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의미?

고전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될 때가 많다. 이전에도 이야기했듯,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고전이라는 데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리더십, 처세술의 고전으로 <군주론>을 본다고 하는데, <군주론>은 아주 제한된 목적과 독자를 대상으로 쓴 책이고, 500년 전 이탈리아라는 시대적, 지역적 맥락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도저히 이 책이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고전인지 모르겠다.

500년 전 군주의 처세를 오늘날의 조직 관계에 적용한다는 게 나는 시대착오적이라고 본다. 물론 <군주론>을 읽음으로써, 내가 리더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책의 효능감이 상승할 수 있다고 보는데, 그게 도움이라면 도움이겠지만 현실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한편으로는 몇천 년 전 성서를 통해서도 교훈을 얻기 때문에 그게 불가능한 문제는 아니겠지만, 성서는 적어도 종교적 의미가 중심이 되는데, <군주론>은 그렇진 않다. 나는 처세술·리더십으로 이 책을 볼 바에는 근대적 조직이 출범한 이후의 책이나, 괜찮은 실용서를 읽는 게 더 유익하다고 본다.

이것도 이전에 이야기한 건데,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보다는 <로마사 논고>가 더 중요한 책이다. 아직도 학계에서 치고받고 싸우는 것 중 하나가 마키아벨리가 과연 군주국을 옹호했느냐, 그 문제이다. 왜 공화주의자 마키아벨리가 군주국을 옹호하는듯한 <군주론>을 썼을까, 그 진의는 무엇일까, 하는. 이게 마키아벨리 <군주론>에 핵심에 맞닿은 질문일 거다. 그런데 이걸 중심으로 본다면 <군주론>은 누구에게나 효용이 있는 책일까? 물론 덕후나, 정치학을 공부하는, 정치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효용이 있겠다. 하지만 공화주의를 이해하는 것도 역시 현대적인 정치서를 읽는 게 도움이라고 생각한다.

고전이라는 걸 읽고, 이게 이 분야와 관련 없는 사람에게는 무슨 효용, 쓸모가 있을까 그런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경우, “물질 중심의 자본주의 탄생을 설명한 마르크스와 대척점에서 관념을 통한 자본주의의 탄생을 설명한 책”이라고 하면 꽤나 재미있겠지만, 베버는 유물론자에 가까울 뿐더러 마르크스와 대결하지도 않았고, 덧붙이자면 마르크스 자신도 일방적 유물론자가 아니었다.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말하고자 하는 건, 서유럽, 거기에서도 개신교에 해당하는 일부 지역의, 자본주의의 여러 요소 중 하나인 자본주의 “정신”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설명하는 책이다. 그러니까 매우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일방적이지도 않게 어떤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칼뱅주의에서 탄생했다!” 이런 게 아니라, 제한적이고, 특정한 몇몇 지역에 있는 자본주의 생활양식을 만들어낸 근대 직업인 일부의 자본주의 정신이 일견 반자본주의적인 종교와 어떻게 선택적으로 맞물려 탄생했는가, 그걸 설명하는 책이라 자본주의의 탄생이라는 거대한 주제와는 다르다. 그렇기에 여러 사람에게 호소할 만한 책인가 싶은 거다.

이 역시 사회학을 공부하는 사람, 그중에서도 이론 사회학이나 질적 연구 쪽에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면 딱히 유효한 내용도 아니라고 본다. 심지어 이쪽에서도 이미 올드한 주제이기 때문에 고전의 의미에서 유효할 것이고. 그래서 요즘 고전의 일반적 효용은 과연 무엇인가 그런 주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있다. 쓸모없음의 쓸모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런 기대 속에서도 사람은 자기 삶이나 세계를 이해하는 데 무언가의 효용, 쓸모를 추구하기 때문에.

'단상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춘익 선생님을 기억하며,  (0) 2021.08.14

한 인친 님께 장춘익 선생님의 부고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나는 장춘익 선생님을 직접 뵌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선생님께서 번역하신 위르겐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과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의 사회』를 보며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의사소통행위이론』의 경우, 번역하는 데에만 4년이 걸렸고, 루만의 『사회의 사회』 역시 비슷한 정도의 시간이 걸린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 장춘익 선생님의 작업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직도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을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또 루만 최후의 기획인 『사회의 사회』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선생님의 이런 노고는 나 같은 후학에게는 등대와 같았다.

전후 독일의 지성, 사회철학, 사회이론은 루만과 하버마스로 대표될 수 있는데, 장춘익 선생님을 통해 현대 지성사의 핵심 중 핵심인 두 명의 이론가를 한국어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단 한 명을 통해 그렇게 될 수 있었다. 신경림이 농무(農舞)에서 자조적으로 말하듯, 한국의 풍토에서 번역하는 것은 “비료값도 안 나오는” 일이다. 그냥 번역도 아니고, 그것도 1,000쪽도 넘고 그저 읽기만 해도 버거운 책을 번역하는 일은 한국 학계의 상황에 비추어 봤을 때, 손해를 넘어 한편으로는 자기희생과 사명감을 요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작업을 묵묵히 해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릴 뿐이다.

선생님이 번역하신 책에는 항상 ‘역자 서문’이 가장 앞에 배치되어 있다. 역자 서문에서 선생님은 번역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자신이 범했을지도 모르는 겸손하게 인정하며 번역 제안을 부탁한다. 메일 주소와 함께. 다시, 나는 선생님을 한 번 뵌 적도 없지만, 선생님께서 번역하신 하버마스와 루만을 공부할 때에는 언제나 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곤 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선생님께 안식이 있길 바란다.

 

올해 2월 5일에.

'단상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전의 의미?  (0) 2021.08.1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