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개신교에 관한 정교한 분석, <태극기를 흔드는 그리스도인>

2016년 박근혜 탄핵 정국을 거치면서 태극기는 보수 혹은 극우의 상징이 되었다. 그 이전만 하더라도 태극기는 한국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공유하는 상징이었으나, 2016년 박근혜 탄핵을 반대하는 집회와 문재인 정권 이후 문제가 된 태극기 집회의 연속 안에서 태극기는 이른바 태극기 부대와 함께 극우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먼저 이 책, <태극기를 흔드는 그리스도인>은 한국 교회의 보수 혹은 극우 개신교도에 대한 막연하고 추상적인 이해를 넘어 정교한 이래를 목표로 보수/극우 개신교에 대한 정치(精緻)한 분석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매우 다채로운 관점에서 이들을 다루고 있다.

우선 책의 가장 중심이 되는 내용은 보수 개신교인에 대한 사회조사다. 이 집단에 대한 사회조사는 2가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먼저는 ‘표적 집단 면접 조사’로, 태극기 집회에 참여했거나 (지방의 경우) 참여할 의향이 있는 사람을 20대부터 70세 미만까지 30여 명 선정하여 심층 면접을 진행한다. 다음으로는 설문 조사인데, 이 조사는 전국 19세 이상의 개신교인 중 보수적 성향을 가진 570명을 표본으로 진행된다. 이 조사를 중심으로 한 글 두 편이 책의 서두에 자리하고 있다.

이어지는 글은 극우 개신교에 대한 분석과 비평이 중심이다. 최경환 선생님은 공공신학과 교회의 정치에서 공공신학의 관점에서 극우 개신교의 정치 참여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개신교의 정치 참여가 지향해야 할 대안을 제시한다. 송인규 선생님은 ‘극우적 사고’에 초점을 맞춰 극우적 사고가 현실적, 종교적 차원에서 형성되는 과정을 추적하고 이를 복음주의의 관점에서 평가한다.

배덕만 선생님은 교회사학자답게 근본주의와 정치적 극우의 융합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시행한다. 미국의 근본주의와 한국 근본주의 접합, 그리고 한국의 근본주의자의 역사적 궤적을 추적한다. 김지방 선생님은 2000년대 교회의 정치 참여와 2020년의 교회의 정치 참여를 비교하면서 이 차이를 서술하고 한 편으로는 개신교 내부에서 새로운 시각에서 정교분리를 재고해야 함을 지적한다. 김현준 선생님은 호프스태더의 반지성주의 논의에 기대어 한국 개신교 내부에 극우파의 출현을 반지성주의라는 관점에서 분석한다.

이 책은 먼저 다채로운 시각에서 쓰였다는 장점이 있다. 사회학자, 기자, 신학자 등이 필진으로 참여해 다양한 관점에서 이 현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사실 정말 중요한 것은 글 서두에 2편이 다루고 있는 사회조사다. 표적 집단 심층 면접, 그리고 570명을 표본으로 하는 설문 조사는 그 자체로 보수 개신교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여러 측면에서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이들은 무엇 때문에 보수 개신교인으로서 자각이 시작되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게 도와준다. 정보량이 정말 많기에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한다.

사회조사에 대한 아쉬움이라면 심층 면접에 있어서 대졸자가 과잉 대표된 것 같다는 느낌이다. 30여 명 정도의 표본 중, 대졸 미만의 학력을 가진 사람이 4명에 불과했다. 이 부분은 확실히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저렇게 많은 비용이 들어간 사회조사를 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그리고 총 7장 중 4장 정도는 종교의 여부와 관계없이 극우/보수 개신교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읽어도 큰 무리가 없을 내용이고, 이 현상을 종교의 입장에서 다루는 장에서도 현실적 분석이 선행되기 때문에 얻을 정보가 많다는 말씀을 드린다. 책을 읽고 극우/보수 개신교에 대한 이미지가 기존보다는 구체적으로 잡히게 돼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여전히 기독교 서적을 보는 이유

사진은 예전에 처분한 기독교 관련 서적들, 책장 한 면을 차지할 정도로 책이 많았고, 사실 지금도 많다. 내가 산 것도 많았지만, 무교회주의자 교수님께서 주신 신학 및 성서 주석도 아직 상당하다. 몇백 권은 처분했는데, 아직도 몇백 권이 남았다. 한때 신학 덕질을 꽤 과하게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으면 정말 평생 공부 안 했을 영역이다. 교양으로서든, 지식으로서든 기독교를 공부하는 것은 굉장히 큰 도움이다. 서구 정신의 한 원형이기 때문이다. 나는 정통 기독교의 교리에 동의하지 않고, 기독교인도 아니지만, 기독교와 연관이 없다고 그 모든 전통을 등한시하는 것은 손해라고 생각한다.

내가 크게 관심 있는 주제는 그런 거다. “신정론과 근대성”, “구원/종말과 사회적 행위”, “기독교의 지식사회학” 같은 것들. 이런 주제는 이미 여러 사회학자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했고, 나는 사회학 이론의 가장 깊은 자리에는 ‘종교’가 있다고 생각한다.

신정론과 근대성: 신정론에 관해서는 여러 번 이야기했다. 신정론이란 전능하고도 정의로운 신과 그가 주관하는 세계의 비참과 고통의 역설을 설명하는 신학의 영역으로 신이 주관하는 세계에 정당하지 않은 고통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신정론에 관한 이해는 사회학의 핵심주제인 ‘근대성’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전통사회는 최종심급으로서 신과 종교적인 것으로 세계의 역설을 설명했다. 하지만 인간은 알 수 없는 고통을 이로써 더는 납득하지 못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1755년 리스본 대지진이다. 천주교 최고의 축일인 만성절에 일어난, 예배를 드리던 무죄한 자들에게 들이닥친 죽음과 비참,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전능한 신의 침묵, 그리고 인간 성취의 하릴없음은 신의 의로움과 인간 존재의 근본을 묻기에 충분했다. 아도르노가 지적하듯, 리스본 대지진은 볼테르에게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이라는 병을 제거하기 충분했다. 나는 이런 역설을 설명하는 데 전통 종교가 실패하면서 이를 합리성이 대체했고, 이로 인해 근대성의 맹아가 움텄다고 생각한다.

구원/종말과 사회적 행위: 기독교 전통적 교리의 주제 중에 내게 중요한 건 구원론과 종말론이다. 구원과 종말이 종교인의 사회적 행위/실천을 만들어내는 데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코로나와 함께 우리가 목도한 바와 같이 특정 종교집단의 행위, 그러니까 이런 시국에 몇백 명이 모여 집회를 하고 집단감염이 이루어지고, 또 그걸 조직적으로 은폐하는 행위의 근원에는 그들 특유의 구원/종말에 관한 인식이 자리한다. 그들은 이 세상의 종말이 임박해 있다. 당장 내일이라도 이 세상의 종말이 올 수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코로나에 걸리지 않아 정상적인 삶을 오랫동안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당장 언제 올지도 모르는 종말을 염두에 두고, 그에 긴박되어 그 불안 속에서 종교적 행위를 극단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종말 교리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행위다.

기독교의 지식사회학: 지식사회학이란 지식과 사회의 관계를 탐구하는 분야인데, “우리의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마르크스의 경전 같은 말이 이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니까 마르크스는 의식이 자유로운 무엇이 아닌, 계급에 의해 제한되는 무엇으로 보았던 것인데, 이는 기독교의 영역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우리는 잘 알지 못하지만, 중남미 아메리카의 근대사는 폭력의 역사이기도 한데, 이런 상황에서 움튼 것이 바로 마르크스주의와 함께 만들어진 ‘해방신학’이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설명할 신을 필요로 했고, ‘마르크스주의’를 접목해 신학을 만들어낸다. 기독교는 이렇게 탐구할 수도 있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종교가 사회를 이해하는 데 여전히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기독교를 여전히 읽고 공부한다. 한편으로 나는 성경에 나온 예언자나 예수의 말을 윤리적으로 존중하는 편이고, 이를 통해 내 삶의 일부가 형성되었다는 것도 정직하게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기독교를 공부하며 정신적으로 고양되는 것이 있다. 한편으로 나는 기독교인 중에 신과 함께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이끌며 사랑을 실천하는 분을 여전히 존경하기도 한다. 이것이 기독교에 관한 내 솔직한 입장이다.

종교주의, 안 좋은 소리주의

요사이 이른바 기독교 빌런 독서를 좀 했다. 그중에는 비교적 최근에 <복있는사람>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낸시 피어시의 『네 몸을 사랑하라』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대강 사회변화, 그것도 성(性)문화 변화에 따른 보수 기독교의 대응이다. 저자 낸시 피어시는 한국에서 잠시 유행했던 기독교 세계관 맥락의 있는 사람으로 성서학을 전공했다고. 대체로 스스로를 꽤 상식적인, 수준 높은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수준 높게 소개한다고 자위할 때 좋아하는 작가. 교회 밖에서는 아는 사람이 없고, 그런.

그래서 이 책은 포르노그래피, 동거, 이혼, 동성애와 성전환, 낙태 등의 문제를 기독교 특유의 시각에서 보수적으로 다루는 책이다. 저자는 몸과 영혼의 이원론적 세계관이 문제라 이런 안 좋은 사회현상(위에 열거한 프로노, 동거, 이혼 등)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원론적 세계관을 타파하기 위해 무려 끌고 오는 게 기독교 세계관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고, 저자의 스승이기도 한 “프란시스 쉐퍼”. 아마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기독교인을 포함해도 태반은 누군지도 모를 사람. 어쨌든 저자는 지속적으로 이런저런 이야기하면서 주저리주저리 그럴싸한 척, 굉장히 뭔가 있고 고상한 척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책을 나중에 조용기 책처럼 한 번 제대로 읽고 ‘보수 기독교의 성 담론’으로 정리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가볍게 말하자면 “저런 식으로 하니까 망하지” 정도로 정리된다. 저자 주장의 타당함은 그만 알아보기로 하자..

이런 말만 할 거면 도대체 글은 왜 쓰는 거냐. 단순하다. 그냥 기독교계가 구려서 써본다. 나야 기독교를 탈출한 지 꽤 됐지만, 그 바닥 돌아가는 생리는 대충 안다. 내가 흥미로운 건 이 책이 그래도 복음주의 계열에서 어느 정도 수준 있는 책이나, 진보적인(?) 책을 출간하는 <복있는사람>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왔다는 것. 책의 추천사를 보니 이찬수를 필두로 한 보수 기독교의 지원이 있었던 것 같다. 찾아보니 이찬수 목사 교회에서 이 책으로 행사도 했다.

복음주의 기독교계, 그중에서도 진보적 복음주의로 묶일 수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동성애에 보수적인 사람을 비판하는 게 일상이다. 아마 이번에 대형교회 목사들이 차별금지법에 관해 개소리하는 기사 링크도 하나씩 공유해가며 페이스북으로 욕했을 텐데, 이 책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안 하는 듯. 왜 그럴까? 공공연하게 서로들 아는 사이니까 그럴 거다. 자기들끼리 서로서로 빨아주다가 막상 이런 책 나오면 함구하는 그런 거. 그러니까 이런 쓰레기 같은 책이 나와도 “너나들이하는 사이”니까, 서로는 비판을 안 한다. 아마 이런 책이 조금만 자기들 기준에 수준 낮다고 여겨지거나, 지들이랑 안 친하거나, 보수적인 출판사에서 나왔으면 까고 조롱하느라 정신없었을 거다. 참 판 자체가 더러운 판이다. 이 책의 운명이나 그들의 운명이나 비슷할 것.

이 정도로 중립을 유지하지 못한 글이 거의 없었는데, 글이 질 나빠서 이 글을 읽으신, 내용에서 비판하는 책 또는 일군의 무리와는 아무 상관 없으실 일반 독자께 진심으로 죄송하다. 기독교판이 너무 구려서, 주체를 못해 죄송한 마음이다.

현대 사회에서의 기독교, 『현대세속화이론』

1. 세속화 이론: ‘세속화’라는 말이 낯선 분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세속화 자체가 종교, 특별히 기독교의 영향력에 관한 것이라 그렇습니다. 종종 모슬렘을 중심으로 연구되기도 하는데, 세속화 이론 자체는 근대화 이후 기독교, 또는 종교의 변화를 탐구했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세속화의 정의는 “사회 일반에 있어 종교의 영향력이 감소하는 현상 및 추세”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권과 왕권이 경쟁하던 중세사회와는 다른 현대 종교의 모습을 다루는 것입니다.

2. 핵심: 이 책, 『현대세속화이론』이 가진 시사점은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먼저는 세속화에 있어서 가장 지배적이었던 단일한 이론과 가정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면서, 세속화 이론이 가진 총체성, 복수성, 그리고 역동성을 경험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며, 기독교 문화 자체를 근대성 일부로 포함한다는 점입니다.

3. 저자: 이 책의 저자 데이비드 마틴은 종교사회학 분야에서 권위 있는 학자로, 영국 런던정경대학교(LSE) 사회학과에서 교수 생활을 했으며, 오랜 시간 종교사회학, 그리고 세속화라는 주제에 천착한 인물입니다. 저자의 이력과 이전 저작 역시 매우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한국종교사회학회에서 함께 공역한 결과물입니다. 그래서 책의 장마다 어느 정도 차이가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좋은 번역이었습니다.

4. 내용: ‘종교’는 사회학이 탄생하면서부터 매우 중요한 연구 대상이었습니다. 종교를 인민의 아편 내지는 진통제로 생각했던 맑스와 다르게 사회학의 다른 시조인 베버와 뒤르켐을 종교를 삶의 어떤 상수로 보기도 했죠. 특별히 베버는 근대화를 탈주술화 과정으로 예견했습니다. 탈주술화란 “우리는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라도 우리의 삶의 조건들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우리의 삶에서 작용하는 어떤 힘들도 원래 신비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힘들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모든 사물은 - 원칙적으로는 - 계산을 통해 지배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이 알고 있거나 또는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인데요, 이런 베버의 테제를 이어받은 사회학자들에게 세속화, 즉 종교의 쇠퇴는 사회학의 상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진 않았습니다. 이 책에서도 주로 다루듯, 세속화 이론이 진전된다는 것은 어떤 과학적 인식이라기보다는 어떤 계몽주의 중심의 선입견이 작용한 것이라는 반론이 20세기 중반 이후부터 제기되기 시작합니다. 유럽 중심의 세속화 이론은 “맞는 말”이었을지 모르겠지만,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등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기독교의 부흥은 세속화로 설명하기 어려웠던 겁니다. 총 4부로 이뤄진 이 책은 1부에서 세속화의 일반 이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서론에 해당하며 책의 논점을 밝히고, 이어지는 2부에서는 다양한 사회에 국가에서의 종교를 경험적으로 살핍니다. 어쩌면 세속화가 유럽 중심주의이자, 유럽의 예외주의일 수 있음을 지적하고, 3부에서는 세속화와 성령강림운동(20세기 이후 가장 뜨거운 종교운동)을 다루며 이를 점검하고, 마지막 4부에서는 이뤄진 작업에 대한 저자의 논평을 다루고 있고, 이 부분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5. 대상 독자: 이 책은 현대 사회에서의 종교, 기독교의 변화 양상과 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이런 문제에 고민하는 분들께 좋은 책입니다. 종교와 사회과학을 좋아하시는 독자와 함께, 신학·종교학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께도 흥미롭게 느낄 책입니다.

6. 감상: 근대화 이후 종교의 귀추를 주목하는 시선은 많았습니다. 책의 추천사에서 찰스 테일러가 지적하듯, 한 편에서는 서유럽의 예로 종교의 죽음과 계몽주의의 승리를 속단하기도, 한 편에서는 아시아, 아프리카에서의 기독교의 성장을 예로 종교의 새로운 승리를 점치기도 했죠. 그러나 사회학은 짜지 않고 싱겁고 담백하게 이 주제를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 책이 정직하다고 느꼈습니다. 이러한 논의를 기반으로 새로운 변화 역시 주시해야 할 거라 느꼈습니다.

 

한국 개신교의 상이한 기원을 이해하기, <윤치호와 김교신>

1. 핵심: 이 책, <윤치호와 김교신>은 저자 양현혜 선생님의 도쿄대학교 종교학과 박사 논문을 출판한 것으로, 양현혜 선생님은 서구 근대문명으로 대표되는 ‘기독교’와 근대 조선이 만나 벌어진 서구 기독교의 수용 양상을 윤치호, 김교신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분석한다. 요컨대, 윤치호와 김교신을 통해 본 근대 조선에서의 민족적 아이덴티티와 기독교의 관계 양상을 파악하는 책이다.

2. 저자: 양현혜 선생님은 이화여대 기독교학부 교수로 재직 중인 분으로, 도쿄대학교 대학원에서 종교학을 전공하시고, “동아시아 문명의 전환기에 기독교가 만들어온 역사 인식과 그 사회적 기능을 검토하는 연구”를 꾸준히 하신 분으로, 일본과 한국의 근대 초기 기독교에 대한 전문가이시다. 또한 무교회주의와 김교신 연구의 권위자이시기도 하다.

3. 내용: 이 책은 언급한 대로 윤치호와 김교신이라는 인물을 통해 조선인이 수용한 기독교의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내 주관을 들여 이야기해보자면, 윤치호와 김교신의 가치는 다르다.

우선 윤치호는 한국 보수·극우 개신교의 원류·효시에 가까운 인물로 그가 근대적 지식인으로서 기독교 신앙을 탈신화화하여 수용한 것 이외에 그의 개신교 사상은 한국 주류 보수 개신교의 원형이 된 것 같다.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 윤치호는 일본을 통해 근대화/산업화에 대한 열망과 사회진화론을 체화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기독교를 수용한 그는 식민지배를 신의 뜻으로 성화시켰다. 그의 사상에는 ‘산업문명국=선자=영원한 지복, 비산업 야만국=약자=영원한 멸망’이라는 세계관이 자리했다. 그에게 기독교의 신은 근대 산업 문명을 수호하는 신이며, 적자생존의 원리에 따라 강자에 의한 약자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신이다. 이런 그의 기독교 이해는 ‘열등한 조선’이라는 아이덴티티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반면, 김교신이 수용한 기독교는 독특한 것이었는데, 그는 우치무라 간조를 필두로 한 일본 무교회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는다. 김교신은 기독교 신의 사랑과 정의에 초점을 맞추어 이를 통해 민족의 고난을 회복할 구상을 만들게 된다. 죽음과 싸워 이긴 그리스도로 인해 죄로서의 세계 역사는 종결되고, 신의 나라가 도래하기 시작한다. 이 역사의 변화는 점진적으로 부정의를 정의로 대체하는 역사인데, 이를 통해 그는 민족의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희망과 기대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그는 기독교인이 창조적으로 역사를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주창한 ‘조선산 기독교’는 역사 형성을 위한 주체적·창조적 신앙의 자세이며, 불의에 의해 잃어버린 민족의 역사를 창조적으로 극복하려는 다른 민족적 아이덴티티의 구상이었다.

4. 감상: 윤치호와 김교신에 대한 감상은 달라야 할 것이다. 윤치호의 개신교 수용은 근대 한국 개신교의 사상을 넘어 한국의 사회사상을 형성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윤치호의 개신교 이해 및 수용을 통해서는 사회진화론, 발전주의로 대표되는 한국 근대 사회사상을 엿볼 수 있다. 반면, 김교신의 경우, 그가 가진 실질적인 사상사적 영향은 작은 편이다. 한국에서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는 맥이 아주 소수에게만 전해졌기 때문이다. 윤치호는 한국 보수 개신교를 표상하지만, 김교신이 진보 개신교를 표상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의 진보적 개신교는 1970년대 이후 영미 신학을 통해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김교신은 사상 내재적인 가치가 충분하다. 그는 1970년대 이후 구성된 진보적 개신교 사상을 이미 20세기 초반에 선취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신의 나라(하나님 나라) 신학이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을 때, 윤치호는 한국 개신교의 심층과 사상사적 영향을 이해하기 위해 보면 좋을 것이고, 김교신은 사상 내적인 성취를 중심으로 보면 좋을 것이다.

사회학자 로버트 벨라

*본 글은 Robert N. bellah의 논문 Civil Religion in America, 1967을 요약한 것으로, 당시의 구체적 사회적 상황에 기인한 본문보다는, 현재에도 의미있는 내용에 주안점을 두고 그를 중심으로 정리한 글이다. 로버트 벨라의 시민종교 연구는 현대 시민종교 연구의 중요한 이론적 자원이다.

 

미국의 시민종교(Civil Religion in America, 1967)

 

로버트 N. 벨라(Robert N. Bellah)

 

 

요약: 로버트 벨라의 논문, 미국의 시민종교는 케네디의 연설문 분석을 통해, 정치적 언명 배후에서 정치 권력을 성화(聖化)하는 종교적 차원을 부상시키며, 이를 시민종교로 명명한다. 시민종교를 주제로 벨라는 미국의 독립과 건국 과정에서 형성된 시민종교와 남북전쟁을 통해 전사자 숭배로 공고화된 시민종교의 양상을 기술한다. 이후에는 시민종교의 정치적 동원력이 가지고 있는 양가적 속성을 언급하면서, 당시 미국이 당면한 과제(베트남 전쟁)에서 시민종교 역할의 재고를 주장하며 글을 마친다.

 

초록: 개신교가 국교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교회와 유대교 회당이 오직 “미국식 생활양식”이라는 보편화 된 종교를 기린다는 사람도 있지만, 실제로 미국에는 정교하고, 제도화된 시민종교가 교회와 구별되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거의 없다. 이 논문에서는 시민종교가 존재할 뿐 아니라, 이 종교는 그 자체의 진지함, 진실성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종교와 같은 동일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1. 케네디 취임식과 시민종교

 

시민종교, 케네디의 예시

 

“내가 여러분과 전능하신 신 앞에서 우리 선조들이 거의 175년 전에 규정한 것과 똑같은 엄숙한 선서를 했기 때문입니다. … 인간의 권리는 국가의 관대함에서가 아니라 신의 손에서 나오는 것 … 신의 축복과 도움을 청하면서 … 신이 하시는 일은 틀림없이 여기 지상에서 진실로 우리의 일이 된다는 것을 알고서 우리가 사랑하는 대지를 이끌어 나아갑시다.”(1961년 존 F. 케네디의 대통령 취임식)

 

존 F. 케네디는 대통령 취임사에서 3번 신을 언급한다. 이러한 언급은 엄숙한 국가 행사에서 미국의 다른 대통령에게서도 거의 변함없이 발견되는 것인데, 엄숙한 행사에서 발언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깊이 자리 잡은 가치와 약속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정치권력의 종교적 정당화

 

미국은 정교분리 국가이고 종교는 사적인 것이 되었지만, 대다수의 미국인이 공유하는 종교적 지향의 공통적인 요소도 존재한다. 이런 종교적 지향은 미국의 설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정치를 포함한 미국의 생활양식 전반에 여전히 종교적 차원을 제공한다. 공공의 종교적 차원은 미국의 시민종교라고 정의한 일련의 믿음, 상징, 그리고 의례의 조합으로 표현된다. 대통령 취임식은 시민종교에서 중요한 의례적 행사로, 최고 정치적 권위의 종교적 정당성을 재확인한다. 취임 선서는 헌법적 의무를 확인하는 것인데, 케네디는 그것을 국민(people)과 신에게 맹세함으로써, 대통령의 의무는 헌법을 넘어 국민뿐 아니라 신에게까지 도달한다. 주권이 신에게 속한다는 것 역시 이를 신성화하며, 대통령의 의무를 확장한다.

 

정치적 동원의 종교적 정당화

 

케네디가 인식한 정치에서의 종교적 차원은 인간의 권리에 대한 종교적 차원의 신성한 근거를 제공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정치 과정을 위한 초월적인 목표를 제공하기도 한다. 지상에서 신의 뜻을 이행해야 하는 개인적, 집단적 의무를 부여한다. 이런 정신은 미국의 건국이념과 같으며, 미국 설립의 모티프로서 이후 모든 세대에 존재하는 정신이다.

 

2. 시민종교라는 발상(idea): 미국 시민종교의 기원와 특징

 

‘시민종교’라는 단어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최초로 사용됐지만, 18세기 미국 국부의 사상에서도 종교, 도덕, 통합에 관한 시민종교의 개념을 엿볼 수 있다. 조지 워싱턴은 “인간사를 경영하는 그 보이지 않는 손을 인정하고 경배해야 할 의무를 합중국의 국민보다 더 많이 진 국민은 없습니다. 합중국 국민이 독립국의 지위로 나아갔던 한 걸음 한 걸음이 신의 섭리를 보여주는 어떤 징표를 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취임사에서 연설하는데, 이러한 종교적 언명은 단순히 그치는 것이 아니라, “추수감사와 기도의 날”과 같은 국가 기념일으로 지정되었다. 미국 초기 국부의 언급과 행동을 통해 시민종교의 기조와 형태가 주조되었다.

미국의 시민종교는 기독교에서 선택적으로 파생되었지만, 기독교와 같지는 않다. 시민종교의 신은 초월적 신으로서, 구원과 사랑보다는 질서, 법, 권리와 관련이 있었고, 그 신은 미국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미국 역사에 참여하는 신이다. “미국 이스라엘(America Israel로 의역하자면 미국 선민사상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의 사상은 빈번했는데, 이는 유럽을 이집트로, 미국을 언약의 땅으로 상정한 일종의 미국식 선민사상이었다. 시민종교는 국부의 사적 견해뿐 아니라, 공공의 관점이 반영되어 만들어졌다. 정교분리라는 역사적 합의와 계몽주의, 여러 종파의 개신교가 지배하는 문화적 배경에도 시민종교는 종교와는 다른 기능을 수행하며 살아남았다.

 

3. 남북전쟁과 시민종교: 남북전쟁을 통한 미국 시민종교의 성립과 전사자 숭배

 

남북전쟁 이전의 미국 시민종교는 독립(출애굽)이 중심이 되었다. 남북전쟁은 미국의 국가적 자기 이해에 두 번째로 중요한 사건이다. 전쟁은 국가의 의미에 가장 심층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그 의미를 정식화하고, 상징한 사람은 링컨이었다. 그의 주된 관심은 국부가 제시한 건국이념에 있었다.

남북전쟁 함께 죽음, 희생, 부활이라는 새로운 테마가 시민종교에 합류한다. 이것은 링컨의 삶과 죽음에서 상징화된다. 게티스버그 연설은 시민종교의 경전으로 이런 주제가 생생하게 드러난다. 미국의 시인 로버트 로웰은 게티스버그 연설은 상징적이고, 성사(聖事)적인 행동이었으며, 링컨의 죽음 역시 상징적이었다고 본다. 이어서 로웰은 미국인과 미국을 위한 그의 죽음은 자유와 평등에 대한 제퍼슨의 이상을 죽음과 부활이라는 기독교적 희생 제의로 완결한 것이다. 이것은 종파나 종교를 넘어선 숭고한 가치로서 미국의 일부가 된다.

기독교적 원형을 배경으로 ‘우리의 순교한 대통령’ 링컨은 전사자, 즉 ‘최후까지 모든 헌신을 바친 자’와 연결됐다. 희생의 테마는 시민 종교에 잊힐 수 없이 기록되었다. 이 새로운 상징은 육체적·의식적 표현으로 만들어졌고, 이것은 전사자를 위한 국립묘지 건립으로 이어졌다. 전사자를 안치한 국립묘지는 가장 성스러운 기념물이 되었다.

남북전쟁과 함께 확대된 전사 장병 추모일(현충일)은 논의해온 주제를 의례적으로 표현했다. 현충일 기념행사는 순교한 전사자 숭배, 희생정신, 미국의 비전을 포함하는 사회 전체를 위한 주요 행사이다. 추수감사절이 가족을 시민종교에 통합하듯, 현충일은 지역사회를 국가 숭배로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 독립기념일, 보훈의 날, 워싱턴·링컨의 생일을 포함한 국가 기념일은 시민종교의 의례적 기념일을 제공하고, 공교육 제도는 시민 의례의 종교적 기념을 위한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한다.

 

4. 오늘의 시민종교: 시민종교의 정치적 동원력이 지닌 양가성

 

미국 초기 역사에서 미국의 종교와 정치변화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교회는 혁명이나 민주제도 반대하지 않았다. 미국의 시민종교는 종교적 전통을 선별적으로 차용하였다. 이렇게 시민종교는 국가적 연대의 강력한 상징인 교회와 반목 없이 구축되었고,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깊은 차원에서 개인의 동기부여를 동원할 수 있었다. 미국의 시민종교는 여전히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불과 3년 전에도 암살된 대통령의 장례식과 희생의 테마가 재현되기도 했고, 린든 존슨은 “오늘 밤 우리가 이 자리에서 시작하는 일을 주님이 정말로 이해하시고 정말로 좋아하실 것으로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시민종교의 자원을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민종교가 언제나 대의를 위해 사용되지는 않았다. 미국 안에서 신-국가-국기를 융합한 보수집단은 비국교도나 자유주의자를 공격하기도 했다. 세계에서의 미국의 역할과 관련하여, 시민종교의 왜곡의 위험은 더 크다. ‘미국 이스라엘’이라는 주제는 인디언에 대한 부끄러운 처리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고, 제국주의적 행동과도 암묵적으로 연계될 수 있었다. 국제 관계에서 미국은 자유 세계의 수호자인 미국과 미국의 도움의 필요로 하는 모든 정부를 동화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남베트남을 피로써 수호하는 것은 새 예루살렘 미국의 역할이며, 여기서 발생하는 죽음은 희생이라는 테마를 통해 성화(聖化)될 수 있다.

 

5. 세 번째 시험: 시민종교에 대한 염려

 

미국 시민종교의 첫 번째 시험대는 독립전쟁이었고, 두 번째 시험대는 남북전쟁이었다. 현재 미국의 시민종교는 세 번째 시험에 도달했다. 이 세 번째 시험에서 미국의 시민종교가 패권주의적으로 발현되는 것(베트남 전쟁)을 경계해야 한다. 미국의 시민종교는 미국이라는 국가가 아닌, 궁극적이며, 보편적 실재에 비추어 본 미국의 경험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에, 새로운 상황에 수반되는 미국 시민종교의 연속성을 유지해야 한다.

시민종교의 이면에는 성서적 원형이 존재한다. 탈출(출애굽), 신의 선민(選民), 약속의 땅, 새로운 예루살렘, 희생적 죽음, 그리고 부활. 하지만 시민종교는 순수하게 미국적이고 새롭다. 시민종교는 그 자체의 예언자, 순교자, 신성한 사건, 성지(聖地), 신성한 의례와 상징을 가지고 있다. 시민종교는 양가적 속성을 지니기 때문에, 미국이 신의 뜻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사회가 되고, 모든 국가에 빛이 되는 것은 우려되는 일이며, 주의를 필요로 할 일이다.

 

#시민종교 #로버트벨라 #종교사회학

1. 핵심: 예수가 처형을 당할 때 고작 몇 백 명이던 유대교의 한 종파, 기독교는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큰 종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는 책이 바로 <기독교 승리의 발자취>입니다. 저자 로드니 스타크는 <기독교의 발흥>에서 초기 기독교의 제한된 주제를 다뤘다면, 이 책은 예수 탄생 이전부터 현재까지 기독교의 역사까지를 광범하게 포괄해 사회학의 관점에서 기독교 역사를 재조명하는 책입니다.

2. 저자: 로드니 스타크는 미국 종교사회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학자입니다. 사회학자들은 과학이 발달할수록 세속화, 즉 종교가 사회에서 점차 영향력을 상실해갈 것을 예측했고, 일부는 종교를 비합리적인 것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이에 반해 스타크는 종교를 상수로 설정하고, 개인이 종교 행위를 할 때 다른 삶의 방식과 마찬가지로 합리성의 근거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합리적 종교 선택이론”이죠. 구체적으로 경제활동에서의 수요/공급의 법칙 같이 종교활동에서도 투자(헌신, 희생) 대비 보상(종교적 효능감, 현세/내세의 보상, 종교공동체의 유대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합리적으로 판단한다는 겁니다. 이 책 역시 이 관점에서 기독교를 재해석합니다.

3. 내용: 책은 앞서 말했듯, 예수 탄생 이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소수로 시작된 예수운동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교회사에서 다루는 모든 주제를 다루지는 않지만 기독교의 전반적인 흐름 속에서 의미있는 사건을 추려내고, 기존의 통념과는 반대되는 해석들을 제시함으로써 흥미롭고 독특한 시선을 전해주는 부분이 매우 매력적입니다.

그중에 몇 가지 내용을 이야기해봅니다. 우선은 초기 교회사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질병, 여성과 여성에 관한 대목이 흥미로웠습니다. 고대의 전염병은 말 그대로 재앙 그 자체였는데, 기독교인들은 이를 시험의 한 종류로 받아들이고 일상을 살면서 이웃을 보살피는 실천을 보여줍니다. 다른 공동체와 구별되는 이 자선은 기독교의 성장요인이 됩니다.

초대 기독교는 여성에 대해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당시 사회에서는 여아를 유아 살해하고, 여성을 12살부터 결혼하게 하거나, 낙태를 강요하던 사회 일반의 분위기가 있었는데 기독교는 이와 다르게 유아 살해, 조혼 금지, 낙태를 금지하고(지금의 맥락과는 다른), 여성이 종교의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성장의 발판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합니다.

중세를 다루며 스타크는 중세를 “암흑의 1000년”이라고 말하는 것이 신화이며, 오히려 신이 창조한 세계의 질서를 탐구하는 기반이 된 중세 스콜라신학이 과학을 발전시켰으며 르네상스가 신화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현대에 와서 스타크는 앞서 언급한 ‘세속화’를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종교를 비이성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종교가 쇠퇴할 것이라는 분석에 실증적으로 반론을 제기하면서 종교의 영향이 증대되고 있는 사례를 언급하기도 합니다.

4. 감상: 이 책은 기독교 역사를 알던 종교인에게도 또 교양으로 기독교에 관심이 있는 비종교인에게도 모두 유익할 책입니다. 로드니 스타크는 논쟁적인 저자입니다. 그의 독창적인 이론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기도, 반박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핫한 작업을 하는 작가라는 이야기입니다. 로드니 스타크는 일견 기독교를 옹호하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고, 저도 그가 종교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종교개혁이 이단이 아닌 것은 살아남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사회학자입니다. 이 책이 누군가에게는 기독교의 승리를 실증해주는 책일지 모르겠지만 그렇게만 보는 것은 이 책의 장점을 반감시키는 것이라고 봅니다. 스타크의 서술을 정직하게 읽고 고민해보는 것이 비/종교인 모두에게 유익하면서도 이것을 생산적으로 점유하는 일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 핵심: 『한국 개신교 근본주의』는 ‘한국 개신교가 왜 개독교가 되었는가?’하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책으로 한국 개신교의 가장 지배적인 근본주의 개신교의 형성과 특징 분석하는 다룹니다. 이 책을 통해서 한국 개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미국 개신교의 근본주의와 그 형성, 그리고 그것이 한국으로 전이되는 과정과 한국 개신교 근본주의만의 특성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2. 저자: 이 책은 서울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신학대학교, 예일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미국 드류(Drew)대학교에서 미국 현대교회사를 전공하신 배덕만 목사/교수님이 썼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배덕만 교수님께 교회사(역사신학)를 입문과정에서 배우기도 했는데요, 교수님의 전공이 한국 개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미국 현대교회사라서 이 책을 쓰기에 굉장히 적합한 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배덕만 교수님은 미국, 한국의 현대교회사와 기독교의 정치운동을 일관되게 연구하셨고, 실천적인 지식인이시기도 합니다.

3. 내용: 책에서는 처음으로 미국 개신교 근본주의의 형성을 다룹니다. 근대가 시작되면서 합리주의·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종교는 절대적 지위를 잃게 되죠. 합리주의를 수용한,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성경에 있는 기적들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거나 전래동화처럼 이해했습니다. 예수의 동정녀 잉태, 예수의 육체적 부활 등의 사건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합리주의에 근거해 해석했죠. 반면 근본주의는 이런 충격에 반작용으로 성경의 내용을 더욱 적극적으로 옹호하게 됩니다. 미국에서 탄생한 이들은 “성경의 영감·무오류성(성경은 신이 썼고 고로 단 하나의 오류도 없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 예수의 대속적 죽음과 육체적 부활”이라는 근본주의 5대 교리를 중심으로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종말이 올수록 세상이 망해간다고 믿습니다(진보정치 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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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미국에서 형성된 근본주의 개신교는 그 근본주의 신앙을 가진 미국 선교사들의 한국선교와 냉전 체제 하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고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로 성장합니다. 한국 근본주의의 형성이 다뤄지죠. 한국은 6·25전쟁에서 한국 개신교인의 절대다수였던 이북사람들이 공산당을 피해 남한으로 오면서 반공주의를 장착하고, 아시아 유일의 개신교 국가로 만들려했던 이승만, 불교신자였지만 미국의 지원 아래 기독교의 포교활동을 국가적으로 지원한 박정희 아래에서 보수주의와 연결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형성된 한국 개신교 근본주의의 특징을 서술하는데, 그 내용은 성서 문자 그대로 수용하는 문자주의, 종교 다원주의에 관한 적대, 창조과학 신봉, 사회·정치·경제적 보수주의 등을 특징으로 발현되고 책에서는 이 항목들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5. 느낀점: 제가 보기에 한국 개신교에 가장 필요한 부분은 성찰성인 것 같습니다. 연구를 보면 한국 개신교의 다수가 근본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있는데요, 이들은 탄생한지 200년 정도인 매우 지엽적인 이 근본주의가 역사를 초월한 진리인 줄 아는 것이 문제 같습니다. 이 책을 통해 개신교인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객관화해보고 성찰할 수 있게 되는 것 같고요, 비기독교인 역시 일반교양으로 읽어볼만한 책 같습니다. 물론 저자께서 학자인 동시에 목사이기도 하셔서 부분부분 신앙적인 서술이 나오긴 하지만 과한 수준은 아닙니다. 책이 문고판 120여 페이지 5,500원 가량으로 작고 얇지만 그 핵심이 잘 담겼습니다. 광화문에 태극기를 들고선, 또 진보정치를 악마화하는 기독교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궁금하신 분들께 추천해드리는 책입니다.

 

한국 개신교 근본주의

한국 기독교 근본주의

근본주의 기독교

근본주의 개신교

“그들에게 과거의 그리스도를 소개하여 준다해도 아무런 감격을 줄 수 없으며 그렇다고 미래의 그리스도를 전하기에는 그들의 현재가 너무도 급박했읍니다.”

조용기, <삼박자 구원> 중

헌책방에 가서 <생산적 믿음>이라는 책을 구했다. 누가 봐도 조용기가 쓴 책이다. 단적으로 한국의 기독교는 조용기주의이다. 조용기에 관한 평가와는 무관하게도 그렇다. 종교사회학을 염두에 두면서, 조용기의 책들 <삼박자 구원>, <가난해야 좋은 신자인가>, <꿈과 성취>를 읽은 적이 있다(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책을 빌려준 신학생 동생에게 감사하다).

그 책에는 한국 개신교가 들어있었다. 자기계발적 신앙, 물질세계를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경제적 삶의 성공을 신앙의 성공으로 연결하는 지극히 세속적인 종교성, 그러면서도 근대화에 관해 반지성주의적으로 점철되는 반세속주의의 역설, 문자주의까지. 이것이 한국 교회의, 한국 기독교의 이념형이 아닐까.

여러 사회학자가 조용기를 구조 형성적 행위자로, 박정희, 정주영과 함께 한국 근대화에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로 규정하는데, 이것이 과도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미 웃음거리가 된 그에게 그런 평가는 과분하게 느껴지겠지만, 조용기는 신앙을 형성하기 위해 굉장히 능동적이고, 절절하게, 진정성 있게 분투한 사람이었다. 그를 나처럼 관찰하든, 아니면 비판하든, 극복하든, 계승하든 어떤 과정에 있더라도 읽을수록 그가 그냥 지나칠 인물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책은 가끔 이렇게도 읽는다. 자료로서, 관찰로서의 독서다. 언제나 판단자인지, 관찰자인지 그 사이를 갈등하지만, 관찰로서의 독서로 이런 책을 읽곤 한다. 앞으로는 이런 자료로서, 관찰로서의 독서와 그 비평, 또는 관찰도 나눌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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