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잘사는 집 아이들이 공부를 더 잘하나?>

왜 잘사는 집 아이들이 공부를 더 잘할까? 이 질문에 굳이 답이 필요할까? 이 책은 저자 신명호 선생님의 박사 학위 논문을 출판한 책이다. 이 당연한 질문, 당연한 주제를 굳이 다룰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너무 당연하기에 이런 주제를 다룰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잘사는 집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는 건 기정사실인데, 그렇다면 왜 잘하는 걸까? 이걸 경험적으로 보여주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을 단적으로 말하자면, 학업성취의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부모의 교육 관여, 양육관행에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고학력 중산층 가정과 저학력 노동자층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한다. 고학력 중산층 가정의 부모는 자녀에게 끊임없이 학벌주의 가치관을 주입하고, 학업열의를 높이기 위해 일상적으로 의식화를 진행하고, 조기에 공부 습관을 들이고, 각종 생활을 통제하고 학업 전략을 수립해준다. 반면, 저학력 노동자층의 부모는 고학력 중산층 부모와는 상대적으로 낮은 교육열망을 보인다. 덧붙여 교육 관여에 있어서도 무관심에 가까운 양상을 보여준다.

이 책은 학위논문인 만큼 한편으로는 읽기에 딱딱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전에 있었던 학업성적의 결정요인에 관한 설명을 정리해주고, 이 사이에서 교육 관여, 양육관행, 교육열망 등이 학업성취도의 격차를 만들어낸다고 설명하는 부분은 유익했다. 책을 통해서 다양한 이론이 어떻게 교육 불평등을 설명해왔는지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본론에 해당하는 2장, 3장에는 인터뷰가 상당히 많이 들어있다. A의 엄마는 특정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인생이 망한다고 말한다든지, 그런 태도에 불안을 느끼는 학생의 이야기도 담고 있다. 그래서 그냥 재밌게 책을 보고 싶다면, 약간은 학술적인 1장을 건너뛰고 2장부터 읽어도 좋을 것 같다.

그저 잘사는 집 아이들이 공부를 더 잘하는 게 상식일 만큼 당연한 것이 되었지만, 이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제대로 알기도 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사회를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느낀 것 하나는 부모의 경험이 자녀에게 꽤 중요하다는 것이다. 책은 사회복지학 연구답게 정책적 제언도 잊지 않고 있지만, 책을 읽으며 다양한 생각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1. 핵심: 이 책, <인생의 특별한 관문>은 미국의 대입제도, 대학교육구조와 그와 관련된 학생, 교육기업, 대학, 연구자 등의 관계와 입장을 전방위적으로 분석한 미국 교육 불평등의 보고서입니다. 이 책은 일종의 사회과학 저널리즘으로 볼 수 있는데요, 저자는 학자들의 연구성과는 물론이고 저널리스트답게 실제 학생, 교육사업가, 대학관계자, 학자들과 인터뷰, 자료조사를 통해 다채롭게 책을 채워나가고 있습니다.

2. 저자: 책의 저자 폴 터프는 뉴욕타임스, 뉴요커 등의 언론매체에서 활동해온 저널리스트인 동시에 27개국에 번역된 책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교육에 대한 강연을 하는 강연자이기도 합니다.

3. 내용: 이 책은 총 9장입니다. 1장 ‘꿈의 대학’에서는 능력과 노력을 가지고 교육을 통해 사회의 상승이동을 꿈꾸는 삶을 보여주며 미국에서 대학의 중요성을 환기함과 동시에 이미 불평등해진 미국의 대학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이어지는 2장 ‘대학으로 들어가는 좁은 문’에서는 대학입시기회의 불평등을 다루고 계층에 따라 대학에 갈 기회가 산술적으로만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행동양식(집안의 분위기 등) 수준에서도 어려워진다는 것도 지적해줍니다.

이어지는 ‘대학 입학시험과 입시 사교육: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는 미국 대학 입학에 필요한 표준화된 시험 SAT를 대상으로 내용을 전개하는데, SAT도 부유층에게 유리한 것이 밝혀지며 공신력을 잃고 사업의 위기가 오자 공정한 시험이라는 이미지 메이킹(빈곤층 대상 교육사업 등)과 진실이 은폐된 통계를 통해 위기를 타계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4장 ‘캠퍼스 문화 충격: 엘리트 대학의 빈부격차’에서는 출신계층의 구성이 극단적으로 나뉘고 있는 아이비리그 대학 안에서 빈곤층이 받는 차별을 보여주고 덧붙여 빈곤층 내부에서도 특혜/이중 빈곤층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생동감 있게 전합니다.

다음 ‘대학입학전형의 이상과 현실’에서는 미국 대학의 운영구조를 보여줌으로써 미국대학이 영리사업으로 전락하게 된 이유와 그로인해 돈 많은 학생을 선호하고 유치하는 불평등이 공고화되는 과정을 그립니다. 6장 ‘대학에서 살아남기’에서는 명문대와 비명문대의 졸업률 격차 문제를 다루면서, 대학과 졸업의 문제를 심도있게 다룹니다.

7장 ‘대학 졸업장의 가치’에서는 대학교육을 받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교육 복음’의 실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교육 복음을 가지고 빈곤층을 포섭하는 불량대학의 모습이 나옵니다. 8장 ‘우등생과 낙제생’은 대학 내부의 교육격차로 인한 낙인을 이야기하고, 마지막 ‘누구를 위한 대학인가: 교육 불평등 유감’에서 저자는 과거 미국의 역사에 따라 “공교육을 활성화하면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단순한 해결책으로 돌아가서 미국 교육의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것을 촉구하며 책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4. 감상:  저자는 아이비리그 대학의 2/3는 부유층이고 겨우 4%만이 빈곤층임을 밝히면서 이것이 21세기 귀족제라 합니다. 그렇지만 저자는 암울한 현실상만을 보여주진 않습니다. 미국 내부의 개선의 움직임과 교육을 사명으로 불평등을 완화하려는 많은 사람들 역시 진솔하게 그려냅니다. 아직 한국은 미국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한국 역시 미국의 사례를 참고하고 교훈으로 삼지 않으면 교육 불평등은 더욱 심화될 것입니다.

한국은 표준화된 시험에 대한 맹신이 있는데, 실제로 저소득층 합격은 ‘학종’이 오히려 수능보다 높다는 결과가 나왔죠. 정치스캔들 때문에 공교육이 평등/탁월성을 지향할 것인지, 입시제도는 정시/수시가 공평한 것인지 논의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이 책을 매우 유익하게 읽었습니다. 미국의 영향이 가장 강한 한국인만큼 미국교육을 아는 것은 중요한데 이 책은 미국 현실을 총체적으로 그려냅니다. 많은 사람이 읽고 논의했으면 하는 책입니다.

잡감: 나는 이 책이 조금 더 반향을 일으켰으면 했는데 좋은 출판사에서 나왔음에도 그런 반향이 없었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전 법무부장관 조국 때문일 것이다. 그때 서평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잠깐 하긴 했지만, 조국이 어그로를 끄는 바람에 한국 교육개혁 자체가 역행하기 시작했다.

정유라가 받았던 지원은 말도 안 되고, 정도가 엄청 심했던 반면, 정유라 케이스는 사회의 집단적인 일탈이 되기는 어려웠다. 대신 조국 딸의 경우는 다르다. 정도가 정유라만큼 심하지는 않았지만, 조국 딸의 케이스는 한국 사회 상류층 자녀들의 모습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그들이 아무렇지 않게 느끼던 집단적 특혜를 드러냈기 때문이고, 문제가 그 집단적 특혜를 없애는 차원이 아니라 조국 개인에 대한 비난으로 수렴되었기 때문에 본질에서는 점점 멀어졌다.

교육부에서는 저소득층 합격자는 학종이 더 많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한국의 교육사회학자들 역시 한국에서는 수시가 정시보다 저소득층에 유리하다는 발표를 해왔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 방향 역시 처음에는 그렇게 흘러갔지만, 조국 스캔들 덕에 정책 방향이 한 방에 역행했다. 교육 불평등을 연구하시는 사회학자들께서는 여전히 이 문제를 더 상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했지만, 정부는 정시 확대를 기조로 바꿔버렸다.

사실 나도 항상 정시가 수시보다 공정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사례를 가지고 직접 따지고, 한 개씩 세어본 사람들은 그게 아니라고 했다. 적어도 한국적 상황에서는 생각보다 수시가 저소득층에게 유리하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예를 들 수 있겠다. 시골학교에서는 전교 1등이 수능 모든 과목에서 2등급 2개가 안 나와서 수시 최저에 떨어지기도 한다. 다만 그 친구는 시골 아이들과 경쟁하기에 내신은 1등급이다. 반면 특목고에서는 수재끼리 경쟁하기에 내신은 낮아도, 수능은 시골학교 1등을 몇십 점 앞서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덧붙여, 서울 강남의 한 학원에서는 수능출제위원에 들어간 교수 명단을 확보해서 그들의 전공을 분석해 예상 문제를 만든다고 한다.

내가 이 책을 기대했던 것은 첫째, 한국이 그렇게 선망의 대상으로 꿈꾸는 미국 사회의 교육제도가 가진 모순을 드러내기 때문이었다. 한국은 어떻게든 미국을 모방하지 못해 안달이기에 이 책을 보면서 미리 이런 문제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 둘째, 이 책은 표준화된 시험인 SAT가 가진 불평등과 통계조작도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다. 한국은 표준화된 시험, 수능에 대한 맹신이 있기에 그에 대한 성찰의 계기로도 매우 좋은 책이다. 그런데 논란이 되지 못했다. 조국 한 명 덕분에.

사람들에게 왜 수능이 더 공정한 시험이냐, 물으면 그저 자신의 믿음, 신념, 합의된 실재에 기대 이야기할 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직접 수시가 공정한지 정시가 공정한지 따질 수 있도록 자료에 접근할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육부는 그걸 할 수 있다. 또 교육사회학자에게 그 자료를 공개해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료와 실제의 경험적 자료에 기반해 나온 결론을 과학이라고 하고, 믿음, 신념, 합의된 실재가 아닌 과학적인 근거로써 정책을 수립해야 하는 게 정부의 역할이다.

얼마 전 문재인 정부의 교육부는 정시 비중을 확대한 대학 70개교에 10억씩, 700억을 쐈다. 교육 질을 높였거나, 학생 복지를 확대했거나, 연구에 투자한 것도 아니고, 그저 지들 입맛에 맞게 입시를 바꾸니 돈을 뿌린 거다. 박근혜 시절, 대학구조개혁평가에서 지방대가 살아남기 위해 교육부 출신 관료를 총장, 부총장에 앉히며 “똥꼬쇼”를 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 문재인 정부는 이와 뭐가 다를까. 교육에 있어 참 무책임하고 비겁한 정권이다.

<착취도시, 서울>

1. 핵심: <착취도시, 서울>은 ‘쪽방’으로 대표되는 서울의 주거와 빈곤문제를 중심으로 다루는 책으로, 단순히 사람들이 처한 참상을 알리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빈곤과 빈곤을 야기하는 착취의 연쇄과정’을 드러내는 한 기자의 르포이자 기록물입니다.

2. 저자: 책의 저자 이혜미 기자는 “언론이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대변해야 한다”는 이용마 기자의 철학을 중심으로 2015년 부산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해서 현재는 한국일보 기획취재부를 거쳐 정치부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기자생활 약 6년차이지만, 이미 훌륭한 취재로 다양한 수상을 하셨고, 그중에서도 제게 인상 깊은 것은 ‘올해의 데이터 기반 탐사보도상’ 같습니다. 이 책 역시 탐사보도의 결과이죠. 이 책은 사실을 전하는 기자의 글답게 한 편으로 정직하지만 기사는 아니기에 기자가 가진 속마음과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고, 기자의 진솔한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 필치 역시 이 책의 장점입니다.

3. 내용: 이 책은 크게 2부로 나뉘어있습니다. 먼저 1부에서는 일명 ‘지옥고(지하방, 옥탑방, 고시원)’ 아래 쪽방이라는 주제로 쪽방 거주실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2018년 있었던 국일고시원 화재 사건으로 드러난 쪽방 문제를 시작으로 쪽방 거주민의 거주 실태와 그들의 삶의 모습, 그리고 이 쪽방을 유지하고 있는 ‘빈곤 비즈니스’에 관해 중점적으로 다룹니다. 빈곤 비즈니스란 “빈곤층을 대상으로 하되 빈곤으로 벗어나는 데 기여하는 것이 아닌, ‘빈곤을 고착화’하는 산업”입니다. 최저의 생활여건도 보장되지 않는 쪽방의 최빈곤층을 통해 돈을 버는 건물주의 악행을 폭로하고, 한 번 쪽방에 들어서면 왜 빠져나올 수 없는지를 적나라하게 기록합니다. 이것이 이 책에서 매우 중요한 ‘착취의 연쇄과정’입니다.

이어지는 2부에서는 ‘대학가 신쪽방촌’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시작은 ‘주거 난민’ 시절을 겪었던 저자의 자전적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2부는 주로 대학가, 구체적으로는 사근동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여기에서도 저자는 ‘착취의 연쇄과정’을 드러내는데, 청년들이 열악한 주거환경에 놓일 수밖에 없는 상황과 임대업자들의 불법과 정치적인 악행들로 인해 환경이 개선될 수 없는 조건들을 여실히 폭로합니다. 저자에게 서울은 청춘에게 더욱 처절한 도시이며, 동시에 대중매체를 수놓은 서바이벌 경연의 현장으로 비춰집니다.

4. 느낀 점: 매우 불편한 책입니다. 쪽방의 현실 자체로도 충격적이고 불편하고 마음이 아프지만 한 편으로 이런 절대빈곤층을 대상으로 상식적인 수준이라 볼 수 없는 입대업을 통해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 있고 이것이 이 비참한 체제를 영속화한다는 겁니다. 지자체나 시민사회가 쪽방 문제를 다루려고 하면 되려 빈곤층을 볼모삼아 문제를 은폐하고, 지자체에서 쪽방주민을 위해 지어준 편의시설로 인해 오히려 집값이 오르는 현실이 암담했습니다.

저자는 끊임없이 이것을 문제제기하고 이에 관한 실증적인 연구와 대책이 나와야한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문제제기와 빈곤의 연쇄를 그려낸 것이 훌륭하게 느껴졌고요. 책의 또 다른 미덕은 빈곤층을 평면적으로 구성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빈곤층의 열악함을 물론이고 이들의 무례함과 허세도 정직하게 기술하면서 동시에 그들이 만들어내는 긍정적인 것 역시 가감하게 그려내는 것이 매우 인상깊었습니다. 이 책이 널리 읽히고 이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런 비합리성을 떠받드는 정당성의 문제에 골몰해볼 생각입니다.

“우리는 폭력의 보전 법칙을 면할 수 없다. 즉 모든 폭력은 대가를 치른다. 예를 들어 해고와 임시고용 등 금융 시장에 가해지는 구조적 폭력은 다소 장기간에 걸쳐 자살·비행·범죄·마약 복용·알코올 중독과 크고 작은 일상적 폭력들로 그 대가를 치른다.” - 피에르 부르디외

1. 핵심: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사회역학자 김승섭 선생님의 책으로, 사회역학이란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찾음으로써, 질병을 유발하는 사회구조를 개선해 질병의 원인을 제거하고, 사회구성원을 더욱 건강하게 살도록 하는 학문입니다. 그러니까 사회역학은 질병을 단순히 유전적이고 생물학적으로만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과 고통을 만들어내는 사회구조와 사회문제들을 탐구하는 분야입니다. 이 책은 사회역학의 측면에서 한국사회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사회적 약자들은 어떻게 질병을 앓고 있는지, 어떻게 고통 받고,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또 이를 위해서는 어떤 해결책이 필요한지를 다룹니다.

2. 저자: 저자 김승섭 선생님은 이 책과 함께 많은 출판상을 받으며 스타덤에 오르셨습니다. 제가 가진 책은 현재 22쇄인데, 이런 분야의 책이 이렇게 판매고를 기록하기는 쉽지 않죠. 김승섭 선생님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하버드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연구 자체도 왕성하게 하시는 걸로 알고, 대중서 집필도 꾸준히 하고 계신 모범적인 학자시죠.

3. 내용: 우리가 개인적인 것으로만 알았던 자살이 사회적인 것인 걸 밝힌 뒤르켐의 고전적 연구처럼, 이 책은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다룹니다. 한 사회구조가 경쟁적으로 바뀌어 사람들이 끊임없는 지위경쟁에 몰리고 시달릴수록 그 구성원들은 더 스트레스를 받고 질병에 소통받을 수밖에 없는 거죠. 책에서는 모든 수준의 사회적 약자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회에는 여러 가지 균열이 존재합니다. 성별, 성적지향, 경제력, 학력, 지역, 인종, 육체적 능력 등 다양한 균열 사이에서 위치와 시간에 따라 어떨 때는 강자인 사람도 어떨 때는 약자가 되기도 하죠. 어떤 집단에 대한 낙인과 비과학적 시각들은 질병을 더욱 유발시키기도 합니다.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집단은 비정규직 노동자, 빈자, 쌍용차 해고노동자, 다문화가정, 소방공무원, 세월호 참사 생존 학생, 성소수자, 교도소 재소자 등입니다. 책은 이들이 겪는 고통과 질병이 오롯이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다분히 사회적인 것이며, 그렇기에 사회가 바뀌면 아프지 않아도 되는 사실을 말하죠. 이 책이 지닌 미덕은 실증적이고 전문적이라는 거고, 그렇게 완성도가 높으면서도 대중적으로 풀어썼기에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다는 겁니다. 또 인용하는 연구를 쉽게 합리화하지도 않고 조심스럽게 다루는 측면도 인상 깊었습니다.

4. 느낀점: 책을 읽으니 마음이 편치 않네요. 한 편으로는 의지도 생기고요. 저는 사회역학을 사회계층론 수업에서 공부한 적이 있었고, 김승섭 선생님의 SNS의 글을 받아보기도 해서 읽지도 않고 이 책을 두 권이나 사서 선물하기도 했는데, 이제야 이 책을 읽었습니다. 뜬금없이 인용한 부르디외의 말처럼 어떤 구조적이고 거시적인 사회의 폭력은 사회 속으로 침투해서, 개인 하나하나를 병들게 합니다. 뉴스에선 단순히 “실업률 ××%”라고 표현되지만 그 안에 있는 수십만의 사회적 고통은 수치화하기 어려울 겁니다. 이 책이 필독서가 되어서 질병의 사회적 원인에 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관련된 많은 정보가 널리 알려지길 바랍니다.

1. 핵심: 이 책, <가난을 엄벌하다>에서 바캉은 부르디외의 관료제장을 이론적 근거로 차용해, 미국에서의 형벌국가의 탄생과 그것이 유럽으로의 전이되고 변화하는 과정을 추적합니다. 이 책은 복지국가가 형벌국가로 변모했고, 모든 부당한 처우를 받는 이들이 형법을 통해 배제되고 분리되는 과정을 경험적으로 밝히는 책입니다. 복지국가가 ‘빈곤’의 문제를 제사회화를 통해 사회에 다시 편입시키는 방식으로 처리했다면, 형벌국가는 ‘빈곤’을 형법으로, 사회적 배제로 처리하죠. 비참함을 감옥으로 몰아넣고 처리하는, 그 낙인으로 인해 배제된 자는 영원히 배제될 수밖에 없는, 범죄에서 범죄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끊을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그들을 물리적으로 분리하는 일만은 아닙니다. 바캉이 밝히듯, 부르디외까지 이어지는 뒤르켐학파에서 감옥은 분리와 처벌의 도구라기보단 커뮤니케이션, 표상화, 연극화의 도구입니다. 따라서 복지국가에서 형벌국가로의 이행은 우리 인식에서의 분류화, 범주화의 문제이며, 상징폭력의 중앙은행으로서 국가가 부여하는 정당성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즉, 형벌을 통해 배제된 자들은 우리의 인식 속에서까지 정당성을 잃고 배제된 자로 전락하며, 우리의 몸은 이 ‘사회적인 것’을 이성적으로 성찰하기도 전에 받아들이게 되는, 그런 일들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2. 구성: 이 책은 제 1부에서 미국산 형벌국가의 탄생을 추적합니다. 맨해튼 연구소라는 싱크탱크를 통해서 가난한 자, 모든 부당한 대우를 받는 자들을 감옥으로 몰아넣자는 생각을 과학으로 만들어 국가에 중심사상으로 만들어냅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깨진 유리창의 법칙 역시 그 일환이죠. 그렇게 탄생한 형벌국가는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이후 유럽으로 수출됩니다. 이게 2부의 주된 내용입니다. 영국·프랑스·독일은 물론이고 네덜란드처럼 범죄자 처리를 처벌보다는 교정에 중심을 두고 관리하는 대표적인 국가마저도 형벌국가로 변해가는 과정을 기술합니다.

3. 느낀 점: 책의 한국어 제목은 <가난을 엄벌하다>인데, 불어 제목은 <Les prisons de la misère>입니다. 불어를 잘 모르지만 직역하자면 “비참의 감옥”, “비참함의 구금” 이정도 되지 않을까요. 프랑스어 비참misère이 눈에 들어온 것은 당연히 부르디외의 <세계의 비참La Misère du monde> 때문입니다. 신자유주의로 인한 사회의 고통을 부르디외는 '세계의 비참'이라고 표현했죠. 부르디외에게 ‘세계의 비참’이란 그의 핵심적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신정론의 테마와도 연결되고, 그의 사회학의 목적을 생각했을 때 스스로 세속화 된 사회에서 인간으로서 그가 할 수 있었던 어떤 노력이었을 겁니다.

부르디외와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렵고, 부르디외에 관한 최고의 주석가인 로익 바캉의 책에서 misère이라는 테마는 단순히 '가난'으로 해석되어선 안 될 것 같고요, 사회가 세계의 비참을 처리하는 방식으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책의 번역은 괜찮은 편이었는데, 인터뷰에서 역자의 질문들을 보면 심층적으로 분류/범주화의 문제로 책을 이해하기보다는 그저 신자유주의 비판정도로 책을 이해한 것 같아서 그 부분이 매우 아쉬웠습니다. 그럼에도 다행히 바캉은 핵심을 잘 짚어주고요. 또 이 책은 후기 근대사회에서 빈곤한 사람들이 ‘쓰레기’, ‘잉여’와 같은 의미론의 공간에 들어서며 배제되는 현상을 말한 지그문트 바우만의 논지와도 연결시켜 볼만 할 것 같습니다.

사회학자 오찬호는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는 저서를 통해 암울한 시대의 피해자이며 또 '가해자'인 20대들을 다룬다. 이 책은 큰 맥락에서 개인의 노력을 통해 성공을 이루었다는 자기계발서의 논리에 빠진 20대들이 학력위계주의를 확대재생산 하고 자신이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차별과 부조리도 서슴지 않으며 그것을 정당화하는 모습을 읽어낸다. 자신의 실력을 쌓기보다는 경쟁에서 이기기만을 원하는 것이다. 또한 개인들의 실패를 순전히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고 노력하지 않았다면 어떤 부당함도 용인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생각하는 것만큼 자기계발서들의 논리들은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자기계발서가 주는 폭력성은 열악한 환경에서 성공한 소수의 경험을 사회전체의 공정함으로, 사회적 성공을 개인 능력의 문제만으로 확대해석하며 열악한 환경에서 꿈을 이루지 못하는 다수의 ‘비참함’과 풍족한 환경에서 비교적 쉽게 성공한 다수의 ‘편안함’을 묵인한 것이다.

오찬호가 본 청년들의 자화상은 이런 자기계발 논리에 사로잡혀있다. 그들은 노력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며 자신들을 옥죄고 결과만을 놓고 차별한다. 문화비평가 크라카우어는 베를린 올림픽에서 독일 국민들에게 내재된 나치즘을 읽었고 우리 안의 파시즘이라는 책에서는 한국 국민들에게서 파시즘과 폭력을 읽어냈다. 사회학자 오찬호는 ‘1등만 살아남는 승자독식사회 구조가 불공정성에도 유지되는 이유는 구성원들이 구조를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1950년대 이후 후기 근대(late modern)사회에서의 노동, 소비주의, 그리고 ‘새로운 빈곤’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이 논의를 따라가 보면 중첩되는 핵심 사안이 존재한다. 바우만은 이 주제를 여러 책에서 다루지만 저는 그의 여러 책 중에서도 이 『새로운 빈곤(Work, Consumerism and the New Poor)』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이 책에서 다루는 중심내용 세 가지를 소개해보려 한다.

1. 노동윤리의 변화와 생산자 사회에서 소비자 사회로의 이행: 막스 베버의 경우 근대 자본주의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안분지족하는 전통주의적 생활양식이 파괴되고 합리적으로 자신의 노동을 조직화하고 금욕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형태의 노동윤리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바우만도 노동윤리가 근대 초기에 빈곤층을 공장으로 유인하는 원인으로 작용했음을 인정하는데, 그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근대 초기의 ‘노동윤리’가 후기 근대에선 ‘소비미학’으로 대체되었음을 주장한다. 사회는 더 이상 생산자(노동자)를 필요로 하지 않고, 소비자를 만들어 낸다. 소비하는 것이 최선의 것이며 부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 된다. 소비자를 만드는 사회에서 모든 매체는 “행복에 이르는 길을 쇼핑”, 소비가 행복임을 주입시키고, 노동윤리가 노동하지 않는 자를 부도덕한 사람으로 만들었다면, 소비사회는 소비하지 않는 자를 그렇게 판단한다.

2. 복지국가의 몰락과 사회의 배제: 소비미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빈곤층은 더 이상 체계에 포용되지 못하다. 초기 근대 산업사회에서는 그들을 산업예비군으로 명명하며 체계 안으로 끌어들였지만 소비미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들에겐 쓸모 있는 역할이 주어지지 않는다. 소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복지국가는 해체되고 결국 국가의 의미는 ‘개인 안전 국가’정도로 전락해 국가는 더 이상 사회적 국가가 아니며 사회적 삶의 공포로부터 국민을 지키지 못한다. 고체근대에서 액체근대로의 이행은 이를 더 가속화시키는데, 고체근대는 무거운 자본주의였으며 이들은 상호의존성으로 결합되어 있었고 그래서 육중한 공장 안에 자본과 노동을 묶어뒀다. 하지만 이제 복지국가는 해체되었고 이들의 빈곤한 삶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게 되었다. ‘새로운 빈곤층’은 이제 체제 밖으로 밀려나 유동하는 공포 속 부유하는 존재일 뿐이다.

3. 새로운 빈곤층의 출현과 빈곤층의 의미변화: 초기 근대 자본주의는 노동자를 체제 안으로 결속시킨 것과 다르게 현대에서는 다양한 사회적 변화로 인해 새로운 빈곤으로서 최하층계급이 만들어진다. 바우만에 의하면, 이들이 최초로 대중의 관심 속에 드러난 것은 1977년 타임지의 커버스토리를 통해서인데 미디어는 이들을 단지 ‘가난한 사람’, ‘경제적으로 궁핍한 사람’으로 보지 않고 이들을 정상의 범주에 있지 않으며, 이질적이고 통제할 수 없는 ‘배제되어 마땅한’ 존재로 규정한다.

소비미학이 지배하는 소비사회에 소비력이 없는 가난한 이들은 배제되어 ‘쓰레기’가 되고 실업은 노동윤리를 통해 의미론적으로 비정상적인 삶을 나타나게 된다. 그들이 잉여로 규정된 것은 그들이 버려져도 무방한 존재임을 나타내며 그들은 ‘잉여’, ‘쓰레기’, ‘불합격품’, ‘폐기물’, ‘찌꺼기’와 같은 의미론적 공간을 공유하는 존재이다. 결속은 해체되기 시작했고 탈규제와 개인화가 시작돼 새로운 빈곤층은 체제가 끌어안아야 할 존재가 아니며 계급 바깥에 버려진 회생이 불가능한 존재이며 재사회화를 통해 정상적인 사회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추방되어야 할 없어져야 할 존재가 된다. 이들에 대한 배제는 의미론적인 배제 뿐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이루어지고, 생계수단이 없는 이들은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로 강제로 추방되어 분리구역으로 몰려 생활하게 된다.

제목 번역의 아쉬움은 있지만, 이 책은 현재 동녘출판사에서 『왜 우리는 계속 가난한가?』 라는 제목으로 재번역 되었다. 나는 바우만의 논의가 후기 근대사회의 새로운 빈곤층의 출현을 역사적으로 잘 추적하고 있다고 보고, 지금 현대사회의 빈곤문제는 단순히 경제적 문제라기보다는 소비미학(사회), 복지국가 해체(정치), 잉여(문화, 사회인식)라는 복잡한 사회작용의 결과라는 걸 알 수 있다. 책 자체도 크게 어렵지 않은 편이니 한 번 읽어보시길 추천해드린다.

201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한국 사회에는 ‘헬조선’이라는 담론이 등장한다. 한국을 헬조선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다양한 층위의 이유가 작용했지만, ‘수저 계급론’으로 대표되는 불평등에 대한 문제의식은 헬조선 담론의 핵심이기도 했다. 그즈음 한국에 번역·소개된 책이 바로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었고, 2013년에 출간된 이 책을 통해 그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이 책을 소개할 땐, 저자인 피케티에 대한 소개를 먼저 해야 한다. 토마 피케티는 프랑스 지식인의 통과 의례인 파리고등사범 출신으로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과 영국 런던 정경대에서 부의 재분배에 대한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는다. 책에서 그는 자신의 지적 전통이 프랑스에 있음을 강조하는데, 경제학자인 그는 세계의 저명한 선배 경제학자보다도 뤼시앵 페브르, 페르낭 브로델, 레비스트로스, 부르디외, 에리티에, 고들리에 같은 학자를 존경한다고 하면서 자신을 프랑스의 지적전통에 편입시킨다. 이는 곧 그의 경제학이 단순히 경제학에 한정된 것이라기보다는, 폭넓은 사회과학과 함께하는 경제학임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피케티 역시 이 책을 경제학과 역사학·정치학·사회학의 책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책에서 피케티가 증명하는 논지의 핵심은 이렇다. 이것은 “r > g”라는 단순한 부등식으로 정리되는데, ‘r’은 자본수익률을 ‘g’는 경제성장률을 의미한다. 이를 대략적으로 표현한다면 돈이 돈을 버는 것이 노동을 통한 소득이나 생산을 통해 돈을 버는 것보다 많은 부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피케티는 장기적으로 이런 현상 때문에 미래의 부의 양극화가 심화될 수 있다는 예측을 역사적 자료를 통해 논증한다.

책은 서장·결론과 함께, 4부로 이루어져 있다. 서론에 해당하는 1부에서는 책에서 사용될 기본적인 개념을 설명하고, 산업혁명 이후의 경제발전을 설명한다. 2부에서는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는데, 여기에서는 자본/소득 비율의 장기적인 변화의 추이를 살피고, 21세기의 전망을 살핀다. 이어지는 3부에서는 노동소득과 자본소득에 따라 나타나는 불평등의 양상을 보여주고, 자본 분배의 역사적인 분석을 시도하며 본격적인 전망을 분석한다. 이어지는 4부에서는 이러한 실증적인 분석에 기반을 두고, 대안을 제시하는 부분으로 이 책의 예측이 맞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검토하는 내용이다.

이 책에서 피케티는 장기적으로 자본의 분배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추적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러니까 내가 이 책을 “우리 시대의 자본론”이라고 명명한 것도 그런 의미에서이다(피케티는 명시적으로 맑스주의와 거리를 두고 있다). 피케티는 서장에서 부의 분배를 다뤘던 역사적 인물들, 멜서스, 리카도, 맑스, 쿠스네츠 등의 기념비적 작업 속에 자신의 작업을 위치시킨다. 더불어 이 책은 단순히 경제적인 분석에만 몰두하지 않고, 자본 분배의 역사적 변동과정을 살피며, 능력주의와 조세 등의 경제 외적인 문제를 표면화하면서 정치학, 사회학적인 분석을 더하고 있다.

『21세기 자본』은 피케티가 말하듯, 일반독자를 염두에 두고 쓴 책으로, 전공 서적이 아닌 교양 서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 도전하고 싶은 분께서는 겁먹지 않고 책에 도전하셨으면 좋겠다. 그만큼 이 책은 상세하고 기초적인 이야기를 상냥하게 설명하고 있다. 팁을 주자면, 어려운 내용은 단순화해서 이해할 필요도 있다. 예를 들어 피케티는 책의 서장에서 책에 쓰인 자료를 상세하게 설명하는데, 우리 같은 일반독자는 이걸 상세히 이해하기보다는 (대충 좋은 데이터 썼다는 말) 정도로 이해하고 큰 맥락을 중심으로 읽으면 편할 것이다.

19세기의 맑스는 『자본』을 통해 자본주의를 실증적으로 분석하고, 이후 역사발전의 필연성을 주장하는 역사철학을 전개했다. 21세기의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을 통해 맑스만큼 도발적이고 강력한 주장을 하지 못하고, 자본 분배의 동학은 여러 변수 때문에 언제나 가변적이며 예측하기 힘든 것이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이것 역시 우리 시대의 『자본』으로서의 이 책을 보여주는 일면일 것이다. 확정성이 감소하고, 작은 개연성들로 이루어진 사회 말이다. 또 이 책은 논쟁적인 책이기에, 이 책이 만들어낸 논쟁을 따라가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Meritocracy는 현재 능력주의, 실력주의, 실적주의, 업적주의 등으로 번역된다. 아마도 능력주의, 실력주의가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고, 몇몇은 이 번역어들이 Meritocracy의 의미를 온전히 담고 있지 못하기에 단어 특유의 의미를 상기시키기 위해 ‘메리토크라시’라고 사용하기도 한다. Meritocracy가 최초로 사용된 마이클 영의 책이 올해 “능력주의”(유강은 역, 이매진)로 번역되었기에, 능력주의로 자리 잡을 것 같지만 여전히 많은 책에서 각기 다른 번역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능력주의, 실력주의, 실적주의 등의 단어가 나오면 그게 Meritocracy임을 상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Meritocracy란 무엇일까? 우선 사전적 정의를 보자면 Meritocracy란 나이, 계급, 성별, 또는 그 밖의 독점적이거나 상속된 특징이 아닌, 능력, 노력, 그리고 탁월함을 통해 지위가 성취되는 사회 질서를 의미한다. Meritocracy는 지능과 노력을 통해 만들어진 탁월함을 가진 사람이 사회적 특권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Meritocracy의 사회는 곧 “특정한 사회적 상속이 아닌 능력만으로 특권을 가질 수 있는 사회”인데 언뜻 보기에 이 사회는 유토피아 같지만, 결정적 결함을 지니고 있다. 노력, 지능, 탁월함을 공정하게 측정할 방법이 있냐는 것이다.

마이클 영은 『능력주의』(The Rise of the Meritocracy 1870-2033)에서 Meritocracy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하는데, 이는 지능(Intelligence) + 노력(Effort)으로 정의된 탁월함(Merit)과 함께 그 탁월함을 지닌 유능한 사람을 통한 통치·지배(government, -cracy)를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는 이 우화에서 기회의 평등이라는 목적이 극한으로 달성된 사회를 보여주는데, 그 사회에서 지능이 뛰어난 사람은 상류층에 진입하고 지능이 낮은 사람은 단순노동을 수행하는 하류층으로 전락하게 된다. 영은 이런 디스토피아를 통해 “계급의 불평등”이 “지능의 불평등”으로 바뀐 것에 불과하다고 경고한다.

앞서 이야기했듯, 지능·노력·탁월함 등을 공정하게 측정할 도구가 없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지능·노력·탁월함 등이 무엇으로, 어떻게 구성되는지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기도 하기에 Meritocracy는 항상 논쟁적일 수밖에 없는 개념이다.

Meritocracy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이것이 국어사전에 나오듯 단순히 능력을 중요시하는 태도가 아닌, cracy(통치를 가리키는 그리스어 kratia로 민주주의democracy는 인민demos의 지배kratia이다), 즉 ‘통치·지배’의 의미를 지녔다는 것이다. 통치에는 언제나 정당성이 필요하다. 마이클 영이 언급하는 건 아니지만, 막스 베버가 이야기하듯 불평등은 그 자체로 기능할 수 없고, 인간에게 어떤 ‘이유’를 제공해야 작동할 수 있었다. Meritocracy는 불평등한 지배질서가 능력, 지능에 의한 것이기에 정당하다는 이유를 제공한다. 이는 능력, 지능에 의해 지배의 정당성을 갖게 되는 사회 질서를 말하는 것이지, 단순히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런 까닭에 나는 Meritocracy를 ‘-주의’로 옮기는 것보다, ‘능력통치’, ‘능력지배’ 등으로 옮겼으면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하지만 이미 번역어는 정해졌고, 나는 이것 바꿀 능력이 없기에 능력주의를 앞으로도 사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이 글을 읽는 분께서는 Meritocracy가 가진 보다 정확한 의미를 아시고, 또 여러 번역어를 마주쳐도 이 개념으로 이해하셨으면 하는 바람에 글을 쓴다.

『불평등한 어린 시절 -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불평등의 대물림(Unequal Childhoods: Class, Race, and Family Life)』(2003)의 원본 표지.


들어가면서


전통사회에서 사회의 재생산은 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귀족의 자식도 귀족이 되는 것은 사회적 합의를 거쳐 승인된 특정한 과정을 성취해서가 아니라 혈통에 의한 것이었으며 혈통을 통해 권위(이는 카리스마 또는 상징권력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를 얻을 수 있었다.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를 통해 발현된 근대사회에서는 단순히 혈통만으로 권위를 얻을 수 없게 되었고, 사회의 재생산은 근대적 교육제도를 통해 이루어졌다. 근대사회에서 권위를 얻기 위해서는 사회를 통해 합리적이라고 승인된 제도를 통해 특수한 능력들을 습득해야했다. 단순히 혈통이 아닌 능력에 따라 사회가 재생산되는 것은 근대사회가 가진 하나의 특징이다. 이것은 하나의 진보였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있었음에도 사회의 재생산은 여전히 신분제처럼 재생산된다는 문제의식을 갖은 학자들은 교육 불평등에 관한 연구를 진행해왔고, 지금 다룰 아네트 라루(Annette Lareau)의 『불평등한 어린 시절 -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불평등의 대물림(Unequal Childhoods: Class, Race, and Family Life)』도 근대사회에서의 사회적 재생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책이다.


아네트 라루(annette lareau, 1952-)


이 책의 저자 아네트 라루는 U.C. 버클리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한 학자이고, 메릴랜드대학교와 템플대학교 사회학 교수를 거쳐, 현재 펜실베니아대학교에서 사회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자는 2003년에 출간된 『불평등한 어린 시절』을 통해서 미국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2004년 미국사회학회에서 ‘윌리엄 J. 구드 가족사회학 최우수도서상’, ‘문화사회학 부문 최우수도서상’, ‘아동·청년기 부문 공로상’과 2003년 미국교육학회의 비평가상을 수상하고, 2004년 사회문제연구학회의 C. 라이트 밀스 상(C.Wright Mills Award) 최우수상 후보에도 올랐다고 한다.


책의 구성과 내용


이 책이 목표하는 바는 교육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회적 불평등의 재생산을 실증하는 것이다. 그를 위해 라루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재생산 이론을 모델로 미국사회에 적용시켜 질적 연구를 진행한다. 이 책 서론에서 저자가 겨냥하는 것은 바로 ‘아메리칸 드림’, 즉 내가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사회적 믿음이다. 아네트 라루는 아메리칸 드림의 신화를 비판하면서 부모의 지위가 자식의 지위로 대물림되는 사회현상을 증명하고자 한다.


먼저 라루는 계급(class)과 인종(race) 변수를 중심으로 표본을 범주화하는데, 계급은 ‘중산층’, '노동자 계급[각주:1]', ‘빈곤층’으로 계급을 범주화한다. 중산층 가정은 부모 중 한 명 이상이 관리직으로 재직 중이거나, 고급 교육과정을 이수해야 재직할 수 있는 전문직 종사자인 경우이다. 노동자 계급 가정은 부모 중 주요 관리직에 종사 중인 사람이 없고, 고급 교육 과정을 이수 받지 못한 가정, 그리고 하위 화이트칼라 노동자를 포함한 범주이다. 마지막으로 빈곤층 가정은 부모에게 안정적인 직업이 없고, 공공복지를 통해 생계를 이어가는 가정을 가리킨다. 여기에 인종변수로 ‘백인’과 ‘흑인’을 추가했고 혼혈의 경우 흑인으로 범주화 된다.[각주:2]


이 책에서는 실질적으로는 ‘중산층’과 ‘노동자·빈곤층’을 중심으로 범주화해서 각각 사회적 계급의 일상생활의 구성, 언어 사용(의 계급적 차이), 가족과 기관 사이의 상호작용이라는 세 가지 경로를 통해 계급적으로 어떻게 아이와 가족의 사회적 삶이 형성되는 지를 서술한다. 1부 사회적 계급의 일상생활 구성은 3장으로, 2부 언어 사용은 2장으로, 가정생활과 공공 기관은 4장으로 각각 구성되어 있고, 각 장마다 한 가정의 사례를 서술하고 있다.[각주:3]


라루는 계층을 ‘중산층’, ‘노동자 계층’, ‘빈곤층’으로 조작화하지만 연구에서 실질적으로는 노동자·빈곤계층을 묶어서 범주화시키고 이에 중산층을 구분해서 연구를 진행한다. 중산층의 교육관행을 ‘집중양육’으로, 노동자·빈곤계층의 교육관행을 ‘자연적 성장’으로 개념화한다. 집중양육은 중산층 교육관행의 특징으로 자녀의 여가생활 및 교육생활을 부모가 조직함으로써 자녀의 능력이 집중적으로 향상되도록 하는 교육의 방법이다. 이에 반해 노동자·빈곤계층은 아이의 생존에 직접적으로 관여되는 일 외에는 아이의 여가나 교육생활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방임하는데, 라루는 이를 ‘자연적 성장’으로 표현한다.



아동 양육 방식

집중양육 방식

자연적 성장을 통한 성취

주요 특징

자녀의 재능과 의견 및 능력을 평가하고 지원하려는 부모의 능동적인 노력

자녀의 성장에 관심을 갖고 노력을 기울임

일과구성

아이들이 어른의 관리를 받으며 다양한 활동에 참여

아이들이 주도하는 ‘놀이’, 주로 가족들 간에 이루어짐

사용하는 언어

·설득/지시

·어른의 발언에 대한 아이들의 능동적 대응

·어른과 아이들 간의 장기적인 의견조율

·지시

·어른의 발언에 대한 질문이나 대응을 거의 하지 않음

·어른의 지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임

학교교육 참여

·아이의 상활을 대변한 비평과 개입

·이러한 역할을 아동에게 위임하기도 함

·의존적 태도

·불만과 무기력

·가정과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아동 양육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갈등

결론

아동의 권리의식 향상

제약에 대한 의식 발달


<표 1> 아동 양육의 유형 분류(라루, 2012: 66)


라루는 집중양육을 하는 중산층과 자연적 성장을 하는 노동자·빈곤계층의 특성이 어떻게 다른 사회적 삶을 구성하고, 또 부모의 지위를 대물림하는 지를 경험적 연구를 통해 보여준다. 중산층과 노동자·빈곤계층이 이런 특징을 가지고 각각 사회에서 상호작용하는 내용을 ‘일상생활의 구성’, ‘언어 사용’, ‘가족과 기관 사이의 상호작용’이라는 주제로 파악한다.


먼저 ‘일상생활의 구성’에서는 중산층 백인 아이, 노동자 계층 흑인 아이, 그리고 빈곤층 백인 아이를 사례로 계층에 따라 이들의 일상생활이 어떻게 다르게 구성되는 지를 다룬다. 중산층 백인 아이는 빈틈없이 계획된 일정 속에서 일상생활을 보냈다. 이들의 일상생활을 재능개발을 목적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다양하게 조직된 사회경험을 통해서 평가받는 방식에 익숙해지고, 부모들 또한 독서하는 문화자본을 아이에게 전이시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독서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에 반해 노동자·빈곤층 가정의 아이들에게는 최소한의 일과가 주어지고 나머지는 모두 아이들이 스스로 만들어나가게 된다. 특히 노동자·빈곤층의 부모들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자녀들의 교육에 신경을 쓸 수 없었으며 따라서 아이들은 여가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했고, 이들은 일정 수준의 문화자본을 체득하는 기회를 갖기도 어렵다.


다음으로 ‘언어 사용’에서는 일상생활 구성의 차이가 언어 사용과 어떤 연관을 맺는지를 설명하면서 중산층 흑인 아이, 빈곤층 흑인 아이의 사례를 통해 계층별로 어떻게 다른 언어능력, 언어 사용의 차이가 나타나는 지를 나타낸다. 중산층과 노동자·빈곤계층의 언어 사용의 가장 큰 차이점은 토론의 존재여부에 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자연스러운 토론이 이루어지는 중산층 가정의 아이는 이를 통해서 어휘구사, 추론, 협상 등의 가치, 즉 일종의 언어자본을 체화시킨다. 라루는 이것을 계층 간 차이를 만들어내는 핵심적인 요소로 평가한다. 반면에 노동자·빈곤계층의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토론보다는 부모의 일방적인 명령이 대화의 주를 이루고 또 이들은 중산층 가정에서는 볼 수 없는 체벌을 통해 아이들을 양육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자란 아이들은 중산층 아이들이 습득한 언어자본을 가질 수 없었고, 비교적 수동적인 태도와 어른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 어른에 대한 공포로 인해 노동자·빈곤층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예의바른 모습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가족과 기관 사이의 상호작용’에서는 아이의 교육에 관여하고 관리하는 부모의 방식이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데, 중산층 흑인 아이와 중산층 백인 아이, 노동자 계층의 백인 아이 둘을 사례로 보여준다. 우선 중산층 부모들은 아이가 다니는 학교와 관계를 맺는 데에 스스럼이 없었으며 학업성취 향상을 위해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들은 가정에서 자녀의 교육을 지도하는 부분에서도 능숙했다. 또 중산층 부모들은 선생님과 관계를 맺을 때도 대등하거나 우월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부모가 외부기관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통해 아이들은 관계형성의 방법을 습득하게 된다. 반면에 노동자·빈곤계층의 부모는 자신이 학교와 관계를 맺으며 혹시 ‘잘못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부모들은 학교나 교직원들이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지는 않을까, 자신들의 교육관행(방임)을 신고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자녀들은 부모가 학교에서 관계 맺는 방식을 보고 또 그런 양육방식이 잘못됐다는 규정을 받기도 하면서 상징폭력을 경험하게 된다.


나오면서


이 책의 목적은 서론에서도 언급했듯, 개인의 능력이 순전히 개인'만'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을 실증하는 데에 있다. 이 책에 이론모델로 삼고 있는 부르디외의 『재생산』 역시 사회적으로 세습되고 상속된 개인의 학업능력이 순전한 개인의 능력으로 신성화(자연화)되는 것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다양한 사회적 삶의 공간, 개인이 위치해 있는 공간들의 차이와 양육방식의 차이, 그리고 그에 의한 격차를 살펴보면 라루는 책의 목적을 어느정도 달성한 듯하다. 또한 라루는 책의 3부 12장 '사회계층의 힘과 한계'에서 이런 교육 불평등 문제에 관한 나름의 해답을 내놓고 있고, 중간중간 들어있는 서술들에서도 저자가 연구대상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떻게 예민하게 다루고 있는지도 알 수 있다. 이 책은 충분히 흥미롭고, 훌륭한 책인 것 같다.


이제 문제는 한국 사회학자들의 손에 달려있는 것 같다. 피에르 부르디외, 아네트 라루의 선행연구를 가지고 교육 불평등에 관한 연구를 어떻게 성찰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책은 그에 대한 여러가지 참조점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교육 불평등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라루의 연구에는 없는 성별변수도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라루는 노동자, 하층민 가정의 아이들이 토론문화에 익숙하지 않고, 그렇기에 어른에게 공손하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한국적 상황에서는 오히려 토론을 시도하는 것보다 어른에게 공손함이 학교의 교육과정에서 이점으로 작용할 여지도 존재한다.


이외에도 라루는 부록으로 현장연구에서 겪을 수 있는 시행착오에 대해 상세하게 적어둔 방법론에 관한 내용, 피에르 부르디외의 작업에 관한 내용, 그리고 연구에 사용된 자료들을 소개하는 내용도 책에 첨부해뒀다. 굉당히 친절하고 도움되는 부록이다. 그리고 번역의 가독성도 좋은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문장이 부자연스럽거나,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크게 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이런 주제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사회학에 관한 사전지식 없이 무난하게 읽을 수 있는 좋은 책이다.


반면에 아쉬움들도 존재하는데, 먼저는 책 구성에 관한 문제이다. 책 편집에서 의도적으로 가독성을 위해 각주들을 뒤에 배치한 것 같았는데, 이 부분들이 꽤 아쉽게 느껴졌다. 다음으로는 번역어에 관한 아쉬움이다. 전문번역가의 번역이라서 책의 가독성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훌륭하지만, 아쉽게도 몇몇 사회학적 개념어들의 번역에서 아쉬움을 느꼈다. 예를 들어 책에서는 계급·계층이 혼용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계급과 계층은 사회학적으로 분명 다른 개념어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설명을 해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그래서 번거롭더라도 원본을 참고해야할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부르디외 사회학의 핵심개념어인, 하비투스(habitus), 장(場, champ, field)를 각각 '습관', '현장'으로 옮겼는데 이 부분은 매우 아쉽다. 물론 라루가 일반독자들을 위해 사회학적 용어 사용을 지양했다고 해서 저렇게 번역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하비투스는 '사회적 습관'으로 옮긴 뒤 각주로 '집단·계급적으로 형성되는 사회적 습관'정도로 설명해주면 되지 않았을까, 장은 '사회적 삶의 공간', 또는 '사회 공간'정도로 옮겼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래도 출판기획 자체가 일반독자를 염두에 둬서 이렇게 번역된 것 같은데, 이런 식으로 번역했다면 일반독자들의 보다 더 깊은 이해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다. 모쪼록 이 책은 주변에 교육에 종사하고 있는 지인들에게 추천하고, 교육 불평등에 관심있는 지인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좋은 책이다.

  1. 아마도 ‘저임금 노동자 계급’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본문으로]
  2. 인종변수에 히스패닉(hispanic)이 추가되지 않은 것은 아마도 라루의 연구가 1990년대 중후반을 중심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본문으로]
  3. 3부 가정생활과 공공 기관은 사례기술 외에도 결론에 해당하는 ‘사회 계층의 힘과 관계’라는 장이 있는데 이는 사례기술이 아니라 제외하고 설명했다. [본문으로]

SOME PRINCIPLES OF STRATIFICATION(DAVIS AND MOORE, 1945)를 읽고


Kingsley Davis와 Wilbert E. Moore의 ‘SOME PRINCIPLES OF STRATIFICATION’라는 논문은 사회계층화와 사회질서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이 논문에서 저자들은 크게 사회계층화의 기능적 필요, 지위 결정의 두 가지 요소, 주요 사회기능과 사회계층화, 계층화된 시스템의 변화, 외적조건 등의 주제를 다룬다.

우선 사회계층화의 기능적 필요라는 주제는 이 논문이 다루는 다른 주제보다 더 중요한 이론적 함의를 다루고 있는 것 같다. 이 주제에서는 사회계층이 왜 사회에 필요한지에 대해 다룬다. 여기서 저자들이 강조하는 것은 사회계층이 보편적이고 기능적인 역할을 감당한다는 사실이다. 일종의 지위는 그 지위 자체를 성취하기 위한 동기와 지위 안에서 지위가 가진 의무를 중요하게 수행하면서 사회의 기능적 요건을 충족시킨다. 또 이런 다른 지위는 사회질서의 일부로서 이에 따른 보상과 분배 그리고 사회의 권리와 특권들은 불평등하며 이것들은 사회계층화 현상을 발생시킨다. 다음 지위 결정의 두 가지 요소에서는 지위를 결정하는 요인으로 사회적 요인과 개인의 재능을 지적한다. 이러한 결정 요인들은 기능적 중요성에 따라 사회에서 차등적인 보상을 받게 된다. 그 다음으로 주요 사회기능과 사회계층화에서는 종교, 정부, 부·재산과 노동, 전문 지식 등의 지식들이 어떻게 사회계층화와 연관되는 지에 대해서 다룬다. 계층화된 시스템의 변화에서는 전문화의 정도, 기능주의적 강조의 본질, 부당한 차이의 규모, 기회의 정도, 계층현대의 정도 등의 내용을 가지고 시스템 변화에 대해 설명한다. 그리고 외적조건에서는 문화발전단계와 다른 사회와 관련된 상황, 사회의 규모 등에 의해 사회계층이 받는 영향에 대해 설명한다.

이 논문은 큰 틀에서 기능주의 이론에 입각해서 쓰인 사회계층화에 관한 논문이다. 글의 이론의 핵심적인 부분은 사회계층화 현상이 사회마다 조금씩 다른 양상을 지니지만 그런 차이들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사회계층화 현상이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것과 사회계층이 사회의 기능을 충족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기능주의 이론은 사회학의 창시자인 에밀 뒤르켐의 이론적 소여를 따르고 있고 특별히 이 논문에서는 탈코트 파슨스의 기능주의적 시각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능주의 관점에서 사회계층화에 따른 불평등은 보편적인 현상이며, 차등적 보상과 지위는 사회를 유지하는 하나의 기능을 담당하는 역할을 하며 이에 따라 사회에 필요한 것이 된다. 기능주의 이론이 주장하는 불평등은 두 가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첫 번째, 사회계층화와 불평등은 시·공간에 따라 변화하는 유동적인 현상이다. 기능주의 이론에서의 불평등은 보편적 현상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사회마다 차등적 보상을 받는 지위들은 가변적인 것들이며 또 급격하게 변화하는 현대사회에서는 더욱 변화의 속도가 상승할 것이다. 두 번째, 기능주의 이론은 동어반복적인 논리적 오류를 지니고 있다. 기능주의 이론에서는 사회의 각 기능들이 필요에 의해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기능주의 이론은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라는 논리적 오류를 지니고 있다. 이 논문 또한 차등적 보상과 지위가 있어서 사회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금 존재하는 불평등 또한 사회적 필요에 의한 것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기능주의 이론의 한계이다. Kingsley Davis와 Wilbert E. Moore의 논문은 사회에 존재하는 사회계층의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 적합해 보인다. 예를 들어 ‘사회에는 차등적 보상과 지위가 존재하며, 이것은 사회의 필요에 따른 사회적 합의의 결과이다.’라는 식의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논문은 사회계층은 동학 내지는 사회변동과 역사성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고 또 논리적인 한계도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2017.봄

불평등과 사회적 위험 : 건강·사회문제지수를 중심으로(황선재, 2015)를 읽고


황선재의 ‘불평등과 사회적 위험 : 건강·사회문제지수를 중심으로’는 소득불평등이 증가할수록 사회의 통합은 해체되고 개인들은 지속적인 경쟁에 내몰리게 되며, 또 이런 현상들로 인해 사회의 부정적인 현상들을 초래한다는 이론적 근거를 토대로 Wilkinson과 Pickett가 고안한 건강·사회문제지수를 측정의 도구로 활용하여 한국사회와 국제사회를 경험적으로 분석해낸다. 이를 통해 이 논문은 소득불평등이 증가할수록 건강·사회지수로 분석된 사회위험의 정도도 높아지는 현상을 보여주며, 한국사회의 많은 사회문제들이 소득불평등과 관계가 있으며,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이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다.

이 논문은 ‘선행연구 및 이론적 배경’을 통해 소득불평등에 관한 기존의 이론들과 최신 연구결과들을 기존의 이론들을 반박하고 연구의 논지를 구체화한다. 이 연구에서 사용하는 중심적인 이론적 근거들이 있다. 먼저 소득불평등은 경제성장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거나 상관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음으로는 소득불평등이 증가할수록 소득하위계층의 정치적 의견이 정치과정에 투입될 가능성은 낮아진다. 그 다음으로는 소득불평등은 사회구성원의 사회통합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마지막으로 소득불평등은 사회 속 개인들의 지위경쟁을 증가시키며 이로 인해 여러 병리적 현상을 증가시킨다.

이후 ‘불평등과 사회적 위험 간의 관계 측정’에서는 앞서 언급한 이론적 토대와 함께 Wilkinson과 Pickett의 건강·사회문제지수를 가지고 분석을 진행한다. 이 부분에서는 각 지표들의 의미에 대해 설명한다. 더불어 한국적 특수성을 고려해 기존의 Wilkinson과 Pickett의 건강·사회문제지수에서 사용되는 지표에 몇 가지 지표들을 추가하거나 제거하여 분석의 틀을 정형한다. 이어서 ‘분석결과’에서는 선행연구와 비슷한 분석결과가 나타났고 또 소득불평등이 높을수록 사회적 위험들이 증가함을 경험적으로 확인한다. 특별히 한국사회는 소득불평등이 1997 외환위기 이후 비교적 빠르게 증가했으며, 소득불평등과 건강·사회문제지수가 전반적으로 비슷한 추이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연구는 소득불평등이 사회적 위험을 초래할 수 있음을 경험적으로 증명함으로써 사회불평등 문제가 사회적 위험, 문제적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고려되어야할 중요한 요소임을 밝힌다. 특별히 연구에서는 소득불평등이 경제성장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의견이나, 저소득층의 경제적 불만이 정치과정에 투입될 것이라는 기존의 연구를 최신 연구로 반박하며 불평등 문제에 대한 기존의 시각을 전환시킨다. 또한 통계적 방법론과 함께 여러 가지 지표와 데이터를 가지고 분석한 연구이기 때문에 보다 더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연구에 사용된 지표들이 사회적 위험을 표현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정책적 함의를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연구에 덧붙여 이 연구가 이론적 근거와 분석결과로 제시하는 ‘사회통합’, ‘사회적 신뢰’에 대한 논의는 기능주의적 전통에서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이기 때문에 이 연구는 기능주의자들로부터도 설득력을 지닐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구조 기능주의 전통에 있는 로버트 K. 머튼의 일탈이론을 통해 연구한 메스너와 로젠필드도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해 사회의 규범이 약화되고 일탈적 행위가 증가함을 밝힌다. 또한 이 논문은 신자유주의로 인한 소득불평등은 사회구성원들의 지속적인 지위경쟁을 유발한다고 지적한다. 이 논문에서 다루는 양적연구 외에도, 신자유주의와 소득불평등이 개인에 미치는 영향을 다루는 한국의 연구들이 이 논문의 성과를 뒷받침할 수 있을 것 같다. 사회학자 김홍중은 현대의 개인들을 생존을 위해 도구적 성찰성을 극대화하는 ‘육화된 신자유주의’의 주체로 해석했다. 또 사회학자 오찬호는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는 저서를 통해서 암울한 시대의 피해자이며 가해자인 20대들의 모습을 지적한다. 이 저서에서 오찬호는 개인의 노력을 통해 성공을 이루었다는 자기계발서의 논리에 빠진 20대들이 학력위계주의를 확대재생산 하고 자신이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차별과 부조리도 서슴지 않으며 정당화하는 모습을 읽어낸다.


2017.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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