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회학자는 피에르 부르디외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부르디외를 공부하는데 정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오늘은 그의 생일이라 그간 공부한 내용을 바탕으로 부르디외 사회학의 쓸모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 부르디외의 위치가 다소 애매하다고 생각한다. 학계에서 부르디외는 어디서나 통용되지만, 생각보다 깊게 연구되고 있지는 못하는 것 같고, 학계 밖에서는 생각보다 중요도나 관심이 부르디외가 가진 역량에 비해 떨어지는 것 같다. 아쉬운 마음에 부르디외가 중요한 이유를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이 글은 인문사회 분야에 관심이 있는 독자나 사회학을 공부하는 학생이 보았으면 좋겠다.
1. 부르디외 사회학의 범위
나는 어떤 사회학자가 “대가”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때, 한 선생님께 배운 대로 그 학자가 가진 이론의 스케일, 범위를 따지곤 한다. 다시 말해 특정 학자의 이론이 사회를 어디부터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부르디외 사회학은 사회 가장 말단의, 최소 단위부터 가장 고차원적이고 복잡한 단위까지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가지고 있다. 구체적으로 부르디외 사회학은 인간 행위의 최소 단위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실천부터, 장(field)이라는 분화된 사회공간까지 포괄하는 범위를 가지고 있다. 부르디외 사회학을 차용한 다양한 연구가 존재하며 그것은 미시사회학부터 거시적인 사회 변동을 분석하는 것까지 포괄된다. 이러한 것이 부르디외 사회학이 가진 종적인 범위를 말했다면 동시에 부르디외는 횡적으로도 분화된 근대사회의 다양한 분야를 포괄할 수 있는 이론적 스케일을 가진다. 국가, 정치, 예술, 교육 등 사회 다양한 영역을 다룬 부르디외의 연구가 있을뿐만 아니라 그를 활용한 다양한 연구 역시 축적되어 있다. 예를 들면 부르디외 사회학을 적용한 국제정치 연구까지 다수 존재한다. 한국에 번역된 책으로는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소(EHESS) 사회학과의 이브 드잘레이와 사우스웨스턴 로스쿨 학장인 브라이언 가스가 집필한 『궁정전투의 국제화』 같은 책이 있다.
2. 이론과 이론적 서사theoretical narrative, 이론의 생산성
이상길 선생님께서는 한 기사에서 ‘이론’과 ‘이론적 서사’에 관해 다루신 적이 있다. 이론적 서사란 “사회적 사실들을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데 쓸모 있는 행위자 목록, 관계 유형, 상호작용의 양상과 특징, 변화의 단계와 과정, 그리고 윤리적 판단 기준 등으로 짜여있다.” 이론적 서사는 사회의 개인이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틀을 제공한다. 이상길 선생님의 말처럼 모든 이론이 이론적 서사를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이론적 서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경험 연구에 효율적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도 아니다. 글에 제시된 예처럼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 근대』는 훌륭한 이론적 서사를 제공하지만, 그 이론을 바탕으로 경험 연구에 적용하기는 어려운 한계를 지닌다. 하지만 부르디외의 사회학 이론은 사회세계를 보고 이해할 수 있는 이론적 서사를 제공하고 동시에 경험 연구를 촉진하는 효율적 프로그램 역시 제공한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이론은 많지 않다.
3. 이론 내재적 역량
부르디외 사회학 이론은 경험 연구를 촉진하는 프로그램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이론 내재적 역량을 가지고 있다. 즉 이론 자체의 단단함이 존재한다. 이런 까닭에 부르디외 사회학은 그 자체로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순수 이론 차원에서 부르디외 사회학 자체를 대상으로 연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사회학에는 다양한 사회학자가 있고, 다양한 이론도 존재한다. 하지만 특정 사회학자 혹은 그 사회학자의 몇몇 테마를 전공한다든지, 특정 학자의 사회학을 주제로 논문을 작성할 만큼 연구할 내용이 있는, 다시 말해 내재적인 역량을 가진 이론은 많지 않다. 부르디외 사회학에서 파생된 다양한 2차 연구서, 용어 사전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4. 경험 연구를 통한 이론화
부르디외는 현대 사회학자 중 가장 탁월하게 경험 연구에 기반해 이론을 도출한 사회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경험 연구에는 다양한 탁월성이 존재한다. 우선 부르디외는 질적 연구와 양적 연구를 모두 수행했고, 이를 통해 자신의 이론을 구성했다. 초기 알제리에서 진행된 연구는 프랑스 특유의 인류학적 전통을 기반으로 진행한 질적 연구였고,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구별』에는 양적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렇게 진행된 부르디외의 연구는 고전이 되어 사회(과)학 통계 분석에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변수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렇듯 부르디외의 연구는 질적 연구를 수행하는 이론적 배경은 물론이고, 양적 연구를 구성하는 다양한 변수에도 적용되고 있으며 역시 이러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이론은 많지 않다. 더불어 질적 연구를 통해 개념을 구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사회조사를 수행하는 것 자체로 사회학 연구의 훌륭한 전범이라고 볼 수 있다.
5. 사회학의 유산: 고전사회학의 종합
부르디외 연구자 김동일 선생님은 부르디외를 뒤르켐과 베버의 과학적 엄밀성으로 무장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지칭하고, 『부르디외 사회학 입문』에서 파트리스 보네위츠는 부르디외를 뒤르켐주의자로 명명한다. 한편에서는 부르디외 장 개념의 결정적 세계상이 베버의 종교사회학 연구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에 그를 베버주의자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나는 여기에서 그가 어떤 주의자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부르디외는 자신을 어떤 ‘-주의’로 명하지 않고 고전사회학자와 실용적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한다.) 부르디외에게 꾸준히 고전사회학자의 이름이 붙는 것은 그가 그만큼 충실하게 고전사회학의 성과를 전유했기 때문이다. 부르디외 사회학은 사회학 전통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부르디외는 정규 교육에서는 철학을 배운 것이 전부였지만, 일관되게 사회학자로서 정체성을 유지하였다. 몇몇 현대 사회학자는 사회학자이면서 철학자인 반면 부르디외는 확고하게 사회학 영역을 개척했는데, 이 근본에는 고전사회학이 있었다. 사회학의 독립적인 유산을 충분히 전유함으로써 사회학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부르디외 이론은 사회학을 공부하는 많은 사람에게 큰 자양분이 된다.
조금 덧붙이자면 부르디외는 반골 기질이 강했고, 이러한 성향 덕분에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비주류로 여겨지던 철학자를 중요하게 공부했다고 한다. 비주류 철학을 공부하고 20대 후반부터 독일어를 독학하며 독일철학과 사회학을 탐구한 것 역시 부르디외의 작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
6. 생애
어떤 이론가를 평가할 때, 그의 저작을 내재적이고 절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생애라는 외적 요소를 보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런 것이 어떨 때는 종종 도움이 되기도 한다. 나는 부르디외의 생애가 멋있다고 생각하고 그의 작업에 매력을 더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그는 파리 태생이 아닌 프랑스의 변방 출신으로 성골 중 성골만 모인 파리 지식인 사회에서 여러 차별을 겪은 사람이다. 더불어 그는 동시대 사회학자 중 유일하게 알제리 전쟁을 경험하기도 했다. 프랑스 좌파가 파리에서 르몽드에 서명함으로써 알제리 전쟁에 반대할 때 부르디외는 알제리 현장 연구를 통해 알제리의 사실을 외부에 알렸다. 이외에도 1980년 이후 학계 정점에 선 부르디외는 다양하게 사회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는 입지전적 인물이고,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지식인이었다. 여기에 모두 적을 수는 없지만 그는 그의 삶 면면에서 용기 있는 사람이었으며 애정 어린 시선으로 타인을 보던 사람이었다고 느낀다.
7. 국제적 명성
부르디외는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사회학자로서 이 시기 사회학자 중 국제적으로 가장 성공한 사회학자이기도 하다. 부르디외 사회학은 영미, 독일 등을 포함한 유럽 전역의 사회학계와 일본 등 선진국에 먼저 수용되었고, 이후 다른 문화권에 수입되었다. 개인적으로 주목하는 것은 특히 2010년대 중반 전후로 중국에서 부르디외가 급격히 소개되고 있다는 점이며, 부르디외를 이론적 배경으로 활용하는 다양한 연구도 많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듯 부르디외는 국제적으로 동등하게 높은 명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부르디외 사회학이 가진 역량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언어 능력의 한계로 모두 확인할 수는 없겠지만, 모든 문화권에 걸쳐 부르디외의 이론은 사회학 연구를 촉진하는 영감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8. 부르디외를 읽으려 한다면
지금까지 부르디외 사회학이 가진 가치를 이야기했다. 이 글을 통해 부르디외를 읽거나 공부하길 원하는 분께 다음과 같은 책을 추천한다.
김동일 『피에르 부르디외』 커뮤니케이션북스
이 책은 부르디외 사회학 전반을 짧게 정리한 책이다. 부르디외 사회학 전반을 소묘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피에르 부르디외·로익 바캉 『성찰적 사회학으로의 초대』 이상길 역 그린비
내가 가장 추천하는 책이다. 이 책은 부르디외가 프랑스가 아닌 미국에서 자신의 이론을 소개하는 목적을 가지고 진행된 인터뷰와 글로 구성되어 있는데, 부르디외 사회학을 알고 있고, 또 어느 정도 틀이 잡힌 분이라면 이 책부터 읽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책에 있는 이상길 선생님이 쓰신 부르디외 사회학 주요 개념 역시 굉장히 좋다. 사전처럼 신뢰하며 활용할 수 있는 좋은 내용이기도 하다.
피에르 부르디외·로제 샤르티에 『사회학자와 역사학자』 이상길·배세진 역 킹콩북
이 책은 아날학파 역사학자인 샤르티에와 부르디외가 나눈 대담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은 얇으면서도 부르디외 사회학 전반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부르디외 사회학을 어느 정도 기초적으로 이해하고 있을 때 읽어야 더 도움이 될 책이라서 앞선 책을 먼저 읽고 읽는 걸 추천한다.
이상길 『아틀라스의 발』
이 책은 한국 부르디외 단행본 중 최고의 책이다. 사회학자 정수복 선생님께서는 프랑스나 다른 언어권에도 이 정도의 책은 많지 않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다만 연구서이기 때문에 다소 고난도다. ‘입문’에 초점을 맞춘다면 부르디외의 생애를 다룬 이 책 1부 <지식인의 초상>을 읽는 걸 추천한다. 이 부분을 통해 부르디외 생애 전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부르디외의 생일을 맞아 부르디외를 읽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하는 마음에 부르디외 사회학이 가진 중요성을 이야기해봤다. 하지만 당연히 그가 신도 아니고 무결점의 학자였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부르디외를 좋아하지만, 누구보다도 그가 가진 한계와 비판점을 찾기 위해 골몰했다. 예를 들어 이론에 있어 부르디외는 모순점을 가지고 있다. 또 삶에 대한 증언에서도 몇몇 문제를 안고 있기도 하다. 이 글로 인해 한두 사람이라도 부르디외를 더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고 동시에 비판적으로 대화하며 읽어나갔으면 하기도 한다. 길면서도 쓸모 없는 글을 여기까지 읽어주심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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