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방의 주자, 퇴계 이황(1501~1570)
1. 서론
서인과 동인, 동인은 남인에서 북인으로 우리 조선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키워드 당쟁. 과연 그 당쟁의 시발은 어디였을까? 예(禮)에 관한 논쟁만으로도 정치의 기득권이 바뀔 정도로 유학과 성리학에 입각한 의리와 예절을 중시한 조선. 과연 이들의 지적전통의 기원은 어디 있었을까? 그 중 영남학파의 거두이며 천 원짜리의 인물로 친근한, 또한 동방의 주자라는 칭송을 얻었던 조선 성리학의 대학자, 퇴계 이황의 생애와 업적, 사상을 알아보려한다.
2. 본론
1) 이황의 생애
ㄱ. 이황의 출생
1501년(연산군 7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현 노송정 종택 태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사 이식이고, 어머니는 춘천 박 씨이다. 이 부부는 슬하에 8남매를 두었는데, 이황은 그 중 막내이다. 이때 이황의 어머니인 춘천 박 씨는 이황의 태몽 중에 공자가 이황의 태실로 걸어들어 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퇴계태실의 문 이름을 성인이 들어온 문이라 하여 성림문(聖臨門)이라고 이름 지었다.
ㄴ. 홀어머니 밑에서 유학 연구에 젊음을 바치다.
이황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삶을 시작했다. 그는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가 자신의 나이 40세의 나이로 이른 죽음을 맞이하였다. 홀어머니 밑에서의 가정형편은 항상 부족했다. 그러나 춘천박씨는 과부이기에 더욱 엄한 가정교육으로 이황을 가르쳤다. 이황은 6살 때 이웃에 사는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우는 것으로 학문을 시작했으며, 12살 때 병으로 휴직한 숙부에게 '논어'를 배웠다. 17세 때 글을 가르쳐주던 숙부가 별세하여 선생님이 없어 대부분을 혼자 공부하였다. 그 후 이황은 자기 힘으로 학문을 연구하게 되었고, 모든 학문에 의심을 가지고 파고들어 재해석하는 학문 방법을 개척하게 되었다. 19세 때 성리학에 심오한 이론을 독파했고 "모르는 사이에 기쁨이 솟아나고 눈이 열렸는데, 오래 두고 익숙하게 읽으니 점차 의미를 알 게 되어 마치 들어가는 길을 얻은 것 같았다. 이때부터 비로소 성리학의 체계를 친숙하게 알 게 되었다."고 하였다. 20세 때는 먹고 자는 것도 잊고 '주역'을 연구하는데 몰두하여 건강을 해치게 되고, 이로 인해 평생 동안 몸이 마르고 쇠약해지는 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21세에 허씨 부인과 결혼하고 23세에 잠시 성균관에 유학하였고, 27세에 향시, 28세에 진사 회시, 32세에 문과 별시, 33세에 경상도 향시에 합격하였고, 수 개월간 다시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ㄷ. 학자에서 현실정치의 세계로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여 43세 때까지 관직 생활을 한다. 그러나 이때에도 끊임없이 학문 연마에 정진했다고 한다. 성균관 대사성에 이른 43세의 이황은 이때부터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할 뜻을 품는다. 이 후 52세 때 까지 그는 세 차례나(43, 46, 50세) 귀향과 소환을 반복하면서 관직을 떠나 초야에서 학문연구과 제자양성의 뜻을 품는다. 이황은 권력 투쟁이 격심하였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학문과 소신을 지켰다고 한다. 역할을 맡은 홍문관의 관직에 가장 오래 재직하였다. 을묘사화에 휩쓸려 파직당하기도 하였으며 다시 복직하기도 하였다. 46세 때 고향으로 돌아와 양진암을 짓고 호를 퇴계라 하며 학문을 연구했고, 단양군수와 풍기군수로 나갔다가 1년여 남짓 벼슬을 지내고 결국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ㄹ. 교육의 뜻을 이룬 노년기
이황은 50세 이후에는 고향의 한적한 시냇가에 한서암과 계상서당 및 도산서당을 세우고, 그의 학덕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문인들을 가르치며 성리학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물러난 후에도 조정에서는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의정부 우찬성, 판중추부사 등 계속하여 높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거듭 사직 상소를 올려 받지 않았으며 마지못해 잠시 나갔다가도 곧 사퇴하여 귀향하기를 반복하였다. 이황의 중요한 저술 또한 주로 노년으로 접어드는 50대 이후에 이루어졌다. 그의 저술 가운데 천명도설, 기대승과의 8년간에 걸친 사단칠정논변, 주자서절요, 성학십도 등은 한국유학사상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60세에 도산서당을 지어 스스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인도하는데 힘썼는데 학문은 사망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2) 이황의 업적
ㄱ. 서원 건립에 힘을 써서 이를 통한 서원의 기초를 마련하고 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그리고 백운동서원을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으로 만들었다. 사액서원은 임금이 하사하는 것으로 유교교육 기관인 서원을 임금이 인정하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로써 서원 교육은 공적으로 인정받으며, 공교육을 통한 학문 발전을 시켰다.
ㄴ. 79번이나 벼슬을 사퇴하여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의연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제자들에게 관직에 연연치 말고 자신의 도를 다하는 자세를 가르쳤다. 이는 교육자로서 이황이 실천하는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 행동이다. 이로써 출세중심 과거시험 중시의 학문 풍토를 개선하고 순수학문에 대한 열정을 보여준 것이다.
ㄷ. 올바른 교육을 위하여 손수 교과서를 만들고 새로운 교육과정을 수립했다. 이는 그의 교육자적인 면모가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며, 또한 탁상공논으로 끝날 수 있는 형이상학적인 성리학의 성격을 자신의 실천적 성리학을 통해 학문태도의 모범을 보이고 바람직한 선비의 모습을 솔선수범하여 보여줬다.
ㄹ. 문학가적 기질도 뛰어나 2000편이 넘는 많은 한시를 남겼다. 그러한 한시는 대개 학문에 대한 열정이나, 자연에 대해 읊은 시들이다. 예를 들면 어리석은 사람도 알며 실천하는데,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겠는가? / (그러나)성인도 못 다 행하니, 그것이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 쉽거나 어렵거나 간에 (학문 수양의 생활 속에서) 늙어가는 줄을 모르노라. 도산십이곡 중 12수.
ㅁ. 고봉 기대승과의 4단 7정에 관한 논쟁을 통하여 학문적 논쟁의 모범을 보여주고 성리학의 심성론을 크게 발전시켰다. 당시 이황은 기대승보다 26살이나 많은 이황이 당시 경직된 조선 사회에서는 신성한 학문 논쟁이었으며, 후배인 기대승에게도 인격적으로 대우하며 모범을 보였다.
ㅂ. 향촌의 자치규정인 향약 규례를 완성시켜 향촌의 풍속을 바르게 잡았다. 이는 향촌 자치 실현을 이상으로 하는 사림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며 도덕적인 풍속으로 백성들을 이끌어 가려는 그의 노력이 엿보이는 모습이다.
ㅅ. 의를 본질로 하여, 합리성을 존중한 예법의 개혁을 함으로써 악습이나 거추장스러운 예법을 변화시켰다. 명분을 중요시하는 성리학에서, 실질적인 부분을 절충하며 허례를 배격한 그의 모습에서 개혁적인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3) 이황의 사상
ㄱ. 주자의 성리학
가. 이기(理氣)론 : 이(理)는 형이상학적인 도(道)이며 만물의 근원이며 본질이며 사물을 낳는 근원이다. 또한 기(氣)는 형이하자이며 사물 구성의 질료, 사물을 낳는 재료이다. 다시 말하면 형이하의 기(器)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주자는 우주의 시작과 인간 존재의 기원을 설명했다. 세계의 참모습인 이(理)는 세계의 현실적인 모습인 기(氣)를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고, 이(理)가 있은 다음 기(氣)가 있고 기(氣)가 있으면 이(理)가 반드시 있다.
나. 심성(心性)론 : 심성론은 인성(人性)론이라고도 하며 인간의 내면적 구조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한 결과이다. 이는 맹자의 심성론의 지적전통을 이어 받았으며 인간의 인성을 맹자가 말한 바와 같이 인간 본래의 마음의 선함과 육체적인 측면과 욕구적인 측면의 가선가악(可善可惡)인 기질적인 측면으로 나누었고 본연의 성은 이와 통하고 기질적인 성질은 기와 통한다고 했다.
ㄴ. 사단칠정 논쟁 *사단: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단서, 칠정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
이황이 서울에 살던 53세 무렵, 옆집에 정지운이 살았다. 정지운은 동생을 가르치기 위해 ‘천명도’를 그렸고 이를 이황에게 의뢰하였다. 이황은 ‘사단은 이에서 생겨나고 칠정은 기에서 생겨난다.’라고 하였다. 이는 이가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후에 많은 논란을 일으켰고, 이를 작성하고 난 6년 뒤 이황은 기대승으로부터 한 편지를 받고 이에 대한 논쟁은 8년간 계속된다. 8년간 주고받은 서신은 적지만 당시 기대승은 호남, 이황은 영남에 살았던 지리적 위치를 생각해본다면 결코 쉬운 학문적 논쟁이 아니었다. 기대승은 세 가지에서 이황에게 반대를 제시했다. 첫째 현실에선 이와 기가 함께 있기 때문에 사단과 칠정도 둘로 나눌 수 없다. 둘째 사단도 감정이고 칠정도 감정이다. 사단은 칠정 중 선한부분에 불과하다. 셋째 기는 변화의 근거이지만 이는 불변이기에 이가 움직인다고 할 수 없다. 이에 이황은 한발 물러서며 기대승의 이와 기의 떨어질 수 없는 것을 인정하며 사단은 이가 움직여 기가 따른 것이라고 했고 칠정은 기가 움직이면 그 위에 이가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와 기가 떨어질 수 없다고 하여 사단과 칠정을 섞어 말한다면 사단은 항상 선으로 귀결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이의 측정을 부각 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ㄷ. 이황과 이이의 비교
이황은 이는 귀하고 기는 천한 것이라고 주장 했다. 그리고 이와 기가 섞일 수 없다는 불상잡의 측면을 강조하였다. 또한 사단과 칠정을 명확히 구분하였다. 이기이원론과 이기호발설을 주장했다. 이이는 이와 기가 현실에서 어우러짐을 강조라면 이와 기가 떨어질 수 없다고 하는 불상리적 측면은 강조했다. 또한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황의 이기호발설중 기가 발하며 그 위에 나타난다는 측면만 인정한다. 이기론을 현실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ㄹ. 평등사상
이황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가르침을 부탁하였는데, 선생은 항상 벗을 대하듯 하여 비록 나이가 젊다하더라도 보내고 맞을 때에는 공경함을 다하고, 자리에 마주 앉은 첫인사로 반드시 부형의 안부를 물었다. 제자가 질문을 하면 하잘 것 없는 말이라도 잠시 생각하는 여유를 두어 대답을 하고,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대답하는 일이 없었다. 또한 사농공상의 직업의 차별과 반상제의 조선의 계급 질서에서도 완전한 평등은 아니지만 각각의 신분에도 예를 정중히 갖출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또한 유교적 분위기가 만연한 학문적 질서 속에서도 학문적으로나 나이로 26살이나 어린 기대승과의 사칠논쟁은 학문적 논변의 모범이 된다.
ㅁ. 수양론
이황의 학문은 이론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완성을 추구하는 수양론으로 열려 있기 때문에, 인간의 심성을 현실 속에서 이해한다는데 특징이 있다. 이황의 수양론은 심(心)과 경(敬)의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심은 수양이 이루어지는 바탕이고, 경은 수양을 실천하는 방법이다. 이황의 학문적 관심은 항상 인간의 도덕적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수양론으로 귀결되고 있으므로 실천적 성격의 '경'이야말로 퇴계 사상의 핵심이다. 또한 이황은 경의 태도를 한 평생 몸소 실천한 인격자이다. 이를 통해 선지후행(先知後行)의 성리학적 수양론에서 자칫하면 간과할 수 있는 행을 강조하면서 성리학의 실천적 성격을 강조했다.
ㅂ. 교육론
이황은 오늘날 서울대총장이라고 할 수 있는 성균관 대사성 시절, 성균관 유생들에게 "선비란 예의의 원천이며 원기의 본거이다. 지금부터 제군들은 모든 일상생활이 예의 가운데서 행하도록 하라. 서로 채찍질하여 구습을 벗도록 힘쓰고, 집에서 부형 모시는 마음을 미루어 밖에서 어른과 윗사람을 섬기는 예를 삼을 것이다. 안으로 충신(忠信)에 주력하고 밖으로 손제(遜悌)를 행함으로써 국가가 문예를 장려하고 학교를 세워 선비를 기르는 뜻에 부응하라." 학문하는 방법을 물었을 때 "다만 부지런하고 수고스럽게 하며 독실하게 하는데 있으니, 이렇게 하여 중단됨이 없으면 입지가 날로 강해지고 학업이 날로 넓어질 것이다."라고 타일러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독서하는 방법을 물었을 때 "그저 익숙하게 읽는 것 뿐이다. 글을 읽는 사람이 비록 글의 뜻은 알았으나 만약 익숙하지 못하면 읽자마자 곧 잊어버리게 되어 마음에 간직할 수 없을 것은 틀림없다. 이미 읽고 난 뒤에 또 거기에 자세하고 익숙해질 공부를 더한 뒤라야 비로소 마음에 간직할 수 있으며 또 흐뭇한 맛도 있을 것이다."라 하여 겉만 핥고 지나치는 것을 경계하며, 익숙하게 하여 깊이 체득하는 공부를 강조하였다.
ㅅ. 지행병진론
앞서 말한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의 경우는 도덕에 대한 앎인 지(知)와 그에 따른 실천인 행(行)에 대하여 선지후행과 지행교진론(知行交進論)을 주장하였다. 즉 지행교진론이란 지를 깨달은 후에 행을 한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자면 사람이 걷는 데에 있어서 한쪽 발을 걸은 후 다른 쪽 발이 따라가는 것이다. 즉 지의 발걸음을 한 후 행을 발걸음이 교대(交代)로 따라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달리 이황은 지행병진론(知行竝進論)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앎인 지와 실천인 행이 교대로 선지후행이 아닌 함께 아울러 나가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쉽게 예를 들자면 주희의 지행교진론이 사람의 걸음이라면 이황의 지행병진론은 두 발로 나란히 서서 전진하는 캥거루의 점프와 같은 것이다. 이처럼 이황은 기존의 유학의 앎 중심의 탁상공론적인 현실을 개혁하며 도덕적 삶의 실천을 중시한 학자이다.
4) 이황의 영향
ㄱ. 성리학을 독자적으로 해석하고 발전시켜 한국의 독창적 성리학으로 만들었다. 또한 이러한 이황의 학문은 퇴계학파, 영남학파를 형성했으며 이를 통해 이황의 사상이 이어진다. 이는 송대 주자의 성리학보다 뛰어난 사상이었으며, 조선 성리학 성립에 큰 기여를 한 것이다.
ㄴ. 임진왜란 후, 이황의 사상이 일본에 전파되어 일본 성리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일본 메이지 유신 때의 교육이념을 세우는 기초가 되었다. 일본 성리학에서 이황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은 크다. 이는 조선이 문화 선진국임을 보여주는 방증이 되기도 한다.
ㄷ. 실학에 영향을 주었다.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은 그 예이다. 특히 성호 이익은 이황을 이자(李子)라고 칭송하며 이황을 주자나 공자 정도로 격상시켰다. 자칫하면 실리만을 추구하여 도덕적 가치를 등한시 하게 될 수 있는 실학의 정신적 규범이 되었다.
ㄹ. 퇴계학파는 후에 위정척사파의 사상의 본이 되었다. 물론 위정척사 운동은 반외세의 배타적인 정신운동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신은 결국 독립운동 정신에 큰 영향을 끼친다. 우리나라 의병활동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감당하기도 한다. 또한 전통을 계승하고 숭상하는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ㅁ. 그의 성리학적 위치는 높다. 그는 학문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연구는 우리나라뿐만 아닌 일본, 중국, 대만, 미국 등에서도 연구되고 있다.
5) 이황에 대한 평가
“동방에서 학문을 했다는 사람 중에 고금을 통틀어 이황에 비할 사람이 없다. 그의 글은 주자와 견주어도 차이가 없고 그의 학문과 이론은 모르는 것이 없다.” - 고봉 기대승
“세상 사람들은 그를 ‘퇴계 선생’이라고 칭송한다. 일세의 유학자며 조광조 이후에 견줄 이가 없다. 이황의 재주가 조광조에 못 미친다고 하나, 의와 이에 대한 깊은 연구와 학문은 조광조도 미치지 못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일일이 실행을 통해서 많은 인재를 길렀으며 누구든 어떤 부문이든 가르쳐 모두 대도에 이르게 하였다. 중도에 폐하는 사람이 없이 끝까지 가르쳤으며 학문을 닦아 선생의 뒤를 잇게 했다. 퇴계선생의 가르침을 읽으면 손뼉치고 춤추고 싶으며 감격해서 눈물이 나온다. 도가 천지간에 가득 차 있으니 선생의 덕은 높고 크기만 하다." - 다산 정약용
“이기변(理氣辨)에 대한 것은 이러합니다. 이황과 기대승(奇大升)의 사칠논변(四七論辨)에 대해서 이이와 성혼이 함께 주자(朱子)의 말을 가지고 강명(講明)한 바가 있었는데, 성혼은 이황의 견해를 옳다고 하고 이이는 이황의 견해를 정견(正見) 중의 한 점 누(累)라고 여겨 기대승의 편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이는 성혼에게 답서를 보내면서 ‘명언(明彦)【기대승의 자(字).】의 학문을 어찌 감히 퇴계와 견주겠는가. 단지 약간의 재지(才知)가 있어 우연히 그것을 알게 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 조선왕조실록
“우리나라의 학문으로 말할 것 같으면 퇴계이자(退溪李子)만한 분이 없고 난 학문의 방법에 있어 항상 그 분의 방법을 따른다.” - 성호 이익
3. 결론
이황 그는 실천적 성격이 결여되고 대의명분만을 따지던 조선 유학계의 실천적 성격을 가진 실천가이자 개혁가이었으며, 어지러운 정치적 상황 속에서 입신양명하며 정치를 바로잡는 것보다 후진을 양성하여 후세에 인간의 도리와 참다운 의의 기준을 밝혀 후세를 올바른 삶으로 교화 시키려 했던 교육자였다. 또한 혼란한 사회 속 도덕적 원리인 이를 강조하여 도덕의 존엄성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세상을 바로 잡기위해 노력한 사상가다. 또한 학문으로는 주자와 견줄만한 대학자였다. 물신주의가 만연하고 본말이 전도되고 있는 현대사회에 도덕정신과 진정한 학문과 교육을 실천하는 이황의 정신은 계승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권오봉, 퇴계선생 일대기, 교육과시학사, 1997
다카하시 도오루, 조선의 유학, 소나무, 1999
기세춘, 성리학개론, 바이북스, 2007
김유혁, 우리에게 이퇴계는 누구인가, 항산문고, 2001
권오봉, 퇴계의 실천유학, 학사원, 1997
윤사순 역주, 퇴계선집, 현암사, 1997
2010.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