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인문학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모두가 고전의 중요성을 역설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인문학이 가진 힘을 보여주는 책은 거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인문고전은 오늘 날 우리에게 어떤 힘이 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그 힘을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요?

1. 핵심: 김용규 선생님은 이제 지식의 시대가 종말하고 생각의 시대가 온다고 선언합니다. 지식이 탄생한 후 사회는 수없이 변화했지만 그럼에도 모든 사고의 근본이 되는 ‘생각의 도구’들만큼은 시대를 초월해 존재했으며 여전히 우리는 이 도구를 통해 창조성을 가질 수 있다고 역설합니다. 지식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창조적 능력을 가질 수 있을까요? 저자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현대 인지과학, 심리학을 통해 창조성의 근원인 생각의 도구들을 제시합니다.

2. 출판사: 이 책은 2,000여 권의 책을 출판한 <살림>에서 나왔습니다. 올해로 설립된 지 30년이 된 이 출판사는 한국문학 출판을 시작으로 현재 다양한 영역의 인문·교양 서적을 펼쳐내고 있고, 입문자에게 유익하고 저도 즐겨보는 문고판 <살림지식총서>, <e시대의 절대사상> 같은 양서들을 출간하고 있습니다.

3. 저자: 김용규 선생님은 현상학의 성지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후설과 하이데거를 공부하고, 튀빙엔대학에서 현대신학의 거장 몰트만·융엘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서양문명의 두 기둥인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독일에서 철학·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고전어 실력이 요구되기 때문에 독일에서 공부하신 분들은 대체로 고전어(그리스어·라틴어·히브리어)의 기본기가 탄탄하죠. 이 책 역시 각주를 보면 헬라철학과 독일 현대철학은 원전으로 읽어 책을 집필하셨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공부가 뒷받침된 인문저자는 많지 않습니다.

4. 내용구성: 이 책은 1·2부를 통해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여 조종하고 인간을 설득하여 움직이게 하는 힘,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 지식이 탄생했고, 축의 시대라고 불리는 기원전 8-3C에는 동서양을 초월해 본격적으로 이 보편성을 탐구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보편성에 대한 탐구는 분류·범주화를 통해 생각이전의 생각을 만들어 냈고, 그중에서도 저자는 고대그리스가 지닌 사유의 독특성(이성·학문)에 주목합니다. 고대그리스는 사회적 영향으로 인해 다른 문명과는 다른 생각의 도구들이 발생했고, 구체적으로 호메로스의 작품을 통해 보편적 사고가 가능하게 됐다고 서술하죠.

호메로스와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을 통해 우리 사고의 근원이 되는 5가지 생각의 도구, 메타포라(은유), 아르케(원리), 로고스(문장), 아리스모스(수), 레토리케(수사)가 만들어집니다. 3부부터 저자는 이 5가지 생각의 도구를 설명합니다. 이 부분이 책의 핵심이죠. 저자는 각각의 생각의 도구가 고전적으로 어떻게 기원됐는지, 그리고 역사의 인물들은 그 도구들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끝으로 우리는 그 도구들을 어떻게 훈련할 수 있는 지까지 세세하고 자상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훈련법들이 인상 깊었습니다.

5. 느낀점: 이 책은 이지성의 <리딩으로 리드하라>의 대안으로 제안하는 책입니다. 김용규 선생님은 말씀드렸듯 고전 공부를 제대로 해보신 분이시기 때문에 고전의 진정한 힘과 그 힘을 기르는 방법을 진정성 있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류사를 만든 생각의 도구라는 장엄한 스케일 속에서도 김용규 선생님의 내공은 빛을 발합니다. 이 책은 고전교육에 관심있는 부모님이 보셔도 좋을 책입니다. 아마 과학의 최신 논의까진 다루시지 못하신 것 같고 선생님 전공상 동양철학을 다루지도 않지만 교양서로서는 손색이 없는 책입니다. 또 참고문헌도 잘 나와있기에 인용된 책으로 독서를 확장하기에도 좋습니다.

이런 책이 나왔다. 인스타를 통해 문장을 만났다.

까뮈의 부조리. 어릴 때 논술 준비하며 주워듣고는 멋있어서 부조리가 뭔지 떠들어댄 적이 있었다. 이젠 그 기억만 남고 한참이 지나서 부조리가 뭔지 생각도 안 난다.

니체의 니힐리즘, 우리시대의 형이상학으로서의 니힐리즘, 니체가 각인시킨 그 세계를 베버는 탈주술화와 가치 다신(多神)주의로 명명한다. 니체의 세계에서 신은 죽었다면, 베버의 세계에선 그 죽은 신들이 모두 무덤에서 기어나와, 영원한 투쟁을 시작한다.

합리주의마저도 절대적인 체위를 잃고, 따라서 우리는 내게 있어 악마가 무엇이고 신이 무엇인지 언제나 투쟁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절대적 가치를 잃은 우리는 이 니힐리즘에서 일상을 견뎌야 한다. 어떤 이들은 근대의 가혹한 의미의 폐허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기 위해 신비로 숨어들어가 삶을 재주술화하기도 한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이전 시대의 형이상학으로서 기독교의 시간관을 성좌에서 끌어내렸고, 까뮈는 그것을 시지프 신화로 형상화했을까. 니체주의자였던 베버는 아마도 그 테마를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통해 이야기했던 것 같다. 요컨데, 근대사회의 인간으로서의 무쓸모함. 근대인의 삶이 다시는 아브라함의 그것과는 같을 수 없다면서.

죽음은 의미있는 현상일까. 베버는 모든 것들이 끊임없이 농축되어 가는 근대의 과정 속에 있는 근대 문화인은 생의 포만감을 느낄 수 없다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근대 문화인은 ‘최종적인 것’이 아닌 끊임없는 진보 속에서 극히 작은 부분만을 낚아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근대인들에게 죽음은 의미 없는 것일 뿐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시조 아브라함이 신의 영원에 참여하며 삶에서 만족감을 느낀 것과는 다른 것이다.

베버는 합리화가 진행될수록 비합리성도 커진다는 역설을 남겼다. 그에게 최고의 가치는 ‘자유’였는데, 그는 이 가치를 초월적으로 정당화하지도, 실체화하지도, 낙관하지도 않고, 구원의 길로 만들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스스로 태양이 되어야 하는 것, 그렇게 이 역설적인 현실, 의미의 무덤에서도 의미의 작은 길을 찾기를 요청했다.

근대 인간의 덧없음과 우연함과 하찮음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의미를 창조할 수 있는지 도전하는 책이다. 까뮈는 이제 기억도 안 나고 토마스 네이글은 처음 들었고 철학도, 반대신론anti-theism 역시 모르지만 이 도전은 어떤 신을 무덤에서 기어나오게 하며, 어떤 태양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또 베버로부터 얼마나 앞서 나갔을지, 궁금하기에 천천히라도 꼭 읽어봐야겠다.

백종현 역의 칸트 전집 중 특별 출간된 선집들.


이번에 새로 출간된 칸트학회 34인의 칸트전집(출처: 뉴시스)


지금도 잘 모르지만 지금보다 더 철학을 모르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나름 철학을 공부한다고 책을 사서 봤는데, 지금보다 어릴 때 주머니 사정이 지금보다 더 넉넉하지 않다보니 말 그대로 출판하기 위해 번역된 값싼 번역서들을 구매해 읽었다. 책 고르는 눈을 배우지도 못했고, 그러기에 당연히 보는 눈이 없기도 했다.

그러다가 공부를 하면서 나도 한 발짝 정도 나가보니 번역서도 제대로 된 번역서를 읽어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때는 한참 플라톤 박종현, 아리스토텔레스 김재홍, 아우구스티누스 성염, 칸트 백종현, 헤겔 임석진 요런 것들을 머리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 이후에는 이것도 당연히 다시 생각하게 됐고.

어쨌든 나는 칸트 저서를 두 권 읽어야 했다. 첫째는 <판단력 비판>이었고, 둘째는 <영원한 평화>였다. 역본을 선택할 때는 '칸트는 백종현'이라는 주문을 가지고 백종현 선생님 번역서를 읽었다. <실천이성 비판>도 소장 중이지만 이건 읽어보지 못했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은 부르디외를 위해 읽어야 했다. 부르디외의 대표작 <구별짓기>는 다양하게 독해될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칸트의 미학을 겨냥해 비판하는 의도가 중요하다고 본다. (*논외로 최종철 선생님께서 번역하신 부르디외의 <구별짓기>의 부제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은 오역이라고 생각하는데 원어 "Critique sociale du jugement"의 진정한 의미는 "(칸트)판단력 비판에 대한 사회(학)적 비판"일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때 백종현 선생님의 역서를 읽으면서 이건 독일어를 정말 그대로 옮겨뒀다는 느낌을 받았다. 백 선생님 스스로도 원전을 '직역'했다고 하셨다.

그리고 다음으로 읽은 책은 <영원한 평화> 였는데, 칸트의 이 저작은 국제정치 그중에서도 자유주의 이론, 민주평화론과 관련이 깊다. 관련된 과제를 하기위해 이 책을 읽게 됐다. 그 때 그 책은 가독성은 둘째치고, 책 말미에 약 100쪽 분량의 기미독립선언서, 국제연맹 협약 같은 걸 실어뒀었다. 칸트 <영원한 평화> 역본중에 백종현 선생님 것이 제일 비쌌는데 책 1/4이 쓸데없는 걸 보니 허탈했던 기억이 난다.

이런 기억이 있었어도 나는 칸트를 모르니 그러려니 했다. 또 내가 느낀 문제는 학술적인 문제는 아니기도 했고. 우리학교에 칸트학회장을 지내신 교수님이 계신데, 그 교수님 수업을 듣는 철학과 동생이 그 교수님께서 수업시간에 종종 백종현 선생님 번역어의 문제를 지적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얘기와 칸트학회의 칸트전집 번역 기획을 듣고는 무언가 문제가 있나보다 했고 그게 요 몇 주간 일어난 논쟁으로 이어졌다.

칸트학회는 스스로 백종현역 칸트 저작에 문제의식을 느꼈기에 이 작업을 시작했고 이에 대한 응전은 백종현 선생님이 시작하셨다. 백종현 선생님은 "공인, 정본이라는 표현 삭제", "transzendental의 번역 문제", "a priori(아프리오리) 또한 한국어로 옮길 것", "문명국가에서는 학회에서 전집 번역하지 않는다" 등으로 축약된다. 일단 정본, 공인 표현은 출판사의 마케팅 욕심에 의한 것으로 삭제하기로 한 것으로 안다.

이 과정에서 아쉽게 느껴지는 게 몇몇 있는데, 백종현 선생님의 <칸트와 헤겔의 철학>에서도 알 수 있듯, 한국에서 가장 많이 연구되고, 가장 많은 전공자가 있는 학자는 칸트일 것이다. 이 번역사업에만 34인의 칸트연구자가 참여했다. 그런데도 백종현 선생님은 꽤 권위적으로 칸트 번역어의 해석을 독점하시려고 하는 것 같아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리고 백종현 선생님은 'a priori'를 음차 표기한 데에 있어 번역은 한국어로 옮기는 것이라며 이를 비판하는데 번역어를 그대로 살리는 예는 한 두가지가 아니다. 당장 부르디외만 해도 아비튀스가 있지 않는가. 내가 의아한 건 백종현 선생님 역본의 한국 단어만 사용했지 역서들이 한국말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글, 한국어 단어만 쓴다고 한국말인 것은 아니다. 참고로 칸트학회에서는 가독성 문제도 번역 사업의 이유로 지목했다. 그렇지만 가독성 문제가 학술상의 문제점은 아니라는 점도 이야기했다.

이런 반론에 후설저작을 대부분 번역하신 이종훈 선생님과 이번 사업에 참여하신 칸트전공자 김상봉 선생님이 재반론에 나섰다. 답이 없는 문제지만 나는 이종현, 김상봉 선생님의 의견에 동의하는 입장이고, 김상봉 선생님의 재반론을 보면 번역의 문제도 칸트학회 34인의 연구자의 의견에 동의하는 입장이다.

사실 이 논쟁에서 제일 실망스러운 것은 백종현 선생님이 이 작업에 참여한 몇몇 학자들의 칸트학회 탈퇴를 주장하고 '법적 대응'을 언급했다는 점이다. 여기에 근대사회를 분화된 사회적 공간, 기능분화된 체계로 보았던 부르디외나 루만의 의견을 차용해본다.

부르디외에 의하면 학문의 장(場)은 법이나 경제의 장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고유의 이해관계, 내기물, 게임의 논리가 존재한다. <소명으로서의 학문>에서 베버는 "눈을 가리고 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구절을 옳게 판독해 내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침잠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예 학문을 단념하십시오."라고 이야기한다. 학문의 장에서의 상징권력은 베버가 말한 것처럼 얻어야 하는 것이지, 법관을 통하거나 사회적 위치를 통해 얻는 것이 아니다.

루만에 있어서 학문(과학)체계는 '진리/허위'라는 이항코드와 '연구'라는 프로그램을 가지고 '새로운 인식생산'이라는 기능을 수행한다. 루만은 "이론은 법률이 아니고, 연애관계에 투자하는 사람은 기업가처럼 행위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학회는 법정이 아니고, 법관은 학자가 아니다.

앞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나는 백종현 선생님 역서를 읽으면서 정말 이 분은 칸트에 대한 열정이 있으시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번 칸트전집 번역사업에 참여하시는, 백종현 역본에 문제의식을 느낀 학자분들 역시 백종현 선생님의 기여를 인정한다.

하지만 이런 학문적 논쟁에 권위주의적으로 대응한다든지, 법적 분쟁을 예고하는 것은 제대로 된 응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부 사정은 모르겠지만 칸트학회 초대회장이자 고문인 백 선생님을 칸트학회 연구자들은 왜 번역어 조정 회의에 초청하지 않았을까? 백 선생님께서도 성찰하실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는 부디 이번 논쟁이 학문적인 논쟁이 되길 바라고, 심도있고 생산적인 논쟁이 되길 바란다.

덧. 역본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기사를 보면 김상봉 선생님도 개인적으로 3대 비판서를 번역하셨다 하시니, 이번 논쟁이 생산적으로 마무리되서 칸트 연구가 더욱 활성화되고 김상봉 역 3대 비판서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참고 : [기고] 김상봉 "백종현 번역어 심각한 문제 있었다"

링크 http://m.hani.co.kr/arti/culture/religion/850160.html?_fr=fb#cb



동방의 주자, 퇴계 이황(1501~1570)


1. 서론


서인과 동인, 동인은 남인에서 북인으로 우리 조선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키워드 당쟁. 과연 그 당쟁의 시발은 어디였을까? 예(禮)에 관한 논쟁만으로도 정치의 기득권이 바뀔 정도로 유학과 성리학에 입각한 의리와 예절을 중시한 조선. 과연 이들의 지적전통의 기원은 어디 있었을까? 그 중 영남학파의 거두이며 천 원짜리의 인물로 친근한, 또한 동방의 주자라는 칭송을 얻었던 조선 성리학의 대학자, 퇴계 이황의 생애와 업적, 사상을 알아보려한다.


2. 본론


1) 이황의 생애


ㄱ. 이황의 출생

1501년(연산군 7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현 노송정 종택 태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사 이식이고, 어머니는 춘천 박 씨이다. 이 부부는 슬하에 8남매를 두었는데, 이황은 그 중 막내이다. 이때 이황의 어머니인 춘천 박 씨는 이황의 태몽 중에 공자가 이황의 태실로 걸어들어 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퇴계태실의 문 이름을 성인이 들어온 문이라 하여 성림문(聖臨門)이라고 이름 지었다.

 

ㄴ. 홀어머니 밑에서 유학 연구에 젊음을 바치다.

이황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삶을 시작했다. 그는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가 자신의 나이 40세의 나이로 이른 죽음을 맞이하였다. 홀어머니 밑에서의 가정형편은 항상 부족했다. 그러나 춘천박씨는 과부이기에 더욱 엄한 가정교육으로 이황을 가르쳤다. 이황은 6살 때 이웃에 사는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우는 것으로 학문을 시작했으며, 12살 때 병으로 휴직한 숙부에게 '논어'를 배웠다. 17세 때 글을 가르쳐주던 숙부가 별세하여 선생님이 없어 대부분을 혼자 공부하였다. 그 후 이황은 자기 힘으로 학문을 연구하게 되었고, 모든 학문에 의심을 가지고 파고들어 재해석하는 학문 방법을 개척하게 되었다. 19세 때 성리학에 심오한 이론을 독파했고 "모르는 사이에 기쁨이 솟아나고 눈이 열렸는데, 오래 두고 익숙하게 읽으니 점차 의미를 알 게 되어 마치 들어가는 길을 얻은 것 같았다. 이때부터 비로소 성리학의 체계를 친숙하게 알 게 되었다."고 하였다. 20세 때는 먹고 자는 것도 잊고 '주역'을 연구하는데 몰두하여 건강을 해치게 되고, 이로 인해 평생 동안 몸이 마르고 쇠약해지는 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21세에 허씨 부인과 결혼하고 23세에 잠시 성균관에 유학하였고, 27세에 향시, 28세에 진사 회시, 32세에 문과 별시, 33세에 경상도 향시에 합격하였고, 수 개월간 다시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ㄷ. 학자에서 현실정치의 세계로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여 43세 때까지 관직 생활을 한다. 그러나 이때에도 끊임없이 학문 연마에 정진했다고 한다. 성균관 대사성에 이른 43세의 이황은 이때부터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할 뜻을 품는다. 이 후 52세 때 까지 그는 세 차례나(43, 46, 50세) 귀향과 소환을 반복하면서 관직을 떠나 초야에서 학문연구과 제자양성의 뜻을 품는다. 이황은 권력 투쟁이 격심하였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학문과 소신을 지켰다고 한다. 역할을 맡은 홍문관의 관직에 가장 오래 재직하였다. 을묘사화에 휩쓸려 파직당하기도 하였으며 다시 복직하기도 하였다. 46세 때 고향으로 돌아와 양진암을 짓고 호를 퇴계라 하며 학문을 연구했고, 단양군수와 풍기군수로 나갔다가 1년여 남짓 벼슬을 지내고 결국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ㄹ. 교육의 뜻을 이룬 노년기

이황은 50세 이후에는 고향의 한적한 시냇가에 한서암과 계상서당 및 도산서당을 세우고, 그의 학덕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문인들을 가르치며 성리학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물러난 후에도 조정에서는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의정부 우찬성, 판중추부사 등 계속하여 높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거듭 사직 상소를 올려 받지 않았으며 마지못해 잠시 나갔다가도 곧 사퇴하여 귀향하기를 반복하였다. 이황의 중요한 저술 또한 주로 노년으로 접어드는 50대 이후에 이루어졌다. 그의 저술 가운데 천명도설, 기대승과의 8년간에 걸친 사단칠정논변, 주자서절요, 성학십도 등은 한국유학사상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60세에 도산서당을 지어 스스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인도하는데 힘썼는데 학문은 사망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2) 이황의 업적


ㄱ. 서원 건립에 힘을 써서 이를 통한 서원의 기초를 마련하고 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그리고 백운동서원을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으로 만들었다. 사액서원은 임금이 하사하는 것으로 유교교육 기관인 서원을 임금이 인정하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로써 서원 교육은 공적으로 인정받으며, 공교육을 통한 학문 발전을 시켰다.


ㄴ. 79번이나 벼슬을 사퇴하여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의연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제자들에게 관직에 연연치 말고 자신의 도를 다하는 자세를 가르쳤다. 이는 교육자로서 이황이 실천하는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 행동이다. 이로써 출세중심 과거시험 중시의 학문 풍토를 개선하고 순수학문에 대한 열정을 보여준 것이다.


ㄷ. 올바른 교육을 위하여 손수 교과서를 만들고 새로운 교육과정을 수립했다. 이는 그의 교육자적인 면모가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며, 또한 탁상공논으로 끝날 수 있는 형이상학적인 성리학의 성격을 자신의 실천적 성리학을 통해 학문태도의 모범을 보이고 바람직한 선비의 모습을 솔선수범하여 보여줬다.


ㄹ. 문학가적 기질도 뛰어나 2000편이 넘는 많은 한시를 남겼다. 그러한 한시는 대개 학문에 대한 열정이나, 자연에 대해 읊은 시들이다. 예를 들면 어리석은 사람도 알며 실천하는데,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겠는가? / (그러나)성인도 못 다 행하니, 그것이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 쉽거나 어렵거나 간에 (학문 수양의 생활 속에서) 늙어가는 줄을 모르노라. 도산십이곡 중 12수.


ㅁ. 고봉 기대승과의 4단 7정에 관한 논쟁을 통하여 학문적 논쟁의 모범을 보여주고 성리학의 심성론을 크게 발전시켰다. 당시 이황은 기대승보다 26살이나 많은 이황이 당시 경직된 조선 사회에서는 신성한 학문 논쟁이었으며, 후배인 기대승에게도 인격적으로 대우하며 모범을 보였다.


ㅂ. 향촌의 자치규정인 향약 규례를 완성시켜 향촌의 풍속을 바르게 잡았다. 이는 향촌 자치 실현을 이상으로 하는 사림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며 도덕적인 풍속으로 백성들을 이끌어 가려는 그의 노력이 엿보이는 모습이다.


ㅅ. 의를 본질로 하여, 합리성을 존중한 예법의 개혁을 함으로써 악습이나 거추장스러운 예법을 변화시켰다. 명분을 중요시하는 성리학에서, 실질적인 부분을 절충하며 허례를 배격한 그의 모습에서 개혁적인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3) 이황의 사상


ㄱ. 주자의 성리학


가. 이기(理氣)론 : 이(理)는 형이상학적인 도(道)이며 만물의 근원이며 본질이며 사물을 낳는 근원이다. 또한 기(氣)는 형이하자이며 사물 구성의 질료, 사물을 낳는 재료이다. 다시 말하면 형이하의 기(器)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주자는 우주의 시작과 인간 존재의 기원을 설명했다. 세계의 참모습인 이(理)는 세계의 현실적인 모습인 기(氣)를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고, 이(理)가 있은 다음 기(氣)가 있고 기(氣)가 있으면 이(理)가 반드시 있다.


나. 심성(心性)론 : 심성론은 인성(人性)론이라고도 하며 인간의 내면적 구조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한 결과이다. 이는 맹자의 심성론의 지적전통을 이어 받았으며 인간의 인성을 맹자가 말한 바와 같이 인간 본래의 마음의 선함과 육체적인 측면과 욕구적인 측면의 가선가악(可善可惡)인 기질적인 측면으로 나누었고 본연의 성은 이와 통하고 기질적인 성질은 기와 통한다고 했다.


ㄴ. 사단칠정 논쟁 *사단: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단서, 칠정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


이황이 서울에 살던 53세 무렵, 옆집에 정지운이 살았다. 정지운은 동생을 가르치기 위해 ‘천명도’를 그렸고 이를 이황에게 의뢰하였다. 이황은 ‘사단은 이에서 생겨나고 칠정은 기에서 생겨난다.’라고 하였다. 이는 이가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후에 많은 논란을 일으켰고, 이를 작성하고 난 6년 뒤 이황은 기대승으로부터 한 편지를 받고 이에 대한 논쟁은 8년간 계속된다. 8년간 주고받은 서신은 적지만 당시 기대승은 호남, 이황은 영남에 살았던 지리적 위치를 생각해본다면 결코 쉬운 학문적 논쟁이 아니었다. 기대승은 세 가지에서 이황에게 반대를 제시했다. 첫째 현실에선 이와 기가 함께 있기 때문에 사단과 칠정도 둘로 나눌 수 없다. 둘째 사단도 감정이고 칠정도 감정이다. 사단은 칠정 중 선한부분에 불과하다. 셋째 기는 변화의 근거이지만 이는 불변이기에 이가 움직인다고 할 수 없다. 이에 이황은 한발 물러서며 기대승의 이와 기의 떨어질 수 없는 것을 인정하며 사단은 이가 움직여 기가 따른 것이라고 했고 칠정은 기가 움직이면 그 위에 이가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와 기가 떨어질 수 없다고 하여 사단과 칠정을 섞어 말한다면 사단은 항상 선으로 귀결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이의 측정을 부각 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ㄷ. 이황과 이이의 비교


이황은 이는 귀하고 기는 천한 것이라고 주장 했다. 그리고 이와 기가 섞일 수 없다는 불상잡의 측면을 강조하였다. 또한 사단과 칠정을 명확히 구분하였다. 이기이원론과 이기호발설을 주장했다. 이이는 이와 기가 현실에서 어우러짐을 강조라면 이와 기가 떨어질 수 없다고 하는 불상리적 측면은 강조했다. 또한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황의 이기호발설중 기가 발하며 그 위에 나타난다는 측면만 인정한다. 이기론을 현실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ㄹ. 평등사상


이황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가르침을 부탁하였는데, 선생은 항상 벗을 대하듯 하여 비록 나이가 젊다하더라도 보내고 맞을 때에는 공경함을 다하고, 자리에 마주 앉은 첫인사로 반드시 부형의 안부를 물었다. 제자가 질문을 하면 하잘 것 없는 말이라도 잠시 생각하는 여유를 두어 대답을 하고,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대답하는 일이 없었다. 또한 사농공상의 직업의 차별과 반상제의 조선의 계급 질서에서도 완전한 평등은 아니지만 각각의 신분에도 예를 정중히 갖출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또한 유교적 분위기가 만연한 학문적 질서 속에서도 학문적으로나 나이로 26살이나 어린 기대승과의 사칠논쟁은 학문적 논변의 모범이 된다.


ㅁ. 수양론


이황의 학문은 이론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완성을 추구하는 수양론으로 열려 있기 때문에, 인간의 심성을 현실 속에서 이해한다는데 특징이 있다. 이황의 수양론은 심(心)과 경(敬)의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심은 수양이 이루어지는 바탕이고, 경은 수양을 실천하는 방법이다. 이황의 학문적 관심은 항상 인간의 도덕적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수양론으로 귀결되고 있으므로 실천적 성격의 '경'이야말로 퇴계 사상의 핵심이다. 또한 이황은 경의 태도를 한 평생 몸소 실천한 인격자이다. 이를 통해 선지후행(先知後行)의 성리학적 수양론에서 자칫하면 간과할 수 있는 행을 강조하면서 성리학의 실천적 성격을 강조했다.


ㅂ. 교육론


이황은 오늘날 서울대총장이라고 할 수 있는 성균관 대사성 시절, 성균관 유생들에게 "선비란 예의의 원천이며 원기의 본거이다. 지금부터 제군들은 모든 일상생활이 예의 가운데서 행하도록 하라. 서로 채찍질하여 구습을 벗도록 힘쓰고, 집에서 부형 모시는 마음을 미루어 밖에서 어른과 윗사람을 섬기는 예를 삼을 것이다. 안으로 충신(忠信)에 주력하고 밖으로 손제(遜悌)를 행함으로써 국가가 문예를 장려하고 학교를 세워 선비를 기르는 뜻에 부응하라." 학문하는 방법을 물었을 때 "다만 부지런하고 수고스럽게 하며 독실하게 하는데 있으니, 이렇게 하여 중단됨이 없으면 입지가 날로 강해지고 학업이 날로 넓어질 것이다."라고 타일러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독서하는 방법을 물었을 때 "그저 익숙하게 읽는 것 뿐이다. 글을 읽는 사람이 비록 글의 뜻은 알았으나 만약 익숙하지 못하면 읽자마자 곧 잊어버리게 되어 마음에 간직할 수 없을 것은 틀림없다. 이미 읽고 난 뒤에 또 거기에 자세하고 익숙해질 공부를 더한 뒤라야 비로소 마음에 간직할 수 있으며 또 흐뭇한 맛도 있을 것이다."라 하여 겉만 핥고 지나치는 것을 경계하며, 익숙하게 하여 깊이 체득하는 공부를 강조하였다.


ㅅ. 지행병진론


앞서 말한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의 경우는 도덕에 대한 앎인 지(知)와 그에 따른 실천인 행(行)에 대하여 선지후행과 지행교진론(知行交進論)을 주장하였다. 즉 지행교진론이란 지를 깨달은 후에 행을 한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자면 사람이 걷는 데에 있어서 한쪽 발을 걸은 후 다른 쪽 발이 따라가는 것이다. 즉 지의 발걸음을 한 후 행을 발걸음이 교대(交代)로 따라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달리 이황은 지행병진론(知行竝進論)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앎인 지와 실천인 행이 교대로 선지후행이 아닌 함께 아울러 나가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쉽게 예를 들자면 주희의 지행교진론이 사람의 걸음이라면 이황의 지행병진론은 두 발로 나란히 서서 전진하는 캥거루의 점프와 같은 것이다. 이처럼 이황은 기존의 유학의 앎 중심의 탁상공론적인 현실을 개혁하며 도덕적 삶의 실천을 중시한 학자이다.


4) 이황의 영향


ㄱ. 성리학을 독자적으로 해석하고 발전시켜 한국의 독창적 성리학으로 만들었다. 또한 이러한 이황의 학문은 퇴계학파, 영남학파를 형성했으며 이를 통해 이황의 사상이 이어진다. 이는 송대 주자의 성리학보다 뛰어난 사상이었으며, 조선 성리학 성립에 큰 기여를 한 것이다.


ㄴ. 임진왜란 후, 이황의 사상이 일본에 전파되어 일본 성리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일본 메이지 유신 때의 교육이념을 세우는 기초가 되었다. 일본 성리학에서 이황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은 크다. 이는 조선이 문화 선진국임을 보여주는 방증이 되기도 한다.


ㄷ. 실학에 영향을 주었다.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은 그 예이다. 특히 성호 이익은 이황을 이자(李子)라고 칭송하며 이황을 주자나 공자 정도로 격상시켰다. 자칫하면 실리만을 추구하여 도덕적 가치를 등한시 하게 될 수 있는 실학의 정신적 규범이 되었다.

ㄹ. 퇴계학파는 후에 위정척사파의 사상의 본이 되었다. 물론 위정척사 운동은 반외세의 배타적인 정신운동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신은 결국 독립운동 정신에 큰 영향을 끼친다. 우리나라 의병활동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감당하기도 한다. 또한 전통을 계승하고 숭상하는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ㅁ. 그의 성리학적 위치는 높다. 그는 학문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연구는 우리나라뿐만 아닌 일본, 중국, 대만, 미국 등에서도 연구되고 있다.


5) 이황에 대한 평가


“동방에서 학문을 했다는 사람 중에 고금을 통틀어 이황에 비할 사람이 없다. 그의 글은 주자와 견주어도 차이가 없고 그의 학문과 이론은 모르는 것이 없다.” - 고봉 기대승


“세상 사람들은 그를 ‘퇴계 선생’이라고 칭송한다. 일세의 유학자며 조광조 이후에 견줄 이가 없다. 이황의 재주가 조광조에 못 미친다고 하나, 의와 이에 대한 깊은 연구와 학문은 조광조도 미치지 못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일일이 실행을 통해서 많은 인재를 길렀으며 누구든 어떤 부문이든 가르쳐 모두 대도에 이르게 하였다. 중도에 폐하는 사람이 없이 끝까지 가르쳤으며 학문을 닦아 선생의 뒤를 잇게 했다. 퇴계선생의 가르침을 읽으면 손뼉치고 춤추고 싶으며 감격해서 눈물이 나온다. 도가 천지간에 가득 차 있으니 선생의 덕은 높고 크기만 하다." - 다산 정약용


“이기변(理氣辨)에 대한 것은 이러합니다. 이황과 기대승(奇大升)의 사칠논변(四七論辨)에 대해서 이이와 성혼이 함께 주자(朱子)의 말을 가지고 강명(講明)한 바가 있었는데, 성혼은 이황의 견해를 옳다고 하고 이이는 이황의 견해를 정견(正見) 중의 한 점 누(累)라고 여겨 기대승의 편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이는 성혼에게 답서를 보내면서 ‘명언(明彦)【기대승의 자(字).】의 학문을 어찌 감히 퇴계와 견주겠는가. 단지 약간의 재지(才知)가 있어 우연히 그것을 알게 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 조선왕조실록

“우리나라의 학문으로 말할 것 같으면 퇴계이자(退溪李子)만한 분이 없고 난 학문의 방법에 있어 항상 그 분의 방법을 따른다.” - 성호 이익


3. 결론


이황 그는 실천적 성격이 결여되고 대의명분만을 따지던 조선 유학계의 실천적 성격을 가진 실천가이자 개혁가이었으며, 어지러운 정치적 상황 속에서 입신양명하며 정치를 바로잡는 것보다 후진을 양성하여 후세에 인간의 도리와 참다운 의의 기준을 밝혀 후세를 올바른 삶으로 교화 시키려 했던 교육자였다. 또한 혼란한 사회 속 도덕적 원리인 이를 강조하여 도덕의 존엄성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세상을 바로 잡기위해 노력한 사상가다. 또한 학문으로는 주자와 견줄만한 대학자였다. 물신주의가 만연하고 본말이 전도되고 있는 현대사회에 도덕정신과 진정한 학문과 교육을 실천하는 이황의 정신은 계승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권오봉, 퇴계선생 일대기, 교육과시학사, 1997

다카하시 도오루, 조선의 유학, 소나무, 1999

기세춘, 성리학개론, 바이북스, 2007

김유혁, 우리에게 이퇴계는 누구인가, 항산문고, 2001

권오봉, 퇴계의 실천유학, 학사원, 1997

윤사순 역주, 퇴계선집, 현암사, 1997


2010.가을


인문학(人文學)은 정말 위기일까? - 내가 생각하는 인문학


몇 년 전부터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한국사회에 하나의 강박이다. 유교경전을 외우고 시를 써서 나라를 다스리던 조선시대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한 때 잘나가던 이른바 문학·사학·철학 책이 읽히지 않고 인문대학 커트라인이 떨어져서인지 한국사회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 아니 강요하고 강박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말 인문학은 위기를 맞이하고 있을까? 나의 대답은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지금의 인문학은 위기가 아니기도 하고 맞기도 하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인문학은 풍요이자 빈곤이다.


인문학의 위기?


먼저 인문학이 위기가 아닌 이유부터 생각해보자. 아마 당신이 20대 중반 이상의 나이라면 2010년 한국사회에 닥쳤던 ‘정의란 무엇인가’ 대란을 기억할 것이다. 나는 한국사회의 지적인 지형이 정의란 무엇인가를 기점으로 변화를 겪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정의란 무엇인가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약 150만 부 이상 팔렸다. 사실 철학서적, 그것도 딱딱한 정치철학서적이 그 정도의 판매고를 기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작 본토에서는 10만 부가 팔린 책이 한국에서 150만 부 이상 판매된 것은 아이러니였고 사람들은 이런 기현상의 원인을 나름 분석했다. 그것은 지적빈곤,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응전이라는 결론을 만들어냈다. 그 이후로 한국사회는 번번이 모든 사회문제를 “기-승-전-인문학 위기”로 풀어냈다. 지금도 그런 문법은 익숙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구글 트렌드에 따르면 현재 한국은 가장 인문학의 인기가 뜨거운 상황이다. ‘인문학 특강’, ‘인문학 강의’, ‘인문학이란’ 따위 검색어가 연관 검색어로 기록된다. 인터넷에서의 상황만이 아니다. 2015년, 인문학 서적은 최초로 소설의 판매량을 넘어섰다. 한국은 적어도 양적으로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역사상 가장 양적인 풍요 속에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지핀 인문학의 불씨에 한국사회는 빠르게 태워졌다. ‘인문학? 어렵긴 해도 한번쯤은 공부해봐야지’, ‘인문학 공부는 필요해’하는 정도의 생각은 어렵지 않게 공유되었고 그런 수요에 부응하기 시작한 것이 일명 양산형, 요약형 인문학의 시작이다. “처음 배우는”, “시작하는”, “한 권으로 끝나는”, “하룻밤 만에 읽는” 등의 이름이 붙은 인문학 서적들의 시작이다. 이들은 한 권의 책에 소크라테스 - 플라톤 -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철학자들의 사상을 간단하게 요약, 나열하는 책들이다. 이런 양산형 인문학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입문, 요약, 처음, 교양, 지식 같은 것들이다. 이런 책들의 목적은 간단하다. 교양 있는 사람들 되기 위해 그럴싸하게 말하는 것을 소비하고 지식으로서 인문학을 소비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고자 한다. 인문학이란 무엇일까?


인문학?


국어사전에서는 인문학을 ‘언어, 문학, 역사, 철학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한다. 교육학사전에서는 ‘인간의 사상 및 문화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영역’이라고 인문학을 말하고 이것들보다 조금 더 친절한 위키백과에서는 인문학을 ‘인간과 인간의 근원문제, 인간의 사상과 문화에 관해 탐구하는 학문, 자연·사회과학이 경험적 접근을 주로 사용하는 것과 달리 분석적이고 비판적이며 사변적인 방법을 폭넓게 사용한다.’라고 쓰였다. 여기서 말하는 인문학이 가진 공통 키워드는 인간, 본질, 분석, 비판, 사유 같은 것들이다. 그렇다면 양산형 인문학은 인문학의 진정한 키워드들 인간, 비판, 사유 같은 것들을 우리의 삶에 끌어들였는지 생각해봐야한다. 내가 말한다고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생각했을 때는 아니라고 답하고 싶다. 그렇다면 인문학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나는 인문학도는 아니지만 나의 나름의 고민을 적어본다.


내가 생각하는 인문학


내가 생각하는 인문학은 인간학(人間學)이다. 학창시절 도덕, 윤리 같은 과목과 친하지 않아도 맹자의 성선설(性善說), 순자의 성악설(性惡說), 고자의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은 대충 들어봤을 것이다. 나는 인문학의 시작은 결국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에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성선설이나 성악설이니 하는 것들도 결국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의 대답하기 위한 것이다. 동양철학에서는 공자를 서양철학에서는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결국 학문의 탐구대상을 자연에서 인간 중심으로 변화시켰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인간 존재에 대한 고민은 우리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착하고 나쁘고 하는 것들은 춘추전국시대라는 답이 필요했던 시기에 해답의 출발이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이고 어떤 존재라면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제 과학의 발달로 사회과학은 인간의 행동에 대해 탐구하고 자연과학은 발달하면서 인간을 구성하는 물질적 작용에 대해 탐구하면서 인간에 대한 비밀이 하나하나 풀려가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 여지는 있다. 나는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에 인문학의 시작이 있고 변화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 내가 생각하는 인문학은 자유학(自由學)이다. 기독교 신약성서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가르침을 전한다. 자유란 무엇일까? 자유란 스스로 自에 말미암을 由를 사용한다. 스스로에게 이유가 있는 것이 곧 자유이다. 외부적인 구속이나 억압,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이유가 있는 것 그것이 자유다. 제멋대로 행동하고 거리낌이 없는 상태는 자유라기보다는 방종(放縱)에 가깝다. 따라서 인문학은 단순히 교양이나 지식으로 소비되기보다는 자신에게 이유를 가지게 되고 상황에 이끌려 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강제하는 상황이나 구조 속에서도 내가 어떤 이유를 가지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나는 인문학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교양 있는 사람이 되고 그럴싸한 이야기나 어떤 특정 지식을 아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에서 기업에서 시행하는 인문학 평가도 굉장히 쓸모없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역사의 순서를 배열하고 철학자의 이름을 맞추고 시의 시대상을 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인문학은 거기에서 의미를 찾아야하고 그 의미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주체성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나는 인문학이 자유학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생각하는 인문학은 싸움이다. 인문학은 현실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고담준론들이나 추상성 높은 이론들, 지적유희 같은 것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문학은 현실에 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절에 가면 온화한 미소를 품은 불상(佛像)을 볼 수 있다. 석가모니로 유명한 고타마 싯다르타는 자비의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기원전에 이미 ‘모든 인간에게는 불성(佛性)이 있다고 선언했다.’ 이 말이 별스럽지 않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사실 약 2500여년 전에 모든 사람은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싯다르타는 카스트제도와 강력히 반대했다. 그리고 싸웠다. 인문학이 현실과는 유리되어 사회에는 대답하지 못하면서 단순히 위기의 인문학을 이야기하는 것은 모순적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겨울철에 실험을 하다 병을 얻어 죽기도 하였다. 사마천은 생식기가 잘려나가는 치욕적인 형벌인 궁형(宮刑)을 당하면서도 역사책을 서술해나갔고 동양의 역사학을 정립하는 불세출의 학자가 되었다. 그들의 인문학은 삶이었고 싸움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고수하다가 사형당한 학자는 물론이고 무덤이 파헤쳐진 학자들도 부지기수이다. 하지만 쏟아지는 인문학 서적들에서 그들의 자리를 찾아볼 수는 없는 것 같다. 결국 인문학은 삶이며 싸움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 이 말을 곱씹어보면 이것은 곧 앎은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이고 앎으로 인한 우열의 관계가 생길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전근대의 폭력은 무지(無知)에서 나왔다면 근대 이후의 폭력은 오히려 앎, 즉 아는 것에서 나왔다. 따라서 단순히 안다는 것은 어쩌면 폭력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인문학은 단순히 알고 지식을 쌓고 교양을 아는 데에 사용하는 것은 인문학의 풍요 속에 진정한 의미를 찾지 못하는 역설적 상황을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인문학이 위기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것 같다고 말한 것이다. 지금 사회의 인문학에 대한 열망과 관심은 제대로 쓰일 때 중요한 것 같다. 무엇을 아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알고 왜 알아야하며 그것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그것이 중요할 것이다. 아는 것이 힘이기에 어쩌면 인문학은 어느 철학자의 말 속이나 서점에서 터져 나오는 책들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 속에서, 내 주변과의 관계 속의 갈등하는 지점, 그것에 대한 고민 그 곳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2016.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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