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재세례파 신자가 사형을 피해 도망가다가, 자신의 사형을 집행하던 교도관이 얼음물에 빠지자 그를 구하기 위해 다시 돌아온 장면이다. 결국 그 신자는 사형을 당했다. 강 밖에 선 것은 같은 교도관의 죽음을 방관하는 교도관들이다.


급진 종교개혁 : 재세례파


가. 아나뱁티즘의 역사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과 펠릭스 만츠(Felix Mantz)은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성서적이지 못하며 세속 당국과 동조했다며 그를 거짓 예언자로 단정 지었다. 구체적으로 츠빙글리는 ‘오직 성서로만(Sola scriptura)’를 외쳤지만 유아세례, 교회와 세속정부의 결탁, 기독교인의 전쟁 참가 등 성경이 허용하거나 명령하지 않는 관례를 존속시켰는데 재세례파는 여기에 불만을 가지고 시작됐다. 이들은 1523년 10월 2차 대토론 기간에 성상과 미사의 즉각 폐지를 요구하는 과격한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결국 스스로는 “참 신자(genuine believers)”“회중교회(gathered church)”라는 독립공동체를 형성했다. 대적자들은 그들을 “재세례파”라고 별명 지었고 이 명칭은 부정확하고 선입견에 의한 것이다. 츠빙글리는 초반에 이들과 격렬하게 싸웠지만 이들의 마음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그들은 국가교회를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모임에만 참가했다. 그들의 박해도 주로 이러한 불일치주의 때문이었다. 그들은 산상수훈에 근거하여 맹세와 군대 복무를 거절했다. 그들을 자신들이 츠빙글리의 성서주의를 논리적 결론으로 끌고 간 것이며 원시 기독교를 회복한 것이었다. 재세례파 운동은 초대 기독교의 복원 프로그램을 가장 철저하게 실천하려는 노력으로 결과이다. 그들은 동시대 종교개혁자들보다 훨씬 철저하게 성서를 연구해서 초대교회의 모습을 재발견하려고 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초대교회는 오직 진실한 신자들로 이루어지고 국가로부터 박해당하고 거부된 순교자들로 가득한 교회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교회란 항상 비방당하고 거부되고 짓밟혀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으로는 외적 권위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 성인신자의 세례를 옹호, 유아세례를 거부, 재산의 공동소유, 평화주의와 무저항 등이 있다. 제도권 개혁자들의 모든 후기 저서는 - 루터의 1535년 판 갈라디아서 주석, 칼뱅의 기독교 강요 등 - 로마 카톨릭에 대적하면서 동시에 재세례파와 대조하며 신앙을 설명했다.


“좋아, 내가 그리스도와 거불어 고난을 당할 필요는 없어. 그는 나를 위해 죽으셨고 자기 행위를 통해 나를 이 고난으로부터 구원하셨다. ··· (중략) ··· 오 내 형제여 이는 그리 좋은 말이 아닐세. 이 말을 그대의 귀에 들려준 것은 악마라네.” 재세례파 찬송 중


재세례파의 견해는 세상에 관한 비관주의와 교회에 대한 낙관주의에 기초한다. 세상을 언제든지 육체와 마귀와 짝하게 마련이지만 교회는 그와는 다른 길을 걷고 교제 가운데 주 예수의 삶과 죽음을 본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에 재세례파는 수도원 운동으로 복귀하고 있으며 자신의 선행으로 천국을 얻고자 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앞서 잠시 언급했던 것과 같이 재세례파(Anabaptist)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다시 세례를 주는 자”이다. 이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 사람만이 세례를 받아야한다는 주장이다. 이들을 재세례파(re-baptizers)라고 부르지만 그들은 유아세례는 세례가 아니며 “로마 교회의 목욕탕에 몸을 담그는 것”에 불과하다고 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세례파(Baptist; 침례파)라고 부른다. 재세례파를 부르는 이름은 다양한다. 재세례파는 종교개혁 좌파(롤란드 베인턴), 급진 종교개혁(조지 헌스턴 윌리엄스)으로 불리며,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 운동을 제도권 종교개혁으로 평가하며 대비시키기도 한다.


재세례파의 세계관은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이다. 메노 시몬스 같은 재세례파 사상가들은 시골에다 대안적 기독교 공동체를 세울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으며 그들은 세속의 권력이나 권위와는 어떤 관계도 맺기를 거부했고 특히 폭력 사용을 부정했다. 앞서 언급했듯 이로 인해 주류 종교개혁자들과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이들은 교회와 국가는 분리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루터는 사회가 기독교화될 수 없다는 것을 동의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지나친 악행을 억제하기 위해 관리로서 직분을 받아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재세례파는 국가는 죄인들이 다스리도록 놓아두어야 한다고 대구했다. 그들은 정치생활을 멀리하고 산상수훈의 윤리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모두가 수도사처럼 되고 말았다. 그들은 전쟁과 사형을 거부했고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폭력도 법에 호소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예수께서 맹세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직업과 일반적인 생활방식은 지극히 경건하고 거룩하며 흠잡을 데가 없다. 그들은 값비싼 의복을 입는 것을 피했고 비싼 음식과 음료를 멸시했으며 거친 천으로 만든 옷을 입었고 머리에는 팽이 넓은 펠트모자를 착용했다. 그들의 걸음걸이와 행동거지는 지극히 겸손했다. ······ 그들은 끝이 뭉툭한 빵 써는 칼 외에는 칼이든 단검이든 일절 무기를 소지하지 않았고 무기를 양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늑대의 의복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결코 맹세하려 들지 않았는데 심지어 정부가 요구할 경우에도 그러했다. 그리고 만일 이를 위반하는 사람들은 그들로부터 축출되었다.”


그들은 종교개혁의 역사 속에서 무수한 박해를 경험했다. 그들 또한 베스트팔렌(1534) 체제 이후 폭력을 사용하기도 했으며 이로 인해 큰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가끔은 몇몇 광신도들 때문에 전체가 매도당하기도 했으며 근대 이후에는 부르주아 문명, 산업주의, 제국주의, 민족주의와 거리를 두고 자신들을 보전했다. 미국의 아미쉬 공동체 같은 경우 단추 없는 외투, 챙 넓은 모자, 휘날리는 구레나룻 등으로 사회와 그들은 구분시켰다. 그들은 철도, 전화, 자동차, 영화, 신문, 연재만화 까지도 거부했다.


재세례파의 교회론


제바스티안 프랑크(1499-1543)메노 시몬스(1496-1551) 같은 급진 종교개혁의 신학자들이 보기에 사도적 교회는 국가 권력과 결속하여 완전히 더럽혀졌다. 이 결속의 시작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A.D. 313)과 큰 연관성을 가진다.


"내가 보기에, 사도들이 죽은 직후에 적그리스도의 침입과 그에 따른 황폐화로 인하여 외형적인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 모든 은사와 성례전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 성령과 진리 속에 숨겨지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1,400년 동안, 모인교회나 그 어떤 성례전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나는 확신한다." - 제바스티안 프랑크


이에 따르면 참된 교회는 하늘에 있고 이 땅 위에는 그것을 모방한 어설픈 제도들만 존재한다. 급진적 종교개혁에서는 교회를 16세기 유럽의 주류 문화 속에 있는 ‘대조사회, 대안사회’로 이해했다. 그들은 초대교회가 로마 제국 안에 존재했지만 제국의 규범을 거부한 것처럼 자신들이 16세기에 존재하지만 그 안에 속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메노 시몬스에게 교회는 “의로운 자들의 모임”이며 “섞인 몸”은 아니었다.


“사실 그의 이름을 그저 떠벌리기만 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참된 회중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참된 회중은 참으로 회개한 사람들이요,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성령의 일하심을 통해 거듭난 마음을 품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다.” - 메노 시몬스


이것은 도나투스주의 교회관과 상당히 유사하다. 도나투스주의에서는 교회는 어떤 수단이나 징계를 통해서라도 교회를 타락시키려는 영향에서 멀어져 교회의 순결과 거룩함을 지켜야한다는 입장이다. 재세례파는 “폭력은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누구나 잘 알듯이 우리에게는 창이나 총 같은 물리적 무기가 없다. 우리는 말과 행동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임을 보여주기를 원한다.” - 한스 뎅크


분리주의 : 재세례파는 ‘출교’를 통해 공동체 내부의 규율을 유지하고 이것이 참된 교회를 세우는데 필수적이라고 본다. 앞서 언급한 아미쉬 공동체과 같은 교회들은 철저한 분리주의를 고수한다. 출교는 억제와 교정효과가 있다.


출교의 이유(폴란드 라코우 교리문답)


1. 타락한 교인들을 치유해 다시 교회에 속하게 하기 위해

2. 다른 사람들이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

3. 교회에서 혼돈과 무질서를 제거하기 위해

4. 교회 밖에서 주의 말씀이 조롱 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5. 주의 영광이 더럽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


출교의 한계 : 출교는 목회적 의도에도 불구하고 너무 가혹하게 해석되어 결과적으로 교인들이 출교당한 사람이나 그 가족과 완전히 사회적 접촉을 끊어 버리는(일종의 따돌림) 결과를 낳을 때가 많다.


*메노나이트(Monnonites) : 이 그룹의 기원은 여러 재세례파 집단 가운데 특히 스위스 형제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재세례파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인이며, 그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참된 구성원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은 국가 행정관이 아니라 성서와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직접 인도하신다고 주장했다. 1536년 네덜란드 사제 메노 시몬스가 북유럽에 흩어진 재세례파들을 모아 교회를 구성했고 그래서 메노나이트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들은 교회를 건물이 아니라 신자의 모임이라고 생각하여 성전이나 성소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도 하지 않으며, 모든 신자를 성직자로 이해한다. 목회자의 선택을 회중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재세례파의 순교 : 재세례파는 츠빙글리의 영향을 받은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과 펠릭스 만츠(Felix Mantz) 같은 신학자들로 인해 시작되었다. 이들은 유아세례에 반대하고 정교분리, 평화주의, 제자도, 그림과 성상의 제거 등을 주장했고 이것은 카톨릭과 개신교 주류 모두에게 이단으로 규정되어 심한 박해를 받았다. 만츠는 몸이 묶여 언 강에 던져졌다. 만츠는 개신교인들에 의해 순교당한 최초의 비카톨릭 신자이다. 1529년 슈파이어 제국회의는 재세례를 주거나 받는 사람 모두는 절차없이 사형할 수 있다는 칙령을 승인하고 수년 사이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순교했다.


가. 아나뱁티즘의 윤리관

*이 부분은 전환기의 한국교회의 내용을 요약한 것.


아나뱁티스트적 대안주의 기독교 : 철저 제자도와 대조사회


“두왕국적 적응주의처럼 교회가 세상질서와 구조에 적응하여 동화되거나, 변혁을 강조하는 기독교 세계관처럼 악마적 세상 전체를 변혁할 수 있다는 승리주의 사고나, 톨레랑스 기독교처럼 다원주의 사회 안에서 복음의 유일성을 포기하고 백기투항하지 말고, 세상질서와 구조와 전적으로 다른 대조사회로서 교회됨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복음의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창조세계 전체를 뒤덮을 수 있다는 낙관적인 승리의 확신이 아니라 죄로 왜곡된 악마적 창조질서에 대항하는 대조와 대항공동체의 수립이 중요하다.”


아나뱁티즘은 소박하지만 진정한 공동체, 행복종교가 아닌 급진 제자도를 대안으로 삼는다. 아나뱁티즘은 복음하의 사명을 입술의 복음전파에서 찾지 않고(복음전도 우선주의), 세상 전체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구현하는 데서 찾지 않고(기독교 세계관), 사회변혁의 실천에서 찾지 않고(해방신학), 교회가 교회됨, 본래성을 회복하는 데서 해답을 찾는다. 그들은 예수 윤리, 희년, 십자가, 급진 제자도, 대안공동체 등을 키워드로 한다.


아나뱁티즘은 복음의 사회적 실천과 교회의 전적으로 구별된 존재방식에서 대안을 찾는 존 하워드 요더외에 총체적 복음주의 로널드 사이더의 경제윤리, 서저너스 공동체 창설자 짐 월리스, 대조사회적 교회개념을 제시한 게르하르트 로핑크, 희년을 비롯한 구약의 사회-경제적 프로그램을 하나님 세계형성의 프로젝트로 규정한 노베르트 로핑크, 교회를 대항구조·대항권력으로 제시하는 인도의 복음주의 사회행동가 비샬 망갈와디를 포함하는 큰 맥락의 대안이다.


1. 실패한 두 가지 기독교 패러다임


1) 교회주의적 기독교 : 교회주의적 기독교는 복음이 실현될 자리를 세상이 아니라 교회당 안에 가두어 버린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세상을 향한 부르심, 세속적 소명을 담지 못한다.


2) 세계관적 기독교 : 교회주의 기독교를 넘어서게 한 것이 기독교 세계관이다. 이것은 성속이원론을 허물고 세상 속에서 일상의 삶이 갖는 신앙의 의미를 갖게 했다. 기독교 세계관은 이원론에 갇힌 기독교인을 세상으로 내밀기는 했지만, 세상구조와 질서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기독교 세계관은 창조를 강조하며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세계라고 이야기했다. 기독교 세계관은 일반은총을 강조하는데 이것이 과도해져서 창조신학이 구속신학보다 높아지면 자연신학이 된다. 자연상태가 구속되어야 할 긴박성이 약화되고, 현존하는 질서가 모두 정당화될 가능성이 있다.


2. 교회론적 대안모델 : 교회가 대안이다.


1) 교회가 사회의 대안이다 : 아나뱁티스트는 사회 속의 교회의 대응방식을 세상이 아니라 교회에서 찾는다. 기독교 세계관이 문제를 관점에서 찾으려 했고 해방신학은 실천에서 찾으려 했다면 아나뱁티즘은 교회에서 해답을 찾는다. 따라서 교회는 ‘교회의 교회됨’을 나타내야하고, 세상과 다른 이질성과 독특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들은 사회 전체를 교회화하는 크리스텐돔(Christendom)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구별된 교회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1.1) 이스라엘과 예수 공동체 하나님의 세계형성의 대안 : 교회는 세상이라는 옛 질서로부터 구별된 새로운 하나님의 사회이다. 따라서 교회는 현존하는 질서를 거부하고 저항하며 살아야 한다. 교회는 예수의 삶과 죽음에서 보여준 행위방식을 순종하는 철저한 제자도, 급진적 제자도의 원리에 따라 세상에 가시적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 최상의 대안이다.


2) 대조사회(contrast society, kontrastgesellschaft)로서 교회 : 교회는 곧 사회이다. 교회는 교회 자체로 성경적 가치에 따라 대안적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성육신의 연장이며, 그리스도적 구조가 현실화되는 곳이다.


2.1) 대조와 대비의 교회로서의 대조사회 : 지배구조 폐기와 폭력포기로서 대조사회 로핑크의 대조사회론은 세상과는 구별되고 대비된 삶의 방식의 의미이다. 예수 제자공동체에서는 먼저 지배구조가 폐기되어야 한다. 산 위의 도시, 세상의 빛과 소금 교회는 세상질서와의 대조성, 이질성을 말이 아닌 존재방식으로 보여줘야 한다. 로핑크의 대조사회론 교회는 대조사회로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 대항사회(gegengesellschaft)로서 교회 교회는 독특한 존재만으로도 현존하는 사회구조의 비판인 동시에 공격이다. 로핑크의 대조사회가 구별됨과 대비만 강조한다면 대항사회는 교회의 대조성이 기존의 사회질서에 대립하고 대척점을 함축하는 개념이다. 대안적 대조사회 교회는 경제적 관계에서 희년과 같이 대도적인 경제적 코이노니아를 보여줘야 한다. 대항문화공동체로서 교회 교회가 현존하는 사회구조에 저항하는 특징을 표현한 개념이다. 


대안사회의 전략 : 대립 대조 대항


3. 대안주의의 사회윤리


1) 기독교 현실주의가 아닌 성경적 현실주의 : 기독교 현실주의는 일차적으로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을 위한 원리만을 제시하는 것이지, 실제적인 지침까지 제공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기독교 현실주의는 죄악된 세상에서 사랑을 실천하려고 하기 때문에 현실 역사속에서 죄를 짓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성경적 현실주의는 성경이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을 위한 근본적인 원리이자 실제적인 지침이 된다는 입장이다. 말씀대로 철저하게 살아가면 세상 속에서 죄를 짓고 사는 것이 아닌 새로운 대안으로서의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2) 콘스탄틴주의와의 결별 교회와 국가의 분리 : 창조-타락-구속을 기본으로 하는 기독교세계관은 타락의 심각성을 인정하면서도 창조를 중요시한다. 그래서 이원론을 극복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만 타락이나 구속에 대한 강조가 빈약하다. 근본주의, 금욕주의, 초대교회의 이원론적 세계관은 세상을 죄악시하여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콘스탄틴 이후 교회와 국가는 종합되었으며 중세카톨릭 이후 루터는 두왕국론을 통해 교회와 국가는 서로 역설적이며 공존한다는 틀을 제시했고, 칼빈과 개혁파는 그리스도 왕적 통치론에 근거하여 교회와 세상만물을 통치하시는 그리스도 보편통치를 주장했다. 이에 반해 아나뱁티즘은 교회와 세상의 종합이나 역설적 공존, 포괄적 통치가 아니라 세상과 교회의 철저한 반정립 틀을 제시한다. 세상은 교회와 공존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세상 전체에서 왕적 통치란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현실은 이미 세상 전체에서 보편적으로 승리 된 현실이 아니라 오직 구속받은 공동체 안에서 온전히 드러날 뿐이며, 세상은 교회와 전혀 다른 존재이다.


3) 죄스러움의 실체로서 세상 :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에 반하는 사회적 실상이며, 사회질서 및 제도를 말한다.


4. 비판적 고찰


교회가 새로운 질서로 관심을 끌고 세상이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은 순진한 낙관주의이다. 교회가 가진 도덕적 사회적 능력이 세상보다 탁월하기만 할까? 사회를 변화시키는 방법은 왜 불가능할까? 대조사회가 또 다른 게토화는 아닌가?


참고문헌

김동춘. 2012. 『전환기의 한국교회』. 대장간.

롤런드 베인턴. 홍치모·이훈영 역. 2001. 『종교개혁사』. 크리스천다이제스트.

배덕만. 2015. 『교회사의 숲』. 대장간.

알리스터 맥그래스. 김기철 역. 2014. 『신학이란 무엇인가』. 복있는사람.

윌리스턴 워커. 송인설 역. 2000. 『기독교회사』. 크리스천다이제스트.


2017년 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