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문트 바우만의 Liquid Modernity

 

지그문트 바우만의 Liquid Modernity 번역에 관해
 
바우만은 최근 10년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회학자다. 바우만 컨텐츠의 매력과 이런 분위기에 부응하듯, 이일수 선생님의 번역으로 <Liquid Modernity>가 액체 “근대”가 아닌 액체 “현대”로 복간됐다. 이뿐만 아니라 윤태준 선생님이 번역하신 <유행의 시대>에서도 Liquid Modernity는 유동하는 “현대”로 번역됐다. 나는 이 번역이 아쉽게 느껴져 글을 쓴다.
 
이일수 선생님의 경우, Modernity란 19세기 서구 산업화 이후 오늘까지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며, 바우만이 과거의 Solid Modernity과 구별되는 오늘날의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만든 개념인 Liquid Modernity을 표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에 오늘날을 구분하는 의미에서 ‘현대’를 사용했다고 밝힌다. 윤태준 선생님은 더 단호한데, “‘modern’을 근대로 옮기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라고 말하며 바우만이 가리키는 근대성의 두 국면(Solid와 Liquid)에서 Solid를 가리킬 때만 Modernity는 근대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거다. 따라서 “‘액체’라는 표현은 절대로 ‘근대’라는 단어를 꾸미는 말이 될 수 없다.”라고도 말한다.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회학에서 근대성Modernity이라는 주제는 매우 각별하다. “사회학은 근대성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정의가 있을 정도로. 19세기 이후 근대성을 연구한 사회학은 20세기 중반 이후의 사회를 어떤 근대로 볼 것인지 고민하는데 하버마스는 근대를 미완의 기획으로 보면서 여전히 근대의 자원을 신뢰하고 료타르, 마페졸리, 보드리야르 등은 근대와의 급격한 단절을 설정하면서 국민-국가, 시민사회, 정당, 직업체계, 제도 등의 근대적인 것으로는 더는 사회를 설명할 수 없다고 본다. 이들은 포스트 모더니티 담론으로 분류된다.
 
반면 바우만은 이론은 후기 근대(Late Modenity)로 분류된다. 앞서 설명한 양자와 다르게, 19세기 후반과 20세기 후반 사회의 차이는 긍정하면서도 새로운 국면의 사회가 시작되었다고 보지 않으면서도 이런 문제를 미완의 기획이 아닌 ‘근대성’의 연속선상에서 파악하는 시도를 후기 근대론으로 분류하고, 대표적 학자로는 바우만, 기든스, 울리히 벡 등이 있다. 이들에게 중요한 점은 20세기 후반 사회가 분명 다르긴 하나, 이것이 급격한 단절 속 전례 없는 새로운 근대는 아니라는 거다. 지금 목도하는 사회 역시 이전 근대성의 결과다.
 
이런 근거에 따라 ‘Liquid Modernity’의 번역어는 ‘액체 근대’라고 생각한다. 바우만은 Solid Modernity와 Liquid Modernity의 차이를 이야기하지만, 근대성의 연속 속에서 급격한 단절이 있다거나 사회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고 보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도 포스트 모더니티에 관한 책을 내기도 한다. <액체 근대>(1999) 출판 훨씬 전인 1987년부터에. 하지만 이것은 건축양식, 예술 사조로서의 사상을 전유한 것이지 사회의 변동을 설명한 것은 아니고 자신을 탈근대론자로 분류하는 것에도 반대했다.
 
『액체 근대』가 출간된 후 한 대담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포스트 모더니티라는 어휘 자체가 목욕물(기존 근대에 관한 설명)를 버리며 아기(근대성)를 함께 버리는 것을 피하려 액체 근대를 조어했다고. 포스트 모더니티라는 단어는 근대성 이후를 암시하는 거라고 못 박으면서 말이다.
 

“21세기에 진입한 우리 사회는 20세기에 진입했던 과거 사회 못지 않은 ‘근대성’을 지닌다. 다만 좀 다른 방식의 근대라고 할 수 있겠다.”

지그문트 바우만. 2009. <액체 근대>. 이일수 역. 47p. 

 
모더니티를 현대로 옮길지, 근대로 옮길지는 여전히 합리적인 이견이 존재할 수 있는 사안이다. 더불어 다른 부분은 고려하더라도 여전히 중요한 것은 기존 번역이 좋은 번역이라는 것이고, 바우만의 어려운 논의를 번역하고 출간해주신 이일수, 윤태준 선생님, 그리고 필로소픽, 오월의봄 출판사에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다.
 
참고
김홍중. 2013. “후기근대적 전환.” 『현대사회학이론』. 한국사회학회. 다산출판사.
Bauman, Zygmunt and Tester, Keith. 2001. Conversations with Zygmunt Bauman. Cambridge: Polity Press.
Dawson, Matt. 2010. “Bauman, Beck, Giddens and our understanding of politics in late modernity.” Journal of Power. 3(2). 189–207.
Outhwaite, W. 2009. “Canon Formation in Late 20th-Century British Sociology.” Sociology. 43(6). 1029–1045.
Tester, Keith. 2004. The Social Thought of Zygmunt Bauman. London: Palgrave Macmillan.

 

지그문트 바우만(1925~2017)

사회과학적 역사 연구의 진일보 <임진왜란>

말 그대로 “압도적인”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이런 표현을 제가 즐겨쓰진 않는 걸 아실 겁니다. 화제의 책, 김영진 선생님의 『임진왜란 – 2년 전쟁 12년 논쟁』입니다. 한국인에게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적인 침략, 선조의 무능, 이순신을 포함한 국군의 선전, 의병의 봉기 정도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순신”으로 기억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 7년 전쟁에서 직접적 교전 기간은 그리 길지 않은 2년여의 기간이었으며 이 시기에 있었던 한·중·일의 군사적 대결을 넘어 외교와 정책 등의 비군사적 대치는 12년 정도였기에 이를 고려해 임진왜란을 국제관계의 측면에서 재해석합니다.

이 책이 흥미롭고, 또 제가 “압도적”이라고 한 이유는 저자가 ‘정치학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정치학과에서 방법론 수업을 들을 때 학위 논문 이야기를 하시면서 교수님은 이순신을 외교적으로 분석하려던 지도학생이 있었는데, 이순신으로 논문으로 쓰려면 당장 당시 조선의 1차 자료뿐 아니라 일본의 이순신 자료까지 읽어야 해서 그 주제로는 논문을 쓸 수 없다고 말했다고 얘기해주셨습니다. 게다가 16~17세기 자료는 근대 이후의 언어와는 차이가 있기도 하죠.

아무튼 사학자가 이 주제를 다룬다면 사료 분석 능력은 탁월하겠지만 사회과학만큼의 이론적 틀이나 해석이 범위는 비교적으로 제한될 것이고, 반대로 사회과학자가 다룬다면 이론적 틀, 해석의 범위는 비교적 풍부하겠지만 사료 분석 능력은 부족할 수밖에 없을 텐데, 김영진 선생님은 그 어려운 걸 해내신 겁니다. 그것도 참고문헌까지 1,000쪽 분량으로 묵직하고 성실하게요. 임진왜란은 한중일이 전면전을 벌인 유일한 사례이지만 한국, 중국, 일본의 원사료를 사용한 통사가 출판된 건 세계적으로 최초라고 합니다.

현재는 언제나 뜨거운 무엇입니다. 앞서 지적했듯, 기존까지의 임진왜란 연구는 각 나라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그래서 편중된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죠. 한국도 마찬가지였죠. 한편으로 타국의 연구는 패권주의인 시각에 긴박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영진 선생님께서는 자국 중심주의, 패권주의 등을 극복하기 위해 국수주의도 민족주의도 아닌 입장에서 균형 잡힌 임진왜란 12년의 통사를 재구성하기 시작합니다.

임진왜란을 한국의 측면에서, 군사적 측면에서만 본다면 전쟁의 신, 이순신이 남겠지만, 시각을 넓혀 국제정치적 측면에서, 비군사적 측면에서 본다면 이순신은 상대화될 수 있습니다. 책을 읽어나가면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의 전쟁이 아닌, 조선이라는 전장에서의 명과 일본의 전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외교적 측면에서 조선의 왕은 명의 차관급인 송응창같은 지위였고, 당연히 왕 이하의 모든 신하는 송응창의 부하였지, 대등할 수 없었습니다. 조선은 외교적 선택에 있어 명나라에 모든 걸 위임하려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조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조선의 국력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임진왜란을 한층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볼 수 있게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비군사적 측면에만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닙니다. 이순신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명 조정 역시 이순신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이순신의 승리가 국제관계에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었기 때문이죠.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의 승리로 인해 명나라는 자국의 해상 방어가 비교적 자유로워졌고 이를 통해 조선에 원활한 원군이 가능해졌습니다. 이 책은 군사적 요소 역시 국제관계의 측면에서 해석합니다.

저는 국제관계사 측면에서 역사를 접근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우리에게 이순신으로 표상되던 임진왜란을 보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게 해줍니다. 이런 사고의 전환 속에서 인식의 운신이 넓어지고, 사유의 폭이 깊어질 수 있습니다. 기존에 알았던 것을 극복하는 건 어떨 때는 괴로울 수도 있지만 그를 통해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16세기 역사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강대국의 세력 균형 사이에 있는 한국의 상황에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합니다. 관심 있는 분께 정말 추천하는 책입니다.

민주주의의 황혼, <꺼져가는 민주주의 유혹하는 권위주의>

1. 이 책, <꺼져가는 민주주의 유혹하는 권위주의>는 저널리스트 앤 애플바움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애플바움은 폴란드의 민주화 운동에 가담했던 동료들과의 추억을 회고하는데,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과 지금은 친구는커녕 얼굴 보기도 민망할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는 겁니다. 애플바움은 ‘왜 민주화 운동의 동지였던 친구들이 이제 권위주의를 추종하게 되었을까’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고, 이 원인을 추적하는 게 이 책의 주제입니다.

2. 이 책은 독특하게 폴란드의 사례로 시작됩니다. 폴란드의 극우·보수정당인 ‘법과 정의당’(Prawo i Sprawiedliwość)이 정치의 주류로 자리 잡게 되는데, 이 정당은 민족주의, 국가주의 정당으로 대표적으로 ‘성소수자 자유 구역’(Streffy wolne odiologyii LGBT) 같은 정책과 연관이 있습니다. 성소수자 자유 구역이란, 노키즈존 같이 성소수자가 없는 지역을 의미합니다. 이 책은 이런 정당이 득세하게 된 원인을 고민해보는 겁니다.

3. 저는 이 책의 제목을 보자마자 트럼프 당선, 브렉시트 등으로 수면에 오른 포퓰리즘의 준동, 영미 정치의 위기를 다루는 일련의 서적이겠구나, 했습니다. 하지만 책을 펴보니 폴란드, 헝가리 등의 동유럽 사례나, 유럽의 사례가 나왔고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살펴보니 이 책도 브렉시트, 트럼프 당선 등의 문제를 영미와 함께 유럽 전체로 확장해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당선은 서구의 충격으로 프랜시스 후쿠야마, 마크 릴라, 그리고 마이클 샌델 같은 굴지의 정치철학자도 이 문제를 다뤄왔습니다.

4. 앤 애플바움도 동일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하지만 애플바움은 이 문제를 공화주의, 자유주의의 정치철학적 논의와 같이 거창하고 거대한 문제로 다루지 않고, 권위주의에 빠지게 되는 심리적 기제를 다루며 보다 실제적이고 우리 생활에 밀접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노지탤지어의 부활, 능력주의에 대한 실망, 음모론의 부상과 더불어 현대적인 담론 자체의 논쟁적이고 호전적인 성격도 현재 위기의 한 원인이다.”라고 분석합니다.

5. 그렇게 이 책은 트럼프 당선, 브렉시트와 같은 문제뿐 아니라 우리에게는 비교적 생경한 유럽에서의 포퓰리즘의 준동과 극우에 가까운 보주 정당의 부상을 보다 미시적이고 친근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교양으로서 새로운 정보도 많이 담고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도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외에는 ‘서구’에 큰 관심이 없는 게 사실인데, 유럽 각국 정치 상황에 대한 여러 내용을 알 수 있어서 흥미로웠습니다.

6. 애플바움은 자유주의자입니다. 굳이 분류하자면, 우파 자유주의자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책을 보실 때 고려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책에 내용이 많은 편인데, 감상과 맥락 위주로 책에 관해 적어봤습니다. 아쉬움이 있다면, 아무래도 책이 생소한 유럽 정치를 많이 다루고 있어서 각주를 통해, 더 자세한 내용을 소개해줬으면 독서에 도움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아쉬움이 있긴 했습니다. 물론 번역이 좋았고요, 기본적인 어휘를 설명하는 각주가 도움이 됐습니다.

7. 곁가지로 이야기하자면 한국의 상황은 어떨까요? 한국에는 이런 권위주의 정당이 득세하지 않을까요? 저는 한국의 기본적인 상황 자체가 이미 그런 기반 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에서 예를 들고 있는 분리주의(인종주의 기반), 국가주의, 성소수자 인권 옹호, 페미니즘 같은 주제는 한국 주류 정당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있죠. 적극적이지도 않고요. 한국은 집권당 당 대표가 흑인 보고 얼굴이 연탄 같다고 농담하는 사회이기도 합니다. 아시아인에 대한 한국사회의 시선의 평균을 따지면 책에서 나오는 보수·극우 정당과 비슷할 겁니다. 다만 한국은 이민 국가도 아니고 국경도 폐쇄되어 그런 상황을 맞이하지 않을 뿐입니다. 자유주의를 제대로만 지지해도 한국에서는 진보주의자가 될 겁니다. 자신을 자유주의자라고 소개하는 한국 정치인 중에 탈권위주의 입장에서 모병제를 국가에 의한 강제라고 선언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도서정가제의 필요, <도서정가제가 없어지면 우리가 일고 싶은 책이 사라집니다>

현행 도서정가제가 시행된 지 벌써 7년째입니다. 도서정가제가 제정되는 즈음 이른바 단통법도 시행되면서, 도서정가제는 ‘책통법’이라는 부정적 의미로 통용되곤 했죠. 저는 처음부터 도서정가제를 찬성하는 편이었습니다. 한국의 경우 군소 출판사가 많기 때문에, 지나친 경쟁이 발생하면 출판생태계의 다양성이 훼손된다는 이유였습니다. 물론 언제나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학생이라 도서정가제 이전이 종종 그리울 때도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요.

이 책, <도서정가제가 없어지면 우리가 일고 싶은 책이 사라집니다>는 한국출판인회의에서 엮고, 책과사회연구소 대표, 한국출판정책연구회 회장인 백원근 선생님이 집필하셨습니다. 책은 도서정가제의 필요성, 개정(현행) 도서정가제의 긍정적 효과, 도서정가제 폐지론에 대한 반박, 도서정가제의 미래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은 도서정가제의 취지와 논리를 설명하고, 도서정가제 이후 긍정적 변화를 사실에 기반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도서정가제의 핵심은 ‘독서생태계의 다양성 보호’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책은 문화적 공공재입니다. 책에서 나오듯, 책의 공공재적 성격 때문에 부가세가 면제되고, 국비로 도서관을 운영하죠. 그래서 자유시장의 논리보다는 이것을 어느 정도 완화할 규제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게 도서정가제입니다.

출판사와 서점 입장에서는 당연히 ‘대형 출판사’와 ‘대형 서점’이 경쟁에 유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형 출판사 같은 경우 출판 인프라가 형성되어 있어서 가격 경쟁을 시행해도 출판 부수로 이윤을 보전할 수 있을 겁니다. 대형 서점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형 인터넷 서점의 경우에는 출혈적인 가격 경쟁, 과도한 마케팅을 해도 유통가를 지역 서점보다 훨씬 낮게, 많이 구매할 수 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고, 대형 오프라인 서점도 비슷할 겁니다. 하지만 군소 출판사와 지역 독립서점은 이런 경쟁에서 살아남기가 어려워지겠죠. 이런 상황에서 독서생태계의 다양성은 감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서정가제는 전 세계가 시장인 OECD 영어권 국가를 제외한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스위스, 일본 등의 국가에서 시행되고 있습니다. 도서정가제 이후, 출간 도서의 다양성이 크게 증진되었고, 독립서점이 500개 이상 설립되었습니다. 도서정가제가 독서생태계의 다양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방증일 겁니다.

한때, ‘도서정가제 폐지’ 국민청원이 등장해 이슈가 됐죠. 이 책에서는 해당 국민청원에 대한 팩트체크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해당 청원은 1)서점 수 감소 2)독서율 감소 3)책 값 인상 4)출판사업 매출 규모 축소 5)평균 발행부수 감소 6)해외와의 차이를 들어 도서정가제 폐지를 주장했죠. 하지만, 책의 자료에 의하면, 1)참고서 위주가 아닌 독립서점의 증가로 전체 서점 수 증가 2)독서율 감소의 주된 원인은 사회 환경 변화(문체부 국민 독서실태 조사) 3)정가제 이후 상승률이 감소, 전체 소비자 물가지수 대비 적게 상승 4)매출 규모 상승(문체부 통계) 5)소품종 대량 생산에서, 다품종 소량 생산으로 변화 6)한국 출판문화의 차이 등의 이유로 해당 청원에 반박하고 있습니다.

저는 대부분 출판계의 반박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특히 한국의 경우는 책이 정말 싼 편입니다. 해외 서적을 구매하시는 분들은 다 느끼실 겁니다. 저는 큰 틀에서 현행 도서정가제를 지지하는 편이고, 완전 도서정가제로 개정되는 것도 동의합니다. 물론, 출판 시장의 위탁 판매제도나 유통구조 개선은 정가제와 관계없이 개선되었으면 좋겠고, 오래된 서적의 오프라인 할인 판매 등의 개정은 좋지 않나 싶습니다. 독서생태계 다양성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요.

책에서 사용하는 몇몇 논거는 조금 더 따져봐야 할 것 같다 느끼기도 했지만, 이 책은 2,000원짜리 팸플릿이고 간명하게 사실을 전하고 있기에 그런 건 독자의 몫이겠죠. 저는 도서정가제를 지지합니다. 도서정가제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당연히 나만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책은 공공재다’, ‘독서생태계의 다양성이 중요하다’ 같은 가치함축적인 문장에 충분히 다른 생각을 가지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책을 사랑하시는 분이라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시고 출판계의 입장을 충분히 들어보시는 것도 좋아 보입니다.

보수 개신교에 관한 정교한 분석, <태극기를 흔드는 그리스도인>

2016년 박근혜 탄핵 정국을 거치면서 태극기는 보수 혹은 극우의 상징이 되었다. 그 이전만 하더라도 태극기는 한국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공유하는 상징이었으나, 2016년 박근혜 탄핵을 반대하는 집회와 문재인 정권 이후 문제가 된 태극기 집회의 연속 안에서 태극기는 이른바 태극기 부대와 함께 극우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먼저 이 책, <태극기를 흔드는 그리스도인>은 한국 교회의 보수 혹은 극우 개신교도에 대한 막연하고 추상적인 이해를 넘어 정교한 이래를 목표로 보수/극우 개신교에 대한 정치(精緻)한 분석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매우 다채로운 관점에서 이들을 다루고 있다.

우선 책의 가장 중심이 되는 내용은 보수 개신교인에 대한 사회조사다. 이 집단에 대한 사회조사는 2가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먼저는 ‘표적 집단 면접 조사’로, 태극기 집회에 참여했거나 (지방의 경우) 참여할 의향이 있는 사람을 20대부터 70세 미만까지 30여 명 선정하여 심층 면접을 진행한다. 다음으로는 설문 조사인데, 이 조사는 전국 19세 이상의 개신교인 중 보수적 성향을 가진 570명을 표본으로 진행된다. 이 조사를 중심으로 한 글 두 편이 책의 서두에 자리하고 있다.

이어지는 글은 극우 개신교에 대한 분석과 비평이 중심이다. 최경환 선생님은 공공신학과 교회의 정치에서 공공신학의 관점에서 극우 개신교의 정치 참여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개신교의 정치 참여가 지향해야 할 대안을 제시한다. 송인규 선생님은 ‘극우적 사고’에 초점을 맞춰 극우적 사고가 현실적, 종교적 차원에서 형성되는 과정을 추적하고 이를 복음주의의 관점에서 평가한다.

배덕만 선생님은 교회사학자답게 근본주의와 정치적 극우의 융합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시행한다. 미국의 근본주의와 한국 근본주의 접합, 그리고 한국의 근본주의자의 역사적 궤적을 추적한다. 김지방 선생님은 2000년대 교회의 정치 참여와 2020년의 교회의 정치 참여를 비교하면서 이 차이를 서술하고 한 편으로는 개신교 내부에서 새로운 시각에서 정교분리를 재고해야 함을 지적한다. 김현준 선생님은 호프스태더의 반지성주의 논의에 기대어 한국 개신교 내부에 극우파의 출현을 반지성주의라는 관점에서 분석한다.

이 책은 먼저 다채로운 시각에서 쓰였다는 장점이 있다. 사회학자, 기자, 신학자 등이 필진으로 참여해 다양한 관점에서 이 현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사실 정말 중요한 것은 글 서두에 2편이 다루고 있는 사회조사다. 표적 집단 심층 면접, 그리고 570명을 표본으로 하는 설문 조사는 그 자체로 보수 개신교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여러 측면에서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이들은 무엇 때문에 보수 개신교인으로서 자각이 시작되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게 도와준다. 정보량이 정말 많기에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한다.

사회조사에 대한 아쉬움이라면 심층 면접에 있어서 대졸자가 과잉 대표된 것 같다는 느낌이다. 30여 명 정도의 표본 중, 대졸 미만의 학력을 가진 사람이 4명에 불과했다. 이 부분은 확실히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저렇게 많은 비용이 들어간 사회조사를 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그리고 총 7장 중 4장 정도는 종교의 여부와 관계없이 극우/보수 개신교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읽어도 큰 무리가 없을 내용이고, 이 현상을 종교의 입장에서 다루는 장에서도 현실적 분석이 선행되기 때문에 얻을 정보가 많다는 말씀을 드린다. 책을 읽고 극우/보수 개신교에 대한 이미지가 기존보다는 구체적으로 잡히게 돼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문화 이론과 근대성의 문제, <문화사회학 이론을 향하여>

저번 주에 한 선생님께서 추천 도서를 물어보셔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오랜만에 <문화사회학 이론을 향하여>를 꺼내 읽게 되었다. 이 책은 학부 시절 비교문화론 시간에 교재로 쓰인 책이다. 오랜만에 책을 꺼내고 다시 읽으니 감회가 새롭다.

문화란 무엇인가, 이 문제에 쉽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좁은 의미의 문화는 예술에 국한되기도 하나, 넓은 의미에서는 ‘생활양식의 총체’로 정의되기도 한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문화의 범위를 설정하기보다는 문화의 성격을 규명하는, 문화 이론에 관심을 두는 책이다. 이 책의 원제는 ‘문화 이론과 근대성의 문제’인데 이 책은 ‘문화’, ‘근대성’ 단어만으로만 압도되어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문제를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저자인 앨런 스윈지우드가 문화와 근대성에 대한 이론들을 정리하고 여기에 비판적 논평을 덧붙여 기존 이론의 여러 난점을 극복하고 장점을 아우를 수 있는 문화사회학의 과제를 제시한다.

이 책은 여러 장점이 있다. 우선 이 책은 탁월한 교과서다. 이 책이 아우르는 지적 전통은 매우 다양하다. 마르크스에서 시작되어 그람시, 루카치, 프랑크푸르트 학파, 레이먼드 윌리엄스에 이르는 마르크스주의 문화이론은 물론이고, 베버, 뒤르켐, 짐멜, 파슨스까지의 사회학적 문화이론, 거기에 현대의 문화이론가라고 할 수 있는, 하버마스, 부르디외, 바흐친, 제임슨, 벨 등의 다양한 문화 이론, 근대성 이론을 비판적으로 비교/검토/정리하고 있다.

다음으로 이 책은 문화 이론을 비판적으로 재전유하고 있다. 스윈지우드는 단순히 문화 이론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문화 이론이 가지고 있는 한계, 구체적으로는 환원론을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마르크스주의의 토대와 상부구조 문제는 마르크스조차도, 결정론으로 해석될 때 이 문제에 한해서는 본인도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언급할 정도였는데, 스윈지우드는 이런 환원론의 문제를 베버와 같은 다른 문화사회학의 맥락에서 극복하고자 한다.

결국 스윈지우드는 문화의 복잡한 사회적 맥락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거시와 미시, 구조와 행위, 내부와 외부를 포괄할 종합적이면서도 유연한 사회학적 문화 이론의 구축을 과제로 삼는다. 이 책은 그런 스케일에 걸맞을 정도로 다양한 이론의 비판적 검토를 시도한다.

한 편으로는 영미학자 특유의 이론을 대하는 태도가 묻어나기도 하지만, 그를 감안해도 준수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다루는 이론의 범위도 매우 광범하다. 그리고 한국 사회학 번역에 있어 대체하기 어려운 작업을 하고 계신 박형신 선생님께서 공역하신 책이라 더 믿고 볼 수 있다. 사회학, 문화, 마르크스주의에 관심 있는 분들은 꼭 읽어보실 만한 책이라고 말씀 드린다.

미국을 다룬 종합적이고 균형적인 책, <미국 문화의 기초>

“아름다운 자연, 넓은 공간과 물질적인 풍요, 개인주의적인 자유와 독립성, 도전과 창의를 높이 사는 태도, 형식과 전통을 배격하고 효율과 실리를 중시하는 태도, 과학과 기술에 대한 신뢰, 적극적인 추진력과 낙관적인 사고방식 등 우리가 삶에서 기대하는 좋은 것은 모두 미국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반면 상업주의의 폐해, 물질주의의 저속함, 엄청난 경쟁과 스트레스, 피상적인 인간관계와 소외, 환경 파괴 등 우리가 혐오하는 현대인의 삶의 문제 역시 미국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개인주의적인 사람이 또 남을 가장 많이 돕는 사람일 수 있을까? 세계에서 가장 세속적인 사회에서 살면서 어떻게 그렇게 신앙심이 깊을 수 있을까? 근대적 민주정치 체제를 최초로 건설한 나라이면서 어떻게 그렇게 인종차별이 만연할 수 있을까? 미국은 그야말로 모순투성이다.”

“미국”이라는 두 글자에는 엄청난 의미의 각축이 시작된다. 앞서 인용한 이 책, <미국 문화의 기초>의 머리말처럼, 미국이라는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압도적인 강대국, 자유의 나라인 동시에 21세기의 제국주의, 만연한 불평등의 나라이기도 하다. 그만큼 미국을 이해하는 데에는 많은 관점의 관점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은 어떻게 보면 이상적이고, 어떻게 보면 문제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을 이해하는 좋은 통로가 바로 <미국 문화의 기초>다.

이 책의 저자 이현송 선생님은 사회학자다. 저자는 미국 오하이오에서 사회학을 전공했고,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에 재직 중이며, 한국 아메리카학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저작과 연구 이력을 보면 이현송 선생님은 정확히는 ‘미국학자’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총 7장으로 구성되어있다. 책에서 다루는 내용은 미국의 신화와 예외주의, 미국을 구별 짓는 특징, 이민자의 나라, 미국의 지역문화, 미국 사회에서의 인종의 의미, 인종 문제의 다양성과 변화, 개인주의와 미국인의 꿈 등이다. 책의 제목처럼 이 책은 미국의 문화적 기초를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저자가 언급하듯, 미국의 정치, 미국의 경제 등 ‘미국의 A’가 아닌 종합적인 관점에서의 미국을 다루는 책이다.

미국을 공부할 때 이 책은 여러 미덕을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앞서 언급한 대로 종합적인 성격의 책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미국 문화의 전반을 다루고 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한국에서는 너무나 중요한 나라이기 때문에, 한국은 미국이라는 정보의 홍수 속에 있지만, 미국이라는 국가, 혹은 사회의 넓은 조감도를 갖추기는 어렵기도 하다. 미국에 대한 정보가 너무 많아서 정보가 오히려 지엽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미국 문화의 전반을 다루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미국에 대한 전체적인 이미지를 얻을 수 있게 된다.

둘째 이 책은 균형적으로 쓰였다. 한국 사회에서 미국은 친미/반미라는 갈등 구조 속에 있다. 당연히 편향된 시각에서 미국을 해석할 여지가 다분하지만, 이 책은 균형적으로 미국을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 책에서는 ‘미국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개인주의와 아메리칸 드림이 미국을 가장 강력하고 매력적인 나라로 만들면서 한 편으로는 미국을 심각한 사회문제로 물들게 하고 혐오하게 하는, 환원하면 미국의 동력이자 아킬레스건이라고 지적한다. 균형적인 시선이 많아서 생각할 여지가 많다.

셋째, 이 책은 교양서로 훌륭하다. 이 책의 성격을 굳이 따지자면, 교양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그만큼 책은 평이하게 쓰였고 쉽게 읽힌다. 그러면서도 적재적소에 필요한 학술 담론을 잘 소개하고 있다. 책은 심도 있으면서도 읽기에는 어렵지 않다. 미국개론서로 굉장히 훌륭한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인종 문제를 다루는 부분이 매우 흥미로웠다. 인종 문제에 있어서 나도 나름 공부했다고 생각했는데, 부분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걸 느끼게 됐고, 책을 통해서 미국 인종 문제의 다양한 측면을 알 수 있었다. 그나마 아쉬움이 있다면 책이 2006년에 출간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책은 교과서에 가까워서 책에서 다루는 미국의 전통적인 문화의 기초는 여전히 유효하다. 더불어 저자께서 2016년에 미국에 관한 신간 <혁신과 갈등, 미국의 변화>을 출간하셔서 이 책을 이어 읽고 싶어졌다.

원자력 문제에 균형 잡기 <원자력 논쟁: 원자력 전문가가 직접 알려준 찬반의 논거>

2021년 폭염이 시작되면서 전력 수급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르게 됐습니다. 작년만 해도 이상 기후의 여파로 8월 기온이 6월 기온보다 낮아지면서 전력 문제는 크게 대두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다른 상황이고 원전/탈원전 논쟁이 다시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관련 문제에 보다 심도 있게 접근하고 싶어서 <원자력 논쟁>이라는 책을 읽게 됐습니다.

이 책은 2015~2016년 진행된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에서 진행된 ‘정책 대 정책 포럼’의 내용이 골자가 된 책입니다. 정책 대 정책 포럼은 찬핵과 탈핵을 주장하는 양 진영의 전문가가 한자리에 모여 첨예한 입장을 드러내며 치열하게 토론한 자리였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서 첨예한 입장에서도 어느 정도의 공통분모를 만들 수 있게 되었고, 한편 타협할 수 없는 지점을 확인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포럼에서는 원전을 둘러싼 5대 핵심 현안, 5대 쟁점을 설정해 논의를 진행합니다. ‘원전의 민주적 절차성’, ‘기후변화 및 에너지 수요 대응 측면의 원전 필요성’, ‘원전의 안전성’, ‘원전의 경제성’, ‘에너지 전환 관점의 원전 필요성’이 그 핵심 현안입니다. 책의 구성은 5개 쟁점을 기준으로 양 진영의 전문가가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는 발제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첫 주제인 ‘원전의 민주적 절차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원전의 민주적 절차성에 있어 긍정적 견해를 피력하는 양재영 교수(한국전력국제원자력대학원)는 원전 관련 정책 결정에 있어 원자력 전문가의 부재를 문제로 꼽고, 한편으로는 시민단체의 윤리 확립을 강조합니다. 다른 한편 이영희 교수(가톨릭대 사회학과 – 과학기술 및 거버넌스 전공)는 기술 건정성뿐만 아니라, 절차적 공정성 역시 중요하며 전문가주의의 폐해를 지적하고 일반 시민이 접근할 수 있는 정보 공개 및 시민과학 증진 등을 강조합니다.

원전 안전성 문제도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안전성을 옹호하는 입장의 백원필 부원장(한국원자력연구원)은 원자력 발전 방식이 화력, 수력, 가스발전에 비해 사고사 및 암 사망률 리스크가 적다는 점을 강조하고 설비 및 매뉴얼을 통해 원전의 위험을 통제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반면 김연민 교수(울산대 산업경영공학부)는 안전을 고려할 때에는 제한적 시설 뿐 아니라 우라늄의 체굴부터 폐기까지 의 전과정에서의 안전을, 그리고 기존 원자력 공학은 인적 오류의 부분을 생략하고 시스템을 설계했으며, 사고 발생 시나리오에서도 원전 접근 가능성을 고려하지만 실제로 이는 현실성이 없음을 지적합니다.

다 다루지는 못했지만, 이 책은 여러 쟁점을 시종일관 흥미롭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안에 관련해 공인된 ‘전문가’의 의견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인터넷에는 정보의 홍수가 있지만, 그중에 검증된 지식은 적은 편이죠. 그래서 믿고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책 서문에서도 언급되듯 정권 교체로 원전 정책의 기조가 변했으나, 책에서는 원론적 이야기를 충분히 다루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이 여전히 유효합니다. 변화된 원전 정책과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독서법 같습니다.

책에서 의사에 관계 없이 합의된 공통분모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원자력 발전의 안전 운영을 위해 제도 개선 및 정상 사고(normal accident) 최소화를 위한 운영자 프로그램 강화 2. 올바른 주민 수용성 파악을 위한 공론조사의 정상화와 체계 마련 3. 정보공개의 확대 4. 원전 인근 주민의 피해 및 전력 소비자의 불평등 해소를 위한 방안 마련 등입니다.

이준석의 <공정한 경쟁>

한국 정치에 돌풍이 불었다. 한국 최고의 보수 정당에서 최연소 당 대표가 선출되었다. 대선 정국으로 열기는 감소했지만 이준석 씨의 당 대표 선출은 분명한 ‘사건’이다. 최근 관심 있는 주제와 연결되기도 하고, 주변의 권유도 있어서 이 책을 읽게 되었고, 대담집이라 내용이 많지는 않고 앉은 자리에서 2~3시간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강희진 작가와 이준석의 대담집으로 강희진 작가는 질문하면서 논의를 이끌고, 이준석은 이에 답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젠더’, ‘청년정치’, ‘북한’, ‘경제’, ‘교육’, ‘보수의 미래’ 총 5개의 주제로 주제에 관한 이준석의 현실 분석과 비전으로 구성된다. 2년 전 책이라 지금 이준석과는 다를지 모르겠지만 근본적인 입장은 공유하지 않을까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준석은 스스로 ‘합리적인 보수’, ‘자유주의적 보수’라고 말하는 바에 적합한 정도로 일관적인 편이라고 느낀다. 이준석은 책에서 박정희의 경제 정책을 “사회주의적 전체주의”라고 규정한다(박정희식 개발독재 모델은 정확히는 발전국가 모델에 가깝다. 이준석이 알고하는 소린지 아닌지 모르겠다만). 이전 한국의 보수 정당은 자유주의라기보다는 보수주의라고 보는 것이 맞고, 한국의 경우에는 독재와 국가주의 정책에 있어 친화성을 보이면서 자유주의와는 일면 벗어나는 모습을 보이곤 하는데, 이준석은 이에 일관성 있다. 하지만 이준석 스스로 자유주의자임을 밝히지만 한국 실정에 제대로 된 자유주의자가 있나 싶다. 자유주의에 결이야 다양하지만 이준석은 징병제를 국가에 대한 강제의 입장에서 분석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하지만 이준석의 사회 인식에 개인적으로는 비판적이다. 우선 이준석은 사회의 진보보다 과학의 진보가 여성의 권익을 상승시켰다고 한다. 이것이 왜 문제냐면, 이런 논리는 기술 발전 이전의 불평등은 물론이고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여러 종류의 불평등을 정당화할 위험을 내포한다. 과학의 발전이 여성의 권익을 상승시킨 것은 맞지만, 그렇게만 해석한다면 세탁기 발명 이전의 가사노동과 피임 기구 발명 이전의 양육 및 출산의 불평등한 관계, 그 사회적 관계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 못한다(여담으로 세탁기를 포함한 가전제품이 여성 해방에 도움되지 못했다는 내용의 <세탁기의 배신>이라는 책이 있다). 이런 논리가 묵인하는 것은 과학의 진보 이전의 불평등은 당연한 것이라는 전제다. 사회과학은 이런 부분을 지적할 수도 있고, 당연히사회사상은 물론이고 사회통계를 비롯한 다양한 영역에서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 과학적인 것, 혹은 공학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은 뚜렷하게 구별되는 무엇이 아니다. 이런 관점을 갖는 건 교양의 차이다.

더불어 이준석은 서울 목동에서의 중학생 시절을 회고하며 여기에서의 성적 경쟁이 “완벽하게 공정한 경쟁”이라고 말한다. 이준석이 말하는 자유주의는 내가 판단하기에는 존 롤스 이후 현대 자유주의라기보다는 고전적 자유주의에 가깝다고 본다. 내 개인적으로 이준석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사회적 영향력이라고 생각한다. 이준석을 예로 들면, 그는 자신이 노원구 상계동 출신의 서민 주거지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음을 강조한다. 그 뒤 그는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에서 1년씩 외국 생활을 했고, 이후 목동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뒤, 하버드를 졸업하고 한국에 와서 벤처기업, 봉사단체 활동을 하다 박근혜에게 발탁되어 정계에 진출해 여기까지 이르게 됐다.

이준석은 상계동 서민 출신임을 강조했지만, 그의 아버지 이수월 씨는 유승민 의원의 경북고 – 서울대학교 동문이며, 친구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아버지의 해외 파견 시절 미국인 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더불어 유승민 의원실에서 인턴을 했고, 박근혜와 연결되어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도 인맥과 연관된다는 논란도 존재한다. 이준석이 간과하는 것은 (혹은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고 숨기는 것은) 서울대 출신 아버지, 해외 경험으로 쌓을 수 있는 문화자본, 목동의 교육열이라는 사회적 분위기, 그리고 아버지의 인맥으로 연결된 정치권과의 사회(관계)자본 같은 유무형의 자본이다. 사회에는 이런 다양한 자본이 얽혀 차이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준석은 이런 사회적 자원을 활용했음에도 이를 순전히 ‘자신의 능력’으로만 파악하며, 이를 사회에 확장한다면 문제가 된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이 정도에서 줄일 생각이다. 이준석을 비판했지만, 가치관 차이의 수준이다. 그래도 이준석은 사회적 지원과 함께 정치에 입문하고 10년 동안 꾸준한 활동을 통해 인지도를 쌓게 됐다. 종편의 탄생도 이준석이 받은 사회적 운이라고 생각하는데, 어찌 되었든 이준석은 분명 저력을 보였다. 이준석에 의해 보수당이 재편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준석은 자유주의에 일관성을 보이고 있고, 보수당에서 낼 수 있는 카드 중에 강력한 카드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준석의 비전이 사회적 배제로 작용할 가능성도 존재한다고 본다. 이준석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지만 이준석 자체가 부디 한국 정치의 질적 향상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젠더 관련 추천도서

지난 한 학기 동안 <여성문제연구>라는 수업을 들으면서 젠더 문제를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대학원 수업이라서 아무래도 논문을 중심으로 수업이 진행되었고, 또 함께 읽은 저서 중에는 방법론이나, 전문 지식을 중심으로 하는 저서도 있어서 다 소개해 드리기는 어렵지만, 주제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일반적으로 볼만한 책을 4권 소개해보겠습니다.

1. <젠더와 사회>, 한국여성연구소 엮음, 동녘.

<젠더와 사회>는 젠더 문제에 관심 있으신 분께 입문서로 훌륭한 책입니다. 약 15개의 주제로 이뤄진 이 책은 젠더에 관한 기초적인 지식부터 세부적인 주제의 문제까지 비교적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 장에 관련 주제와 연관된 읽을거리를 제공하고 있어서 입문서이지만, 관심사를 확장·심화하시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한국의 저자가 참여한 책이라서 주제가 한국에 매우 적합하기도 합니다. 아마 이 책의 이전 판이 <새 여성학 강의>였을 텐데, 이를 <젠더와 사회>로 바꾸고, 남성성 문제를 다룬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2. <젠더란 무엇인가>, 로빈 라일, 조애리 외 역, 한울아카데미.

여성학/젠더학은 학제적 연구 영역입니다. 그래서 철학, 문학 등의 인문과학은 물론이고, 사회학, 정치학을 포함한 사회과학에서도 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젠더란 무엇인가>는 사회학자인 로빈 라일이 쓴 책으로 사회학을 중심으로 젠더를 다룬 책입니다. 일단 젠더 문제를 다룬 입문서로도 훌륭한데, 특히 사회과학에서 이 문제를 보고 생각하길 원하시는 분께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3. <성스러운 국민>, 한양대학교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젠더연구팀 기획, 서해문집.

<‘성’스러운 국민>은 性스러운, 혹은 聖스러운 국민이라는 중의적 표현을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은 젠더와 섹슈얼리티 문제를 주제로 근대국가 한국이 이 문제를 어떻게 과학적으로, 법적으로 다루었는지를 보여주는 여러 글을 싣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선량한 풍속’으로서 간통죄, 법에서의 “음행의 상습이 없는 부녀”, 병역법과 성스러운 국민 만들기, 과학을 위한 몸으로 줄기세포에 관한 내용 등의 흥미로운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 소개한 책 중에 가장 흥미로운 책이었습니다. 강력 추천합니다.

4. <젠더 트러블>, 주디스 버틀러, 조현준 역, 문학동네.

끝으로는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입니다. 이 책은 사실 저도 제대로 이해를 못했습니다. 이 책에 관해서는 3월 13일에 서평을 남겼습니다. 물론 책의 핵심이 되는 수행/수행성에 관한 내용은 어느 정도 이해했지만,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정신분석학에 관한 훈련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워낙 현대의 고전이다 보니 관심이 있는 분께서는 한 번쯤은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이 책 자체를 보시기보다는, 역자인 조현준 선생님이 이 책을 소개한 2차 저작이 한국에 2권이나 있으니(<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젠더는 패러디다>),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믿고 거르는 새움과 이정서

작년 2월에 이정서 역의 『이방인』에 대한 포스팅을 했습니다. 어쩌다 보니, 이정서 씨가 본인이 대표인 새움 출판사에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번역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저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생각했습니다. 또 ‘기존 번역은 엉터리고, 이 책을 오독하고 있다. 내 책만이 세밀한 뉘앙스까지 번역한 진짜 번역서다.’라고 마케팅하겠구나, 싶었습니다. 역시는 역시 역시였죠.

다른 SNS에 새움의 『동물농장』 홍보 게시물이 떴습니다. 이 책의 경우, 제가 서평을 쓰기 위해 역본을 2개 비교하고, 원서도 참고했기에 어느 정도 할 얘기가 있을 거라 봤는데, 처음부터 이상한 소리를 하더군요. 책의 처음에 나오는 ‘Manor farm’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여기서 manor는 장원에 딸린 영지를 말하는데, 민음사의 도정일 역은 이를 살리지 못했다는 겁니다. 저는 도정일 역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manor에서 오웰이 의미하고자 했던 바는 이정서의 주장이 맞을 겁니다. 그러면 제가 그 게시물을 보면서 무릎을 탁!치고 ‘이런 숨은 의미가! 당장 이정서 역을 봐야지!’라고 했을까요?

정답은 ‘아니다’입니다. 제가 참고했던 김욱동 역(비채)과 김기혁 역(문학동네)에서 이미 그에 대한 정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할 것도 없는 정보입니다. 위키백과에도, 꺼무위키라 불리는 나무위키에도 나오는 정보죠. 그런데 이정서 씨와 그가 대표인 새움 출판사는 이게 엄청난 정보인 양 포장해서 마케팅합니다. ‘기존 번역은 잘못됐고, 드디어 내가 온전히 이 책을 번역했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예전 이방인 포스팅에도 말했듯, 이정서 씨는 본인만이 『이방인』을 제대로 번역했다고 하면서 자기 책에 오역이 있으면 전량 폐기하겠다고 했습니다. 한 독자가 이정서의 번역을 프랑스의 카뮈학회(Société des Études camusiennes)에 문의했고, 프랑스카뮈학회장이었던 아녜스 스피켈(Agnès Spiquel)은 이정서의 번역이 오역이며 고쳐야 한다고 지적했고, 이방인 번역을 다룬 서울대 불어교육과 김진하 교수의 논문에서는 이정서의 번역이 『이방인』을 몰이해했다고 지적했음에도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죠. 당시 이정서 씨는 노이즈 마케팅에 역풍을 맞았고, 정당하게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을 “바퀴벌레”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버릇을 남 주지 못한다는 겁니다. 저는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서 이정서가 번역한 모든 책의 책 소개를 읽었는데, 그 책에는 “하나도 빠짐없이” 기존 번역은 오역이고, 나만이 제대로 된 번역을 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나 말고는 다 의역이고, 나만이 직역이다’라면서요. 이게 말이 됩니까? 제가 『동물농장』에 관해 더 화나는 건, 이정서의 주장이 조지 오웰의 글쓰기와 정확히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오웰은 생전에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쉬운 글쓰기를 표방하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오웰을 숱한 영문학자와 번역자는 이해 못 하고 본인만 이해한다? 오웰의 근본부터를 몰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이정서의 번역서가 계속 신경 쓰여도 참고 있었던 건 그런 거였습니다. 이정서 번역 읽으면 얼마나 틀리고 인생이 바뀌기야 하겠냐, 그런 생각이었죠. 그런데 지속되는 꼬락서니를 보니 문제가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전 이슈가 된 정육각의 초신선 삼겹살 같은 거죠. 이정서와 그가 대표인 새움출판사의 마케팅이 그와 다른가요? 완벽한 번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불어 완벽한 해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심지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로 원서를 본다고 해도 완벽하게 저자의 의도를 이해할 순 없습니다.

그런데 이정서는 사소한 꼬투리 몇 개로 기존 번역은 다 잘못되었다고 하는데, 정작 본인의 해석이 오류가 많고 치명적인, 재밌는 사람이죠. 저는 이런 근거 없는 비방이 기존 번역의 정당한 가치를 폄훼하고, 출판시장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봅니다. 그리고 기존의 것은 뭔가 미심쩍다는 한국사회 특유의 심성 역시 한몫하는 것 같습니다. 가짜뉴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처럼. 그러기에 저는 이정서와 새움의 책을 믿고 거릅니다. 저는 이 번역가와 출판사의 작업물과 마케팅이 한국 출판계의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랭스로 되돌아가다』

디디에 에리봉은 뛰어난 지성사가이자, 사회학자이며 동시에 노동계급의 배경을 지닌 성소수자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랭스로의 귀환: 에리봉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의 고향인 랭스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에게 프랑스의 지방, 랭스는 자신이 잊었던, 잊으려 애썼던 장소로 계급적 모욕과 게이로서 성적 모욕을 당한 장소다. 그는 그곳에서 지금껏 애써 부정하려 했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가족의 역사: 에리봉은 전형적인 노동계급 가족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노동계급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초등학교 졸업장조차 가지고 있지 못하고 있으며, 그의 어머니 역시 그와 비슷하다. 가족 중 유일하게 사회적 상승 궤적에 진입했던 에리봉에게 노동자 가정의 거칠고 투박한 문화는 용인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그는 그렇게 자신을 구성해온 정체성을 무시하며 부르주아의 세계를 열망하고, 그들과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개인을 만들어내는 사회적 환경의 힘을 자각하게 된 지금의 에리봉은 이제 가족의 역사를 들춰보며 자신에게 폭력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마저도 다른 폭력에 의한 삶임을 깨닫게 된다. 당시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했던 그는 관념 속에서 노동자 개념을 이해하기만 했을 뿐 정작 현실의 노동자인 자신의 가족은 부인했던 과거를 회고한다. 실제 노동자인 가족과는 유리된 채, 그는 부르주아로 주체화하기 위해 노동자 개념을 공부했다.

개인의 역사: 가족의 역사를 살펴본 그는 개인의 역사, 즉 자신의 역사로 시선을 돌린다. 그는 부르디외를 경유하며, 자신 역시 분열된 하비투스의 소유자임을 고백한다. 즉, 한편으로 그는 학교의 교육체계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임을 자각하고 이에 격렬하게 대항했고, 한편으로는 교육체계의 교양과 고급스러운 문화를 동경하기도 했다. 부르디외처럼 그 역시 상층계급 문화의 혐오와 동경 사이에 자신의 삶을 만들었음을 회고한다.

“랭스는 내게 모욕의 도시이기도 했다.” 성소수자로서 지방 랭스는 사회적 폭력과 사회적 수치심을 안겨준 장소였다. 그것이 게이로서 그가 랭스를 떠나 파리의 성소수자 커뮤니티에 속하게 한 이유이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을 한계 짓고, 결정지었던 계급 정체성을 다시금 되돌아본다.

노동계급의 가정을 떠나 지식인이 되기로 결심한 그였지만, 그에게 부족한 것은 경제자본뿐 아니라, 그 진로에 필요한 조언 몇 마디마저 부족했다. 지식인 세계에서 한계를 경험했던 그는 당시의 자신을 이렇게 회고하기도 한다. “나는 내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도망쳐 나왔지만, 내 출신에 다시 덜미를 잡힌 셈이었다. 나 자신과 관련해 그동안 부인해온 진실이 다시 떠올랐고, 그것의 법을 강제했다.”

나는 책의 서사를 중심으로 이야기했지만, 에세이 형식을 가진 이 책에는 많은 사회학적 개념이 응축되어 있다. 계급, 정체성, 하비투스, 궤적, 정당성, 계급정치는 물론이고, 역자이신 이상길 선생님이 쓰신 해제 역시 매우 유익하다. 이런 주제나, 사회학에 관심이 독자는 무조건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어제, 이 책을 통해 사회학 고전 독서회를 진행했다. 특별 게스트로는 현재 부르디외 학파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부르디외와 한국 문학장을 주제로 연구하고, 아니 에르노의 대담을 번역하고, 디디에 에리봉의 비판이론에 관한 글을 쓰고 계신 박진수 선생님께서 함께 해주셔서 책의 맥락에 관해 다양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또 모임원 모두 책을 재밌게 읽고 열띤 토론을 이어나갔다. 귀중한 시간이었다.

부르디외는 개인의 사회적 삶과 위치를 인식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했다. 그의 이론에 힘입은 이 사회학적 자기분석은 개인을 위치지우는 사회의 힘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해방을 제공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삶을 결정지은 조건을 보게 함으로써 자신의 삶과 화해를 제공하기도 한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 애써 부정하려 했던 고향으로 되돌아와, 자신을 되돌아본 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책을 끝맺는다.

“나는 왜 그를 이해해보려고 하지 않았던가. 과거에 나는 왜 그와 대화해보려고 하지 않았던가. 사회세계의 폭력이 그를 이겼던 것처럼, 나를 이기도록 내버려두었던 것을 후회했다.”

내일이면 5·18 광주 민주항쟁 기념일입니다. <5월 18일, 광주>의 저자 김영택 선생님은 5·18 광주 민중항쟁을 “신군부라는 마피아적 정치군인집단이 정권을 찬탈하기 위해 무고한 광주 시민을 희생양으로 삼아 벌인 살인극에서 빚어진 것이고, 이에 가만히 앉아서만 당할 수 없는 광주시민들이 생과 사를 초월해 저항한 투쟁”으로 정의합니다. 저는 5·18 광주 민주항쟁이 한국 사회의 민주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봅니다. 천안문 6·4 항쟁 이후, 민주주의의 열기가 이어지지 못했던 중국과 다르게 한국은 이 사건을 끊임없이 재전유함으로써 민주화를 이끌어냈습니다. 시대적으로도 이제 5·18 광주 민주항쟁은 다행히도 민주화 역사의 ‘정통’으로 자리 잡은 것 같습니다. 물론 제대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겠죠. 5·18 광주 민주항쟁에 관한 책을 소개합니다.

1. <5월 18일, 광주>, 김영택, 역사공간

이 책은 5·18 광주 민주항쟁을 주제로 최초의 박사 학위를 받은 김영택 선생님이 쓰신 책입니다. 5월 광주에 관한 가장 자세한 기록이 담긴 책으로, 저자는 광주항쟁 당시 기자로 그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이기도 합니다. 책은 당시에 있었던 일을 분 단위까지 기록하며 세세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저는 광주항쟁에 관한 최고의 책이라고 봅니다.

2.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엮음, 창비

광주항쟁의 기록인 이 책은 원래 금서였습니다. 이른바 <넘어 넘어>라고 불리던 이 책이 2017년 수정증보판으로 재출간되었습니다. 기존에 있던 기록을 검증하고, 내용을 추가했습니다. 이 책은 광주항쟁 당사자들의 기록입니다. 광주항쟁에 관해 단 한 권의 책만 추천한다면 저는 이 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 2권이 광주항쟁의 사실을 중심으로 쓰였다면, 나머지 책은 광주항쟁을 해석한 책이다.

3. <5·18 광주 커뮤니타스>, 강인철, 사람의무늬

이 책은 종교사회학자 강인철 선생님이 커뮤니타스, 리미널리티, 사회극이라는 개념으로 광주항쟁을 재해석하는 책입니다. <시민종교의 탄생>, <경합하는 시민종교> 등에서부터 이어지는 강인철 선생님의 시민종교 시리즈에 있는 책입니다. 광주항쟁 연구의 성과를 종합하면서도 또 커뮤니타스, 리미널리티, 사회극이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광주항쟁을 인류학으로 또 감정사회학으로 재해석하는 수작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광주항쟁의 해석 중에 가장 추천하고 싶은 책입니다.

4, <오월의 사회과학>, 최정운, 오월의봄

이 책은 광주항쟁에 관한 가장 유명한 책입니다. 광주항쟁의 고전인 책이죠. 사실 별다른 수사가 필요 없는 광주항쟁에 관한 고전입니다. 광주를 사회과학적으로 재해석한 시초가 되는 책입니다. 더불어서 매우 흥미롭습니다.

5. <철학의 헌정>, 김상봉, 도서출판 길

광주항쟁을 철학적으로 규정하기 위한 작업입니다. 김상봉 선생님 특유의 개념인 서로주체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광주항쟁을 공동체로 재해석하는데, 이 역시 수작입니다.

 

한 권 덧붙이자면, <김군을 찾아서> 역시 중요한 저작이다.

오세라비 글에 관한 생각

안티 페미니즘 담론을 분석하기 위해 오세라비의 책을 읽고 드는 생각을 공유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세라비의 주장은 전체적으로 실증/논거도 부족하고, 레퍼런스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내용이 빈약하고, 오세라비의 주장은 합리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안티 페미니즘의 정서와 진영 논리로 소비되고 있다고 저는 판단합니다.

어디에도 무결하고 오류가 없는 이론은 없습니다. 페미니즘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한국 페미니즘의 일면에는 본질주의라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여성을 단일 범주로 구성하는 문제점이죠. 사실 ‘여성’이라는 범주에는 일반화할 수 없는 엄청나게 다양한, 사회경제적 특성을 지닌 개인이 존재하는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교차성의 측면에서도 특히 계층/계급성을 간과할 여지가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한국 페미니즘 운동이 전부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일면에 그런 조류가 있다는 겁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 오세라비가 페미니즘을 비판하더라도 제대로 비판한다면 담론장에도, 사회에도, 그리고 심지어는 페미니즘 운동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일종의 성찰을 제공할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오세라비의 주장은 전혀 그러지 못하다는 게 제 평가입니다.

앞서 말했듯, 오세라비의 치명적인 약점은 실증/논거가 없다는 겁니다. 오세라비는 “법적, 사회적으로 가부장제는 이미 끝난 시대다.”라고 주장합니다. 저는 동의하지 않지만,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렇게 말하려면 그만큼의 증거를 제출해야 합니다. 하지만 오세라비는 전혀 그런 증거를 제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가부장제는 끝났다.’는 말을 논증하려면 그만큼 치열하게 준비하고 경험적으로 자료를 모아 논증해야 할 겁니다. 그런데 오세라비는 전혀 그런 논증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 훈련조차 안 된 사람 같고요.

그럼 어떤 효과가 발생할까요? 객관적인 자료가 하나도 없으니, 결국 저 문장을 읽은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할 겁니다. 그리고 기준 자체도 존재하지 않으니, 인식의 격차는 훨씬 더 벌어지겠죠. 이게 오세라비가 제대로 된 담론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닌, 안티 페미 정서를 등에 업은 장사꾼인 증거입니다.

다음으로는 레퍼런스 부족인데, 오세라비는 본인이 원조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는데 정작 책을 보면 나오는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는 아주 기초적인 수준입니다. 당장 페미니즘이 가진 논리의 핵심에 도달하지도 못할뿐더러, 급진 페미니즘이 해체주의로 간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도 합니다. 고작 레퍼런스라고 제시하는 건 진중권·서민 등의 인터넷 신문이 전부죠. 그런 식으로 가상의 적만 생산해 허공에 쉐도우 복싱을 합니다.

또 논리적으로도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세라비는 페미니즘의 일부 조류인 급진 페미니즘의 피해자주의를 전체 페미니즘으로 환원하고, 이를 비판하는데, 오세라비에게 정작 청년 남성은 모두 피해자입니다. 오세라비는 여성의 피해자주의는 비판하면서 정작 청년 남성의 피해자주의를 옹호합니다. 이거야 말로 자신이 비판하는 분리주의죠. 청년 남성 역시 동일한 범주로 보기 어려운 집단입니다. 다음으로는 세대론인데, 기성세대 남성과 젊은 남성을 비교합니다. 기성세대 남성 중 우리가 아는 586남성은 극소수일뿐더러 기성세대 남성 중 가부장제의 특혜를 받고도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남성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오세라비는 이것 역시 일반화하죠.

복지를 비판하는데 그냥 초보적인 수준입니다. 좋은 말은 누구든 할 수 있습니다. “복지 예산이 낭비되는 것을 막아야 하고, 복지 예산의 부정 수급을 막아야 한다” 이거 제가 금방 지어낸 말인데요, 이 정도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수준에서 뭐가 문제인지 분석해야 그게 제대로 된 비판이고, 논증이죠. 제가 느낀 오세라비의 전체적인 담론 수준은 학부생 1·2학년 정도 같습니다. 조롱이 아니라 진지하게 말하는 겁니다. 오세라비는 제대로 된 훈련이 전무해 보여요. 저 같으면 이 정도 글을 쓰고 출판한다? 개명하거나 아예 절필할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현실’이 아닌, ‘인식’으로서 자료를 취급하기 때문에, 서술이 현실과 부합하는지는 판단하지 않고, 그들이 가진 인식에 초점을 맞추니, 다 자료이긴 합니다. 다만 그들의 인식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어서 몇 자 적습니다.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에 대한 생각

최근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Apocalypse Never>이 번역되었다. 책이 나왔을 때부터 책의 목차를 살피고 출판사의 소개를 읽었다. 어떤 새로운 내용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후변화가 과장된 위협이라는 논의는 아마 기후변화라는 문제를 제기한 순간부터 이어졌을 것이고, 이 책 역시 그런 맥락에 있는 책이다. 이 책이 위치한 맥락과 이 책을 둘러싼 반응을 보고 글을 몇자 적는다.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은 출간된 이후 이 주제를 다루는 책 중에는 잘 팔리고 있는 것 같다. 출판사에서는 긴급 중쇄를 했다고 하고, 교보문고를 비롯한 인터넷 서점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교보에서는 정치/사회 분야 1위라고 한다. 이 책이 갑자기 각광 받는 이유가 여럿일 텐데, 첫째로는 ‘한국에 이런 담론이 제대로 수입되지 않아서’라고 생각한다. 기후변화를 극우적이거나 음모론적으로 비난하는 이른바 ‘트럼프식 담론’도 아닌, 환경운동가가 환경운동 담론을 비판하고,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한다는 게 이 책의 매력 포인트일 거다. 하지만 해외에서는 이런 담론은 이미 클리셰 중 하나가 된 것 같다.

두 번째로 눈에 띄는 것은 이 책을 정당화의 무기로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SNS에 이 책을 링크한 사람의 글을 읽으면 많은 사람이 내가 원하던 내용을 담은 책이 나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여기에서 세속적 부를 추구하라는 종교 서적이 베스트셀러였던 상황이 겹쳐 보인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은 이 책을 접할 때, ‘환경운동의 종말론적 담론, 극단적 메시지는 정확한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이 책을 기다리던 사람이 이 책을 읽는 이유는 그저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기 위한 무기인 것이다. ‘기후위기는 과장됐대, 새로 책 나온 거 보니까 그렇더라, 우리 그냥 이대로 살면 돼.’하며 귀찮음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정치/경제적 맥락 안에 존재한다. 이 책을 포함한 이런 부류의 책은 기업, 보수언론의 지지를 받는데, 이는 이 책에서 선언하는 메시지가 그들에게 친화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담론과 미국 기업/보수 정치의 연관성 역시 존재한다.

이 책에 대한 비판적 논평을 두 편 읽었다. 하나는 Peter H. Gleick이라는 학자의 비판인데*, 그는 태평양 연구소 명예 소장, 미국 국립 과학원 회원, 맥아더 펠로우 등을 역임했다. 이 사람의 논평은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에서 셸런버거가 가진 문제를 전반적으로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리고 가디언에 실린 Bob Ward의 논평은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과 비슷한 맥락의 <False Alarm>이라는 책을 함께 논평하는데**, Bob ward는 런던정경대학 기후변화환경연구소 소속이다. 이 기사에서는 셸런버거의 주장 중 타당한 부분을 일부 인정하지만, 내용을 비판하고, 전반적인 자료가 체리피킹 되었음을 지적한다.

셸런버거가 주장하는 내용이 일견 타당하다고도 생각한다. 환경을 위한 효율적인 길을 찾아야 한다. 단, 체리피킹은 안 되고. 또 어디든 극단주의자는 있기 마련이고, 그들의 과격한 주장에는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특히 한국의 경우 환경 근본주의자가 정책 입안에서 권력을 행사하거나, 환경 근본주의 정당이 유의미한 지지를 얻고 있는가? 당연히 아니다. 쉐도우 복싱, 허수아비 논증도 안 된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이 책에 전부 동의하게 되더라도, 한국에서 극소수의 환경 종말론자/근본주의자의 해악보다는 무관심한 절대다수의 해악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책은 그 절대다수에게 용기를 불어넣는다.

이런 문제는 왜 발생하는가? 환경 문제가 고도로 전문화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원전에 대한 제대로 된 지식은 소수의 전문인만 판단할 수 있다. 나 같은 사람은 눈 뜨고 코 베일 수 있다. 원전에 관해 하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민/관 차원에서 시민과학을 증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한다.

 

6월 18일 기준으로 이 책을 읽었다. 책을 안 읽고 글 쓰는 문제를 가지고 시비를 따지는 분들이 많으셔서 굳이 읽었다. 이에 관해 얘기해 보자.

 

내가 처음 이 글을 쓴 목적은 책보다는 책을 둘러싼 지형에 관해 이야기 하고 싶어서, 그런 이유였다. 그렇기 때문에 책보다는 책을 둘러싼 이야기를 사실에 기반해 글을 썼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책을 읽지 않았어도 문제는 되지 않는다.

 

두번째로는 이 책의 내용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 전문가의 비평을 인용했다. 한 사람은 태평양 연구소 명예 소장, 미국 국립 과학원 회원, 맥아더 펠로우 등을 역임한 피터 글릭이라는 학자고, 한 사람은 런던정경대학 기후변화환경연구소 소속의 밥 워드다. 나는 이들이 전문성을 가지고 공개적으로 게재한 비평을 신뢰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용을 인용해서 비판하는 부분, 그리고 출판사의 책 소개와 연관해서 책 내용의 간접적 비판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런 식으로 글을 써서 문제가 되는 경우는 내가 인용한 전문가의 인용과 비판 내용이 틀렸을 때 유효하다. 내가 인용한 리뷰가 책에 없는 내용을 인용해 비판했다면 진실성이 없으니 문제일 것이나, 나는 이 전문가와 그의 글을 신뢰한다. 만약에 밑에 첨부한 이들의 평가에 오류가 있다면 이 글을 수정할 것이다. 하지만 이를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뭐, 읽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끝으로 굳이 책을 읽었으니 하나만 지적하자. 책에서는 기후변화의 티핑포인트인 평균 기온 4도 상승을 문제 삼으면서, 기온 상승은 2~3도에 머물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이게 다분히 문제 있는 주장인 것은 평균의 함정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기후변화에 대한 데이터를 보면, 1도 상승은 단순한 1도 상승이 아니다. 기후변화가 발생하면서 극단값이 상승하고 있다. 그러니까 기온은 단순히 1도가 오를지 모르지만 혹한기가 더 추워지고, 혹서기는 더욱 더워지면서 기온은 서서히 상승한다. 더불어서 지구적 차원에서 봤을 때 이런 기후변화에 취약한 것은 한국 같은 중위도 지역의 사람이 아니라 극지방에 사는 사람들이다. 저자는 원주민은 정말 위한다고 하면서 이런 부분은 슬쩍 빼버린다. 스스로 환경전문가라고 자처한다면 이 정도는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아주 평범한 소시민인데도 알고 있는 사실인데 말이다.

 

이 책에 관한 독서를 마무리 하고도 결론은 뒤바뀌지 않는다. 저자의 주장에는 물론 유효한 지점이 존재한다. 극단적, 종말론적 환경주의자의 주장에는 문제점이 존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게 비효율적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리고 한국의 상황에서는 더더욱 종말론적 환경주의자보다 기후변화에 무관심한 대다수의 해악이 크다고 본다. 특히 이 책을 보면서 기후변화는 과장되었으니 앞으로 변화가 필요 없겠다는 냉소적 시각이 더 위험하다고 본다.

*Book review: Bad science and bad arguments abound in ‘Apocalypse Never’ by Michael Shellenberger

**False Alarm by Bjorn Lomborg; Apocalypse Never by Michael Shellenberger –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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