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 슈슈의 모든 것


연예인들의 사사건건들은 인구(人口)에 쉽게 회자(膾炙)되고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한다. 서태지와 이지아가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였다. 서태지는 당시에 광적인 팬들의 반응을 우려해서 결혼한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연예인은 여러 분야가 있지만 크게 가수와 연기자로 나누어 보았을 때, 서태지는 가수이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생긴 인물 1위로 꼽히는 장동건은 결혼발표를 하여도, 물론 전성기 때의 인기는 아니라고 하지만, 그 결혼을 반대하는 광적인 반응 등의 큰 파장이 없었다. 대표적인 인물들을 뽑아보긴 하였지만 대개 배우에 비해 가수의 팬이 더욱 광적인 활동을 하는 것 같다. 가수 베이비복스 독극물 사건이나, 사생활을 수집하는 일명 사생팬들도 대부분 가수들에게 있는데 이런 것을 예로 꼽을 수 있다. 배우는 비교적 시각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데에 그 중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가수는 비교적 감성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데에 그 중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가수들에게 더욱 공감하고 그들에게 광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영화의 시작은 특이하다. 고요하고 푸른 들판에서 한 아이가 음악을 듣는데, 이와는 반대로 채팅화면이 어지럽게 화면은 채운다. 이와 같이 영화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 가운데 굉장히 혼란스러운 일탈을 담아낸다. 영화의 초점은 유이치에게 맞춰 있다. 유이치는 추측이지만 재혼 가정의 아이일 것이다. 그러나 CD를 훔치면 훈계하는 도덕적인 어머니 아래에서 자랐다. 하지만 유이치는 사회에서 보았을 때, 불량한 아이들과 함께 교제하면서 CD를 훔치는 등의 일탈을 한다. 영화 속에서는 다양한 일탈이 일어난다. 유이치를 성추행하는 불량집단 아이들, 원조교제를 종용하고 성폭행을 사주하는 호시노, 살인을 저지르는 유이치까지 영화는 일탈로 가득 차있다. 우선 호시노의 일탈행위는 기능주의적 관점과 정신분석학적 관점으로 풀어 낼 수 있다. 호시노의 가정의 도산했고, 가족은 해체했다. 우선 호시노의 가정은 해체되었다. 가족은 사회를 유지하고 사람은 사회적 존재로 사회화시키는 1차적 집단이다. 그런 가족의 해체는 보수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병리적인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가족주의나 공동체주의를 모방하는 일본에서 가족해체는 호시노가 가지고 있던 기존의 가치규범과 해체된 가족의 현실과의 괴리로 인해 그를 일탈하게끔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불우한 가정 환경은 그의 인격 현성에 관여했을 것이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당한 왕따가 그를 조금 더 불안한 모습을 내포하게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보면 쯔다라는 여학생이 성매매를 강요당한다. 이는 교실 내에서의 기득권이 된, 호시노가 여학생을 억압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는 갈등이론적 관점으로 풀어낼 수고 있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두 가지 왕따가 나타나는 데, 첫 번째로는 호시노가 당하는 왕따였다. 그리고는 쿠노가 당하는 왕따가 나타난다. 이들의 공통점은 왕따의 대상들이 ‘잘났기’ 때문에 그들을 미워하고 그들을 따돌린다. 또한 그들은 그들끼리 소통하고 그들끼리 교제하면서 그 사회적 응집력을 더해간다. 쿠노를 따돌리는 여자 아이들이 노래를 그만 부르자, 다른 아이들도 우리도 하지 않겠다고 한다. 이는 동조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초장부터 종장까지 꾸준히 릴리 슈슈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에테르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에테르는 본래 빛의 매개체인 물질로 알려졌던 것이다. 그러나 릴리의 팬들은 그를 감성의 촉매로 칭하고 릴리 슈슈를 신격화 시킨다. 릴리 슈슈는 갖힌 사고에 도전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은 일탈을 쉬이 허용할 수 있게끔 한다. 그리고 그들의 유대감은 크기 때문에 콘서트 현장에서 다른 생각을 지닌 팬을 에테르를 오염시킨다고 폭행하기 까지 한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았을 때, 릴리 슈슈는 여러 힘든 사람들의 감성의 돌파구였다. 그의 음악에 공감하고 그의 음악에서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릴리 슈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돌파구나,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영화 제목이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인 것은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인 모든 것이며, 릴리 슈슈의 유일한 돌파구인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나의 사담이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술도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고 다른 자극적인 취미 생활을 하지도 않는다. 나는 스트레스를 받거나 일이 복잡할 때, 농구를 즐겨한다. 농구를 하면 그 순간은 모든 것을 잊고 농구에 집중하게 되고 운동이 끝나면 조금 복잡한 마음이 가라 앉기 때문이다.


2012.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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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에서 남자 주인공 뫼르소는 다툼이 있었던 남자를 총으로 살인하게 된다. 경찰은 뫼르소와 그의 친구 그리고 그들과 다툼이 있었던 총살된 남자에 대해 조사를 하고 살인의 이유를 다른 것이 아니라 그들의 ‘다툼’에 초점을 두었다. 하지만 뫼르소의 살인의 동기는 단순했다. 이는 명료하다. 단지 햇빛이 자신의 눈을 눈부시게 했기 때문에 뫼르소는 그를 살인했다고 주장한다. 이는 뫼르소에게 범행동기의 진정한 이유이다. 하지만 이러한 범행 동기를 국가 당국은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를 ‘미친놈’이라고 할 뿐이다. 사회학은 개인의 우연성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일정한 흐름의 거시적 사회적 움직임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사회학적으로 모든 현상이 예측되거나 추론되기는 힘든 경우가 있다. 앞서 본 까뮈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도 그런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뫼르소가 보여준 일탈처럼 개인의 우연성이

영화 속에서는 이시가미와 야스코 모녀의 일탈이 드러나 있다. 야스코 모녀는 우발적으로 그들을 괴롭기는 야스코의 전 남편을 살해하게 되었고, 이시가미는 이를 은폐하고 또 다른 살인으로 이 사건을 덮어 버렸다. 영화에서는 특히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사건을 조작하는 이시가미의 일탈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시가미의 주요한 일탈의 원인은 ‘애정’에 기인한 것이다. 이시가미의 일탈적 행위의 원동력은 감정이었다. 하지만 이는 2차적인 일탈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이시가미는 영화 속에서 물리학자가 친구라고 칭하자 자신에게는 친구가 없었다고 고백을 했다. 그리고 이시가미는 자살, 즉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 행위를 하려 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까지 가게 된 것은 이시가미가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사람인 사실이 크다. 그는 친구도 없었고 사랑하는 사람도 없었으며 자신의 꿈을 완전히 이루지도 못한 사람이다. 이는 사회적 유대약화의 원인이 되어 이시가미에게 비행의 단초를 제공할 이유가 되었다. 그는 대부분이 사는 사회에서 항상 소외받고 외톨이인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 이는 사회에 대한 애착의 결핍으로 나타날 수 있기도 하다. 또한 이시가미는 친구인 물리학자의 얼굴을 보며 그의 외모에 대한 부러움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의 외톨이었다고 회고하는 과거를 보았을 때도 그는 자아존중감이 낮은 사람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그의 세계에서 그는 통상적인 집단 다시 말해 학교나 주변인들을 보고 그 집단의 구성원에 대한 기대, 그에 따른 보상과 좌절 등을 통해 자아의 성향이 결정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의 이시가미는 자신의 연구 분야인 수학에 대해서는 애착이 있지만 그 외에 교사의 삶이나 대인관계에 있어서는 취약한 모습을 보인다. 이시가미의 일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관점으로 추론해볼 수 있다. 우선 이시가미가 자살을 시도한 사건을 보았을 때, 이시가미는 사랑을 얻고 자살을 포기했으므로, 이시가미는 사랑과 같은 삶에 대한 애착의 목표를 이루지 못하여 일탈했을 수 있다. 또한 저명한 물리학자도 인정하는 그의 능력이 적절히 발현될 수 있도록 도와주지 못한 경제적인 이유로 그의 삶을 억압해버린 사회구조에 대한 아쉬움도 남는다. 또한 살해된 남편이 비교적으로 정상적인 삶에 궤도에서 벗어난 삶을 살았다는 이유로 그를 낙인화하여 그와 관련되어 있을 것 같은 조직폭력배를 조사하는 등의 낙인이론적 관점의 수사가 보이기도 한다. 또한 합리적 선택이론으로 보았을 때, 이시가미는 범죄를 완전하게 은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추론 때문에 그는 범죄를 선택했을 것이다. 또한 상당 부분 그의 추론이 맞아 떨어지고 범죄가 은폐될 수 있는 상황에서 물리학자의 등장으로 인해 그는 다시 그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 알리바이 사건을 꾸민 것도 그러하고 범죄의 사실이 잘 드러나지 않는 노숙인을 살해한 것 또한 그러하다. 범죄에 대한 기대이익은 사랑하는 여인이 범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결과였다. 또한 사회유대 이론으로 보았을 때, 이시가미의 일탈은 사회에 대한 유대나 애착의 결여가 컸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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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평전이 해고가 되는 사회


재작년 이맘 때 뉴스에서 이마트 노사관계를 다루며 일례로 이마트가 전태일 평전을 소지한 노동자를 색출했고 노동자를 해고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어이가 없는 소식이었다. 내가 아는 전태일은 평균 연령 15세에 하루 16시간을 일하고 일당으로 90원 정도를 받는 미성년자들과 일반노동자들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근로기준법'을 지키자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랬던 전태일의 평전이 그가 작고한지 45년이 지난 지금에도 불온서적인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됐다. 그런데 그런 일이 실제로 21세기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일어났다.

영화 카트는 이런 현실이 잘 반영된 내용이었다. 영화의 기본적인 골격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무당해고와 관련해서 벌어진 일을 다루고 있다. 나는 이런 큰 맥락 속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눈 여겨 본 것들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영화 초반부에 인상 깊었던 것은 '회사가 살아야 우리가 산다.', '매출은 우리의 고객', '우리는 항상 을(乙)입니다.' 같은 문구들이었다. 이 문구들은 영화에서 큰 비중은 없지만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라고 생각한다. 이 문구가 별 것이 아닌 것 같지만 전체주의, 맑스가 지적한 물화(物化), 경제에서 인간관계의 인간관계로의 전이 등을 나타낸다. 영화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장면들이 있다. 계산직원이 소비자의 가방을 확인해본다고 한 사건을 통해 계산직원은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하게 된다. 이 때 서비스 산업에서의 감정노동 개념을 적용시켜볼 수 있다. 계산직원은 합리적인 이유로 자신의 역할을 한 것인데, 오히려 무릎을 꿇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게 된다. 감정부조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남성 정규직 직원이 여성 비정규직 직원의 탈의실을 거리낌 없이 들어오는데 이것은 직무상의 관계가 인간적 관계로 일정 부분 전이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즉 직무상의 상하관계가 인간관계의 상하관계로 이어진 것이다. 또한 영화에는 2명의 정직원인 김강우(동준)와 이승준(최 과장)이 나온다. 이들은 중간관리자 혹은 보조관리자 정도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중간관리자는 직분은 노동자이지만 역할이 관리자이기 때문에 부조화가 일어날 수 있는 위치이고 영화는 이 2명의 다른 행동을 보여주며 이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 회사는 노조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노동자들의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은 노동 3권이라고 불리며 헌법에서 수호되고 있는 가치이다. 사실 정말 불법을 저지르는 것은 회사 측임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불법자로 낙인찍히는 것은 노동자인 현실이 많이 안타까웠다. 또한 근로계약서에 노동자들이 기한 없이 서명했다는 것이 나는 가장 안타까웠다. 합법적으로 보호받을 명분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야근을 하다 유산을 했다는 문정희(혜미)나 며칠의 파업으로 생활이 곤궁해진 염정아의 가정을 보면서 갈등주의적 이론이 생각났다. 화이트칼라의 범죄는 직접 살인하지 않지만 많은 사람을 경제적 살인으로 몰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는 결국 마무리가 지어지지 않고 노동자들과 경찰이 몸싸움을 하며 막을 내린다. 감독이 열린 결말로 영화를 구성한 이유는 아마도 우리의 현실에서의 노동자와 자본가의 갈등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 같다. 이 영화의 모티프가 2000년대 초반 까르푸 파업과 2000년대 후반 홈에버 파업에 있다는 설명을 들었고 글의 서두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마트의 노조설립 무산운동과 직원 사찰은 비교적 최근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카트에서 노동자가 파업하자 불만을 말했던 소비자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산업사회를 배우는 대학생으로서 사회에 더 깊은 고민과 실천을 생각해 보아야겠다.


2015.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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