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멸감

모멸 권하는 사회와 해법에 관하여


1. 모멸감 요약


모멸감(侮蔑感)이란 무엇일까? 모멸이란 단어는 낯설지 않지만 딱히 익숙하지 않은 단어이기도 하다. 보통의 사람들은 모멸에 대해 막연한 느낌은 받지만 뜻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생각한다. 같은 이름의 ‘모멸감’이라는 책에서 저자인 사회학자 김찬호는 모멸감이란 감정의 사회성과 파괴적 속성에 대해 논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책을 내놓는다. 모멸감이란 모멸스러운 느낌을 뜻하고 모멸이란 업신여기고 얕잡아 본다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일종의 무시·굴욕·모욕을 당할 때 느끼는 감정이라고 한다. 책에서 저자는 사회학자답게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모멸감이라는 감정을 개인의 심리상태에만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감정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소통되는지 그 감정이 생성된 사회문화적 배경과 역사적 맥락을 파악하는 데 노력한다. 특히 한국은 정동적(情動的) 요소가 많은 나라로서 사회에서의 감정의 위상을 강조하기도 한다. 책에서는 모멸감에 대한 연구는 전무하다고 밝힌다. 책에서의 내용으로는 모멸감은 우리사회에서 꽤나 큰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이지만 연구가 전무하다는 것이 참 아쉬웠다. 책은 우선 감정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특히 도미니크 오미시의 감정의 지정학을 예로 들며 이슬람권의 굴욕감이라는 코드는 세계적인 공격성의 발로가 되었다. 이는 상당히 흥미로운 분석이었다. 저자의 말대로 이슬람권은 항상 유럽보다 강한 국가였다. 하지만 근대화 이후 앞서가는 서양에 굴복감을 느끼는 이슬람권의 굴욕감에 대한 논거는 흥미롭다. 다음 장에서는 한국사회의 정서적 지형을 전체적으로 바라본다. 한국사회에서의 감정의 특수성과 문화로 모멸을 풀어나가고 요점은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위신을 확인하려는 문화관성은 있는데 오히려 공동체는 붕괴되며 위태로운 상태에 있는 한국인의 정서지도를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에서는 인간세계의 7가지 방식의 모멸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비하, 차별, 조롱, 무시, 침해, 동정, 오해로 우리사회에 공공연하게 일어나는, 밀접한 사례들을 들어 이를 제시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인간적인 사회’라는 대안을 제시한다. 인간적 사회의 조건들은 품위와 타인에 대한 감수성, 생리·환경적 조건, 개인 간의 유대관계, 시장가치를 넘어선 가치관, 안정의 공동체 등이다. 또 저자는 모멸에 대한 내성을 키울 것은 강조한다. 이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노력이다. 모멸에 대한 내성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를 생각해보길 권한다. 또한 내면이 강해져야 궁극적으로 진정한 자존감의 회복이 일어난다고 보고 있다. 감정에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감정을 운용할 것을 당부한다. 끝으로 맺음말에서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것은 무엇인가, 모멸감에 취약한 까닭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명예와 품위에 대해서 의미를 다시 다져보고 스스로 돌아보고 사회적 안정망을 확충할 수 있는 사회로의 전환과 깊은 내면의 성숙을 가진 개인으로의 전환을 촉구하며 책을 마친다.


2. 한국 정서의 역사적 구성과 모멸감


책에서 작가는 한국의 정서적 상황에서 모멸이란 특수성을 지적한다. 모멸이라는 단어가 다른 문화권 언어에는 생소하다는 점이 주목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언어는 그 사회를 대변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사회는 모멸감에 취약하다. 나는 그 민감한 이유가 체면을 중시하는 사회적인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나는 그 원인을 한국 사회의 정체성과 가장 밀접한 연관이 있는 문화인 유교에서 파생된 성리학 문화에서 찾고 있다. 성리학은 대한민국은 전신인 조선의 500년 통치 사상이었다. 지금은 성리학적 질서가 많이 와해됐다고 한다. 하지만 당장 자본주의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가치인 화폐만 봐도 성리학자만 2명이다. 유교적 관념으로 현모양처인 신사임당도 5만원권의 주인공이다. 모멸감의 저자는 가끔 모멸의 해법으로 유교적 내용을 인용하여 유교적 가치를 제고한다. 하지만 나는 입장이 조금 다르다. 유교는 타종교들에 비해 두드러지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유교 자체의 엘리트주의이고 그것은 큰 폐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유인자(惟仁者) 능호인(能好人), 능오인(能惡人)’이라는 말을 한다. 풀이 하자면 오직 인자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고 또한 미워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유교사상을 풀어나가는 데에 있어 인(仁)의 개념은 중요한 것이다. 공자는 인자, 즉 일정 수준 이상의 사람만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설파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은 불성(佛性 즉 부처의 성품)을 지닌 존재’라고 하며 평등을 외쳤던 불교의 창시자 고타마 싯다르타나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했던 예수의 아가페적 주장과는 상반된 입장에 있다. 유교는 도덕적 타락이 심한 대상을 윤리의 고려범주로 삼지 않는다. 일정 수준 이상의 사람만 사람으로 취급한다. 이것은 유교의 엘리티즘적 특징이다. 이러한 유교의 일련의 수직적 윤리 구조는 성리학으로 수용·심화되며 이기론(理氣論)으로 확장된다. 이기론은 모든 사물의 원리인 리(理)는 같지만 타고난 기질인 기(氣)의 탁함에 따라 물질에 따라 동물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구별 짓기를 불러왔다. 당시 조선사회는 이기론을 사상적 기반으로 양반은 맑은 기질을 상인은 탁한 기질을 타고 태어나 생득적으로 양반이 우월한 존재라는 하나의 헤게모니로 이용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리학과 조선시대 전기와 후기로 갈리는 임진왜란 때의 조선의 사회문화의 변화의 관계이다. 이는 양반들의 정체성 혼란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사회는 성문화(成文化)된 양천제의 사회였다. 양반과 중인 양민을 모두 포함한 개념의 양인과 천민의 구분만이 있을 뿐이지 후기보다는 양반의 권력집중이 낮았다. 하지만 문제는 임진왜란이었다.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은 약 200년간의 황금기를 누린 세대였다. 큰 사회적 문제가 없었다는 뜻이다. 임진왜란은 한국역사에 큰 전쟁으로 조선의 사회상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특히 사회가 피폐해졌고 그 증거로는 언어생활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조선시대 전기만 해도 한글에는 거센소리나 된소리가 없었다. 이런 언어현상이 나타난 것들은 임진왜란 이후에 일이다. 거센소리나 된소리가 들어가지 않은 욕설은 많지 않다. 그리고 당시 절대적인 지배의 상징이었던 왕은 궁을 떠나 의주로 떠났고 지역사회에서 명망 높던 양반들 또한 자기 목숨을 챙기기에 바빴다. 임진왜란으로 통치의 권위를 인정받던 왕과 양반세력들은 권위를 잃었다. 따라서 책에서 언급한 근대 이후 세계사의 주도권을 빼앗긴 이슬람의 굴욕의 코드라든가 마뉴엘 카스텔이 정체성 권력에서 말한 알 카에다 엘리트들의 정체성의 위기가 폭력으로 촉발하는 일들이 조선사에도 일어난다. 조선 후기 17세기 조선의 사회에서 신분제는 동요하기 시작했고 마을공동체의 중심이 되던 양반은 몰락하여 잔반이 되기도 하는 등 큰 변화들이 일어난다. 이러한 경향에 반동적으로 조선 후기는 성리학의 절대화 경향이 일어난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의 명분론이 절대화 되고 성리학을 만든 주자의 해석외의 해석을 하면 사문난적으로 몰려 극단적인 경우 처형을 당하기도 한다. 과부에게 재가를 금지하고 부계중심의 가족제도와 장자에게 상속권을 주는 등의 가부장적 제도의 연원은 사실 조선 초기부터 이루어진 전통이 아닌 조선후기 일어난 양반층의 몰락에 대한 지배세력의 반동이었다. 불교국가였던 고려는 재혼은 물론 여자가 상속을 받았고 이런 경향은 조선 초에도 이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민족적 질서가 깨진 것은 앞서 다룬 것과 같이 사회의 혼란으로 인한 지배계층의 정체성의 위협으로 지배계층은 경직되고 수직적인 사회사상을 생산해냈다. 이런 성리학의 교조화는 ‘체면’을 중시하는 사회의 문화적 기반이 되기 충분했다. 이런 사상의 흐름으로 후기 조선은 크게는 중국과 사대주의 외교를 했고 명분론을 앞세우다 병자호란 때는 삼전도에서 왕이 치욕을 당하기도 한다. 작게 보아서는 사회에서 내면의 도덕성으로 양반으로 칭송 받는 것이 아니라 돈을 주고 신분을 사는 문화가 만연했다고 한다. 이런 까닭들로 인하여 우리나라는 수직적인 문화가 자리를 잡고 자연히 체면을 중시하는 사회가 되었다. 다양성을 추구하기보다는 획일성에 중점을 두었다. 문제는 이런 체면중심의 사회는 실수와 타인의 시선에 관용적이지 못했다. 책에서 저자는 사학자나 사회과학자들이 신분제의 와해가 크게 이루어진 때는 6·25 전쟁이라고 한다. 아쉬운 것은 다른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는 신분적 질서를 타파하는 데 사회구성원의 성찰과 참여가 부족했다. 책의 예시처럼 비교적 현대에 와서도 신분제의 변화를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례로 이어졌고 나름 와해되기 했지만 지금도 자신이 속한 가문의 시조나 본적을 모르는 가문은 없으며 ‘족보’ 없는 집안이 없는 사회로 이어지고 있다. 아직도 예의가 없는 사람들을 기성세대들은 ‘족보 없는 놈’이나 ‘못 배운 놈’이라고 욕한다. 주목할 점은 보통 기성세대가 말하는 예의도 유교적 질서에 가깝고 못 배운 놈이 배우지 못한 지식도 유교적 교육에 가까운 것들이다.


3. 현대의 사회양상과 모멸감


그렇다면 지금을 사는 우리사회의 모멸의 모습은 어떨까? 스무 살이 된 어느 날 아버지께서 나에게 해주신 말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고 잊어야 행복하다.”라는 말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직업여건 상 아버지와 자주 만나지 못하는 현실에서 아버지께서 굳이 아들에게 하신 말씀이 ‘잊어라’라는 것이 참으로 의아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어릴 적 우리 동네에서 일어났던 살인 사건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이야기의 대강은 이렇다. 어렸을 때 A와 B는 동급생이었고 A가 B를 괴롭혔다고 한다. 나중에 성인이 되어 두 사람은 다시 만났는데 A는 B를 여전히 무시했고 B는 그것을 참지 못해 살인을 했다고 한다. 모멸감이라는 책은 읽기 시작하고 아버지가 그때 해주신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사실 주고받는 말 몇 마디와 비언어적 표현 몇 가지로 한 사람은 생명을 잃었고 한 사람은 살인자가 되었으며 그 두 사람이 속한 가족공동체는 복구하기 힘든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헝그리 사회에서 앵그리 사회가 되었다는 작가의 말이 절실히 느껴지는 사례이다. 이러한 부정적 감정은 한국사회의 변화들 앞에 더욱 증폭될 가능성이 있다. 지금 50대 이상의 세대들은 농업사회에서 태어나 산업사회에 젊음을 살고 정보화시대에 중년이나 노년을 맞이한 세대들이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본인의 정체성을 지키기는 꽤나 힘들었을 것이다. 사회사상도 유교의 완고한 가치 속에서 유년을 보내고 자유주의와 민주화 속에 청년을 보내고 이제는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여생을 보낸다. 한국은 이 세대들의 황혼 자살률이 가장 높은 국가이다. 박완서의 ‘황혼’이라는 소설을 보면 전통적 가치를 지난 시어머니와 현대적 가치를 지난 며느리의 갈등양상을 나타내는 소설이다. 소설 속에서 정(情)이 그리웠던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명치를 쓰다듬어 달라고 한다. 이에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성적(性的) 욕구가 비정상적으로 표출된다고 생각하여 시어머니를 병원에 보낸다. 결국 작품 속 늙은 여자는 자신의 삶이 무가치함을 느끼며 작품이 마무리된다. 현대에 있어 기성세대들은 자신의 신념과 급변하며 하루가 다르게 다른 모습으로 변해가는 사회에서 박탈감을 느낄 것이다. 이제 고작 20대 중반인 나도 종종 ‘나 때는 안 그랬는데’라는 말을 한다. 기성세대들은 얼마나 큰 부조화를 느낄지 생각해본다. 그리고 경제체제의 변화도 기성세대의 부조화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미래학자로 불리는 앨빈 토플러는 정보화시대의 혁명이 일어나면, 유산계급인 브루주아가 경제의 기득권을 얻었다면 정보화 사회에서는 유식계급인 코그니타리아트(Cognitariat)가 경제적 기득권을 장악할 것을 예고했다. 경제체제의 변화 특히 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농업사회에서 정보화 사회까지의 변화를 겪은 베이비부머 세대들은 이런 사회변동에 적응을 못하여 소외되기도 한다. 이러한 소외는 무시·굴욕 등의 감정과 뒤섞이어 파괴적 감정으로 나타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이에 반해 기성세대에 비해 나름 현대적 가치관 속에 사는 젊은 세대들은 보통 경제적인 상황에서 불안을 느끼고 이것이 삶에 여러 부분과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자본주의 사회이다. 일찍이 사회학자 칼 맑스는 물화(物化)라는 개념을 사회에 내놓은 적이 있다. 물화란 자본주의의 생산과 소비 같은 개념들이 인간의 영역에도 침범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사는 사회구성원들은 책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전자기기의 사양을 의미했던 'Specification'이라는 단어는 흔히 스펙이라고 불리며 사람사용설명서가 되었다. 인간의 삶이 수치화되어 평가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수단이 되는 사회에서 사람은 존엄성을 잃기 쉽다. 존엄성의 부재는 모욕이나 무시로 이어지기 쉽고 이것이 모멸감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의 일이다. 우리는 평가가 만연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인기 있는 프로그램들은 사람들의 재능에 점수를 부여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은 공영방송 모두 편성되어있다. 그리고 가깝게는 진리의 상아탑인 대학교도 평가와 순위로 학문을 평가받는다. 학생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에 와서까지 언제나 평가의 대상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서로를 너무나 쉽게 평가하고 쉽게 판단한다. “인격을 수단으로 삼지 말고 목적으로 삼으라.”라고 했던 도덕주의자 칸트가 현대사회를 본다면 개탄할 일이 아닌가 싶다. 나는 충대신문 대덕울림에 ‘당신의 인생 제 점수는요’라는 글을 게재한 적 있다. ‘우리사회는 거대한 오디션 프로그램이 되었고 삶을 점수로 평가받는다. 학력은 음역이 되고 학점은 음색이 되며 토익은 외모가 된다.’라고 말했다. 책에서는 소중한 것들은 돈으로 살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는 재능을. 나아가 인격을 평가받으며 살고 있고 규격화된 평가 앞에서 개개인의 삶의 영역을 침범을 당한다. 또한 경제체제의 직접적 영향으로 불안정 노동 상황이 있다. 현재 신자유주의 체제의 경제체제에서 고용은 늘 불안하다. 특히 불안정한(precarious)과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합성어인 프레카리아트는 불안정 노동계층을 말한다. 인간이 최소한의 삶을 살기위해 필요한 경제적 토대들의 불안함은 개인의 감정을 풍전등화로 만들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이런 경제 상황은 개인의 삶을 비참하게 하기 좋다. 아르바이트생들의 고충은 커뮤니티 사이트의 단골 글감이다. 그런 경향이 얼마나 심하면 엔젤리너스라는 프랜차이즈 커피점에서는 손님이 아르바이트생의 이름을 부르며 존댓말로 주문을 하면 할인을 해주는 일까지 있을까? 재미있는 것은 자신이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도 쉽게 경제적 여건 때문에 일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조선시대에는 혈통과 지식으로 계급사회를 이루었다면 현대의 우리는 학벌과 경제력으로 계급사회 아닌 계급사회를 만들어 살고 있다. 책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한국에서 잘산다는 것의 의미는 행복하게 즐겁게 사는 것이 아니라 부유한 삶을 말한다는 것이 애석하다. 책에서 나오는 브랜드 재킷을 가리키는 시가 절적한 예인 것 같다. 나를 나의 인격으로 평가받기 보다는 나의 겉치레로 평가받길 원하고 다국적 브랜드나 기업들의 제품이 한국에만 오면 비싸게 판매된다는 이야기는 더 이상 가설이 아니라 일반론에 가까운 사회현상이 되었다. 그리고 모멸감에 대한 연구도 전무하고 품위에 대한 논의도 없는 것은 부정적 상황을 악화하는 데에 한 몫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는 대개 타의적으로 이루어졌다.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독립도, 민주주의도, 한국전쟁도 모두 우리사회는 우리가 주체가 아닌 외세로부터 변화를 받아들였다. 이성과 지식에 대한 논의는 많이 이루어지지만 기초교육과정에서 감정과 심리에 대해 다루는 과목은 희소하거나 거의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인간의 심리에서 타자로 활동하는 감정의 작용들에 대한 무지는 우리가 감정의 주인이 아니라 감정의 노예로 이끌려 다니는 데에 큰 역할을 한다. 책의 인디언의 말처럼 내가 먹이를 주면 자라나는 감정이라는 늑대에게 먹이 주는 법을 몰라 늑대에게 삶을 잠식당한다.


4. 모멸주지 않고 모멸 느끼지 못하는 유토피아는 가능한가?


나는 그래도 해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모멸감의 저자 김찬호는 모멸사회에 대해 사회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의 해법을 제시한다. 사회적 해법의 주요 내용은 제도적 차원에서 경제적 안정성을 보장하고 불평등을 개선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또한 문화적으로 다원주의를 중심으로 사회적 가치관을 다시 확립할 것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개인적 차원에서는 내면의 힘을 키우는 방법을 제시한다. 나는 이런 대안들의 현실가능성에 대해 숙고하고 개인적 차원에서 내가 먼저 바꾸어 나갈 수 있는 현실에 대해 생각해봤다. 우선 제도적인 측면에서 경제적 안정성 보장은 사실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현 정부의 경제부총리인 최경환은 비정규직 근무연수를 늘리겠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물론 사회적으로 불안 노동에 대한 논의들이 이루어지고 있어 정규직의 임금 인상을 없애고 일자리를 늘린다거나 정규직 채용을 전제로 비정규직을 채용한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하지만 가까운 예로 충남대학교 병원은 국립병원임에도 불구하고 올해부터 무기한 계약직으로 간호사를 채용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개개인들은 고용의 안정과 불평등의 타파를 이야기하고 논의해야 한다. 당장은 실현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포기해서는 안 되고 지속적으로 조금 더 개선될 사회를 위해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문화적 차원의 변화는 인식변화에 중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원주의 문화모델에는 용광로(Melting Pot) 모델과 샐러드 그릇(Salad Bowl) 모델이 있다. 한국 사회는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나라이기 때문에 보통 모든 가치규범이 하나의 사회규범에 녹아드는 용광로 모델을 지향한다. 그렇지만 현재는 우리 사회는 다문화가정이 사회의 주요한, 다수의 현상이 되고 한국은 유례없는 다민족사회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모두가 전체의 가치를 하나로 획일화하는 용광로 모델보다는 부분적 동일성과 다양성을 전제로 하는 샐러드 접시 모델로 변화해야 한다. 가까운 나는 교회의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 중인데 우리 초등부에 1학년의 다문화가정 아이가 왔다. 어머니가 몽골인이라고 한다. 몽골민족과 한민족의 외형적 차이는 크게 없으나 그 아이는 아이들이 뱀파이어 같다고 아이들이 꺼려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이들이 괴롭히는 것은 아니지만 기피한다는 것에 마음이 아팠다. 아이들에게 다양성에 대해 어떻게 가르칠지 고민이 된다. 적어도 다양성에 대한 관용을 지닌 사회라면 사회 곳곳에 산재하는 이러한 갈등이나 소외가 덜어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또한 이 사회를 변화시킬 정말 의미 있는 것은 개인의 변화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개인적 차원의 의미 있는 변화들이 때로는 사회의 거시적 변화를 가지고 온다고 생각한다. 특히 내면적인 힘을 키우고 주변에 있는 타인들에게 이런 삶을 나누며 주변인을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의사인 박경철이 쓴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1’에서 그 적절한 예를 찾을 수 있다. 그녀의 미니스커트라는 제목의 글인데 당시 병원에 있던 저자는 응급환자가 생겨 진료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때에 온 환자는 20대 후반의 여성이었고 교통사고를 심하게 당하여 다리를 절단해야 될 상황이었다고 한다. 간신히 죽음의 고비를 넘긴 여자는 사실 27세에 외국계 은행에서 근무하는 직장인이고 능력을 인정받아 다음 달이면 해외로 MBA 과정을 수료하기 위해 유학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한다. 탄탄대로였던 그녀의 삶에 다리절단과 복부의 30cm의 흉터, 옆구리에 끼워진 4개의 호스는 그녀의 삶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고 한동안 그녀는 비관에 잠겨 살았다고 한다. 정신질환을 앓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신과적 치료와 약혼자의 정성어린 노력으로 그녀의 상태는 좋아졌고 퇴원을 한다. 그래도 마음 한 켠의 어둠까지는 걷히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도 약혼자는 사고를 당한 그녀와의 결혼을 택하고, 그녀는 수술 담당의사에게 청첩장을 전하러 병원에 왔는데 그때 그녀는 ‘미니스커트’를 입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저자는 이렇게 서술한다. ‘아름다운 자태가 돋보이는 고운 왼쪽다리는 스커트 아래에서 길게 뻗어 땅을 디디고 있었지만, 사라진 오른쪽 다리는 당연히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사라진 오른쪽 다리가 다시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착각이 될 정도로 눈부신 아름다움을 느꼈다.’ 이 이야기는 일상생활에 적용 될 수 없는 극적인 이야기를 다루어 현실성이 없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충분히 내면의 변화와 타인으로서 한 사람을 위하는 모습이 모범적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인 그녀는 비극적 상황을 희망과 자신감으로 전환시켰다. 모멸감에서 다루었던 많은 사례들과는 전혀 다른 대안을 내세웠다. 그녀가 그녀의 삶에 가장 큰 상처일 수 있는 절단된 오른쪽 다리를 오히려 미니스커트를 입음으로써 그녀 내적 성숙의 자신감으로 변모시킨다. 또한 약혼자 또한 외모와 경제여건 등 삶의 외형적인 토대가 하루아침에 바뀐 그녀의 곁을 지킨다. 이것은 그 약혼자가 그녀의 외형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녀를 인격적으로 정서적으로 사랑했다는 방증이라고 생각한다. 대중적 심리학 서적이 된 ‘미움 받을 용기’라는 책은 트라우마란 허상이며 타인의 기대에 젖어 사는 것이 아니라 행복해질 용기, 평범해질 용기, 그리고 미움 받을 용기를 가지고 살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모멸감이라는 책에서 말하는 대안은 사실 막연하고 뜬구름 잡는 소리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있듯 개인 삶의 내면적 변화와 안전한 관계성,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믿을 수 있는 공동체 조성이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삶의 큰 변화를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이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는 것은 물론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영역들로부터 모멸 없는 사회로의 작은 실천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2015.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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