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으로부터의 혁명
- 어떻게 혁명할 것인가?
‘세계식량체계, 유전자조작식품, 몬산토, 독·과점, 자본주의’ 아마 이 말들은 이번 환경사회학 수업을 들으면서 ‘지역식량체계, 유기농 또는 친환경 농산물, 사회적 경제, 대안 경제’ 이 말들보다 보다 강력한 구속력, 힘과 지배력을 가진 단어들로 느껴지지 않을까 싶다. 사실 수업을 수강하면서 가장 초점이 되었던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세계식량체계라는 일종의 메가트렌드(Megatrends) 앞에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였다. 문두에 나열한 단어들은 나에게 강력하고 그것보다 무서운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들이었다. 이런 까닭에 과연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인가는 당연히 나의 생각을 차지했다. 수업이 진행되며 저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들은 조금씩 제공되었다. 그러던 중 과제와 함께 읽게 된 일본의 한 농부 후쿠오카 마사노부의 ‘짚 한 오라기의 혁명’이라는 책을 만나게 됐다. 이 책의 제목을 접하고 처음 느낀 것은 아마도 짚 한 오라기로 혁명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었다. 이것은 새로운 정치를 말하는 것 같지도 새로운 사회체제를 말하는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나름의 의문을 가지고 읽기 시작한 것이 이 책이다.
마사노부는 책 처음에 짚 한 오라기로 혁명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그것의 방법으로 인간의 지혜와 인위를 모두 거부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개인적으로 어렸을 때 도교, 불교, 그리고 유교 등 동양사상의 영향을 알게 모르게 받고 자라게 된 영향 때문인지 이런 마사노부의 접근법은 낯설지 않았을 뿐더러 반가웠다. 글에서 읽은 마사노부의 이력을 보면 2차 세계대전 당시 징집을 피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마사노부도 어느 정도 세계대전 이후의 전후인식에 영향을 받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크게 사상적 흐름을 보면 양차 세계대전 이후 보통 사람들은 근대성에 대한 회의를 가지고 된다. 중세의 신성에 반한 하나의 이성적 조류와 함께 발생했던 ‘근대’라는 이름은 인류사 최악의 결과를 맞이함으로써 이것에 대한 대안으로 반이성적 사상의 조류를 형성한다. 하지만 이것은 다 서구중심적인 내용이고 이것이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는 이런 근대성에 대한 회의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전후인식은 마사노부의 인식과 유불선(儒佛仙)으로 대표되는 동양사상과 일정부분 함께 공유하는 상(像)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공유할 수 있는 가치는 문제의 근본에 접근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사노부는 무위(無爲)의 자연(自然)농법을 주장한다. 인위도 없고 또한 자연이란 낱말의 의미 그대로인 스스로 그러한 농법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이 나에게는 설득력이 있게 느껴진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현대를 생각했을 때 이것은 정말 ‘혁명’에 가까운 인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마사노부는 무위와 방임은 다르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다소 충격적인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마사노부의 주장을 잃으면서 한 가지 생각난 것은 나도 이미 현대에 젖어있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대중사회 속 소비주의 세대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났고, 서구화 된 삶을 살며 정보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냥 몇 가지 ‘-주의’들을 적었지만 이것들이 내 삶에 꽤나 구속력 있게 작용할 것 같다. 나는 이런 인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한국적 가치’와 ‘한국적 고민’ 또는 ‘우리 주변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을 꾸준히 말씀하신 수업시간의 내용이 떠올랐다. 또한 나의 삶이, 사회가 많은 부분 앞에 나열한 인식 안에서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령의 수필 중 ‘폭포와 분수’라는 글이 있다. 그는 글에서 동양의 폭포와 서양의 분수의 특성으로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를 설명한 글을 썼다. 폭포를 사랑하는 동양인들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반면 분수를 사랑하는 서양인들은 자연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거스르는 문화를 가진다. 글에서는 이로 인해 동·서양은 문화적 차이를 가진다고 말한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내가 특히 지적하고 싶은 서양의 문화적 특성은 ‘합리성’이다. 이는 과학적 태도로 연결되고 이 과학적 태도는 ‘인과법칙’을 도출하는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마사노부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런 서구의 과학주의적 태도는 인과관계를 직접적이고 단편적인 방법으로 도출해내는 데에는 성공한다. 반면 동양사상 중에서도 인과법칙을 설명하는 불교 연기(緣起)설의 경우는 ‘이것이 생김으로써 저것도 생기고, 이것이 멸함으로써 저것도 멸한다.’라는 인과를 이야기한다. 이것은 비교적 간접적이고 일체(一切)인 인식이라고 생각한다. 동양적 인식은 막연할 수 있는 반면 서구적 인식을 단선적인 문제해결로 인해 발생하는 부가적 피해에 취약한 것 같다. 물론 동·서양의 인식을 양분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뿐더러 어떤 인식의 우열을 가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지배적인 것은 서구적 인식이고 이런 서구적 인식이 기여한 점도 있지만 현재 발생된 문제들은 마사노부의 주장처럼 이런 패러다임의 변화에 키워드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유전자조작식품을 반대하는 영상에서 본 바와 같이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에 나오는 DDT, 월남전에 쓰인 고엽제는 당대 최신 과학기술이었으며 인간의 이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인과관계를 도출하고 문제를 해결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치명적인 결함들을 수반했다. 우리 인식에 뿌리깊이 자리 잡은 인간 이성과 과학에 대한 맹신을 의심해야 할 것이다. 물론 나는 아직 마사노부처럼 모든 것을 헛되다고 느끼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인식전환의 필요성을 공감한다.
마사노부는 책의 2장에서 자연농업에 대한 소개를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마사노부는 자신의 농법이 절대 잘못된 것이 아니며 농업기술자로서 10년, 농부로서의 37년의 삶을 이야기하며 그것을 보증한다. 여기서 느낀 것은 초창기 마사노부가 초보농부로서 자연과 방임을 혼동하여 있었던 실패와 실행착오들이 환기되었다. 나는 편하게 글을 읽고 있지만 그의 짚 한 오라기로 시작한 혁명은 얼마나 큰 용기와 노력이 필요했을까 생각하게 되는 대목이었다. 그는 구체적인 자연농법의 방법들을 제시하는데 나열된 것들은 당연하면서도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다. 흥미로운 부분들은 생각해보니 자연 생태계가 유지되는데 조금만 생태계를 관리한다면 잡초나, 병충해에서 대안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의 뚝심처럼 과학에 기반을 두지도 않은, ‘벼는 되지 않지만 쌀을 되는’ 그런 그의 농법은 오히려 실용적이면서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사노부는 과학적 진리나 이론은 실험조건에 따라 변한다고 이야기하며 자연적인 것이 오히려 강력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것은 앞서 말한바와 같이 과학의 인과설정의 오류를 말하는 것 같다. 과학적 실험은 통제된 상태에서 진행되는데 마사노부는 이것이 보편성 없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그의 의견은 바다오염을 비료가 일으킨다는 다음 장의 주장과도 연결된다.
마사노부는 3장에서 자연식품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여기서 인상 깊었던 것은 조금이라도 외관이 좋고 깨끗하고 큰 것을 원하는 소비자의 단순한 마음이 농부를 몰아가 괴롭힌다는 이야기이다. 미디어는 엘리트가 생산하고 대중이 소비한다. 이에 따라 보통의 대중들은 미디어가 주는 특정 이미지에 호감을 가지게 된다. 사실 과일을 먹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아마도 ‘맛’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이미지보다는 현실적이라고 생각되는 맛조차 어느 정도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책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소비자들의 의식전환이 없이 농업이 바뀌는 일은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한 때 진돗개가 세계애견협회에 정식 등록되지 못한 적이 있다고 한다. 진돗개는 본연의 유전적 다양성으로 인해 황구, 흑구, 백구 등의 종류들이 다양하게 새끼가 배출된다. 진돗개가 하나의 종으로 표준화 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는 해남의 간척지에서 60마지기의 논에서 농사를 지으셨다. 그때 아버지께서 일을 도우러가셨다가 “장모님, 저희 논은 농약 안 쓰시죠?”하자 외할머니께서 “암 그라제”이러셨고 이에 덧붙여 외할아버지께서 “농약을 안 쓰긴 뭘 안 써 팍팍 들이붙제”라고 하셨다고 한다. 나는 60마지기가 상상이 가지 않지만 어머니께 들은 말로는 꽤나 넓은 영역이라고 들었다. 대규모 농업 또는 기업농에서는 책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자연 농법이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와 같이 한국의 농업도 많은 부분 기업화 되었으며 이를 변화시킬 강력한 견인책 또한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내가 책에서 가장 자연농법의 매력을 느낀 것은 책의 적은 분량이지만 ‘사라진 농부의 정월 휴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한 때 손학규라는 정치인이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슬로건으로 대선후보 경선에서 나름의 선전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은 저녁이 있는 삶도 아닌 ‘주말이 있는 삶’이란 담론이 형성되었다. 한국 사회는 뭔가 휴식이 부족하거나 적어도 휴식이 부족하게 느껴지는 사회인 것 같다. 이런 사회에서 마사노부가 말하는 녹색혁명은 매력적으로 들린다. 물론 농사일은 전혀 쉽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경쟁사회에서 살고 있거나 경쟁사회에 살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마사노부의 짚 한 오라기의 혁명은 충분히 의미 있는 외침이 될 수 있다.
4장 녹색혁명에서 마사노부는 서두에 농업의 원류가 잊히며 농부가 농부다운 한마디 말도 못하고 저항할 방도도 모른 채 사라져가는 세상이라는 비관적 분석을 내놓는다. 근대성의 한 특성으로 분화를 들 수 있다. 분화는 현대의 사회를 이루어나가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이런 분화의 부작용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마사노부가 지적한 문제점이다. 수업시간에 배운 인도의 면화농업 같은 경우 정작 농업의 주체인 농민들은 농업에서 소외되고 종자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하다 삶이 파탄된 경우를 보았다. 물론 이것은 농업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지만 종자회사의 농업과 생명공학의 지식을 가지고 학위를 가진 과학자들이 농업의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에 반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사노부의 글을 읽으면서 새롭게 깨달은 것은 그런 과학자들이 정말 전문가인가에 대한 회의이다. 덧붙여 농부들은 정말 그렇게 비전문적이고 무기력한 존재일까.
이후 마사노부는 현대인의 병든 식이에 대해 설명하며 음양오행에 기반을 둔 자연식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참다운 맛의 추구를 말하는데, 씀바귀와 두릅이 생각났다. 씀바귀에 쓴 맛과 두릅의 향이 나는 너무 생소하고 양념을 많이 하지 않으면 먹지 못하겠다고 느낀 적이 있다. 그런데 부모님 세대들은 그것들을 없어서 못 먹는 것을 보면서 먹는 것에 문화적 차이도 느꼈고 내가 너무 단순한 맛에만 길들여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음식물 자체에 대한 맛을, 다양한 맛을 느끼는 연습을 해야겠다.
이 책이 그리고 후쿠오카 마사노부가 우리에게 던지는 것은 그의 책에서도 서술되었듯이 ‘짚 한 오라기’뿐이다. 하지만 그는 어쩌면 말도 안 되는 짚 한 오라기에 인생을 던졌고 노력했으며 일정한 성과를 얻었다. 이런 마사노부의 삶이 담긴 책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마사노부의 책이 진정성 있게 느껴지지 않나하는 생각이다. 책에서 마사노부는 일관되게 인간 이성과 과학, 서구화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 자연농법과 자연식, 녹색철학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그는 짚 한 오라기를 던진다. 마사노부는 때로 현대사회가 대안으로 생각하는 유기농법 자체도 부정하고 국민개농(國民皆農)의 이상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과연 나는 그가 던진 짚 한 오라기를 내 삶에 어떻게 적용하면 살 수 있을까? 일단은 거대한 시류 앞에 무기력하게만 느껴졌던 내가 어떻게든 나만의 방식으로 삶을 개척해나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이것이 쉽고 재밌기만 한 것은 아닐지라도 무언가 변화시킬 수 있고 대응할 수 있다는 깨달음은 큰 것 같다. 그리고 합리주의, 인간의 이성, 과학기술과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현대의 삶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고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한 숙제를 남긴다. 또한 구체적으로 수업의 주제인 환경사회학의 관점에서 환경이나 사회를 조금 더 긴밀성 있는 하나의 공동체로 인식하고 기존에 그냥 생각 없이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해봐야겠다. 진정한 자연스러움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구체적으로 내 삶에서 작은 부분들을 그리고 내 주변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봐야겠다.
2015.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