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거르는 새움과 이정서
작년 2월에 이정서 역의 『이방인』에 대한 포스팅을 했습니다. 어쩌다 보니, 이정서 씨가 본인이 대표인 새움 출판사에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번역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저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생각했습니다. 또 ‘기존 번역은 엉터리고, 이 책을 오독하고 있다. 내 책만이 세밀한 뉘앙스까지 번역한 진짜 번역서다.’라고 마케팅하겠구나, 싶었습니다. 역시는 역시 역시였죠.
다른 SNS에 새움의 『동물농장』 홍보 게시물이 떴습니다. 이 책의 경우, 제가 서평을 쓰기 위해 역본을 2개 비교하고, 원서도 참고했기에 어느 정도 할 얘기가 있을 거라 봤는데, 처음부터 이상한 소리를 하더군요. 책의 처음에 나오는 ‘Manor farm’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여기서 manor는 장원에 딸린 영지를 말하는데, 민음사의 도정일 역은 이를 살리지 못했다는 겁니다. 저는 도정일 역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manor에서 오웰이 의미하고자 했던 바는 이정서의 주장이 맞을 겁니다. 그러면 제가 그 게시물을 보면서 무릎을 탁!치고 ‘이런 숨은 의미가! 당장 이정서 역을 봐야지!’라고 했을까요?
정답은 ‘아니다’입니다. 제가 참고했던 김욱동 역(비채)과 김기혁 역(문학동네)에서 이미 그에 대한 정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할 것도 없는 정보입니다. 위키백과에도, 꺼무위키라 불리는 나무위키에도 나오는 정보죠. 그런데 이정서 씨와 그가 대표인 새움 출판사는 이게 엄청난 정보인 양 포장해서 마케팅합니다. ‘기존 번역은 잘못됐고, 드디어 내가 온전히 이 책을 번역했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예전 이방인 포스팅에도 말했듯, 이정서 씨는 본인만이 『이방인』을 제대로 번역했다고 하면서 자기 책에 오역이 있으면 전량 폐기하겠다고 했습니다. 한 독자가 이정서의 번역을 프랑스의 카뮈학회(Société des Études camusiennes)에 문의했고, 프랑스카뮈학회장이었던 아녜스 스피켈(Agnès Spiquel)은 이정서의 번역이 오역이며 고쳐야 한다고 지적했고, 이방인 번역을 다룬 서울대 불어교육과 김진하 교수의 논문에서는 이정서의 번역이 『이방인』을 몰이해했다고 지적했음에도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죠. 당시 이정서 씨는 노이즈 마케팅에 역풍을 맞았고, 정당하게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을 “바퀴벌레”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버릇을 남 주지 못한다는 겁니다. 저는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서 이정서가 번역한 모든 책의 책 소개를 읽었는데, 그 책에는 “하나도 빠짐없이” 기존 번역은 오역이고, 나만이 제대로 된 번역을 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나 말고는 다 의역이고, 나만이 직역이다’라면서요. 이게 말이 됩니까? 제가 『동물농장』에 관해 더 화나는 건, 이정서의 주장이 조지 오웰의 글쓰기와 정확히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오웰은 생전에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쉬운 글쓰기를 표방하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오웰을 숱한 영문학자와 번역자는 이해 못 하고 본인만 이해한다? 오웰의 근본부터를 몰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이정서의 번역서가 계속 신경 쓰여도 참고 있었던 건 그런 거였습니다. 이정서 번역 읽으면 얼마나 틀리고 인생이 바뀌기야 하겠냐, 그런 생각이었죠. 그런데 지속되는 꼬락서니를 보니 문제가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전 이슈가 된 정육각의 초신선 삼겹살 같은 거죠. 이정서와 그가 대표인 새움출판사의 마케팅이 그와 다른가요? 완벽한 번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불어 완벽한 해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심지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로 원서를 본다고 해도 완벽하게 저자의 의도를 이해할 순 없습니다.
그런데 이정서는 사소한 꼬투리 몇 개로 기존 번역은 다 잘못되었다고 하는데, 정작 본인의 해석이 오류가 많고 치명적인, 재밌는 사람이죠. 저는 이런 근거 없는 비방이 기존 번역의 정당한 가치를 폄훼하고, 출판시장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봅니다. 그리고 기존의 것은 뭔가 미심쩍다는 한국사회 특유의 심성 역시 한몫하는 것 같습니다. 가짜뉴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처럼. 그러기에 저는 이정서와 새움의 책을 믿고 거릅니다. 저는 이 번역가와 출판사의 작업물과 마케팅이 한국 출판계의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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