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사회학 공부를 조금 나눠볼까 합니다. 순서는 오귀스트 꽁트(Auguste Comte) -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 칼 맑스(Karl Marx) - 에밀 뒤르케임(Emlie Durkheim) -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 - 막스 베버(Max Weber) - 조지 허버트 미드(George Herbert Mead) - 칼 만하임(Karl Mannheim) 순서입니다.
오귀스트 꽁트(August Comte, 1789~1857)
1. 사회적 배경
오귀스트 꽁트가 살았던 시대는 정권이 일곱 번이나 뒤바뀌고 수많은 폭동과 반란, 그리고 대중 봉기가 나타나던 혼란의 시기였다. 이 시기의 프랑스는 무질서와 혼란의 온상이었고 더불어 유럽 과학발전의 독보적인 중심이이기도 했다.
2. 개인적 배경
꽁트는 1789년 1월 19일 남부 프랑스 도시 몽펠리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열렬한 가톨릭 신자이며 신중한 왕당파인 하급공무원이었다. 이런 이유로 노년의 꽁트는 혁명을 경멸했고 가톨릭 박해를 비난했다. 그는 질서에 애착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린 꽁트는 작고 섬세하며 많은 병을 앓았고 자유를 사랑하는 공화주의자, 황제를 혐오하는 혁명을 꿈꿨다. 다니엘 앙꽁뜨르(Daniel Encontre)는 꽁트의 수학교사로 개신교 목사였고 그는 꽁트에게 광범위한 지식의 롤모델이었다. 꽁트는 거의 모든 기간 파리에 살았다. 이공대학에 진학했지만 이 이공대학은 황제에 의해 군대식으로 개편되었고 꽁트는 이에 반발했다. 공화주의자였던 꽁트는 제정과 왕정에 열렬한 비판자였고 결국 처벌을 받아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되었다. 한참 뒤에야 재입학 기회를 받지만 결국 이공대학에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수학 사강사(私講師)를 하면서 영어로 된 기하학 서적에 참여하는 등의 일을 했다.
쌩-시몽과의 만남
1817년 여름 꽁트는 정기간행물 산업(Industrie)의 편집자였던 앙리 쌩-시몽(Henri Saint-Simon)을 만나게 되었다. 공상적 사회주의자인 쌩-시몽은 개성적이고 창의적이며 무질서하고 불같은 성미를 지닌 사람으로 꽁트의 생애와 저작에 중요하고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젊은 꽁트는 벌써 60이 다 된 쌩-시몽에게 매력을 느꼈다. 꽁트는 그의 비서이자 가까운 협력자였다. 꽁트는 쌩-시몽에게 돈을 받지 못하면서도 함께 일했고 둘은 서로 영향을 끼쳤다. 꽁트는 쌩-시몽을 만난 이후 곧 엘리뜨적 견해로 전향하게 되었고 이런 견해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줄곧 유지되었다. 꽁트가 쌩-시몽과 가깝게 지내던 시기에 한 구상은 꽁트 후기 주된 사상들의 핵심이 담겨있다. 1824년 둘을 논문에 누구의 이름을 쓸 것인가를 문제로 돌아서게 된다. 또한 행동주의자였던 쌩-시몽은 언제나 당장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이에 반해 꽁트는 개혁적인 행동에 앞서 이론적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과 과학적 이론의 기초를 확립하는 것이 어떠한 실천적 영향을 도모하는 것보다 우선적으로 중요한 일임을 강조했다.
꽁트는 당시 지식인들과 교류했지만 제대로 된 직장도 지위도 소득도 없었다. 꽁트는 1825년 결혼했고 안정적이지는 못했지만 잠시 가정이라는 안식처를 가졌다. 이 기간 꽁트는 실증철학을 세련되게 만드는 데에 집중했다. 꽁트는 사강좌를 열었고 많은 지식인이 참여했지만 4번째 강의를 하지 못하고 심각한 정신쇠약을 겪었다. 이 기간 꽁트는 투신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으나 고향 몽펠리에로 긴 여행을 한 이후 서서히 회복되었다. 1829년 강의는 시작되었지만 꽁트는 점점 과학자들의 모임에서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꽁트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과학의 모든 업적을 자신의 백과사전식 학문체계에 포함시키려는 프로메테우스 같은 야망을 매우 경멸하였다.
실증철학강의를 집필하면서 열심을 다하는 동안 꽁트는 재정적 어려움, 학계의 비난, 가정의 불화를 겪으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그는 1838년부터 더 이상 과학서적은 읽지 않고 단지 소설과 시민 읽기로 작정했다. 말년에 그가 되풀이해서 읽었던 책은 ‘그리스도를 본받아’였다. 꽁트의 저작은 영국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제자도 생기기 시작했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논리학 체계(1834)에서 꽁트를 “일급의 사상가”들 중 하나도 꼽고 그를 격려했다. 밀은 꽁트를 지지하는 영국학자들에게 돈을 모아 그의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하기도 했다.
적이 많았던 꽁트는 대학에 재임용되지 못했으나 클로틸드 드 보(Clothilde de Vaux)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지면서 정열적이고 감성적인 사람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연인은 세상을 떠났고 꽁트는 남은 여생을 “나의 천사”를 그리는데 바치기로 했고 실증정치학체계는 자신의 애인을 기념하는 작품으로 지성에 대한 감성의 우위를, 정신에 대한 감정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꽁트는 오랫동안 남성적 사유의 거친 서경이 지배해온 인류에 대한 따뜻한 여성적 힘의 치유력을 거듭 강조했다.
꽁트는 자신이 최고사제인 인류교라는 종교를 이야기했고 여기서부터 합리주의자들과 추종자들로부터 멀어졌다. 그는 모든 문서에 “보편종교의 창시자, 인류교의 대사제”라고 서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양한 청중들을 새로운 신조로 개종시키려 노력했다. “실증교리문답”, “보수주의자들에게 바람”같은 호소문을 쓰기도 했다. 꽁트는 사도 바울처럼 해외에 있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실증학회”의 정기집회가 있는 수요일을 제외한 매일 저녁 7시 ~ 9시 사이 꽁트는 집에서 파리의 제자들과 접견했다. 전직 공예사, 미래의 정치인, 지식인, 노동자들이 그의 스승에 대한 큰 사랑 안에 뭉쳤다.
“꽁트는 젊었을 때 지녔던 공화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열망으로부터 이제 멀리 벗어났다. 몽펠리에의 저항적이었던 학생이 이제 복종의 미덕과 질서의 필연성을 설교하는 사람으로 변했다.” 루이스 코저, 사회사상사 23p.
3. 지적 배경
오귀스트 꽁트는 18세기 후반 진보철학, 특히 튀르고(Turgo)와 꽁도르쎄(Condorcet)에서 시작된 계몽주의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꽁트는 계몽주의에 한정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18세기 전반 지배적인 개인주의적 사회이해 방식에 철저한 반대자였던 드 보날(de Bonald)과 드 메스뜨르(de Maistre)의 전통을 이어받은 사상가였다. 그는 사회질서의 붕괴와 그로인한 충격 속에 전통주의적 사상과들과 같이 도덕공동체를 강조했다. 또한 그는 자유주의자였다. 그는 아담 스미스(Adam Smith)에서 장 바띠스트 세(Jean Baptiste Say)에 이르는 자유주의 정치경제학자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또한 꽁트는 칸트를 “실증철학에 가장 근접한 형이상학자”로 간주했고 1824년에는 칸트를 좀 더 일찍 읽었더라면 많은 노력을 절약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또 베이컨(Bacon)과 데카르트(Decartes)의 상이한 과학적 전통의 계승자로 자처하였으나 보쉬에(Bossuet)의 가톨릭적 관점에도 영향을 받았다. 이외에도 유명한 자연과학자들, 몽테스키외(Montesquieu), 흄(Hume), 드 꽁디약(de Condillac)과 관념학파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꽁트는 전통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어느 하나에 몰입하지 않고 여러 주장을 섭렵하며 나름의 독자적인 종합을 이루었다.
진보의 전통
꽁트는 꽁도르세의 영향을 거듭 인정했다. 그러나 꽁도르세의 두 가지 주요한 주장, 즉 개인주의에 대한 신념과 상대적 평등성에 대한 견해는 따르지 않았다. 꽁트의 생각은 강한 위계적, 반개인주의적, 그리고 차등주의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질서의 전통
꽁트는 전통주의자들을 무척 찬양했다. 프랑스 혁명 당시 과격한 변화의 시기를 겪고 등을 돌린 사람들은 도덕덕 공동체의 연대감에 의해 결속되지 않은 사회는 고립된 원자들로 이루어진 모래산처럼 무너지고 말 것이라 생각하였다. 사회는 하나의 유기적 전체이며 그것이 아니라면 사회는 존재할 수 없다. 계몽주의자들의 자유로운 개인을 전통주의자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개인이라고 평가했다. 질서, 위계, 도덕공동체, 정신적 힘, 개인에 대한 집단의 우위는 꽁트의 사상에서 많은 발견되는 것이다. 그러나 꽁트는 계몽주의로부터 배운 낙관적, 미래지향적 관점을 포기하지 않았고 과거지향적 견해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자유주의의 전통
꽁트는 아담 스미스를 빛나는 철학자라고 불렀고 그를 찬양했다. 꽁트는 분업에 대해 긍정적이었으나 자유방임이 무정부상태를 체계화 한다고 생각했고 그를 비판하기도 했다. 정치경제학자들이 “어떤 형태의 조정적 간섭도 없애는 것을 일종의 교리”로 내세우는 한 꽁트는 그들을 자신의 세계관과 함께 존립불가능한 적대자로 여겼다. 그래도 꽁트는 분업을 비판하거나 찬양할 때 모두 스미스의 전통에 입각해서 작업을 하였다.
4. 사상 개관
꽁트는 사회학의 아버지로서 인류의 발전 과정을 설명하고 진행과정을 예견하기 위해 자연주의적 사회과학을 만드는 일을 자신의 목표로 삼았다. 그는 시대를 초월하여 인류를 지배해 온 하나의 운동법칙을 설명할 수 있는 과학을 정립하고자 노력했다. 사회적 안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며 이를 공식화하려고 노력했다. 사회동학(변동과 진보), 사회정학(질서와 안정)은 콩트의 사고체계를 형성하는 핵심이다.
꽁트는 인간사회도 자연계를 연구하는 것과 똑 같은 과학적 방법에 의해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사회가 복잡하지만 그래도 기본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 동일하다고 이야기했다. 자연과학이 이런 법칙성을 찾아낸 것에 반해 사회과학은 이런 법칙성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인식했다.
꽁트가 처음 정립하려고 했던 새로운 과학을 “사회물리학”이라 불렀다. 후에 그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결합시켜 “사회학(Socialogy)”이란 용어를 만들었다. 이것은 사회연구에 있어서도 경험적 방법과 인식론적 기반에 있어서 뿐 아니라 인류에 대한 기능에 있어서조차 전적으로 자연과학을 추종하여 만들어졌다. 사회과학은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구체적으로 이로움을 가져다 줘야 하고 인간조건을 개선하는데 몫을 담당한다.
"과학으로부터 예측이, 예측으로부터 행동이 나온다." 이처럼 사회적 행위를 인류에게 유익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인류 진보의 운동법칙을 정립하고 그리하여 사회질서와 시민적 협조의 기반이 확립되어야 한다. “인간이든 신이든 지배자의 자의적인 간섭 때문에 늘 교란되는 경우가 흔하다.”고 믿는 한 다시 말해 사회적 행위는 아무런 법칙에도 종속되지 않는 자의적이고 우연적인 것이라고 사람들이 믿고 있는 한 시민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개선시킬 일치된 행동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사회학이 인간사에 있어서 발전과 질서의 불변적 법칙을 정립하고 알리면 상황은 달라진다. “사회현상을 불변의 자연적 법칙 즉 각 시대에 있어서 사회적 행위의 한계의 특성을 분명하게 규정해주는 법칙에 전적으로 복종시키는 외에는 어떤 질서나 합의도 있을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사회의 기본법칙을 발견하면 사람들은 오만한 자부심을 고칠 수 있게 된다. 즉 사람들은 어떤 역사적 순간에 있어서도 사회적 행위라는 사회유기체의 적절한 기능을 위기에 빠뜨리지 않을 수준으로 제한되어 행동하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사회적 법칙들을 그들 자신의 목적에 알맞게 변경시킴으로써 주어진 한계 내에서 의도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사회)과학의 임무는 현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변경시키는 것이며 이것을 위해서는 그 법칙들을 이해해야만 한다. - 중략 - 어떤 사회질서가 행위에 부과하는 구속조건들을 명확히 파악함으로써 인간은 필연성이 경계지어 놓은 영역 내에서 그들 사회를 자유로이 개조할 수 있다.”
꽁트의 실증과학은 오랜 전통의 권위를 무너뜨렸다. 즉 절대적인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는 주장은 그의 가르침의 핵심이었다. 영원히 타당한 율법적 진리를 받아들이는 대신 그는 인간 이해의 끊임없는 발전과 과학적 작업의 자기수정적 성격을 강조했다. “존재의 본질과 그것의 최종, 궁극적인 원인을 찾으려는 탐구는 늘 절대적인 성격을 드러낸다. 하지만 현상의 법칙들을 연구하는 것은 상대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실체, 관찰의 점진적인 발전에 따르는 끊임없는 사색의 진정 등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꽁트는 과학의 강한 권위를 인정하고 그에 따라 자유로운 참구의 권리나 독단적인 무한한 양심의 자유 같은 것에 대한 환상적인 요구를 포기하는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적절한 지식을 공유하는 상황 하에서 보편적으로 존중되는 기본법칙에 근거하여 여러 결과들의 실제적인 상호연관성을 논의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과학적 논의가 지금 요구하는 일은 헛된 사색이나 구속되지 않는 이상주의에 대해 강한 제한을 가하는 일이다.
5. 탐구의 방법
사회학이 진보의 법칙을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할 때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관찰과 실험 그리고 비교의 방법이다. 관찰이란 예비적 이론에 의해 한 사회적 사실이 다른 사실과 관련을 맺게 될 때 비로소 그 사회적 사실은 과학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따라서 관찰은 현상의 정적이거나 동적인 법칙들에 입각해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실험은 사회과학에서 부분적으로 적용 가능하다. 직관적 실험은 인간세계에서 불가능하다. 그러나 현상의 규칙적인 과정이 명확한 방식으로 간섭을 당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실험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현상의 규칙적인 과정이 명확한 방식으로 간섭을 당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실험이 이루어진다. 사회형태에 있어서의 혼란은 개인유기체에 있어서의 질병에 비유될 수 있다. 따라서 병리적 현상의 연구는 정상적 현상을 이해하는 데 유리한 방법일 수 있다.
과학적 탐구방법 가운데 사회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비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절대주의적인 사고방식을 변화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기 때문이다. 인간집단 간의 비교가 중요하다.
네 번째는 역사적 방법이다. 인류의 일관된 상태에 대한 역사적 비교를 새로운 정치철학을 가능케 하는 주요한 과학적 방안일 뿐 아니라 그 본질에 관계없이 과학의 하부구조를 형성한다.
6. 인류의 진화법칙
꽁트는 중심 개념인 인류의 진화법칙 또는 삼단계법칙을 정립했다.
인류의 정신적 진화는 개인의 정신 발달과 병행해 왔다. 인간집단이나 전체 인류의 발전을 다루는 계통발생론은 개별적 인간유기체의 발전을 다루는 개체발생론에서 찾을 수 있다. 꽁트에 의하면 인간정신은 진화된 것이다. “새로운 체계의 구성은 낡은 것이 붕괴되어야만, 그낡은 정신적 질서의 잠재성이 완전히 소멸되어야만 나타날 수 있다.” 아무리 높은 수준의 정신이라도 그 이전 단계의 정신이 붕괴되기 전에는 다가오는 시기를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신학적·공상적, 형이상학적·추상적 또는 실증적 단계를 거쳐 왔다. 신학적 상태에서 인간 정신은 존재의 근원과 모든 결과의 궁극원인을 찾고 모든 현상은 초자연적이라고 생각한다. 형이상학적 상태에서 정신은 모든 현상을 산출해 낼 수 있는 추상적 힘, 확실한 실체들을 상정하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실증적 상태에서 정신은 절대자 우주의 기원과 종착지 모든 현상의 원인 등에 대한 쓸모없는 탐구를 초기하고 대신 법칙을 연구하는데 몰두한다.”
꽁트는 인류의 역사는 낡은 질서의 소멸이라는 진통으로부터 순조롭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붕괴로 이루어진다. 또한 인류 역사는 유기적 위기적 시기의 두 가지 모습으로 이루어진다. 유기적 시기에서는 사회적 안정과 정신적 조화가 폭 넓게 이루어져 있고 사회의 여러 부분들이 균형 상태를 이룬다. 반면 위기적 상태에서는 기존의 확신이 무너지고 전통이 붕괴되고 사회가 근본적으로 불균형상태에 존재한다. 그러나 위기도 결국 유기의 필연적 전주곡일 뿐이다.
꽁트의 삼단계 법칙은 정신주의·관념론적 편향성이 있다. 그러나 그는 인류의 각 정신적 단계를 그에 대응하는 사회조직이나 정치적 지배유형의 특성들과 연결했다. 신학적 단계는 사제와 군인에 의해 지배되었다. 가족이 전형적인 예이다. 형이상학적 단계(대체로 중세와 르네상스)에서는 성직자와 법률가들이 주도 집단을 주도하고 국가가 중요하다. 실증적 단계에서 집단은 기업경영자들과 과학자의 도덕적 가르침으로 지배한다. 전인류가 실질적 사회 단위이며 정신적 진화가 가장 중요한 원리이다. 진화정도의 중요한 척도 중 하나는 인구증가이다. 더불어 분업이 사회진화의 강력한 추진력이다.
7. 과학의 위계
꽁트의 두 번째 이론은 과학의 위계론이다. 꽁트는 인류의 발전이 명백한 단계를 지니며 과학적 지식도 비슷한 발전단계를 거친다. 과학도 상이하게 발전정도가 다르다. 자연과학 중 가장 일반적이고 단순한 천문학이 제일 먼저 뒤를 따른다. 가장 복잡하고 다른 모든 과학들이 발전하여야 나타날 수 있는 사회과학은 위계상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다. 사회과학은 실증적인 방법의 완성이다. 사회과학은 여러 과학이 발전시킨 모든 자원을 동원할 뿐 아니라 비교가 아닌 연속적 계통론에 의해 탐구되는 역사적 방법까지 사용한다. 사회과학 바로 아래에는 생물학이 있는데 사회과학은 이에 크게 의존한다. 생물한은 다른 과학과 달리 전체적인 성격이 있다. 유기체 전체를 연구함으로써 발달한다. 사회학이 생물학과 공유하는 있는 점이 바로 유기적인 측면과 유기적인 단위에 대한 강조이다.
8. 사회정학과 사회동학
생물학에 해부학과 생리학의 구분이 있듯 사회학에서도 정학(靜學)과 동학(動學)을 구분하는 것이 옳다. 이 구분은 사실들의 구분이 아닌 이론적인 구분이다. 사회의 진보와 질서, 변동과 안정은 곧 사회정학과 사회동학에 대응된다. 질서는 사회적 존재의 영속적인 조화에 기초하고 진보는 사회발전의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질서나 빈보, 정학과 동학은 늘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사회학의 정태적 연구는 사회체계의 상이한 여러 부분들간의 작용-반작용 법칙을 탐구하는 것이다. 사회 내에 이루어지는 균형적인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것이며 전체로서의 사회에는 각 부분들간의 자생적인 조화가 필요하다. 조화가 결핍되었을 때 사회는 병리적인 사례에 직면하게 된다.
꽁트는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요소를 개인이 아닌 가족이라고 판단했다. 기본적인 이기적 성향이 사회적 목표를 위해 다듬어지고 길들여지는 곳이 바로 가족이다. 개인이 타고난 개성에 기초하여 성장하고 강력한 본능에 순응해 가면서 다른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을 배우는 곳이 가족이다. 개인은 타고난 개성에 기초해 성장하고 강력한 본능에 순응해가면서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을 배우는 곳이 가족이다. 가족은 기본적인 사회적 단위인 동시에 모든 결합체의 원형이다.
꽁트는 사회를 생물유기체에 비유하여 파악하였지만 그것이 초래하는 곤란한도 알고 있었다. 생물유기체는 피부로 둘러싸여 있어서 물리적 경계를 분명하게 갖고 있지만 사회적 단위체는 정신적 결합으로 하나가 된다. 그리고 꽁트는 언어와 종교에 핵심적인 중요성을 부여했다.
언어는 이전세대의 사상과 선조의 문화가 저장되어 온 그릇이다. 언어는 개인을 결합시켜주고 이전 세대와 연계시켜준다. 공통의 언어는 연대와 합의의 필수적 요소이다. 또한 공통의 종교적 신념은 개인들의 상이함에 공통의 바탕을 제공하고 인간의 이기적 성향을 극복하게 해준다. 또한 동료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들을 초월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종교는 사회질서의 근원이다. 정부의 요구를 정당한 것으로 만드는 데에도 필수적이다. 어떤 세속적 권력도 정신적 힘의 지지 없이는 존속할 수 없다.
언어와 종교 외에 사람들을 서로 결합시키는 제3의 요인은 분업이다. 원칙적으로 분업은 개인의 능력이나 재능의 발전을 도와주면서도 각 개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되어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함으로써 개인들의 연대성에도 공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분업은 일반적 정신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을 소멸하거나 제한하게 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꽁트는 언어, 종교, 분업 등 사회제도를 고찰할 때, 전체적인 사회질서를 파악했고 이것은 기능주의적 사회 분석의 최초로 파악된다.
9. 규범적 학설
꽁트는 앞으로 다가올 실증사회, 즉 새로운 실증적 종교의 정신적 힘과 은행과 기업 지배자들의 정신이 지배할 사회에 대한 복잡한 청사진을 그렸다. 그들은 과학적인 사회학자인 동시에 설교자이기도 하고 우월한 지식의 힘을 사용하여 사람들의 의무와 복종을 강조함으로써 도덕적 지도자가 되고 그 집단의 검열관이 될 것이다. 미래의 실증적 사회통치(sociocracy) 아래서는 선악에 대한 실증적인 지식을 획득한 인류교의 성직자(동시에 과학자)가 사람들을 의무에 굳게 묶고, 타고난 권리라는 파괴적인 사상을 어떤 형태로든 나타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과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인류교의 최고사제가 조화와 정의, 진실과 평등으로 전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새로운 실증적 질서는 사랑을 원리로, 질서를 기초로 그리고 진보를 목표로 이루어질 것이다. 지금까지 인류가 지녀온 이기적 성향은 이타주의로 바뀔 것이며 개인들은 동료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할 것이다. 또한 과거와 현재에 대한 지식과 법칙적으로 결정된 방향을 통하여 미래에 대한 예측을 구체화할 수 있는 지혜를 지닌, 영혼을 다루는 실증적 공학자들이 따뜻한 존경을 받을 것이다. 꽁트는 특히 말년 동안 사회과학자로뿐만 아니라 인류를 모든 고뇌로부터 구원 할 수 있는 새로운 종교의 예언자, 또는 창시자로 자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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