 20~30대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들은 학력주의에 함몰되었다기보다는 시험위계주의에 긴박된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학벌주의라고 볼 수도 없는 것이 학교를 중심으로 파벌을 만들기보다는 시험을 통해 끊임없이 위계를 세분화한다. 오찬호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서 보듯, 서강대생이 서강대생끼리 파벌을 만드는 게 아니라, 서강대 경영학과와 서강대 철학과가 구별되고, 정시와 수시가 구별되고, 수시 안에서는 사회적 배려대상자 전형이 구별된다.
한편으로 이런 질서는 시험신분제로 보이기도 한다. 인천국제공항 정규직 전환 문제에서 의견을 낸 사람의 담화를 보면 알 수 있다. 구약성서 욥기에서 욥은 자신이 신의 명령을 다 지켰음에도 오는 이유 없는 고난을 문제 제기한다. 그러니까 욥은 그 고난에서 합리적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신의 명령을 지키는 것은 행복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건데 이것이 고난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인천국제공항 정규직 전환 문제에서도 동일하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되면 안 된다는 의견 속에는 시험 성적으로 증명되지 않았거나, 시험 성적이 나보다 낮은데도 나보다 좋은 지위를 성취해서는 안 된다는 모순에서 기인한 인식이 작용한다. 나는 그러한 인식 속에서 “상놈(시험체제에서 승리하지 못한 자)이 양반(시험체제에서 승리한 자)보다 잘 살아서 되는 것이냐”는 생각이 읽힌다.
나는 시험의 의미가 각별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인의 생애주기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끊이지 않는 테스트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학 입시에 사회의 관심이 집약되고, 일상이 통제되기도 하고, 교육·선발체계의 변화에 사회 전체가 동요한다. 이런 과정에서 선별되고, 시험에 통과해야만 사회적 삶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고, 삶의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매번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야 하는 의례가 바로 ‘시험’에 있다. 이런 선발체제에서의 승리는 일종의 간증 서사로 작용하고, 이를 통과한 사람에 대한 일종의 숭배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자신이 가진 자본·자원을 가장 극적으로 사용해서 자신의 생존을 집약적으로 입증해야 하는 청년 세대에게 시험은 일종의 신앙이며, 한국 사회는 테스트-토템(test-totem) 사회다. 그렇기에 나는 능력주의에 관한 강박은 한국 사회가 더 강하지 않을까 그렇게 지레짐작한다.
한국은 전근대에서부터 독특하게 과거제라는 능력주의적 선발체계를 사용한 전통이 존재하기도 한다. 한편 모든 삶이 시험으로 연결되는데 표준화된 시험에 관한 신앙 역시 능력주의를 타파하는데, 걸림돌로 작용할 거라 생각한다. 아무튼 이 책의 한국 수용에 관해선 비관적 전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샌델을 통해 능력주의 문제가 적어도 부상할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는 갖는다.
6. 책에 관한 불만
책은 전체적으로 괜찮은 편이다. 그러나 너무 대중을 염두에 두고 대중서로 책을 만들다 보니 역주를 보기 불편하거나, 이미 한국에 번역된 책을 참고문헌이 기록하지 않는 등 만듦새가 부족한 부분이 꽤 있다. 그리고 번역어 선택에도 섬세함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technocracy를 어디에서는 테크노크라시로, 어디에서는 기술관료적 정치로 사용하고, tyranny of merit 역시 어디에서는 능력의 폭정으로, 능력주의의 폭정으로 사용하는데 원어를 병기하거나 번역어를 일관되게 사용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앞서 호네트의 ‘인정’을 지적했듯 개념어를 못 살린 번역도 지적하고 싶고, 몇몇 부분에는 실수에 가까운 오기(誤記)도 있는 것 같다. 덧붙여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건, 쓸데없는 유명 인사들의 추천사며, 머리말이며 하는 것들. 책 이해에 도움도 안 되고, 이야기의 본질에 다가가지도 못하는 것 같다. 샌델이 너무나 대중에게 사랑 받는 작가이니, 이런 편집이 이해는 되지만, 독자를 너무 가볍게 본 처사는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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