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 문제에 균형 잡기 <원자력 논쟁: 원자력 전문가가 직접 알려준 찬반의 논거>

2021년 폭염이 시작되면서 전력 수급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르게 됐습니다. 작년만 해도 이상 기후의 여파로 8월 기온이 6월 기온보다 낮아지면서 전력 문제는 크게 대두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다른 상황이고 원전/탈원전 논쟁이 다시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관련 문제에 보다 심도 있게 접근하고 싶어서 <원자력 논쟁>이라는 책을 읽게 됐습니다.

이 책은 2015~2016년 진행된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에서 진행된 ‘정책 대 정책 포럼’의 내용이 골자가 된 책입니다. 정책 대 정책 포럼은 찬핵과 탈핵을 주장하는 양 진영의 전문가가 한자리에 모여 첨예한 입장을 드러내며 치열하게 토론한 자리였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서 첨예한 입장에서도 어느 정도의 공통분모를 만들 수 있게 되었고, 한편 타협할 수 없는 지점을 확인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포럼에서는 원전을 둘러싼 5대 핵심 현안, 5대 쟁점을 설정해 논의를 진행합니다. ‘원전의 민주적 절차성’, ‘기후변화 및 에너지 수요 대응 측면의 원전 필요성’, ‘원전의 안전성’, ‘원전의 경제성’, ‘에너지 전환 관점의 원전 필요성’이 그 핵심 현안입니다. 책의 구성은 5개 쟁점을 기준으로 양 진영의 전문가가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는 발제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첫 주제인 ‘원전의 민주적 절차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원전의 민주적 절차성에 있어 긍정적 견해를 피력하는 양재영 교수(한국전력국제원자력대학원)는 원전 관련 정책 결정에 있어 원자력 전문가의 부재를 문제로 꼽고, 한편으로는 시민단체의 윤리 확립을 강조합니다. 다른 한편 이영희 교수(가톨릭대 사회학과 – 과학기술 및 거버넌스 전공)는 기술 건정성뿐만 아니라, 절차적 공정성 역시 중요하며 전문가주의의 폐해를 지적하고 일반 시민이 접근할 수 있는 정보 공개 및 시민과학 증진 등을 강조합니다.

원전 안전성 문제도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안전성을 옹호하는 입장의 백원필 부원장(한국원자력연구원)은 원자력 발전 방식이 화력, 수력, 가스발전에 비해 사고사 및 암 사망률 리스크가 적다는 점을 강조하고 설비 및 매뉴얼을 통해 원전의 위험을 통제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반면 김연민 교수(울산대 산업경영공학부)는 안전을 고려할 때에는 제한적 시설 뿐 아니라 우라늄의 체굴부터 폐기까지 의 전과정에서의 안전을, 그리고 기존 원자력 공학은 인적 오류의 부분을 생략하고 시스템을 설계했으며, 사고 발생 시나리오에서도 원전 접근 가능성을 고려하지만 실제로 이는 현실성이 없음을 지적합니다.

다 다루지는 못했지만, 이 책은 여러 쟁점을 시종일관 흥미롭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안에 관련해 공인된 ‘전문가’의 의견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인터넷에는 정보의 홍수가 있지만, 그중에 검증된 지식은 적은 편이죠. 그래서 믿고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책 서문에서도 언급되듯 정권 교체로 원전 정책의 기조가 변했으나, 책에서는 원론적 이야기를 충분히 다루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이 여전히 유효합니다. 변화된 원전 정책과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독서법 같습니다.

책에서 의사에 관계 없이 합의된 공통분모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원자력 발전의 안전 운영을 위해 제도 개선 및 정상 사고(normal accident) 최소화를 위한 운영자 프로그램 강화 2. 올바른 주민 수용성 파악을 위한 공론조사의 정상화와 체계 마련 3. 정보공개의 확대 4. 원전 인근 주민의 피해 및 전력 소비자의 불평등 해소를 위한 방안 마련 등입니다.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에 대한 생각

최근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Apocalypse Never>이 번역되었다. 책이 나왔을 때부터 책의 목차를 살피고 출판사의 소개를 읽었다. 어떤 새로운 내용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후변화가 과장된 위협이라는 논의는 아마 기후변화라는 문제를 제기한 순간부터 이어졌을 것이고, 이 책 역시 그런 맥락에 있는 책이다. 이 책이 위치한 맥락과 이 책을 둘러싼 반응을 보고 글을 몇자 적는다.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은 출간된 이후 이 주제를 다루는 책 중에는 잘 팔리고 있는 것 같다. 출판사에서는 긴급 중쇄를 했다고 하고, 교보문고를 비롯한 인터넷 서점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교보에서는 정치/사회 분야 1위라고 한다. 이 책이 갑자기 각광 받는 이유가 여럿일 텐데, 첫째로는 ‘한국에 이런 담론이 제대로 수입되지 않아서’라고 생각한다. 기후변화를 극우적이거나 음모론적으로 비난하는 이른바 ‘트럼프식 담론’도 아닌, 환경운동가가 환경운동 담론을 비판하고,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한다는 게 이 책의 매력 포인트일 거다. 하지만 해외에서는 이런 담론은 이미 클리셰 중 하나가 된 것 같다.

두 번째로 눈에 띄는 것은 이 책을 정당화의 무기로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SNS에 이 책을 링크한 사람의 글을 읽으면 많은 사람이 내가 원하던 내용을 담은 책이 나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여기에서 세속적 부를 추구하라는 종교 서적이 베스트셀러였던 상황이 겹쳐 보인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은 이 책을 접할 때, ‘환경운동의 종말론적 담론, 극단적 메시지는 정확한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이 책을 기다리던 사람이 이 책을 읽는 이유는 그저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기 위한 무기인 것이다. ‘기후위기는 과장됐대, 새로 책 나온 거 보니까 그렇더라, 우리 그냥 이대로 살면 돼.’하며 귀찮음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정치/경제적 맥락 안에 존재한다. 이 책을 포함한 이런 부류의 책은 기업, 보수언론의 지지를 받는데, 이는 이 책에서 선언하는 메시지가 그들에게 친화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담론과 미국 기업/보수 정치의 연관성 역시 존재한다.

이 책에 대한 비판적 논평을 두 편 읽었다. 하나는 Peter H. Gleick이라는 학자의 비판인데*, 그는 태평양 연구소 명예 소장, 미국 국립 과학원 회원, 맥아더 펠로우 등을 역임했다. 이 사람의 논평은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에서 셸런버거가 가진 문제를 전반적으로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리고 가디언에 실린 Bob Ward의 논평은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과 비슷한 맥락의 <False Alarm>이라는 책을 함께 논평하는데**, Bob ward는 런던정경대학 기후변화환경연구소 소속이다. 이 기사에서는 셸런버거의 주장 중 타당한 부분을 일부 인정하지만, 내용을 비판하고, 전반적인 자료가 체리피킹 되었음을 지적한다.

셸런버거가 주장하는 내용이 일견 타당하다고도 생각한다. 환경을 위한 효율적인 길을 찾아야 한다. 단, 체리피킹은 안 되고. 또 어디든 극단주의자는 있기 마련이고, 그들의 과격한 주장에는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특히 한국의 경우 환경 근본주의자가 정책 입안에서 권력을 행사하거나, 환경 근본주의 정당이 유의미한 지지를 얻고 있는가? 당연히 아니다. 쉐도우 복싱, 허수아비 논증도 안 된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이 책에 전부 동의하게 되더라도, 한국에서 극소수의 환경 종말론자/근본주의자의 해악보다는 무관심한 절대다수의 해악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책은 그 절대다수에게 용기를 불어넣는다.

이런 문제는 왜 발생하는가? 환경 문제가 고도로 전문화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원전에 대한 제대로 된 지식은 소수의 전문인만 판단할 수 있다. 나 같은 사람은 눈 뜨고 코 베일 수 있다. 원전에 관해 하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민/관 차원에서 시민과학을 증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한다.

 

6월 18일 기준으로 이 책을 읽었다. 책을 안 읽고 글 쓰는 문제를 가지고 시비를 따지는 분들이 많으셔서 굳이 읽었다. 이에 관해 얘기해 보자.

 

내가 처음 이 글을 쓴 목적은 책보다는 책을 둘러싼 지형에 관해 이야기 하고 싶어서, 그런 이유였다. 그렇기 때문에 책보다는 책을 둘러싼 이야기를 사실에 기반해 글을 썼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책을 읽지 않았어도 문제는 되지 않는다.

 

두번째로는 이 책의 내용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 전문가의 비평을 인용했다. 한 사람은 태평양 연구소 명예 소장, 미국 국립 과학원 회원, 맥아더 펠로우 등을 역임한 피터 글릭이라는 학자고, 한 사람은 런던정경대학 기후변화환경연구소 소속의 밥 워드다. 나는 이들이 전문성을 가지고 공개적으로 게재한 비평을 신뢰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용을 인용해서 비판하는 부분, 그리고 출판사의 책 소개와 연관해서 책 내용의 간접적 비판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런 식으로 글을 써서 문제가 되는 경우는 내가 인용한 전문가의 인용과 비판 내용이 틀렸을 때 유효하다. 내가 인용한 리뷰가 책에 없는 내용을 인용해 비판했다면 진실성이 없으니 문제일 것이나, 나는 이 전문가와 그의 글을 신뢰한다. 만약에 밑에 첨부한 이들의 평가에 오류가 있다면 이 글을 수정할 것이다. 하지만 이를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뭐, 읽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끝으로 굳이 책을 읽었으니 하나만 지적하자. 책에서는 기후변화의 티핑포인트인 평균 기온 4도 상승을 문제 삼으면서, 기온 상승은 2~3도에 머물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이게 다분히 문제 있는 주장인 것은 평균의 함정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기후변화에 대한 데이터를 보면, 1도 상승은 단순한 1도 상승이 아니다. 기후변화가 발생하면서 극단값이 상승하고 있다. 그러니까 기온은 단순히 1도가 오를지 모르지만 혹한기가 더 추워지고, 혹서기는 더욱 더워지면서 기온은 서서히 상승한다. 더불어서 지구적 차원에서 봤을 때 이런 기후변화에 취약한 것은 한국 같은 중위도 지역의 사람이 아니라 극지방에 사는 사람들이다. 저자는 원주민은 정말 위한다고 하면서 이런 부분은 슬쩍 빼버린다. 스스로 환경전문가라고 자처한다면 이 정도는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아주 평범한 소시민인데도 알고 있는 사실인데 말이다.

 

이 책에 관한 독서를 마무리 하고도 결론은 뒤바뀌지 않는다. 저자의 주장에는 물론 유효한 지점이 존재한다. 극단적, 종말론적 환경주의자의 주장에는 문제점이 존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게 비효율적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리고 한국의 상황에서는 더더욱 종말론적 환경주의자보다 기후변화에 무관심한 대다수의 해악이 크다고 본다. 특히 이 책을 보면서 기후변화는 과장되었으니 앞으로 변화가 필요 없겠다는 냉소적 시각이 더 위험하다고 본다.

*Book review: Bad science and bad arguments abound in ‘Apocalypse Never’ by Michael Shellenberger

**False Alarm by Bjorn Lomborg; Apocalypse Never by Michael Shellenberger – review

<탄소 사회의 종말>

한국에도 이런 책이 나올 수 있구나, 하는 책이 나왔다. 이 책, <탄소 사회의 종말>은 우리가 마주하게 된 기후위기를 과학과 함께 사회적으로 조망하는 책이다. 이 책은 생태와 사회를 함께 보는 기획을 하는 책이다. 우리는 쉽게 기후변화를 ‘자연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엄밀히 말해 순수하게 자연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이 책은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학적 상상력’을 강조한다.

이 책의 주된 문제의식은 제목에서부터 드러난다. 이 책이 문제 삼는 것은 탄소 문제, 기후변화 같은 자연적인 것이 아닌 ‘탄소 사회’이다. “탄소 사회란 탄소 자본주의의 논리와 작동방식을 깊이 내면화한 고탄소 사회체제를 뜻한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보면 탄소 사회는 생산, 소비, 그리고 인간의 내밀한 의식까지 지배하는 달콤한 중독의 체제다.” 탄소 문제는 탄소 배출로 인해 기부가 변화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닌, 탄소와 함께 작동하는 인간의 욕망과 그것을 작동시키는 의식까지 무언가이다.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이 책은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이 기후위기가 자연적이면서도 사회적인 성격의 위기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런 사회의 문제는 왜 해결되지 않으며,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는 것이 왜 어려운지를 다룬다. 그 이후에는 저자가 인권사회학의 대가인 만큼, 저자는 기후위기를 인권 담론과 연결해 기후위기에 대응할 정당성을 확보한다. 대안을 고민하며 책은 마무리된다.

책에서는 다양한 논의가 이뤄지는데, 기후위기에 관해 사람들이 왜 행동하지 않는가, 하는 그런 이유도 나와 있고, 그런 부분이 특히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통해서 저자인 조효제 선생님이 강사인 포럼에 참석하기도 했는데, 한국의 경우 기후위기를 인식하는 사람이 많은데도 이것이 기후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에 관해 질문을 드리니 한국은 정답 찾는 교육에 몰두하기 때문에 정답은 알고 있지만,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다는 대답을 해주셨다.

이 책은 정말 강력추천하는 책이다. 아마 작년에 읽었다면 망설임 없이 올해의 책으로 선정했을 책이기도 하다. 기후 문제를 다루는 첫 책으로도 매우 훌륭하다. 책은 기후위기를 초래하는 자연적인 요인은 물론이고, 이를 둘러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요인 역시 탁월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문체나 내용 자체도 어렵지 않은 편이라서 꼭 한번씩 읽어보시길 추천해 드린다.

개인적으로 조효제 선생님을 알게 된 지 5년 정도 된 것 같다. 조효제 선생님은 정말 존경할 만한 학자시다. 굉장히 중요한 저작을 번역하시는 것은 물론이고, 이렇게 저작 활동도 탁월하시고, 또 실천은 실천대로 이어가시는 좋은 학자의 전범이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내 평가와는 전혀 무관하게 선생님은 이미 그런 분이시고, 나는 선생님이 개척하신 분야를 공부하고 있지도 않지만, 선생님은 정말 훌륭하신 분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됐다.

녹색평론의 창간호

오늘 친구에게 연락을 받았다. 『녹색평론』을 읽고 싶은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냐는 연락이었다. 친구는 홈페이지가 다운되었다는 말을 덧붙였는데, 나는 ‘아마 격월간으로 구독이 가능할 텐데?’라고 생각하며 홈페이지에 접속하기 위해 “녹색평론”을 검색하니 발행인이자, 대표이신 김종철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걸 알게 됐다. 『녹색평론』에 대해 긴 이야기를 할 만큼 무언가가 없어 친구에게 그저 과월호도 쉽게 중고나 헌책으로 구할 수 있고, 김종철 선생님이 편집하신 선집이 있으니 그것부터 읽어도 좋을 거라고 말하고 말았다.

이제 한 5년 정도 되었나. <환경사회학> 수업을 들으면서 <녹색평론사>라는 출판사를 처음 알게 되었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민망할 만큼 이 출판사의 책을 잘 알지 못한다. 도시에 살았지만, 어릴 때 시골에서의 귀중한 경험도 있었고 자연을 좋아하기도 해서 생태, 환경은 언제나 관심이 가는 주제였기에 <녹색평론사>를 늦게 알았지만 단숨에 빠져들었던 기억이 난다.

자연 농법을 소개하는 후쿠오카 마사노부의 『짚 한 오라기의 혁명』, 티벳의 소수민족의 삶과 생태적 대안을 소개하는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 근대 문명이 지닌 본질적 문제를 지적하며, 삶의 성찰의 자리로 이끄는 리 호이나키의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근대의 발전주의 청사진에 제동을 거는 C. 더글라스 러미스의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권정생의 『우리들의 하느님』, 장일순의 『나락 한알 속의 우주』, 장일순을 중심으로 편집된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김종철의 『땅의 옹호』 같은 책을 한 때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 관심사는 생태, 환경보다는 (순전히 내 관점에서) 더 절실하다고 여겨지는 문제로 이동했다. 녹색평론의 담론을 어느 순간부터 조금은 순진한, 너무나 이상적인 거라 생각하게 됐고, 그러면서 앞서 이야기한 책들을 중요한 책을 두는 책장에서 다른 책장으로 옮기게 됐다. 이런 일이 있었던 것도 한참 전 일이다.

이런 내 개인적 맥락이 있었고, 얼마 전에 프랑스에서 귀국한 한 선배님과 통화를 했는데, 요즘 선진국에서는 생태, 환경문제가 굉장히 중요한 이슈로 자리매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도 개인적으로 생태, 환경에 관심을 다시 가져야겠다고 생각을 하던 와중에 오늘 우연히 김종철 선생님의 부고를 보게 된 것이다.

한국의 생태주의 운동에서 녹색평론이 기여한 것과 차지하는 위치는 대체하기 어려운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생태 문제를 이야기하면, 냉소의 말이 돌아오곤 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김종철 선생님은 1991년 녹색평론을 창간해 생태 담론을 지탱할 토대를 만들었고, 녹색평론은 언제나 생태주의의 구심에 있었다. 나 역시 현실이라는 핑계로 거리를 두었고, 또 한 편으로 녹색평론의 담론이 완전히 무결한 이야기도 아니겠지만, 언제나 다른 삶을, 변화를, 대안을, 희망을 생각하는 어느 자리에는 김종철 선생님의 꿈이 함께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작은 애도를 보내 본다.


작은 것으로부터의 혁명

- 어떻게 혁명할 것인가?


‘세계식량체계, 유전자조작식품, 몬산토, 독·과점, 자본주의’ 아마 이 말들은 이번 환경사회학 수업을 들으면서 ‘지역식량체계, 유기농 또는 친환경 농산물, 사회적 경제, 대안 경제’ 이 말들보다 보다 강력한 구속력, 힘과 지배력을 가진 단어들로 느껴지지 않을까 싶다. 사실 수업을 수강하면서 가장 초점이 되었던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세계식량체계라는 일종의 메가트렌드(Megatrends) 앞에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였다. 문두에 나열한 단어들은 나에게 강력하고 그것보다 무서운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들이었다. 이런 까닭에 과연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인가는 당연히 나의 생각을 차지했다. 수업이 진행되며 저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들은 조금씩 제공되었다. 그러던 중 과제와 함께 읽게 된 일본의 한 농부 후쿠오카 마사노부의 ‘짚 한 오라기의 혁명’이라는 책을 만나게 됐다. 이 책의 제목을 접하고 처음 느낀 것은 아마도 짚 한 오라기로 혁명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었다. 이것은 새로운 정치를 말하는 것 같지도 새로운 사회체제를 말하는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나름의 의문을 가지고 읽기 시작한 것이 이 책이다.

마사노부는 책 처음에 짚 한 오라기로 혁명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그것의 방법으로 인간의 지혜와 인위를 모두 거부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개인적으로 어렸을 때 도교, 불교, 그리고 유교 등 동양사상의 영향을 알게 모르게 받고 자라게 된 영향 때문인지 이런 마사노부의 접근법은 낯설지 않았을 뿐더러 반가웠다. 글에서 읽은 마사노부의 이력을 보면 2차 세계대전 당시 징집을 피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마사노부도 어느 정도 세계대전 이후의 전후인식에 영향을 받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크게 사상적 흐름을 보면 양차 세계대전 이후 보통 사람들은 근대성에 대한 회의를 가지고 된다. 중세의 신성에 반한 하나의 이성적 조류와 함께 발생했던 ‘근대’라는 이름은 인류사 최악의 결과를 맞이함으로써 이것에 대한 대안으로 반이성적 사상의 조류를 형성한다. 하지만 이것은 다 서구중심적인 내용이고 이것이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는 이런 근대성에 대한 회의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전후인식은 마사노부의 인식과 유불선(儒佛仙)으로 대표되는 동양사상과 일정부분 함께 공유하는 상(像)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공유할 수 있는 가치는 문제의 근본에 접근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사노부는 무위(無爲)의 자연(自然)농법을 주장한다. 인위도 없고 또한 자연이란 낱말의 의미 그대로인 스스로 그러한 농법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이 나에게는 설득력이 있게 느껴진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현대를 생각했을 때 이것은 정말 ‘혁명’에 가까운 인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마사노부는 무위와 방임은 다르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다소 충격적인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마사노부의 주장을 잃으면서 한 가지 생각난 것은 나도 이미 현대에 젖어있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대중사회 속 소비주의 세대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났고, 서구화 된 삶을 살며 정보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냥 몇 가지 ‘-주의’들을 적었지만 이것들이 내 삶에 꽤나 구속력 있게 작용할 것 같다. 나는 이런 인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한국적 가치’와 ‘한국적 고민’ 또는 ‘우리 주변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을 꾸준히 말씀하신 수업시간의 내용이 떠올랐다. 또한 나의 삶이, 사회가 많은 부분 앞에 나열한 인식 안에서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령의 수필 중 ‘폭포와 분수’라는 글이 있다. 그는 글에서 동양의 폭포와 서양의 분수의 특성으로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를 설명한 글을 썼다. 폭포를 사랑하는 동양인들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반면 분수를 사랑하는 서양인들은 자연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거스르는 문화를 가진다. 글에서는 이로 인해 동·서양은 문화적 차이를 가진다고 말한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내가 특히 지적하고 싶은 서양의 문화적 특성은 ‘합리성’이다. 이는 과학적 태도로 연결되고 이 과학적 태도는 ‘인과법칙’을 도출하는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마사노부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런 서구의 과학주의적 태도는 인과관계를 직접적이고 단편적인 방법으로 도출해내는 데에는 성공한다. 반면 동양사상 중에서도 인과법칙을 설명하는 불교 연기(緣起)설의 경우는 ‘이것이 생김으로써 저것도 생기고, 이것이 멸함으로써 저것도 멸한다.’라는 인과를 이야기한다. 이것은 비교적 간접적이고 일체(一切)인 인식이라고 생각한다. 동양적 인식은 막연할 수 있는 반면 서구적 인식을 단선적인 문제해결로 인해 발생하는 부가적 피해에 취약한 것 같다. 물론 동·서양의 인식을 양분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뿐더러 어떤 인식의 우열을 가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지배적인 것은 서구적 인식이고 이런 서구적 인식이 기여한 점도 있지만 현재 발생된 문제들은 마사노부의 주장처럼 이런 패러다임의 변화에 키워드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유전자조작식품을 반대하는 영상에서 본 바와 같이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에 나오는 DDT, 월남전에 쓰인 고엽제는 당대 최신 과학기술이었으며 인간의 이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인과관계를 도출하고 문제를 해결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치명적인 결함들을 수반했다. 우리 인식에 뿌리깊이 자리 잡은 인간 이성과 과학에 대한 맹신을 의심해야 할 것이다. 물론 나는 아직 마사노부처럼 모든 것을 헛되다고 느끼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인식전환의 필요성을 공감한다.

마사노부는 책의 2장에서 자연농업에 대한 소개를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마사노부는 자신의 농법이 절대 잘못된 것이 아니며 농업기술자로서 10년, 농부로서의 37년의 삶을 이야기하며 그것을 보증한다. 여기서 느낀 것은 초창기 마사노부가 초보농부로서 자연과 방임을 혼동하여 있었던 실패와 실행착오들이 환기되었다. 나는 편하게 글을 읽고 있지만 그의 짚 한 오라기로 시작한 혁명은 얼마나 큰 용기와 노력이 필요했을까 생각하게 되는 대목이었다. 그는 구체적인 자연농법의 방법들을 제시하는데 나열된 것들은 당연하면서도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다. 흥미로운 부분들은 생각해보니 자연 생태계가 유지되는데 조금만 생태계를 관리한다면 잡초나, 병충해에서 대안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의 뚝심처럼 과학에 기반을 두지도 않은, ‘벼는 되지 않지만 쌀을 되는’ 그런 그의 농법은 오히려 실용적이면서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사노부는 과학적 진리나 이론은 실험조건에 따라 변한다고 이야기하며 자연적인 것이 오히려 강력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것은 앞서 말한바와 같이 과학의 인과설정의 오류를 말하는 것 같다. 과학적 실험은 통제된 상태에서 진행되는데 마사노부는 이것이 보편성 없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그의 의견은 바다오염을 비료가 일으킨다는 다음 장의 주장과도 연결된다.

마사노부는 3장에서 자연식품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여기서 인상 깊었던 것은 조금이라도 외관이 좋고 깨끗하고 큰 것을 원하는 소비자의 단순한 마음이 농부를 몰아가 괴롭힌다는 이야기이다. 미디어는 엘리트가 생산하고 대중이 소비한다. 이에 따라 보통의 대중들은 미디어가 주는 특정 이미지에 호감을 가지게 된다. 사실 과일을 먹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아마도 ‘맛’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이미지보다는 현실적이라고 생각되는 맛조차 어느 정도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책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소비자들의 의식전환이 없이 농업이 바뀌는 일은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한 때 진돗개가 세계애견협회에 정식 등록되지 못한 적이 있다고 한다. 진돗개는 본연의 유전적 다양성으로 인해 황구, 흑구, 백구 등의 종류들이 다양하게 새끼가 배출된다. 진돗개가 하나의 종으로 표준화 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는 해남의 간척지에서 60마지기의 논에서 농사를 지으셨다. 그때 아버지께서 일을 도우러가셨다가 “장모님, 저희 논은 농약 안 쓰시죠?”하자 외할머니께서 “암 그라제”이러셨고 이에 덧붙여 외할아버지께서 “농약을 안 쓰긴 뭘 안 써 팍팍 들이붙제”라고 하셨다고 한다. 나는 60마지기가 상상이 가지 않지만 어머니께 들은 말로는 꽤나 넓은 영역이라고 들었다. 대규모 농업 또는 기업농에서는 책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자연 농법이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와 같이 한국의 농업도 많은 부분 기업화 되었으며 이를 변화시킬 강력한 견인책 또한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내가 책에서 가장 자연농법의 매력을 느낀 것은 책의 적은 분량이지만 ‘사라진 농부의 정월 휴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한 때 손학규라는 정치인이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슬로건으로 대선후보 경선에서 나름의 선전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은 저녁이 있는 삶도 아닌 ‘주말이 있는 삶’이란 담론이 형성되었다. 한국 사회는 뭔가 휴식이 부족하거나 적어도 휴식이 부족하게 느껴지는 사회인 것 같다. 이런 사회에서 마사노부가 말하는 녹색혁명은 매력적으로 들린다. 물론 농사일은 전혀 쉽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경쟁사회에서 살고 있거나 경쟁사회에 살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마사노부의 짚 한 오라기의 혁명은 충분히 의미 있는 외침이 될 수 있다.

4장 녹색혁명에서 마사노부는 서두에 농업의 원류가 잊히며 농부가 농부다운 한마디 말도 못하고 저항할 방도도 모른 채 사라져가는 세상이라는 비관적 분석을 내놓는다. 근대성의 한 특성으로 분화를 들 수 있다. 분화는 현대의 사회를 이루어나가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이런 분화의 부작용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마사노부가 지적한 문제점이다. 수업시간에 배운 인도의 면화농업 같은 경우 정작 농업의 주체인 농민들은 농업에서 소외되고 종자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하다 삶이 파탄된 경우를 보았다. 물론 이것은 농업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지만 종자회사의 농업과 생명공학의 지식을 가지고 학위를 가진 과학자들이 농업의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에 반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사노부의 글을 읽으면서 새롭게 깨달은 것은 그런 과학자들이 정말 전문가인가에 대한 회의이다. 덧붙여 농부들은 정말 그렇게 비전문적이고 무기력한 존재일까.

이후 마사노부는 현대인의 병든 식이에 대해 설명하며 음양오행에 기반을 둔 자연식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참다운 맛의 추구를 말하는데, 씀바귀와 두릅이 생각났다. 씀바귀에 쓴 맛과 두릅의 향이 나는 너무 생소하고 양념을 많이 하지 않으면 먹지 못하겠다고 느낀 적이 있다. 그런데 부모님 세대들은 그것들을 없어서 못 먹는 것을 보면서 먹는 것에 문화적 차이도 느꼈고 내가 너무 단순한 맛에만 길들여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음식물 자체에 대한 맛을, 다양한 맛을 느끼는 연습을 해야겠다.

이 책이 그리고 후쿠오카 마사노부가 우리에게 던지는 것은 그의 책에서도 서술되었듯이 ‘짚 한 오라기’뿐이다. 하지만 그는 어쩌면 말도 안 되는 짚 한 오라기에 인생을 던졌고 노력했으며 일정한 성과를 얻었다. 이런 마사노부의 삶이 담긴 책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마사노부의 책이 진정성 있게 느껴지지 않나하는 생각이다. 책에서 마사노부는 일관되게 인간 이성과 과학, 서구화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 자연농법과 자연식, 녹색철학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그는 짚 한 오라기를 던진다. 마사노부는 때로 현대사회가 대안으로 생각하는 유기농법 자체도 부정하고 국민개농(國民皆農)의 이상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과연 나는 그가 던진 짚 한 오라기를 내 삶에 어떻게 적용하면 살 수 있을까? 일단은 거대한 시류 앞에 무기력하게만 느껴졌던 내가 어떻게든 나만의 방식으로 삶을 개척해나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이것이 쉽고 재밌기만 한 것은 아닐지라도 무언가 변화시킬 수 있고 대응할 수 있다는 깨달음은 큰 것 같다. 그리고 합리주의, 인간의 이성, 과학기술과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현대의 삶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고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한 숙제를 남긴다. 또한 구체적으로 수업의 주제인 환경사회학의 관점에서 환경이나 사회를 조금 더 긴밀성 있는 하나의 공동체로 인식하고 기존에 그냥 생각 없이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해봐야겠다. 진정한 자연스러움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구체적으로 내 삶에서 작은 부분들을 그리고 내 주변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봐야겠다.


2015.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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