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에 대한 생각

최근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Apocalypse Never>이 번역되었다. 책이 나왔을 때부터 책의 목차를 살피고 출판사의 소개를 읽었다. 어떤 새로운 내용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후변화가 과장된 위협이라는 논의는 아마 기후변화라는 문제를 제기한 순간부터 이어졌을 것이고, 이 책 역시 그런 맥락에 있는 책이다. 이 책이 위치한 맥락과 이 책을 둘러싼 반응을 보고 글을 몇자 적는다.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은 출간된 이후 이 주제를 다루는 책 중에는 잘 팔리고 있는 것 같다. 출판사에서는 긴급 중쇄를 했다고 하고, 교보문고를 비롯한 인터넷 서점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교보에서는 정치/사회 분야 1위라고 한다. 이 책이 갑자기 각광 받는 이유가 여럿일 텐데, 첫째로는 ‘한국에 이런 담론이 제대로 수입되지 않아서’라고 생각한다. 기후변화를 극우적이거나 음모론적으로 비난하는 이른바 ‘트럼프식 담론’도 아닌, 환경운동가가 환경운동 담론을 비판하고,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한다는 게 이 책의 매력 포인트일 거다. 하지만 해외에서는 이런 담론은 이미 클리셰 중 하나가 된 것 같다.

두 번째로 눈에 띄는 것은 이 책을 정당화의 무기로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SNS에 이 책을 링크한 사람의 글을 읽으면 많은 사람이 내가 원하던 내용을 담은 책이 나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여기에서 세속적 부를 추구하라는 종교 서적이 베스트셀러였던 상황이 겹쳐 보인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은 이 책을 접할 때, ‘환경운동의 종말론적 담론, 극단적 메시지는 정확한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이 책을 기다리던 사람이 이 책을 읽는 이유는 그저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기 위한 무기인 것이다. ‘기후위기는 과장됐대, 새로 책 나온 거 보니까 그렇더라, 우리 그냥 이대로 살면 돼.’하며 귀찮음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정치/경제적 맥락 안에 존재한다. 이 책을 포함한 이런 부류의 책은 기업, 보수언론의 지지를 받는데, 이는 이 책에서 선언하는 메시지가 그들에게 친화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담론과 미국 기업/보수 정치의 연관성 역시 존재한다.

이 책에 대한 비판적 논평을 두 편 읽었다. 하나는 Peter H. Gleick이라는 학자의 비판인데*, 그는 태평양 연구소 명예 소장, 미국 국립 과학원 회원, 맥아더 펠로우 등을 역임했다. 이 사람의 논평은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에서 셸런버거가 가진 문제를 전반적으로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리고 가디언에 실린 Bob Ward의 논평은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과 비슷한 맥락의 <False Alarm>이라는 책을 함께 논평하는데**, Bob ward는 런던정경대학 기후변화환경연구소 소속이다. 이 기사에서는 셸런버거의 주장 중 타당한 부분을 일부 인정하지만, 내용을 비판하고, 전반적인 자료가 체리피킹 되었음을 지적한다.

셸런버거가 주장하는 내용이 일견 타당하다고도 생각한다. 환경을 위한 효율적인 길을 찾아야 한다. 단, 체리피킹은 안 되고. 또 어디든 극단주의자는 있기 마련이고, 그들의 과격한 주장에는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특히 한국의 경우 환경 근본주의자가 정책 입안에서 권력을 행사하거나, 환경 근본주의 정당이 유의미한 지지를 얻고 있는가? 당연히 아니다. 쉐도우 복싱, 허수아비 논증도 안 된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이 책에 전부 동의하게 되더라도, 한국에서 극소수의 환경 종말론자/근본주의자의 해악보다는 무관심한 절대다수의 해악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책은 그 절대다수에게 용기를 불어넣는다.

이런 문제는 왜 발생하는가? 환경 문제가 고도로 전문화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원전에 대한 제대로 된 지식은 소수의 전문인만 판단할 수 있다. 나 같은 사람은 눈 뜨고 코 베일 수 있다. 원전에 관해 하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민/관 차원에서 시민과학을 증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한다.

 

6월 18일 기준으로 이 책을 읽었다. 책을 안 읽고 글 쓰는 문제를 가지고 시비를 따지는 분들이 많으셔서 굳이 읽었다. 이에 관해 얘기해 보자.

 

내가 처음 이 글을 쓴 목적은 책보다는 책을 둘러싼 지형에 관해 이야기 하고 싶어서, 그런 이유였다. 그렇기 때문에 책보다는 책을 둘러싼 이야기를 사실에 기반해 글을 썼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책을 읽지 않았어도 문제는 되지 않는다.

 

두번째로는 이 책의 내용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 전문가의 비평을 인용했다. 한 사람은 태평양 연구소 명예 소장, 미국 국립 과학원 회원, 맥아더 펠로우 등을 역임한 피터 글릭이라는 학자고, 한 사람은 런던정경대학 기후변화환경연구소 소속의 밥 워드다. 나는 이들이 전문성을 가지고 공개적으로 게재한 비평을 신뢰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용을 인용해서 비판하는 부분, 그리고 출판사의 책 소개와 연관해서 책 내용의 간접적 비판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런 식으로 글을 써서 문제가 되는 경우는 내가 인용한 전문가의 인용과 비판 내용이 틀렸을 때 유효하다. 내가 인용한 리뷰가 책에 없는 내용을 인용해 비판했다면 진실성이 없으니 문제일 것이나, 나는 이 전문가와 그의 글을 신뢰한다. 만약에 밑에 첨부한 이들의 평가에 오류가 있다면 이 글을 수정할 것이다. 하지만 이를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뭐, 읽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끝으로 굳이 책을 읽었으니 하나만 지적하자. 책에서는 기후변화의 티핑포인트인 평균 기온 4도 상승을 문제 삼으면서, 기온 상승은 2~3도에 머물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이게 다분히 문제 있는 주장인 것은 평균의 함정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기후변화에 대한 데이터를 보면, 1도 상승은 단순한 1도 상승이 아니다. 기후변화가 발생하면서 극단값이 상승하고 있다. 그러니까 기온은 단순히 1도가 오를지 모르지만 혹한기가 더 추워지고, 혹서기는 더욱 더워지면서 기온은 서서히 상승한다. 더불어서 지구적 차원에서 봤을 때 이런 기후변화에 취약한 것은 한국 같은 중위도 지역의 사람이 아니라 극지방에 사는 사람들이다. 저자는 원주민은 정말 위한다고 하면서 이런 부분은 슬쩍 빼버린다. 스스로 환경전문가라고 자처한다면 이 정도는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아주 평범한 소시민인데도 알고 있는 사실인데 말이다.

 

이 책에 관한 독서를 마무리 하고도 결론은 뒤바뀌지 않는다. 저자의 주장에는 물론 유효한 지점이 존재한다. 극단적, 종말론적 환경주의자의 주장에는 문제점이 존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게 비효율적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리고 한국의 상황에서는 더더욱 종말론적 환경주의자보다 기후변화에 무관심한 대다수의 해악이 크다고 본다. 특히 이 책을 보면서 기후변화는 과장되었으니 앞으로 변화가 필요 없겠다는 냉소적 시각이 더 위험하다고 본다.

*Book review: Bad science and bad arguments abound in ‘Apocalypse Never’ by Michael Shellenberger

**False Alarm by Bjorn Lomborg; Apocalypse Never by Michael Shellenberger –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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