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넨베르크 조직신학 1

2장 하나님 개념과 그 진리성의 질문 - 5.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자연적인” 앎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로마서 1장 19-20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로마서 2장 14-15절


1. 하나님은 창조로부터 모든 인간에게 알려져 있다. 이것은 자연신학의 진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한 하나님의 계시의 빛으로부터 수립되 인간에 대한 주장이다. (cf. 스토아적 우주신학과 자연법이론)


2. “타고난 하나님 인식” 하나님에 대한 앎이 선천적으로 인간의 영혼에게 주어져 있다는 생각은 테르툴리아누스 이래로 서방 그리스도교 신학에 잘 알려져 있다. 아벨라르두스 이후 타고난 양심에는 자연법을 통해 종교의 토대는 물론 하나님에 대한 앎도 보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3. 루터 역시 로마서 강의에서 창조로부터 알려져 있는 하나님에 대한 보편적인 앎에 관한 사도적 본문을 하나님의 법이 인간의 ‘마음속에 쓰여져’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을 말하는 본문(롬 2:15)과 연결시켰다. (+멜란히톤, 키케로)


첫 번째로 우리의 주목을 끄는 주제는 키케로의 ‘자연법’ 사상이다. 신의 섭리를 강조한 스토아 철학에 영향을 받은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키케로는 자연법을 철학적 사유를 넘어 제도적 표현으로까지 설명하려던 최초의 정치사상가다. 무엇보다 인간의 재능으로 고안할 수 없는 자연 이성이 부여한 신과 인간의 법(lex divina et humana)이 존재하고, 이 법은 인간의 올바른 이성(recta ratio)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으며, 이런 자연법에 기초한 도덕 원칙은 정치사회적 경계를 넘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주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을 도덕적으로 평등한 인격체로 인정하고, 다수의 의견이나 사회적 관습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자연법이 정의가 기초해야 할 근거라는 견해는 지금도 널리 수용되기 때문이다. - 정치철학, 곽준혁


4. 하나님에 대한 ‘습득된 앎’보다 ‘타고난 앎’에 대한 강조는 루터나 초기 멜란히톤에게서 나타나는 불신 곧 원죄에 “빠져 현혹된” 이성에 대한 불신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루터는 우상숭배가 이성이 타고난 앎(마음속에 기록되어 지워질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앎)으로부터 잘못 작용하여 다른 것과 혼동하며 일어나는 것이라고 보았다.


멜란히톤 : 루터와 함께 독일의 종교개혁을 이끌고 루터 사후에도 열심히 활동함. 12살에 하이델베르크 대학 입학, 21살 비텐베르크대학에 그리스어교수로 임용되면서 95개조 반박문을 쓰고 1년 뒤인 루터와 인연을 맺게 됨. 1521년 보름스 칙령이 내려지고, 소르본느 대학에서 루터를 이단으로 규정하자 멜란히톤은 ‘파리의 멍청한 신학자들의 광포한 칙령을 논박함’이라는 글을 쓰면서 루터를 옹호하고 소르본느의 신학자들은 비판했다. 멜란히톤은 루터종교개혁의 브레인 역할을 하며 개신교 최초의 조직신학서이며 루터교 최고의 신학서적이라고 평가받는 신학총론을 집필한다. 루터는 “이 작은 책은 반발할 여지가 없는 불멸의 고전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루터는 에라스무스와의 자유의지 논쟁에서도 루터는 이 책을 가지고 논쟁에 임했다. 루터가 카를 5세의 제국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자 멜란히톤은 루터대신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제출하기도 한다. 멜란히톤은 삼위일체 같은 본질을 수호하되, 비본질에는 자유를 이야기하자고 했지만 이를 통해 수정주의자로 낙인찍힌 그는 루터파에서 축출된다. 루터가 선두에 서면 멜란히톤은 길을 닦고 사상을 정초했다. - 배덕만


5. 루터와 멜란히톤의 구(舊)프로테스탄트 교의학은 타고난 앎과 하나님에 대한 실제적인 앎(습득된 앎)을 연결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요한 무제우스 이후로 타고난 앎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에 관한 앎에 대한 성향이나 자연적 본능뿐이지 실제적인 앎은 아니라는 견해가 나왔고, 실제적인 앎은 유한한 사물들과 제일 존재자이신 하나님 사이의 구분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세계 경험의 맥락에서 획득된다는 것이다. 이후 인간이 하나님을 보편적으로 알 수 있다는 교리의 무게중심은 타고난 앎에서 습득된 앎으로 이동한다.


스토아학파 : 자연학을 또한 인간 행위의 합리성이 대자연의 합리성에 근거한다는 저에서 윤리적인 목적을 띠기도 한다. 자연학적 관점에서 볼 때 스토아주의의 선택의 근간에 있는 자신과의 정합성을 이루려는 의지는 물질적 실재 가운데서 일종의 근본적인 법칙처럼 나타난다. 이 법칙은 모든 존재들과 존재들 전체에 내재한다. 생명체는 실존의 첫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과 조화를 이룬다. 생명체는 자신을 보전하고 그 자신의 실존을 사랑하고자 한다. 그러나 세계 그 자체도 하나의 살아있는 존재로서 자신과 화합하며 정합성을 이루고자 한다. 체계적이고 유기적인 단일체 내에서와 마찬가지로 세계 내에서도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들과 관계를 이루고 있고 모든 것이 모든 것 안에 있으며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을 필요로 한다. -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 피에르 아도


스토아학파는 덕은 이성에 따라서, 즉 로고스에 따라서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로고스는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했다시피 우주의 핵심 원리이다. 스토아학파는 이 원리를 신, 신성한 불 혹은 운명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로고스에 스스로를 개방할 수 있고, 이로써 그들의 영혼은 조화를 이루고 우주와 일치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영혼은 일정하게 우주를 지배하는 질서와 조화를 반영한다. 가장 중요한 통찰은 모든 것이 현명한 질서하에 있으며 일어나는 일들에 개입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안다는 점을 깨닫는 것일 것이다. 모든 것은 로고스, 즉 신에 의해 인도된다. ··· 스토아학파의 법사상의 출발점은 모든 개인에게 현존하는 보편적 이성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이성의 다른 표현인 “신성한 불”의 불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스토아학파는 이 보편적 이성으로부터 자연법을 도출해냈다. 키케로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이 공통의 본성인 보편적 이성이 법의 원천이다. 서양철학사, 군나르 시르베크·닐스 길리에


6. 종교개혁 신학에 대해 제기된 실제적인 문제는 오늘날도 양심의 현상에 관여하지 않고서는 적절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게르하르트 에벨링은 양심 개념에 대한 중요한 논문을 통해 양심의 경험에서 발생하는 하나님, 세계, 인간에 대한 중요한 논문을 통해 양심의 경험에서 발생하는 하나님, 세계, 인간의 상관성을 강조했다. 여기서의 양심은 타고난 양심이다. (cf. 스토아학파의 양심 이해)


7. 양심은 감정의 삶으로부터 양심과 삶 전체 사이의 비주제적인(unthematisch) 관계가 생성된다. 비주제적 관계란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지 않고 서로 포괄된 관계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초기에 개체적으로 생성될 때, 엄마의 몸에서 경험하는 “공생적 영역”, 즉 무자아적 정착을 볼 수 있다. 이렇듯 하나님·세계·자아가 아직 구별되지 않았던 초기의 차원들의 분리는 경험의 산물이며 양심의 경험은 이와 같은 자기 관계가 최초로 주제화 되는 형식이다. 이렇게 서술된 주제는 신학과 철학의 전통 속에서 타고난 앎의 의미로 하나님에 대한 자연적인 앎을 주장했던 진술과 관련된다.


8. 루터는 자연적인 앎에 타고난 양심 속에서 믿음과 어떻게 관계되는지 질문한다. 루터에게 믿음은 신앙적 지성으로서 참된 하나님 인식의 형식이었다. (타고난 양식 속에서 인식되는 하나님에 대한 앎과 믿음은 동일하지 않음) 루터의 믿음은 보다 넓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일례로 루터는 “오직 마음의 신뢰와 신앙만이 하나님과 우상을 만든다.”라고 이야기했다. 마음의 신뢰와 신앙이 하나님이든, 우상이든 의지하게 한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전제는 인간은 모든 경우에 자신의 신뢰를 어떤 것에 고정해야 하며, 자신의 마음을 거기에 두고 의지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삶의 탈중심적 형식’도 포함된다. 인간은 무조건 자신의 밖에 놓인 무엇인가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


9. 신뢰는 자아와 세계의 차이에 대한 최소한의 퇴화된 의식을 전제하고, 이것보다 선재하는 것은 개체가 공생적 삶의 관계성 속에 놓이는 것이다. 공생적 삶의 관계성은 개체가 자신에게 도달하여 자신의 곁에서 자기 자신을 의식하게 됨에 따라 그와 동시에 자신의 현존재를 무규정적으로 능가하면서 그의 의식 안에서 존재하게 된다. 인지적 발달과 차별화의 과정과 함께 비로소 신뢰할 수 있는 대상들이 구분될 수 있으며, 그것들 사이의 선택 역시 가능하게 된다.


10. 그럼에도 인간은 시초부터 자신을 능가하는 비밀 속에 세워져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범접할 수 없이 침묵하는 현실의 무한성이 비밀로서 지속적으로 다가오는” 방식으로 비밀 안에 있다. 이 비밀은 개인이 지닌 삶의 역사에서 최초로 관계를 맺는 인물과 마주하면서 구체화된다. 엄마와의 관계를 예로 들 수 있으며, 엄마는 아이로 하여금 깊은 신뢰 속에서 세계 전체로, 삶으로 창조자·보존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해준다. 이 과정이 “비주제화 된 하나님의 앎”과 관계된다.


11. 이런 과정을 ‘모든 경험에 우선하는’ 분명한 하나님 의식이라는 의미의 종교적 선험(a priori)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칸트 - 트뢸치 - 오토) 태고적 의식은 “전적 타자”나 “거룩한 것”에 대한 의식이 아니다. 영원한 것, 거룩한 것들은 경험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성찰에 속하는 사유가 핵심이다.


12. 인간의 원초적 상태에 속하는 앎, 하나님에 대한 “주제화 되지 않는 앎”은 비주제적이기에 자기 자신 안에서 이미 하나님에 관한 앎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적 활동성의 형식이다. 현실에서 인간은 언제나 이미 자신의 실존적 “질문”에 대한 잠정적인 “대답들”로부터 살아간다. 경험을 통해 자아와 세계가 구분되면서 질문이 시작된다.


13. 태고적 의식은 어떻게 하나님에 관한 앎으로 지칭될 수 있는가? 하나님은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출 6:3)” 이 말씀처럼 인간들이 인식하지 못하였어도 태초부터 모든 개인에게 현재하시고, 모두에게 알려져 있다.


14. 롬 1:20, 바울에 의하면 “세계의 창조 이래로” 하나님은 “그가 지으신 만물을 통하여” 알려져 계신다. 이것은 타고난 앎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습득된 앎, 즉 세계의 경험과 결합되어 있고 그 경험을 통해 획득되는 앎에 관계된다.


규정되지 않은 절대자에 대한 직관은 세계 경험과정 속에서 유한한 사물들과 구분된다(예를 들면 유한한 시간 속에서 무한함을 사유). 이 같은 세계 경험과정에서 창조의 작품들을 통해 신성의 활동과 본질의 의식에 도달한다. 철학적 자연신학은 “세계의 창조 시” 이미 존재했던 선험적인 개념이 아니며 오히려 인류의 역사 속에서 항상 다양한 방식으로 명시적인 하나님 의식이 먼저 형성되었다. 이 의식이 창조의 작품들의 경험과 결합되면서 철학적 자연신학이 등장한다. 따라서 창조의 작품(타고난 양심)들을 통한 하나님 인식에 대한 바울의 진술과 종교들 사이의 관계는 미리 우상숭배로 판단되어서는 안 된다. 그 중에는 분명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에 도달한 것도 있고, 불멸의 하나님을 피조된 사물들과 맞바꾸려는 인식도 있을 것이다.


핵심 : 타고난 앎, 비주제적인 관계, 습득된 앎


윤철호 교수의 인간의 본격적인 서평에 들어가기 앞서, 신학 책을 사랑하는 독자로서 느끼는 두 가지 문제의식을 공유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로는 한국에 한정했을 때, 그동안 한국에 출판된 책들 중에 인간을 주제로 다룬 신학서적이 다른 주제를 다룬 신학서적에 비해 현저하게 적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기독교 신학에서 다룰 인간이라는 주제는 다른 신학의 주제들인 신, 그리스도, 성령과 같은 주제에 비해 현대과학과 문명의 발달, 분과학문의 발달로 인해 가히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조직신학에는 다양한 주제들이 존재한다. 전통적으로 다루어지는 주제들에는 보통 신론과 인간론 또는 인죄론, 그리스도론, 성령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의 내용이 존재한다. 이렇게 다양한 주제들 가운데서도 어쩌면 가장 외면당한 주제는 이 책 윤철호 교수의 인간이 다루는 인간론 또는 인죄론이라고 불리는 주제일 것이다. 한국의 상황에 한정했을 때, 신론, 그리스도론, 성령론, 교회론 등의 조직신학 주제들을 다루는 책들은 이미 다양한 신학적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서적들, 여러 양질의 번역서들, 한국학자들에 의해 쓰인 학술적 서적들이 존재한다. 그에 반해 인간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이해를 다룬 책들은 다른 조직신학 주제들에 비해 너무 적다. 또 다루는 책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부 “-주의를 표방하는 일부 신학적 입장을 대변할 뿐이라, 풍성한 논의를 얻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근대 이후의 과학의 발전과 분과학문의 발달로 인해 고전적인 학문들은 혁명적인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 신학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다양한 주제들 중에서도 아마 인간에 관한 이해가 가장 혁명적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과학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으며 이러한 충격은 신학뿐만 아니라 근대 이후의 학문인 사회과학 같은 분과학문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생물학에서는 이미 유전자를 통해 인간 개인의 행위를 설명하고 진화의 메커니즘을 통해 인간의 집단행위에 대한 설명도 시도하고 있다. 이것은 사회과학의 역할까지 과학이 담당하게 될 수 있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또 사회과학 내에서도 반() 과학이라는 평가를 받고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에 한 발씩 걸치고 있는 심리학의 인간 이해 또한 괄목할 발전을 이루어왔다. 이러한 과학과 분과학문들의 혁명적 발전으로 인한 도전에 성서 텍스트에서 이해를 시작하는 신학의 인간 이해는 어떤 응전을 펼칠 수 있을까?

 

이런 문제의식에 답할 수 있는 기독교적 응답, 또는 응전이 윤철호 교수의 인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책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 중인 윤철호 교수의 저작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를 전방위적으로 풀어나간다. 이 책은 종적으로나 횡적으로나 굉장히 포괄적인 서술을 특징으로 한다. 이 책은 우선 현대와 최신의 인간에 대한 논의뿐 아니라 성서와 기독교의 전통에서 나타난 고전적인 인간 이해를 1부에서 충실히 다룬다는 의미에서 종적으로 포괄적이고, 다음으로 이 책은 신학적 스펙트럼에 있어서 다양한 전통들을 다루고 있으며, 동시에 학제적 연구에 있어서도 다양한 분과학문을 다루어 논의를 진전시킨다는 의미에서 횡적으로 포괄적이다. 앞선 문장에 대해 조금 더 상술하자면, 이 책은 고전 신학의 관점을 다룰 때도 희랍철학에 있어서의 인간론을 배제하지 않으며 동시에 책의 2부인 현대신학의 인간론을 다룰 때도 칼 바르트, 판넨베르크, 폴 틸리히와 같은 대가들과 함께 기독교 윤리가로 분류할 수 있는 라인홀드 니버나 비교적 현대의 학자들인 스탠리 그렌츠와 개혁주의 전통의 마이클 호튼도 다루고 있다. 더불어서 이 책은 3부 학제적 관점에서 진화론·생물학·신경과학·심리학·생태학에서부터 정신분석학은 물론이고 불교의 인간 이해까지 다루는 방대함을 보여준다. 이 책은 신학적으로 학제적으로나 편협하지 않으며 광범한 주제를 다룬다.

 

4부에서는 오늘날의 기독교 인간론의 초점들이라는 주제를 통해 최신 논의들을 이끌어 나간다. 이 부분에서는 특별히 세 가지의 오늘날에 대한 초점이 나타나는데, 이는 신학적 오늘이며 사회적 오늘이며 과학적 오늘이다. 먼저 저자는 페리코레시스적 관계성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주제로 삼위일체, 기독론과 대상관계 이론을 통해 인간의 본질이 페리코레시스, 공감적 사랑, 공감적 이해에 있음을 제시한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신학적 개념 자원과 과학의 결과를 통해 논지를 강화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더불어 이런 주장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당위적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어서 저자는 생태학적 기독교 인간론에 대한 조직신학적 고찰을 통해 이원론적 인간론을 극복하고 만유재신론을 통해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비전에 동참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낸다. 이것이 저자의 신학적 오늘에 대한 응답이다. 저자의 사회적 오늘은 차별과 평등이란 제목의 16장에서 가장 부각된다. 저자는 전세계적으로 일어나는 각종 혐오, 배제, 그리고 차별의 사건들을 다루며 이런 사회문제를 신학적 인간론이 돌파할 수 있음을 설득한다. 저자의 사회에 대한 관심은 이 장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책의 여러 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어서 저자는 과학적 오늘을 다룬다. 신학자인 저자는 포스트 휴머니즘과 기독교 신앙이라는 장에서 포스트 휴머니즘과 인공지능 시대의 기독교 신앙에 대해 서술하며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고, 수호해내는 주장을 이어간다.

 

특별히 내가 주의 깊게 보았던 부분은 현대신학에서의 인간 이해이다. 나는 신학이 아닌 다른 영역에 있기 때문에 학제적 연구보다도 기독교 신학에서의 인간 이해에 관심이 갔다. 특별히 책에서 다루는 현대신학자들 중에서도 칼 바르트와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의 인간론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우선 20세기 신학의 교부라 일컬어지는 칼 바르트의 인간론은 교의학적·관계론적 인간론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칼 바르트 인간론의 핵심은 하나님 말씀으로부터의 인간론이다. 바르트는 특유의 신학적 입장과 같이 인간의 실재에 관심을 가지고 진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교의학적 인간론 밖에 없다는 주장을 하며, 인간론을 삼위일체론에 근거해서 설명하고 기독론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재구성한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 이성 내지는 영혼이라는 고전 신학의 실체론적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과의 관계성으로 정의한 데에 있어 신학적 진보를 가지고 왔다. 바르트는 의외로 철학적 인간론에 대해는 반대했지만 인간의 개별적 속성에 대해 연구하는 다양한 분과학문의 결과를 존중해야 한다고도 주장했지만 실질적으로 다른 분과학문과의 대화를 이루내지는 못한다.

 

반면 또 다른 20세기의 거장인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는 칼 바르트와 대비되는 관점에서 인간론을 전개해나간다. 판넨베르크의 방법론은 전체적으로 변증적·교의학적 인간론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판넨베르크는 기독교의 교의학적 전제로부터 인간론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기초신학적”(fundamental-theological) 인간론을 전개한다. 그는 학제적 관점에서 생물학·심리학·문화인류학·사회학 등의 다양한 분과학문들이 다루는 인간 실존의 현상에 직접적인 관심을 기울인다. 또한 그는 이 학문들이 일구어낸 학문적 성과들에서 종교와 신학의 함의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오직 계시로만 인간론을 말할 수 있다던 바르트와 달리 판넨베르크는 과학적 연구와 계시된 말씀에 기초하여 신학적 인간 이해 사이의 연결점을 찾으려 부단히 노력한다. 판넨베르크의 인간론은 세속학문과 연결점을 찾는다는 측면에서 타협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는 오히려 기독교 인간론의 고립성을 극복하고 일반학문과 대화하면 세속적 비판에 변증하기 위한 작업이다.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의 형상을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종교성에 초점을 맞춰 해석한다. 판넨베르크는 특별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연결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바르트의 견해를 비판한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 창조의 의도와 함께 인간에게 존재론적으로 내재되었다고 파악한다. 판넨베르크는 고유의 인간론을 전개하는데, 그중에서도 인간의 운명과 종말론적 완성이 독특하게 느껴진다. 판넨베르크에게 인간의 본질은 곧 종말론적 운명이며 동시에 역사이다. 일간 운명적 본성의 목표는 하나님 형상의 구현,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인간이 역사라는 판넨베르크의 의견은 인간이 세계 개방성을 가진 존재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그에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완성된 형태로 소유하고 있지 않다. 인간은 역사적 과정을 거쳐 종말론적 미래에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에 열린 존재로서 운명의 성취를 향한 과정 속에 존재하는 역사적 존재이다. 판넨베르트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인간의 운명이 선취적으로 실현되었음을 주장한다. 그는 개인의 종말을 개인적 구원의 차원에서만 설명하지 않는다. 판넨베르크에게 인간의 운명과 종말이란 여러 종말론적 주제들이 통합되어 하나님의 영원한 삶에 참여되는 것을 의미하며, 인간 사회와 인류의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는 사건이다. 그는 하나님이 통치하실 때에, 비로소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불의가 종식되고 인류의 사회적 운명이 성취된다고 본다.

 

윤철호 교수의 인간은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두 가지 문제의식을 해결할만한 훌륭한 책이다. 또한 저자의 능력과 출판사의 편집 능력도 탁월한 것 같다. 일단 저자는 굉장히 난해하고 어려울 수 있는 신학적 내용들을 저자는 이해하기 쉽고, 평이한 문장으로 표현해낸다.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저자는 가끔씩 어떠한 학자나 관점의 의견에 개입해서 본인의 판단을 서술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칼 바르트는 삼위일체의 확고한 기반 위에서 인간론을 세우려고 했다는 문장 뒤에 삼위일체 신학은 다양한 양태와 논쟁을 가지고 있음을 기억하라는 논평을 덧붙인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의 판단을 독자에게 맡기는 것을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존재하기도 한다. 또한 책 외적으로 이와 비교할만한 국내 학자의 인간론 저술이 많지 않은 것이 아쉽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서술과 방향성에 대해 동의하지만 이 책을 계기로 더욱 풍성하고 수준 있는 논의들이 진척되었으면 좋겠다.

 

유물론 철학자인 포이어바흐는 그의 저서 기독교의 본질에서 인간은 기독교의 신이고 인간학은 기독교 신학의 비밀이다.”라는 이야기를 했다. 이것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지만 헤겔 전통의 관념적인 신 개념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이라는 기치를 걸어두고 교계가 각종 행사로 종교개혁에 대한 재조명으로 시끄럽다. 그런데 이 책 인간500년 전의 종교개혁의 관념과 아이디어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도 이 땅을 밟고 살아가는 인간들에 대한 적극적인 이해를 담고 있는 책이다.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신학적 논의도 필요하겠지만 이 책과 함께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에 대해 고민해보는 것은 어떨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공감적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한 희망의 빛을 밝혀야 한다.” 윤철호 인간, 60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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