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면재번역된 루만의 <사회적 체계들>

<사회적 체계들>이 출간된 다음 해, 루만은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껏 제가 집필한 모든 것은 이론 생산의 0-시리즈였습니다. 최근에 출간된 사회적 체계들을 제외하고요.

 

Was ich bisher geschrieben habe, ist alles noch Null-Serie der Theorieproduktion

— mit Ausnahme vielleicht des zuletzt erschienenen Buches “Soziale Systeme”(AuW: 142).


 

사상사가 오카모토 유이치로는 사회학의 패러다임이 “프랑스의 뒤르켐이냐, 독일의 베버냐”에서 “프랑스의 부르디외냐, 독일의 루만이냐”로 옮겨갔다고 평가한다. 생소하지만, 니클라스 루만은 사회학의 연구 대상으로서 ‘사회적 체계’를 제시함으로써 자신만의 독자적인 학문 세계를 구축한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사회학자이다. 빌레펠트 대학에 임용될 때 그는 “연구대상: 사회이론, 연구 기간: 30년, 비용: 없음”이라는 내용의 연구계획서를 제출하는데, 그는 평생 15,000쪽에 달하는 70권 이상의 저서와 450편 이상의 학술 논문을 남겼고, 이 <사회적 체계들>은 이 방대한 학술세계에서도 중핵에 해당하는 저작이다.

 

루만이 독일에서 일반 문법이 될 정도로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는데도 명성이 부족한 이유는 그가 사회를 비판하는 사회학이 아니라, 사회를 기술하는 사회학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루만은 프랑크푸르트 학파 2세대의 대표주자이자, 근대를 미완의 기획이라고 규정한 계몽의 적자 하버마스와의 논쟁을 통해 이름을 알린다. 하버마스는 진보·이성·계몽·비판의 전통으로 수놓아진 독일의 철학적 전통 위에서 루만의 이론을 ‘사회공학’이라고 규정하며 질 수 없는 싸움을 시작하는데, 루만은 이에 담담히 자신의 이론을 설명할 뿐이며, 이는 루만의 승리로 마무리된다.

 

이론적 명제를 정치적 명제로 치환하지 않고자 했던 그는 학자로서 사회적 체계 개념을 통해 서구 철학·이론 전통의 고색창연한 가정을 가장 급진적으로 전복시킨다. 그는 스펜서-브라운의 형식논리학, 폰 푀르스터의 급진적 구성주의, 마투라나의 인지생물학, 후설의 현상학, 파슨스의 사회적 체계, 사이버네틱스, 그리고 무엇보다도 베버의 사회학을 통해 독창적 사회학을 구축한다. ‘체계’가 주는 경직적 이미지와는 다르게, 루만은 체계에 이미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도 부르는) 포스트 구조주의에서 중요한 ‘차이’에 대한 개념을 68 이전에 선취한다.

 

행정 관료로 활동하던 루만은 지금껏 사회 현실을 설명했던 방식이 잘못되었으며, 구유럽적인 방식이라는 판단과 함께 복잡성이 갈수록 증대하고 있는 현대사회를 설명한 개념 도구로 ‘체계’를 창안한다. 체계란 환경(정의되지 않은 모든 것)의 복잡성이 감축되어 창발하는 것으로 환경과의 차이·구별을 통해 나타난다. 루만의 사회적 체계는 인간이 아닌 ‘소통’으로 구성되는데, 사회적 체계란 인간 사이에 소통이 발생할 때 그때그때 현재화된다. 체계는 실체가 아닌 작동이며, 소통과 차이의 연속이다. 체계는 자기준거적으로 구별된 자신 고유의 소통을 이어가면서 사회에서의 고유한 기능을 수행해낸다. 루만은 이러한 체계라는 개념을 통해 사회의 정치·종교·법·경제·교육체계 등을 일관되게 분석하는데(사진 2), 사회를 분석하는 일반이론으로서 체계를 제안하는 것이 이 책, <사회적 체계들>이며 이 이론은 높은 완결성을 갖는 이 시대의 마지막 일반이론이자, 거대이론이다.

 

이 책은 이미 <사회체계이론>이라는 이름을 번역된 바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지금껏 제대로 인용된 적이 없었다. 그만큼 문제적이었다. 루만에게 사회체계(Gesellschaftssystem, Societal System)와 사회적 체계(Soziales System, Social System)은 다른 개념인데, 이전 번역은 그것을 살리지 못했다. 이제 ‘사회적 체계들(Soziales Systme, Social Systems)’이라는 이름으로 정확히 번역되었다. 루만의 <사회이론 입문>에서는 한 ‘한국인 제자’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바로 노진철 선생님이다. 이 책은 2010년대부터 적극적으로 루만 연구를 진행 중이신 이철 선생님과 박여성 선생님의 번역과 더불어 노진철 선생님이 3년간 진행한 강독을 통해 번역된 책으로 믿고 볼 수 있는 번역이다.

 

루만의 방대한 이론 세계를 설명하기에는 분량이 부족하다. 이 책은 인류 지성사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책이며, 사회(학) 이론이 도달한 가장 높은 고봉으로 이를 직접 응시하기 위해서라도 직접 읽어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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