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승, <쌀 재난 국가>

화제의 책을 읽었다. 이철승 선생님의 <쌀 재난 국가>는 한국 사회의 현재적 문제의 기원을 찾는 책으로, 한국 사회의 많은 명암이 벼농사 체제에서 기원했음을 주장하는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목표하는 바는 단순히 한국이라는 근대국가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다. 한반도와 쌀이라는 동일한 ‘생태적 환경 공간과 먹거리’를 공유했던 선조의 삶과 오늘날 우리 삶의 패턴의 기저에 있는 공통의 구조에 주목하는 것인데, 이게 바로 벼농사 체제이다.

저자는 밀 농사권 지역과 벼 농사권 지역을 대비해 농업 체제에 따른 사회의 습속 차이를 설명한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집단 협업이 필요하지 않은 밀농사 지역에는 개인주의가 자리 잡고, 집단 협업이 중요한 벼농사 지역에는 집단주의가 자리 잡는다는 이야기다. 저자는 이런 구분 속에서 벼농사 체제가 남긴 7가지 유산을 이야기한다.

첫째, 벼농사 체제는 자연재해에 취약했기 때문에 동아시아 국가는 재난에 대비하는 재난 대비 구휼국가가 되었고 이는 코로나 상황에서도 작동했다. 둘째, 벼농사 체제는 공동생산(품앗이 등)을 위해 작동하는 협업 조직이었다. 이들은 모두의 논에서 공동의 생산을 위해 협력했으며 동시에 같은 노동을 들여도 생산량의 차이가 있었기에 경쟁도 체화했다. 셋째, 이런 집단 협업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 기술 표준화 시스템이 작동한다. 넷째, 벼농사 체제는 마을 단위 협업 시스템을 유지하는 위계 구조인데, 이는 현대의 연공서열제로 이어졌다. 다섯째, 벼농사 체제는 여성 배제의 사회구조로 이어졌다. 여섯째, 벼농사 체제는 선발체계(과거제)와 엮여 시험을 통한 선발 및 신분 상승으로 이어져 현대에는 시험의 숭배, 고용형태 차별로 이어졌다. 일곱째, 벼농사 체제는 땅과 자산에 대한 집착, 씨족 계보·혈연을 중심으로 한 사적 복지체제로 작용했다.

이 책은 이런 분석과 함께 문제의식으로 현재 한국의 불평등의 원인이 벼농사 체제에서 기인했음을 논증하고, 이를 위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에는 여러 장점이 있다. 먼저 책은 단순히 ‘근대국가’ 정도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한국, 또는 동아시아 문명의 기저에 있는 역사학의 교황 브로델의 용어로 ‘장기지속’을 밝혀내는 야심 있는 기획이다. 다음으로 이 책은 매우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생각지도 못한 벼농사에서 현대 한국의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고 있는데, 심지어는 그게 꽤 개연성 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탁월한 생각이라고 느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매우 평이하다. 그러니까 학술적 내용을 담고 있고, 한편으로 학술적 논증을 시도하고 있지만, 일반 독자가 읽고 이해하기에도 큰 문제가 없을 정도로 책이 잘 쓰였다.

하지만 아쉬움이 존재한다. 첫째, 과도한 일반화다. 이 책을 접하기 전 한 인터뷰에서 이철승 선생님은 베버를 호명하며 서양은 농업 생산물이 신과의 계약이기 때문에 한국과 다르다고 설명했는데, 과연 여기서 서양은 구체적으로 어디인가? 러시아와 터키는 서양인가, 아닌가? 1905년의 베버도 개신교 지역 일부를 선정해 연구를 진행했고, 일반화도 하지 않았는데, 지금 시대의 학자가 그 복잡한 양상의 문명을 단순/일반화하는 건 분명한 실수다. 물론 이 책은 동아시아와 한국을 설명하기에 저것과 상관은 없지만, 주제를 설명하는 저자의 태도는 비슷하다.

둘째, 책에는 한국의 벼농사 체제에 대한 1차 자료가 거의 없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도 벼농사가 아닌 지역도 있고, 혹은 농업이 아닌 지역도 있을 텐데, 거기에서도 작동하는 벼농사 체제의 부산물을 저자는 다루지도, 해명하지도 않는다. 벼농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현대에 연결되었는지를 1차 자료를 통해 제대로 논증하지 못하고 있다. 동아시아에 대한 실증도 부족해 보인다.

셋째, 저자가 끌고 오는 브로델은 역사학의 사회과학화로 설명되는 아날학파에 속해 있지만, 저자는 사회학자다. 책에서는 장기지속을 설명하기 위해 벼농사 체제를 고대부터 설명하는데 고대, 중세와 근대 이후의 사회는 아예 다르다. 그래서 지금의 시각에서 고대·중세에 적용해선 안 된다. 사료를 읽는 것부터 적용까지 역사학 방법론이 필요할 텐데 저자는 그 역시 제대로 다루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이 책은 문제 제기에 의의가 있다고 본다. 아직 이 책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이건 이 정도의 분량으로 해명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철승 선생님의 후속 작업을 기대하는 마음이며, 책은 매우 흥미롭다.

<경합하는 시민종교들>

<시민종교의 탄생>은 시민종교란 무엇이며, 한국에서 식민성, 전쟁을 통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추적했다면, 이 책 <경합하는 시민종교들>은 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부터, 문재인 정부까지 시민종교가 어떤 변화양상을 거쳤는지를 연대순으로 조망하는 책이다. 이 책은 태극기와 촛불로 양분된 두 개의 대한민국의 계보학을 다룬다.

책의 1부 시민종교의 형성에서는 한국 시민종교의 신념체계를 구성하는 민족주의, 반공주의, 발전주의, 친미주의, 민주주의의 문제를 다룬다. 해방을 통해 만들어졌던 집합적 열광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열광은 국가 폭력에 의해 차갑게 사그라지게 된다. 국가는 애국심을 끌어내기 위한 의례, 상징을 창출하며 통치를 공고화하고, 이 시기에는 독립운동과 관련된 성지·영웅과 반공 성지·영웅의 경합이 일어난다.

‘식민지엘리트’ 세력으로 구성된 한국의 지배층은 이런 경합에서 자신의 반민족주의적 과오 때문에 반공주의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사용해야 했다. 김구, 이봉창, 윤봉길, 이동녕, 안중근(가묘) 등이 안장되어있던 민족적 성지 효창공원에 이승만 정부는 축구장을 만들고, 박정희 정부는 테니스장·위락시설을 만들며 성지의 성스러움을 오염하는 것이 대표적 예다.

2부부터 다루는 전쟁은 한국의 시민종교가 반공·친미주의로 중심화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전쟁 이후 반공·친미주의는 대중에게도 내면화된다. 국가 역시 다양한 전적비, 국립묘지, 현충일, UN참전기념물 등의 기념물, 의례, 기념일 등을 만들어내며 반공·친미의 가치를 성스러운 것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한다. 한국의 반공주의는 미국·영국식 자유주의적 반공주의가 아닌, 일본·독일식 국가주의적 반공주의라는 것이 중요한데, 반공주의가 급부상한 시민종교 체제는 이 성스러움에 반대되는 것을 낙인하고, 배제하고, 폭력하는 것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60년의 4·19 혁명은 다시 해방 시기의 집합적 열광, 대중적 열광을 끌어내기에는 충분했으나 혁명은 부유하게 되고, 쿠데타가 일어나게 된다. 3부는 박정희 이후 시민종교를 다룬다. 박정희 정부는 민족주의와 복잡한 관계를 맺었는데, 그는 경제·반공·스포츠 민족주의 등 지배에 도움이 될 민족주의를 잘 활용하며 시민종교를 사용한다. 이 시기의 영웅은 대부분 전장영웅이 자리하는데, 박정희는 병영사회 건설을 위해 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국난의 극복으로서 역사 서사를 만들어낸다. 또한 시민종교의 5대 교리 중 하나인 민주주의를 전면으로 비판하며 반공-국가주의의 시민종교를 창출해내고, 유신체제 이후에는 이에 대항하는 예언자 진영이 만들어진다.

막스 베버는 종교지도자를 사제, 예언자 등으로 구분하는데, 사제적 종교지도자는 초월적 존재로부터 오는 지지와 위로를 제공하며 기존의 가치를 성화하는 역할을 한다. 예언자적 종교지도자는 기존의 가치규범을 전복하며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다. 유신체제 이후 한국의 시민종교에는 민주-공화주의를 중심으로 한 예언자 진영이 만들어지고, 광주항쟁 이후 균열이 본격화 된다.

이 책 마지막은 민주화 이후 시민종교를 다룬다.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의 시민종교는 한의 시민종교로 통합될 여지도 가지고 있었지만, 민주화와 과거사청산을 통해 양분되는 경향으로 이어진다. 저항적 시민종교가 급속도로 발전하고, 지배적 시민종교이자, 시민종교의 사제적 진영의 영웅 박정희, 전두환 등은 조롱과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런 저항적 시민종교의 출현은 김대중-노무현의 정권 창출로도 이어지는데, 48년부터 김대중이 임기를 시작한 98년까지 약 50년 동안 흔들리지 않았던 한국의 지배층은 이에 반격을 시작하고 예언자 진영 역시 재반격을 가하면서 반공-자유를 중심으로 한 시민종교와 민주-공화를 중심으로 한 시민종교의 대립이 극심해진다. 이것이 태극기와 촛불로 표현된 현재의 갈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강인철 선생님은 20세기 한국사를 이해할 때 필수적인 연구를 이어오고 계시며 출판된 책만 거의 1만 페이지에 달하지 않을까 싶다. <시민종교의 탄생>은 세종도서로, <경합하는 시민종교들>은 대학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와 한국사회사학회에서 1회 최재석학술상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지금 태극기와 촛불로 분할된 두 개의 대한민국의 심층에 있는 종교적이고 열광적인 무언가를 확인할 수 있는 책. 굳이 아쉬움이라면 ‘시민종교 정치가’로 표현된 문재인의 정권이 임기 중이라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시민종교의 탄생>

“시민은 국가를 왜 사랑하며, 국가는 어떻게 시민을 지배하는가”

2016년 이후, 대한민국은 태극기와 촛불로 나뉘게 되었다. “그들은 왜 태극기/촛불을 들게 되었을까?”에 관한 많은 설명이 제시되었는데,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설득력 있게 느낀 것은 바로 이 책, <시민종교의 탄생>에서 제시되어있다.

시민종교란 “한 사회를 통합하고, 도덕적으로 결속시키며, 그 구성원들에게 안정적이고 긍정적인 정체성을 제공하는, 그러면서 어느 정도 성스럽게 여겨지거나 최소한 존중의 대상이 되는, 폭넓게 공유되고 합의된 가치 및 신념 체계 그리고 그와 연관된 상징, 신화, 의례, 실천, 장소, 인물들의 체계”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세속국가에서 국가는 성스러운 후광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 왕권신수설로 정당화된 서구의 절대왕정도, 황제를 천자(天子), 곧 하늘의 아들로 규정하여 지배를 신성화했던 통치도 불가능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는 통치를 정당화하고 권력에 신성한 후광을 부여할 문화적·종교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을 필요로 하게 된다. 국가는 합리적 권위 이면에 있는 종교적이고 열광적이고 비이성적인 충성심을 끌어내는 ‘무엇’을 만들어야 했다.

국민 마음의 종교적 충성심을 끌어내기 위해 국가는 종교처럼 고유의 신념체계, 축제, 의례, 노래, 상징, 영웅, 성인, 성소, 숭배대상을 구축한다. 예를 들어,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이라는 의례, 현충일이라는 국가 기념일과 이를 비롯한 행사, 독립운동가라는 영웅, 독립운동 유적지라는 성소, 애국가 등은 합리적 지배 이면에 있는 유사종교적인 충성심을 만드는 시민종교의 요소이다. 이런 논의를 통해 저자는 한국 시민종교를 분석한다.

책에서는 한국의 시민종교를 주조한 세력으로 ‘식민지엘리트’ 세력을 지목하며, 식민지 경험, 한국·베트남전쟁이 이를 구축하는 중심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식민지엘리트 세력이란, 식민지시기 근대적 교육을 통해 근대적 직업인으로 활동했던 세력으로 이들 안에는 반일적인 개인도 존재했지만, 이들은 집단 수준에서 반민족적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객관적 위치에 있었고, 조선인이라는 민족보다 일본의 민족 이익을 우선했던 세력이다.

문제는 ‘해방’이었다. 민족지도자이자, 민족의 선각자였던 그들은 해방 후 민족주의를 중심으로 한 대중에 의해 과거사 청산의 대상이 되며 생명과 재산에 위협을 받게 되며 한순간에 반민족행위자로 전락한다. 과거사 청산에 관한 대중적 열기가 있었는데도, 미군정은 이 요구를 무시했고, 결국 식민지엘리트는 일제강점기에 이어 대한민국 정부의 지배 세력으로도 자리매김한다.

이들은 대중의 민족주의적 열망에 응답할 수 없는 반민족주의적 지배 세력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지배의 정당성을 끌어내기 어려운 환경에서 시민종교를 강제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이 한국전쟁이었다.

식민성과 전쟁의 상흔 속에서 식민지엘리트가 주도한 한국의 시민종교는 민족주의, 반공주의, 발전주의, 친미주의, 자유 민주주의라는 5대 교리로 발현한다. 민족주의는 과거사 청산, 통일 등의 위험한 민족주의가 아닌 스포츠 민족주의로 대변되는 건전한 민족주의로 변모하고, 반공주의는 전쟁을 통해 대중의 몸 속 깊이 자리하게 되며, 근대화·경제발전으로 나타나는 발전주의 역시 전쟁이 만든 절대 빈곤 속에서 각인되고, 식민지엘리트의 생존 자구책에 불과했던 친미주의 역시 전쟁을 통해 내면화되고, 자유 민주주의는 북한 체제에 대항하는 허울의, 명목의 교리로 작용한다.

한국의 시민종교는 전쟁을 통해 반공주의를 중심으로 재편된다. 이 책에서는 48년 체제 전후 한국 시민종교의 형성기를 주로 다룬다. 지배 세력이 구축한 한국 시민종교의 5대 교리는 국가에 의해 전사자 숭배, 각종 기념물, 행사 등을 통해 성스러운 가치로 변모하고, 그 안에서 교리의 수호자와 이탈자를 구별해 성과 속, 포함과 배제의 기준으로 작용하며 폭력을 정당화하게 된다. 이 책은 한국 현대사 특유의 폭력성도 이런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1. 핵심: 이 책, <세월호 이후의 사회과학>은 세월호 참사와 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 사회를 다룬 학제 간 연구서로 철학, 사회학, 역사학, 정치학, 법학, 문화학, 신학, 인지신경과학에 이르는 다양한 분과학문을 가로지르며 세월호 사건을 조명하는 책입니다. 이를 통해 이 책은 세월호 이후를 준비하는 사회의 연대를 정치하게 학문적으로 지원하는 목표를 가지고 저술된 책입니다. 또한 이 책은 이전의 역사적 유산, 대표적으로 5․18 진실 규명운동의 역사성과 성과를 염두에 두며 책을 집필했다고 합니다.

2. 저자: 이 책은 제가 소개한 세월호 저서 중에 가장 다양한 필진이 참여한 책으로, 14명이 공동집필했습니다. 이 책의 필진은 분과 학문적 다양성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신/구 연구자가 다양하게 참여했다는 점에서, 또 학교에 소속된 연구자와 대안연구공동체에 소속된 연구자들이 다양하게 참여했다는 점에서 또 가치를 지니는 것 같습니다.

3. 내용: 이 책은 각각 3부, 14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각 장을 소개해드리긴 어려울 것 같고 큰 주제를 중심으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우선 각각의 부는 고통, 국가, 치유를 키워드로 합니다. 참사의 고통을 다룬 1부에서는 세월호 참사가 야기한 사회적 고통이 사고-보상 프레임과 세월호의 사건성을 부인하려는 상황을 통해 은폐, 축소, 왜곡되는 과정을 비판적으로 살핍니다. 이를 통해 피해자가 사물화되는 과정을 지적하고, 이런 분석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의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정치적 애도는 어떻게 가능한지 모색하고 있습니다.

국가를 다루는 2부에서는 세월호 참사의 사회정치적 의미와 이것을 가능케 한 역사적 조건을 다양한 수준에서 분석합니다. 세월호 참사는 배의 침몰,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 사건을 은폐, 축소하는 것이 결합된 사건이고, 또한 이 부분에서는 이런 사회정치적 조건 속에서 반복되는 사고의 작동방식과 신자유주의적 통치성, 분단체제의 내면화, 교육에서의 안전불안증 등의 주제로 세월호 참사와 참사 이후를 심층적으로 분석합니다.

세월호 이후의 치유의 문제를 다루는 마지막 3부에서는 세월호 참사의 진실 규명 및 안전 사회, 재발방지를 요구하는 사회적 연대, 피해자의 정치적 주권화, 사회구조의 변화 등의 총체적인 수준의 전환만이 세월호 문제의 사회적 치유를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배(보)상, 피해자와의 연대와 지지, 기념과 추모, 치유와 회복 등의 다양한 문제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4. 감상: 책에서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인 이재승 선생님은 세월호 사건을 ‘국가범죄’로 명료하게 정의합니다. 이 참사는 국가가 생명 안전의 의무를 외면/회피하고, 기업의 부패와 결합한 ‘국가·기업 범죄’이고, 해경 및 구조 본부의 조직적인 부작위는 전형적인 국가 범죄이며, 참사 이후 정부와 여당(당시 새누리당, 현재 미래통합당)의 희생자 모욕과 부인은 ‘참사 후 국가 범죄’로 ‘국가·사회 범죄’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소개한 <세월호가 묻고 사회과학이 답하다>, <세월호가 우리에게 묻다>는 비교적 객관적 관점에서 세월호 참사를 다루는 사회과학적 접근인 반면, <세월호 이후의 사회과학>은 보다 적극적인 관점에서 서술된 책이니 참고하시기 바라겠습니다.

세월호 6주기를 맞이하며 홍준표 씨는 “세월호는 해난사고일 뿐, 정치에 이용마라”라는 식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난번 말씀드렸듯, 세월호 참사는 다양한 사회적 의미를 갖는데 이 사고는 국민이 국민의 안전, 생명, 재산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권리를 양도한 국가가 국민의 생명, 안전, 재산을 지키지 못한 사건입니다. 안보는 안전보장의 준말인데, 세월호 사고는 ‘안보’ 문제이기도 합니다. 한국은 북한 때문인지 안보를 군사적 적대로만 이해하는데, 세월호 사고 역시 안보 문제입니다. 그리고 보수주의를 참칭하면서도 안보 문제가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부인, 왜곡, 축소, 은폐하는 보수주의자는 사이비 보수주의거나 자기 철학도 모르는 머저리거나 둘 중 하나일 겁니다.

1. 핵심: 이 책, <국가 이성 비판>은 세월호 참사 이후 국가를 어떻게 볼 것인지, 국가를 성찰하는 기회를 갖는 책입니다. 국가의 실상은 어떻게 되는지, 국가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국가는 어떻게 주술화 되었는지, 또 이런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하는지를 다루는 책입니다.

2. 저자: 김덕영 선생님은 제가 존경하는 사회학자입니다. 정말 대체불가능한 작업을 하시는 분이시죠. 김덕영 선생님에 관해서는 따로 포스팅을 한 적도 있으니, 2019년 12월 18일 포스팅을 참조하시길 바라겠습니다.

3. 내용: 이 책은 총 4장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먼저 1장에서는 한국의 모습을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종이 국가(페이퍼컴퍼니를 비유), 키클롭스 국가(신화의 괴물), 마름 국가(재벌과의 유착), 콤플렉스 국가(친미·반공 콤플렉스)로 규정하면서 한국이라는 국가를 설명합니다. 이는 국가의 현상학인 겁니다. 2장에서는 국가의 계보학을 다룹니다. 여기에서는 한국은 왜 이런 모습이 되었는지를 역사적으로 살핍니다. 김덕영 선생님은 시간 순으로 친일에 기반한 반공·친미적 비자주적 국가, 연고주의(지연·학연 등의)에 기반한 비보편적 국가, 재벌과의 동맹에 기반한 비사회적 국가, 기능적 미분화에 기반한 비근대적 국가로 한국 근대국가의 발전을 설명합니다.

*기능적으로 미분화되었다는 것은 사회의 다양한 영역(정치·경제·문화·예술·종교·교육·학문)이 고유의 가치와 고유의 논리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고유의 역할을 하지 못하거나 정치, 경제와 같은 한 영역에 종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정치영역은 또 입법, 사법, 행정으로 나뉘고 각자 고유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행정부와 사법부가 유착을 한다면 그것은 미분화된 사회인 것입니다.

3장에서는 국가가 국민 그리고 개인이 자신의 역량을 파악하고 의식하지 못하도록 국가 자체를 주술적으로 믿고 신뢰하고 애국하게 하는 ‘국가의 주술화’ 문제를 다룹니다. 여기서는 중심적으로 경제·국가주의적 주술을 다룹니다. 한국은 개인의 의미, 생명, 존엄보다는 경제발전이라는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선진국은 곧 개인소득 4만 달러로 상상되는 경제주의적 주술에 빠져있음을 말합니다. 또 한국은 개인보다는 집단, 집단보다는 국가를 먼저 생각하는데, 이는 국가주의적 주술화로서 이를 통해서도 개인은 말살되죠. 이어서 책은 당시 이슈가 되었던, 국정교과서와 국립국어원의 언어 정의를 통해 생활에 깊게 뿌리잡은 경제·국가주의의 모습을 분석합니다.

4장, 국가의 탈주술화에서는 경제·국가주의적 주술화의 대안을 모색합니다. 근대화는 단순히 경제가 성장하는 과정이 아니라, 정치·법·경제·과학·예술·윤리·종교·교육·가족·생태·에로스 등의 다양한 사회·삶의 영역이 변화하는 과정을 의미하는데, 이를 통해 볼 때 경제는 광범한 과정의 한 부분임을 자각할 수 있습니다. 또 사회의 다양한 영역의 가치가 존중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래서 경제에서 사회로의 인식 전환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 국가에서 개인으로 전환함으로써 국가주의를 탈주술화 할 수 있는데, 세월호 참사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생명과 존엄보다는 국가의 위신과 명예를 중시하는 당시의 분위기를 지적하며, 국가의 개인이 아닌 개인의 국가를 지향하며, 인류로서 개인을 성찰할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4. 감상: 저는 김덕영 선생님의 거의 전집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선생님이 이런 책을 쓰셨다는 게 흥미로웠습니다. 원래 이런 작업을 안 하시는 분이 얼마나 애통하면 이런 작업을 하셨을까 싶은 겁니다. 파토스가 절절한 책입니다. 김덕영 선생님을 모르시는 분은 김덕영 선생님이 악성 국까(?)라고 느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 정도로 비판의 수위가 세고 다른 책에 비해 주관적인 평가가 많은 편입니다. 다수 사이에서 단 한 번 뵌 것이 전부지만 김덕영 선생님의 이런 비판 안에는 한국이라는 국가보다는 한국사회의 구성원, 개인에 대한 애정이 기반이 된다는 걸 아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김덕영 선생님의 다른 작업에 비해 현실적인 이야기가 많기도 해서 김덕영 선생님의 작업을 이해하는 데에도 좋은 것 같고, 무엇보다도 세월호 참사로 인해 드러난 국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 핵심: 이 책, <세월호가 우리에게 묻다>는 세월호 참사가 한국사회에 제기한 문제에 답하는 책입니다. 이 책은 구체적으로 세월호 참사가 왜 발생했는지, 또 세월호 참사의 성격이 지난 선박 침몰사고나 한국의 각종 재난의 되풀이인지, 이 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공공성’의 측면에서 분석하는 책입니다.

2. 저자: 이 책은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에서 기획한 책으로, (아마도 )사회학을 전공한 8인의 사회학자를 중심으로 집필된 책입니다.

3. 내용: 이미 소개한 <세월호가 묻고 사회과학이 답하다>가 세월호 참사를 사회과학 분과에서 다각적으로 탐구했다면 이 책은 세월호 문제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공공성의 문제로 전환시켜 재난을 대처했던 국가의 사례를 통해 한국은 어떤 대안을 구축해야할지 고민하는 책입니다.

책은 총 8장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이는 3가지로 분류될 수 있을 겁니다. 1-3장은 세월호 참사의 일반적인 분석과 책의 초점이 되는 공공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4-7장에서는 각각 일본(후쿠시마 원전 사고), 미국(카트리나 허리케인 자연재해), 독일(탈핵 결정과정), 네덜란드(대홍수와 재발방지 대책)의 사례를 통해 재난과 공공성의 관점에서 재난에 대처하는 국가별 사례를 소개합니다. 그리고 끝으로 8장 세월호와 같은 사회적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결론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4. 감상: 이 책 역시 세월호 참사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파악하는 데에 유익한 책입니다. <세월호가 묻고 사회과학이 답하다>는 6명의 필진이 각자의 이야기를 했다면, 이 책은 8명의 필자가 재난과 공공성의 측면에 초점을 맞춰 하나의 통일성 있는 이야기를 이어나간다는 데에 차이점이 있고, 해외의 사례를 깊이 소개한다는 점에서도 구별됩니다.

인상 깊었던 내용을 몇 개 얘기해보겠습니다. 책 1장에서는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원인을 추적하며 왜 이 사건이 이렇게 발생했는지를 13가지 질문을 통해 묻는데 질문 하나하나가 쉽지도 않고 세월호 참사에 관여한 사회의 많은 부분을 설명하게 해줍니다. 또 2장에서는 세월호 사고가 과거형 사고임을 말합니다(일부 앞의 책과 중첩되지만). 한국은 이전에 있었던 서해페리호 침몰사고, 삼풍백화점 사고 등의 재난 문제에서 대책이 제대로 세워지지 못했고 세월호 사고 역시 그 맥락 속에 존재하는 반복이자, 고질적 문제임을 지적합니다. 더불어 3장에서 다루듯, 한국은 공공성 인식이 OECD 국가 중에 매우 낮기 때문에 문제가 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공성이 제고되어야함을 이야기하죠. 원론적이고 재미없는 제안이지만 각자도생과 생존으로 긴박한 한국에서 그만큼 지난하고 중요한 문제일 겁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른 국가의 사례를 통해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게 됩니다. 일본과 미국의 사례는 양면적인 교훈, 긍정적 유산과 부정적 유산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과 미국의 영향이 강한 한국인만큼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탈핵을 위한 독일의 40여 년의 문제해결, 그리고 1953년의 대홍수 이후, 이 과거형 재난을 통해 미래의 재난을 끊임없이 문제화하고 방지 대책을 세우는 네덜란드의 사례는 모범적이라 부러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이 책을 보면서 다양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도 저는 아주 미미한 힘밖에 가지지 못한 현실이 가장 답답했지만, 그럼에도 희망하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할 것 같습니다. 재난의 관점에서 코로나19 이후, (현재진행중이라 가변적이지만) 한국의 대처가 모범적 사례로 꼽히는데 사후에는 정부의 정치적 역량, 관료의 역량, 그리고 시민의식을 긍정적으로 평가함과 동시에 한 편으로는 언제나 더 나은, 더 좋은 사회를 꿈꿔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재난이 재발되지 않도록 시스템을 만드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사진에서 볼 수 있듯,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는 이유에는 위로뿐 아니라, 저런 현실적인 이유도 있는 것입니다.

1. 핵심: 이 책, <세월호가 묻고 사회과학이 답하다>는 세월호 참사라는 사회적 사건이 제기한 한국사회의 문제에 사회과학이 답하는 책입니다. 다양한 사회과학 분과(사회학, 인류학, 정치학, 지리학)의 저자들이 각각의 관점에서 세월호와 관련된 사회현상을 분석하는 책입니다.

2. 저자: 책의 저자는 총 여섯 명입니다. 저자들은 이재열, 홍찬숙(이상 사회학), 이현정(인류학), 강원택, 박종희(이상 정치학), 신혜란(지리학)으로 구성돼있고, 다 서울대학교에 소속을 두고 계신 학자 분들입니다.

3. 내용: 총 6장인 이 책은 다양한 관점에서 세월호 참사와 참사가 만들어낸 사회를 분석합니다. 1장 “세월호 참사, 시스템 이론으로 본 원인과 대책”은 참사의 문제를 시스템(체계) 차원에서 분석함으로써 다양한 측면에서 참사의 원인과 구조 실패의 원인을 분석합니다(사진 2, 3). 2장 “위험사회와 정보유포매체와 세월초 참사의 ‘국민재난’ 되기”는 울리히 벡, 루만, 벤야민 등의 사회이론가의 대중매체에 관한 논의를 기반으로 한국사회에 적용해 이 참사가 이를 어떻게 재난으로 만들었으며 어떤 정치적 주체를 만들어냈는지 분석합니다. 3장 “세월호 참사와 사회적 고통: 표상, 경험, 개입”은 인류학의 관점에서 세월호 참사가 야기한 고통의 중층적인 성격을 분석하며 무엇이 고통을 가속화했는지 파악합니다.

4장 “사회적 이슈와 정치갈등: 세월호 사건을 중심으로”는 한국의 강력한 대통령제와 승자독식형 양당구조라는 거시적 측면에서 세월호 참사가 정치적 갈등으로 점철되었는지를 분석합니다. 5장 “왜 세월호 참사는 극단적으로 정치화되었는가? - 재난정치의 딜레마”에서는 재난정치 이론을 바탕으로 세월호 참사가 극단의 정치로 탈바꿈하게 된 과정을 분석합니다. 마지막 6장 “기억의 영토화: 세월호 기억공간의 형성 과정을 사례로”에서는 단원고의 기억교실, 광화문 광장, 제주 기억공간을 중심으로 세월호를 둘러싼 기억의 형성과 공간의 상호작용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4. 감상: 개인적으로는 1, 3, 4장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1장에서는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 세월호 사건을 심층적으로 분석하는데, 이것을 통해 과잉정치화 되었던 당시의 사건의 원인분석에 한층 더 다가갈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여기서 이론으로 사용하는 ‘숙성형 사고(incubated accidents)’는 위험한 상황이 안전으로 인식된 상황이 누적되며 발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사가 풀렸는데도 아직 떨어지지 않은 선반을 안전하다고 인식하는 순간 그것이 언제 떨어져서 사고로 이어질지 모르는 것처럼. 저자가 말하듯, 희생양을 찾기보다는 사회개혁을 준비하는 토대가 마련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3장에서는 인류학 작업으로 세월호 참사와 관련하여 유가족을 위해 활동했던 필자의 시선이 인상 깊었습니다. 세월호와 관련된 피해자의 고통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심층적으로 그려냅니다. 언론은 생존자에게 “친구가 죽은 거 알아?”라고 묻는가하면 안산을 “노동자 계급의 도시, 외노자의 도시”로 정체화해서 고통을 가중시켰고, 또 정치와 유가족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있었던 전문가의 개입(방문해서 ‘자살하고 싶냐’ 묻는 심리치료사 등)이 고통의 원인이 됨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역시 앞으로의 재난에 있어 재발방지를 위해 고민할 문제일 겁니다.

5장은 세월호의 극단적 정치화(당파적 정치화)가 책임을 전가하는 정치세력과 행정부의 문제 같다는 결론을 내리는데 이제와서야 이게 진실인 게 밝혀졌습니다. 여기서의 담론 분석은 당시의 여당인 새누리당(현 미래통합당)이 어떻게 문제를 정치화시켰는지 보여주며 자신들의 잘못을 덮으려 피해자를 어떤 의미의 공간에 가둬뒀는 지 알 수 있습니다(사진 4).

책은 논문모음집이다보니 쉽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렇게 어렵지 않아 일반적인 독자분도 충분히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여전히 세월호가 현재진행형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잘못의 경중이 분명하지만, 문제를 확대해보면 저 역시 일부의 방조자가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일상적 안전에 대한 관심이 세월호를 추모하는 한 방법일 것이라고 여전히 생각하고 사고의 원인분석과 재발방지 대책이 제대로 이루어지길 진심으로 바라는 바입니다.

사회학자 김덕영

1. 김덕영의 약력

여러 번 소개드린 적 있습니다. 김덕영 선생님은 한국에서 사회학 학부를 졸업하시고, 독일에 건너가셔서 베버를 주제로 고전사회학의 명문인 괴팅엔대학에서 사회학 석사·박사, 그리고 독일 카셀대학에서 교수자격논문인 하빌리타치온을 획득하십니다. 현재 독일의 카셀대학에서 재직중이시죠.

선생님의 교수자격논문은 『게오르그 짐멜과 막스 베버(Georg Simmel und Max Weber)』라는 이름으로 독일에서 출간되었고, 이를 통해 선생님의 작업은 독일에서도,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학술작업이 됩니다. 예를 들어 한국의 경우로 생각한다면, 한국과 상관없는 한 나라에서 유학 온 외국인이 다산 정약용을 주제로 석사·박사·교수자격논문까지 작성하고 그 작업이 한국 다산학회에서도 인정받는 유의미한 작업이 된다, 이런 것인데 실질적으로는 이것보다도 어려운 작업일 겁니다. 베버에 관한 연구가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2. 김덕영의 문제의식

사회학 이론, 그 중에서도 사회학사의 단 한 사람인 베버의 이론을 심층까지 연구하신, 그러니까 서구 사회학의 한 고봉의 정점에 도달해보신 선생님의 문제의식은 의외로 순수 이론에만 있다기보다는 ‘한국적 사회학 이론’을 향하고 있습니다. 막스 베버는 사회학의 창시자로 볼 수 있는 오귀스트 꽁트·허버트 스펜서·칼 마르크스 등이 가졌던 ‘총체적 사회’ 개념을 ‘사회적인 것(das sozial)’인 ‘사회적 행위’로 해체시킵니다. 베버에겐 총체적 사회도 사회개념도 없었고, 그는 “사회를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사회적 행위로 끊임없이 환원해야 한다”라고 합니다.

베버의 이런 문제의식과 함께 국가주의에 긴박된 한국사회에서의 경험을 통해 김덕영 선생님은 한국의 집단주의와 개인의 문제, 국가의 탈주술화와 근대의 표지인, 분화·개인화·세속화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복수의, 근대성‘들’에 의거해 근대의 보편성(서구 사회학 이론), 이에 대한 정치(精緻)한 번역·연구, 즉 토착화를 통해 한국사회 경험적으로 연구한 결과로 근대의 특수성(한국 사회 연구)을 탐구하자고 주장하십니다.

3. 김덕영의 기획

이를 통해 선생님의 기획은 2가지 작업이 병행되는데, 그 한 축은 근대성 보편성에 관한 제대로 된 탐구로 서구 사회학 이론의 거장들은 번역·연구하는 작업이고, 다른 한 축은 그런 학술작업을 통해 한국사회(근대의 특수성)를 분석하는 것입니다.

1) 사회학 이론: 사회학 이론 작업으로 김덕영 선생님은 베버에 관한 번역서를 준비 중이시고, 『사회의 사회학』이라는 사회학사를 편찬하시죠. 여기서 다루는 꽁트·스펜서·마르크스·조지 허버트 미드·뒤르케임·짐멜·베버·알프레드 슈츠·파슨스·엘리아스·부르디외·하버마스·니클라스 루만까지 이상 14명에 관한 연구서를 계획 중이십니다. 이순(耳順)에 20년 이론기획을 한 것이 저 기획이고, 그 첫 단추가 올해 나왔던 『에밀 뒤르케임: 사회실재론』인 것이죠.

2) 한국의 근대성: 한 편으로 김덕영 선생님은 한국의 근대성에 관한 경험적 연구를 진행하시죠. 그 성과물이 환원근대-루터와 종교개혁-에리식톤 콤플렉스로 이어지는 작업물들입니다. 서구 사회학에 관한 정교한 이론틀로서 한국 사회를 경험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은 중세인 루터를 통해 유럽에 싹튼 근대성을 보았듯, 아마 정약용을 통해 그가 왜 근대의 맹아를 틔우지 못했는지에 관한 증명을 하는 작업을 기획중이십니다.

김덕영 선생님의 작업에 관심있으신 입문자분들께서는 『환원근대』, 『에리식톤 콤플렉스』가 경험 연구이며,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루기에 이 둘을 우선적으로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2010년대 중반 한국 사회학의 탈종속 문제제기를 한 김경만의 저작

한국 사회학의 탈식민/종속성 논쟁이란, 한국사회학이 서구 특히 미국사회학의 정신적 식민지라는 문제의식 속에서 이것을 탈피하고 “자생적이고 한국적인 사회학을 추구하고, 사회학을 토착화 하자”는 하나의 주장으로 오늘은 이 문제를 다룬 최근의 논쟁을 다뤄봅니다.

사회학계에는 ‘서울대-미국박사는 성골, 서울대-비미국박사는 진골, 연고대-미국박사는 6두품’이라는 식의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떠돌곤 했습니다. 『지배받는 지배자』는 앞선 이야기를 전면적으로 다루는, 미국유학을 통해 이루어지는 한국 엘리트의 형성을 추적하는 책으로, 한국과 미국을 교차해 미국학계의 우월성에 압도되며 동시에 미국문화에서 주변자로 소외되는 미국 유학생들이 한국에 와서는 미국 출신이라는 점으로 우월한 엘리트가 되는, 즉 (미국의) 지배받는 (한국의) 지배자의 탄생 과정을 추적하며 한국학계에 중심부를 차지하는 엘리트 사회에 문제제기를 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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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은 날선 비판이 담긴 책인 동시에 이어 다룰 책의 기준이 되는 책이기도 합니다. 김경만 선생님은 서구사회학의 탈종속성, 탈식민성을 강조하며 ‘한국적 사회학’을 주장한 원로 스타급 학자들을 실명비판하며 그런 것은 없고, 주변부에서 학자생활을 시작했지만 이제는 학자적 능력을 인정받아 자신의 책이 미국‧캐나다 대학의 사회이론 교과서로 채택되고, 기든스, 바우만, 제프리 알렉산더 등의 세계적 1급 사회학자들과 논쟁하고 공동작업을 하게 된 자신처럼 한국사회학도 한국이라는 로컬지식장이 아닌 글로벌지식장에서 세계적인 학자들과 경쟁하며 권위를 얻어야 세계적 수준의 학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김경만의 문제제기에 『응답하는 사회학』은 다른 해답을 내놓습니다. 그러니까 학자들의 세계에 갇혀 학술지에서 논쟁하고 권위를 얻는 사회학이 아닌, 예술/인문학/문학으로서의 사회학을 다시금 초청하며, 지금 주변의 삶의 자리(로컬)에 ‘응답하는’ 사회학을, 그럼으로써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도록 돕는 사회학을 제안합니다. 이를 위해 저자 정수복 선생님은 인문학적 사회학은 무엇인지, 또 응답하는 사회학자의 삶과 응답하는 사회학을 했던 한국 사회학자들의 책을 다루며 책을 마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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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사회학』 역시 김경만의 문제제기를 언급합니다. 저자 김덕영 선생님은 김경만의 문제제기에 공감을 합니다. 사회학 자체가 근대의 결과물이기에, 서구/한국의 대립은 무의미하고 전통/근대의 구별이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김경만 선생님의 주장과 그가 이상으로 꼽는 부르디외는 세 가지 차이가 있는데, 부르디외는 세계사회학이 아닌 프랑스를 연구했고, 글로벌 지식장이 아닌 프랑스 지성계에서 활동했고,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공부했다는 점을 지적하십니다. 그렇기에 김덕영 선생님의 해법은 근대의 보편성과 특수성의 결합으로 한국 사회학을 구축해야하는데, 이것은 서구 사회학을 넓고 깊게 연구하며 기본적 훈련을 하고, 사회학의 고전을 번역‧연구함으로써 서구 사회학을 토착화하고, 이를 모국어로 읽으며 지적시야를 넓히고 이를 통한 제대로 된 한국사회의 경험연구를 통해 한국적 사회학 이론을 추구해야 된다고 보십니다.

저는 각자 선생님께서 다 맞는 말씀을 하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김덕영 선생님의 입장을 공감하고 지지하지만요. 여담으로 부르디외는 『지배받는 지배자』에서 이론의 근거로,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에서 글로벌 지식장을 장악한 극복의 대상이자 분석틀로, 『응답하는 사회학』에서 응답하는 사회학자로서, 『사회의 사회학』에서는 그의 학술세계를 통해 지향할 사회학의 방향으로 다뤄집니다.

1. 핵심: 김덕영 선생님은 단적으로 한국의 자본주의 정신은 박정희(국가)가 주조하고, 정주영(기업)이 구현했으며, 한국 개신교가 성화(聖化)시켰고 이 상징의 정점에는 산업개발·현대출신·장로 ‘이명박’이 있다고 하십니다. 한국 자본주의의 정신은 책의 제목인 ‘에리식톤 콤플렉스’로 규정되는데, 이는 그리스신화에서 걸신이 들려 영원한 배고픔에 빠져버린 에리식톤의 지칠 줄 모르는 허기가 한국의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겁니다. 에리식톤(한국 자본주의 정신)을 만들어낸 기아의 여신 리모스(국가·재벌·교회)를 탐구하는 것이 주제입니다.

2. 저자: 이 책은 김덕영 선생님께서 이론없는 사회학을 비판하시면서 이론을 통해 한국사회의 근대성을 분석한 <환원근대>(근대화의 다양한 영역이 모두 경제로 환원되고, 근대화의 주체도 시민이 아닌 국가와 민족으로 환원된 근대성), 그리고 루터와 종교개혁을 통해 서구 근대의 시원(始原)에 관해 다룬 <루터와 종교개혁>의 연장선에 있는 연구라는 점을 기억하시면 좋으실 것 같고요, 저 책들을 읽지 않으셨어도 이 책을 읽으시는데 무리는 없습니다만 읽으시면 더 풍성하게 책을 보실 수 있으실 것 같습니다.

3. 내용: 한국사회의 근대화와 근대성에 관한 고찰이 목적인 이 책은 강박적 성장에 긴박된 한국의 자본주의 정신을 탐구합니다. 준선진국에 되었음에도 여전히 배고픈 이명박은 ‘에리식톤 콤플렉스’의 전형이며, 허기의 근원은 국가·재벌·개신교입니다.

서론의 가설을 사회학·계보학적으로 논증하기 위해 1부(사회학), 1장에서는 연구의 기반이 되는 막스 베버의 자본주의 이론을 간략하게 설명합니다(+프로텐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관한 요약으로 매우 훌륭해요). 그리고 여기서는 ‘자본주의 정신(자본주의적 경제체계를 특정한 방식으로 채색하고 추동하는 의식, 사고방식, 윤리규범, 행위유형, 생활양식, 사회관계를 포괄)’이 연구대상임을 구체화하죠. 이어지는 2장에서는 한국 자본주의와 그 정신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본격적으로 탐구합니다. 역사적인 사료를 가지고 식민근대 시기의 자본주의를 다루고, 한국 자본주의 정신이 만들어진 1960년대 이후의 국가-재벌 동맹자본주의의 탄생을 그려내고 이를 통해 한국 자본주의 정신의 개념을 구성합니다.

계보학으로 이어지는 2부에서는 가진 연구의 한계로 인해 국가·재벌·기독교를 다 다루지 못해 박정희·정주영을 중심으로 다루고 개신교에서는 조용기를 중심으로 다루기는 하지만 그만 본격적으로 다루지는 않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한국 자본주의 정신의 지대한 영향을 미친 박정희와 정주영에 관한 케이스 스터디가 진행되고, 순서대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됩니다. 개신교는 경제주체가 아니기에 국가-재벌 동맹자본주의를 정당화하고 신성화하며 그 자체가 국가를 통해 기업화되며 성장하는 과정을 추적합니다. 이것이 책의 중심이고, 맺음말을 통해서는 간략하게 해결책을 논합니다.

5. 느낀점: 이 책의 경우에는 김덕영 선생님이 서론에서 한계를 밝히시듯, 아직은 완성된 이론이기보다는, 앞으로의 연구를 위한 예비적 고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여러 사람들에게 읽히고 논쟁되고 비판도 받으며 보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한국 자본주의는 보통 맑스주의에서 규명하곤 했는데, 베버를 통한 한국 자본주의 정신의 규명이라는 데에 큰 의의가 있을 거라고 보고요, 저는 참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 『오월의 사회과학』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한국 사회과학의 한 성과이다. 이 표현은 나의 말이 아니라 서울대 사회학과의 김홍중 선생님의 표현이고, 대전대 정치학과의 권혁범 선생님 역시 이 책이 수작이라고 평가하셨고, 이 책을 언급하셨던 많은 분들 역시 그렇게 말씀하곤 했다. 저자 최정운 선생님은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로 광주항쟁에 대한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 작업을 진행하셨고 이 작업을 사회과학에서 광주를 다룬 고전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책은 오월 광주의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책이 아니라, 광주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실을 사회과학 이론을 통해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그렇기에 적어도 앞서 소개한 『5월 18일, 광주』나 이후 소개할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와 같이 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다룬 다른 책을 먼저 보고 읽어야 좋은 책이다.

책은 총 4부로 이루어졌다. 우선 1부, “폭력과 언어의 정치: 5·18 담론의 정치사회학”에서는 광주항쟁 둘러싼 다양한 담론(폭도론, 불순 정치집단론, 유언비어론, 과잉 진압론, 민중론, 민주화론, 혁명론 등)의 각축을 다룬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여기서는 광주항쟁을 규정한 광주시민과 광주 외부의 담론을 분석한다. 광주 내부의 담론은 생존을 둘러싼 항쟁의 목소리가 민주화의 요구로 변환된, 전쟁에서 공동체로의 변화를 가리키는데, 이런 담론은 그 당시 광주 외부로 나가 광주항쟁의 성격을 규정할 힘이 되진 못했다.

반면 광주 외부의 담론은 신군부가 광주를 폭도, 남파간첩, 고정간첩과 불순분자 등의 폭동으로 규정한 것을 가리키고 이것이 한동안 광주를 규정한 정통이 되었다. 이런 광주에 대한 담론은 학생 운동권에 의해 부활하고, 이들은 광주항쟁을 민주화운동으로, 광주시민을 운동의 주체인 ‘민중’으로 개념화했고, 이것이 민주화운동과 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진다.

이어지는 2·3부는 광주항쟁의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하는 작업으로, “폭력과 사랑의 변증법: 절대공동체의 등장”, “삶과 진실: 해방광주의 고뇌”라는 제목이 붙었다. 2부에서는 『5월 18일, 광주』에서 김영택 선생님이 논증한 것처럼 광주에서의 학살이 사전에 계획되었다는 데에 무게를 두면서, 신군부가 음모론을 통해 광주항쟁의 주체를 자신과 동등한 권력체로 인식시키려고 했음을 지적한다. 이후에는 광주항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다수의 시민이 시위에 동원될 수 있었던 이유로 민주화 요구, 지역차별, 공동체와 계급구조 등의 이론을 통해 동원의 이유를 설명하고, 그런 목적과 함께 지위, 나이, 성별할 것 없이 구성된 항쟁의 주체를 “절대공동체”로 정의한다.

3부에서는 항쟁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시민군과 일반시민, 즉 항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광주시민과의 분리, 그리고 항쟁 참여에 나섰던 시민의 계급적 차이, 그리고 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시민집단 내부의 온건파와 저항파와의 갈등 등의 문제를 다룬다. 그리고 마지막 4부, “해방광주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해석의 시도와 이론적 문제점”은 일종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5·18이라는 사건을 가능하게 했던 신군부의 폭력의 논리와 광주시민의 저항의 논리를 각각 정리하고, 광주항쟁에 대한 담론을 어느 정도 정리하면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 책은 내가 다 설명하기는 어려울 만큼, 다양한 층위와 관점에서 광주항쟁을 다룬다. 책에서는 지속적으로 광주에서 자행된 공수부대의 폭력이 단순한 폭력이 아닌 전시(展示)폭력임을 밝힌다. 그들은 작정한 듯, 백주대낮에 대검을 가지고 사람을 자르고 찔러서 죽였다. 그건 압도적이고 처절한 폭력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저항의지도 꺾어보려는 의도였다. 당시 일제강점기도, 6·25전쟁도 겪었던 노인은 공수부대의 폭력이 일본 순사의, 공산당의 폭력보다도 잔학했음을 회고한다. 그 폭력을 목도하며 광주시민은 그것을 국가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들은 국가가 아닌 그것에 대항하며 국가를 지키기 위해 애국가를 부르고 시체에 태극기를 두르며 항쟁했다.

이 책은 20년도 더 된 책이다. 지금 보면 몇몇 과도한 해석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5·18을 다룬 고전적 연구임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글항아리> 출판사에서 『포스트 코로나 사회』를 선물 받았다. 사회에 큰 사건이 생기면 그와 관련된 책이 쏟아져 나오곤 한다. 그럴 때 나오는 많은 책은 사실 급하게 준비된 책이고, 내용보다는 이슈에 중점을 두다 보니 보통 질 좋은 책이 되기 어렵다. 사실 『포스트 코로나 사회』의 경우에도 저런 이유로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책을 봤는데, 책 내용이 좋아서 알리고 싶은 마음에 리뷰를 쓴다.

우선 책을 보기 전에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은 필진이었다. 이 책의 필진은 사진에 따로 첨부했듯, 매우 다양한 영역에 종사하는 분들이다. 간호사, 의사, 작가, 사회복지를 공부한 작가, 정신건강 전문가, 보건학자, 신학자, 여성운동가, 한국학자, 수의학의 공부한 가축위생방역 관료, 신경인류학자 등이다. 모든 필진이 각자의 영역에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다.

이러한 다채로운 필진은 내용의 다양성과 깊이를 더한다. 책은 코로나 환자를 직접 간호한 간호사의 경험담, 대구 지역 의사의 경험담, 일본의 코로나 대응, 사회적 약자가 겪는 코로나 이야기, 코로나가 남긴 트라우마의 문제, 단순히 생물학적 질병이 아닌 ‘사회적인 것’으로서의 코로나, 코로나와 자본주의 문제, 코로나와 종교, 코로나와 젠더, 코로나 이후 아시아인 인종차별, 기후변화와 인수공통감염병 문제, 인류와 전염병 등의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다양하면서도 깊이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필진이 가진 각 영역의 전문성 때문일 것이다. 이를 통해 책은 다양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만듦새가 엉성하지 않고 준수한 수준의 이야기로 일관되게 구성되어 있다. 책의 앞부분은 코로나를 몸으로 겪은 체험에 가깝다면 이후는 사회와 체제 수준의 문제를 다루고, 끝에서는 인류와 감염병이라는 본질적인 차원에서 코로나 이후를 다루고 있다. 또 이 책이 유익한 것은 코로나 이후 세계 최고의 선진국이 된 한국 사회에 찬사만 보내기보다는 비판을 견지한다는 데에 있다.

책의 다양한 글 중에서도 나는 두 가지 글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 우선 코로나 19 확진자를 간호했던 김수련 간호사 선생님의 수기가 기억에 남았다. 아무래도 이런 글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 써지는 글이기에 기억에 남는 것 같다. 큰 관련이 없었던 나의 공포와는 다른 생의 감각이자 기억이었을 것이다. 한 편으로는 코로나 19 문제를 사회구조적 문제로 규정하면서, 이것이 총선을 통해 과잉 정치화된 반면, 보건의료체계의 공공성 강화에 있어서는 과소 정치화된 부분을 지적하는 김창엽 선생님의 글은 여러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 것 같다. 박철현 선생님이 쓰신 “사요나라 니폰”의 경우에는 다른 글에 비해 문제의식이나 일관성이 조금은 부족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 부분은 조금 아쉬웠지만 이 글을 포함해도 전반적으로 좋은 책이다.

포스트 코로나 담론을 다루는 책으로는 이 책을 유일하게 읽어봤지만, 내 생각에 『포스트 코로나 사회』는 이 주제를 다루는 책 중에서도 가장 다양하면서도 깊이 있는 책이 아닐까 싶다. 공저인데도 필진 사이에 구심점은 하나도 없는 이런 기획은 전적으로 출판사의 역량일 것이다. 여전히 코로나의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이렇게 필진을 섭외하고 일정 수준 이상의 글을 기획/편집해서, 코로나 19 이후 “국뽕”에 빠진 한국 사회에 포스트 코로나 담론을 정리, 소개함으로써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며 여전히 소외된 것, 개선해야 할 것을 문제화 해준 출판사에 감사의 마음을 전해본다.

음모론과 사회학, 『음모론의 시대』와 곁가지.

이 책, 『음모론의 시대』는 음모론에 대한 문화사회학적 분석이 담긴 책이다. 사회학자 전상진 선생님의 책으로 이 책은 본격적인 학술서적이라기보단 교양서적에 가까운 책 같다. 책에서 음모론은 ‘정치적’ 음모론에 초점을 맞추어 때로는 저항의 불쏘시개이면서 때로는 저항의 분쇄를 정당화하는 음모론의 역설적인 ‘효용’을 분석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책에서 저자는 음모론의 진위를 가르는 심판자가 아닌 음모론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실재들을 다루는 관찰자로서 음모론을 다룬다. 책 자체가 크게 어렵지 않고, 또 많은 예시를 통해 이루어졌기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큰 진입장벽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고, 추천하는 책이다.

오늘은 책 자체보다 책의 프리퀄에 해당할 수 있는, 베버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보려고 한다. 우선 이 책은 베버의 종교사회학, 그중에서도 ‘신정론’을 다룬 이론을 토대로 음모론을 분석해간다. 음모론은 오늘날의 신정론의 모습이기도 하다.

교회용어사전에 의하면 신정론이란, “‘신’(神, 데오스)과 ‘의’(義, 디케)를 뜻하는 두 헬라어의 합성어로서,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고통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을 변호하려는 시도. 일명 '신의론'(神義論)이라고 한다. 즉, 하나님이 존재하시는데 세상이 이처럼 모순투성이인지, 왜 계속 죄악이 맹위를 떨치는지, 그렇다면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 맞는지 등의 문제를 다루는 신학적 입장”이다.

근대 사회를 분석하는 학문적 구상으로서 ‘문화과학’을 제시했던 베버에게 문화과학의 선험적 전제가 되는 조건은 “주관적으로 입지를 정하고 행위하며 이 행위에 대해서 주관적 의미를 부여하는 의지와 능력을 소유한 문화인간”이었다. 베버에게 인간은 “인식의 나무를(선악과) 먹은, 문화시대의 숙명을 공유”하는 인간이다. 이 인간은 본질적으로 끊임없이 ‘의미’를 추구한다.

욕망과 현실, 기대와 결과 사이의 간극에서 인간은 이런 부조화를 견뎌낼 합리적인 의미를 추구한다. 예를 들어 착하게 살면 보상을 받는다고 믿는 사람이 착하게 살아도 보상을 받지 못할 때, 성서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달리 악인이 형통할 때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인간은 이 간극을 견디기 위해 합당한 설명을 필요로 했다. 언제나 고통은 그 자체로서 괴로운 것이 아니라, 이유가 없고 설명할 수 없을 때 그렇듯, 고통과 불평등한 복의 분배는 설명을 필요로 했다. 인간은 행복보다는 의미를 먼저 추구한다. 그런 간극을 설명하는 정당화하는 역할로서 신정론이 작용했다고 베버는 분석한 것이다. 베버는 이러한 합리적 이유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뿌리뽑을 수 없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 책에서는 신정론의 자리에 음모론을 적용한다. 우리가 어떤 고통을 설명할 때, 이전에는 신정론이 그런 역할(동양에서는 업보가 그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을 했지만, 근대 사회에서는 정치 이데올로기와 음모론이 기대와 현실의 간극과 고통을 설명하는 이론으로써 작용하는 것이다. 이 책은 칼 포퍼처럼 음모론을 심판하거나 편집증적 인간의 이야기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잔존하는 종교의 ‘사회적 쓸모’를 관찰한 베버처럼 음모론의 사회적 쓸모와 이것의 사회적 효용을 재밌게 풀어쓴 책이다.

이 책은 세월호라는 비극과 그 사건의 간극 속에서 의미를 추구하며 이를 이해하고자 했던 사회의 분위기에서 쓰인 책이다. 저자는 그 사건을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지만, 그때의 사회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게 글을 쓴 것 같았다. 6년이 지난 오늘 사람들은 오늘날 벌어진 기대와 현실의 간극 속에서 이 사건의 괴리감을 해결할 새로운 책임자과 희생양을 색출하고 있다. 지금의 사회적 맥락에서 이 책을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1925년 11월 19일 - 2017년 1월 9)


소외와 빈곤, 그리고 청년노동



Ⅰ. 서론


근대와 시작된 사회학의 주된 관심 중 하나는 ‘자본주의’라는 주제였다. 대표적으로 사회학을 정초했다고 평가받는 칼 맑스(Karl Marx), 에밀 뒤르켐(Èmile Durkheim), 그리고 막스 베버(Max Weber)의 관심 또한 자본주의와 그로 인한 사회변동에 있었고 그들은 이를 통해 자신들의 업적을 이어나갔다. 구체적으로 칼 맑스의 경우, 그는 자신의 저작 『자본(Das Kapital)』을 통해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설명한다. 그 저작들에서 맑스는 자본가의 이윤은 어디서 오는지, 자본의 유통과정과 자본의 형태변화, 자본주의의 생산과정을 밝힌다(김수행, 2015: 11-13). 이어서 뒤르켐의 경우에도 자본주의를 연구했는데 그의 관심은 보통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분석이라기보다는 근대로 이행된, 자본주의로 이행된 사회의 분업과 병리적 사회현상을 진단하는 일이었다(앤서니 기든스, 2008: 411). 베버는 “우리 근대인의 삶의 운명을 가장 강력하게 결정하는 힘인 자본주의”(막스 베버, 2013: 15)라고 평가하며 자본주의가 근대인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해 평가했다.

이렇듯 ‘자본주의’는 줄 곧 사회학의 중심적인 주제 중 하나였다. 사회학은 자본주의를 탐구하기도 했으며 동시에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삶에 대해 연구하고 서술해나갔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사회적 삶’들은 ‘장밋빛 인생’으로 그리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근대 자본주의로 이행하면서 스스로 합리적인 노동의 형태를 조직한 프로테스탄티즘에게 영웅의 모습을 읽고 있는 막스 베버도 자본주의는 이제 인간의 영향력을 떠나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힘으로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다”(막스 베버, 2013: 365)고 평가하고 있다. 뒤르켐 또한 기계적 연대에서 유기적 연대로 변화된 사회를 이끌 새로운 도덕에 관심을 가졌지만 그의 ‘아노미(anomie)’ 이론을 근대사회의 병리적 현상에 초점을 둔 분석이었다. 이중에도 자본주의의 사회적 모순에 대해 가장 날카롭게 분석한 것은 아마도 맑스일 것이다. 맑스는 소외(Entfremdung) 개념을 통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의 삶의 형태를 보았다. 그리고 이 소외의 개념은 근대사회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데 여전히 유용한 도구이다(앤서니 기든스, 2008: 411).

고전 사회학자들의 분석뿐 아니라 20세기 중반 이후의 사회는 다시금 다양하게 사회학을 통해 포착되기 시작한다. 현대사회학자들 또한 그들의 저작에서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삶의 형태와 그 모순에 대해 연구하고 서술했다. 그 중에 후기 근대(late modern)에서의 새로운 빈곤(new poor)의 양태를 그려낸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의 논의는 지금의 한국사회의 형태와 사회적 삶을 분석하는 데도 여전히 유용한 도구이다.

본 보고서는 칼 맑스의 소외론과 지그문트 바우만의 빈곤에 대한 논의를 토대로 이 논의들을 한국 청년세대에 적용시켜 분석해보고자 한다. 또 이를 통하여 현재 한국의 청년세대들의 소외와 빈곤에 대해 탐구해보고 이에 대한 의의와 결론을 내려보고자 한다.


Ⅱ. 본론


1. 이론적 검토


1) 소외와 빈곤


칼 맑스는 노동에서의 소외가 네 측면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인간은 그가 생산한 생산물에서, 생산의 과정에서, 스스로에게서, 그리고 인류로부터 소외된다.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산출된 대상에서 소외되고, 또 생산의 과정과 생산행위로부터 소외되고, 그 자신에게서도 소외되고, 다른 인간에게서도 소외되게 된다(루이스 코저, 2016: 93-94).

소외에 대한 더 중요한 초점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통제력이 상실된다는 측면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야 한다. 그러나 노동자는 소외로 인해서 “자기 노동생산물을 통제할 수도, 자신의 노동 자체를 통제할 수도 없게 된다”(알렉스 캘리니코스, 2002: 99)는 점이 중요하다. 노동에서 소외를 경험한 인간은 다른 사회적 영역에서도 주체성과 창조성을 부여받지 못할 경향성이 크다. 맑스주의를 비판적으로 계승했다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마르쿠제에 따르면 개인이 합리적인 작업, 노동에 참여할수록 헛된 합리성에 굴복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순응의 역학’이 노동과 작업장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질서에도 확장된다고 보았다. 구체적으로 사무실, 학교, 상점 등의 다양한 생활세계에서도 소외는 이어진다(한국철학사상연구회, 1995: 195).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소외란 단순히 노동자의 작업장의 삶에서만 이루어지는 사건이 아니다. 소외란 사회적 삶에서의 소외이며, 주체성의 박탈이라고 볼 수 있다. 맑스의 인간론으로 보았을 때 인간은 호모 파베르(Homo Faber), 즉 도구의 인간, 작업인이다. 맑스는 역사가 인간의 자기실현 과정이라고 보았다. 역사는 인간의 노동과 생산을 통한 자기창출 과정이다(에리히 프롬, 1983: 40). 이런 까닭에 소외가 증대할수록 인간은 세계창조적 또는 세계형성적 주체에서 박탈된다. 그들은 운명을 스스로 만들 수도 없으며 하루하루 운명을 잠식당해가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요컨대, 소외와 빈곤은 단순히 경제적인 영역에 국한되어서 적용될 수 있는 개념뿐 아니라 사회·문화를 포괄하는 영역에서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2) 후기 근대사회와 새로운 빈곤


이러한 소외·빈곤 논의를 20세기 중반 이후의 현대사회(comtemporary society)에서 새롭게 이어나간 이론가로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사회의 병폐들을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천착해온 사회학자이다. 그의 이론은 후기 근대(late modern)이라는 시대적 진단의 지평 위에서 전개되었다. 먼저 후기 근대라는 시간설정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고전 사회학자들이, 앞서 언급한 맑스, 뒤르켐, 베버 등, 보았던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사회와 20세기 중반 이후의 사회는 변화가 있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근대와의 급격한 단절을 선언했다. 또 하버마스로 대변되는 측면에서는 근대를 미완의 기획으로 판단했다. 이 둘 사이에서 양자를 비판적으로 지양하면서 발생한 이론이 후기 근대론이다. 김홍중(2015: 154-157)에 의하면 후기 근대론은 20세기 중반 이후의 세계가 20세기 초반, 19세기 후반의 세계와 상이한 구성을 하고 있음에 동의한다. 이들은 복지국가의 와해, 금융 자본주의의 등장, 정치적 참여의 쇠락, 이데올로기의 사회동원력 약화,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의 새로운 사회문제에 주목한다. 이들의 주된 입장은 이렇다. 첫 째, 후기 근대는 초기 근대성이 단절된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아니라, 초기 근대가 성숙하고 발전된 재귀적(再歸的) 형태이다. 둘 째, 후기 근대는 초기 근대에 자명하게 여기던 것들이 붕괴와 파산된 상황이다. 셋 째, 20세기 후반의 사회상황을 긍정적으로 인식했던 포스트모던 사회이론과 달리 후기 근대론은 현대사회는 해결해야하는 문제들의 집합으로 파악한다. 정리하자면 후기 근대론적 사회이론은 초기 근대와 달라진 20세기 중반 이후의 세계의 변화를 관찰한다는 측면에서 포스트모던 사회이론과 공유하는 지점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은 극단적 단절이 아니라 근대의 연속성 위에서 현대세계를 파악하고 있다. 그렇지만 하버마스처럼 근대성과 이성을 문제해결의 실마리로 보지 않는다.

바우만의 논의 또한 이런 연결성 상에서 파악해야 한다. 바우만은 복지국가의 와해와 이데올로기의 동원력 약화, 정치참여의 쇠락, 노동시장의 유연화,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라는 특징을 가진 20세기 후반의 사회를 관찰했다. 바우만은 새로운 근대성을 ‘액체근대(liquid modern)’라고 명명한다. 액체 근대는 포스트모던 사회이론처럼 해체적이다. 우선 견고한 사회적 형식들이 소멸했다. 그리고 국민국가(national state)의 기능과 권력이 약화되고 국가기관의 기능들이 외주화된다. 덧붙여 공동체는 액화되어 해체되어 네트워크화 된다. 또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삶이 프로젝트나 에피소드로 분할된다. 끝으로 개인이 이 모든 불확실의 책임을 갖게 된다(김홍중, 2015: 166).

지그문트 바우만(2012)이 펼친 다양한 논의를 보면 어느 정도 중첩되는 부분들이 존재한다. 먼저는 ‘노동윤리의 변화와 생산자 사회에서 소비자 사회로의 이행’이다. 다음으로는 ‘복지국가의 몰락과 사회의 배제’이다. 마지막으로는 ‘새로운 빈곤층의 출현과 이들의 의미변화’이다. 물론 이것들을 작위적으로 구분했지만 이 논의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우만의 논의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자 한다. 첫 번째로 바우만은 노동윤리의 변화와 생산자 사회에서 소비자 사회로의 이행을 이야기한다. 막스 베버의 경우 근대 자본주의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안분지족하는 전통주의적 생활양식이 파괴되고 합리적으로 자신의 노동을 조직화하고 금욕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형태의 노동윤리가 필요하다고 보았다(막스 베버, 2013). 바우만 또한 노동윤리가 근대 초기에 빈곤층을 공장으로 유인하는 원인으로 작용했음을 주장한다. 바우만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근대 초기의 ‘노동윤리’가 ‘소비미학’으로 대체되었음을 주장한다. 사회는 더 이상 생산자를 필요로 하지 않고, 소비자를 만들어 낸다. 소비하는 것이 최선의 것이며 부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 되어버린다(지그문트 바우만, 2012). 소비자를 만드는 사회에서 모든 매체들은 “행복에 이르는 길을 쇼핑”, 소비가 행복임을 주입시킨다(지그문트 바우만, 2014: 71).

두 번째로 바우만은 복지국가의 몰락과 사회의 배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앞서 언급한 소비미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빈곤층은 더 이상 체계에 포용되지 못한다. 초기 근대의 산업사회에서는 그들을 산업예비군으로 명명하며 체계 안으로 끌여들였지만 소비미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들은 쓸모 있는 역할이 주어지지 않는다(지그문트 바우만, 2012: 9). 복지국가는 해체되고 쇠락하고 있다. 결국 국가의 의미는 ‘개인 안전 국가(personal safety state)’정도로 전락한다. 국가는 더 이상 사회적 국가(social state)가 아니며 사회적 삶의 공포로부터 국민을 지켜주지 않는다. 단순히 범죄자로부터 개인의 삶을 지켜낼 뿐이다(지그문트 바우만, 2010a: 29). 고체근대(solid modern)에서 액체근대로의 이행은 이를 더 가속화시킨다. 고체근대는 무거운 자본주의였으며 이들은 상호의존성으로 결합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육중한 공장 안에 자본과 노동을 묶어뒀다. 노동자가 어떤 상태에 있든 그들을 결속시켜 두었다(지그문트 바우만, 2010b: 233). 하지만 복지국가는 해체되었고 이들의 빈곤한 삶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게 되었다. 이들은 이제 체제 밖으로 밀려나 유동하는 공포 속에 부유하는 존재이다.

세 번째로 바우만은 새로운 빈곤층의 출현과 이들의 의미변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앞서 언급했듯 초기 근대의 자본주의는 노동자를 체제 안으로 결속시켰다. 하지만 다양한 사회적 변화로 인해 새로운 빈곤으로서 최하층계급이 발생했다. 이들이 최초로 대중의 관심 속에 드러난 것은 1977년 타임지의 커버스토리를 통해서인데 미디어는 이들을 단지 ‘가난한 사람’, ‘경제적으로 궁핍한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이들은 정상의 범주에 있지 않으며, 이질적이고 통제할 수 없는 ‘배제되어 마땅한’ 존재로 규정된다(지그문트 바우만, 2012: 135). 소비사회에 소비력이 없는 가난한 이들은 배제되어 ‘쓰레기’가 되었다. 실업은 노동윤리를 통해 의미론적으로 비정상적인 삶을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이 잉여로 규정된 것은 그들이 버려져도 무방한 존재임을 나타냈다. 그들은 ‘잉여’, ‘쓰레기’, ‘불합격품’, ‘폐기물’, ‘찌꺼기’와 같은 의미론적 공간을 공유하는 존재이다(지그문트 바우만, 2008: 29-32). 결속들은 해체되기 시작했고 탈규제와 개인화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체제가 끌어안아야 할 존재가 아니다. 계급 바깥에 버려졌고 회생이 불가능하다. 더 이상 재사회화를 통해 정상적인 사회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추방되어야 할 없어져야 할 존재이다. 이들에 대한 배제는 의미론적인 배제 뿐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이루어졌다. 생계수단이 없는 이들은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로 강제로 추방되어 분리구역으로 몰려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제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분리되었다(지그문트 바우만, 2010a: 111-120).



2. 청년세대와 소외와 빈곤


1) 프레카리아트(precariat) 그리고 권위주의와 소외


프레카리아트라는 단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 단어는 ‘불안정한’이라는 의미의 프레카리오(Precario)와 ‘무산계급’을 의미하는 프롤레타리아토(Proletariato)를 결합해 만들어진 조어이다. 이 말은 2003년 이탈리아 거리의 낙서로 시작되어 이제 불안정한 노동을 의미하는 단어로 자리매김했다(아마미야 가린, 2011: 23). 이 프레카리아트라는 단어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분석했던 20세기 중·후반의 세계의 특성과 친화성을 갖고있다. 바우만은 “이제 상황은 변했고, 다방면의 변화에서 핵심적 요소는 ‘장기적’ 마음가짐을 대체하게 된 새로운 ‘단기적’ 마음가짐이다. … 중략 … 최근의 계산에 따르면 보통 정도의 교육을 받은 젊은 미국인은 그의 노동인생에서 최소 열한 번쯤 직업을 바꾼다고 한다. 그 변화와 속도와 빈도는 현 세대의 노동인생이 끝나기 전에 더욱 증가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 오늘날의 슬로건인 ‘유연성’을 노동시장에 적용하면 이는 ‘우리가 알던 일’에 종말이 오고 있다는 것, 대신 계약서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단기계약과 ‘다음번 통고까지’라는 불안정한 지위가 도래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우리의 일하는 삶은 불확실성으로 가득하다.”(지그문트 바우만, 2010b: 237)라고 말했다. 이것이 이 시대 특별히 청년들 노동의 특성이다.

청년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청년세대를 규정하는 다양한 담론지형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는 우석훈·박권일(2007)의 ‘88만원 세대’와 ‘삼포세대’(경향신문, 2011.5.11)가 있다. 이는 모두 2000년대 중반 이후 청년들의 경제적 삶을 특징으로 나타낸 신조어들이다. 삼포세대는 원래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세대라는 의미의 조어였지만 지금 와서 청년들은 너무나 포기할 것이 많아 ‘N포세대’로 불리기도 한다. 이전 한국의 청년세대의 표상이었던 386세대의 주체적이고 참여적인 이미지는 더 이상 청년의 표상이 아니다. 청년들은 스스로를 규정하지 못하며, 단순히 ‘N포 세대’라고 불릴 뿐이다. 청년세대를 규정하는 언어담론의 지형에서부터 청년들은 스스로를 스스로의 성격으로 규정할 수 없다.

비정규직이 다수를 차지하는 청년노동시장에서 갑은 커녕 을도, 병도 아닌 ‘정(丁)’이다. 이들에게 회사에 남아 노동하는 것은 생존의 문제이다. 한 청년의 자기기술을 보면 스스로를 “갑을병정의 정정정정”이라고 평가한다. 그 청년은 자신의 회사에서의 노동에 대해 기술하면서 자신이 갑을병정 중, 정의 위치, 즉 최하위층에 있었는데 어떻게 하다보니 맡게 된 조금 더 높은 지위에 일을 수행하자 같은 정들에게 받은 따돌림을 이야기하면서 정의 세계에도 서열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한다. 또 한국의 자본주의는 유교 자본주의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데 이런 유교적 가부장적 질서는 회사의 사무적 관계에 수직적 서열화를 가속화시키고, 더불어 성(gender)에 의한 가부장적 차별을 심화하는데 이 청년의 자기기술에는 그러한 상황들도 적혀있다. 이 청년은 “업무 처리에 뛰어나고 성실한 사람도, 하루 열여섯 시간씩 일하고도 야근 수당을 받지 않는 사람도 얼마든지 해고 대상자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김송희, 2017: 64-78). 이것을 보면 청년노동은 경제적으로도 최하층이며 동시에 작업장 내에서의 지위도, 사무직, 생산직, 서비스직을 포함해, 낮고 그 안에서 유교적 권위주의와 서열문제로 가장 밑단의 ‘정(丁)중의 정’의 역할을 수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청년세대는 스스로를 규정할 힘도 또 작업장 내에서 스스로의 존재에 참여하기도 어려운 존재의 특성을 지닌다.


2) 노동윤리의 이중성 - 극단화와 이탈


다음으로 볼 청년세대의 특성의 노동윤리의 이중성이다. 청년세대는 노동윤리를 극단적으로 내재화하거나 아니면 노동윤리에서 이탈하는 특성을 보인다. 먼저 바우만의 논의에 따르면 노동윤리는 일하는 삶이 경제적으로 우월하다는 것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함을 내세웠다(지그문트 바우만, 2012: 27). 따라서 청년세대는 한 편으로는 극단적으로 노동에 집착하여 노동하기 위해, 즉 사회의 정상적인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의 행위 능력을 극한으로 이끌어 스스로의 삶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주체로 탄생했다.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의 공간을 채우는 많은 일명 ‘합격 수기’의 이념형(Idealtypus)은 “공부에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을 절제하고”, “명문대 또는 대기업에 들어가고”, “노력하고”, “극적인 성과 성장을 이루는” 모습들을 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들을 가진 합격수기들은 넘쳐나고 사람들은 이를 칭송하는데 여념없다. 특별히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합격에 ‘노력’이라는 가치가 첨가되는 것인데, 이를 통해 불합격한 삶들은 노력하지 않은, 사회적으로 선망의 대상이 될 가치가 없는 삶으로 전락해버린다. 많은 청년세대들은 이런 인식을 공유하고 있으며 이런 삶은 자기계발서의 논리와 유사성을 갖는다. 오찬호(2014: 33-34)는 자기계발 담론은 내면화한 청년세대가 이를 통해 성공한 자기계발서 주인공의 한 사례를 모든 사람이 누구나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일반화시키는 현실을 지적하기도 했다. 자기계발담론은 소수의 극적인 성공 드라마를 통해서 다수가 가진 현실적 조건과 비참함을 정당화시키는 폭력성을 내재한다.

한편으로 청년들은 노동윤리에서 이탈되기도 한다. 이들은 “돈 많은 백수”를 꿈꾼다. 하지만 이것은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노동을 해야 한다는 전제를 공유한다. 그렇지만 굳이 노동하는 삶이 더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청년세대들은 “일은 왜 열심히 해야 하나요”라고 반문하기 시작했다(김송희, 2017: 84). 노동은 소명(Beruf)라고 보다 ‘먹고사니즘’이다. 먹고 살기위해, 또는 소비하고 즐기기 위한 화폐를 모으는 것이 곧 노동이다. 이렇게 내재적으로 공유되는 노동윤리에서의 이탈을 포착할 수 있는 것은 ‘헬요일’ 같은 단어이다. 헬요일은 월요일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말 그대로 월요일은 휴식이 끝나는 지옥(hell)같은 날이라는 뜻이다. 또 ‘월요병’이라는 단어도 이를 지지해줄 수 있다.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월요일에짖는개’라는 닉네임을 가진 유저가 2015년부터 약 2년 동안 일요일 저녁이면 월요일을 알리며 “월월월”짖는 내용의 게시물을 올렸다. 이 게시물은 헬요일, 월요병 등으로 인식되는 월요일을 알리는 내용으로 거부를 해도 오는 월요일을 재치 있게 표현한 형태로 유저들에게 인기를 얻기도 했다.


3) 생존과 일하는 삶, 그리고 잉여


앞서 말한 대로 청년들의 노동윤리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노동윤리에서 이탈하는 현상이 발생해도 소비미학 때문에 청년들은 노동해야 한다는 전제는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생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김홍중(2016: 289)은 한국 근대의 사회적 상상을 자유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화주의, 합리주의가 아닌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에 근접해 있다고 평가한다. 한국 근대의 사회적 상상은 ‘생존주의’와 연결된다. 김홍중(2009)은 이미 현대의 주체들을 ‘육화된 신자유주의의 주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신자유주의는 단순한 제도라기보다 특정한 주체를 생산해내는 일종의 사회적 에토스(ethos)로 작용한다. ‘육화된 신자유주의의 주체’는 생존자로 명명가능하며, 이들의 도덕은 생존주의이다. 이 주체들은 사회·경제·생물학적 생존을 위해 도구적 성찰성을 극대화시키는 존재이다. 이러한 이론적 배경에서 21세기 한국의 청년세대는 “생존에 대한 불안이라는 기조감정과 서바이벌을 향한 과열된 욕망, 그리고 경쟁에서의 승리를 위한 자기 존재의 가능성들을 전략적으로 계발하려는 집요한 계산으로 특징지어지는 독특한, 마음의 역동”을 보여주며, 생존주의를 통해 행위와 실천을 이끌어내는데, 생존주의는 “개인의 인생에서 다양한 퍼포먼스를 통해 자신의 수월성을 증명함으로써, 패배와 그 결과 주어지는 사회적 배제로부터 스스로를 구제하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믿는 21세기 청년들의 세대심”이라고 정의한다(김홍중, 2016: 263). 그들은 스스로 스놉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공격적 생존’과 ‘세속적 성공’을 이루기 위한 적합한 주체의 형태이기 때문이다(김홍중, 2013: 81).

청년세대는 실패하지 않는 삶을 살기위해 노력한다. 정부의 영역과 대중매체는 청년실업 문제에 대해 대대적으로 ‘문제 상황’을 규정하고 있다. 청년들은 당연히 ‘일해야 하는 그래야만 하는’ 존재이다. 이런 사회구조적 압력은 개인의 생활세계(Lebenswelt)에 침투한다. 개인들은 이 문제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의심하지 못한다. 취업하지 못하는 삶은 상상할 수 없는, 상상해서는 안 되는 삶이며 실패한 삶인 것이다. 이것은 취업에 실패한 청년에게는 비정상의 스티그마로 작용한다. 이 실패는 사실 부유한 삶에서의 이탈이나, 정말 괜찮은 삶을 영위하기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생물학적 몸의 생존이 달리 문제이기도 하다. 헬조선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비정규직 일자리라도 구하지 못하는 삶은 사회적 삶에서의 배제와 박탈을 의미한다. 먼저 대기업에 정규직으로 입사한 청년들은 이 위계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고급 공무원과 공기업 공사에 취직한 청년들은 다음 위계이다. 그 밑으로 비정규직 일자리, 사회적 지위와 선망의 대상이 되지 않는 누군가 욕망하지 않는 노동자가 되는 것은 실패이고 생존의 문제가 달린 일이 된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논의처럼 청년들은 스스로의 삶을 ‘잉여’라고 명명하기 시작했다. 『월간 잉여』라는 잡지를 창간한 최서윤(2017: 166-168)은 스스로를 “대한의 ‘잉여’”라고 명명한다. 본인은 산업 역군으로도 쓰일 수 없는 존재이다. 스스로를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평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제가 쇠락하면서, 잉여인력이 급증했고 청년세대는 체념과 자학이 몸에 뱄다. 그런 세대를 위해 잉여에 의한, 잉여를 위한 잡지는 창간했다고 이야기한다. 이외에도 한윤형의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최태섭의『잉여사회』, 가스카 다케히코의『별 볼 일 없는 인생 입문』김상민 등의『속물과 잉여』등의 책은 청년세대와 잉여를 연결시키고 있는 책들이며 이것들이 바로 한국사회의 자기기술의 결과이다. 열악한 노동의 형태나, 신자유주의적 삶에서 이탈한 형태를 잉여라 명명한다.


Ⅲ. 결론 및 한계


이영자(2015)는 프랑스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와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논의를 가지고 현대 자본주의를 분석한다. 그에게 있어 현대 자본주의는 신화이며 독사(doxa)이다. 먼저 신화는 바르트의 개념인데, 이는 자연의 외피, 즉 거짓자연의 옷을 입고 자연으로 위장하여 자연의 본성을 보증한다. 자본주의로부터 파생된 이데올로기와 문화들을 자연스러운 또 초역사적인 것으로 당연시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부르디외에 있어서 독사는 그 인위적 질서를 숙명적인 체계, 사회적 본질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부르디외에게 사회구조는 아비튀스(Habitus)를 통해 생활세계에 침투한다. 독사 또한 자본주의적 질서, 인류 역사에 몇 백년도 되지 않은 역사를 초역사적이고 자연스러운, 생득적인 질서로 오인하게 만든다. 자본주의적 질서와 체계, 문화, 그것이 생성하는 에토스는 생활세계에서 의심할 필요 없이 당연하게 육화된다. 지그문트 바우만 또한 파편화된 개인들의 경쟁이 사회적 선, 공익을 증진시킨다는 프로파간다를 비판하고, ‘사회적 불평등’이 자연스러움이 된 현실을 비판한다(지그문트 바우만, 2014: 11, 87). 지그문트 바우만이 새로운 빈곤에서 지적하듯 자본주의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언어를 잠식하며 스스로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인간은 왜 일을 해야 할까?”, “일하지 않는 삶은 부도덕한 삶일까?”, “현재 한국사회의 질서는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인가?” 이러한 다양한 질문들이 시작되며 성찰이 시작되는 것이 한국 청년세대의 소외와 빈곤 문제에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소외와 빈곤이 너무나 당연한 생활세계를 살고 있는 한국인의 노동자들은 “기이한 환몽”에 사로잡힌 것을 아닐까? 이러한 열정들이 오히려 “생명력을 소진”하고 있지는 않을까? 현실을 문제시하고 성찰하면서 게으를 수 있는 권리와 대안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폴 라파르크, 2014: 27-28).

피에르 부르디외(2002: 1524-1525)는 사회학이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구조를 제대로 인식한다고 해서 그 구조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서술한다. 그러나 사회학이 갖는 사회적 효과가 미미할지라도 사회학의 역할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들로 하여금 고통의 책임을 사회적 원인에서 찾을 수 있게 함으로써 그들의 무죄를 입증”해주고 은폐된 불행의 출처를 드러내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지그문트 바우만(2010b: 343) 또한 부르디외의 앞 선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더 이상 대안이 없다”는 주문을 외우며 양심의 가책을 달래는 것은 그 불행의 공범일 뿐임을 지적한다. 이 또한 도덕적으로 유죄이다. 칼 맑스로부터 시작되어 20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지그문트 바우만을 거쳐 지금 한국의 소외와 빈곤이 현실 속에 이루어지고 있다. “소외는 역사 속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가는 힘없는 사람들의 실천적인 고통이며 구체적인 일상사이다.”(김호기, 1986: 1)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과연 자유주의, 자본주의 문명을 뛰어넘는 사회적 상상이 가능한지 가끔 묻는다. 긍정적인 대답이 나오지는 않지만 이런 삶에 의문을 제기하고 성찰하는 것이 조금의 대안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피에르 부르디외는(2013: 13) 프랑스 국립과학 연구원 금메달 수상 연설에서 사회학은 제국에 대항할 수 있는 하나의 대항권력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연설 끝에 이런 이야기를 덧붙인다.


“마지막으로 성찰성의 원칙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이 말을 빠뜨려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요컨대, 저는 오늘 이 연설의 결과에 대해서 어떤 환상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 연설을 하게 된 상황이 워낙 엄숙하다보니, 저도 엄숙한 어조를 취할 수밖에 없었고, 바로 그 이유로 제 이야기는 실현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희망한다는 것, 그것은 결코 금지되어 있지 않습니다.”


보고서를 쓰면서 한계를 느꼈던 부분은 청년세대의 자기기술을 근거로 경험적인 분석을 할 때였다. 헬조선과 흙수저 담론이 한참 유행하던 시절 웹사이트 디시인사이드 흙수저 갤러리에는 ‘가난그릴스’라는 닉네임의 유저가 생존법을 공유한 적이 있다. 가난그릴스란 생존왕 ‘베어그릴스’를 패러디해 자신의 정글이 아닌 가난 속에서 생존하고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의 생존정보들은 인터넷에 공유되었고, 그 삶은 정말 빈곤하고 소외된 삶으로 그려졌다. 그의 삶에는 취업 같은 단어도 허락되지 않는 것 같았다. 지금의 출간된 청년담론들은 수도권, 인서울대학 출신 대졸자, 활동가, 사무직을 중심으로 기술되어있다. 따라서 정말 배제되고 열악한 환경에 있는 비수도권, 고졸 이하, 생산직, 육체노동자인 청년들의 담론을 이끌어 오기 어려웠다. 루만에 의하면 사회가 생산해내는 다양한 담론들은 복잡한 현대사회가 스스로를 자기관찰하는 형식들이다. 그런데 정말 배제된 존재들의 자기기술을 찾지 못한 것이 아쉽고, 이를 계기로 추후에 관련된 연구를 진행하면 그런 청년들을 사례 기술하는 연구를 진행해보고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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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겨율


모멸감

모멸 권하는 사회와 해법에 관하여


1. 모멸감 요약


모멸감(侮蔑感)이란 무엇일까? 모멸이란 단어는 낯설지 않지만 딱히 익숙하지 않은 단어이기도 하다. 보통의 사람들은 모멸에 대해 막연한 느낌은 받지만 뜻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생각한다. 같은 이름의 ‘모멸감’이라는 책에서 저자인 사회학자 김찬호는 모멸감이란 감정의 사회성과 파괴적 속성에 대해 논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책을 내놓는다. 모멸감이란 모멸스러운 느낌을 뜻하고 모멸이란 업신여기고 얕잡아 본다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일종의 무시·굴욕·모욕을 당할 때 느끼는 감정이라고 한다. 책에서 저자는 사회학자답게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모멸감이라는 감정을 개인의 심리상태에만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감정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소통되는지 그 감정이 생성된 사회문화적 배경과 역사적 맥락을 파악하는 데 노력한다. 특히 한국은 정동적(情動的) 요소가 많은 나라로서 사회에서의 감정의 위상을 강조하기도 한다. 책에서는 모멸감에 대한 연구는 전무하다고 밝힌다. 책에서의 내용으로는 모멸감은 우리사회에서 꽤나 큰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이지만 연구가 전무하다는 것이 참 아쉬웠다. 책은 우선 감정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특히 도미니크 오미시의 감정의 지정학을 예로 들며 이슬람권의 굴욕감이라는 코드는 세계적인 공격성의 발로가 되었다. 이는 상당히 흥미로운 분석이었다. 저자의 말대로 이슬람권은 항상 유럽보다 강한 국가였다. 하지만 근대화 이후 앞서가는 서양에 굴복감을 느끼는 이슬람권의 굴욕감에 대한 논거는 흥미롭다. 다음 장에서는 한국사회의 정서적 지형을 전체적으로 바라본다. 한국사회에서의 감정의 특수성과 문화로 모멸을 풀어나가고 요점은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위신을 확인하려는 문화관성은 있는데 오히려 공동체는 붕괴되며 위태로운 상태에 있는 한국인의 정서지도를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에서는 인간세계의 7가지 방식의 모멸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비하, 차별, 조롱, 무시, 침해, 동정, 오해로 우리사회에 공공연하게 일어나는, 밀접한 사례들을 들어 이를 제시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인간적인 사회’라는 대안을 제시한다. 인간적 사회의 조건들은 품위와 타인에 대한 감수성, 생리·환경적 조건, 개인 간의 유대관계, 시장가치를 넘어선 가치관, 안정의 공동체 등이다. 또 저자는 모멸에 대한 내성을 키울 것은 강조한다. 이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노력이다. 모멸에 대한 내성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를 생각해보길 권한다. 또한 내면이 강해져야 궁극적으로 진정한 자존감의 회복이 일어난다고 보고 있다. 감정에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감정을 운용할 것을 당부한다. 끝으로 맺음말에서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것은 무엇인가, 모멸감에 취약한 까닭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명예와 품위에 대해서 의미를 다시 다져보고 스스로 돌아보고 사회적 안정망을 확충할 수 있는 사회로의 전환과 깊은 내면의 성숙을 가진 개인으로의 전환을 촉구하며 책을 마친다.


2. 한국 정서의 역사적 구성과 모멸감


책에서 작가는 한국의 정서적 상황에서 모멸이란 특수성을 지적한다. 모멸이라는 단어가 다른 문화권 언어에는 생소하다는 점이 주목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언어는 그 사회를 대변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사회는 모멸감에 취약하다. 나는 그 민감한 이유가 체면을 중시하는 사회적인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나는 그 원인을 한국 사회의 정체성과 가장 밀접한 연관이 있는 문화인 유교에서 파생된 성리학 문화에서 찾고 있다. 성리학은 대한민국은 전신인 조선의 500년 통치 사상이었다. 지금은 성리학적 질서가 많이 와해됐다고 한다. 하지만 당장 자본주의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가치인 화폐만 봐도 성리학자만 2명이다. 유교적 관념으로 현모양처인 신사임당도 5만원권의 주인공이다. 모멸감의 저자는 가끔 모멸의 해법으로 유교적 내용을 인용하여 유교적 가치를 제고한다. 하지만 나는 입장이 조금 다르다. 유교는 타종교들에 비해 두드러지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유교 자체의 엘리트주의이고 그것은 큰 폐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유인자(惟仁者) 능호인(能好人), 능오인(能惡人)’이라는 말을 한다. 풀이 하자면 오직 인자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고 또한 미워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유교사상을 풀어나가는 데에 있어 인(仁)의 개념은 중요한 것이다. 공자는 인자, 즉 일정 수준 이상의 사람만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설파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은 불성(佛性 즉 부처의 성품)을 지닌 존재’라고 하며 평등을 외쳤던 불교의 창시자 고타마 싯다르타나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했던 예수의 아가페적 주장과는 상반된 입장에 있다. 유교는 도덕적 타락이 심한 대상을 윤리의 고려범주로 삼지 않는다. 일정 수준 이상의 사람만 사람으로 취급한다. 이것은 유교의 엘리티즘적 특징이다. 이러한 유교의 일련의 수직적 윤리 구조는 성리학으로 수용·심화되며 이기론(理氣論)으로 확장된다. 이기론은 모든 사물의 원리인 리(理)는 같지만 타고난 기질인 기(氣)의 탁함에 따라 물질에 따라 동물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구별 짓기를 불러왔다. 당시 조선사회는 이기론을 사상적 기반으로 양반은 맑은 기질을 상인은 탁한 기질을 타고 태어나 생득적으로 양반이 우월한 존재라는 하나의 헤게모니로 이용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리학과 조선시대 전기와 후기로 갈리는 임진왜란 때의 조선의 사회문화의 변화의 관계이다. 이는 양반들의 정체성 혼란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사회는 성문화(成文化)된 양천제의 사회였다. 양반과 중인 양민을 모두 포함한 개념의 양인과 천민의 구분만이 있을 뿐이지 후기보다는 양반의 권력집중이 낮았다. 하지만 문제는 임진왜란이었다.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은 약 200년간의 황금기를 누린 세대였다. 큰 사회적 문제가 없었다는 뜻이다. 임진왜란은 한국역사에 큰 전쟁으로 조선의 사회상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특히 사회가 피폐해졌고 그 증거로는 언어생활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조선시대 전기만 해도 한글에는 거센소리나 된소리가 없었다. 이런 언어현상이 나타난 것들은 임진왜란 이후에 일이다. 거센소리나 된소리가 들어가지 않은 욕설은 많지 않다. 그리고 당시 절대적인 지배의 상징이었던 왕은 궁을 떠나 의주로 떠났고 지역사회에서 명망 높던 양반들 또한 자기 목숨을 챙기기에 바빴다. 임진왜란으로 통치의 권위를 인정받던 왕과 양반세력들은 권위를 잃었다. 따라서 책에서 언급한 근대 이후 세계사의 주도권을 빼앗긴 이슬람의 굴욕의 코드라든가 마뉴엘 카스텔이 정체성 권력에서 말한 알 카에다 엘리트들의 정체성의 위기가 폭력으로 촉발하는 일들이 조선사에도 일어난다. 조선 후기 17세기 조선의 사회에서 신분제는 동요하기 시작했고 마을공동체의 중심이 되던 양반은 몰락하여 잔반이 되기도 하는 등 큰 변화들이 일어난다. 이러한 경향에 반동적으로 조선 후기는 성리학의 절대화 경향이 일어난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의 명분론이 절대화 되고 성리학을 만든 주자의 해석외의 해석을 하면 사문난적으로 몰려 극단적인 경우 처형을 당하기도 한다. 과부에게 재가를 금지하고 부계중심의 가족제도와 장자에게 상속권을 주는 등의 가부장적 제도의 연원은 사실 조선 초기부터 이루어진 전통이 아닌 조선후기 일어난 양반층의 몰락에 대한 지배세력의 반동이었다. 불교국가였던 고려는 재혼은 물론 여자가 상속을 받았고 이런 경향은 조선 초에도 이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민족적 질서가 깨진 것은 앞서 다룬 것과 같이 사회의 혼란으로 인한 지배계층의 정체성의 위협으로 지배계층은 경직되고 수직적인 사회사상을 생산해냈다. 이런 성리학의 교조화는 ‘체면’을 중시하는 사회의 문화적 기반이 되기 충분했다. 이런 사상의 흐름으로 후기 조선은 크게는 중국과 사대주의 외교를 했고 명분론을 앞세우다 병자호란 때는 삼전도에서 왕이 치욕을 당하기도 한다. 작게 보아서는 사회에서 내면의 도덕성으로 양반으로 칭송 받는 것이 아니라 돈을 주고 신분을 사는 문화가 만연했다고 한다. 이런 까닭들로 인하여 우리나라는 수직적인 문화가 자리를 잡고 자연히 체면을 중시하는 사회가 되었다. 다양성을 추구하기보다는 획일성에 중점을 두었다. 문제는 이런 체면중심의 사회는 실수와 타인의 시선에 관용적이지 못했다. 책에서 저자는 사학자나 사회과학자들이 신분제의 와해가 크게 이루어진 때는 6·25 전쟁이라고 한다. 아쉬운 것은 다른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는 신분적 질서를 타파하는 데 사회구성원의 성찰과 참여가 부족했다. 책의 예시처럼 비교적 현대에 와서도 신분제의 변화를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례로 이어졌고 나름 와해되기 했지만 지금도 자신이 속한 가문의 시조나 본적을 모르는 가문은 없으며 ‘족보’ 없는 집안이 없는 사회로 이어지고 있다. 아직도 예의가 없는 사람들을 기성세대들은 ‘족보 없는 놈’이나 ‘못 배운 놈’이라고 욕한다. 주목할 점은 보통 기성세대가 말하는 예의도 유교적 질서에 가깝고 못 배운 놈이 배우지 못한 지식도 유교적 교육에 가까운 것들이다.


3. 현대의 사회양상과 모멸감


그렇다면 지금을 사는 우리사회의 모멸의 모습은 어떨까? 스무 살이 된 어느 날 아버지께서 나에게 해주신 말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고 잊어야 행복하다.”라는 말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직업여건 상 아버지와 자주 만나지 못하는 현실에서 아버지께서 굳이 아들에게 하신 말씀이 ‘잊어라’라는 것이 참으로 의아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어릴 적 우리 동네에서 일어났던 살인 사건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이야기의 대강은 이렇다. 어렸을 때 A와 B는 동급생이었고 A가 B를 괴롭혔다고 한다. 나중에 성인이 되어 두 사람은 다시 만났는데 A는 B를 여전히 무시했고 B는 그것을 참지 못해 살인을 했다고 한다. 모멸감이라는 책은 읽기 시작하고 아버지가 그때 해주신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사실 주고받는 말 몇 마디와 비언어적 표현 몇 가지로 한 사람은 생명을 잃었고 한 사람은 살인자가 되었으며 그 두 사람이 속한 가족공동체는 복구하기 힘든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헝그리 사회에서 앵그리 사회가 되었다는 작가의 말이 절실히 느껴지는 사례이다. 이러한 부정적 감정은 한국사회의 변화들 앞에 더욱 증폭될 가능성이 있다. 지금 50대 이상의 세대들은 농업사회에서 태어나 산업사회에 젊음을 살고 정보화시대에 중년이나 노년을 맞이한 세대들이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본인의 정체성을 지키기는 꽤나 힘들었을 것이다. 사회사상도 유교의 완고한 가치 속에서 유년을 보내고 자유주의와 민주화 속에 청년을 보내고 이제는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여생을 보낸다. 한국은 이 세대들의 황혼 자살률이 가장 높은 국가이다. 박완서의 ‘황혼’이라는 소설을 보면 전통적 가치를 지난 시어머니와 현대적 가치를 지난 며느리의 갈등양상을 나타내는 소설이다. 소설 속에서 정(情)이 그리웠던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명치를 쓰다듬어 달라고 한다. 이에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성적(性的) 욕구가 비정상적으로 표출된다고 생각하여 시어머니를 병원에 보낸다. 결국 작품 속 늙은 여자는 자신의 삶이 무가치함을 느끼며 작품이 마무리된다. 현대에 있어 기성세대들은 자신의 신념과 급변하며 하루가 다르게 다른 모습으로 변해가는 사회에서 박탈감을 느낄 것이다. 이제 고작 20대 중반인 나도 종종 ‘나 때는 안 그랬는데’라는 말을 한다. 기성세대들은 얼마나 큰 부조화를 느낄지 생각해본다. 그리고 경제체제의 변화도 기성세대의 부조화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미래학자로 불리는 앨빈 토플러는 정보화시대의 혁명이 일어나면, 유산계급인 브루주아가 경제의 기득권을 얻었다면 정보화 사회에서는 유식계급인 코그니타리아트(Cognitariat)가 경제적 기득권을 장악할 것을 예고했다. 경제체제의 변화 특히 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농업사회에서 정보화 사회까지의 변화를 겪은 베이비부머 세대들은 이런 사회변동에 적응을 못하여 소외되기도 한다. 이러한 소외는 무시·굴욕 등의 감정과 뒤섞이어 파괴적 감정으로 나타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이에 반해 기성세대에 비해 나름 현대적 가치관 속에 사는 젊은 세대들은 보통 경제적인 상황에서 불안을 느끼고 이것이 삶에 여러 부분과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자본주의 사회이다. 일찍이 사회학자 칼 맑스는 물화(物化)라는 개념을 사회에 내놓은 적이 있다. 물화란 자본주의의 생산과 소비 같은 개념들이 인간의 영역에도 침범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사는 사회구성원들은 책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전자기기의 사양을 의미했던 'Specification'이라는 단어는 흔히 스펙이라고 불리며 사람사용설명서가 되었다. 인간의 삶이 수치화되어 평가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수단이 되는 사회에서 사람은 존엄성을 잃기 쉽다. 존엄성의 부재는 모욕이나 무시로 이어지기 쉽고 이것이 모멸감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의 일이다. 우리는 평가가 만연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인기 있는 프로그램들은 사람들의 재능에 점수를 부여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은 공영방송 모두 편성되어있다. 그리고 가깝게는 진리의 상아탑인 대학교도 평가와 순위로 학문을 평가받는다. 학생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에 와서까지 언제나 평가의 대상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서로를 너무나 쉽게 평가하고 쉽게 판단한다. “인격을 수단으로 삼지 말고 목적으로 삼으라.”라고 했던 도덕주의자 칸트가 현대사회를 본다면 개탄할 일이 아닌가 싶다. 나는 충대신문 대덕울림에 ‘당신의 인생 제 점수는요’라는 글을 게재한 적 있다. ‘우리사회는 거대한 오디션 프로그램이 되었고 삶을 점수로 평가받는다. 학력은 음역이 되고 학점은 음색이 되며 토익은 외모가 된다.’라고 말했다. 책에서는 소중한 것들은 돈으로 살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는 재능을. 나아가 인격을 평가받으며 살고 있고 규격화된 평가 앞에서 개개인의 삶의 영역을 침범을 당한다. 또한 경제체제의 직접적 영향으로 불안정 노동 상황이 있다. 현재 신자유주의 체제의 경제체제에서 고용은 늘 불안하다. 특히 불안정한(precarious)과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합성어인 프레카리아트는 불안정 노동계층을 말한다. 인간이 최소한의 삶을 살기위해 필요한 경제적 토대들의 불안함은 개인의 감정을 풍전등화로 만들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이런 경제 상황은 개인의 삶을 비참하게 하기 좋다. 아르바이트생들의 고충은 커뮤니티 사이트의 단골 글감이다. 그런 경향이 얼마나 심하면 엔젤리너스라는 프랜차이즈 커피점에서는 손님이 아르바이트생의 이름을 부르며 존댓말로 주문을 하면 할인을 해주는 일까지 있을까? 재미있는 것은 자신이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도 쉽게 경제적 여건 때문에 일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조선시대에는 혈통과 지식으로 계급사회를 이루었다면 현대의 우리는 학벌과 경제력으로 계급사회 아닌 계급사회를 만들어 살고 있다. 책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한국에서 잘산다는 것의 의미는 행복하게 즐겁게 사는 것이 아니라 부유한 삶을 말한다는 것이 애석하다. 책에서 나오는 브랜드 재킷을 가리키는 시가 절적한 예인 것 같다. 나를 나의 인격으로 평가받기 보다는 나의 겉치레로 평가받길 원하고 다국적 브랜드나 기업들의 제품이 한국에만 오면 비싸게 판매된다는 이야기는 더 이상 가설이 아니라 일반론에 가까운 사회현상이 되었다. 그리고 모멸감에 대한 연구도 전무하고 품위에 대한 논의도 없는 것은 부정적 상황을 악화하는 데에 한 몫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는 대개 타의적으로 이루어졌다.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독립도, 민주주의도, 한국전쟁도 모두 우리사회는 우리가 주체가 아닌 외세로부터 변화를 받아들였다. 이성과 지식에 대한 논의는 많이 이루어지지만 기초교육과정에서 감정과 심리에 대해 다루는 과목은 희소하거나 거의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인간의 심리에서 타자로 활동하는 감정의 작용들에 대한 무지는 우리가 감정의 주인이 아니라 감정의 노예로 이끌려 다니는 데에 큰 역할을 한다. 책의 인디언의 말처럼 내가 먹이를 주면 자라나는 감정이라는 늑대에게 먹이 주는 법을 몰라 늑대에게 삶을 잠식당한다.


4. 모멸주지 않고 모멸 느끼지 못하는 유토피아는 가능한가?


나는 그래도 해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모멸감의 저자 김찬호는 모멸사회에 대해 사회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의 해법을 제시한다. 사회적 해법의 주요 내용은 제도적 차원에서 경제적 안정성을 보장하고 불평등을 개선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또한 문화적으로 다원주의를 중심으로 사회적 가치관을 다시 확립할 것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개인적 차원에서는 내면의 힘을 키우는 방법을 제시한다. 나는 이런 대안들의 현실가능성에 대해 숙고하고 개인적 차원에서 내가 먼저 바꾸어 나갈 수 있는 현실에 대해 생각해봤다. 우선 제도적인 측면에서 경제적 안정성 보장은 사실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현 정부의 경제부총리인 최경환은 비정규직 근무연수를 늘리겠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물론 사회적으로 불안 노동에 대한 논의들이 이루어지고 있어 정규직의 임금 인상을 없애고 일자리를 늘린다거나 정규직 채용을 전제로 비정규직을 채용한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하지만 가까운 예로 충남대학교 병원은 국립병원임에도 불구하고 올해부터 무기한 계약직으로 간호사를 채용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개개인들은 고용의 안정과 불평등의 타파를 이야기하고 논의해야 한다. 당장은 실현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포기해서는 안 되고 지속적으로 조금 더 개선될 사회를 위해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문화적 차원의 변화는 인식변화에 중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원주의 문화모델에는 용광로(Melting Pot) 모델과 샐러드 그릇(Salad Bowl) 모델이 있다. 한국 사회는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나라이기 때문에 보통 모든 가치규범이 하나의 사회규범에 녹아드는 용광로 모델을 지향한다. 그렇지만 현재는 우리 사회는 다문화가정이 사회의 주요한, 다수의 현상이 되고 한국은 유례없는 다민족사회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모두가 전체의 가치를 하나로 획일화하는 용광로 모델보다는 부분적 동일성과 다양성을 전제로 하는 샐러드 접시 모델로 변화해야 한다. 가까운 나는 교회의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 중인데 우리 초등부에 1학년의 다문화가정 아이가 왔다. 어머니가 몽골인이라고 한다. 몽골민족과 한민족의 외형적 차이는 크게 없으나 그 아이는 아이들이 뱀파이어 같다고 아이들이 꺼려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이들이 괴롭히는 것은 아니지만 기피한다는 것에 마음이 아팠다. 아이들에게 다양성에 대해 어떻게 가르칠지 고민이 된다. 적어도 다양성에 대한 관용을 지닌 사회라면 사회 곳곳에 산재하는 이러한 갈등이나 소외가 덜어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또한 이 사회를 변화시킬 정말 의미 있는 것은 개인의 변화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개인적 차원의 의미 있는 변화들이 때로는 사회의 거시적 변화를 가지고 온다고 생각한다. 특히 내면적인 힘을 키우고 주변에 있는 타인들에게 이런 삶을 나누며 주변인을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의사인 박경철이 쓴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1’에서 그 적절한 예를 찾을 수 있다. 그녀의 미니스커트라는 제목의 글인데 당시 병원에 있던 저자는 응급환자가 생겨 진료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때에 온 환자는 20대 후반의 여성이었고 교통사고를 심하게 당하여 다리를 절단해야 될 상황이었다고 한다. 간신히 죽음의 고비를 넘긴 여자는 사실 27세에 외국계 은행에서 근무하는 직장인이고 능력을 인정받아 다음 달이면 해외로 MBA 과정을 수료하기 위해 유학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한다. 탄탄대로였던 그녀의 삶에 다리절단과 복부의 30cm의 흉터, 옆구리에 끼워진 4개의 호스는 그녀의 삶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고 한동안 그녀는 비관에 잠겨 살았다고 한다. 정신질환을 앓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신과적 치료와 약혼자의 정성어린 노력으로 그녀의 상태는 좋아졌고 퇴원을 한다. 그래도 마음 한 켠의 어둠까지는 걷히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도 약혼자는 사고를 당한 그녀와의 결혼을 택하고, 그녀는 수술 담당의사에게 청첩장을 전하러 병원에 왔는데 그때 그녀는 ‘미니스커트’를 입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저자는 이렇게 서술한다. ‘아름다운 자태가 돋보이는 고운 왼쪽다리는 스커트 아래에서 길게 뻗어 땅을 디디고 있었지만, 사라진 오른쪽 다리는 당연히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사라진 오른쪽 다리가 다시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착각이 될 정도로 눈부신 아름다움을 느꼈다.’ 이 이야기는 일상생활에 적용 될 수 없는 극적인 이야기를 다루어 현실성이 없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충분히 내면의 변화와 타인으로서 한 사람을 위하는 모습이 모범적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인 그녀는 비극적 상황을 희망과 자신감으로 전환시켰다. 모멸감에서 다루었던 많은 사례들과는 전혀 다른 대안을 내세웠다. 그녀가 그녀의 삶에 가장 큰 상처일 수 있는 절단된 오른쪽 다리를 오히려 미니스커트를 입음으로써 그녀 내적 성숙의 자신감으로 변모시킨다. 또한 약혼자 또한 외모와 경제여건 등 삶의 외형적인 토대가 하루아침에 바뀐 그녀의 곁을 지킨다. 이것은 그 약혼자가 그녀의 외형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녀를 인격적으로 정서적으로 사랑했다는 방증이라고 생각한다. 대중적 심리학 서적이 된 ‘미움 받을 용기’라는 책은 트라우마란 허상이며 타인의 기대에 젖어 사는 것이 아니라 행복해질 용기, 평범해질 용기, 그리고 미움 받을 용기를 가지고 살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모멸감이라는 책에서 말하는 대안은 사실 막연하고 뜬구름 잡는 소리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있듯 개인 삶의 내면적 변화와 안전한 관계성,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믿을 수 있는 공동체 조성이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삶의 큰 변화를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이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는 것은 물론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영역들로부터 모멸 없는 사회로의 작은 실천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2015.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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