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모스(Nomos)와 일뤼지오(Illusio)*
자의성(arbitraire)은 모든 장(champ)들, 예술적 혹은 과학적인 것들과 같은 가장 순수한 장들의 원칙에도 자리 잡고 있다. 이 장들 각각은 ‘자신의 근본적인 법’, 자신의 노모스(노모스는 보통 ‘법’으로 번역되고 있으나, 자의적인 제정 행위를 상기시키는 ‘구성(constitution)’으로 번역하거나 어원과 보다 가까운 ‘시각 및 구분의 원리’로 번역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를 가지고 있다.1) 파스칼의 말대로 “법은 법이고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이 법에 대해 말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법은 예외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경우 동어 반복을 통해서만 진술된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고 나뉠 수 없는 그것은, 다른 장의 법과 이 다른 장이 강제하는 진리의 제도(régime)에 결부될 수 없다. 이런 점은 특히 예술의 장에서 가시적이다. 예술의 장이 내세우는 노모스는, 19세기 후반에 주장된 바,(‘예술을 위한 예술’)대로 본다면 경제의 장이 내세우는 노모스(‘장사에는 인정사정 없다’)의 반전(inversion)이다. 바슐라르2)가 주목하고 있는 바와 같이 ‘법률적 정신’과 ‘과학적 정신’ 사이에도 동일한 양립 불가능성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모든 어림셈(approximation)을 거부하는 것, 소송의 원천인 모호함을 없애기 위한 의지는 법률가에게 한 평의 땅의 값을 정확하게 평가하도록 이끄는데, 이것은 학자의 눈에는 터무니없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이 말하는 것은 하나의 장을 형성하는 관점이 일단 받아들여지게 되면, 이 장에 대해 다른 외부의 관점을 채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노모스는 결코 그런 식으로 위치될 수 없기에 반박될 수 없고, 안티테제도 가질 수 없는 테제이다. 사고할 수 있는 것과 사고할 수 없는 것, 규정된 것과 금지된 것은 규정하는 구분의 정당한 원리로서 그것은 존재의 모든 근본적 측면에 적용될 수 있으며 이것은 사유되지 않은 채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모든 타당한 문제들의 모태로서 그것을 문제로 요구하는 문제들을 생산할 수 없다.
그리하여 각각의 장은 파스칼의 범주처럼 자신의 고유한 내기물(내기에 건 돈, enjeux)들 속에 행위자들을 가둔다. 이 내기물들은 다른 관점, 다시 말해 다른 게임의 관점에서 보면 눈에 띄지 않거나 적어도 무의미하며, 심지어 헛되다. “위대함이 드러내는 모든 광채는 정신의 탐구 속에 있는 자들에게는 빛이 없다. 재치 있는 사람들의 위대함은 왕·부자·장군 등 육체적으로 위대한 그 모든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지혜의 위대함은 ···중략··· 관능적인 자들과 재치 있는 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종류가 다른 세 범주이다.”3) 파스칼의 명제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각각의 장들에 의해 제안된 내기물들과 이윤들이 어디에서 지각되고 끌어당기는 것을 멈추는지 관찰하면 충분하다. (이것이 장들의 경계를 시험하는 방법들 가운데 하나이다.) 예를 들어 고위 공무원의 직업적 야망은 연구직 종사자를 무심하게 만들 수 있고, 예술가의 무모한 투자나 ‘1면’을 차지하기 위한 기자들의 투쟁은 은행가들이 보기에는(예술가들과 작가들이 부르주아 아버지와 일으키는 갈등은 성인 연구의 단순한 주제topos가 아니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없이, 아마 장 외부에 무관한 모든 사람들에게, 다시 말해 아주 흔히 피상적인 관찰자들이 보기에 그것은 대체적으로 여전히 의미를 알 수 없는(inintelligible) 것이다.
*해당 글은 국역된 부르디외의 『파스칼적 명상』Méditation Pascaliennes, 김웅권 역, 동문선, 2001, 141-143p.를 기준으로 영역된 『Pascalian Meditations』, tran. Richard Nice, Stanford, 2000과 비교하고, 몇몇 개념어는 원서인 『Méditation Pascaliennes』, Seuil, 1997과 비교해서 본문을 수정해본 원고이다.
1) 나는 향후의 연구에서 장 이론을 보다 체계화적으로 설명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당장, 독자들은 나의 책 『예술의 규칙』Les Règles de l'art : genèse et structure du champ littéraire, Paris: Éditions du Seuil. 특히 254-259p.를 참고하길 바란다.
2) 가스통 바슐라르(G. Bachelard), 『새로운 과학정신』Le Nouvel Esprit scientifique (Paris: Librairie Felix Aican, 1934).
3) 파스칼(Pascal), 『팡세』Pensees, 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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