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회학자는 피에르 부르디외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부르디외를 공부하는데 정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오늘은 그의 생일이라 그간 공부한 내용을 바탕으로 부르디외 사회학의 쓸모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 부르디외의 위치가 다소 애매하다고 생각한다. 학계에서 부르디외는 어디서나 통용되지만, 생각보다 깊게 연구되고 있지는 못하는 것 같고, 학계 밖에서는 생각보다 중요도나 관심이 부르디외가 가진 역량에 비해 떨어지는 것 같다. 아쉬운 마음에 부르디외가 중요한 이유를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이 글은 인문사회 분야에 관심이 있는 독자나 사회학을 공부하는 학생이 보았으면 좋겠다.
 
1. 부르디외 사회학의 범위
나는 어떤 사회학자가 “대가”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때, 한 선생님께 배운 대로 그 학자가 가진 이론의 스케일, 범위를 따지곤 한다. 다시 말해 특정 학자의 이론이 사회를 어디부터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부르디외 사회학은 사회 가장 말단의, 최소 단위부터 가장 고차원적이고 복잡한 단위까지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가지고 있다. 구체적으로 부르디외 사회학은 인간 행위의 최소 단위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실천부터, 장(field)이라는 분화된 사회공간까지 포괄하는 범위를 가지고 있다. 부르디외 사회학을 차용한 다양한 연구가 존재하며 그것은 미시사회학부터 거시적인 사회 변동을 분석하는 것까지 포괄된다. 이러한 것이 부르디외 사회학이 가진 종적인 범위를 말했다면 동시에 부르디외는 횡적으로도 분화된 근대사회의 다양한 분야를 포괄할 수 있는 이론적 스케일을 가진다. 국가, 정치, 예술, 교육 등 사회 다양한 영역을 다룬 부르디외의 연구가 있을뿐만 아니라 그를 활용한 다양한 연구 역시 축적되어 있다. 예를 들면 부르디외 사회학을 적용한 국제정치 연구까지 다수 존재한다. 한국에 번역된 책으로는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소(EHESS) 사회학과의 이브 드잘레이와 사우스웨스턴 로스쿨 학장인 브라이언 가스가 집필한 『궁정전투의 국제화』 같은 책이 있다.
 
2. 이론과 이론적 서사theoretical narrative, 이론의 생산성
이상길 선생님께서는 한 기사에서 ‘이론’과 ‘이론적 서사’에 관해 다루신 적이 있다. 이론적 서사란 “사회적 사실들을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데 쓸모 있는 행위자 목록, 관계 유형, 상호작용의 양상과 특징, 변화의 단계와 과정, 그리고 윤리적 판단 기준 등으로 짜여있다.” 이론적 서사는 사회의 개인이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틀을 제공한다. 이상길 선생님의 말처럼 모든 이론이 이론적 서사를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이론적 서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경험 연구에 효율적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도 아니다. 글에 제시된 예처럼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 근대』는 훌륭한 이론적 서사를 제공하지만, 그 이론을 바탕으로 경험 연구에 적용하기는 어려운 한계를 지닌다. 하지만 부르디외의 사회학 이론은 사회세계를 보고 이해할 수 있는 이론적 서사를 제공하고 동시에 경험 연구를 촉진하는 효율적 프로그램 역시 제공한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이론은 많지 않다.
 
3. 이론 내재적 역량
부르디외 사회학 이론은 경험 연구를 촉진하는 프로그램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이론 내재적 역량을 가지고 있다. 즉 이론 자체의 단단함이 존재한다. 이런 까닭에 부르디외 사회학은 그 자체로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순수 이론 차원에서 부르디외 사회학 자체를 대상으로 연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사회학에는 다양한 사회학자가 있고, 다양한 이론도 존재한다. 하지만 특정 사회학자 혹은 그 사회학자의 몇몇 테마를 전공한다든지, 특정 학자의 사회학을 주제로 논문을 작성할 만큼 연구할 내용이 있는, 다시 말해 내재적인 역량을 가진 이론은 많지 않다. 부르디외 사회학에서 파생된 다양한 2차 연구서, 용어 사전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4. 경험 연구를 통한 이론화
부르디외는 현대 사회학자 중 가장 탁월하게 경험 연구에 기반해 이론을 도출한 사회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경험 연구에는 다양한 탁월성이 존재한다. 우선 부르디외는 질적 연구와 양적 연구를 모두 수행했고, 이를 통해 자신의 이론을 구성했다. 초기 알제리에서 진행된 연구는 프랑스 특유의 인류학적 전통을 기반으로 진행한 질적 연구였고,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구별』에는 양적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렇게 진행된 부르디외의 연구는 고전이 되어 사회(과)학 통계 분석에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변수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렇듯 부르디외의 연구는 질적 연구를 수행하는 이론적 배경은 물론이고, 양적 연구를 구성하는 다양한 변수에도 적용되고 있으며 역시 이러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이론은 많지 않다. 더불어 질적 연구를 통해 개념을 구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사회조사를 수행하는 것 자체로 사회학 연구의 훌륭한 전범이라고 볼 수 있다.
 
5. 사회학의 유산: 고전사회학의 종합
부르디외 연구자 김동일 선생님은 부르디외를 뒤르켐과 베버의 과학적 엄밀성으로 무장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지칭하고, 『부르디외 사회학 입문』에서 파트리스 보네위츠는 부르디외를 뒤르켐주의자로 명명한다. 한편에서는 부르디외 장 개념의 결정적 세계상이 베버의 종교사회학 연구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에 그를 베버주의자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나는 여기에서 그가 어떤 주의자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부르디외는 자신을 어떤 ‘-주의’로 명하지 않고 고전사회학자와 실용적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한다.) 부르디외에게 꾸준히 고전사회학자의 이름이 붙는 것은 그가 그만큼 충실하게 고전사회학의 성과를 전유했기 때문이다. 부르디외 사회학은 사회학 전통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부르디외는 정규 교육에서는 철학을 배운 것이 전부였지만, 일관되게 사회학자로서 정체성을 유지하였다. 몇몇 현대 사회학자는 사회학자이면서 철학자인 반면 부르디외는 확고하게 사회학 영역을 개척했는데, 이 근본에는 고전사회학이 있었다. 사회학의 독립적인 유산을 충분히 전유함으로써 사회학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부르디외 이론은 사회학을 공부하는 많은 사람에게 큰 자양분이 된다.
 
조금 덧붙이자면 부르디외는 반골 기질이 강했고, 이러한 성향 덕분에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비주류로 여겨지던 철학자를 중요하게 공부했다고 한다. 비주류 철학을 공부하고 20대 후반부터 독일어를 독학하며 독일철학과 사회학을 탐구한 것 역시 부르디외의 작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
 
6. 생애
어떤 이론가를 평가할 때, 그의 저작을 내재적이고 절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생애라는 외적 요소를 보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런 것이 어떨 때는 종종 도움이 되기도 한다. 나는 부르디외의 생애가 멋있다고 생각하고 그의 작업에 매력을 더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그는 파리 태생이 아닌 프랑스의 변방 출신으로 성골 중 성골만 모인 파리 지식인 사회에서 여러 차별을 겪은 사람이다. 더불어 그는 동시대 사회학자 중 유일하게 알제리 전쟁을 경험하기도 했다. 프랑스 좌파가 파리에서 르몽드에 서명함으로써 알제리 전쟁에 반대할 때 부르디외는 알제리 현장 연구를 통해 알제리의 사실을 외부에 알렸다. 이외에도 1980년 이후 학계 정점에 선 부르디외는 다양하게 사회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는 입지전적 인물이고,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지식인이었다. 여기에 모두 적을 수는 없지만 그는 그의 삶 면면에서 용기 있는 사람이었으며 애정 어린 시선으로 타인을 보던 사람이었다고 느낀다.
 
7. 국제적 명성
부르디외는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사회학자로서 이 시기 사회학자 중 국제적으로 가장 성공한 사회학자이기도 하다. 부르디외 사회학은 영미, 독일 등을 포함한 유럽 전역의 사회학계와 일본 등 선진국에 먼저 수용되었고, 이후 다른 문화권에 수입되었다. 개인적으로 주목하는 것은 특히 2010년대 중반 전후로 중국에서 부르디외가 급격히 소개되고 있다는 점이며, 부르디외를 이론적 배경으로 활용하는 다양한 연구도 많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듯 부르디외는 국제적으로 동등하게 높은 명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부르디외 사회학이 가진 역량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언어 능력의 한계로 모두 확인할 수는 없겠지만, 모든 문화권에 걸쳐 부르디외의 이론은 사회학 연구를 촉진하는 영감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8. 부르디외를 읽으려 한다면
지금까지 부르디외 사회학이 가진 가치를 이야기했다. 이 글을 통해 부르디외를 읽거나 공부하길 원하는 분께 다음과 같은 책을 추천한다.
 
김동일 『피에르 부르디외』 커뮤니케이션북스
이 책은 부르디외 사회학 전반을 짧게 정리한 책이다. 부르디외 사회학 전반을 소묘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피에르 부르디외·로익 바캉 『성찰적 사회학으로의 초대』 이상길 역 그린비
내가 가장 추천하는 책이다. 이 책은 부르디외가 프랑스가 아닌 미국에서 자신의 이론을 소개하는 목적을 가지고 진행된 인터뷰와 글로 구성되어 있는데, 부르디외 사회학을 알고 있고, 또 어느 정도 틀이 잡힌 분이라면 이 책부터 읽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책에 있는 이상길 선생님이 쓰신 부르디외 사회학 주요 개념 역시 굉장히 좋다. 사전처럼 신뢰하며 활용할 수 있는 좋은 내용이기도 하다.
 
피에르 부르디외·로제 샤르티에 『사회학자와 역사학자』 이상길·배세진 역 킹콩북
이 책은 아날학파 역사학자인 샤르티에와 부르디외가 나눈 대담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은 얇으면서도 부르디외 사회학 전반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부르디외 사회학을 어느 정도 기초적으로 이해하고 있을 때 읽어야 더 도움이 될 책이라서 앞선 책을 먼저 읽고 읽는 걸 추천한다.
 
이상길 『아틀라스의 발』
이 책은 한국 부르디외 단행본 중 최고의 책이다. 사회학자 정수복 선생님께서는 프랑스나 다른 언어권에도 이 정도의 책은 많지 않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다만 연구서이기 때문에 다소 고난도다. ‘입문’에 초점을 맞춘다면 부르디외의 생애를 다룬 이 책 1부 <지식인의 초상>을 읽는 걸 추천한다. 이 부분을 통해 부르디외 생애 전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부르디외의 생일을 맞아 부르디외를 읽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하는 마음에 부르디외 사회학이 가진 중요성을 이야기해봤다. 하지만 당연히 그가 신도 아니고 무결점의 학자였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부르디외를 좋아하지만, 누구보다도 그가 가진 한계와 비판점을 찾기 위해 골몰했다. 예를 들어 이론에 있어 부르디외는 모순점을 가지고 있다. 또 삶에 대한 증언에서도 몇몇 문제를 안고 있기도 하다. 이 글로 인해 한두 사람이라도 부르디외를 더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고 동시에 비판적으로 대화하며 읽어나갔으면 하기도 한다. 길면서도 쓸모 없는 글을 여기까지 읽어주심에 감사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Liquid Modernity

 

지그문트 바우만의 Liquid Modernity 번역에 관해
 
바우만은 최근 10년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회학자다. 바우만 컨텐츠의 매력과 이런 분위기에 부응하듯, 이일수 선생님의 번역으로 <Liquid Modernity>가 액체 “근대”가 아닌 액체 “현대”로 복간됐다. 이뿐만 아니라 윤태준 선생님이 번역하신 <유행의 시대>에서도 Liquid Modernity는 유동하는 “현대”로 번역됐다. 나는 이 번역이 아쉽게 느껴져 글을 쓴다.
 
이일수 선생님의 경우, Modernity란 19세기 서구 산업화 이후 오늘까지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며, 바우만이 과거의 Solid Modernity과 구별되는 오늘날의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만든 개념인 Liquid Modernity을 표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에 오늘날을 구분하는 의미에서 ‘현대’를 사용했다고 밝힌다. 윤태준 선생님은 더 단호한데, “‘modern’을 근대로 옮기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라고 말하며 바우만이 가리키는 근대성의 두 국면(Solid와 Liquid)에서 Solid를 가리킬 때만 Modernity는 근대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거다. 따라서 “‘액체’라는 표현은 절대로 ‘근대’라는 단어를 꾸미는 말이 될 수 없다.”라고도 말한다.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회학에서 근대성Modernity이라는 주제는 매우 각별하다. “사회학은 근대성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정의가 있을 정도로. 19세기 이후 근대성을 연구한 사회학은 20세기 중반 이후의 사회를 어떤 근대로 볼 것인지 고민하는데 하버마스는 근대를 미완의 기획으로 보면서 여전히 근대의 자원을 신뢰하고 료타르, 마페졸리, 보드리야르 등은 근대와의 급격한 단절을 설정하면서 국민-국가, 시민사회, 정당, 직업체계, 제도 등의 근대적인 것으로는 더는 사회를 설명할 수 없다고 본다. 이들은 포스트 모더니티 담론으로 분류된다.
 
반면 바우만은 이론은 후기 근대(Late Modenity)로 분류된다. 앞서 설명한 양자와 다르게, 19세기 후반과 20세기 후반 사회의 차이는 긍정하면서도 새로운 국면의 사회가 시작되었다고 보지 않으면서도 이런 문제를 미완의 기획이 아닌 ‘근대성’의 연속선상에서 파악하는 시도를 후기 근대론으로 분류하고, 대표적 학자로는 바우만, 기든스, 울리히 벡 등이 있다. 이들에게 중요한 점은 20세기 후반 사회가 분명 다르긴 하나, 이것이 급격한 단절 속 전례 없는 새로운 근대는 아니라는 거다. 지금 목도하는 사회 역시 이전 근대성의 결과다.
 
이런 근거에 따라 ‘Liquid Modernity’의 번역어는 ‘액체 근대’라고 생각한다. 바우만은 Solid Modernity와 Liquid Modernity의 차이를 이야기하지만, 근대성의 연속 속에서 급격한 단절이 있다거나 사회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고 보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도 포스트 모더니티에 관한 책을 내기도 한다. <액체 근대>(1999) 출판 훨씬 전인 1987년부터에. 하지만 이것은 건축양식, 예술 사조로서의 사상을 전유한 것이지 사회의 변동을 설명한 것은 아니고 자신을 탈근대론자로 분류하는 것에도 반대했다.
 
『액체 근대』가 출간된 후 한 대담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포스트 모더니티라는 어휘 자체가 목욕물(기존 근대에 관한 설명)를 버리며 아기(근대성)를 함께 버리는 것을 피하려 액체 근대를 조어했다고. 포스트 모더니티라는 단어는 근대성 이후를 암시하는 거라고 못 박으면서 말이다.
 

“21세기에 진입한 우리 사회는 20세기에 진입했던 과거 사회 못지 않은 ‘근대성’을 지닌다. 다만 좀 다른 방식의 근대라고 할 수 있겠다.”

지그문트 바우만. 2009. <액체 근대>. 이일수 역. 47p. 

 
모더니티를 현대로 옮길지, 근대로 옮길지는 여전히 합리적인 이견이 존재할 수 있는 사안이다. 더불어 다른 부분은 고려하더라도 여전히 중요한 것은 기존 번역이 좋은 번역이라는 것이고, 바우만의 어려운 논의를 번역하고 출간해주신 이일수, 윤태준 선생님, 그리고 필로소픽, 오월의봄 출판사에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다.
 
참고
김홍중. 2013. “후기근대적 전환.” 『현대사회학이론』. 한국사회학회. 다산출판사.
Bauman, Zygmunt and Tester, Keith. 2001. Conversations with Zygmunt Bauman. Cambridge: Polity Press.
Dawson, Matt. 2010. “Bauman, Beck, Giddens and our understanding of politics in late modernity.” Journal of Power. 3(2). 189–207.
Outhwaite, W. 2009. “Canon Formation in Late 20th-Century British Sociology.” Sociology. 43(6). 1029–1045.
Tester, Keith. 2004. The Social Thought of Zygmunt Bauman. London: Palgrave Macmillan.

 

지그문트 바우만(1925~2017)

사회과학적 역사 연구의 진일보 <임진왜란>

말 그대로 “압도적인”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이런 표현을 제가 즐겨쓰진 않는 걸 아실 겁니다. 화제의 책, 김영진 선생님의 『임진왜란 – 2년 전쟁 12년 논쟁』입니다. 한국인에게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적인 침략, 선조의 무능, 이순신을 포함한 국군의 선전, 의병의 봉기 정도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순신”으로 기억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 7년 전쟁에서 직접적 교전 기간은 그리 길지 않은 2년여의 기간이었으며 이 시기에 있었던 한·중·일의 군사적 대결을 넘어 외교와 정책 등의 비군사적 대치는 12년 정도였기에 이를 고려해 임진왜란을 국제관계의 측면에서 재해석합니다.

이 책이 흥미롭고, 또 제가 “압도적”이라고 한 이유는 저자가 ‘정치학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정치학과에서 방법론 수업을 들을 때 학위 논문 이야기를 하시면서 교수님은 이순신을 외교적으로 분석하려던 지도학생이 있었는데, 이순신으로 논문으로 쓰려면 당장 당시 조선의 1차 자료뿐 아니라 일본의 이순신 자료까지 읽어야 해서 그 주제로는 논문을 쓸 수 없다고 말했다고 얘기해주셨습니다. 게다가 16~17세기 자료는 근대 이후의 언어와는 차이가 있기도 하죠.

아무튼 사학자가 이 주제를 다룬다면 사료 분석 능력은 탁월하겠지만 사회과학만큼의 이론적 틀이나 해석이 범위는 비교적으로 제한될 것이고, 반대로 사회과학자가 다룬다면 이론적 틀, 해석의 범위는 비교적 풍부하겠지만 사료 분석 능력은 부족할 수밖에 없을 텐데, 김영진 선생님은 그 어려운 걸 해내신 겁니다. 그것도 참고문헌까지 1,000쪽 분량으로 묵직하고 성실하게요. 임진왜란은 한중일이 전면전을 벌인 유일한 사례이지만 한국, 중국, 일본의 원사료를 사용한 통사가 출판된 건 세계적으로 최초라고 합니다.

현재는 언제나 뜨거운 무엇입니다. 앞서 지적했듯, 기존까지의 임진왜란 연구는 각 나라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그래서 편중된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죠. 한국도 마찬가지였죠. 한편으로 타국의 연구는 패권주의인 시각에 긴박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영진 선생님께서는 자국 중심주의, 패권주의 등을 극복하기 위해 국수주의도 민족주의도 아닌 입장에서 균형 잡힌 임진왜란 12년의 통사를 재구성하기 시작합니다.

임진왜란을 한국의 측면에서, 군사적 측면에서만 본다면 전쟁의 신, 이순신이 남겠지만, 시각을 넓혀 국제정치적 측면에서, 비군사적 측면에서 본다면 이순신은 상대화될 수 있습니다. 책을 읽어나가면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의 전쟁이 아닌, 조선이라는 전장에서의 명과 일본의 전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외교적 측면에서 조선의 왕은 명의 차관급인 송응창같은 지위였고, 당연히 왕 이하의 모든 신하는 송응창의 부하였지, 대등할 수 없었습니다. 조선은 외교적 선택에 있어 명나라에 모든 걸 위임하려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조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조선의 국력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임진왜란을 한층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볼 수 있게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비군사적 측면에만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닙니다. 이순신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명 조정 역시 이순신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이순신의 승리가 국제관계에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었기 때문이죠.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의 승리로 인해 명나라는 자국의 해상 방어가 비교적 자유로워졌고 이를 통해 조선에 원활한 원군이 가능해졌습니다. 이 책은 군사적 요소 역시 국제관계의 측면에서 해석합니다.

저는 국제관계사 측면에서 역사를 접근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우리에게 이순신으로 표상되던 임진왜란을 보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게 해줍니다. 이런 사고의 전환 속에서 인식의 운신이 넓어지고, 사유의 폭이 깊어질 수 있습니다. 기존에 알았던 것을 극복하는 건 어떨 때는 괴로울 수도 있지만 그를 통해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16세기 역사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강대국의 세력 균형 사이에 있는 한국의 상황에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합니다. 관심 있는 분께 정말 추천하는 책입니다.

민주주의의 황혼, <꺼져가는 민주주의 유혹하는 권위주의>

1. 이 책, <꺼져가는 민주주의 유혹하는 권위주의>는 저널리스트 앤 애플바움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애플바움은 폴란드의 민주화 운동에 가담했던 동료들과의 추억을 회고하는데,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과 지금은 친구는커녕 얼굴 보기도 민망할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는 겁니다. 애플바움은 ‘왜 민주화 운동의 동지였던 친구들이 이제 권위주의를 추종하게 되었을까’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고, 이 원인을 추적하는 게 이 책의 주제입니다.

2. 이 책은 독특하게 폴란드의 사례로 시작됩니다. 폴란드의 극우·보수정당인 ‘법과 정의당’(Prawo i Sprawiedliwość)이 정치의 주류로 자리 잡게 되는데, 이 정당은 민족주의, 국가주의 정당으로 대표적으로 ‘성소수자 자유 구역’(Streffy wolne odiologyii LGBT) 같은 정책과 연관이 있습니다. 성소수자 자유 구역이란, 노키즈존 같이 성소수자가 없는 지역을 의미합니다. 이 책은 이런 정당이 득세하게 된 원인을 고민해보는 겁니다.

3. 저는 이 책의 제목을 보자마자 트럼프 당선, 브렉시트 등으로 수면에 오른 포퓰리즘의 준동, 영미 정치의 위기를 다루는 일련의 서적이겠구나, 했습니다. 하지만 책을 펴보니 폴란드, 헝가리 등의 동유럽 사례나, 유럽의 사례가 나왔고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살펴보니 이 책도 브렉시트, 트럼프 당선 등의 문제를 영미와 함께 유럽 전체로 확장해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당선은 서구의 충격으로 프랜시스 후쿠야마, 마크 릴라, 그리고 마이클 샌델 같은 굴지의 정치철학자도 이 문제를 다뤄왔습니다.

4. 앤 애플바움도 동일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하지만 애플바움은 이 문제를 공화주의, 자유주의의 정치철학적 논의와 같이 거창하고 거대한 문제로 다루지 않고, 권위주의에 빠지게 되는 심리적 기제를 다루며 보다 실제적이고 우리 생활에 밀접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노지탤지어의 부활, 능력주의에 대한 실망, 음모론의 부상과 더불어 현대적인 담론 자체의 논쟁적이고 호전적인 성격도 현재 위기의 한 원인이다.”라고 분석합니다.

5. 그렇게 이 책은 트럼프 당선, 브렉시트와 같은 문제뿐 아니라 우리에게는 비교적 생경한 유럽에서의 포퓰리즘의 준동과 극우에 가까운 보주 정당의 부상을 보다 미시적이고 친근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교양으로서 새로운 정보도 많이 담고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도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외에는 ‘서구’에 큰 관심이 없는 게 사실인데, 유럽 각국 정치 상황에 대한 여러 내용을 알 수 있어서 흥미로웠습니다.

6. 애플바움은 자유주의자입니다. 굳이 분류하자면, 우파 자유주의자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책을 보실 때 고려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책에 내용이 많은 편인데, 감상과 맥락 위주로 책에 관해 적어봤습니다. 아쉬움이 있다면, 아무래도 책이 생소한 유럽 정치를 많이 다루고 있어서 각주를 통해, 더 자세한 내용을 소개해줬으면 독서에 도움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아쉬움이 있긴 했습니다. 물론 번역이 좋았고요, 기본적인 어휘를 설명하는 각주가 도움이 됐습니다.

7. 곁가지로 이야기하자면 한국의 상황은 어떨까요? 한국에는 이런 권위주의 정당이 득세하지 않을까요? 저는 한국의 기본적인 상황 자체가 이미 그런 기반 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에서 예를 들고 있는 분리주의(인종주의 기반), 국가주의, 성소수자 인권 옹호, 페미니즘 같은 주제는 한국 주류 정당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있죠. 적극적이지도 않고요. 한국은 집권당 당 대표가 흑인 보고 얼굴이 연탄 같다고 농담하는 사회이기도 합니다. 아시아인에 대한 한국사회의 시선의 평균을 따지면 책에서 나오는 보수·극우 정당과 비슷할 겁니다. 다만 한국은 이민 국가도 아니고 국경도 폐쇄되어 그런 상황을 맞이하지 않을 뿐입니다. 자유주의를 제대로만 지지해도 한국에서는 진보주의자가 될 겁니다. 자신을 자유주의자라고 소개하는 한국 정치인 중에 탈권위주의 입장에서 모병제를 국가에 의한 강제라고 선언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도서정가제의 필요, <도서정가제가 없어지면 우리가 일고 싶은 책이 사라집니다>

현행 도서정가제가 시행된 지 벌써 7년째입니다. 도서정가제가 제정되는 즈음 이른바 단통법도 시행되면서, 도서정가제는 ‘책통법’이라는 부정적 의미로 통용되곤 했죠. 저는 처음부터 도서정가제를 찬성하는 편이었습니다. 한국의 경우 군소 출판사가 많기 때문에, 지나친 경쟁이 발생하면 출판생태계의 다양성이 훼손된다는 이유였습니다. 물론 언제나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학생이라 도서정가제 이전이 종종 그리울 때도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요.

이 책, <도서정가제가 없어지면 우리가 일고 싶은 책이 사라집니다>는 한국출판인회의에서 엮고, 책과사회연구소 대표, 한국출판정책연구회 회장인 백원근 선생님이 집필하셨습니다. 책은 도서정가제의 필요성, 개정(현행) 도서정가제의 긍정적 효과, 도서정가제 폐지론에 대한 반박, 도서정가제의 미래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은 도서정가제의 취지와 논리를 설명하고, 도서정가제 이후 긍정적 변화를 사실에 기반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도서정가제의 핵심은 ‘독서생태계의 다양성 보호’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책은 문화적 공공재입니다. 책에서 나오듯, 책의 공공재적 성격 때문에 부가세가 면제되고, 국비로 도서관을 운영하죠. 그래서 자유시장의 논리보다는 이것을 어느 정도 완화할 규제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게 도서정가제입니다.

출판사와 서점 입장에서는 당연히 ‘대형 출판사’와 ‘대형 서점’이 경쟁에 유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형 출판사 같은 경우 출판 인프라가 형성되어 있어서 가격 경쟁을 시행해도 출판 부수로 이윤을 보전할 수 있을 겁니다. 대형 서점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형 인터넷 서점의 경우에는 출혈적인 가격 경쟁, 과도한 마케팅을 해도 유통가를 지역 서점보다 훨씬 낮게, 많이 구매할 수 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고, 대형 오프라인 서점도 비슷할 겁니다. 하지만 군소 출판사와 지역 독립서점은 이런 경쟁에서 살아남기가 어려워지겠죠. 이런 상황에서 독서생태계의 다양성은 감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서정가제는 전 세계가 시장인 OECD 영어권 국가를 제외한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스위스, 일본 등의 국가에서 시행되고 있습니다. 도서정가제 이후, 출간 도서의 다양성이 크게 증진되었고, 독립서점이 500개 이상 설립되었습니다. 도서정가제가 독서생태계의 다양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방증일 겁니다.

한때, ‘도서정가제 폐지’ 국민청원이 등장해 이슈가 됐죠. 이 책에서는 해당 국민청원에 대한 팩트체크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해당 청원은 1)서점 수 감소 2)독서율 감소 3)책 값 인상 4)출판사업 매출 규모 축소 5)평균 발행부수 감소 6)해외와의 차이를 들어 도서정가제 폐지를 주장했죠. 하지만, 책의 자료에 의하면, 1)참고서 위주가 아닌 독립서점의 증가로 전체 서점 수 증가 2)독서율 감소의 주된 원인은 사회 환경 변화(문체부 국민 독서실태 조사) 3)정가제 이후 상승률이 감소, 전체 소비자 물가지수 대비 적게 상승 4)매출 규모 상승(문체부 통계) 5)소품종 대량 생산에서, 다품종 소량 생산으로 변화 6)한국 출판문화의 차이 등의 이유로 해당 청원에 반박하고 있습니다.

저는 대부분 출판계의 반박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특히 한국의 경우는 책이 정말 싼 편입니다. 해외 서적을 구매하시는 분들은 다 느끼실 겁니다. 저는 큰 틀에서 현행 도서정가제를 지지하는 편이고, 완전 도서정가제로 개정되는 것도 동의합니다. 물론, 출판 시장의 위탁 판매제도나 유통구조 개선은 정가제와 관계없이 개선되었으면 좋겠고, 오래된 서적의 오프라인 할인 판매 등의 개정은 좋지 않나 싶습니다. 독서생태계 다양성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요.

책에서 사용하는 몇몇 논거는 조금 더 따져봐야 할 것 같다 느끼기도 했지만, 이 책은 2,000원짜리 팸플릿이고 간명하게 사실을 전하고 있기에 그런 건 독자의 몫이겠죠. 저는 도서정가제를 지지합니다. 도서정가제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당연히 나만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책은 공공재다’, ‘독서생태계의 다양성이 중요하다’ 같은 가치함축적인 문장에 충분히 다른 생각을 가지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책을 사랑하시는 분이라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시고 출판계의 입장을 충분히 들어보시는 것도 좋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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