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농장, 성찰하는 삶에 관하여

 

이성과 계몽 위에 정초 된 근대사회에서 인류는 문명의 진보라는 장밋빛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압도적인 과학과 기술의 발전, 낙관적 희망의 정점에서 인류는 역사 최악의 전쟁과 이념 갈등을 맞이하게 된다. 『동물농장』은 이성이 만들어낸 시대적 잔혹함의 역사 속에서 폭력을 마주하면서도 그것과 대결하며 항상 성찰했던 작가, 조지 오웰이 그 역사의 한복판에서 써낸 책이다. 『동물농장』을 통해 조지 오웰은 전체주의를 비판하고, 모든 형태의 권력에 의문을 제기한다. 모든 책이 그렇듯, 이 책 역시 당시의 맥락 속에서 쓰였다. 그렇기에 이 텍스트가 형성된 맥락을 통해 오웰의 주제 의식을 살피고, 그 의미를 오늘의 상황에 적용해보고자 한다.

『동물농장』에는 극단의 시대를 겪은 오웰의 통찰이 담겨있다. 오웰이 이 작품을 통해 문제 삼았던 것은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었다. 책의 내용만 본다면, 오웰은 단순히 소비에트연방의 공산주의를 비판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를 통해 1936년 이후의 작품은 “어느 한 줄이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전체주의에 맞서고” 있음을 회고한다. 소비에트연방의 반대편에는 히틀러의 나치즘, 프랑코의 스페인 독재,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자리하고 있었고, 이러한 역랑 속에서 자유주의를 외치는 국가마저 체제 경쟁을 위해 개인을 억압하고 착취하기 시작했다.

“인간이야말로 우리의 유일한 진짜 적”이라는 메이저 영감의 선포에도, 강압적인 폭력 통치를 시작한 나폴레온을 정당화하는 데마고그 스퀼러의 “나폴레온은 항상 옳아!”라는 구호 속에서도 오웰은 끊임없이 전체주의적 사고를 풍자하고 있다. 전체주의는 두 가지로 문제가 된다. 하나는 개인을 집단을 위해 억압하고, 희생시킨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를 규율로 대체함으로써, 사회 구성원을 성찰하지 않는 인간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인간을 향한 동물의 혁명은 인간에 의한 동물의 착취에 기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체제가 자리 잡자, 돼지들은 같은 동물을 억압하고 착취하기 시작했다. 체제를 위해 희생하다가 팔려나간 복서의 예가 대표적이며, 소의 젖은 돼지의 식탁에만 오르게 됐고, 달걀이 인간에게 판매되자 이에 저항했던 암탉들 역시 폭력적인 처벌을 통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전체주의와 전체주의적 사고는 집단의 목표를 위해 개인을 희생시킨다. 그들이 스스로 잘 살기 위해 만든 체제가 역설적으로 그들을 옥죄는 올무가 되어버린 것이다.

동시에 전체주의는 윤리의 성찰성을 외재적 규율로 대체하여 생각하지 않는 인간을 만들어낸다. “나폴레온은 항상 옳다”는 스퀼러의 선동은 나폴레온이 옳기 때문에 옳다는 순환논증일 뿐이며, 무솔리니는 항상 옳다고 선전했던 파시즘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생각이 지배하는 사회의 구성원은 윤리를 진정성 있게 실천하거나, 윤리의 본질을 성찰하기보다는 권력이 부여하는 규범에 복종하는 것으로, 독재자의 지시에 순응하는 것으로 윤리를 대체한다. 이런 사회는 복종적이며 순응적인 인간을 양산하고, 그들은 서로를 감시하며 새로운 디스토피아를 만들어낸다.

다른 한 편 조지 오웰은 『동물농장』을 통해 인간 존재 본질에 관한 의문을 제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정의했다. 정치의 본질을 “권력을 위한 투쟁”이라고 규정할 때,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은 권력에 대한 투쟁을 본질로 한다고 볼 수 있다. 오웰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은 한 가지는 모든 권력은 부패한다는 것이다. 동물의 해방을 꿈꾸던 메이저의 원대한 이상은 나폴레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 하지만 이 슬픈 우화의 마지막은 인간의 착취가 끝나고 동물에 의한 동물의 착취가 시작되는 권력 부패의 연쇄를 보여준다.

『동물농장』은 시대의 극단과 잔혹함을 고발했던 조지 오웰의 삶에서 비롯된 작품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시대는 당시와 같은 극단적 폭력은 자취를 감추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폭력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 시대의 폭력은 세련되고 미시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독재자의 강압적 통치뿐 아니라, 우리는 일상생활의 모든 부분에서 ‘우리’를 위해 우리가 아닌 누군가를 희생하고자 하거나, 극단적 이분법이 선사하는 ‘편안함’에 반기를 들지 않고 성찰하지 않을 때, 죽은 줄 알았던 그 시대의 폭력을 오롯이 우리 앞에 부활한다.

그런 시대에서 오웰은 폭력에 민감한 사람이었다. 식민지의 관료로서 회의를 느꼈던 그는 자신에게 닥친 폭력만이 아니라 자신이 행하는 폭력에도 섬세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문학은 진정성으로 빛나고, 시대를 초월한 고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동물농장』은 “그러나 이미 어느 것이 돼지의 얼굴이고 어느 것이 인간의 얼굴인지 도저히 구별할 수가 없었다”라는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이 책은 우리에게 불편함을 선사한다. 우리 마음에 꿈틀대는 단순화의 유혹과 내가 속한 곳과 나의 이익을 중심으로 하는 모든 사고와 행동 속에서 끊임없이 성찰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머리로만 읽을 책이 아니라, 오웰처럼 몸으로 실천으로 읽어내야 할 책이다. 우리도 돼지가 될 수 있기에. 또 돼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

 

덤으로 역본의 경우, 동물농장이 쓰인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자세히 알고 싶은 분은 김욱동 역(비채)의 역본을, 가독성을 추구하고 오웰의 추가적인 작품을 읽고 싶으신 분은 김기혁(문학동네) 역본을 보시는 걸 추천해 드린다. 두 책 모두 준수한 번역이라고 느꼈다. 솔직히 나는 이 책이 그리 재미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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