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디외 덕후가 본 『아비투스』

며칠 전 언급한 『아비투스』를 봤습니다. 정독하기는 어려워서 빠르게 살폈습니다.

1. 자기계발서와 사회학: 이 책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하고 싶은 말은 책이 자기계발서라는 겁니다. 평가와 무관하게 자기계발서는 보통 좋은 이야기를 하고 그걸 긍정적으로 따르다 보면 삶이 개선될 가능성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모든 일은 사바사, 케바케이기에 이 책이 누군가에겐 인생의 책이 될 수 있겠고,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책의 가치가 정해질 것 같습니다.

2. 핵심: 이 책은 부르디외의 사회학을 사용해 최상층으로 가는 법을 말합니다. 부르디외가 말한 사회적/계급적 습관인 아비투스 개념, 그리고 자본 개념을 통해서 최상층의 사람은 어떤 자본과 아비투스를 지녔으며 어떻게 해야 그들처럼 될 수 있는지를 말합니다. 이후에는 제가 본 이 책과 부르디외의 사회학의 차이를 3개 이야기하겠습니다.

3. 아비투스: 저자는 우리 삶의 모든 행동의 근원이 되는 원리인 아비투스 개념을 설명하고, “아비투스를 바꾸는 건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를 열린 개념으로 보기는 하지만, 이것을 전혀 쉽게 바꿀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유년 시절의 사회적 배경에서 습득한 아비투스를 1차 아비투스라고 하고, 그 이후에 습득한 아비투스를 2차 아비투스라고 합니다. 저자의 말은 2차 아비투스에 관한 것인데, 1·2차 아비투스를 모두 상류층에서 습득한 사람과 서로 다른 배경에서 습득한 사람은 본질적으로 다르고, 오히려 상승이동으로 다른 아비투스를 습득한 사람의 그것은 분열된 아비투스입니다.

4. 문화자본: 책에 제시된 자본의 대부분은 문화자본 개념에 포함되는 개념입니다. 문화자본은 논쟁적인 개념입니다. 부르디외는 프랑스 사회를 연구해서 문화자본 개념을 만들어냈지, 한국 사회를 보고 만들지 않았죠. 한국에서도 문화자본이 계급을 구별하는 데 큰 영향을 줄까요? 어느 쪽에서는 한국에는 계급문화가 자리 잡지 못했기 때문에 문화자본의 영향이 미약하다고 하기도 하고, 한 편에서는 부르디외가 연구한 당시와 다르게 문화자본의 배타성이 감소하고 대중은 문화를 잡식으로 소비한다고 보기도 하고, 다른 한 편에서는 부르디외의 이론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판단하기도 합니다. 책에서 다룬 유럽과 한국은 다른 사회이고 문화자본도 다른 맥락에서 쓰일 겁니다. 저도 문화자본이 한국에선 프랑스만큼 계급 구별의 효과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보는 편입니다. 곁가지로 저는 한국이 시험/고시 자본주의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5. 숙명론: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3부는 이 책이 다루는 내용에 대한 부르디외의 답변을 간접적으로 싣고 있습니다. 지배계급은 자신의 문화적 특성을 아주 자연스럽게 향유하죠.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그 특성이 마치 본능인 것마냥 보여주며, 나는 너희와 다르다는 걸 보이는 겁니다. 반면 지배계급으로의 상승지향을 꿈꾸는 중간계급을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그것을 쟁취하려 하죠. 이 책에서 말하는 게 그겁니다. 하층민의 억척스러움이 아닌, 지배층의 자연스럽고 즐기는 태도, 즉 아비투스를 가지라는 거죠. 암울하게도 부르디외는 이런 중간계급의 도전이 보통 실패로 돌아간다고 분석합니다. 그래서 동시대에 사회학자는 부르디외에게 숙명론자라는 낙인을 찍죠. 부르디외가 이야기한 것은 언제나 작은 기회일 뿐입니다.

6. 다시 자기계발서와 사회학: 부르디외는 신이 아니고, 당연히 이 책을 통해 지위 상승을 이루고, 상류층의 아비투스를 갖추는 데 성공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부르디외는 숙명론자가 아님에도, 사회학은 현실과학이자 경험과학이기 때문에 사회의 불평등을 저렇게 분석합니다. 당장 이 글을 읽고 일상을 사는 우리에게, 신빙성은 떨어지지만 변화의 가능성을 긍정하며 열심히 살라고 하는 책과 현실적이지만 상승이동은 어렵다고 말하는 사회학 책 중에 무엇이 더 유익할까, 저는 이게 고민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계발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두 책의 성격을 이해해주시고, 저는 앞선 이유로 이 책보다는 다른 자기계발의 방법을 찾으시는 걸 추천하고 싶습니다.

1. 핵심: <사회학자와 역사학자>는 부르디외와 샤르티에의 대담집으로, 부르디외의 장황한 수사로 쉽게 접근하기 어려웠던 부르디외의 사회학을 보다 더 평이하면서도 수준높게 접근할 수 있는 책으로 부르디외 사회학의 전반을 이해하기에 좋은 책입니다.

2. 저자: 이 책은 부르디외와 아날학파 4세대의 역사학자 로제 샤르티에의 대담입니다. (부르디외는 스킵) 샤르티에는 <프랑스 출판의 역사>라는 기획을 통해서 ‘책, 출판의 역사’분야의 업적을 인정받은 권위있는 학자죠. 여기서 샤르티에는 부르디외의 인터뷰어에 가깝지만 샤르티에 자체도 대학자일 뿐더러 부르디외를 워낙 잘 이해하고 있기에 대담의 수준 자체가 매우 높습니다.

3. 내용: 이 책은 총 5장이에요. 1장 ‘사회학자의 직능’에서 부르디외는 “과학 자체에 과학적 시선”을 돌려주고, 이미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모든 것을 문제시 삼는 사회학과 사회학자의 역할에 관해 설명합니다. 2장 ‘환상과 인식’에서는 은폐된 지배의 메커니즘으로 인해 만들어진 ‘환상’을 폭로하며 ‘인식’으로 나아가야 사회의 예속에서 자유를 확보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어지는 ‘구조와 개인’에서 부르디외는 구조주의(객관주의), 실존주의(주관주의)의 이분법은 허상이며 이를 지양하면서, 사회학자는 객관적 위치와 주관적 관점을 모두 포괄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4장 ‘하비투스와 장’에서 부르디외는 인간이 단순히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행위자가 아닌, 내면 깊숙한 속에 체화된 모종의 성향체계(하비투스)를 지닌 역사적이고 집단적인 존재라고 밝힙니다. 하비투스는 구조와 행위라는 극단 속에서 창조적 길을 낸 개념으로, 구조화된 구조이자 구조화하는 구조입니다. 또 하비투스는 기존 구조주의와는 다른 열린 성향의 체계임을 강조합니다. 이어서 부르디외는 장(field)에 관해 설명하고, 이어지는 5장에서 부르디외는 당시 연구하고 있었던 ‘마네, 플로베르, 미슐레’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장의 탄생을 다룹니다. 장이란 정치, 경제, 문화, 종교, 예술, 학문 등의 독자적 가치를 가지고 분화된 근대사회의 사회적 공간인데요, 여기서 부르디외는 마네의 인상적인 예를 통해서 장의 탄생을 설명하고 제가 느끼기에 이 부분이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같습니다.

4. 느낀 것: 부르디외는 대담을 통해 자신의 이론세계를 여러 번 설명했던 학자입니다. 그중에서도 이 책이 가장 평이한 것 같습니다. 동시에 부르디외가 가지고 있었던 고뇌나 유머같은 것들을 잘 살려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글에선 언제나 치열한 부르디외인데, 역사를 이야기하다가 “내가 샤르티에 (권위있는 역사학자) 앞에서 역사 얘기를 해도 되는 건가”하는 웃긴 내용도 있고, 프랑스에서 주변적 위치에 있었던 사회학을 정상과학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했던 그의 고민, 프랑스 지성계에서 겪은 고뇌와 치열함이 그대로 나타나서 좋았던 것 같습니다. 또 이상길, 배세진 선생님의 번역과 적재적소에 나오는 부연설명 등이 매우 유익하기도 합니다. 책이 묵직하지는 않은 편이고 가벼우면서도 깊은 부르디외를 만나보시기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1. 핵심: <아틀라스의 발>은 한국에 부르디외가 수입된 지 20여 년이 지나 집대성된 부르디외에 관한 연구서로서, 제가 판단하기에 한국어로 쓰인 부르디외에 관한 연구서 중 가장 완성도 높은 연구서입니다. 이 책은 포스트식민 상황이라는 문제의식 속에서 부르디외에 관한 전기, 부르디외 이론에 관한 연구, 부르디외 이론을 통한 경험연구로 이루어져 있고, 각 부분이 매우 정치(精緻)하게 쓰였습니다.

2. 저자: 이상길 교수님은 제가 존경하는 연구자 중 한 분으로 한국에서 언론정보학을 공부하신 뒤 프랑스에서 사회학을 전공하셨고, 현재는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 계십니다. 푸코, 부르디외에 관한 굵직한 번역서와 경험연구를 병행하시는 학자시고, 하시는 작업 하나하나 굉장히 완성도가 높고, 한국의 부르디외 연구자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전문가세요.

3. 구성: 이 책은 총 3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부 '지식인의 초상'은 부르디외의 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기할 것은 이 부분이 단순히 부르디외의 생애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디외의 분석 틀을 가지고 그것을 부르디외에게 돌려주는, 그런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르디외는 어떤 사회적 영향을 통해 성장했는지 밝히고, 부르디외의 작업과 프랑스 지성계에서의 부르디외 위치 등 다양한 정보를 흥미롭게 다루고 있습니다. 2부 이론적 지평은 부르디외의 사회학 이론을 심화적으로 다룬 연구서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여기서는 장(field)이론, 언어 이론 등 그의 핵심 이론을 다루고 있습니다. 모두 좋은 내용이고요, 특히 5장 장이론의 재구성 같은 경우 장이론을 이해하는 데 매우 탁월한 것 같습니다. 끝으로 수용의 단층에서는 부르디외의 이론을 어떻게 한국적 맥락에서 수용할 수 있는지 능동적으로 연구한 저자의 경험적 연구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4. 책의 필요: 먼저 이 책은 부르디외에 관한 입문자분들이 보시기에는 1부와 2부 장이론의 재구성을 보시면 부르디외의 개인, 학문세계와 이론의 핵심을 파악하시는 데 많은 도움이 되실 것 같다고 생각이 됩니다. 특히 1부의 경우에는 한국어로 부르디외에 관한 개인, 학문세계를 이 정도 밀도로 서술하는 책이 없기 때문에 연구서지만 입문자들께서도 꼭 읽어보시길 추천해드려요. 그리고 2부 이론적 지평의 경우는 부르디외에 관한 조금의 기본지식을 갖추신 다음에 보시면 더욱 도움이 되실 것 같고요, 마지막 수용의 단층 같은 경우도 그렇습니다.

5. 느낀 점: 이 책의 제목이 '아틀라스'의 발인 이유는 부르디외의 마지막 강의에서 나온 “성찰성이란 세계를 자신의 어깨에 짊어진 아틀라스의 두 발이 어디를 딛고 있는지 질문하는 일입니다.”라는 말 때문입니다. 제 계정의 이름이 아틀라스인 이유도 그렇구요. 부르디외의 성찰적 사회학이란 당연시되는 세계를 의문시하는 작업입니다. 사회학이 제기하는 질문체계가 있다면, 그 질문체계 자체를 의문시하고 질문하는 것, 그것이 '사회학의 사회학'이자, 성찰적 사회학이고, 성찰성인 것입니다. 이상길 선생님은 이 성찰성 개념을 포스트식민(현재를 또 다른 정신적 식민형태로 규정하면서, 해방을 추구하고 서구가 부여한 정체성에서 해방을 요구하는) 상황으로 확장하시는 겁니다. 이 책은 지난 20여 년간 연구된 한국의 부르디외 연구의 중간결산이자 당분간은 넘기 어려운 업적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반독자들께선 이 책을 통해 부르디외와 그의 세계를 느끼실 수 있을 것 같고요, 사회과학 연구자를 꿈꾸는 독자들은 이 책을 더욱 진전된 연구를 계획하는 기반으로, 자양분으로 삼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비판서평을 하려고 합니다. 부르디외에 관한 한국어로 출간된 자료는 거의 다봤어요. 이 김영사의 <부르디외&기든스>의 경우에는 제가 한참 초창기에 공부를 할 때 봤던 책인데, 최근에 다시 봤습니다. 김영사의 지식인 마을 시리즈죠.

1. 핵심: 이 책은 부르디외, 기든스라는 두 사회학자를 '세계화'라는 주제로 대질시켜가며 두 사람의 이론과 정치적 차이를 설명하는 책입니다. 세계화는 무엇인지, 부르디외 기든스의 사회학은 어떻고 이를 통해 세계화에 관한 어떤 다른 관점을 가졌는지를 설명합니다.

2. 구성: 책은 우선 세계화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또 사회학의 기원을 설명하고, 부르디외의 사회학과 기든스의 사회학을 다루고, 이런 것들을 통해서 맞불(부르디외), 제 3의 길(기든스)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가상 대화를 통해 둘의 입장차를 설명하고 프랑스적 전통의 지식인과 근대성의 위기 등을 다룹니다.

3. 비판: 이 책은 정치학자이신 하상복 선생님이 쓰셨습니다. 정치학자이시기에 사회학의 역사에 관해 쓰시는 데 오류가 존재하는 것 같고요, 그래서 그것들을 조금 설명하려고 합니다.

(1)베버는 반실증주의자다: 베버는 반실증주의자가 아닙니다. 베버는 당시 독일지성계를 양분했던 실증주의와 관념론 사이에서 양자를 창조적으로 절충하여 '이해사회학'이라는 새로운 체계를 창안하죠. 베버는 실증주의가 설명하는 인과와 역사주의(관념론), 해석의 방법을 절충해냅니다. 베버는 반실증주의자가 절대 아닙니다.

(2)뒤르켐과 베버는 반(反)마르크스주의 사회학의 기원이다: 이것도 아닙니다. 뒤르켐이 사회학을 정초할 때, 마르크스와 대결하며 사회학을 새로운 과학으로 성립시키려 했던 적도 없고요, 흔히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관념론적 역사변동을 옹호하는 반마르크스주의 저작이라고 얘기하는데 이것도 아니에요. 베버는 본인이 기대 이상으로 유물론적이며, 당시 지성계가 니체와 마르크스에 의해 각인됐다고 이야기하고, 더불어 베버의 자본주의 논쟁자는 좀바르트와 브렌타노였습니다.

(3)세계화라는 주제설정과 부르디외&기든스: 이건 오류라기보단 설정의 잘못 같은데요, 저는 도통 부르디외를 세계화라는 주제로 녹여낸 게 이해가 안 갑니다. 부르디외의 사회학은 지배질서에 관한 사회학이고 세계화에 관한 이야기는 아직 지엽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더불어 저는 기든스가 이론 내적으로 힘이 있는 학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기든스는 대외적인 유명세에 비해서 약간 내실이 떨어지는 학자 중 하나죠. 영어로 글쓰는 학자라 유명하고, 또 유명한 제 3의 길 역시 사회이론이라기보다는 정책, 정치사상 개념이죠. 단적으로 기든스 사회학을 전공한 학자가 한국엔 하나도 없는 것도 그의 사회학이 그정도 깊이는 없다는 반증일 거예요. 물론 그렇다고 그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건 아니지만. 무튼, 이 기획은 출판사의 문제같기도 해요.

(4)운동권 부르디외: 책에서는 부르디외와 기든스의 가상대화를 하는데, 부르디외를 운동권 학자만으로 표현한 게 아쉽습니다. 부르디외는 90년대 이후 시위 대열의 맨 앞에 서는 사회학자였습니다. 그런데 부르디외의 그런 참여는 본질적으로 자신의 사회학 기획 속에서 신자유주의라는 상징폭력에 대항하는 상징폭력으로서 연구, 참여를 실천한 것이지 그저 참여만 외친 학자로 파악하는 건 유치한 이해입니다.

(5)만듦새: 끝으로는 만듦새인데, 일단 부르디외와 기든스의 지적인 영향을 보여주는 계보 자체도 무척 틀린 부분이 많고요(이건 저자분의 문제이겠지만), 미시사회학의 미드(George Herbert Mead)의 자리에 인류학자 미드(Margaret Mead)의 얼굴을 넣어두거나, 아마도 입시시장을 겨냥한 건지 '영어로 만나는 원문' 이런 코너를 넣어뒀는데 저는 이런 부분들이 아쉬웠습니다.

4. 느낀점: 입문서이기에 한계는 있겠지만 정확하면서도 쉽게 전달할 수 있는 입문서가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도 부르디외나 기든스의 사회학 자체를 설명하는 부분들은 나름 쉽게 쓰였기에 도움이 되실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을 더욱 풍성하게 읽기 위해서는 부르디외 사회학의 개념을 아시면 좋다고 생각을 해서 이야기를 조금 나눠보려고 하고요, 제가 소설에 관해 설명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포일러가 걱정되더군요. 스포가 있으니 참고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부르디외는 그의 마지막 저작으로 <자기분석을 위한 소묘>를 남깁니다(자기분석에 대한 초고로 번역). 자서전이라는 장르를 무척이나 비판했던 부르디외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사회학을 통해 스스로를 분석합니다. 죽음을 앞에 그는 자신이 청소년기에 받은 상처가 ‘치유 불가능한 것’이어서 ‘인생의 매 순간’ 끊임없이 고통을 주었다고 회고하고, 다른 곳에선 “나는 결코 대학의 구성원으로서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루이의 이 책은 “유년기에 관한 그 어떤 행복한 추억도 없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죠.

부르디외의 사회학에는 많은 개념들이 존재하나 이 책을 읽을 때, 밀접한 개념은 아마도 하비투스(Habitus)와 문화자본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비투스란 일종의 사회적인 습관·버릇입니다. 개인은 사회적 습관을 체화한 존재고 그렇기에 개인의 행위는 순수하게 개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역사적이고 집단적이며 계급적인 것이죠. 저는 하비투스를 일종의 사회적 함수라고 이야기하는데요, 함수의 공식이 있으면 어떤 변수가 들어와도 일정한 방식으로 처리됩니다. 그런 것처럼 어떤 동일한 하비투스를 체화한 집단의 개인은 서로 다르지만 생활할 때 어느 정도 동일한 반응과 행위로 대응을 합니다. 하비투스는 열린 성향의 체계이기도 하지만 이정도만 이야기드립니다.

부르디외는 자본을 문화·사회영역으로 확장시킵니다. 문화자본에도 여러 층위가 있지만, ‘체화된 문화자본’이 중요합니다. 체화된 문화자본은 경제자본이 외부에 축적된 자원인 것과는 다르게 소유에서 존재로 이행된 것으로 교환도 불가능하죠. 문화자본은 사회화 과정에서 개인에게 내화되며, 신체와 결합된 한 성향으로서 존재하는 개인의 능력이 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취향·교육·몸짓 등의 다양한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예를 들어 고급스러운 문화자본은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동일한 예술품을 평가할 때는 전혀 다른 견해가 나오고 언어의 사용, 일상적인 몸짓에서도 문화자본의 차이는 드러나죠. 흔히 아는 고상한 언어와 천박한 언어의 차이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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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의 끝>은 빈곤과 폭력을 다루는 시종일관 불편한 책이고, 야만적인 폭력으로 가득한 책입니다. 에디에게 폭력을 가하는 사람들은 야만적인 하비투스를 가진 사람들로서 폭력이 폭력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야만은 자연스러운 것이지 폭력이 아닌거죠. 그곳의 하비투스를 가진 에디 역시 그것이 문제라고 반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비투스와 맞는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하죠. 어떤 고급스러운 취향도 찾아볼 수 없는 이 동네는 원색적인 폭언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반지성주의의 하비투스는 근대의료에 대한 불신, 몰지각한 위생관념 같은 이야기로 형상화됩니다.

너무나도 적나라하고 야만적인 폭력을 보여주는 이 책은 결국 폭력의 장소인 피카르디를 떠나 도시의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끝이 납니다. 그게 바로 ‘에디의 끝’인데요, 책의 마지막은 상급학교에서의 새로운 형태의 폭력의 시작을 암시하며 마무리됩니다. ‘에디의 끝’이 시골의 원시적인 폭력의 ‘끝’을 의미했다면, 에필로그는 도시·부르주아 사이에서의 세련된 형태의 폭력을 암시하면서 끝이 납니다. 그건 에디의 끝이면서 동시에 에디의 시작일 겁니다.

1. 핵심: 정수복 선생님의 <응답하는 사회학>에는 부르디외 사회학의 '해방적 효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르디외를 통해 해방을 느꼈던 사람들은 대개 사회적 폭력의 경험을 공유하고 그처럼 상승이동을 경험한 사람들이었죠. 지금 소개할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와 에두아르 루이의 <에디의 끝>은 부르디외 사회학을 형상화한 소설로 읽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자의 여성으로서, 후자는 성소수자로서 겪은 사회적 폭력을 드러내며 문제의식을 나타냅니다.

2. 출판사: 공교롭게도 이 두 책은 모두 열린책들에서 나왔습니다. 이곳에 관해선 8월 28일 포스팅을 참고하세요!

3. 저자·역자: 부르디외의 사회학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영감을 제공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골에서 태어나 부르주아 사회에 진입한 아니 에르노,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학자가 된 게이 지식인 디디에 에리봉, 그 에리봉의 제자이자 <저항의 유산>이라는 부르디외의 논문집을 편집하고 시골출신으로 파리고등사범에 진학한 에두아르 루이가 있습니다. 또 에르노의 경우에는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부르디외와 보부아르를 꼽습니다. <남자의 자리>는 불문학자이면서 전문 번역가인 임호경 선생님께서, <에디의 끝>은 번역학자 정혜용 선생님께서 하셨는데 둘 다 번역이 좋다고 느꼈고 에디의 끝 같은 경우에는 참 노력한 번역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4. 내용구성: 부르디외 사회학에는 문화자본이라는 개념이 있는데요, 그중에도 체화된 문화자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부모나 교육을 통해 육체로 습득되는 자본으로, 한 사람의 지적역량과 취향을 형성합니다. 고급스러운 문화자본을 물려받은(체화한) 사람은 교양있게 행동하고 그러지 않은 경우는 천박하게 행동하는 거죠. 남자의 자리는 시골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교사가 되고 또 부르주아 남성과 결혼한 여성이 아직도 시골에 살며 고급 문화자본을 가지지 못한 아버지와 소통이 불가능해지는 그런 상황을 그려냅니다. 시골에서 자라며 겪었던 경제적, 성적, 문화적 불평등을 서술하고 주류사회에 진입하고 겪게 된 상징적인 폭력 역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르노가 여성으로서의 삶과 상승이동을 보여줬다면 에디의 끝은 문화자본도, 경제자본도 부족한 프랑스의 시골에서 태어난 성소수자가 겪은 폭력의 경험들을 적나라하게 서술합니다. 이 책에서는 퀴어 정체성을 가진 소년의 유년, 청소년기의 경험을 보여줍니다. 물리적 폭력은 물론이고 남성성(masculinity)의 문제와 다양한 층위의 폭력을 유년의 시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5. 느낀점: 이 두 책은 모두 에세이, 소설, 자서전의 경계가 모호한, 또 유려하기보다는 투박하고 때로는 천박한 언어로 문제의식과 주제를 드러내는 사회학적 소설입니다. 부르디외는 <남성지배>를 통해 여성과 성소수자 문제를 다루지만, 그는 여성도 성소수자도 아니었습니다. 부르디외는 푸코가 권력이라고 부르던 것을 폭력이라고 불렀고 그만큼 비참과 아픔에 민감한 사회학자였습니다. 그에 의해 이론으로 추상화된 폭력의 경험들이 에르노와 루이를 통해서 소설로 다시 한 번 형상화되었고, 이 소설들은 모두 소설로서도 훌륭하지만 사회학적 시선과 개념이 담긴 좋은 사회학의 교재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에디의 끝> 같은 경우는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눠보고도 싶네요.

1. 핵심: 이 책은 부르디외와 그에 관한 가장 권위있는 주석가이자 제자인 로익 바캉이 공동집필한 책으로 부르디외의 사회학으로 초대하는 책입니다. 타문화권(미국)에 부르디외가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는 책으로, 부르디외를 이해하기 위한 책 중에 가장 심도있는 책입니다.

2. 출판사: 이 책은 그린비 출판사에서 나왔습니다. 그린비 출판사는, 현대철학, 구체적으로 프랑스 철학·맑스 철학에 특화된 출판사로 굵직한 책들을 내고 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참고할 책이 많은 출판사라서 좋아하는 출판사이기도 하고, 신간이 나오면 항상 살펴보는 출판사이기도 합니다.

3. 저자·역자: 이 책은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사회학자 부르디외와 그의 제자이자 역시 중요한 학자인 로익 바캉이 공저한 책입니다. 부르디외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했으니 바캉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그는 스무 살에 부르디외를 만난 이후로 그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제자이자 동료였습니다. U.C. 버클리에서 교수로 활동하면서 바캉은 꾸준히 부르디외의 사회학을 미국에 수입하는데 기여하기도 했고, 부르디외가 이 책의 편집 전권을 맡길 정도로 그를 신뢰한 것을 보아 둘의 사이를 짐작할 수 있죠. 그리고 이 책의 역자는 이상길 선생님이신데요, 번역으로나 부르디외에 관한 연구로나 굉장히 탁월한 학자이시고, 전반적으로 부르디외 책의 번역이 안 좋은 데에 반해 이 책의 번역은 매주 좋은 편입니다.

4. 내용구성: 이 책은 본문이 400 페이지 정도의 분량에 3부로 구성되어있고, 부록만 약 100페이지 정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부록 자체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로익 바캉과 이상길 선생님이 쓴 부록은 부르디외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정보들을 제공합니다. 그래서 부록을 먼저 읽고 본문을 읽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부록에서는 바캉이 부르디외를 심화적으로 읽는 방법에 관해 설명하고, 이상길 선생님은 부르디외 사회학의 핵심개념과 그의 이론이 가지는 의미를 짚어주시죠.

책 1부는 로익 바캉이 작성했습니다. 바캉은 여기에서 부르디외 사회학의 전체적인 윤곽을 소개하면서 그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아무래도 부르디외를 설명한 텍스트 중에 가장 밀도있는 텍스트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어지는 2부는 미국의 시카고 대학에서 부르디외와 바캉이 나눈 대담을 수록했는데, 여기에서 부르디외는 그의 이론과 연구 실천의 전반적인 취지를 설명합니다. 미국에서 오독되고 있는 자신의 텍스트에 관해 해명하고 자신의 이론을 진솔하게 설명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파리워크숍은 부르디외가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진행한 입문 강의를 녹취한 대본을 수록했습니다. 이 부분은 사회과학연구에 있어서 가장 실천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책은, 1부에서 부르디외 이론의 전반을 설명하고, 2부는 그 이론의 기저에 있는 속 이야기들이 오가고, 3부에서는 이를 기반으로 한 연구실천은 어떠해야 하는지, 그걸 다룬다고 보시면 됩니다.

5. 시사점: 일단 이 책은 쉽지만은 않은 책이어서, 어느 정도 기본적인 사회과학 독서가 되신 분들이 보시기에 적합하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작정하고 읽으시면 어려움은 있겠지만 이해할 수 없는 정도의 텍스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분들이라면 동의 여부를 떠나 한 번 쯤은 읽고 공부해야 할 텍스트라고 생각합니다. 부르디외의 성찰적 사회학, 사회학의 사회학은 사회 연구의 과학적 도구들을 끊임없이 사회연구자에게 겨누는 것입니다. 연구자의 실천 역시 사회연구의 대상처럼 사회 속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피에르 부르디외

“지금까지 저는 숱한 공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엄격한 의미에서 반박의 대상이 된 적은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서글픈 감정이 들기도 합니다. 많은 이유가 있는데요, 그중 하나는 프랑스 지식 장 안에 저의 수많은 적이 있지만, 진정한 맞수가 없다는 사실에서 나옵니다. 호적수, 맞수란 저를 반박하기 위해서 그에 필요한 [과학적] 작업을 하는 사람입니다. … 다만 저를 반박하려는 사람이라면 아침 일찍 이른 시간에 일어나서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조금 오만하게 들릴지 몰라도, 어쨌거나 사실은 사실입니다.”

피에르 부르디외, 『사회학자와 역사학자』 34p.

“부르디외의 사회학은 지배계급의 반감을 샀다. 그는 온갖 객관적 자료를 동원한 사회학적 연구를 통해 지배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특권을 누리고 거드름을 피우며 즐기는 고상한 예술과 고결한 철학이라는 것이 사실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폭로했기 때문이다.”

정수복, 『응답하는 사회학』 200p.

부르디외의 “적은 있지만, 맞수는 없다”는 말이 종종 회자되고, 또 몇 분이 이유를 묻기도 하셔서 글을 조금 남겨본다. 예전에도 쓴 적이 있는데, 지워서 다시 올려본다.

내가 본 부르디외는 언제나 학적인 치열함으로 귀결되곤 했다. 그는 한국보다도 파리중심주의가 심한 프랑스에서 인구 500명이 안 되고 표준 프랑스어가 아닌 지역 방언을 사용하는 ‘깡촌’에서 자랐다. 시골의 수재였던 부르디외는 프랑스의 귀족이 모이는 명문 루이르그랑 고교와 최고 엘리트 학교인 그랑제콜에 입학한다. ‘촌놈’이었던 부르디외는 귀족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차별과 폭력을 받았고, 그는 사회에서 경험한 ‘사진’(장면)을 객관화하는 것이 바로 사회학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부르디외는 반골 중 반골이었다. 프랑스는 사회학보다는 철학과 문학의 나라인데, 부르디외는 당시 관념적 학문을 하는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 반감을 느끼고 가스통 바슐라르, 조르주 깡길렘으로 대표되는 과학철학을 공부하며 관념, 추상, 사유가 아닌 경험과학에 관심을 쏟기 시작한다.

청년 부르디외는 알제리전쟁에 징집되면서 그랑제콜 출신이 갈 수 있는 장교 교육대에 가길 거부한다. 그리고 보통 그랑제콜 출신은 프랑스 후방에 배치되었지만 그는 장교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며 알제리의 독립을 지지하고 징벌적으로 알제리 현지에 배치된다. 부르디외는 프랑스 5공화국 사회학자 중 유일하게 알제리 전쟁을 겪은 사회학자였다.

알제리 전쟁터에서 그는 프랑스의 식민지배가 알제리에 미친 부정적 영향을 폭로하는 『알제리 사회학』을 출판했고 이는 미국에 번역되기도 한다. 프랑스의 지식인들이 책상에 앉아 좌파신문에 성명을 내며 알제리 독립을 외칠 때, 부르디외는 현장에서 알제리를 경험적으로 연구하며 알제리의 독립을 촉구하는 작업을 했던 것이다. 지식인이 책상에서 노동자를 논할 때 그는 빈민촌에서 현장연구를 했다. 그는 항상 그렇게 작업했다.

지식인 사회에 대한 부르디외의 비판은 꾸준히 진행되었다. 노동자계급과 부르주아계급 출신의 학생이 받는 교육의 차이를 보여주는 『상속자들』, 교육을 통한 계급재생산을 다루는 『재생산』, 교양이라는 우아한 이름으로 벌어지는 폭력을 폭로하는 『구별짓기』, 프랑스 고등교육 체계의 이면에 존재하는 엘리트주의를 다루는 『국가 귀족』 등이 대표적이다.

자신이 속했던 지식인 사회의 위선을 끊임없이 폭로하고, 그것을 경험적 자료를 통해 끊임없이 객관화했던 그의 작업이 지식인의 눈에 좋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부르디외는 파리의 ‘상속자들’, ‘국가 귀족’과는 다르게 지식인 사회에 무혈입성할 수 없었다. 1981년 그가 그랑제콜의 교수로 임용된 후 그는 세계적 지식인으로 발돋움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치열한 사람이었다.

1999년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참여의 맥락에서 방한한 부르디외는 70의 나이에 한국 사회학자들에게 “나는 아직도 새벽 6시에 일어나 작업하니 당신들도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자 김대중 대통령과의 만남을 거부하고, 권력자를 뒤로한 채 한국의 시민사회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언제나 시위의 가장 앞 대열에 선 사회학자였고, 죽을 때까지 원고를 놓지 않았다.

“적은 있지만, 맞수는 없다”는 말은 그의 과학적이고 철저한 작업이 아니꼬운 파리 지식인 사회의 공허하고 관념적이며 추상적인 비판을 두고 하는 말이지, 재수없음이 아니다. 그는 사회학계의 유노윤호였다.

노모스(Nomos)와 일뤼지오(Illusio)*

 

자의성(arbitraire)은 모든 장(champ)들, 예술적 혹은 과학적인 것들과 같은 가장 순수한 장들의 원칙에도 자리 잡고 있다. 이 장들 각각은 ‘자신의 근본적인 법’, 자신의 노모스(노모스는 보통 ‘법’으로 번역되고 있으나, 자의적인 제정 행위를 상기시키는 ‘구성(constitution)’으로 번역하거나 어원과 보다 가까운 ‘시각 및 구분의 원리’로 번역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를 가지고 있다.1) 파스칼의 말대로 “법은 법이고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이 법에 대해 말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법은 예외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경우 동어 반복을 통해서만 진술된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고 나뉠 수 없는 그것은, 다른 장의 법과 이 다른 장이 강제하는 진리의 제도(régime)에 결부될 수 없다. 이런 점은 특히 예술의 장에서 가시적이다. 예술의 장이 내세우는 노모스는, 19세기 후반에 주장된 바,(‘예술을 위한 예술’)대로 본다면 경제의 장이 내세우는 노모스(‘장사에는 인정사정 없다’)의 반전(inversion)이다. 바슐라르2)가 주목하고 있는 바와 같이 ‘법률적 정신’과 ‘과학적 정신’ 사이에도 동일한 양립 불가능성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모든 어림셈(approximation)을 거부하는 것, 소송의 원천인 모호함을 없애기 위한 의지는 법률가에게 한 평의 땅의 값을 정확하게 평가하도록 이끄는데, 이것은 학자의 눈에는 터무니없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이 말하는 것은 하나의 장을 형성하는 관점이 일단 받아들여지게 되면, 이 장에 대해 다른 외부의 관점을 채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노모스는 결코 그런 식으로 위치될 수 없기에 반박될 수 없고, 안티테제도 가질 수 없는 테제이다. 사고할 수 있는 것과 사고할 수 없는 것, 규정된 것과 금지된 것은 규정하는 구분의 정당한 원리로서 그것은 존재의 모든 근본적 측면에 적용될 수 있으며 이것은 사유되지 않은 채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모든 타당한 문제들의 모태로서 그것을 문제로 요구하는 문제들을 생산할 수 없다.

  그리하여 각각의 장은 파스칼의 범주처럼 자신의 고유한 내기물(내기에 건 돈, enjeux)들 속에 행위자들을 가둔다. 이 내기물들은 다른 관점, 다시 말해 다른 게임의 관점에서 보면 눈에 띄지 않거나 적어도 무의미하며, 심지어 헛되다. “위대함이 드러내는 모든 광채는 정신의 탐구 속에 있는 자들에게는 빛이 없다. 재치 있는 사람들의 위대함은 왕·부자·장군 등 육체적으로 위대한 그 모든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지혜의 위대함은 ···중략··· 관능적인 자들과 재치 있는 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종류가 다른 세 범주이다.”3) 파스칼의 명제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각각의 장들에 의해 제안된 내기물들과 이윤들이 어디에서 지각되고 끌어당기는 것을 멈추는지 관찰하면 충분하다. (이것이 장들의 경계를 시험하는 방법들 가운데 하나이다.) 예를 들어 고위 공무원의 직업적 야망은 연구직 종사자를 무심하게 만들 수 있고, 예술가의 무모한 투자나 ‘1면’을 차지하기 위한 기자들의 투쟁은 은행가들이 보기에는(예술가들과 작가들이 부르주아 아버지와 일으키는 갈등은 성인 연구의 단순한 주제topos가 아니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없이, 아마 장 외부에 무관한 모든 사람들에게, 다시 말해 아주 흔히 피상적인 관찰자들이 보기에 그것은 대체적으로 여전히 의미를 알 수 없는(inintelligible) 것이다.

 

*해당 글은 국역된 부르디외의 『파스칼적 명상』Méditation Pascaliennes, 김웅권 역, 동문선, 2001, 141-143p.를 기준으로 영역된 『Pascalian Meditations』, tran. Richard Nice, Stanford, 2000과 비교하고, 몇몇 개념어는 원서인 『Méditation Pascaliennes』, Seuil, 1997과 비교해서 본문을 수정해본 원고이다.

 

1) 나는 향후의 연구에서 장 이론을 보다 체계화적으로 설명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당장, 독자들은 나의 책 『예술의 규칙』Les Règles de l'art : genèse et structure du champ littéraire, Paris: Éditions du Seuil. 특히 254-259p.를 참고하길 바란다.

 

2) 가스통 바슐라르(G. Bachelard), 『새로운 과학정신』Le Nouvel Esprit scientifique (Paris: Librairie Felix Aican, 1934).

 

3) 파스칼(Pascal), 『팡세』Pensees, 793.

사회학자와 역사학자, 피에르 부르디외 로제 샤르티에 저, 이상길 배세진 역, 킹콩북, 2019

피에르 부르디외는 20세기 최고의 사회학자 중 한 명입니다. 또 부르디외는 가장 많이 인용되는 사회학자이기도 한데,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글로벌 지식 장에서 위치하는 그의 자리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부르디외의 사회학은 그만큼 매력적이기도 하고, 그만큼 적실성을 갖추고 있기도 한데 이 매력과 적실성만큼이나 그를 입문하는 데는 여러 어려움들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그의 책들의 문장이 난해하다는 것이고, 부차적으로는 한국의 번역서들의 번역의 질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보통 한국의 부르디외 서적들은 사회학자가 아닌 불문학자들이 번역한 것이 대부분이라 더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회학자와 역사학자>는 앞서 언급한 두 가지 문제점과는 연관이 없는 책입니다. 우선 부르디외의 서술을 장황하고 난해합니다. 한국어 역본뿐 아니라 그의 영역본들을 봐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부르디외 특유의 난해함이 없어서 가독성이 매우 좋습니다. 아무래도 대담집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덧붙여 설명하자면 부르디외는 <말한 것들>, <성찰적 사회학으로의 초대>, <Satz und Gegensatz> 등의 대담집을 통해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는 이론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대담이라는 형식이 그의 이론을 전달하는데 좋은 형식일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 책은 한국의 대표적인 부르디외 연구가이신 이상길 선생님과 현재 파리에서 정치철학 박사과정에 계신 배세진 선생님의 공역으로 믿고 볼 수 있는 역본입니다. 역어 하나하나가 적확한 것이라고 신뢰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서 번역은 한국어로서의 자연스러움도 필요한데 문장도 유려해 가독성도 좋습니다. 그리고 대담집의 특성상 부가적인 설명이 필요한 부분에서 적절하게 역자들의 부연설명이 있어서 더 내용을 쉽게 이해하기에 좋습니다.

 

책 내용으로 들어가보면 이 책의 제목은 <사회학자와 역사학자>이지만, 사회학자에 방점이 찍혀있습니다. 샤르티에가 인터뷰어에 가깝고, 부르디외가 인터뷰이라서 그럴 것입니다. '사회학자의 직능', '성찰성', ‘환상과 인식’, '구조와 행위의 극복', '하비투스', '장(場)'과 같은 부르디외 사회학의 핵심적인 개념들을 그의 입을 통해 단순하고 명료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핵심 개념과 함께 부르디외가 연구하고 있었던 마네, 플로베르, 미슐레, 하이데거 등의 인물을 통해 장(場)에 관한 경험적인 연구 과정과 결과들을 서술하는 마지막 장도 그의 이론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대담이다 보니 설명들이 문어(文語)만큼 체계적이지 않은 단점이 존재하긴 하지만 어떤 입문서들보다도 편하게 부르디외의 이론을 이해할 수 있는 장점이 존재합니다. 초심자께서는 이 책 이후에는 <성찰적 사회학으로의 초대>(또는 <부르디외, 커뮤니케이션을 말하다>) 부록에 있는 이상길 선생님이 작성하긴 부르디외 사회학의 주요 개념을 참고하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더불어, 인터뷰어에 가까운 로제 샤르티에 역시 ‘대가’답게 부르디외의 이론을 아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고, 그의 이론에서 명확치 않았던 부분들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질문함으로써 답변을 유도하고, 가려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실력을 발휘합니다.

 

이 책에서는 아마도 부르디외 학문의 절정기라고 볼 수 있는 1988년 부르디외의 어떤 이론적인 야망과 자신감, 그리고 한 편으로는 ‘인간’ 부르디외의 고뇌와 발랄함도 엿볼 수 있습니다. 모쪼록 부르디외에 관심이 있는데, 섣불리 입문하시지 못하셨던 초심자분들, 또 부르디외 사회학을 그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받고 싶으신 분들께 강력하게 추천드리는 책입니다.


부르디외의 재생산 이론


부르디외는 하비투스, 자본, 그리고 장과 같은 기본개념들을 도구로 사용하여 프랑스 사회의 교육에 대한 연구를 이어나갔다. 이 때문에 부르디외는 미국에 수용될 때 교육학자로 소개되기도 했다. 부르디외는 1964년, 학업성취도의 격차를 낳는 주요 원인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자본의 결과임을 『상속자들(Les héritiers)』을 통해 논증한다. 이어서 1970년, 부르디외는 1960년대에 시행했던 교육사회학 연구들을 종합해 『재생산(La reproduction)』이라는 저작을 출간한다. 재생산에서 부르디외는 상징폭력의 일반이론을 구축하면서 교육을 하나의 상징폭력으로 규정하며 교육이 사회질서의 유지에 기능하는 점을 지적한다. 부르디외의 교육과 지식사회, 엘리트주의 등에 관한 연구는 끊임없이 그의 작업 속에 이어졌고, 내용은 조금씩 다르나 『국가귀족(La noblesse d’État)』과 같은 연구 역시 교육체계와 지식인 사회에 관한 연구를 담고 있다(이상길, 2018: 55-71).


교육에 관한 부르디외의 작업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작업은 『재생산』에 담겨있다. 부르디외의 재생산은 1997년 국제사회학회에서 진행된 설문조사에서 사회학자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사회학 도서 48위에 자리매김 했으며 단 권으로만 약 20,000회 이상 인용된 저작이기도 하다. 부르디외의 재생산 이론의 핵심을 두 가지로 파악할 수 있는데, 첫 째, 사회화 과정에서 상속받은 문화자본의 차이가 ‘학업성취의 격차’로 이어진다는 것이고, 둘 째, 교육과정을 통해 ‘불평등한 사회적 질서가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기존에 한국에서 수용된 재생산 이론 연구는 문화자본에 의한 ‘학업성취의 격차’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하지만 부르디외의 재생산 이론은 이러한 결과적 평등뿐만 아니라 그 격차를 통해 불평등한 사회질서가 정당화되는 과정을 중점적으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부르디외 재생산 이론이 가지는 두 가지 함의를 구분해서 설명할 것이다. 먼저 재생산 이론이 설명하는 교육 불평등에 대해 다루고, 이어서 교육과정 자체가 지닌 불평등의 정당화 과정에 대해 서술할 것이다.


1) 재생산 이론의 함의: 문화자본에 의한 학업성취의 격차




악셀 호네트(1986: 6-7, 55-57)에 의하면 인류학적 작업을 통해 전통사회에 가까운 부족사회들을 연구했던 부르디외는 한 사회에서 집합적으로 공유되는 관념적인, 상징적인 질서는 사회적 집단의 계급이익에 따른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부르디외는 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상징체계가 사회집단들의 투쟁 산물임을 주장한다. 이런 까닭에 어떤 한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지배적인 상징질서는 곧 투쟁에서 승리한 특정 집단의 상징체계인 것이며, 이는 이 자체로서 상징권력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이행은 부족집단이 상징권력을 두고 투쟁했던 시기와는 다르게 단순한 형태의 직접적인 상징투쟁이 아닌 문화적 지식의 습득과 보유에 관한 투쟁의 형태를 취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근대사회에서는 이러한 문화자본을 둘러싼 투쟁이 세련된 형태인 교육으로 나타나고, 교육기관을 통해 이 질서가 주입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부르디외에게 학교로 대표되는 교육체계는 사회적으로 중립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장소가 아니다. 학교에서는 오히려 특정한 (지배집단의) 문화의 전달되며, 그렇기 때문에 학교는 “문화적 신성화의 장소”, “문화적 전횡의 장소”, “문화적 전횡이 생산되는 장소”, 이에 따라 “기존질서가 재생산되는 장소”이다(앙사르, 1994: 203). 이에 따르면 학교는 지배집단의 상징적·문화적 질서가 이미 자리 잡은 장소이다. 다시 말해 교육의 장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사회공간이 아니라 이미 사회에 지배계급이 상징권력을 획득해 상징질서를 구축해놓은 공간인 것이다. 사회적 행위자는 각기 다른 계급의 하비투스를 체화하고, 자신이 온축(蘊蓄)한 다양한 형태의 자본을 가지고 교육의 장에 참여한다. 교육의 장에는 이미 지배계급을 중심으로 구축되어있는 사회질서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 장에 게임의 규칙에 적합한 지배계급의 하비투스를 체화하고 사회적 위치공간에서 그 계급에 적합한 자본을 가지고 장에 참여하는 행위자와 민중계급의 하비투스를 체화하고 그에 따른 자본을 가지고 장에 참여하는 행위자는 교육의 장에서 전혀 다른 수행성을 보일 것이고, 이는 ‘선별과 배제’로 이어진다.


부르디외(2003: 175-203)는 프랑스 교육체계에서 ‘시험’의 중요성과 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선별과 배제’에 대해 서술한다. 프랑스 교육체계 내에서 시험은 고등교육제도를 지배한다고 평가한다. 특히 부르디외가 설명하고 있는 프랑스 교육체계의 특징은 엘리트교육기관부터 실업학교까지의 위계가 명확하다는 점과 정성(定性)평가가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교육을 질적으로 평가하는 프랑스 교육은 평가자의 가치와 주관이 개입할 특성이 커지는데 이는 시험의 기준으로 작용한다. 이에 따라 시험응시자의 논구술·대면평가에서의 어조, 어투, 어휘구사력, 논술평가에서의 문체나 문장력 등의 언어능력은 물론이고 자세나 몸짓, 복장, 스타일 등도 평가에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부르디외가 관심을 가졌던 하나의 부분은 바로 계급 하비투스로 체화된 언어(의사소통)능력이었는데, 부르디외에게 언어능력은 계급 하비투스를 보여주는 각별한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계급의 하비투스 전체는 언어적 하비투스를 통해 드러난다고 말하기도 한다(부르디외, 2014: 99). 따라서 중립적인 것 같은 시험에서도 계급의 체화된 자본은 평가에 반영될 수밖에 없으며, 지속적인 선별과정(시험)에서 민중계급 출신이 좋은 성적을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부르디외는 이야기한다.


이런 선별과정을 거쳐 학업성취, 그리고 학위를 소유하게 된 사람들은 더 큰 특권을 부여받는다. 이들이 가진 능력은 지극히 사회적이고 상속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생득(生得)적인 것으로 자연화(본성화)된다(부르디외, 2006: 135). 학교는 교육과정의 승리자들을 천부적인, 타고난 ‘재능’이라는 이데올로기로 포장하고 사회질서의 재생산을 정당화시킨다(부르디외, 2003: 239).


2) 재생산 이론의 함의: 불평등의 정당화 과정으로서의 교육과정


“상징폭력을 행사하는 권력은 모두 자신의 힘의 토대인 권력관계를 은폐한 채 의미를 부여하고, 거기에 다시 정당성을 부여하는 권력이다. 이 권력은 이를 통해서 권력관계에 자신의 고유한 힘인 상징권력을 추가한다.”(부르디외, 2003: 20)


부르디외 『재생산』에서 가정 처음에 나오는 명제는 상징폭력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 사회의 불평등한 지배질서가 어떻게 유지되는지에 중점을 두었던 부르디외의 사회학에서 상징폭력은 핵심적인 개념이다. 부르디외는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에서 지배관계를 설명했던 이데올로기(ideologie)를 ‘상징적 지배(symbolic domination)’, ‘상징권력(symbolic power)’, 또는 ‘상징폭력(symbolic violence)’으로 대체하고자 했다(Bourdieu‧Eagleton, 1994: 265).


부르디외의 상징지배에 관한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베버의 사회학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베버는 종교가 사회의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기능에 대해 설명하는데, 사회의 불평등한 복(자본)의 분배는 단순히 복, 그 자체로서의 효과를 가질 수 없고 그 불평등한 분배가 정당하다는 승인을 필요로 했다. 이에 따라서 전능하고 정의로운 신과 세계의 비참이라는 모순을 설명했던 것이 종교에서의 신정론(神正論)[각주:1]의 역할이었다(베버, 2015a: 134). 신정론은 사회의 불평등을 해명하는 역할로 기능했던 것이다. 이런 베버의 아이디어를 차용해서 부르디외(Bourdieu, 2011: 57)는 “신정론은 언제나 사회신정론(社會神正論)이다”라고 서술하는데, 이는 세속화된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자의 성공과 그 결과의 차이를 정당화하는 기제를 설명한 것이다. 직접적으로 부르디외(2003: 239-240)는 교육과정에서 일어나는 사회신정론의 효과, 즉 불평등의 정당화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렇듯 부르디외의 상징지배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적 불평등의 정당화 기능이다. 앞선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 지배관계는 지배관계 자체로서 기능할 수 없고, 그것을 피지배계급이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부르디외(2013: 28)는 상징자본[각주:2]을 베버의 카리스마의 변형된 형태로 이해했다. 베버에게 카리스마란 정당한 지배, 즉 피지배자에게도 정당성을 획득한 지배의 신성한 근거이다(베버, 2015b: 413-414). 상징권력은 곧 상대에게서 인정(정당화)받을 수 있는 권력이며, 지배계급의 문화적 자의성(un arbitraire culturel)과 폭력성을 오인(méconnaissance)[각주:3]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이다. 상징폭력은 오인으로 인해 피지배계급이 사회질서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될 때 발생하는 비가시적 폭력을 의미한다(이상길, 2015: 496-497).


부르디외(2003)는 교육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교육행위’ 자체가 문화적 자의성을 주입하는 과정이며 이는 곧 상징폭력이라고 규정한다. 교육행위는 ‘교육적 권위’를 부여받은 것으로서 오인을 생산해 교육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이는 의사소통을 통해 전달된다. ‘교육작업’은 교육행위가 중단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지배관계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하비투스를 형성할 만큼 오랜 시간 지속되어야 하는 주입작업이다. ‘교육체계’는 문화적 자의성을 재생산(문화재생산)하면서 동시에, 사회계급을 재생산(사회재생산)한다. ‘학교의 권위’는 교육적 권위를 제도화시킨 형태로서 교육의 장에 있는 행위자들에게 끊임없이 권위를 위임받고, 교육제도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제도 자체를 완성도 높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참고문헌


강창동, “학교교육의 상징적 폭력 작용에 관한 이론적 고찰”, 『한국교육학연구』, 15(2), 2009.

막스 베버, 『종교사회학 선집』, 전성우 옮김, 나남, 2015a.

_________, 『경제와 사회·1』, 박성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5b.

이상길, “부르디외 사회학의 주요 개념”, 피에르 부르디외·로익 바캉, 『성찰적 사회학으로의 초대』, 그린비, 2015.

______, 『아틀라스의 발』, 문학과지성사, 2018.

피에르 부르디외, 『재생산』, 이상호 옮김, 동문선, 2003.

_______________,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上』, 최종철 옮김, 새물결, 2006.

_______________, “상징자본과 사회계급”, 이상길 옮김, 『언론과사회』 21(2), 2013.

_______________, 『언어와 상징권력』, 김현경 옮김, 나남, 2014.

피에르 앙사르, 『현대 프랑스 사회학』, 정수복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4.


국외문헌


Bourdieu, Pierre. “Genese und Struktur des religiösen Feldes”, in Pierre Bourdieu Religion Schriften zur Kultursoziologie 5. Suhrkamp, 2011.

Bourdieu, Pierre ‧ Eagleton, Terry. “Doxa and Common Life: An interview”, in Savoj Zizek (ed.), Mapping Ideology, London: Verso, 1994.

Honneth, Axel. “The Fragmented World of Symbolic Forms: Reflection on Pierre Bourdieu’s Sociology of Culture”, Theory, Culture and Society, vol. 3, no. 3, 1986.

  1. “‘신’(神, 데오스)과 ‘의’(義, 디케)를 뜻하는 두 헬라어의 합성어로서,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고통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을 변호하려는 시도. 즉, 하나님이 존재하시는데 세상이 이처럼 모순투성이인지, 왜 계속 죄악이 맹위를 떨치는지, 그렇다면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 맞는지 등의 문제를 다루는 신학적 입장”(출처 : 교회용어사전, 생명의말씀사, 2013) [본문으로]
  2. 상징자본이란 어떤 유형의 자본일지라도 그 자본을 통해 사회적 인정을 얻게 되면 기능할 수 있는 자본을 의미한다(이상길, 2015: 518). 존경·명예 등은 상징자본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상징자본은 사회적 행위자에게 위임된 하나의 인정으로서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자본을 소유한 사회적 행위자는 상징자본의 소유자가 될 수도 있으며, 자본은 단순히 물질적인 영향력뿐만 아니라 상징적인 효과를 만들기도 한다. [본문으로]
  3. ‘오인’이란 “신비화된 인식으로서의 인정”(이상길, 2015: 510)을 가리키는 말로 역사적이고 구성적인 현실을 자연화하고 신비화하고 절대화해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본문으로]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

 

1. 부르디외 사회학의 기본개념: 하비투스(habitus), 자본(capital), 그리고 장(champ, 場)

 

요약하자면 부르디외의 일반적인 개념도식은 다음과 같다. 사회적 행위자가 가진 특정 자원(자본)은 특정한 사회적 게임(장)의 맥락에서 특정한 종류의 실천을 생산해내는 특징적 구조(하비투스)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상황은 견고하게 재생산되는데, 이는 자본, 하비투스, 장을 함께 연결하는 이 과정이 기존의 불평등한 자원의 분배를 정당화하는 것을 돕는 일상적인 이해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왜곡되기 때문이다. 부르디외는 이 개념들을 계층화, 재생산, 그리고 사회이동에 대한 설명을 발전시키기 위해 사용한다.(Riley, 2017: 111-112)

 

1) 하비투스(habitus)[각주:1]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다양한 철학적, 사회과학적 성과를 수용하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관점으로 구축된 하비투스는 부르디외 사회학 이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다(Loïc Wacquant, 2016). 사회적 행위자의 실천을 설명하는 하비투스는 ‘체화(體化)된 사회적 습관’으로 이해할 수 있다.[각주:2]

 

“아비튀스는 일종의 버릇이다. 버릇은 실천을 낳는다. 그런데 그 버릇은 사회적이다. 사회적이라는 것은 집단적이라는 것이며, 계급적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성적 주체가 아니며, 나의 행위 역시 합리적 선택이 아니다. 나라는 존재와 나의 행위는 오랜 역사 속에서 형성된 버릇에서 비롯되었다. 이 사회적 버릇은 개인으로서 나와 계급을, 행위와 구조를 매개한다.”(김동일, 2016: 1)

 

  앞선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 하비투스는 일종의 습관이다. 부르디외는 이 습관을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사회적이고, 계급적이고, 집단적이고, 역사적인’ 개념으로 구성한다. 개인은 이러한 계급적이고, 사회적인 습관인 하비투스를 체화한 존재이다. 이 습관을 기초로 하여 개인의 사회적 실천이 발생한다. 부르디외의 관점에서 개인의 사회적 실천은 자신의 이성과 주체적인 판단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계급과 집단에서 체화된 사회적 습관, 즉 집단적·계급적 무의식으로부터 발생한다. 하비투스는 특정한 의식적인 목표지향을 하지 않으면서도, 목표를 위한 실천을 만들어내, 조직하는 원칙이다(Bourdieu, 1990a: 53). 하비투스는 무의식적인 행위틀(frame)이며, 선반성적인(pre-reflective) 실천지향이다(정선기, 1999a: 57).[각주:3]

  더불어 하비투스는 기존 사회과학에서 대립하고 있던 미시적 행위(실천)와 거시적 구조 사이에서 양자를 매개하는 역할로 기능한다. 하비투스는 사회적 실천과 그 사회적 실천의 지각(知覺)을 구성하는 ‘구조화하는 구조’인 동시에 구조, 그리고 체계들의 구조 기능을 담당하는 ‘구조화된 구조’이기도 하다(Bourdieu, 1990a: 53; 부르디외, 2006: 312). ‘구조화된 구조’로서 하비투스는 사회와 행위자에게 구조화된(체화된) 구조이다. 사회의 거시적이고 객관적인 구조는 하비투스는 생산하는 사회적 조건인 동시에 행위자에 내면화되어 구조화된 구조로 작용한다. 또한 하비투스는 구조화하는 구조이기도 하다. 하비투스를 통해 만들어진 사회적 행위자들의 실천들은 이전 사회적 구조의 산물이지만 개인과 집단의 사회적 실천을 다시 재생산(구조화)하는 기능을 담당하기도 한다. 새로운 상황과 마주한 사회적 행위자들의 사회적 실천은 지속적으로 실천을 갱신하며 새로운 사회적 실천을 통해 새롭게 변화된다(정선기, 1999a: 57). 하비투스는 다양하고 새로운 사회적 상황을 접해도 일정한 수준의 사회적 실천을 조직하는 일종의 사회적 함수(function)와 같은 개념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요컨대 하비투스는 체화된 성향, 인지, 판단 및 행위의 지속적이고 전이가 가능한 체계, 도식(schème), 또는 틀(frame)이다. 유의할 것 중 하나는 행위자가 하비투스의 꼭두각시가 아니라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하비투스가 열린 성향의 체계임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하비투스는 행위자의 육체에 잠재하다가, 사회적 실천이 발생할 때 그때 그때 현재화되며 매번 새롭게 갱신되는 개념이다(부르디외·샤르티에, 2019: 99-101).

 

  오카모토 유이치로(2016)에 의하면, 부르디외는 현대사회를 ‘계급 분화된 사회’로 파악했다. 부르디외에게 사회적 행위자는 구조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전략적인 실천을 만들어내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계급 하비투스는 개인의 사회적 실천에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

 

“동질적인 생활조선 속에 위치한 행위자들 전체로 나타나는 이 계급(classe objective)은 동질적인 조건화를 부과하고 유사한 실천을 생성해낼 수 있는 동질적인 성향체계를 생산해내며, 또 일련의 공통 특성 즉 흔히 (재화나 권력의 소유처럼) 법적으로 보장되거나 또는 계급의 아비튀스(특히 분류도식 체계)처럼 육화(肉化)된 객체화된 특성을 소유한다.”(부르디외, 2006: 197)

 

“(계급은) 유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유사한 조건에 위치하고 있으며, 유사한 유형의 상황 속에 종속되어 있어서, 유사한 성향과 이해 관심을 가지고, 유사한 실천을 생산하며, 유사한 자세를 취하는 온갖 기회를 갖는, 행위자들의 집합이다.”(Bourdieu, 2001; 김동일, 2016: 8에서 재인용)

 

  부르디외의 계급론이 독특한 지점은 부르디외는 단순히 계급은 객관적인 지표로만 설명하는 것뿐만 아니라 계급이 공유하는 동일한 행위틀과 계급 안에서 발생하는 동일한 사회적 실천으로 계급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앞서 구조와 행위를 매개하는 구조로서 하비투스를 설명했듯, 거시적 구조의 수준에서 존재하는 계급구조는 계급 하비투스를 통해 행위자에게 내화(內化)되어, 사회적 행위자의 사회적 실천·행위를 조직하고 발생시킨다. 계급으로 묶인 각기 다른 개인들은 집단적으로 투영된 계급 하비투스를 매개로 “일련의 공통 특성”, “동질적인 성향체계”를 가지고 계급적 실천을 사회세계에 만들어낸다. 개인의 사회적 실천은 계급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며 지극히 계급적인 것이다(부르디외, 2006: 21). 계급별로 만들어지는 상이한 실천양식, 사회적(문화적) 실천을 중심으로 연구는 『구별짓기(La distinction)』에 나타난다. 예를 들어 상류층이 요트(yacht)같은 여가생활을 선호하는 것이나 중산층이 축구를 좋아하는 것은 그 계층이 가진 경제적·물질적 조건에 의한 계급적 무의식이기도 하다.

  하비투스를 요약하자면, 하비투스는 사회적 행위자의 사회적 실천·행위는 집단적이고 계급적이고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적 습관에 제약과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구체적으로 현대사회는 계급 분화된 사회로 파악하는 부르디외에게 하비투스는 결국 사회적 행위자의 사회적 실천·행위에는 구조적 제약이 있음을 드러내준다. 더불어서 이 구조적 제약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는 바로 계급구조로, 각기 다른 계급마다 상이한 사회적 실천을 발생시킨다.

 

2) 자본(capital)

 

  부르디외에게 자본은 희소재 및 그와 관련된 이윤을 전유할 수 있는 능력(이상길, 2015: 518)이며, 물질의 형태로든 또는 내화되고 체화된 형태로든 모든 축적된 노동(정선기, 1999a: 63)을 포함하는 것으로 개념화된다. 부르디외의 자본 개념은 스스로 증식한다는 측면에서 마르크스적인 자본의 의미를 가지고(김동일, 2016: 48), 베버적인 의미의 자산(asset)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이상길, 2015: 518). 개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본을 가지고 사회공간에서 사회적 실천과 상징 투쟁에 참여한다. 즉 자본을 통해 사회적 행위자들은 사회공간 안에서의 희소가치를 두고 투쟁하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자본 개념을 경제적 영역에만 국한시키지 않았으며 그는 자본의 개념을 보다 더 넓은 사회적 영역에 적용시켰다(보네위츠, 2000: 64; 김홍중, 2017: 6). 이를 통해 부르디외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자본론을 전개 시킨다. 1983년, 경제자본, 문화자본, 사회(관계)자본(Ökonomisches Kapital, kulturelles Kapital, soziales Kapital)[각주:4]이라는 논문을 통해서 자본의 세 가지 기초 유형에 대해 제시한다.

 

자본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초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경제자본(eoconomic capital)은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화폐로 태환(兌換)가능하며, 재산권과 같은 형태로 제도화될 수 있다. 문화자본(cultural capital)은 특정한 조건에서 경제자본으로 태환가능하며, 교육적 자격과 같은 형태로 제도화될 수 있다. 사회(관계)자본(social capital)은 사회적 의무(연줄)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정한 조건에서 경제자본으로 태환가능하며, 귀족의 칭호로 제도화될 수 있다.(Bourdieu, 1986: 47)

 

  경제자본은 아마도 기존에 통용되던 자본의 의미와 가장 밀접한 관련을 가진 의미일 것이다. 경제자본은 화폐라는 형태로 객관화된, 또 외부에 축적되는 자본으로서, 여러 생산 요소들(부동산·노동·공장), 수입, 물질적 재화와 같은 경제적 재화를 포괄한 총체로 구성된 자본이다(김동일, 2016: 29; 보네위츠, 2000: 64-65).

  사회(관계)자본은 상호간의 친분 또는 인정을 통해 제도화된 관계나 지속적으로 유지가능한 사회적 관계망에 속하게 됨으로써 소유할 수 있는 실질적이거나 잠재적인 자원의 집합"(Bourdieu, 1986: 51)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것은 한국적 맥락에서 인맥과 비슷한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한 개인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는 부르디외의 자본론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자본이다. 부르디외에 의하면 문화자본이란 세 가지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Bourdieu, 1986: 48-51).

  첫째, 문화자본은 체화된(embodied) 상태로 나타날 수 있는데, 체화된 문화자본은 경제자본이 외부에 축적된 자원인 점과는 다르게 소유에서 존재로 전이된 자본을 가리킨다. 체화된 문화자본은 사회화 과정에서 내화되며, 신체와 결합된 성향으로 체화된 개인의 능력이다. 이를 통해 개인은 취향과 교육의 정도, 몸짓 등의 다양한 모습을 보일 수 있다.

  둘째, 문화자본은 객관화된(objectified) 상태로 나타난다. 객관화된 상태의 문화자본은 문화적 생산물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물질적인 문화적 재화를, 예를 들면 회화·문학작품·도서·기념물 같은, 의미한다. 이는 경제자본과 같이 개인의 신체 외부에 하나의 대상물로서 존재하며 교환하거나 상속가능한 문화자본이다.

  셋째, 문화자본은 제도화된(institutionalized) 상태의 문화자본은 특정한 문화적 능력을 제도적으로 증명한 학문적 자격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국가공인 자격증이나 학위 같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제도화된 상태의 문화자본은 학위와 같은 학력자본을 제도화하여 이 자본이 가진 경제적 가치를 유지시킨다.

 

구분 문화자본
유형 체화된 객체화된 제도화된
토대 인지: 역량
미학: 취향
지식 교육
양식 문화선호 문화상품 문화제도
속성 육체적 문화상품의 양도성 자격증
과정 내면화
사회화
대상화
생산
제도화
재생산
유연성 위임불가능 접근의 개방/폐쇄 경제자본을 보장하는 자격증
소멸위험성 습득한 자본의 구식화 · 인플레이션
가치척도 특징 문화적 정통성 부족성

 

<표 1> 문화자본의 유형(한스-페터 뮬러, 미출간)

 

  앞서 다룬 자본과 함께 부르디외의 자본론에서 중요한 자본으로는 상징자본(symbolic capital)이 있다. 상징자본이란 어떤 유형의 자본일지라도 그 자본을 통해 사회적 인정을 얻게 되면 기능할 수 있는 자본을 의미한다(이상길, 2015: 518). 예를 들어 경제자본을 축적한 거부(巨富), 문화자본이 많은 예술인, 사회(관계)자본을 통해 다양한 유명인들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유명인 등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존경·명예 등은 상징자본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상징자본은 사회적 행위자에게 위임된 하나의 인정으로서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자본을 소유한 사회적 행위자는 상징자본의 소유자가 될 수도 있으며, 자본은 단순히 물질적인 영향력뿐만 아니라 상징적인 효과를 만들기도 한다.

 

자본형태 경제자본 사회(관계)자본 문화자본 상징자본
토대 화폐 관계 지식 자본의 사회적 인지: 특권
객체화 자본 연결망 문화상품·지식
제도화 소유권 ·개인적 속성으로 귀족·관료
·집단으로서 신분·직업
개인적 속성으로 학위
체화 · · 교육·취향
전이성 높음 낮음(불안정) 중간(교육 및 직종, 자본의 크기에 따라 다름)
소멸위험 사회변동(전쟁·금융위기 등) ·배은망덕
·불균형적 호혜
·기만
·교육팽창
·지식의 구식화
손실범주 ·인플레이션
·박탈
·관계
·지위
·하비투스의 구식화

 

<표 2> 자본형태의 논리: 현상형태와 재생산 방식(한스-페터 뮬러, 미출간)

 

  이외에도 부르디외의 자본론이 가진 특성이 두 가지 존재한다. 먼저는 자본의 태환(conversion)에 관한 것이다. 앞서 본 바와 같이 부르디외에 있어 다양한 자본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연관되며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자본의 총량을 증식한다(김동일, 2016: 52).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제도화된 문화자본으로서의 학위는 문화자본의 경제자본으로의 태환을 공증(公證)하는 역할로 작용한다. 또한 사회(관계)자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자본들 또한 자본의 태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부르디외 자본론이 갖는 특성은 자본 개념의 유연성에 있다. 김홍중(2017: 8)에 의하면 부르디외의 자본 개념은 특정한 사회공간에서 특유의 자본의 형식이 어떤 효과를 가지고 구성되었는지에 따라 새로이 적용 가능한 개념으로, 부르디외는 문학자본, 과학자본, 법-경제적 자본, 정치자본, 인격자본, 명망자본, 신체자본, 윤리적 자본, 지적 자본 등 자본을 다양한 사회적 맥락에서 적용시켜 개념을 구성했고, 다른 연구자들 또한 매력자본, 젠더자본, 정체성 자본, 감정자본 등으로 부르디외의 자본을 다양한 맥락에서 구성하여 사용했다.

 

3) 사회공간과 장(champ, 場)

 

  부르디외는 사회를 3차원의 “복합 구조(composition structure)”로 파악하고자 했다.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이 수직적인 차원에서 계급적 구성으로 사회공간을 개념화했다면 부르디외는 여기에 문화적 차원을 더하여 사회공간을 다차원적으로 확장시킨다. 이를 통해 사회공간은 경제자본의 크기로 수직적 구조를 이루고 동시에 문화자본의 양에 따라 수평적인 구조로도 위치하게 된다(Honneth, 1986: 9). 즉 부르디외는 자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직업집단의 투쟁을 수직적인 차원에서 구성하고, 동시에 사회적 장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사회의 수평적 분화까지 설명한다(정선기, 2011: 143).

  부르디외(2006: 219이하)는 사회적 행위자들을 사회공간 안에 분포시킨다. 이상길(2018: 201)은 부르디외의 이론에서 사회공간을 구성하는 세 가지 축에 대해 설명한다. 부르디외의 사회공간을 구축하는 첫 번째 축은 행위자들이 소유한 자본의 총량에 의해 위치된다. 두 번째 축은 전체자본에서 자신들이 소유한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의 상대적인 비중에 따라 사회적 위치가 각기 다르게 분포하게 된다. 세 번째 축은 행위자들의 사회적 궤적에 따라 결정되는데, 이는 행위자들이 소유한 자본의 총량과 구조가 겪은 통시적 변화에 의해 정의된다. 이 세 가지 좌표축을 중심으로 행위자들의 사회적 위치공간이 구성된다.

  결국 부르디외에게 사회공간은 다양한 형태의 자본들로 구조화된 공간이며, 동시에 하비투스의 의해 구성된 공간이다(부르디외, 2006: 311). 사회공간에서 사회적 행위자들이 위치한 자리는 그들이 스스로 소유하고 있는 자본의 총량과 구조에 의해 종속되어있다(보네위츠, 2000: 64-65). 부르디외에게 사회란 3차원으로 이루어진 복합구조의 공간이었고, 장은 이런 사회공간에서 분화된 하위공간이자 개인들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회적 실천이 일어나는 공간이다.

 

(2) 장의 기원

 

  앞서서 다룬 하비투스, 자본과 마찬가지로 장 이론은 부르디외 사회학에서의 핵심개념이다(부르디외, 2005: 8). 근대사회와 함께 탄생한 사회학은 ‘분화’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졌고, 에밀 뒤르켐의 『사회 분업론』같은 저작 역시 근대사회의 분화에 대한 하나의 연구를 담고 있다. 부르디외의 장 개념 역시 분화된 근대사회의 구별된 사회공간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장이란 앞서 살펴본 사회공간이라는 하나의 대우주 속에 상대적으로 자율성을 가진 공간적으로 분화된 소우주를 가리킨다(부르디외, 2002: 20).

  부르디외의 장 개념은 고전 사회학자 베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부르디외는 직접적으로 예술사회학에 대한 연구와 베버의 『경제와 사회』의 종교사회학 부분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이야기한다(Bourdieu, 1990b: 22). 먼저 부르디외는 베버의 종교분석틀을 장에 적용시킨다. ‘장’은 베버가 종교를 분석할 때 사용했던 분석틀인, 공급·수요·자본·이익·경쟁·독점 등의 경제학적 개념들을 사회의 하위공간으로 확장시킨 개념이다(현택수, 2010: 278; 이상길, 2018: 229). 다음으로 부르디외는 베버의 사회분화 양식인 다양한 영역에서의 ‘가치의 제도화’ 테제를 차용한다. 베버는 근대사회의 이행 과정을 연구하면서 점진적으로 종교 영역이 다양한 가치의 영역으로 제도화되는 현상에 주목했다. 각각의 가치영역은 독자적인 가치이념(객관적 의미체계)를 기반으로 발전해 일정한 분화 수준에서 지식인 집단의 출현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근대사회는 분화되었고, 가치가 제도화된 영역들은 독립적인 가치체계를 구축하며 발전한다(정선기, 2011: 143).

 

 

(3) 장의 일반적 속성과 종합

 

  부르디외(2004: 125)는 복수의 장의 가지고 있는 일반법칙이 존재한다고 서술한다. 이상길(2002: 189-190)에 의하면 근대사회의 분화된 사회적 소우주를 가리키는 장 개념은 다섯 가지의 일반적인 속성들을 공유한다.

 

  첫째, 장은 사회공간의 소우주들로서 사회공간은 ‘예술장’, ‘정치장’, ‘경제장’, ‘학문장’ 등 위계적으로 구성된 장에 의해서 구조화된다. 이 장들은 고유한 내적 논리와 ‘구조적 동형성’을 가지며 서로에 대해 ‘상대적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

  둘째, 장은 위치 공간으로서 객관적인 위치들 사이에 구조화된 공간이다. 위치는 장 내부에 불평등하게 분포된 다양한 자본의 양과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 이 구조는 장 내부의 개인, 기관들 사이의 세력관계에 의해 위치된다.

  셋째, 장은 투쟁공간으로서 각각의 장은 특수한 내기물(stakes)과 게임의 규칙을 가진다. 각각 장의 고유한 내기물과 게임의 규칙은 다른 장의 것들로 환원불가능하다. 장은 장 고유의 자본의 정당한 독점 또는 자본의 재정의에 관한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사회적 행위자들의 투쟁의 공간이다. 이들은 서로 투쟁하더라도 장 내부에 있는 공통의 이해관계를 공유한 존재들이다.

  넷째, 장에서는 하비투스·전략·일루지오(illusio)가 작동한다. ‘일루지오’란 장 내부에서 게임과 내기물의 신성한 가치를 향한 집단적 신념을 의미한다. 이는 게임의 조건이며 산물이다. 장 내부의 사회적 행위자들은 특정한 이해를 만들어내는 위치, 하비투스, 그리고 장의 역사 속에서 한 개인이 점유하고 있는 ‘사회적 궤적’에 의해 규정된다. 사회적 행위자들이 투쟁을 위해 사용하는 전략은 ‘위치’, ‘하비투스’, ‘사회적 궤적’ 이 세 가지 요인에 영향을 받는다. 장에서는 기존 세력관계를 이어가고자 하는 지배자(정통)의 보존전략과 그 관계를 뒤집으려고 하는 피지배자(이단)의 전복전략 사이에 근본적인 갈등이 존재한다.[각주:5]

  다섯째, 장이 하나의 객관적인 ‘위치공간’이라고 본다면, 각기 다른 위치들은 그에 대응하는 입장을 가지면서 위치 공간에 대응하는 ‘입장 공간’이 발생한다. 위치와 입장 사이의 조응은 기계적 결정론이 작용하지 않으며, 사회적 행위자들의 하비투스와 ‘가능성의 공간’에 의해 매개된다.

 

  부르디외(2004: 126)는 “학문장(學文場)과 같은 하나의 장은 다른 장에 고유한 이해관계와, 내기물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한 내기물과 특수한 이해관계를 정의함으로써 그 스스로를 정의한다. (지리학에서 거는 내기물을 걸고 철학자로 하여금 일하게 할 수는 없다.) 장에 고유한 내기물과 특수한 이해관계는 장에 입장하도록 만들어지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인식되지 않는다. (각각의 이해관계의 범주는 다른 이해관계, 다른 투자에 대한 무관심을 내포한다. 따라서 다른 이해관계들과 다른 투자들은 부조리하거나 상식 밖의 것으로, 혹은 이해관계를 초탈한 지고한 것으로 간주된다.) 하나의 장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내기물들과 유희를 할 준비가 된 사람들, 즉 유희의 내재적 법칙들과 내기물들에 대한 지식, 그리고 내기물들이 지닌 사회적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하비투스의 보유자들을 필요로 한다.”라고 서술하며 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막스 베버(2013: 34)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통해 “눈가리개를 하고 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구절을 옳게 판독해 내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침잠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예 학문을 단념하십시오.”라고 서술한다. 이는 근대사회에서 가치가 제도화된 학문장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하나의 학문장에서 각각의 하비투스를 체화한 장의 참여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다양한 자본을 가지고 ‘전문적 지식’이라는 상징자본을 얻기 위해 학문적 실천을 통해 투쟁에 참여한다. ‘전문적 지식’은 학문장 고유의 자본이다. 학문장에서는 ‘연구’라는 고유한 게임의 논리가 공유된다. 이 전문적 지식을 소유한 사회적 행위자는 장 안에서 ‘인정’이라는 상징권력을 얻게 되고 이를 통해 ‘정통’의 지위를 얻어 지배자로 군림할 수 있게 된다. 기존의 지배적 학술담론에서 벗어난 피지배자들은 학문장의 전복을 위해 새로운 지식을 가지고 투쟁에 참여할 것이다.

  이런 학문장에서의 상징자본과 게임의 논리는 스포츠의 장이나 경제장에서는 환원될 수 없는 자본이다. 뛰어난 육체적 퍼포먼스를 수행할 수 있는 육체자본이나 천문학적인 경제자본은 학문장 고유의 상징자본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전문적 지식 또한 스포츠의 장에서 핵심적인 자본으로 작용하기는 어렵다. 이렇게 각각의 장은 서로에게 독립적이며 상대적 자율성을 갖는다. 하지만 장은 구조적 상동성과 자본의 태환 가능성 때문에 서로 완전히 독립적이지 않으며 상호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이상길, 2018: 218-219). 장 내부에서 자신의 하비투스, 자본을 가지고 보전과 전복을 위해 투쟁한다는 상동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스포츠의 논리로 봤을 때 고대 필사본에 목숨을 거는 행위는 무가치한 행위이며 일종의 환상(illusion)으로 보일 것인데 학문장 내부에서는 그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는다. 이를 일루지오로 볼 수 있다.

  부르디외에게 사회는 온정적이고, 협동적인 공간으로 연대가 일어나는 장소가 아닌 적자생존적 긴장감과 자본의 축적을 위한 투쟁이 지배하는 공간이며, 부르디외에게 행위자란 언제나 사회적 삶에서 ‘실천적 위급함’ 해결하기 위해 힘쓰는 전투적인 존재이자 자기보존에 힘쓰는 코나투스적(conatic) 주체들이다(김홍중, 2017: 5-6). 부르디외는 ‘실천’을 “[(하비투스) (자본)] + 장 = 실천”(부르디외, 2006: 196)이라고 정식화한 바 있다. 결국 구체적인 실천이란 하비투스와 자본을 가진 행위자가 장에 참여할 때 발생하는 것이다. 사회적 공간인 장에서 개인들은 자신들이 체화시킨 계급 하비투스를 준거로 지각하고 판단하며, 집단적인 투쟁공간인 장에 참여한 행위자들을 끊임없이 분류·평가하고 구별짓는다(이상길, 2018: 204). 자본은 “실제로 이용가능한 자원과 권력의 총체”(부르디외, 2006: 220)이며, 장에서의 무기이자, 투쟁의 내기물이다(부르디외·바캉, 2015: 176). 행위자들은 자신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자본을 동원해서 장의 투쟁에 참여한다.

 

 

참고문헌

 

국내문헌

 

김동일, 『피에르 부르디외』, 커뮤니케이션북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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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부르디외·로익 바캉, 『성찰적 사회학으로의 초대』, 이상길 옮김, 그린비,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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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페터 뮬러, 문화, 취향, 구별짓기, 정선기 옮김, 미출간

현택수, 피에르 부르디외 아비튀스와 문화자본의 사회학, 김호기 엮음, 『현대 비판사회이론의 흐름』, 한울, 2010.

 

국외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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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_________. The Logic of Practice, trans. Richard Nice,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0a.

_______________. In Other Words: Essays Towards a Reflexive Sociology, trans. Matthew Adamson,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0b.

Honneth, Axel. The Fragmented World of Symbolic Forms: Reflection on Pierre Bourdieus Sociology of Culture, Theory, Culture and Society, vol. 3, no. 3, 1986.

Müller, Han-Peter. “Pierre Bourdieu Eine systematische Einführung”, Suhrkamp 2016.

Riley, Dylan. Bourdieu’s Class Theory: The Academic as Revolutionary, Catalyst Journal, vol. 1, no. 2, 2017.

Wacquant, Loïc. A concise genealogy and anatomy of habitus, The Sociological Review, 64, 2016.

  1. habitus는 국내에 아비투스, 아비튀스, 하비투스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는데, 이 글에서는 habitus의 역사성을 고려하고, 또 이를 강조하기 위해 이 단어를, 이 단어가 유래한 라틴어 발음인, 하비투스로 역어를 선택했다(이상길, 2011: 275). [본문으로]
  2. habitus는 부르디외 사회학 이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개념어이다. 구체적으로 부르디외는 원래 이 개념을 베버가 사용했던 에토스(Ethos)로 사용하다가, 에르빈 파노프스키의 『고딕건축과 스콜라 철학』을 번역하면서 habitus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부르디외의 이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헥시스(Hexis)부터 중세철학, 현대 철학·사회과학 등의 다양한 논의를 거쳐 구성된 개념이다. [본문으로]
  3.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것은 부르디외가 단순히 사회적 행위자를 구조의 허수아비로만 파악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기존의 레비-스트로스나 알튀세르 같은 구조주의자들이 행위자는 너무 단순하게 폐기 시켰다고 지적하면서 기존 구조주의자들이 등한시했던 생활세계(Lebenswelt)의 행위자를 다시금 사회학에 위치시키고 구조적 영향력 아래에서도 사회적 행위자들이 단순하게 구조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전략적으로 실천을 만들어가는 부분과 우연성을 자신의 이론에 추가함으로써 더 깊은 설명력과 사회변동의 가능성을 제시한다(Bourdieu, 1990b: 9). [본문으로]
  4. 독일어가 원본인 이 논문은 1986년, The Forms of Capital로도 출간되었다. [본문으로]
  5. 장 내부에서의 보전/전복, 정통/이단과 관련된 메커니즘 역시 베버 종교사회학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베버는 전문가 집단이 출현해서 각각의 사회적 공동체에 합리적인 설명을 제공한다고 파악했다. 이러한 체계화가 이루어지면 정설(Orthodoxie)이 이설(Heterodoxie)에 의해 공격받을 수 있다(정선기, 1999b: 82). [본문으로]

베버와 부르디외

부르디외와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신 홍성민 선생님은 부르디외가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다는 걸 느꼈다고 이야기하셨다. 부르디외와 푸코의 비교연구를 하기도 하셨던 선생님은 푸코가 '권력'이라고 하는 것을 부르디외는 '폭력'이라고 부른다고, 푸코와 그의 차이는 아마 폭력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 같다고 덧붙이셨다.(부르디외는 폭력과 구별되는 권력 개념도 사용한다.)

은폐된 사회의 지배구조를 폭로함으로써 지배당하고, 고통받는 자들로 하여금 무죄를 입증한다는 목적을 가진 부르디외 사회학은 '지배의 사회학'이며 무엇보다도 '폭력'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장 이론이 세계의 근원적인 폭력성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담고 있다는 이상길 선생님의 규정은 부르디외 사회학의 핵심을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사회 내에서의 불평등한 지배질서를 유지시키는 역할은 부르디외에게 '상징폭력'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된다. 상징폭력이란 피지배자가 지배계급의 자의성을 오인함으로써 그것을 정당화시키고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되어 발생하는 비가시적 폭력을 의미한다. 폭력이라는 부르디외 사회학의 핵심적인 개념과 전체적인 세계상을 생각해봤을 때, 베버가 부르디외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는 것을 갈수록 느낀다.

[세계종교와 경제윤리]라는 베버의 유명한 종교사회학 논문에서 그는 사회적 불평등을 종교가 정당화하는 과정에 대해 다룬다. 원시적이고 주술적인 관념들이 제거될수록 전능하고 정의로운 신의 세계에는 부당한 고통이 너무나 많았기에 이는 설명을 필요로 했고, 불평등한 복의 분배는 정당한 것이 되어야 했다. 신정론은 세계의 비참의 원인과 사회의 불평등한 복의 분배가 정당한 것임을 설명하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했다.

이런 맥락에서 부르디외는 [종교장의 기원과 구조]라는 논문에 "신정론은 언제나 사회신정론이다"라고 서술하는데, 이 대목은 세속화된 사회에서 사회적인 성공과 성공한 자의 복, 자본의 불평등한 분배를 포함한 모든 수준의 정당화를 다뤄야하는 사회학의 기능에 대한 서술일 것이다. 또 이는 부르디외가 "베버는 종교사회학이 권력사회학의 한 장(章)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라고 평가하면서 상징자본을 개념화할 때 베버의 카리스마 개념을 기반으로 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부르디외가 문화사회학을 오늘날의 종교사회학이라고 명명한 것은 곧 문화사회학이 권력사회학이며, 지배의 사회학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외에도 베버는 종교 영역이 점증적으로 다양한 가치영역으로 제도화·전문화 되는 과정(근대화)에 주목하면서, 분화가 진행중인 근대사회에서 각각의 독립적인 가치이념이 객관적 의미체계를 구축하고 일정한 분화수준에서 전문가 집단의 출현을 통해 구성되는 공동체의 교조적 원리의 체계화를 설명한다. 부르디외의 장 이론은 이 베버의 다양한 가치의 제도화라는 생각에 빚지면서 동시에 전문가 집단의 체계화된 도그마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정설(Orthodoxie)과 이설(Heterodoxie) 대결, 정통/이단의 대결이라는 베버의 아이디어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에서 지배관계를 설명했던 이데올로기를 대체할 상징권력, 상징폭력, 상징지배 개념의 기저를 이루는 독사(Doxa) 개념을 이끌어낸다.

이런 부르디외 사회학의 결정적인 세계상과 더불어 부르디외 사회학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 하비투스는 베버의 에토스를, 자본은 베버의 자산(asset)을 기반으로 발천시킨 개념이며 부르디외의 계급론 또한 베버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아틀라스와 부르디외, 한 지식인의 초상

이상길 선생님의 부르디외 연구서 <아틀라스의 발>을 처음 봤을 때 들었던 의문은 제목이 왜 '아틀라스의 발'일까하는 의문이었다. 일단 책 서문을 보면서 이 의문은 풀리게 되었고, 지난 9월 27일에 있었던 푸른역사아카데미 <아틀라스의 발> 서평회에 참여하면서 '아틀라스와 부르디외'에 관한 저자 이상길 선생님의 해석도 들을 수 있었다.

먼저 (일전에 포스팅한 적도 있지만) 책 제목이 <아틀라스의 발>인 이유는 이것이 부르디외가 콜레주드프랑스 마지막 강의 때 사용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상길 선생님께서 인용하신 대로, 캐나다 사회학자인 마르셀 프루니에에 의하면 부르디외는 자신의 콜레주드프랑스 마지막 강의에서 “성찰성이란 세계를 자신의 어깨에 짊어진 나틀라스의 두 발이 어디를 딛고 있는지 질문하는 일”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부르디외의 이 비유는 이 책의 부제인 "포스트식민 상황에서 부르디외 읽기"를 함축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제목인 것이다.

다음으로는 아틀라스와 부르디외에 관한 이상길 선생님의 해석인데, 선생님께서는 부르디외가 아틀라스를 언급했지만 이 이미지를 발전시킨 것은 아니라고 하시면서 이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덧붙이셨다. 하늘을 이고 있는 아틀라스는 땅, 그러니까 현실을 딛고 있는 존재이다. 반면에 아틀라스와 형제인 프로메테우스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이며 티탄족과 올림푸스족의 전쟁에서도 미래를 예견해 벌을 받지 않았다. 아틀라스는 미래를 예견하지도 못해 형벌을 받는 존재로 대비된다.

프로메테우스는 미래를 예견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인류에 불을 가져다주고 진보를 상징하는, 구체적이고 진보적인 수단을 제공하는 존재이다. 맑스는 그런 프로메테우스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파리신문이 폐간될 때 자신을 나타내는 이미지로 쓰곤 했다. 아틀라스의 이미지는 그런 프로메테우스적 지식인의 이미지와 대비될 수 있다. 아틀라스에게는 프로메테우스 같은 신적인 능력이 없이 세상을 짊어지는 형벌을 받는 존재이다.

이런 내용을 토대로 이상길 교수님께서는 "말년의 부르디외는 어쩌면 그저 세계 전체를, 세계의 비참을, 현실을 짊어지고 관점들에 대한 관점을 확보하려고 노력하는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이 딛고 있는 땅을 성찰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 그런 이미지를 사용하지 않았을까"하는 해석을 이야기 해주셨다.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


  하버마스 정치사회학의 핵심은 비판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생활세계의 왜곡되지 않고, 강압적이지 않은 ‘의사소통행위’를 중심으로 제안하고, 이러한 의사소통행위는 정치적 공론장에서 이루어지는 절차적 정당성을 갖춘 숙의 과정을 통해 근대 대의 민주주의에 대안이 될 수 있는, 하나의 숙의 민주주의 모델을 제시한다.


 부르디외는 그러한 하버마스의 논의에 정면으로 반박한다. 먼저 부르디외에게 장에 참여하는 개인은 “실천적인 위급함” 안에서 사회적 삶에서 마주하게 되는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투쟁하는 존재이다. 이들은 수직적으로 구성된 사회세계에서 상승과 지배를 원하고 상징투쟁에서 기존의 체제에 도전하고 장의 전복을 꿈꾸는 코나투스적(conatic) 주체들이다(김홍중, 2017: 5-6). 사회세계를 살아가는 개인들은 자기보존을 위해 투쟁하는 존재이며, 이런 까닭에 부르디외는 생활세계에서의 비판 잠재력을 기대하지 않는다.


 이러한 인간론적 전제 아래에서 부르디외는 자신의 언어(소통)이론을 전개시킨다. 실천과 구조가 만나는 장은 경제적 이해관계의 성격을 공유하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언어관계 또한 경제적인 관계로 유추될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장에서의 언어실천은 다양한 형태의 자본을 축적하기 위한 경쟁으로 특징지어지고, 이를 토대로 하버마스가 언급한 “왜곡되지 않은 의사소통”, 즉 합리적 의사소통·의사소통행위는 현실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예이며, 하버마스가 제안한 소통은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특별한 노력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는 것이다(Bourdieu ‧ Eagleton, 1994: 270). 그렇기 때문에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이론적 토대로 구축된 숙의 민주주의의 언어관에는 성찰이 필요해진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조금 더 지식이 있다면 어떤 일들을 확실히 더 잘 이해할 텐데. 그게 전부예요. 내가 더 지식을 갖게 되면 일은 많이 달라질 텐데. … (중략) … 그러나 나는 정말 시간이 없어요. 조금만 시간이 더 있다면, 나는 그것에 관여하고 무언가 더 알려고 시도하고 그 흐름을 더 깊이 따라갈 텐데. 다시 말해서 조금 더 지식이 있다면 누군가와 더 많이 토론할 수 있고, 많이 알지 못할 때는 격리된 채로 남아 있게 되지요.” (가정부)*


*해당 인용문은 부르디외가 구별짓기 8장 문화와 정치에서 사용한 한 가정부의 이야기이다.


 부르디외가 관심을 가졌던 하나의 부분은 바로 계급 아비튀스로 체화된 언어능력이었다. 부르디외에게 언어능력은 계급 아비튀스를 보여주는 각별한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계급의 아비튀스 전체는 언어적 아비튀스를 통해 드러난다고 말하기도 한다(부르디외, 2014: 99). 부르디외가 구별짓기에서 인용한 학력자본이 낮고, 여성인 가정부는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싶어도 지식이 없기 때문에 정치적 토론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증언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이 정치적 의견을 소유한다”는 일종의 선험적인 토대를 지지하는데, 부르디외의 분석은 오히려 반대로 치닫게 된다. 부르디외는 하층 계급에서는 생활에 기능하는 것들 외에 생활과 동떨어진 정치적 의제에 대한 의견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부르디외, 2006: 722-731).


계급 아비튀스로 육화된 언어의 사회적 용법들은 고유한 의미를 지니는 사회적 가치들을 통해 일종의 격차들의 상징적 질서과 사회적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담당한다(부르디외, 2014: 55).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아비튀스를 체화하고 정치의 장에 참여하는 시민들은 정치의 장에서 일어나는 숙의과정에서도 각자 가진 자본을 통해 자유로울 수 없으며, 상징적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정치 엘리트들이 만들어 놓은 의제를 소비하는 주체로 전락할 뿐이다. 이런 까닭에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급일수록 정치적 장에서 통용되는 게임의 논리와 그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는 자본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고, 소유하기도 어려운 실정에 놓여 결국 ‘정치적 소외’를 경험하게 된다(김태수, 2008: 116).


부르디외는 근대 민주주의에 맹점을 자신의 이론적 토대인 아비튀스, 장 개념으로 지적해낸다. 특별히 부르디외의 언어적 아비튀스 이론은 하버마스의 핵심개념인 합리적 의사소통과 소통관계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부르디외(2001: 123)는 오히려 합리적 의사소통을 통해 권력이 행사된다고 보았다. 예를 들면 다른 장들에 비해 합리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학문의 장에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조차도 그 관계 배후에 존재하는 사회계층적 구조와 특권들로 배제를 포함하고 있다(부르디외, 2001: 32). 이러한 부르디외 정치사회학의 개념은 자칫 숙의와, 절차적 정당성으로 포장되어 이상(理想)으로 여겨질 수 있는 숙의 민주주의에 비판적 성찰을 제공한다.


참고문헌


김태수, "부르디외 정치사회학을 통한 대의민주주의 성찰", 『사회와이론』 13, 2008.

김홍중, "부정자본론 - 사회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한국사회학』 51(3), 2017.

피에르 부르디외,『파스칼적 명상』,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1.

_______________,『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下』, 최종철 옮김, 새물결, 2006.

_______________,『언어와 상징권력』, 김현경 옮김, 나남, 2014.

Bourdieu, Pierre ‧ Eagleton, Terry. "Doxa and Common Life: An interview", in Savoj Zizek (ed.), Mapping Ideology, London: Verso,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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