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부르디외

“지금까지 저는 숱한 공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엄격한 의미에서 반박의 대상이 된 적은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서글픈 감정이 들기도 합니다. 많은 이유가 있는데요, 그중 하나는 프랑스 지식 장 안에 저의 수많은 적이 있지만, 진정한 맞수가 없다는 사실에서 나옵니다. 호적수, 맞수란 저를 반박하기 위해서 그에 필요한 [과학적] 작업을 하는 사람입니다. … 다만 저를 반박하려는 사람이라면 아침 일찍 이른 시간에 일어나서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조금 오만하게 들릴지 몰라도, 어쨌거나 사실은 사실입니다.”

피에르 부르디외, 『사회학자와 역사학자』 34p.

“부르디외의 사회학은 지배계급의 반감을 샀다. 그는 온갖 객관적 자료를 동원한 사회학적 연구를 통해 지배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특권을 누리고 거드름을 피우며 즐기는 고상한 예술과 고결한 철학이라는 것이 사실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폭로했기 때문이다.”

정수복, 『응답하는 사회학』 200p.

부르디외의 “적은 있지만, 맞수는 없다”는 말이 종종 회자되고, 또 몇 분이 이유를 묻기도 하셔서 글을 조금 남겨본다. 예전에도 쓴 적이 있는데, 지워서 다시 올려본다.

내가 본 부르디외는 언제나 학적인 치열함으로 귀결되곤 했다. 그는 한국보다도 파리중심주의가 심한 프랑스에서 인구 500명이 안 되고 표준 프랑스어가 아닌 지역 방언을 사용하는 ‘깡촌’에서 자랐다. 시골의 수재였던 부르디외는 프랑스의 귀족이 모이는 명문 루이르그랑 고교와 최고 엘리트 학교인 그랑제콜에 입학한다. ‘촌놈’이었던 부르디외는 귀족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차별과 폭력을 받았고, 그는 사회에서 경험한 ‘사진’(장면)을 객관화하는 것이 바로 사회학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부르디외는 반골 중 반골이었다. 프랑스는 사회학보다는 철학과 문학의 나라인데, 부르디외는 당시 관념적 학문을 하는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 반감을 느끼고 가스통 바슐라르, 조르주 깡길렘으로 대표되는 과학철학을 공부하며 관념, 추상, 사유가 아닌 경험과학에 관심을 쏟기 시작한다.

청년 부르디외는 알제리전쟁에 징집되면서 그랑제콜 출신이 갈 수 있는 장교 교육대에 가길 거부한다. 그리고 보통 그랑제콜 출신은 프랑스 후방에 배치되었지만 그는 장교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며 알제리의 독립을 지지하고 징벌적으로 알제리 현지에 배치된다. 부르디외는 프랑스 5공화국 사회학자 중 유일하게 알제리 전쟁을 겪은 사회학자였다.

알제리 전쟁터에서 그는 프랑스의 식민지배가 알제리에 미친 부정적 영향을 폭로하는 『알제리 사회학』을 출판했고 이는 미국에 번역되기도 한다. 프랑스의 지식인들이 책상에 앉아 좌파신문에 성명을 내며 알제리 독립을 외칠 때, 부르디외는 현장에서 알제리를 경험적으로 연구하며 알제리의 독립을 촉구하는 작업을 했던 것이다. 지식인이 책상에서 노동자를 논할 때 그는 빈민촌에서 현장연구를 했다. 그는 항상 그렇게 작업했다.

지식인 사회에 대한 부르디외의 비판은 꾸준히 진행되었다. 노동자계급과 부르주아계급 출신의 학생이 받는 교육의 차이를 보여주는 『상속자들』, 교육을 통한 계급재생산을 다루는 『재생산』, 교양이라는 우아한 이름으로 벌어지는 폭력을 폭로하는 『구별짓기』, 프랑스 고등교육 체계의 이면에 존재하는 엘리트주의를 다루는 『국가 귀족』 등이 대표적이다.

자신이 속했던 지식인 사회의 위선을 끊임없이 폭로하고, 그것을 경험적 자료를 통해 끊임없이 객관화했던 그의 작업이 지식인의 눈에 좋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부르디외는 파리의 ‘상속자들’, ‘국가 귀족’과는 다르게 지식인 사회에 무혈입성할 수 없었다. 1981년 그가 그랑제콜의 교수로 임용된 후 그는 세계적 지식인으로 발돋움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치열한 사람이었다.

1999년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참여의 맥락에서 방한한 부르디외는 70의 나이에 한국 사회학자들에게 “나는 아직도 새벽 6시에 일어나 작업하니 당신들도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자 김대중 대통령과의 만남을 거부하고, 권력자를 뒤로한 채 한국의 시민사회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언제나 시위의 가장 앞 대열에 선 사회학자였고, 죽을 때까지 원고를 놓지 않았다.

“적은 있지만, 맞수는 없다”는 말은 그의 과학적이고 철저한 작업이 아니꼬운 파리 지식인 사회의 공허하고 관념적이며 추상적인 비판을 두고 하는 말이지, 재수없음이 아니다. 그는 사회학계의 유노윤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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