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1925년 11월 19일 - 2017년 1월 9일)
소외와 빈곤, 그리고 청년노동
Ⅰ. 서론
근대와 시작된 사회학의 주된 관심 중 하나는 ‘자본주의’라는 주제였다. 대표적으로 사회학을 정초했다고 평가받는 칼 맑스(Karl Marx), 에밀 뒤르켐(Èmile Durkheim), 그리고 막스 베버(Max Weber)의 관심 또한 자본주의와 그로 인한 사회변동에 있었고 그들은 이를 통해 자신들의 업적을 이어나갔다. 구체적으로 칼 맑스의 경우, 그는 자신의 저작 『자본(Das Kapital)』을 통해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설명한다. 그 저작들에서 맑스는 자본가의 이윤은 어디서 오는지, 자본의 유통과정과 자본의 형태변화, 자본주의의 생산과정을 밝힌다(김수행, 2015: 11-13). 이어서 뒤르켐의 경우에도 자본주의를 연구했는데 그의 관심은 보통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분석이라기보다는 근대로 이행된, 자본주의로 이행된 사회의 분업과 병리적 사회현상을 진단하는 일이었다(앤서니 기든스, 2008: 411). 베버는 “우리 근대인의 삶의 운명을 가장 강력하게 결정하는 힘인 자본주의”(막스 베버, 2013: 15)라고 평가하며 자본주의가 근대인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해 평가했다.
이렇듯 ‘자본주의’는 줄 곧 사회학의 중심적인 주제 중 하나였다. 사회학은 자본주의를 탐구하기도 했으며 동시에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삶에 대해 연구하고 서술해나갔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사회적 삶’들은 ‘장밋빛 인생’으로 그리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근대 자본주의로 이행하면서 스스로 합리적인 노동의 형태를 조직한 프로테스탄티즘에게 영웅의 모습을 읽고 있는 막스 베버도 자본주의는 이제 인간의 영향력을 떠나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힘으로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다”(막스 베버, 2013: 365)고 평가하고 있다. 뒤르켐 또한 기계적 연대에서 유기적 연대로 변화된 사회를 이끌 새로운 도덕에 관심을 가졌지만 그의 ‘아노미(anomie)’ 이론을 근대사회의 병리적 현상에 초점을 둔 분석이었다. 이중에도 자본주의의 사회적 모순에 대해 가장 날카롭게 분석한 것은 아마도 맑스일 것이다. 맑스는 소외(Entfremdung) 개념을 통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의 삶의 형태를 보았다. 그리고 이 소외의 개념은 근대사회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데 여전히 유용한 도구이다(앤서니 기든스, 2008: 411).
고전 사회학자들의 분석뿐 아니라 20세기 중반 이후의 사회는 다시금 다양하게 사회학을 통해 포착되기 시작한다. 현대사회학자들 또한 그들의 저작에서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삶의 형태와 그 모순에 대해 연구하고 서술했다. 그 중에 후기 근대(late modern)에서의 새로운 빈곤(new poor)의 양태를 그려낸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의 논의는 지금의 한국사회의 형태와 사회적 삶을 분석하는 데도 여전히 유용한 도구이다.
본 보고서는 칼 맑스의 소외론과 지그문트 바우만의 빈곤에 대한 논의를 토대로 이 논의들을 한국 청년세대에 적용시켜 분석해보고자 한다. 또 이를 통하여 현재 한국의 청년세대들의 소외와 빈곤에 대해 탐구해보고 이에 대한 의의와 결론을 내려보고자 한다.
Ⅱ. 본론
1. 이론적 검토
1) 소외와 빈곤
칼 맑스는 노동에서의 소외가 네 측면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인간은 그가 생산한 생산물에서, 생산의 과정에서, 스스로에게서, 그리고 인류로부터 소외된다.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산출된 대상에서 소외되고, 또 생산의 과정과 생산행위로부터 소외되고, 그 자신에게서도 소외되고, 다른 인간에게서도 소외되게 된다(루이스 코저, 2016: 93-94).
소외에 대한 더 중요한 초점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통제력이 상실된다는 측면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야 한다. 그러나 노동자는 소외로 인해서 “자기 노동생산물을 통제할 수도, 자신의 노동 자체를 통제할 수도 없게 된다”(알렉스 캘리니코스, 2002: 99)는 점이 중요하다. 노동에서 소외를 경험한 인간은 다른 사회적 영역에서도 주체성과 창조성을 부여받지 못할 경향성이 크다. 맑스주의를 비판적으로 계승했다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마르쿠제에 따르면 개인이 합리적인 작업, 노동에 참여할수록 헛된 합리성에 굴복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순응의 역학’이 노동과 작업장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질서에도 확장된다고 보았다. 구체적으로 사무실, 학교, 상점 등의 다양한 생활세계에서도 소외는 이어진다(한국철학사상연구회, 1995: 195).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소외란 단순히 노동자의 작업장의 삶에서만 이루어지는 사건이 아니다. 소외란 사회적 삶에서의 소외이며, 주체성의 박탈이라고 볼 수 있다. 맑스의 인간론으로 보았을 때 인간은 호모 파베르(Homo Faber), 즉 도구의 인간, 작업인이다. 맑스는 역사가 인간의 자기실현 과정이라고 보았다. 역사는 인간의 노동과 생산을 통한 자기창출 과정이다(에리히 프롬, 1983: 40). 이런 까닭에 소외가 증대할수록 인간은 세계창조적 또는 세계형성적 주체에서 박탈된다. 그들은 운명을 스스로 만들 수도 없으며 하루하루 운명을 잠식당해가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요컨대, 소외와 빈곤은 단순히 경제적인 영역에 국한되어서 적용될 수 있는 개념뿐 아니라 사회·문화를 포괄하는 영역에서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2) 후기 근대사회와 새로운 빈곤
이러한 소외·빈곤 논의를 20세기 중반 이후의 현대사회(comtemporary society)에서 새롭게 이어나간 이론가로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사회의 병폐들을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천착해온 사회학자이다. 그의 이론은 후기 근대(late modern)이라는 시대적 진단의 지평 위에서 전개되었다. 먼저 후기 근대라는 시간설정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고전 사회학자들이, 앞서 언급한 맑스, 뒤르켐, 베버 등, 보았던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사회와 20세기 중반 이후의 사회는 변화가 있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근대와의 급격한 단절을 선언했다. 또 하버마스로 대변되는 측면에서는 근대를 미완의 기획으로 판단했다. 이 둘 사이에서 양자를 비판적으로 지양하면서 발생한 이론이 후기 근대론이다. 김홍중(2015: 154-157)에 의하면 후기 근대론은 20세기 중반 이후의 세계가 20세기 초반, 19세기 후반의 세계와 상이한 구성을 하고 있음에 동의한다. 이들은 복지국가의 와해, 금융 자본주의의 등장, 정치적 참여의 쇠락, 이데올로기의 사회동원력 약화,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의 새로운 사회문제에 주목한다. 이들의 주된 입장은 이렇다. 첫 째, 후기 근대는 초기 근대성이 단절된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아니라, 초기 근대가 성숙하고 발전된 재귀적(再歸的) 형태이다. 둘 째, 후기 근대는 초기 근대에 자명하게 여기던 것들이 붕괴와 파산된 상황이다. 셋 째, 20세기 후반의 사회상황을 긍정적으로 인식했던 포스트모던 사회이론과 달리 후기 근대론은 현대사회는 해결해야하는 문제들의 집합으로 파악한다. 정리하자면 후기 근대론적 사회이론은 초기 근대와 달라진 20세기 중반 이후의 세계의 변화를 관찰한다는 측면에서 포스트모던 사회이론과 공유하는 지점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은 극단적 단절이 아니라 근대의 연속성 위에서 현대세계를 파악하고 있다. 그렇지만 하버마스처럼 근대성과 이성을 문제해결의 실마리로 보지 않는다.
바우만의 논의 또한 이런 연결성 상에서 파악해야 한다. 바우만은 복지국가의 와해와 이데올로기의 동원력 약화, 정치참여의 쇠락, 노동시장의 유연화,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라는 특징을 가진 20세기 후반의 사회를 관찰했다. 바우만은 새로운 근대성을 ‘액체근대(liquid modern)’라고 명명한다. 액체 근대는 포스트모던 사회이론처럼 해체적이다. 우선 견고한 사회적 형식들이 소멸했다. 그리고 국민국가(national state)의 기능과 권력이 약화되고 국가기관의 기능들이 외주화된다. 덧붙여 공동체는 액화되어 해체되어 네트워크화 된다. 또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삶이 프로젝트나 에피소드로 분할된다. 끝으로 개인이 이 모든 불확실의 책임을 갖게 된다(김홍중, 2015: 166).
지그문트 바우만(2012)이 펼친 다양한 논의를 보면 어느 정도 중첩되는 부분들이 존재한다. 먼저는 ‘노동윤리의 변화와 생산자 사회에서 소비자 사회로의 이행’이다. 다음으로는 ‘복지국가의 몰락과 사회의 배제’이다. 마지막으로는 ‘새로운 빈곤층의 출현과 이들의 의미변화’이다. 물론 이것들을 작위적으로 구분했지만 이 논의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우만의 논의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자 한다. 첫 번째로 바우만은 노동윤리의 변화와 생산자 사회에서 소비자 사회로의 이행을 이야기한다. 막스 베버의 경우 근대 자본주의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안분지족하는 전통주의적 생활양식이 파괴되고 합리적으로 자신의 노동을 조직화하고 금욕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형태의 노동윤리가 필요하다고 보았다(막스 베버, 2013). 바우만 또한 노동윤리가 근대 초기에 빈곤층을 공장으로 유인하는 원인으로 작용했음을 주장한다. 바우만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근대 초기의 ‘노동윤리’가 ‘소비미학’으로 대체되었음을 주장한다. 사회는 더 이상 생산자를 필요로 하지 않고, 소비자를 만들어 낸다. 소비하는 것이 최선의 것이며 부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 되어버린다(지그문트 바우만, 2012). 소비자를 만드는 사회에서 모든 매체들은 “행복에 이르는 길을 쇼핑”, 소비가 행복임을 주입시킨다(지그문트 바우만, 2014: 71).
두 번째로 바우만은 복지국가의 몰락과 사회의 배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앞서 언급한 소비미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빈곤층은 더 이상 체계에 포용되지 못한다. 초기 근대의 산업사회에서는 그들을 산업예비군으로 명명하며 체계 안으로 끌여들였지만 소비미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들은 쓸모 있는 역할이 주어지지 않는다(지그문트 바우만, 2012: 9). 복지국가는 해체되고 쇠락하고 있다. 결국 국가의 의미는 ‘개인 안전 국가(personal safety state)’정도로 전락한다. 국가는 더 이상 사회적 국가(social state)가 아니며 사회적 삶의 공포로부터 국민을 지켜주지 않는다. 단순히 범죄자로부터 개인의 삶을 지켜낼 뿐이다(지그문트 바우만, 2010a: 29). 고체근대(solid modern)에서 액체근대로의 이행은 이를 더 가속화시킨다. 고체근대는 무거운 자본주의였으며 이들은 상호의존성으로 결합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육중한 공장 안에 자본과 노동을 묶어뒀다. 노동자가 어떤 상태에 있든 그들을 결속시켜 두었다(지그문트 바우만, 2010b: 233). 하지만 복지국가는 해체되었고 이들의 빈곤한 삶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게 되었다. 이들은 이제 체제 밖으로 밀려나 유동하는 공포 속에 부유하는 존재이다.
세 번째로 바우만은 새로운 빈곤층의 출현과 이들의 의미변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앞서 언급했듯 초기 근대의 자본주의는 노동자를 체제 안으로 결속시켰다. 하지만 다양한 사회적 변화로 인해 새로운 빈곤으로서 최하층계급이 발생했다. 이들이 최초로 대중의 관심 속에 드러난 것은 1977년 타임지의 커버스토리를 통해서인데 미디어는 이들을 단지 ‘가난한 사람’, ‘경제적으로 궁핍한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이들은 정상의 범주에 있지 않으며, 이질적이고 통제할 수 없는 ‘배제되어 마땅한’ 존재로 규정된다(지그문트 바우만, 2012: 135). 소비사회에 소비력이 없는 가난한 이들은 배제되어 ‘쓰레기’가 되었다. 실업은 노동윤리를 통해 의미론적으로 비정상적인 삶을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이 잉여로 규정된 것은 그들이 버려져도 무방한 존재임을 나타냈다. 그들은 ‘잉여’, ‘쓰레기’, ‘불합격품’, ‘폐기물’, ‘찌꺼기’와 같은 의미론적 공간을 공유하는 존재이다(지그문트 바우만, 2008: 29-32). 결속들은 해체되기 시작했고 탈규제와 개인화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체제가 끌어안아야 할 존재가 아니다. 계급 바깥에 버려졌고 회생이 불가능하다. 더 이상 재사회화를 통해 정상적인 사회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추방되어야 할 없어져야 할 존재이다. 이들에 대한 배제는 의미론적인 배제 뿐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이루어졌다. 생계수단이 없는 이들은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로 강제로 추방되어 분리구역으로 몰려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제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분리되었다(지그문트 바우만, 2010a: 111-120).
2. 청년세대와 소외와 빈곤
1) 프레카리아트(precariat) 그리고 권위주의와 소외
프레카리아트라는 단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 단어는 ‘불안정한’이라는 의미의 프레카리오(Precario)와 ‘무산계급’을 의미하는 프롤레타리아토(Proletariato)를 결합해 만들어진 조어이다. 이 말은 2003년 이탈리아 거리의 낙서로 시작되어 이제 불안정한 노동을 의미하는 단어로 자리매김했다(아마미야 가린, 2011: 23). 이 프레카리아트라는 단어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분석했던 20세기 중·후반의 세계의 특성과 친화성을 갖고있다. 바우만은 “이제 상황은 변했고, 다방면의 변화에서 핵심적 요소는 ‘장기적’ 마음가짐을 대체하게 된 새로운 ‘단기적’ 마음가짐이다. … 중략 … 최근의 계산에 따르면 보통 정도의 교육을 받은 젊은 미국인은 그의 노동인생에서 최소 열한 번쯤 직업을 바꾼다고 한다. 그 변화와 속도와 빈도는 현 세대의 노동인생이 끝나기 전에 더욱 증가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 오늘날의 슬로건인 ‘유연성’을 노동시장에 적용하면 이는 ‘우리가 알던 일’에 종말이 오고 있다는 것, 대신 계약서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단기계약과 ‘다음번 통고까지’라는 불안정한 지위가 도래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우리의 일하는 삶은 불확실성으로 가득하다.”(지그문트 바우만, 2010b: 237)라고 말했다. 이것이 이 시대 특별히 청년들 노동의 특성이다.
청년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청년세대를 규정하는 다양한 담론지형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는 우석훈·박권일(2007)의 ‘88만원 세대’와 ‘삼포세대’(경향신문, 2011.5.11)가 있다. 이는 모두 2000년대 중반 이후 청년들의 경제적 삶을 특징으로 나타낸 신조어들이다. 삼포세대는 원래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세대라는 의미의 조어였지만 지금 와서 청년들은 너무나 포기할 것이 많아 ‘N포세대’로 불리기도 한다. 이전 한국의 청년세대의 표상이었던 386세대의 주체적이고 참여적인 이미지는 더 이상 청년의 표상이 아니다. 청년들은 스스로를 규정하지 못하며, 단순히 ‘N포 세대’라고 불릴 뿐이다. 청년세대를 규정하는 언어담론의 지형에서부터 청년들은 스스로를 스스로의 성격으로 규정할 수 없다.
비정규직이 다수를 차지하는 청년노동시장에서 갑은 커녕 을도, 병도 아닌 ‘정(丁)’이다. 이들에게 회사에 남아 노동하는 것은 생존의 문제이다. 한 청년의 자기기술을 보면 스스로를 “갑을병정의 정정정정”이라고 평가한다. 그 청년은 자신의 회사에서의 노동에 대해 기술하면서 자신이 갑을병정 중, 정의 위치, 즉 최하위층에 있었는데 어떻게 하다보니 맡게 된 조금 더 높은 지위에 일을 수행하자 같은 정들에게 받은 따돌림을 이야기하면서 정의 세계에도 서열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한다. 또 한국의 자본주의는 유교 자본주의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데 이런 유교적 가부장적 질서는 회사의 사무적 관계에 수직적 서열화를 가속화시키고, 더불어 성(gender)에 의한 가부장적 차별을 심화하는데 이 청년의 자기기술에는 그러한 상황들도 적혀있다. 이 청년은 “업무 처리에 뛰어나고 성실한 사람도, 하루 열여섯 시간씩 일하고도 야근 수당을 받지 않는 사람도 얼마든지 해고 대상자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김송희, 2017: 64-78). 이것을 보면 청년노동은 경제적으로도 최하층이며 동시에 작업장 내에서의 지위도, 사무직, 생산직, 서비스직을 포함해, 낮고 그 안에서 유교적 권위주의와 서열문제로 가장 밑단의 ‘정(丁)중의 정’의 역할을 수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청년세대는 스스로를 규정할 힘도 또 작업장 내에서 스스로의 존재에 참여하기도 어려운 존재의 특성을 지닌다.
2) 노동윤리의 이중성 - 극단화와 이탈
다음으로 볼 청년세대의 특성의 노동윤리의 이중성이다. 청년세대는 노동윤리를 극단적으로 내재화하거나 아니면 노동윤리에서 이탈하는 특성을 보인다. 먼저 바우만의 논의에 따르면 노동윤리는 일하는 삶이 경제적으로 우월하다는 것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함을 내세웠다(지그문트 바우만, 2012: 27). 따라서 청년세대는 한 편으로는 극단적으로 노동에 집착하여 노동하기 위해, 즉 사회의 정상적인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의 행위 능력을 극한으로 이끌어 스스로의 삶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주체로 탄생했다.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의 공간을 채우는 많은 일명 ‘합격 수기’의 이념형(Idealtypus)은 “공부에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을 절제하고”, “명문대 또는 대기업에 들어가고”, “노력하고”, “극적인 성과 성장을 이루는” 모습들을 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들을 가진 합격수기들은 넘쳐나고 사람들은 이를 칭송하는데 여념없다. 특별히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합격에 ‘노력’이라는 가치가 첨가되는 것인데, 이를 통해 불합격한 삶들은 노력하지 않은, 사회적으로 선망의 대상이 될 가치가 없는 삶으로 전락해버린다. 많은 청년세대들은 이런 인식을 공유하고 있으며 이런 삶은 자기계발서의 논리와 유사성을 갖는다. 오찬호(2014: 33-34)는 자기계발 담론은 내면화한 청년세대가 이를 통해 성공한 자기계발서 주인공의 한 사례를 모든 사람이 누구나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일반화시키는 현실을 지적하기도 했다. 자기계발담론은 소수의 극적인 성공 드라마를 통해서 다수가 가진 현실적 조건과 비참함을 정당화시키는 폭력성을 내재한다.
한편으로 청년들은 노동윤리에서 이탈되기도 한다. 이들은 “돈 많은 백수”를 꿈꾼다. 하지만 이것은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노동을 해야 한다는 전제를 공유한다. 그렇지만 굳이 노동하는 삶이 더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청년세대들은 “일은 왜 열심히 해야 하나요”라고 반문하기 시작했다(김송희, 2017: 84). 노동은 소명(Beruf)라고 보다 ‘먹고사니즘’이다. 먹고 살기위해, 또는 소비하고 즐기기 위한 화폐를 모으는 것이 곧 노동이다. 이렇게 내재적으로 공유되는 노동윤리에서의 이탈을 포착할 수 있는 것은 ‘헬요일’ 같은 단어이다. 헬요일은 월요일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말 그대로 월요일은 휴식이 끝나는 지옥(hell)같은 날이라는 뜻이다. 또 ‘월요병’이라는 단어도 이를 지지해줄 수 있다.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월요일에짖는개’라는 닉네임을 가진 유저가 2015년부터 약 2년 동안 일요일 저녁이면 월요일을 알리며 “월월월”짖는 내용의 게시물을 올렸다. 이 게시물은 헬요일, 월요병 등으로 인식되는 월요일을 알리는 내용으로 거부를 해도 오는 월요일을 재치 있게 표현한 형태로 유저들에게 인기를 얻기도 했다.
3) 생존과 일하는 삶, 그리고 잉여
앞서 말한 대로 청년들의 노동윤리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노동윤리에서 이탈하는 현상이 발생해도 소비미학 때문에 청년들은 노동해야 한다는 전제는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생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김홍중(2016: 289)은 한국 근대의 사회적 상상을 자유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화주의, 합리주의가 아닌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에 근접해 있다고 평가한다. 한국 근대의 사회적 상상은 ‘생존주의’와 연결된다. 김홍중(2009)은 이미 현대의 주체들을 ‘육화된 신자유주의의 주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신자유주의는 단순한 제도라기보다 특정한 주체를 생산해내는 일종의 사회적 에토스(ethos)로 작용한다. ‘육화된 신자유주의의 주체’는 생존자로 명명가능하며, 이들의 도덕은 생존주의이다. 이 주체들은 사회·경제·생물학적 생존을 위해 도구적 성찰성을 극대화시키는 존재이다. 이러한 이론적 배경에서 21세기 한국의 청년세대는 “생존에 대한 불안이라는 기조감정과 서바이벌을 향한 과열된 욕망, 그리고 경쟁에서의 승리를 위한 자기 존재의 가능성들을 전략적으로 계발하려는 집요한 계산으로 특징지어지는 독특한, 마음의 역동”을 보여주며, 생존주의를 통해 행위와 실천을 이끌어내는데, 생존주의는 “개인의 인생에서 다양한 퍼포먼스를 통해 자신의 수월성을 증명함으로써, 패배와 그 결과 주어지는 사회적 배제로부터 스스로를 구제하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믿는 21세기 청년들의 세대심”이라고 정의한다(김홍중, 2016: 263). 그들은 스스로 스놉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공격적 생존’과 ‘세속적 성공’을 이루기 위한 적합한 주체의 형태이기 때문이다(김홍중, 2013: 81).
청년세대는 실패하지 않는 삶을 살기위해 노력한다. 정부의 영역과 대중매체는 청년실업 문제에 대해 대대적으로 ‘문제 상황’을 규정하고 있다. 청년들은 당연히 ‘일해야 하는 그래야만 하는’ 존재이다. 이런 사회구조적 압력은 개인의 생활세계(Lebenswelt)에 침투한다. 개인들은 이 문제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의심하지 못한다. 취업하지 못하는 삶은 상상할 수 없는, 상상해서는 안 되는 삶이며 실패한 삶인 것이다. 이것은 취업에 실패한 청년에게는 비정상의 스티그마로 작용한다. 이 실패는 사실 부유한 삶에서의 이탈이나, 정말 괜찮은 삶을 영위하기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생물학적 몸의 생존이 달리 문제이기도 하다. 헬조선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비정규직 일자리라도 구하지 못하는 삶은 사회적 삶에서의 배제와 박탈을 의미한다. 먼저 대기업에 정규직으로 입사한 청년들은 이 위계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고급 공무원과 공기업 공사에 취직한 청년들은 다음 위계이다. 그 밑으로 비정규직 일자리, 사회적 지위와 선망의 대상이 되지 않는 누군가 욕망하지 않는 노동자가 되는 것은 실패이고 생존의 문제가 달린 일이 된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논의처럼 청년들은 스스로의 삶을 ‘잉여’라고 명명하기 시작했다. 『월간 잉여』라는 잡지를 창간한 최서윤(2017: 166-168)은 스스로를 “대한의 ‘잉여’”라고 명명한다. 본인은 산업 역군으로도 쓰일 수 없는 존재이다. 스스로를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평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제가 쇠락하면서, 잉여인력이 급증했고 청년세대는 체념과 자학이 몸에 뱄다. 그런 세대를 위해 잉여에 의한, 잉여를 위한 잡지는 창간했다고 이야기한다. 이외에도 한윤형의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최태섭의『잉여사회』, 가스카 다케히코의『별 볼 일 없는 인생 입문』김상민 등의『속물과 잉여』등의 책은 청년세대와 잉여를 연결시키고 있는 책들이며 이것들이 바로 한국사회의 자기기술의 결과이다. 열악한 노동의 형태나, 신자유주의적 삶에서 이탈한 형태를 잉여라 명명한다.
Ⅲ. 결론 및 한계
이영자(2015)는 프랑스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와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논의를 가지고 현대 자본주의를 분석한다. 그에게 있어 현대 자본주의는 신화이며 독사(doxa)이다. 먼저 신화는 바르트의 개념인데, 이는 자연의 외피, 즉 거짓자연의 옷을 입고 자연으로 위장하여 자연의 본성을 보증한다. 자본주의로부터 파생된 이데올로기와 문화들을 자연스러운 또 초역사적인 것으로 당연시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부르디외에 있어서 독사는 그 인위적 질서를 숙명적인 체계, 사회적 본질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부르디외에게 사회구조는 아비튀스(Habitus)를 통해 생활세계에 침투한다. 독사 또한 자본주의적 질서, 인류 역사에 몇 백년도 되지 않은 역사를 초역사적이고 자연스러운, 생득적인 질서로 오인하게 만든다. 자본주의적 질서와 체계, 문화, 그것이 생성하는 에토스는 생활세계에서 의심할 필요 없이 당연하게 육화된다. 지그문트 바우만 또한 파편화된 개인들의 경쟁이 사회적 선, 공익을 증진시킨다는 프로파간다를 비판하고, ‘사회적 불평등’이 자연스러움이 된 현실을 비판한다(지그문트 바우만, 2014: 11, 87). 지그문트 바우만이 새로운 빈곤에서 지적하듯 자본주의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언어를 잠식하며 스스로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인간은 왜 일을 해야 할까?”, “일하지 않는 삶은 부도덕한 삶일까?”, “현재 한국사회의 질서는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인가?” 이러한 다양한 질문들이 시작되며 성찰이 시작되는 것이 한국 청년세대의 소외와 빈곤 문제에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소외와 빈곤이 너무나 당연한 생활세계를 살고 있는 한국인의 노동자들은 “기이한 환몽”에 사로잡힌 것을 아닐까? 이러한 열정들이 오히려 “생명력을 소진”하고 있지는 않을까? 현실을 문제시하고 성찰하면서 게으를 수 있는 권리와 대안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폴 라파르크, 2014: 27-28).
피에르 부르디외(2002: 1524-1525)는 사회학이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구조를 제대로 인식한다고 해서 그 구조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서술한다. 그러나 사회학이 갖는 사회적 효과가 미미할지라도 사회학의 역할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들로 하여금 고통의 책임을 사회적 원인에서 찾을 수 있게 함으로써 그들의 무죄를 입증”해주고 은폐된 불행의 출처를 드러내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지그문트 바우만(2010b: 343) 또한 부르디외의 앞 선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더 이상 대안이 없다”는 주문을 외우며 양심의 가책을 달래는 것은 그 불행의 공범일 뿐임을 지적한다. 이 또한 도덕적으로 유죄이다. 칼 맑스로부터 시작되어 20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지그문트 바우만을 거쳐 지금 한국의 소외와 빈곤이 현실 속에 이루어지고 있다. “소외는 역사 속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가는 힘없는 사람들의 실천적인 고통이며 구체적인 일상사이다.”(김호기, 1986: 1)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과연 자유주의, 자본주의 문명을 뛰어넘는 사회적 상상이 가능한지 가끔 묻는다. 긍정적인 대답이 나오지는 않지만 이런 삶에 의문을 제기하고 성찰하는 것이 조금의 대안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피에르 부르디외는(2013: 13) 프랑스 국립과학 연구원 금메달 수상 연설에서 사회학은 제국에 대항할 수 있는 하나의 대항권력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연설 끝에 이런 이야기를 덧붙인다.
“마지막으로 성찰성의 원칙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이 말을 빠뜨려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요컨대, 저는 오늘 이 연설의 결과에 대해서 어떤 환상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 연설을 하게 된 상황이 워낙 엄숙하다보니, 저도 엄숙한 어조를 취할 수밖에 없었고, 바로 그 이유로 제 이야기는 실현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희망한다는 것, 그것은 결코 금지되어 있지 않습니다.”
보고서를 쓰면서 한계를 느꼈던 부분은 청년세대의 자기기술을 근거로 경험적인 분석을 할 때였다. 헬조선과 흙수저 담론이 한참 유행하던 시절 웹사이트 디시인사이드 흙수저 갤러리에는 ‘가난그릴스’라는 닉네임의 유저가 생존법을 공유한 적이 있다. 가난그릴스란 생존왕 ‘베어그릴스’를 패러디해 자신의 정글이 아닌 가난 속에서 생존하고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의 생존정보들은 인터넷에 공유되었고, 그 삶은 정말 빈곤하고 소외된 삶으로 그려졌다. 그의 삶에는 취업 같은 단어도 허락되지 않는 것 같았다. 지금의 출간된 청년담론들은 수도권, 인서울대학 출신 대졸자, 활동가, 사무직을 중심으로 기술되어있다. 따라서 정말 배제되고 열악한 환경에 있는 비수도권, 고졸 이하, 생산직, 육체노동자인 청년들의 담론을 이끌어 오기 어려웠다. 루만에 의하면 사회가 생산해내는 다양한 담론들은 복잡한 현대사회가 스스로를 자기관찰하는 형식들이다. 그런데 정말 배제된 존재들의 자기기술을 찾지 못한 것이 아쉽고, 이를 계기로 추후에 관련된 연구를 진행하면 그런 청년들을 사례 기술하는 연구를 진행해보고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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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겨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