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


  하버마스 정치사회학의 핵심은 비판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생활세계의 왜곡되지 않고, 강압적이지 않은 ‘의사소통행위’를 중심으로 제안하고, 이러한 의사소통행위는 정치적 공론장에서 이루어지는 절차적 정당성을 갖춘 숙의 과정을 통해 근대 대의 민주주의에 대안이 될 수 있는, 하나의 숙의 민주주의 모델을 제시한다.


 부르디외는 그러한 하버마스의 논의에 정면으로 반박한다. 먼저 부르디외에게 장에 참여하는 개인은 “실천적인 위급함” 안에서 사회적 삶에서 마주하게 되는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투쟁하는 존재이다. 이들은 수직적으로 구성된 사회세계에서 상승과 지배를 원하고 상징투쟁에서 기존의 체제에 도전하고 장의 전복을 꿈꾸는 코나투스적(conatic) 주체들이다(김홍중, 2017: 5-6). 사회세계를 살아가는 개인들은 자기보존을 위해 투쟁하는 존재이며, 이런 까닭에 부르디외는 생활세계에서의 비판 잠재력을 기대하지 않는다.


 이러한 인간론적 전제 아래에서 부르디외는 자신의 언어(소통)이론을 전개시킨다. 실천과 구조가 만나는 장은 경제적 이해관계의 성격을 공유하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언어관계 또한 경제적인 관계로 유추될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장에서의 언어실천은 다양한 형태의 자본을 축적하기 위한 경쟁으로 특징지어지고, 이를 토대로 하버마스가 언급한 “왜곡되지 않은 의사소통”, 즉 합리적 의사소통·의사소통행위는 현실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예이며, 하버마스가 제안한 소통은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특별한 노력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는 것이다(Bourdieu ‧ Eagleton, 1994: 270). 그렇기 때문에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이론적 토대로 구축된 숙의 민주주의의 언어관에는 성찰이 필요해진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조금 더 지식이 있다면 어떤 일들을 확실히 더 잘 이해할 텐데. 그게 전부예요. 내가 더 지식을 갖게 되면 일은 많이 달라질 텐데. … (중략) … 그러나 나는 정말 시간이 없어요. 조금만 시간이 더 있다면, 나는 그것에 관여하고 무언가 더 알려고 시도하고 그 흐름을 더 깊이 따라갈 텐데. 다시 말해서 조금 더 지식이 있다면 누군가와 더 많이 토론할 수 있고, 많이 알지 못할 때는 격리된 채로 남아 있게 되지요.” (가정부)*


*해당 인용문은 부르디외가 구별짓기 8장 문화와 정치에서 사용한 한 가정부의 이야기이다.


 부르디외가 관심을 가졌던 하나의 부분은 바로 계급 아비튀스로 체화된 언어능력이었다. 부르디외에게 언어능력은 계급 아비튀스를 보여주는 각별한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계급의 아비튀스 전체는 언어적 아비튀스를 통해 드러난다고 말하기도 한다(부르디외, 2014: 99). 부르디외가 구별짓기에서 인용한 학력자본이 낮고, 여성인 가정부는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싶어도 지식이 없기 때문에 정치적 토론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증언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이 정치적 의견을 소유한다”는 일종의 선험적인 토대를 지지하는데, 부르디외의 분석은 오히려 반대로 치닫게 된다. 부르디외는 하층 계급에서는 생활에 기능하는 것들 외에 생활과 동떨어진 정치적 의제에 대한 의견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부르디외, 2006: 722-731).


계급 아비튀스로 육화된 언어의 사회적 용법들은 고유한 의미를 지니는 사회적 가치들을 통해 일종의 격차들의 상징적 질서과 사회적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담당한다(부르디외, 2014: 55).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아비튀스를 체화하고 정치의 장에 참여하는 시민들은 정치의 장에서 일어나는 숙의과정에서도 각자 가진 자본을 통해 자유로울 수 없으며, 상징적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정치 엘리트들이 만들어 놓은 의제를 소비하는 주체로 전락할 뿐이다. 이런 까닭에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급일수록 정치적 장에서 통용되는 게임의 논리와 그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는 자본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고, 소유하기도 어려운 실정에 놓여 결국 ‘정치적 소외’를 경험하게 된다(김태수, 2008: 116).


부르디외는 근대 민주주의에 맹점을 자신의 이론적 토대인 아비튀스, 장 개념으로 지적해낸다. 특별히 부르디외의 언어적 아비튀스 이론은 하버마스의 핵심개념인 합리적 의사소통과 소통관계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부르디외(2001: 123)는 오히려 합리적 의사소통을 통해 권력이 행사된다고 보았다. 예를 들면 다른 장들에 비해 합리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학문의 장에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조차도 그 관계 배후에 존재하는 사회계층적 구조와 특권들로 배제를 포함하고 있다(부르디외, 2001: 32). 이러한 부르디외 정치사회학의 개념은 자칫 숙의와, 절차적 정당성으로 포장되어 이상(理想)으로 여겨질 수 있는 숙의 민주주의에 비판적 성찰을 제공한다.


참고문헌


김태수, "부르디외 정치사회학을 통한 대의민주주의 성찰", 『사회와이론』 13, 2008.

김홍중, "부정자본론 - 사회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한국사회학』 51(3), 2017.

피에르 부르디외,『파스칼적 명상』,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1.

_______________,『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下』, 최종철 옮김, 새물결, 2006.

_______________,『언어와 상징권력』, 김현경 옮김, 나남, 2014.

Bourdieu, Pierre ‧ Eagleton, Terry. "Doxa and Common Life: An interview", in Savoj Zizek (ed.), Mapping Ideology, London: Verso, 1994.

프랑크푸르트학파 3세대로 분류되는 악셀 호네트(Axel Honneth, 1949년 7월 18일 - )


*이 글은 Axel Honneth. "The Fragmented World of Symbolic Forms: Reflection on Pierre Bourdieu's Sociology of Culture", Theory, Culture and Society, vol. 3, no. 3, 1986.를 요약한 글이다.


서론


부르디외는 사회적 삶을 통해 드러나는 상징적 형식들의 세계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정통 맑스주의자들이 단순히 경제적인 재생산을 이야기한 것과 다르게 문화적 관습, 상징적 형식들의 공간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맑스주의자로 남아있다. 그는 맑스주의를 가볍게 비판하지 않고, 계급투쟁 개념에 있어 맑스주의 이론과 논쟁적인 하나의 패러다임을 구축한다. 부르디외는 계급투쟁 개념을 기초로 하여 사회구조를 분석하는데, 이는 문화적 실재에 관한 연속적인 연구를 위한 것이었다. 부르디외는 이런 연구를 통해 전통적인 사회학에서는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를 하나로 결합하여 연구한다. 어떻게 두 요소가 통합될 수 있는지, 부르디외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상징적 형태로 문화를 어떻게 다루는 지에 대해 뒤이어 다룰 것이다.



부르디외의 『실천이론의 개요(Outline of a Theory of Practice, 1977)』은 1950-60년대 쓴 인류학 에세이의 모음집이다. 부르디외는 프랑스를 지배했던 레비스트로스로 대표되는 구조주의 인류학에서 벗어났다.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에서 인류학자로서 부르디외는 카바일(Kabyle)족의 신화와 결혼 의례를 폐쇄된 의미(기호)체계로서의 언어학의 모델로 해석했고, 이는 인간의 마음에 있는 구조적 법칙과 연관성을 가졌다. 부르디외는 이어지는 연구에서 레비스트로스의 이론과 연관된 몇 가지 연구사례를 제시한다. 그러나 부르디외는 레비스트로스주의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부족의 상징적 분류와 사회적 실재의 불일치를 발견한다. 친족관계 또는 부족의례의 언어적 표현은 레비스트로스의 주장처럼 보편적으로 엄격한 문법을 따르지 않았다. 이러한 경험적 반박은 구조주의자들의 기반을 흔들어 놓았다.


상징적인 것의 모호함을 설명하기 위해 부르디외는 원주민들의 사회를 예로 든다. 부르디외는 집합적으로 공유되는 체계가 집단의 계급적 이익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원주민들의 상징적 분류에서 나타난 차이들은 부족사회 내에서 경쟁하는 친족집단들 자신들의 위치를 상승시키기 위해 이해관계에 따라 상호주관적으로 기호체계를 다르게 해석하려 한다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부르디외는 상징적 형식들이 이해관계에 따른 투쟁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레비스트로스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무너뜨린 것 같다. 원주민이 현실에 질서를 부여한 상징체계는 인간 마음에 있는 논리의 산물이 아니라 사회적 집단들의 투쟁의 결과인 것이다. 이미 부르디외는 그의 인류학적 작업에서 구조주의에 대한 비판을 ‘실천의 경제학’이라는 개념을 통해 준비했고, 이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경제적 목적이 있든 아무런 목적이 없어서 경제적 동기가 없든, 배후에 경제적 동기를 품고 있다”라고 표현된다. 부르디외에게 인간의 모든 행위는 물질적·상징적 재화의 획득을 최대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부르디외는 경험적으로 인류학적 구조주의 비판을 조정하고, 상징적 실천을 실용주의 형식의 적용과 아비튀스 개념의 논리적 확장으로 이끈다. 아비튀스 개념은 무의식의 수준에서 집합적으로 담지되는 평가의 도식이다. 부르디외는 집단적 성향에서 기인하는 아비튀스 개념을 통해 개인의 지평을 뛰어넘는 사회적 실천·행위의 근원을 설명한다.



부르디외는 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행위의 ‘경제학’ 이론을 발전시킨다. 부르디외가 카바일족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본 것은 지위를 두고 벌어지는 끊임없는 친족집단 사이의 경쟁이었고 이것은 상징적 분류학(taxonomy)를 통해 이루어졌다. 부르디외는 사회적 투쟁의 장으로서 변환되는 상징적 형식들의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인류학적 연구를 진행했다. 친족집단으로 구성된 부족사회에서의 집단 간 경쟁은 직업집단으로 구성된 발전되 계급 구조화된 사회에서의 상징적·경제적 “자본”을 둘러싼 투쟁을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 복잡해진 현대사회를 설명하는 데 있어도 인류학적 연구에서 기원한 상징적 투쟁의 모델은 경유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인류학적 연구의 성과를 산업사회에 적용하는 것에는 몇몇 이론적인 차이가 요구된다. 상징적 형식들의 지위를 변화시키고, 제도적 장치의 역할을 첨가해야 한다. 부르디외는 근대화 이후의 사회에서는 “상징자본”을 둘러싼 투쟁이 더 이상 단순한 형태의 직접적인 경쟁의 양상을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고, 문화적 지식의 습득과 보유에 관한 투쟁의 형태를 취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러한 문화자본을 둘러싼 투쟁은 교육기관을 통해 이식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부르디외의 시각이 담긴 책이 『구별짓기』이고, 이는 부르디외 이론의 정수이다.



부르디외는 “구별짓기”에 관한 본인의 조사와 전통적 미학 비판을 결합한다. 미학적 판단은 다양한 계급들에 의해 구성된다. 예술작품에 대한 미학적인 인상은 몇몇 미학적인 인상들의 자발적이고 독립적인 판단이 아니라 교육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사회적 구성물임을 부르디외는 지적한다. 이러한 취향은 특정계급을 통해 교육된다. 부르디외는 이러한 관점을 비판적으로 발전시켜 칸트주의 미학을 비판하고 이것이 『구별짓기』의 부제인 “판단력 비판에 대한 사회적 비판”으로 이어진다. 그는 일반적인 미학장(場)을 사회학적으로 폐기시킨다. 예술에 대한 판단이 스포츠나 음식을 대하는 태도와 구별성을 갖지 못하게 되면 미학적 판단은 유효성을 잃게 된다. 부르디외의 미학 비판에 숨겨진 의도는 문화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하는 데 있다. 그는 식습관, 옷차림, 예술에 대한 판단 등에 교묘하게 숨겨진 법칙을 발견했고, 이러한 매일의 문화적 실천 속에서 그의 연구의 진정한 목적을 찾을 수 있다. 사회적 공간에서의 고급 취향은 특정 계급의 취향의 설득과 지배를 통해 구성된다. 부르디외는 현대사회의 문화 연구를 통해 자신의 인류학적 연구의 가설을 뒷받침한다. 다시 말해 특정 집단적으로 드러나는 사회적 습관, 생활양식은 사회적 투쟁의 전략이다.



사회적 행위의 유용성 개념은 부르디외 사회이론과 문화 분석의 토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집단들은 자신들의 더 좋은 사회적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한다. 부르디외는 이러한 사회의 모습을 설명하기 위해 사회적 행위자를 포커게임에 참여하는 선수에 비유하여 표현한다. 사회적 투쟁의 경기장에서 각기 사회적 집단에서 소유하게 된 다양한 사회적인 자본의 자원을 가지고 투쟁에 참여한다. 이 투쟁의 목적은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위한 것이다.


부르디외의 자본개념


경제 자본 : 여러 생산 요소들과 수입, 유산, 물질적 재화와 같은 경제적 재화의 총체로 구성된다.


문화 자본 : 학교제도에 의해 양산된 것이든 가족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든 지니고 있는 지적 자격의 총체에 상응한다. 이 자본은 첫째, 신체에 체화된 형태, 문화적 재산과 같은 객관적 상태(예술품, 도서), 사회적으로 제도화된 형태(학위·자격)로 존재한다.


사회 자본 : 기본적으로 개인 혹은 집단이 가진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이다. 이 자본을 소유한다는 것은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작업, 즉 초대, 공동 여가활동 등의 사교활동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르디외는 경험적인 연구의 목적을 위해 비교적 덜 까다로운 개념인 교육자본을 “문화적 자본의 공식적으로 인가된 부분”으로 정의하고, 교육과 문화적 자본 사이의 관계에 취득한 학위와 전문가의 직업에 가치를 부여한다.


부르디외는 경쟁적인 사회적 투쟁이 이러한 자원을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한 일련의 전략을 수반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미 다양한 사회적 집단들은 그를 위해 나름의 경제적 부나 문화적 자원들을 소유하고 있다. 부르디외는 사회적 배제 개념을 암묵적으로 사용하는데 이는 막스 베버의 계급 이론에서 기원한다. 여기서 “사회적 배제(social closure)”는 사회적 공동체들이 자신의 특권과 기회를 강화하거나 유지시키는 전략을 의미한다. 부르디외는 사회의 규모와 상관없이 이러한 투쟁이 실천적 요소로 사회에 일반적으로 발생한다고 보았고, 사회적 삶의 특정 측면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집합적인 사회적 투쟁, 장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고, 동시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것을 “사회구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영구적인 투쟁에 대한 방법론적인 의심은 부르디외의 저작에서도 나타난다. 부르디외는 방법론적 지위뿐 아니라 계급에 대한 이론적인 기준에 대해서도 평가한다. 『구별짓기』에서 경제·문화자본으로 프랑스 사회구조에서 객관적 계급을 측정한다. 부르디외는 맑스주의의 전통적 계급에 영향을 받았고 이것이 그의 사회적 분류의 기초가 된다. 부르디외는 생산수단의 소유여부로 계급을 구분하는 데에 동의한다. 그러나 상류계급은 경제적 부에 상응하는 문화자본도 소유해야 한다. 이러한 시도는 고전적 계급이론에 대한 부르디외의 도전이다. 다음 기준으로 부르디외는 사회적 구조, 즉 “복합 구조(composition structure)”에서의 객관적 계급을 측정하기 위해 개인의 자본이 특정 관계와 시간에서 다르게 평가받는 부분을 지적한다. 이를 통해서 부르디외는 사회집단들이 경제자본의 크기로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구조에 의해 분류되며 수직적이고, 수평적으로도 분류된다고 파악한다.


이러한 계급의 이차원적인 확장을 통해서 계급의 수직적 구조(경제자본)와 수평적 구조(문화자본)를 함께 고려할 수 있게 되었고, 동일 집단 안에서 이루어지는 투쟁에 대해서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계급이론의 수정은 부르디외 연구의 기초적인 것이다. 그의 행위이론은 사회계층의 분석에 기반을 둔다. 그의 이론은 사회적 불평등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하고, 특정집단에 관한 미시사회학의 이론틀을 제공하기도 한다. 부르디외는 방대한 사회조사를 통해 얻게 된 경험적 자료를 통해 “사회적 위치의 공간들”을 구성한다.


“구별짓기” 개념은 문화를 통한 일상적 계급지배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문화적으로 더 우월한 가치, 생활양식은 다른 문화적 가치나 생활양식을 대중적이고 통속적인 취향으로 구별한다. 이것은 상징적 지배이다. 하층계급은 예술작품에 있어 수수함이나 실용적인 기능을 찾는 경향이 존재한다. 낮은 사회계층의 아비튀스는 경제적으로 제한적이고 억압적인 실존적 상황의 어려움을 현실적 쾌락주의, 실용적 쾌락주의를 통해 해소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다. 사회의 일상적인 문화적 실천은 “지배계급”, “중간계급”, “하위계급”의 투쟁으로 점철된다. 이러한 세 집단 사이의 투쟁은 양식적 배제의 높은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부르디외의 작품 일부 구절에서 그가 제시하는 경험적 자료들은 오히려 그의 이론적 토대에 반대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부르디외 연구의 핵심에 놓인 오해이다. 부르디외는 ‘구별짓기의 표지’와 문화적 타당성에 대한 기준을 뛰어 넘는 사회의 경쟁을 연구하기 위해 “실천의 경제학”이라는 측면에서 사회집단의 전체적인 삶의 형태를 전체적으로 인식하는 접근법을 제시한다.



부르디외의 연구는 사회학적 계몽이 항상 추구해왔던 과학적 탈신화화의 과정으로 지속된다. 부르디외가 일상 문화에 대한 경험적 분석과 개념을 연결하는 부분은 모호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을 간과하더라도 부르디외의 이론은 내재적인 차별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부르디외는 맑스주의와 베버주의를 혼합하여 독창적인 결과물을 얻고, 이를 통해 계층화된 사회의 문화분석을 가능케 하는 미시사회학적 이론틀을 획득한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사회 집단의 위치와 삶의 기회를 경제·문화적 재화에 의해 측정하고 이것은 사회적 투쟁을 통해 경제적 부와 명예를 획득하게 해준다. 부르디외는 “제도화된 학력”이 돈에 버금가는 매체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재화들이 사회적 투쟁에서 집합적 생활양식에 작용하는 역할을 살펴보면 부르디외 사회학의 핵심 개념인 아비튀스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삶의 양형식과 타고난 기질의 취향은 각기 다른 사회 집단에서 다른 문화적 사회화를 통해 획득된다. 특정한 계급적 배경을 통해 개인은 무의식적으로 그들의 가치와 취향에 대한 판단에 적응하고 이를 가지고 사회적 위치의 상승을 위한 전략적 행위를 실천한다.


여기서 부르디외는 구조주의자들의 개념적 도식을 사용하는데, 그는 다른 집단과의 “차이”에 의해 결정된 사회적 집단의 “의미” 또는 “가치”를 사용한다. 사회적 집단들은 각기 다른 직업적 집단의 전략적 표현의 상징적 형식을 통해 자신들의 우월성을 주장하고, 그들의 집합적 정체성을 유지시킨다. 사회적 집단들은 상징적 구별직시를 통해 그들 스스로를 차별화한다. 부르디외에 의하면 각 사회적 집단들은 자신들이 가진 “구별짓기의 표지”를 다른 집단에 강조하기 위해 투쟁한다.


부르디외는 “계급투쟁의 잊힌 차원”으로서의 사회세계의 상징적 분류에 의한 투쟁을 주장하고, “계급투쟁의 잊힌 차원”은 사회의 문화적·도덕적 모델의 경쟁을 통한 집합적 생활양식의 경기장으로 수렴한다.


피에르 부르디외(1930-2002)



“사회학을 찬미하다”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원 금메달 수상 연설, 피에르 부르디외 1993 번역 : 김홍중
“사회학은 제국을 현실화시키고 정당화하기 위해서 과학에 점점 더 의존하는 권력들에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비판적 대항-권력의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 저는 오늘 이 연설의 결과에 대해서 (사회학의 미래가 긍정적일 것이라는) 어떤 환상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 바로 그 이유로 제 이야기는 실현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희망한다는 것, 그것은 결코 금지되어 있지 않습니다.” - 피에르 부르디외
들어가기
사회학을 직업으로 삼고자하는 이들의 전망이 좋지 않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연설이다. 부르디외와 같이 연구한 학자들은 문예적 논리, 형이상학적 논리를 고수하는 지식인과 독특함과 기발함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는 방법도 아닌 뒤르케임적 방법론(실증주의)으로 집합적 작업을 했고 이에 따라 많은 난관을 겪었다.
사회학에 대해서
사회학은 과학을 정의하는 주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자율적이며 누적적으로 성장하는 학문으로서의 사회학은 경험적으로 관찰 가능한 사실들의 거대한 집합을 설명할 수 있는 정합적 모델의 형태로 가설들의 체계를 구축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사회학은 정치와 연루되어 있다는 혐의는 받는다. 역사학자나 인류학자와 달리 사회학자의 연구대상은 자신이 살고 있는 그 세계이다. 따라서 사회학자는 연구대상인 세계에 대해 이해관계를 갖게 되며 실천의 과정에서 선입견이나 편견에 빠질 위험성이 항상 존재한다. 하지만 사회학은 이미 이런 오류에 대한 방어책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 사회학의 장(場)은 사회학자로 하여금 세속적인 유혹과 저널리즘과 연루되지 않도록 한다. 또 세속적 유혹에 연루된 사회학자들은 학자들이 구성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대학(사회학의 장場)”에서 배제될 위험성을 갖게 된다.
사회학자는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획득한 집합적 지식(지적 유산)을 미리 장악하여 숙달하고 있어야 한다. 사회학의 집합적 지식은 이미 방대한 것이며 이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 학문적인 토론에 진입할 수 있다.
사회학의 집합적 유산을 전유한 사회학자들은 서로 갈등할 때도 결국 잘 통합되었다. 왜냐하면 이 대립이 동일한 유산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유산을 가지지 않는(사이비) 사회학자들이다. 이들은 유산을 상속받지 못했기 때문에(제대로 된 사회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미디어와 밀착되어있다.
사회학은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성찰적이어야 한다. 사회학의 장(場) 안에서 사회적인 무의식은 학문적 권위와 사회적 지배관계가 통용되어 젊은 학자들의 독창성과 창의성을 가로막는다.
사회학자는 예언가가 아니다. 사회학은 과학적 방법으로 제기할 수 있는 질문들에 대해서만 명확하고 검증 가능한 해답을 제공하는 것이다. 상식과 저널리즘이 제기하는 질문들과는 단절되어야 한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복잡한 사회세계가 존재한다. 사회학자들은 이 세계에 있는 기능장애를 분석하고 그 갈등들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회학자들은 개인이나 집단에게 소크라테스적 산파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좌파건 우파건 사회과학에 기대를 하고 제 콜레주 드 프랑스 강좌의 일 년 재정의 열 배, 스무 배 되는 재정을 소모한다. 그런데 여론조사란 사실 과학적으로 쓸모가 없는데다가 재정적으로도 큰 손해를 입힌다. 정치가들은 진리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민중선동의 합리적 도구를 원하고 있다. 사회학만이 이런 사악한 방식으로 학문을 활용하여 시민을 조작하고 기만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와해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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