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평등한 어린 시절 -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불평등의 대물림(Unequal Childhoods: Class, Race, and Family Life)』(2003)의 원본 표지.
들어가면서
전통사회에서 사회의 재생산은 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귀족의 자식도 귀족이 되는 것은 사회적 합의를 거쳐 승인된 특정한 과정을 성취해서가 아니라 혈통에 의한 것이었으며 혈통을 통해 권위(이는 카리스마 또는 상징권력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를 얻을 수 있었다.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를 통해 발현된 근대사회에서는 단순히 혈통만으로 권위를 얻을 수 없게 되었고, 사회의 재생산은 근대적 교육제도를 통해 이루어졌다. 근대사회에서 권위를 얻기 위해서는 사회를 통해 합리적이라고 승인된 제도를 통해 특수한 능력들을 습득해야했다. 단순히 혈통이 아닌 능력에 따라 사회가 재생산되는 것은 근대사회가 가진 하나의 특징이다. 이것은 하나의 진보였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있었음에도 사회의 재생산은 여전히 신분제처럼 재생산된다는 문제의식을 갖은 학자들은 교육 불평등에 관한 연구를 진행해왔고, 지금 다룰 아네트 라루(Annette Lareau)의 『불평등한 어린 시절 -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불평등의 대물림(Unequal Childhoods: Class, Race, and Family Life)』도 근대사회에서의 사회적 재생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책이다.

아네트 라루(annette lareau, 1952-)
이 책의 저자 아네트 라루는 U.C. 버클리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한 학자이고, 메릴랜드대학교와 템플대학교 사회학 교수를 거쳐, 현재 펜실베니아대학교에서 사회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자는 2003년에 출간된 『불평등한 어린 시절』을 통해서 미국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2004년 미국사회학회에서 ‘윌리엄 J. 구드 가족사회학 최우수도서상’, ‘문화사회학 부문 최우수도서상’, ‘아동·청년기 부문 공로상’과 2003년 미국교육학회의 비평가상을 수상하고, 2004년 사회문제연구학회의 C. 라이트 밀스 상(C.Wright Mills Award) 최우수상 후보에도 올랐다고 한다.
책의 구성과 내용
이 책이 목표하는 바는 교육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회적 불평등의 재생산을 실증하는 것이다. 그를 위해 라루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재생산 이론을 모델로 미국사회에 적용시켜 질적 연구를 진행한다. 이 책 서론에서 저자가 겨냥하는 것은 바로 ‘아메리칸 드림’, 즉 내가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사회적 믿음이다. 아네트 라루는 아메리칸 드림의 신화를 비판하면서 부모의 지위가 자식의 지위로 대물림되는 사회현상을 증명하고자 한다.
먼저 라루는 계급(class)과 인종(race) 변수를 중심으로 표본을 범주화하는데, 계급은 ‘중산층’, '노동자 계급', ‘빈곤층’으로 계급을 범주화한다. 중산층 가정은 부모 중 한 명 이상이 관리직으로 재직 중이거나, 고급 교육과정을 이수해야 재직할 수 있는 전문직 종사자인 경우이다. 노동자 계급 가정은 부모 중 주요 관리직에 종사 중인 사람이 없고, 고급 교육 과정을 이수 받지 못한 가정, 그리고 하위 화이트칼라 노동자를 포함한 범주이다. 마지막으로 빈곤층 가정은 부모에게 안정적인 직업이 없고, 공공복지를 통해 생계를 이어가는 가정을 가리킨다. 여기에 인종변수로 ‘백인’과 ‘흑인’을 추가했고 혼혈의 경우 흑인으로 범주화 된다.
이 책에서는 실질적으로는 ‘중산층’과 ‘노동자·빈곤층’을 중심으로 범주화해서 각각 사회적 계급의 일상생활의 구성, 언어 사용(의 계급적 차이), 가족과 기관 사이의 상호작용이라는 세 가지 경로를 통해 계급적으로 어떻게 아이와 가족의 사회적 삶이 형성되는 지를 서술한다. 1부 사회적 계급의 일상생활 구성은 3장으로, 2부 언어 사용은 2장으로, 가정생활과 공공 기관은 4장으로 각각 구성되어 있고, 각 장마다 한 가정의 사례를 서술하고 있다.
라루는 계층을 ‘중산층’, ‘노동자 계층’, ‘빈곤층’으로 조작화하지만 연구에서 실질적으로는 노동자·빈곤계층을 묶어서 범주화시키고 이에 중산층을 구분해서 연구를 진행한다. 중산층의 교육관행을 ‘집중양육’으로, 노동자·빈곤계층의 교육관행을 ‘자연적 성장’으로 개념화한다. 집중양육은 중산층 교육관행의 특징으로 자녀의 여가생활 및 교육생활을 부모가 조직함으로써 자녀의 능력이 집중적으로 향상되도록 하는 교육의 방법이다. 이에 반해 노동자·빈곤계층은 아이의 생존에 직접적으로 관여되는 일 외에는 아이의 여가나 교육생활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방임하는데, 라루는 이를 ‘자연적 성장’으로 표현한다.
| 아동 양육 방식 |
집중양육 방식 | 자연적 성장을 통한 성취 |
주요 특징 | 자녀의 재능과 의견 및 능력을 평가하고 지원하려는 부모의 능동적인 노력 | 자녀의 성장에 관심을 갖고 노력을 기울임 |
일과구성 | 아이들이 어른의 관리를 받으며 다양한 활동에 참여 | 아이들이 주도하는 ‘놀이’, 주로 가족들 간에 이루어짐 |
사용하는 언어 | ·설득/지시 ·어른의 발언에 대한 아이들의 능동적 대응 ·어른과 아이들 간의 장기적인 의견조율 | ·지시 ·어른의 발언에 대한 질문이나 대응을 거의 하지 않음 ·어른의 지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임 |
학교교육 참여 | ·아이의 상활을 대변한 비평과 개입 ·이러한 역할을 아동에게 위임하기도 함 | ·의존적 태도 ·불만과 무기력 ·가정과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아동 양육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갈등 |
결론 | 아동의 권리의식 향상 | 제약에 대한 의식 발달 |
<표 1> 아동 양육의 유형 분류(라루, 2012: 66)
라루는 집중양육을 하는 중산층과 자연적 성장을 하는 노동자·빈곤계층의 특성이 어떻게 다른 사회적 삶을 구성하고, 또 부모의 지위를 대물림하는 지를 경험적 연구를 통해 보여준다. 중산층과 노동자·빈곤계층이 이런 특징을 가지고 각각 사회에서 상호작용하는 내용을 ‘일상생활의 구성’, ‘언어 사용’, ‘가족과 기관 사이의 상호작용’이라는 주제로 파악한다.
먼저 ‘일상생활의 구성’에서는 중산층 백인 아이, 노동자 계층 흑인 아이, 그리고 빈곤층 백인 아이를 사례로 계층에 따라 이들의 일상생활이 어떻게 다르게 구성되는 지를 다룬다. 중산층 백인 아이는 빈틈없이 계획된 일정 속에서 일상생활을 보냈다. 이들의 일상생활을 재능개발을 목적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다양하게 조직된 사회경험을 통해서 평가받는 방식에 익숙해지고, 부모들 또한 독서하는 문화자본을 아이에게 전이시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독서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에 반해 노동자·빈곤층 가정의 아이들에게는 최소한의 일과가 주어지고 나머지는 모두 아이들이 스스로 만들어나가게 된다. 특히 노동자·빈곤층의 부모들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자녀들의 교육에 신경을 쓸 수 없었으며 따라서 아이들은 여가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했고, 이들은 일정 수준의 문화자본을 체득하는 기회를 갖기도 어렵다.
다음으로 ‘언어 사용’에서는 일상생활 구성의 차이가 언어 사용과 어떤 연관을 맺는지를 설명하면서 중산층 흑인 아이, 빈곤층 흑인 아이의 사례를 통해 계층별로 어떻게 다른 언어능력, 언어 사용의 차이가 나타나는 지를 나타낸다. 중산층과 노동자·빈곤계층의 언어 사용의 가장 큰 차이점은 토론의 존재여부에 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자연스러운 토론이 이루어지는 중산층 가정의 아이는 이를 통해서 어휘구사, 추론, 협상 등의 가치, 즉 일종의 언어자본을 체화시킨다. 라루는 이것을 계층 간 차이를 만들어내는 핵심적인 요소로 평가한다. 반면에 노동자·빈곤계층의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토론보다는 부모의 일방적인 명령이 대화의 주를 이루고 또 이들은 중산층 가정에서는 볼 수 없는 체벌을 통해 아이들을 양육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자란 아이들은 중산층 아이들이 습득한 언어자본을 가질 수 없었고, 비교적 수동적인 태도와 어른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 어른에 대한 공포로 인해 노동자·빈곤층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예의바른 모습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가족과 기관 사이의 상호작용’에서는 아이의 교육에 관여하고 관리하는 부모의 방식이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데, 중산층 흑인 아이와 중산층 백인 아이, 노동자 계층의 백인 아이 둘을 사례로 보여준다. 우선 중산층 부모들은 아이가 다니는 학교와 관계를 맺는 데에 스스럼이 없었으며 학업성취 향상을 위해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들은 가정에서 자녀의 교육을 지도하는 부분에서도 능숙했다. 또 중산층 부모들은 선생님과 관계를 맺을 때도 대등하거나 우월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부모가 외부기관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통해 아이들은 관계형성의 방법을 습득하게 된다. 반면에 노동자·빈곤계층의 부모는 자신이 학교와 관계를 맺으며 혹시 ‘잘못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부모들은 학교나 교직원들이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지는 않을까, 자신들의 교육관행(방임)을 신고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자녀들은 부모가 학교에서 관계 맺는 방식을 보고 또 그런 양육방식이 잘못됐다는 규정을 받기도 하면서 상징폭력을 경험하게 된다.
나오면서
이 책의 목적은 서론에서도 언급했듯, 개인의 능력이 순전히 개인'만'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을 실증하는 데에 있다. 이 책에 이론모델로 삼고 있는 부르디외의 『재생산』 역시 사회적으로 세습되고 상속된 개인의 학업능력이 순전한 개인의 능력으로 신성화(자연화)되는 것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다양한 사회적 삶의 공간, 개인이 위치해 있는 공간들의 차이와 양육방식의 차이, 그리고 그에 의한 격차를 살펴보면 라루는 책의 목적을 어느정도 달성한 듯하다. 또한 라루는 책의 3부 12장 '사회계층의 힘과 한계'에서 이런 교육 불평등 문제에 관한 나름의 해답을 내놓고 있고, 중간중간 들어있는 서술들에서도 저자가 연구대상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떻게 예민하게 다루고 있는지도 알 수 있다. 이 책은 충분히 흥미롭고, 훌륭한 책인 것 같다.
이제 문제는 한국 사회학자들의 손에 달려있는 것 같다. 피에르 부르디외, 아네트 라루의 선행연구를 가지고 교육 불평등에 관한 연구를 어떻게 성찰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책은 그에 대한 여러가지 참조점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교육 불평등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라루의 연구에는 없는 성별변수도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라루는 노동자, 하층민 가정의 아이들이 토론문화에 익숙하지 않고, 그렇기에 어른에게 공손하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한국적 상황에서는 오히려 토론을 시도하는 것보다 어른에게 공손함이 학교의 교육과정에서 이점으로 작용할 여지도 존재한다.
이외에도 라루는 부록으로 현장연구에서 겪을 수 있는 시행착오에 대해 상세하게 적어둔 방법론에 관한 내용, 피에르 부르디외의 작업에 관한 내용, 그리고 연구에 사용된 자료들을 소개하는 내용도 책에 첨부해뒀다. 굉당히 친절하고 도움되는 부록이다. 그리고 번역의 가독성도 좋은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문장이 부자연스럽거나,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크게 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이런 주제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사회학에 관한 사전지식 없이 무난하게 읽을 수 있는 좋은 책이다.
반면에 아쉬움들도 존재하는데, 먼저는 책 구성에 관한 문제이다. 책 편집에서 의도적으로 가독성을 위해 각주들을 뒤에 배치한 것 같았는데, 이 부분들이 꽤 아쉽게 느껴졌다. 다음으로는 번역어에 관한 아쉬움이다. 전문번역가의 번역이라서 책의 가독성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훌륭하지만, 아쉽게도 몇몇 사회학적 개념어들의 번역에서 아쉬움을 느꼈다. 예를 들어 책에서는 계급·계층이 혼용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계급과 계층은 사회학적으로 분명 다른 개념어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설명을 해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그래서 번거롭더라도 원본을 참고해야할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부르디외 사회학의 핵심개념어인, 하비투스(habitus), 장(場, champ, field)를 각각 '습관', '현장'으로 옮겼는데 이 부분은 매우 아쉽다. 물론 라루가 일반독자들을 위해 사회학적 용어 사용을 지양했다고 해서 저렇게 번역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하비투스는 '사회적 습관'으로 옮긴 뒤 각주로 '집단·계급적으로 형성되는 사회적 습관'정도로 설명해주면 되지 않았을까, 장은 '사회적 삶의 공간', 또는 '사회 공간'정도로 옮겼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래도 출판기획 자체가 일반독자를 염두에 둬서 이렇게 번역된 것 같은데, 이런 식으로 번역했다면 일반독자들의 보다 더 깊은 이해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다. 모쪼록 이 책은 주변에 교육에 종사하고 있는 지인들에게 추천하고, 교육 불평등에 관심있는 지인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