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정가제의 필요, <도서정가제가 없어지면 우리가 일고 싶은 책이 사라집니다>

현행 도서정가제가 시행된 지 벌써 7년째입니다. 도서정가제가 제정되는 즈음 이른바 단통법도 시행되면서, 도서정가제는 ‘책통법’이라는 부정적 의미로 통용되곤 했죠. 저는 처음부터 도서정가제를 찬성하는 편이었습니다. 한국의 경우 군소 출판사가 많기 때문에, 지나친 경쟁이 발생하면 출판생태계의 다양성이 훼손된다는 이유였습니다. 물론 언제나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학생이라 도서정가제 이전이 종종 그리울 때도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요.

이 책, <도서정가제가 없어지면 우리가 일고 싶은 책이 사라집니다>는 한국출판인회의에서 엮고, 책과사회연구소 대표, 한국출판정책연구회 회장인 백원근 선생님이 집필하셨습니다. 책은 도서정가제의 필요성, 개정(현행) 도서정가제의 긍정적 효과, 도서정가제 폐지론에 대한 반박, 도서정가제의 미래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은 도서정가제의 취지와 논리를 설명하고, 도서정가제 이후 긍정적 변화를 사실에 기반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도서정가제의 핵심은 ‘독서생태계의 다양성 보호’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책은 문화적 공공재입니다. 책에서 나오듯, 책의 공공재적 성격 때문에 부가세가 면제되고, 국비로 도서관을 운영하죠. 그래서 자유시장의 논리보다는 이것을 어느 정도 완화할 규제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게 도서정가제입니다.

출판사와 서점 입장에서는 당연히 ‘대형 출판사’와 ‘대형 서점’이 경쟁에 유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형 출판사 같은 경우 출판 인프라가 형성되어 있어서 가격 경쟁을 시행해도 출판 부수로 이윤을 보전할 수 있을 겁니다. 대형 서점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형 인터넷 서점의 경우에는 출혈적인 가격 경쟁, 과도한 마케팅을 해도 유통가를 지역 서점보다 훨씬 낮게, 많이 구매할 수 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고, 대형 오프라인 서점도 비슷할 겁니다. 하지만 군소 출판사와 지역 독립서점은 이런 경쟁에서 살아남기가 어려워지겠죠. 이런 상황에서 독서생태계의 다양성은 감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서정가제는 전 세계가 시장인 OECD 영어권 국가를 제외한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스위스, 일본 등의 국가에서 시행되고 있습니다. 도서정가제 이후, 출간 도서의 다양성이 크게 증진되었고, 독립서점이 500개 이상 설립되었습니다. 도서정가제가 독서생태계의 다양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방증일 겁니다.

한때, ‘도서정가제 폐지’ 국민청원이 등장해 이슈가 됐죠. 이 책에서는 해당 국민청원에 대한 팩트체크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해당 청원은 1)서점 수 감소 2)독서율 감소 3)책 값 인상 4)출판사업 매출 규모 축소 5)평균 발행부수 감소 6)해외와의 차이를 들어 도서정가제 폐지를 주장했죠. 하지만, 책의 자료에 의하면, 1)참고서 위주가 아닌 독립서점의 증가로 전체 서점 수 증가 2)독서율 감소의 주된 원인은 사회 환경 변화(문체부 국민 독서실태 조사) 3)정가제 이후 상승률이 감소, 전체 소비자 물가지수 대비 적게 상승 4)매출 규모 상승(문체부 통계) 5)소품종 대량 생산에서, 다품종 소량 생산으로 변화 6)한국 출판문화의 차이 등의 이유로 해당 청원에 반박하고 있습니다.

저는 대부분 출판계의 반박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특히 한국의 경우는 책이 정말 싼 편입니다. 해외 서적을 구매하시는 분들은 다 느끼실 겁니다. 저는 큰 틀에서 현행 도서정가제를 지지하는 편이고, 완전 도서정가제로 개정되는 것도 동의합니다. 물론, 출판 시장의 위탁 판매제도나 유통구조 개선은 정가제와 관계없이 개선되었으면 좋겠고, 오래된 서적의 오프라인 할인 판매 등의 개정은 좋지 않나 싶습니다. 독서생태계 다양성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요.

책에서 사용하는 몇몇 논거는 조금 더 따져봐야 할 것 같다 느끼기도 했지만, 이 책은 2,000원짜리 팸플릿이고 간명하게 사실을 전하고 있기에 그런 건 독자의 몫이겠죠. 저는 도서정가제를 지지합니다. 도서정가제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당연히 나만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책은 공공재다’, ‘독서생태계의 다양성이 중요하다’ 같은 가치함축적인 문장에 충분히 다른 생각을 가지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책을 사랑하시는 분이라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시고 출판계의 입장을 충분히 들어보시는 것도 좋아 보입니다.

믿고 거르는 새움과 이정서

작년 2월에 이정서 역의 『이방인』에 대한 포스팅을 했습니다. 어쩌다 보니, 이정서 씨가 본인이 대표인 새움 출판사에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번역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저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생각했습니다. 또 ‘기존 번역은 엉터리고, 이 책을 오독하고 있다. 내 책만이 세밀한 뉘앙스까지 번역한 진짜 번역서다.’라고 마케팅하겠구나, 싶었습니다. 역시는 역시 역시였죠.

다른 SNS에 새움의 『동물농장』 홍보 게시물이 떴습니다. 이 책의 경우, 제가 서평을 쓰기 위해 역본을 2개 비교하고, 원서도 참고했기에 어느 정도 할 얘기가 있을 거라 봤는데, 처음부터 이상한 소리를 하더군요. 책의 처음에 나오는 ‘Manor farm’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여기서 manor는 장원에 딸린 영지를 말하는데, 민음사의 도정일 역은 이를 살리지 못했다는 겁니다. 저는 도정일 역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manor에서 오웰이 의미하고자 했던 바는 이정서의 주장이 맞을 겁니다. 그러면 제가 그 게시물을 보면서 무릎을 탁!치고 ‘이런 숨은 의미가! 당장 이정서 역을 봐야지!’라고 했을까요?

정답은 ‘아니다’입니다. 제가 참고했던 김욱동 역(비채)과 김기혁 역(문학동네)에서 이미 그에 대한 정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할 것도 없는 정보입니다. 위키백과에도, 꺼무위키라 불리는 나무위키에도 나오는 정보죠. 그런데 이정서 씨와 그가 대표인 새움 출판사는 이게 엄청난 정보인 양 포장해서 마케팅합니다. ‘기존 번역은 잘못됐고, 드디어 내가 온전히 이 책을 번역했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예전 이방인 포스팅에도 말했듯, 이정서 씨는 본인만이 『이방인』을 제대로 번역했다고 하면서 자기 책에 오역이 있으면 전량 폐기하겠다고 했습니다. 한 독자가 이정서의 번역을 프랑스의 카뮈학회(Société des Études camusiennes)에 문의했고, 프랑스카뮈학회장이었던 아녜스 스피켈(Agnès Spiquel)은 이정서의 번역이 오역이며 고쳐야 한다고 지적했고, 이방인 번역을 다룬 서울대 불어교육과 김진하 교수의 논문에서는 이정서의 번역이 『이방인』을 몰이해했다고 지적했음에도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죠. 당시 이정서 씨는 노이즈 마케팅에 역풍을 맞았고, 정당하게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을 “바퀴벌레”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버릇을 남 주지 못한다는 겁니다. 저는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서 이정서가 번역한 모든 책의 책 소개를 읽었는데, 그 책에는 “하나도 빠짐없이” 기존 번역은 오역이고, 나만이 제대로 된 번역을 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나 말고는 다 의역이고, 나만이 직역이다’라면서요. 이게 말이 됩니까? 제가 『동물농장』에 관해 더 화나는 건, 이정서의 주장이 조지 오웰의 글쓰기와 정확히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오웰은 생전에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쉬운 글쓰기를 표방하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오웰을 숱한 영문학자와 번역자는 이해 못 하고 본인만 이해한다? 오웰의 근본부터를 몰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이정서의 번역서가 계속 신경 쓰여도 참고 있었던 건 그런 거였습니다. 이정서 번역 읽으면 얼마나 틀리고 인생이 바뀌기야 하겠냐, 그런 생각이었죠. 그런데 지속되는 꼬락서니를 보니 문제가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전 이슈가 된 정육각의 초신선 삼겹살 같은 거죠. 이정서와 그가 대표인 새움출판사의 마케팅이 그와 다른가요? 완벽한 번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불어 완벽한 해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심지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로 원서를 본다고 해도 완벽하게 저자의 의도를 이해할 순 없습니다.

그런데 이정서는 사소한 꼬투리 몇 개로 기존 번역은 다 잘못되었다고 하는데, 정작 본인의 해석이 오류가 많고 치명적인, 재밌는 사람이죠. 저는 이런 근거 없는 비방이 기존 번역의 정당한 가치를 폄훼하고, 출판시장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봅니다. 그리고 기존의 것은 뭔가 미심쩍다는 한국사회 특유의 심성 역시 한몫하는 것 같습니다. 가짜뉴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처럼. 그러기에 저는 이정서와 새움의 책을 믿고 거릅니다. 저는 이 번역가와 출판사의 작업물과 마케팅이 한국 출판계의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체인지 그라운드, 로크미디어에 관해

오늘은 거를 출판사를 다룰 예정이다. 굳이 다루는 건 이들이 한국 출판문화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판단했다. 신영준·고영성은 체인지 그라운드, 로크미디어 운영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체인지 그라운드와 로크미디어(임프린트 브론스테인, 안드로메디안, 비잉, 커넥팅, 베리타스, 호모루덴스까지 다 같은 출판사)의 책을 거르는 첫 번째 이유는 여기서 다루는 컨텐츠의 질이 낮아서다. 두 번째는 부도덕한 처사와 이로 인한 출판계의 악영향을 꼽겠다.

1. 무단전재 및 짜깁기: 신영준·고영성의 <일취월장>은 본문 17.5%가 무단전재이고, 내용 중 75%가 인용되었으며, 몇몇은 참고문헌의 내용을 왜곡 인용한 것이다. 신영준·고영성의 저작권 침해에 관한 내용은 MBC 뉴스데스크에서도 다뤘다. 신영준은 ‘저작권료를 지불하면 그만이다’라는 식으로 대응했는데 이건 윤리의식이 없는 거다. 처벌받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거다. 이러니 컨텐츠가 저질일 수밖에 없다. 대학생 레포트 정도의 글쓰기다. 참고문헌을 읽는 게 낫다고 본다.
출처: http://www.ziksir.com/ziksir/view/8903#0DQ5
출처: https://imnews.imbc.com/replay/2019/nwdesk/article/5401839_28802.html

2. 빅보카: 빅보카는 빅데이터를 사용해서 필수 영어 어휘를 추려냈다고 선전해 대박이 난 책인데, 데이터 마이닝부터 문제가 있다. 고민 없이 빅데이터란 그럴싸한 이름으로 책만 판 것. 더불어 네이버 사전과 70% 이상 일치한다. 이건 도용과 연관된다. 역시 저질의 컨텐츠.
출처: https://www.dogamdan.org/bigvoca?fbclid=IwAR2YPHvkYTXGtgAAPFkx9MFSkPkLUoZzoi8P3lnzMFrRJUwYN_uDpmGaWlA

3. 번역의 질: 로크미디어와 임프린트는 지속해서 번역의 질이 낮다는 평을 받고 있다. 출처에 구체적 예가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출처: https://www.dogamdan.org/blog/rokmedia?fbclid=IwAR2EO0kunKL5FDkR1147pVOJb2Ql0_DdkctAUn5OcYe3dwqXdiN5rW-ocOA

4. 모순된 내용: 신영준·고영성은 항상 엄선된 책만 번역한다고 한다. 그런데 엄선한 <영양의 비밀>, <당신은 뇌를 고칠 수 있다>, <오래도록 젊음을 유지하고 건강하게 죽는 법>은 서로 모순된 내용으로 다투고 있다. 이들한테 필요한 건 책 판매지, 제대로 된 지식이 아니라는 방증이다. 자세한 내용은 출처를 참고하시길.
출처: https://www.dogamdan.org/blog/trilemma?fbclid=IwAR08eeQqnj3HkOLfUnJmFJvE3yGr80aK3Jf9pNgL1HkATauAOjDFOYE1-AI

5. 도덕성: 대표적으로 서평마케팅, 뒷광고, 사회적 기업 사칭, 막말 강연을 꼽을 수 있다. 신영준은 서평 모임을 무료로 진행하는 대신 자기 회사의 책을 홍보하고, 글의 내용보다는 조회수만 관심이 있다. 일종의 다단계. 뒷광고 역시 심각한 수준. 또 사회적 기업을 사칭해서 과태료를 부과받았고 심각한 막말 강연도 했다.
출처 https://imnews.imbc.com/replay/2019/nwdesk/article/5401841_28802.html
출처: https://www.dogamdan.org/blog/deception?fbclid=IwAR0x-hSPgARtf6PWtl1iCLfYmHXz7qjSNOra28Aw_vZuCeJ3_E8_YGcoBew
출처 https://www.facebook.com/dogamdan/posts/217101256339149
출처 https://ppss.kr/archives/210568?fbclid=IwAR08eeQqnj3HkOLfUnJmFJvE3yGr80aK3Jf9pNgL1HkATauAOjDFOYE1-AI

로크미디어(임프린트 브론스테인, 안드로메디안, 비잉, 커넥팅, 베리타스, 호모루덴스)의 최대 문제는 컨텐츠가 저질이라는 것이고, 대응을 보았을 때 개선의 여지가 없다. 또 뒷광고, 서평마케팅 등을 통해 소비자를 우롱하고, 출판시장을 더럽히고 있다. 이들은 근본주의 종교인 같이 이야기하는데, 그게 공고한 팬덤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는 것 같다. 나는 이들에게 피해받지 않으시길 바라고, 더불어 출판문화를 위해 이들의 컨텐츠 소비를 지양해주시길 부탁드린다.

윤동주 기일과 두 권의 책

2월 16일은 윤동주의 기일이라, 윤동주에 관한 두 권의 책을 소개하려고 한다. 윤동주는 언제나 맑음이 느껴졌던 사람이다. 내가 가장 많이 필사한 시인이기도 하다. 그만큼 윤동주에 대한 애정이 있는데, 내가 가장 추천하는 책은 <정본 윤동주 전집>과 <처럼 시로 만나는 윤동주> 두 권이다.

1. <정본 윤동주 전집>: 윤동주의 시는 엄중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쓰였기 때문에, 자칫 빛을 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런 윤동주의 원고를 친구인 정병욱이 간직하고 있었다. 친구 강처중과 시인 정지용이 그 원고를 편집했고, 그것을 토대로 1946·1948년 두 번에 걸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정음사를 통해 출간하게 된다. 이 시집은 윤동주 시집의 표준이 되었고, 여전히 저 제목으로 하고 있다.

그러다 1999년 윤동주의 유족이 <윤동주 자필 시고 전집>을 발간했는데, 이를 토대로 출간된 시를 검토해보니 미출간된 시가 나오고, 검열을 피해 수정했던 원고가 발견되고, 시의 본문이 추가되거나 삭제되고, 연 또는 행의 배열이 달라졌으며 많은 출판본의 잘못된 어휘가 바로잡히기도 했다. 그런 연구의 성과에 의해 출간된 책이 <정본 윤동주 전집>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서시”라고 알고 있는 시는 윤동주가 제목을 부치지 않은 무제(無題)의 시다. 또 “별 헤는 밤”의 경우, 우리가 아는 마지막 연 “그러나 겨울이 ~ 무성할 거외다”라는 구절은 윤동주가 시를 완성하고 추가로 쓴 글이라 원본 확정에는 제외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많은 부분 시의 구성이 변한 구절이 있는데, 시인의 마음을 느끼기 위해서는 한창 유행했던 초판본 디자인보다는 <정본 윤동주 전집>을 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2. <처럼 시로 만나는 윤동주>: 이 책은 숙명여대 김응교 교수님이 쓰신 책으로 윤동주 평전이자 해설서, 입문서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의 특징은 윤동주의 삶과 함께 문학을 풀어낸다는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윤동주에게 관심 있는 독자에게는 굉장히 좋은 책이다. 이 책은 시를 중심으로 한 평전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독자에게는 사학자 송우혜 선생님의 <윤동주 평전>보다 추천할 만한 책이다.

이 책의 특징은 윤동주 시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데에 있다. 예를 들면 윤동주가 쓴 정말 많은 동시(童詩)를 포함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시를 대상으로 한다. 저자는 윤동주가 동시에서 형상화한 주제 의식이 윤동주 시의 원형을 구성한다고 분석한다. 동시에 저자는 특유의 민족주의적 파토스를 가지고 윤동주 시에 관한 기존의 해석과 궤를 달리하는데, 이 역시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또 구어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친절하면서도 매우 꼼꼼함을 엿볼 수 있기도 하고, 저자의 출간기념회에 참여했던 나는 김응교 선생님이 윤동주를 다루는 방식을 기억한다. 그것만으로도 추천할 책이다.

복간된 남자의 자리

 

“최근에서야 나는 소설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질적 필요에 굴복하는 삶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술적인 것, 무언가 흥미진진한 것 혹은 감동적인 것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나는 아버지의 말과 제스처, 취향, 아버지의 인생에 영향을 미쳤던 사건들, 나 역시 함께 나눴던 한 존재의 모든 객관적인 표적을 모아보려 한다.” 20p.

1. 자기분석: 우리에게 소설가로 유명한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작업을 ‘자전적 소설’이 아닌 부르디외적 의미에서의 ‘자기분석auto-analyse’으로 규정한다. 문학사회학자와의 대담에서 에르노는 “부르디외 이전엔 아무도 저에게 그와 같은 파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습니다. 다른 형태의 사회적 고찰에서는 그와 같은 것을 결코 발견할 수 없었어요. 그것은 크나큰 차이를 낳았습니다”라고 회고하며, 70년대 부르디외를 접한 에르노는 아버지의 삶을 써야겠다고 결심한다(오늘의 문예비평 2020 가을호 에르노와 샤르팡티에 대담, 박진수 역).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삶을 사회적 시선으로 분석하는 <남자의 자리>다.

2. 계급횡단자Les Transclasses: 책에서 볼 수 있듯, 에르노는 사회적 상승 이동을 경험한 계급횡단자(혹은 탈주자transfuge)이다. 가난한 집안 출신이지만, 교사의 지위를 획득하고 부르주아 남성과 결혼함으로써 상류층에 편입한다. 아버지의 죽음 뒤, 그의 자리를 반추하는 <남자의 자리>는 상승 이동을 경험한 에르노의 다양한 사회적 시선이 응축되어있다. 에르노가 목격하고 되새긴 아버지의 삶은 농장의 고된 노동에서 자연을 향유하는 것이 불가능한, “대지의 어머니의 장엄함”을 느낄 수 없는 삶이며, 동시에 프랑스 문학 속에 구현된 동시대 부르주아와는 다른 삶이었다. 그 속에서 에르노는 아버지에게 배운 언어를 학교 선생님에 의해 교정 당하고, 또 공부하며 새로운 지식을 배울 때마다 그와 벌어지는 사회적 거리를 느끼게 된다.

3. 사회적 폭력: 에르노는 아버지의 죽음 뒤 사진을 통해 그의 삶을 하나하나 짚어본다. 교양이나 지식이라는 여유와 거리가 멀었던 그의 삶은 무지에 의해 누군가에게 폭력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지배 문화에 의해 상처를 받기도 했다. 제대로 된 철자를 알지 못해 벌어진 해프닝 속에서의 부끄러움, 처음 딸을 데리고 간 도서관에서 겪었던 문화적 상처, 그 미묘하면서도 지성적인 폭력의 경험을 에르노는 이 책 안에 형상화한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눈치, 미묘한 시선, 작은 제스처를 통한 폭력, 그리고 그로 인한 ‘사회적 주눅’까지. 에르노는 “공부는 좋은 환경을 얻고 노동자와 결혼하지 않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이었다고 표현하는데, 그렇게 자신의 계급에서 횡단한, 혹은 탈주한 삶을 통해 에르노는 아버지의 삶을 다시 볼 수 있게 되고 그 기록이 바로 <남자의 자리>다.

4. 에르노와 함께: 나는 에르노는 읽는 한 방법으로 부르디외를 이야기했다. 말년의 그는 자신이 만든 자본, 하비투스, 장(field) 개념을 통해 자신의 삶을 분석했다. 그것이 유작 <자기분석을 위한 개요Esquisse pour une auto-analyse>이다. 부르디외는 사회적 삶을 이해하는 다양한 사고의 도구를 제공했고, 에르노 역시 이에 빚진 사람이다. 얼마 전에 출간된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 역시 이런 관점에서 극단까지 밀어붙인 자기분석의 결과이고, 에두아르 루이의 <에디의 끝> 역시 그렇다. 부르디외의 자기분석은 계급적 상황에 한정되었다면, 에르노, 에리봉, 루이를 통해 자기분석은 여성과 퀴어의 경험으로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에르노를 읽는 한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에르노는 에르노이기도 하다.

“물론 들었던 단어와 문장에 최대한 가깝게 써야 하는 이런 작업에서 글쓰기의 행복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때때로 볼드체로 강조했던 문장들은 독자들에게 중의적인 의미를 나타내거나, 내가 모든 형식에서 거부했던 향수, 감동, 조롱을 공모하는 쾌락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저 그 단어와 문장이 아버지가 살았던 세계이자 내가 살았던 세계이기도 한 곳의 한계와 색깔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어떤 단어를 다른 단어로 받아들이는 법이 없었다,” 40~4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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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큐레이터 아틀라스의 올해의 책과 한 줄 평

1. <종교생활의 원초적 형태> 에밀 뒤르켐 한길사: 말년 뒤르켐의 농축된 사회학적 관록이 종교를 통해 표현된 명서, 한편으로는 칸트를 넘어서는 사회학적 인식론을 구축한 역작.

2. <사회적 체계들> 니클라스 루만 한길사: 현대 사회학 이론의 가장 높은 성취이자, 도달한 가장 높은 봉우리.

3. <편견> 고든 올포트 교양인: 차별과 혐오의 근원으로서 편견의 기원과 작동에 관한 사회심리학의 고전.

4. <상징권력과 문화> 이상길 컬처룩: 20세기의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문화와 예술에 관한 특징과 한계를 정직한 이해와 프랑스 지성사 속에서 풀어내고 있는 책.

5. <상징투쟁의 사회학> 김동일 커뮤니케이션북스: 부르디외의 이론을 기반으로, 예술장(field)에서 이루어지는 격렬한 미학적 투쟁으로 가시화되는 정당성 투쟁을 분석하는 책.

6. <사회학 용어 도감> 다나카 마사토·가츠키 타카시 성안당: 사회학을 처음 공부할 때 접근하기 가장 편하면서도 포괄적인 책.

7. <포스트 코로나 사회> 글항아리 & <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 돌베개: 코로나 이후의 사회의 단면과 간과한 것, 아픈 것에 관해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진지하게 분석한 책들.

8. <5·18 광주 커뮤니타스> 강인철 사람의무늬: 80년 해방 광주에서 벌어진 집합적 열광을 사회극이라는 인류학적 접근을 통해 재구성하고, 그를 둘러싼 역사전쟁을 시민종교의 측면에서 다룬 저작.

9. <능력주의> 마이클 영 이매진: 능력주의(meritocracy)의 효시가 되는 기념비적 저작.

10. <가난의 문법> 소준철 푸른숲: 한 사회학자가 4년에 걸친 현장 연구를 통해 만들어낸 우리 시대 빈곤의 표상에 관한 이야기.

11. <김군을 찾아서> 강상우 후마니타스: 한쪽에서는 시민군으로 한쪽에서는 북한군으로 호명되는 ‘김군’을 찾기 위한 저자의 7년의 노력이 응축된 책, 역사 이면에 이야기되지 않았던 얼굴들에 관한 이야기.

12. <4·3과 여성, 그 살아낸 날들의 기록> 제주4.3연구소 각: 역사의 폭력이 남긴 여성의 일상에 관한 이야기‘들’.

읽지 못했지만 주목한 책

<마키아벨리의 꿈> 곽차섭 도서출판길
<누가 백인인가> 진구섭 푸른역사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와이즈베리
<일상적 국민주의> 마이클 빌리그 그린비
<자본과 이데올로기> 토마스 피케티 문학동네
<화이트> 리차드 다이어 컬처룩
<보이지 않는 여자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웅진지식하우스
<정치적 낭만주의> 칼 슈미트 에디투스
<엘리트 세습> 대니얼 마코비츠 세종서적
<문명과 혐오> 데릭 젠슨 아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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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멋 설(說)  (0) 2020.09.25

아니 에르노의 <사건>

읽기 힘든 책이었다. 이 책에서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임신중절 경험을 적나라하게 고백한다. 이 책의 분류는 소설이지만, 에르노는 자신의 작업이 ‘사회학적 자기분석’임을 밝힌 바가 있다. 허구와 실재, 문학과 사회학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에르노의 특징은 이 책에서도 여실하게 드러난다.

이 책에서 에르노는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어렵게 당시 불법이었던 낙태를 결심하고 이를 한 간호조무사에게 불법 시술받고 잘못 되어 결국 병원에 가게 되기까지 하는 순간을 가감 없이 그려낸다. 이 적나라한 현실을 마주하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그러나 에르노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분노나 혐오감을 자극할 수도 있을 테고, 불쾌감을 불러일으켜 비난을 살지도 모르겠다. 어떤 일이든 간에, 무언가를 경험했다는 사실은, 그 일을 쓸 수 있다는 절대적인 권리를 부여한다. 저급한 진실이란 없다. 그리고 이런 경험의 진술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는다면, 나 또한 여성들의 현실을 어둠 속으로 밀어 넣는 데 기여하는 셈이며, 이 세상에서 남성 우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1960년대, 가톨릭의 나라 프랑스에서 20대 초반이 여성이 겪었던 경험은 매 순간 너무나 폭력적인 것이었다. 아니 에르노는 이것을 담담한 필치로 표현하기에 더욱 강렬하다. 자신이 처한 계급, 젠더, 사회적 낙인, 종교, 사회적 관념이 얽어져 만들어낸 ‘사회적 상처’를 느낄 수 있다.

“그저 사건이 내게 닥쳤기에, 나는 그것을 이야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내 삶의 진정한 목표가 있다면 아마도 이것뿐이리라. 나의 육체와 감각 그리고 사고가 글쓰기가 되는 것, 말하자면 내 존재가 완벽하게 타인의 생각과 삶에 용해되어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무엇인가가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이 책은 마무리된다.

동물농장, 성찰하는 삶에 관하여

 

이성과 계몽 위에 정초 된 근대사회에서 인류는 문명의 진보라는 장밋빛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압도적인 과학과 기술의 발전, 낙관적 희망의 정점에서 인류는 역사 최악의 전쟁과 이념 갈등을 맞이하게 된다. 『동물농장』은 이성이 만들어낸 시대적 잔혹함의 역사 속에서 폭력을 마주하면서도 그것과 대결하며 항상 성찰했던 작가, 조지 오웰이 그 역사의 한복판에서 써낸 책이다. 『동물농장』을 통해 조지 오웰은 전체주의를 비판하고, 모든 형태의 권력에 의문을 제기한다. 모든 책이 그렇듯, 이 책 역시 당시의 맥락 속에서 쓰였다. 그렇기에 이 텍스트가 형성된 맥락을 통해 오웰의 주제 의식을 살피고, 그 의미를 오늘의 상황에 적용해보고자 한다.

『동물농장』에는 극단의 시대를 겪은 오웰의 통찰이 담겨있다. 오웰이 이 작품을 통해 문제 삼았던 것은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었다. 책의 내용만 본다면, 오웰은 단순히 소비에트연방의 공산주의를 비판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를 통해 1936년 이후의 작품은 “어느 한 줄이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전체주의에 맞서고” 있음을 회고한다. 소비에트연방의 반대편에는 히틀러의 나치즘, 프랑코의 스페인 독재,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자리하고 있었고, 이러한 역랑 속에서 자유주의를 외치는 국가마저 체제 경쟁을 위해 개인을 억압하고 착취하기 시작했다.

“인간이야말로 우리의 유일한 진짜 적”이라는 메이저 영감의 선포에도, 강압적인 폭력 통치를 시작한 나폴레온을 정당화하는 데마고그 스퀼러의 “나폴레온은 항상 옳아!”라는 구호 속에서도 오웰은 끊임없이 전체주의적 사고를 풍자하고 있다. 전체주의는 두 가지로 문제가 된다. 하나는 개인을 집단을 위해 억압하고, 희생시킨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를 규율로 대체함으로써, 사회 구성원을 성찰하지 않는 인간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인간을 향한 동물의 혁명은 인간에 의한 동물의 착취에 기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체제가 자리 잡자, 돼지들은 같은 동물을 억압하고 착취하기 시작했다. 체제를 위해 희생하다가 팔려나간 복서의 예가 대표적이며, 소의 젖은 돼지의 식탁에만 오르게 됐고, 달걀이 인간에게 판매되자 이에 저항했던 암탉들 역시 폭력적인 처벌을 통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전체주의와 전체주의적 사고는 집단의 목표를 위해 개인을 희생시킨다. 그들이 스스로 잘 살기 위해 만든 체제가 역설적으로 그들을 옥죄는 올무가 되어버린 것이다.

동시에 전체주의는 윤리의 성찰성을 외재적 규율로 대체하여 생각하지 않는 인간을 만들어낸다. “나폴레온은 항상 옳다”는 스퀼러의 선동은 나폴레온이 옳기 때문에 옳다는 순환논증일 뿐이며, 무솔리니는 항상 옳다고 선전했던 파시즘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생각이 지배하는 사회의 구성원은 윤리를 진정성 있게 실천하거나, 윤리의 본질을 성찰하기보다는 권력이 부여하는 규범에 복종하는 것으로, 독재자의 지시에 순응하는 것으로 윤리를 대체한다. 이런 사회는 복종적이며 순응적인 인간을 양산하고, 그들은 서로를 감시하며 새로운 디스토피아를 만들어낸다.

다른 한 편 조지 오웰은 『동물농장』을 통해 인간 존재 본질에 관한 의문을 제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정의했다. 정치의 본질을 “권력을 위한 투쟁”이라고 규정할 때,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은 권력에 대한 투쟁을 본질로 한다고 볼 수 있다. 오웰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은 한 가지는 모든 권력은 부패한다는 것이다. 동물의 해방을 꿈꾸던 메이저의 원대한 이상은 나폴레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 하지만 이 슬픈 우화의 마지막은 인간의 착취가 끝나고 동물에 의한 동물의 착취가 시작되는 권력 부패의 연쇄를 보여준다.

『동물농장』은 시대의 극단과 잔혹함을 고발했던 조지 오웰의 삶에서 비롯된 작품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시대는 당시와 같은 극단적 폭력은 자취를 감추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폭력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 시대의 폭력은 세련되고 미시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독재자의 강압적 통치뿐 아니라, 우리는 일상생활의 모든 부분에서 ‘우리’를 위해 우리가 아닌 누군가를 희생하고자 하거나, 극단적 이분법이 선사하는 ‘편안함’에 반기를 들지 않고 성찰하지 않을 때, 죽은 줄 알았던 그 시대의 폭력을 오롯이 우리 앞에 부활한다.

그런 시대에서 오웰은 폭력에 민감한 사람이었다. 식민지의 관료로서 회의를 느꼈던 그는 자신에게 닥친 폭력만이 아니라 자신이 행하는 폭력에도 섬세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문학은 진정성으로 빛나고, 시대를 초월한 고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동물농장』은 “그러나 이미 어느 것이 돼지의 얼굴이고 어느 것이 인간의 얼굴인지 도저히 구별할 수가 없었다”라는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이 책은 우리에게 불편함을 선사한다. 우리 마음에 꿈틀대는 단순화의 유혹과 내가 속한 곳과 나의 이익을 중심으로 하는 모든 사고와 행동 속에서 끊임없이 성찰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머리로만 읽을 책이 아니라, 오웰처럼 몸으로 실천으로 읽어내야 할 책이다. 우리도 돼지가 될 수 있기에. 또 돼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

 

덤으로 역본의 경우, 동물농장이 쓰인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자세히 알고 싶은 분은 김욱동 역(비채)의 역본을, 가독성을 추구하고 오웰의 추가적인 작품을 읽고 싶으신 분은 김기혁(문학동네) 역본을 보시는 걸 추천해 드린다. 두 책 모두 준수한 번역이라고 느꼈다. 솔직히 나는 이 책이 그리 재미있지 않았다.

 

조지훈

멋 설(說)

 

조지훈

 

어떤 이 있어 나에게 묻되 “그대는 무엇 때문에 사느뇨?” 하면 나는 진실로 대답할 말이 없다.

곰곰이 생각노니 살기 위해서 산다는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산다는 그것밖에 또 다른 삶의 목적을 찾으면 그것은 사는 목적이 아니고 도리어 사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의 삶에서 부질없이 허다한 목적을 찾아낸들 무슨 신통이 있겠는가.

도시, 산다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사는 판이니 어째 살고 왜 사는 것을 모르고 산들 무슨 죄가 되겠는가.

 

하늘이 드높아 가니 벌써 가을인가 보다.

가을이 무엇인지 내 모르되 잎이 진 지 오래고 뜰 앞에 두어 송이 황국(黃菊)이 웃는지라 찾아오는 이마다 가을이라 이르니 나도 가을이라 믿을 수밖에 없다.

촛불을 끄고 창 앞에 턱을 괴었으나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다시 왜 사는가. 문득 한 줄기 바람에 마른 잎이 날아간다. 유위전변(有爲轉變) - 바로 그것을 위해서 모든 것이 사나 보다.

 

우주의 원리 유일의 실재에다 ‘멋’이란 이름을 붙여 놓고 엊저녁 마시다 남은 머루술을 들이키고 나니 새삼스레 고개 끄덕여지는 밤이다.

산골 물소리가 어떻게 높아 가는지 열어젖힌 창문에서는 달빛이 쏟아져 들고, 달빛 아래는 산란한 책과 술병과 방우자(放牛子)가 네 활개를 펴고 잠들어 있는 것이다.

 

‘멋’, 그것을 가져다 어떤 이는 ‘도(道)’라 하고 ‘일물(一物)’이라 하고 ‘일심(一心)’이라 하고 대중이 없는데, 하여간 도고 일물이고 일심이고 간에 오늘 밤엔 ‘멋’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는 것이 아니라 태초에 멋이 있었다.

멋을 멋있게 하는 것이 바로 무상(無常)인가 하면 무상을 무상하게 하는 것이 또한 ‘멋’이다.

변함이 없는 세상이라면 무슨 멋이 있겠는가.

이 커다란 멋을 세상 사람은 번뇌(煩惱)라 이르더라. 가장 큰 괴로움이라 하더라.

우주를 자적(自適)하면 우주는 멋이었다.

우주에 회의(懷疑)하면 우주는 슬픈 속(俗)이었다.

나와 우주 사이에 주종의 관계 있어 이를 향락하고 향락 당하겠는가.

우주를 내가 향락하는가 하면 우주가 나를 향락하는 것이다.

나의 멋이 한 곳에서 슬픔이 되고 속(俗)이 되고 하는가 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즐거움이 되고 아(雅)가 되는구나.

죽지 못해 살 바에는 없는 재미도 짐짓 있다 하랴.

 

한 바리 밥과 산나물로 족히 목숨을 잇고 일상(一床)의 서(書)가 있으니 이로써 살아 있는 복이 족하지 않은가.

시를 읊을 동쪽 두던이 있고 발을 씻을 맑은 물이 있으니 어지러운 세상에 허물할 이가 누군가.

어째 세상이 괴롭다 하느뇨. 이는 구태여 복을 찾으려 함이니, 슬프다, 복을 찾는 사람이여, 행복이란 찾을수록 멀어 가는 것이 아닌가.

 

안분지족(安分知足)이 곧 행복이라, 초의야인(草衣野人)이 어찌 공명을 바라며, 포류(蒲柳)의 질(質)이 어찌 장수(長壽)를 바라겠는가.

사는 대로 사는 것이 나의 삶이니 여곽지장(藜藿之腸)이라 과욕(寡慾)을 길러 고성(古聖)의 도를 배우나니 내 어찌 고성의 도를 알리오. 다만 알려고 함으로써 멋을 삼노라.

 

고루거각(高樓巨閣)이 어찌 나의 멋이 될 수 있겠는가? 다만 멋 아닌 멋으로 멋을 삼아 법당을 돌고 싶으면 법당을 돌고, 염주를 세고 싶으면 염주를 세고, 경을 읽고 싶으면 경을 읽으며, 때로 눈을 들어 먼 산을 바라보고, 때로는 고개 숙여 짐짓 무엇을 생각하나니, 나의 선(禪)은 곧 멋밖에 아무 것도 없는가 보다. 오늘을 모르는 세상에 내일을 생각함은 어리석은 일일러라.

내일을 모른다 하여 오늘에 집착함은 더욱 어리석은 일일러라.

다만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나를 사랑하지 않으며 남을 도우려고도 않아 들녘에 피었다 사라지는 이름 모를 꽃과 같고자 하노라.

만물이 내가 없으매 떳떳함이 없고 떳떳함이 없으매 슬프지 않음이 없으나 괴로움을 재미로 돌리고 무상(無常)을 멋으로 보매 상일주재(常一主宰)하는 아(我)가 없는 것이 또 무슨 슬픔이 되랴. 없는 나를 나라고 불러 꿈같은 세상에서 다시 꿈꾸고자 할 따름이니, 내 몸을 나마저 잊어 남이 알 리 없고, 푸른 메와 흐르는 물은 항시 유유(悠悠)하거니, 다만 이와 같을 따름이로다. (辛巳 暮秋)

 

출처: 조지훈, 『방우산장기』, 고려대학교출판부, 1997, 114-117p.

한스 로슬링과 그의 동료들이 함께 쓴 『팩트풀니스(Factfulness)』는 아마도 논픽션으로 2019년을 대표할만한 책이 아니었나 싶다. 내가 가진 책이 2019년 12월 27일에 나온 1판 40쇄의 책이니 지금까지도 엄청나게 책이 팔렸을 거다.

이 책의 핵심은 간단하다. 극단적인 본능과 극단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사실충실성(factfulness)과 사실에 근거한 세계관을 가질 수 있도록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다.

이 책은 저소득 국가에서 초등교육을 받는 여성이 늘고 있으며, 세계인구 대부분은 중간 소득 국가에 살고, 극빈층의 비율은 20년간 절반으로 줄었고, 기대수명은 늘고, 자연재해 사망자는 줄고, 예방접종 비율을 높아지고 있다. 이런 통계적 ‘사실’을 중심으로 세상이 살만하고 긍정적인 세계관을 가져도 된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이 책이 일상적인 부분에서 과학적인, 사실에 기반한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돕는 책인 줄 알았는데, 그보다는 “통계가 이러니까 너희 불안해하지마 그거 팩트 아냐”라고 얘기하는 책이었다. 그래도 값어치는 하는 책이고 준수한 편이라 100점 만점에 70점정도 주고 싶다. 지인이 읽는다면 “어. 볼만 해” 이렇게 대답할 정도.

이 책은 실증주의에 기반해서 쓰인 책이다. 실증주의는 인식론에 기반을 두고, 연구대상과 연구자의 객관적 거리두기가 가능하고 그에 따라 객관적인 사실, 객관적 진리를 포착할 수 있다고 본다. 통계를 사용해서 쓴 이 책은 소득수준, 교육수준, 건강상태 등이 긍정적이고 행복한 상태로 연결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스 로슬링이 연구자, 관찰자로서 가지고 있는 시각에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한스 로슬링은 국가를 소득수준에 맞춰 4단계로 설정했는데, 전세계 인구는 이와 동일한 범주를 가지고 있을까? 예를 들어 예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에게 예술은 인상파, 고전주의, 신고전주의, 현대미술 등으로 나뉠 수 있겠지만 나같이 무지한 사람은 예술에 대해 예술품이 있고 없고 정도 이외에는 어떤 분류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한스 로슬링이 가진 시각 자체를 의문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백인/유럽/남성/전문직/상류층의 시각은 아닌지, 그래서 쓸 수 있었던 책은 아닌지 생각해봐야하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설문조사를 문제 삼으면서 설문지에서 예술품이나 음식을 분류하고 범주화하는 것 자체가 연구자, 그러니까 지식인의 인식에 의한 분류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 분류와 인식 자체에 메타적으로 문제 삼는 것이 부르디외의 ‘사회학의 사회학’, ‘성찰적 사회학’인 것이다.

예를 들어 합격률이 99%인 시험이 있다고 했을 때, 이는 누군가에게는 개꿀일 수 있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외려 더 큰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이고, 실력이 없는 누군가에게 합격률은 1%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저소득국가의 교육수준이 높아지는 것이 모든 사람의 행복으로 바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히 아닌 것이다. 물론 객관적 지표가 좋아지는 모든 게 부정될 수는 없겠지만 무엇이 객관적인 건지 파악하는 건 숫자 몇 개로 가능한 게 아니다. 또 통계조사는 언제나 결과보다는 과정을 알아야 이게 제대로 된 조사인지 알 수 있기도 하다.

이 책은 극단적 세계관을 가진 극우주의자, 기독교 종말론자, 급진적 좌파 같이 세상이 갈수록 망해간다는 불안에 빠진, 이 정도는 아니어도 세상의 일에 불안한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책이고 여전히 준수한 책이다. 다만 내가 느끼기에 로슬링이 제시하는 ‘팩트풀’한 세계관 자체도 긍정을 지향하는 느낌이라 이게 진짜 사실충실인지 긍정충실인지 싶은 거다. 미묘한 긍정/부정의 가치판단이 딱히 과학적이라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같은 주제의 글을 쓴다면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소개하고 그 과정을 훈련·연습할 수 있게끔 해서 일상에서의 인식을 전환하도록 돕는 글을 쓰고 싶다. 긍정적 세계관이 극단적 세계관보단 낫지만 이것도 역시 편견이기에. 내가 서평을 쓴 2019년 마지막 날만 해도 코로나로 세계와 일상이 뒤집힐 지 누구 알았겠는가. 나는 솔직히 그런 생각이다.


최은영 작가님의 <쇼코의 미소>를 읽었다. 주변에서 다양한 분들의 추천을 받은 만큼 책이 참 좋았고, 어느 대목에서는 울컥하기도 했다. 가끔은 진부함이 느껴지기도 했는데, 그것을 고려하고서도 소설이 좋았다.

최은영 작가님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행위자(agent)’라기보다는 ‘아픈 자(patient)’이다. 그들은 신앙심을 통해 근대의 직업윤리를 합리적으로 주조해낸 영웅적 행위자도, 사물의 관계 속에 숨어있는 은밀한 이해관계를 추구하기 위해 자본을 끊임없이 온축(蘊蓄)하며 사회적 실천을 만들어내는 행위자도 아닌, 구조에 의한 압력에 제대로 반항하지 못하거나 그대로 순응하는, 그 폭력 속에서 폭력을 견디고 감내할 수밖에 없는 희미하고도 미약한 주체이자, ‘앓는 이’들이다.

이 소설에는 이런 옅고 희미한 주체들, 앓는 주체들이 서로 주고받는 위로와 그들의 의미를 예민하고 섬세하고 투명하게 그려낸다. 그렇기에 주는 위안이 더 정직하다. 아마도 작가의 말이 그것을 대변한다고, 그리고 소설에 묻어나는 민감함은 당연히 작가의 시선에서 나왔을 거라고.

“십 대와 이 십대의 나는 나에게 너무 모진 인간이었다. 내가 나라는 이유만으로 미워하고 부당하게 대했던 것에 대해 그때의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 애에게 맛있는 음식도 해주고 어깨도 주물러 주고 모든 것이 괜찮아지리라고 말해주고 싶다. 따뜻하고 밝은 곳에 데려가서 그 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다. 그렇게 겁이 많은데도 용이 글 내줘서, 여기까지 함께 와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쇼코의 미소> 작가의 말 중, 최은영.

소설의 서평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말도 안 되는, 아무 말을 남겨본다. 아무튼, 앞으로도 최은영 선생님의 작업을 조심스럽게 따라가보지 않을까 싶다.

인문사회 입문을 위한 작가 추천

인문사회 분야에 관심은 가지고 있으시지만,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분들께 제가 재밌게 읽었던 인문사회 분야의 작가를 간략하게 소개해봅니다.

1. 김용규: 김용규 선생님은 제가 여러 번 소개해드린만큼 제가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김용규 선생님의 강점은 서양 정신의 두 뿌리인 신학과 철학을 정말 제대로 공부하셨다는 것이고, 또 정확한 독해를 바탕으로 쉽게 글을 쓰신다는 겁니다. 말 그대로 금상첨화인 분이시죠. 서양 고전이 어떻게 힘이 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생각의 시대>, 인문학 바탕으로 문학을 깊게 읽는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서양 문명의 뿌리인 신에 관해 교양으로 접근할 수 있는 <신 :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를 저는 대표작으로 꼽습니다. 서양 고전이 주는 깊은 통찰력을 배우고 싶은 분들께 추천해드립니다.

2. 박홍규: 제가 소개할 박홍규 선생님은 형이상학자가 아닌 영남대 법학자십니다. 박홍규 선생님의 강점은 자유분방하고 포괄적이면서도 정확한 이해에 있습니다. 게다가 다작의 작가시죠. 아마도 대중적 지식인의 전범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선 박홍규 선생님 독서와 사유의 편력을 엿볼 수 있는 <내내 읽다가 늙었습니다>, 인권과 약자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다루며 한국의 현실도 반추하는 <불편한 인권>, 인문학의 근원에 존재하는 숨겨진 차별의 불편한 진실을 지적하면서 이를 민주주의와 연결하는 <인문학의 거짓말>을 저는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날카로운 지적 교양을 원하시는 분들께 추천해드립니다.

3. 강명관: 강명관 선생님은 한문학자로 내공있는 연구자이신 동시에 글을 잘 쓰시는 연구자이시기도 하시죠. 강명관 선생님은 한문학 이해를 갱신했다는 평가도 받고 계시는데요, 선생님의 장점은 내실있는 연구와 흥미로운 주제, 해석의 결합인 것 같습니다. 특히 조선에 관한 이야기이니 더 친숙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지배층 중심의 역사 가려져 알기 어려웠던 조선 서민의 풍속을 다루는 <조선의 뒷골목 풍경>, 조선시대에 남겨진 그림을 통해 투영된 당시 남성의 욕망과 여성의 모습을 복원하는 <그림으로 읽는 조선 여성의 역사>, 조선시대 지배층의 역사를 책이라는 주제로 분석한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를 추천해드립니다. 조선시대 역사에 관한 풍부하면서도 새로운 관점에 관심있는 분들께 추천해드립니다.

4. 표정훈: 표정훈 선생님은 출판평론가이자, 저술가이십니다. 앞선 선생님들이 박사학위라는 자격증을 가지고 계셨다면 표정훈 선생님은 학사학위만 가지고 순수하게 실력으로 출판시장에서 살아남으신 분이시죠. 표정훈 선생님의 강점은 책에 관한 신선한 이야기와 독특한 시선 같습니다. 시대성과 삶의 문제의식으로 철학사를 조명한 <철학을 켜다>, 책에 미친 탐서주의자의 관점에서 인생의 책을 소개하는 <탐서주의자의 책>, 한국 현대사와 출판, 독서문화를 다루는 <대한민국이 읽은 책>을 추천합니다. 교양으로서 독서를 원하시는 분들께 추천해드립니다.

5. 남경태: 남경태 선생님은 아마도 지식소매상이라는 명명이 가장 어울리는 분인 것 같습니다. 남경태 선생님의 강점은 많은 주제를 기본에서 충실하게 다루시는 데에 있는 것 같고, 그만큼 입문으로 적합한 작가이신 것 같습니다. 인문사회 분야에서 쓰이는 다양한 개념을 설명하는 <개념어 사전>, 우리 삶과 연관된 시사의 역사를 살피는 <시사에 훤해지는 역사>, 접근하기 어려운 철학의 역사를 연속적이고, 시대적으로 친근하게 설명하는 <누구나 한번쯤 철학을 생각한다>를 추천합니다. 남경태 선생님 책은 지금 소개한 선생님들 책 중에서도 가장 편하게 접근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이 목록은 언제나 제 제한적인 독서경험에 의해 작성된 것이고, 저의 주관이 다분히 들어가있으니 참고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래도 저는 인문사회를 입문하려는 지인에게 이 작가분들을 소개하고, 여타 작가와 비교했을 때도 훌륭하시다고 생각합니다. 저자 분마다 저작이 적게는 20여 권, 많게는 150여 권도 되기 때문에 제가 추천한 책 이외에 책도 찾아보시길 바라겠습니다.

1. 핵심: <번역청을 설립하라>는 <번역은 반역인가>를 집필한 역사학자 박상익 교수님의 한국에서의 번역에 관한 문제의식과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책입니다. 요는 한국의 번역문화에 큰 문제가 있으며 이를 위해선 시장이 아닌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한다는 겁니다.

2. 저자: 박상익 교수님은 서양사학자로 이미 20여 권의 단행본을 출간하시고 또 굵직굵직한 고전 번역을 해오신 연구/번역자이십니다.

3. 내용: 이 책은 “고전을 영어로 읽으면 되지 굳이 번역해야 되냐”는 식으로 고전번역 예산을 삭감해버린 기재부 관료들의 이야기에서 시작됩니다. 정말 미천하고 비루한 인식이죠. 이런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책은 번역의 중요성, 한국 번역의 현실, 그리고 구체적인 대안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는 다양한 논의들이 진행됩니다.

얼마 전에 한국에 왔던 문명연구가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한글을 한껏 칭송했습니다. 언제나 있는 한글 찬양의 이면에는 컨텐츠 빈곤이라는 한계가 숨어있죠. 마음먹고 고전이란 걸 읽는다거나 어떤 자료가 필요할 때, 한국어로 접할 수 있는 자료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저자 박상익 선생님은 그 지점을 지적하십니다. 한국의 열악한 번역현실과 그를 가로막는 관료들과 학계까지 지적하며 번역의 현실을 다루시고 번역은 지식의 문제인 동시에 국가 경쟁력이며, 이를 위해서 더는 이 문제를 방치하면 안 되고 번역청, 그러니까 국가가 나서서 번역문제를 위해 힘써야 된다고 촉구하며 책은 마무리됩니다.

4. 느낀점: 박상익 선생님은 <번역청을 설립하라 - 한 인문학자의 역사적 알리바이> 출간과 번역청 설립 국민청원을 통해 여러 운동도 하셨지만 정권이 바뀌어도 번역사업의 진전은 미미했습니다. 물론 박상익 교수님과 여러 번역증진 운동 덕에 번역사업 예산이 2배 가량 증액되며 노무현 정권 때 수준으로 복구되었지만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되려 퇴보한 거죠.

일례로 번역 문제는 지식의 민주주의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누구나 쉽게 지식에 도달하고 이걸 통해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되지 않는 겁니다. 한국의 민주주의 공화국이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국의 개인들이 민주주의의 기원이 됐던 사상들과, 현대 민주주의 담론에 대해 읽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현실은 그렇지 않죠. 민주주의의 기원이 되는 고전들은 번역되지 않았고, 현대 담론들 역시 그렇습니다. 개인 스스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기는 요원한 구조인 것입니다.

굵직한 고전번역을 해오신 박상익, 김덕영 선생님께서는 거의 비슷한 말을 하시곤 했습니다. 외국어를 한 30년 정도 공부하면 이게 편해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라는 얘기었습니다. 심지어 김덕영 선생님은 독일에서 독일어로 강의까지 하시는데 말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모국어로 읽고 사유할 때 가장 쉽고 독창적이죠. 한국어로 번역된 고전의 기반이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부르디외도 학자 초기에 자신이 직접 후설과 베버를 번역해 학생들을 가르치고, 프랑스의 학계가 후진적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직접 출판사를 통해 번역사업을 진행하기도 했죠. 그 프랑스도 후진적이라고 생각하며 번역에 힘썼는데 한국은 할많하않입니다.

이 책은 한국사회의 번역에 관해 문제제기한 한 인문학자의 역사적 알리바이입니다. 책이 얇고 쉬운 편이니 두루 읽히며 번역에 관한 문제의식과 공감대가 형성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1. 핵심: <번역은 반역인가>는 서양사학자이자 존 밀턴, 토마스 칼라일 같은 사상가들의 고전을 번역해오신 박상익 교수님이 한국 번역문화에 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집필된 총체적 번역보고서입니다.

2. 저자: 박상익 교수님은 우리에게는 <실낙원>으로 유명한 밀턴의 사상을 전공하신 초기 근대 전공의 서양사학자이십니다. 박사논문으로는 밀턴의 사상을 다루셨고 그와 함께, 언론자유의 경전이자 언론사상사의 시초인 <아레오파기티카>를 연구번역하셨죠. 이 책의 저자 박상익 교수님과 저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데, 앞에 책 번역을 위해 자료를 모으려고 단행본 700여 권, 논문 300여 편, 중형차 한 대값을 사용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이 제게 책을 많이 물려주셨는데 번역하신 책에 맑스를 다루는 작은 부분이 있어서 그 부분을 위해 <맑스 사상사전>, 김수행 역 <자본론> 전 권을 구매하시는 그런 분이시고 현재도 20권 이상의 단행본을 저술/번역하셨습니다.

3. 구성: 이 책은 1장 번역의 역사, 2장 슬픈 모국어, 3장 번역의 실제, 4장 책의 세계로 구성되어있습니다. 1장에서 박상익 교수님은 중국, 일본, 이슬람, 서유럽이 어떻게 번역을 통해 문명을 발전시켰는지를 상세하게 밝혀 나가고, 다음 2장 슬픈 모국어는 한국의 번역 현실에 관한 보고이며 성찰인데 1장에 나온 번역의 모범사례에 비해 한국 번역의 현실은 매우 안타깝고, 민망한 수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3장에서는 연구자이면서 동시에 각주, 해제가 풍성히 담긴 연구번역을 진행한 저자가 번역의 과정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겪었던 경험을 토대로 번역자의 조건과 환경, 오역과 편집자와의 관계들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4장에서는 독서문화와 또 책의 미래, 그리고 한국의 독서, 번역문화에 관한 저자의 주장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4. 느낀점: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근대 일본의 번역사입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은 번역을 담당하는 국가기관을 설치해 번역을 진행하고 서구의 지적유산을 모국어로 읽을 수 있게 됩니다. 일본이 100년 전에 쌓아올린 번역의 성과를 한국은 아직도 못 따라잡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도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은 유치한 수준의 반일 뿐, 일본을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극일(克日)을 하자는 생각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책이 2006년 출간되었는데, 여전히 한국의 현실은 난망합니다. 저는 문제의식에 초점을 두고 글을 썼지만, 이 책은 번역에 관한 역사와, 실제부터 번역에 관한 문제의식, 중요성, 그리고 현실과 대안까지 다루는 한국 번역 보고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독서문화에 관심있는 분들의 필독서라고 생각합니다. 또 12년의 시차를 두고 출간된 박상익 교수님의 <번역청을 설립하라> 또한 포스팅해보겠습니다.

1. 들어가기 앞서: 제가 “최초”로! 도서지원을 받아서 작성한 서평입니다. 지금껏 조건이 안 맞아서 계속 제의를 고사했습니다. 여러분들께 접근하기 쉬운 책을 소개하려고 이 책이 출간된 것을 보고 장바구니에 넣어뒀는데, 이 책의 공동저자이자, 출판인이신 박지원 선생님께 서평제의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흔쾌히 서평을 쓰기로 했습니다.

2. 핵심: 이 책은 우리시대의 ‘르네상스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진보적 법학자 박홍규 선생님과 박지원 작가의 대담으로, 성찰적 지식인 박홍규의 사유와 독서 편력을 말로써 드러내는 책입니다. 박홍규라는 지식인의 정신과 사유, 그리고 현실의 생생한 문제들과 독서를 통해 치열하게 만들어진 그의 세계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3. 저자: 이 책은 공저인 책입니다. 우선 박홍규 선생님은 제게 전문인보다는, ‘르네상스 지식인’이라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분입니다. 노동법 교과서를 집필하실 정도로 전공 노동법 분야에 학적인 성과를 내는 학자, 동시에 강단만이 아닌 현장에서 실천하는 운동가, 법학 뿐 아니라 <오리엔탈리즘>, <감시와 처벌>, 루쉰, 톨스토이 등을 번역한 번역가, 다양한 문제에 기사·단행본·논문으로 이야기하는 저술가시죠. (저술·번역하신 성과물이 150여 권 되시는 분입니다.) 한국사회에서 흔치 않은, 모범적 지식인상에 적합한 분이셨죠. 다른 저자 박지원 선생님은 <아이돌을 인문하라>, <산책하는 마음>의 작가이시며 출판인이신데요, 책 자체가 ‘박홍규’의 이야기로 이루어져있지만 박지원 선생님은 박홍규 선생님의 광활한 지적세계를 이해하고 계셔서 대담의 수준 자체가 시종일관 높게 유지되고 동시에 왜 이 책이 공저인지를 알게 됐습니다.

4. 독서의 포인트: 이 책의 첫 째 포인트는 지적세계의 광활함입니다. 박홍규 선생님은 이 책에서 자신을 만든/만들었던 사상과 책을 종횡무진 넘나들며 대담이 이어지는데, 이것만으로도 넓은 지적세계와 조우하고 더 깊은 독서의 발판이 될 것 같습니다. 다음 포인트는 실천적 지식인인데요, 진보 그리고 지식인의 위선을 목도하고 있는 현실에서 박홍규 선생님의 지식과 실천의 일관성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셋 째 포인트는 현실의 문제입니다. 박지원 선생님은 시종일관 첨예한 문제들을 수면위로 올리며 대화를 이끄시는데, 문제를 이야기해나가는 박홍규 선생님의 생각을 엿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마지막 포인트는 어쩌면 가장 중요할 ‘고독’의 문제 같습니다. “무리짓지 않는 삶의 아름다움”이라는 부제에서 볼 수 있듯, solitude한, 적극적인 고독개념의 옹호하면서 이를 개인적인 차원에서부터 사회·정치적 차원까지 확대합니다. 이는 개인의 발견이며 자유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며, 박홍규 선생님의 근원적인 문제의식인 것 같습니다.

5. 느낀점: 책의 끝에서는 박홍규 선생님의 아내이신 서현숙 선생님과의 대담이 나오는데, 서 선생님이 정작 남편의 책은 잘 안 읽으신다면서 “제 생각엔 이 사람이 남의 말을 잘 안 들어요. 자기보다 잘난 사람을 좀 싫어하는 심리가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라며 농담하시는 부분이 웃음 나오면서 인간미가 묻어나는 이 대담의 백미인가 싶기도 했습니다. 제가 느낀바 박홍규 선생님은 성찰적, 존재적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소유에 얽매지 않고 자유롭고 정직하게 사유하고 실천하는 분이시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어떤 지점에서는 생각의 차이, 세대차이 같은 걸 느끼기도 했는데, 그건 너무 당연한 거고 또 그런 불화의 지점을 느끼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대담 문화가 없는 한국사회에서 적절하고 의미있는 작업이라 느꼈습니다. 이 책은 깊으면서도 접근하기 좋아서 이런 주제에 관심있는 분들께 추천해드리고, 전체적인 만듦새, 디자인도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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