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오해와 진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하 신교 논문)은 사회학사와 인류 지성사에 있어 기념비적 작품이다. 이 책은 출간 이후 숱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러한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이 책은 명성만큼 크게 오독된 책이기도 하다. 베버는 우리가 흔히 아는 이 책을 두 편의 논문으로 작성한 것이고, 이후 논쟁 속에서 책의 내용과 자신의 주장에 대해 끊임없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이 책을 오독한 대부분은 제대로 베버를 공부하지 않고 책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해 1. 근대 자본주의는 칼뱅주의가 만들어냈다: 보통 많은 사람이 이렇게 도식적으로 이 책을 이해하곤 한다. 근대 자본주의는 칼뱅주의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베버가 이 책에서 실제로 논증하고 싶었던 것은 칼뱅주의와 자본주의의 기계적인 일대일 인과관계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구성 요소 중 하나인 ‘자본주의 정신’의 다양한 인과 요소 중 하나로 칼뱅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베버는 이 책의 연구대상인 사회/국가에서만 자본주의가 생겨났다고 하지도, 자본주의 정신이 칼뱅주의에서만 도출될 수 있다고 하지도 않았다.

오해 2. 베버는 이 책을 통해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싸우는 관념론자이다: 이 오해는 이 책보다 유명한 것 같다. 우선 베버(1864년 생)는 마르크스(1818년 생)가 중년일 때 태어났다. 베버와 마르크스는 동시대의 지식인은 아니었다. 베버는 마르크스의 『자본』을 발전된 과학의 업적으로 생각했으며, 동시에 이 시대 지성의 대부분이 마르크스와 니체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정직하지 못하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베버는 마르크스가 아닌 동시대의 지식사회에서 발생한 문제의식으로 이 책을 집필했고, 스스로가 생각 이상으로 유물론적임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물론 베버가 마르크스의 모든 걸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에 반대했다.

오해 3. 미국의 자본주의 발전에 감동해서 쓴 글이다: 베버는 1904년 미국에 다녀온다. 이 신교 논문은 1904, 1905년 두 해에 걸쳐나온 두 논문의 모음인데, 베버는 미국에 가기 전에 이미 1부의 원고를 투고한 상태였고, 2부는 미국에 다녀온 지 6개월 만에 출간됐다. 이 논문은 이미 미국 여행과는 상관없이 작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베버도 각주에 2번 정도 미국을 언급할 뿐이다. 다만 이후에 베버는 미국에서의 경험과 관련된 논문을 두 편정도 작성한다.

오해 4. 베버의 가족사가 연구에 영향을 미쳤다: 이 오해는 앞선 오해보다는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베버의 가족사를 알아야 하기 때문인데, 베버의 아버지는 방탕한 삶을 살던 부르주아였고, 어머니는 경건하고 엄격한 칼뱅주의자였다. 이런 개인적 영향으로 이 책이 쓰였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결정적으로 베버의 어머니는 근대 자본주의의 담지자 집단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주장은 설명력을 가질 수 없다. 베버의 어머니는 근대적 직업노동을 수행하던 시민계층이 아니다. 그것보다 베버는 당시 독일 지성계의 에버하르트 고트하인, 베르너 좀바르트, 게오르그 짐멜, 게오르그 옐리네크, 에른스트 트뢸치 등과의 교류 및 논쟁을 통해 문제의식을 형성시켜 작업했다는 것이 더 타당하다.

베버는 보통 이런 유치한 오해를 통해 소개된다. 이 책이 고난도이기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베버에 대한 한국어로 된 제대로 된 자료가 없었던 점에서도 일부 면죄부를 줄 수 있겠지만 이 책이 김덕영 선생님에 의해 제대로 번역된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그 이후에도 어떠한 갱신이 없다는 것은 지적으로 게으르다는 방증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을 땐, 가격이 부담되면 다른 번역본을 보더라도 가능하면 함께 김덕영 선생님이 쓰신 해제를 참고하라고 하는 편이다. 특히 우리가 아는 것과 달리 베버는 열린 사람이었다. 그는 학문의 목적이 끊임없는 진보임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학적 작업 역시 ‘탈주술화’될 것이며,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베버와 그의 사회학적 유산이 한국에 제대로 자리 잡길 바라고, 이를 기반으로 제대로 된 논의가 시작되길 바랄 뿐이다.

이 글은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도서출판 길, 2010에 실린 김덕영의 해제를 통해 작성되었다.

사회학자 김덕영과 막스 베버의 사진(출처: 경향신문)

김덕영, 『막스 베버』

“이미 명백해진 사실이지만 다음과 같은 말을 확실히 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즉 ‘베버의 업적은 사회과학의 역사 속에서 중요한 이정표다.’ 사회학은 베버 이전과 이후로 나뉠 수 있을 정도다. 당대의 사회학은 물론 현대사회학도 모두 그의 재능에 도움을 받고 있다.”
- 루이스 코저(Lewis Coser)

“내가 보기에는 막스 베버야말로 사회학자 중 가장 위대한 사회학자이며, 심지어 나는 그야말로 ‘진정한’ ‘유일한’ 사회학자라고 말하고 싶다.”
- 레이몽 아롱(Raymond Aron)

사회학, 그중에서도 사회학 이론을 공부하는 것은 과장을 보태 막스 베버를 공부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아직도 걸음마가 서툰 내가 이제 아장아장 사회학도로서 걷기 시작할 때, 어떤 사회학자를 공부하든, ‘막스 베버’로 수렴되곤 했다. 앞에 언급한, 코저나 아롱의 언급이 과하지 않을 정도로 베버는 언제나 대문자 사회학자, 단 한 명의 사회학자였다.

한국의 독서계와 지성계에서도 여전히 중심의 지위에는 철학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의 하늘을 수놓는 수많은 별 사이에서, 사회학에는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아우구스티누스도, 아퀴나스도, 칸트도, 헤겔도, 후설도, 하이데거도 없고, 사회학과 철학을 비교하는 자체가 꽤 부끄러운 일이지만, 시대적 근본 규정이라는 점을 비교할 때 사회학에는 뒤르켐과 베버가 또 루만과 부르디외가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특별히 여전히 ‘우리 시대의 사회학자’라고 할 수 있는 루만과 부르디외 역시 베버의 작업에 크게 빚지고 있다.

김덕영 선생님이 쓰신 『막스 베버』는 한국어로 쓰인 막스 베버 개론서이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듯, 1,000페이지 만으로는 도저히 베버의 지적 세계를 감당할 수 없었지만, 아마 한국어로 쓰인 베버에 관한 텍스트 중에 이와 비견될 만한 책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범위를 제한하자면, 연구서로서 전성우 선생님이 저술하신 『막스 베버 사회학』정도뿐이다.

이제 내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던 때, 아무것도 쌓인 것이 없어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도 모르겠던 시절, 김덕영 선생님의 『막스 베버』는 등대와 같은 책이었고, 한 번도 이 책을 보면서 후회한 적이 없다. 이 정도로 베버를 깊이 이해하면서, 한편으로는 베버의 세계를 망라하는, 그러면서도 비교적 쉽고 적확한 서술을 특징으로 하는 책이 한국어로 쓰였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내일부터는 김덕영 선생님과 사회이론강좌 나비를 통해 막스 베버 공부를 시작한다. 선생님 책을 본지 적어도 5년 정도는 되었던 시점, 2020년 4월 28일에 선생님과 처음으로 오랜 이야기를 나눌 자리가 마련되었다. 나는 내가 가진 20권도 넘는 김덕영 선생님 저작 중에 단 두 권, 『막스 베버』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들고 갔다. 이 책은 그만큼 내게 의미 있는 책이다. 더불어 현대 사회학은 물론이고, 우리가 사는 세계를 설명하는 데 큰 빚을 지고 있는, 사회학을 넘어 지성사의 거인인 베버에게 관심이 있는 분들께 이 책은 보물과 같으며, 베버에게 이르는 가장 신뢰할 만한 또 가장 바른 길임을 말씀드린다.

 

베버를 공부하면서 드는 의문들이 거의 모두 이 책을 통해 해결된다. 선생님께 감사드릴 따름이다.

1. 핵심: 이 책을 통해 베버는 서구사회에서 발생한 근대의 합리적인 자본주의 정신을 여러 사회학적 방법론을 통해 추적합니다. 유명한 만큼 오독된 이 책에서 베버는 맑스를 넘어서려고도 관념론을 설파하려고도 하지 않죠. 베버의 진정한 관심은 ‘자본주의의 탄생’보단 신앙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근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특정한 종류의 실천적·합리적 생활양식을 만들고 이를 통해 행위하는 서구 근대 시민계층에 관한 관심으로 이 책을 썼습니다.

2. 출판사: 도서출판 길

3. 저자·역자: 세계사회학회에서 진행한 20세기 사회학의 유산으로 베버의 <경제와 사회>는 1위를, 이 책은 4위를 차지했습니다. 책의 역자 김덕영 선생님은 베버 전문가 중에 전문가시고 책에 신학적인 내용이 많기에 제대로 된 번역을 위해 무려 신학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제가 여러 역본으로 이 책을 읽었는데 김덕영 선생님의 이 번역본이 압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4. 구성: 제가 본 길의 번역본은 우리가 흔히 아는 이 책의 1904-1905에 게재된 두 편의 논문 뿐 아니라, <프로테스탄티즘의 분파들과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논문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책의 내용 자체가 워낙 방대하니 여기에 줄여서 쓰기 어려워 아주 부족한 서평이라는 점을 감안해주세요.

1장 문제에서 베버는 신앙공동체마다 각기 다른 사회계층에 종사하는 점을 지적하고,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자본주의 정신’의 개념을 구성합니다. 여기서 벤저민 프랭클린은 처세술이 아닌 윤리로 자본주의 정신을 구성했다고 합니다. 이어 베버는 루터가 단순히 노동을 의미하는 성서의 단어를 소명으로 해석함으로써 수도원에서 시작된 전문적 직업윤리가 세속으로 전파되었다고 하면서 ‘프로테스탄티즘(신교)’의 신학적 차이들을 설명하면서 칼뱅주의의 윤리가 카톨릭·루터교와 구별될 만큼 전통주의적 태도를 변화시키는데 선택적 친화성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면 장을 마칩니다.

이어지는 2장에서는 세속적 금욕주의의 종교적 토대부터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신교의 네 개 분파를 중심으로 그들이 신앙과 그를 통해 어떤 식의 생활양식들을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베버는 칼뱅주의에 집중하면서 그들은 구원에 있어 어떤 주술적 태도도 신뢰하지 않았으며, 구원에 관한 강박을 세속적 금욕주의를 통해 해소했다고 설명합니다. 이어지는 ‘금욕주의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베버는 신교 4개의 분파들의 설교자의 설교를 분석하면서 이를 통해 근대 시민계층적 직업 에토스가 탄생함을 논증합니다.

또 이 책엔 추가 논문과 150페이지 정도의 김덕영 선생님의 해제가 있어서 더 값집니다. 이 해제가 아마 한국어로 볼 수 있는 이 책에 관한 가장 수준 높은 텍스트일 겁니다.

5. 느낀점: 이 책은 모두를 위한 고전은 아닌 것 같고요, 사회과학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이 너무 헤비하다 싶으신 분들껜 문예출판사 박성수 역의 책을 추천해드립니다. 분량 때문에 제가 설명을 잘 못했는데, 이 책에는 베버의 다양한 방법론들이 녹아있기도 해서 더 가치가 높고, 이 책에 관한 논쟁은 지금까지 이어질 만큼 문제적인 책이면서 그렇기에 명저이기도 합니다. 어릴 때 쓴 거라 (지금도 어리지만;;) 지금보면 많이 부끄럽지만 A4용지 20장정도 되는 서평이 프로필에 있는 블로그에 있으니 자세한 서평은 참고하시고요, 사진은 제가 서평을 쓰면서 참고했던 책들인데, 이렇게 또 책 좀 읽고 서평하고 싶네요.

1. 핵심: 사회학자 루이스 코저는 유명한 저서 <사회사상사>에서 사회학은 베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했고, 세계사회학회에서 선정한 사회학 명저 1·4위는 베버의 책이었습니다. 이 책 <막스 베버>는 사회학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중 하나)인 베버를 소개하는 수준 높은 베버 개론서로, 약 1,000쪽 분량의 밀도 있고, 심도 있는 책입니다. 베버의 지적유산에 가장 광범하게 도달할 수 있는 한국어 책입니다.

2. 출판사: <도서출판 길>은 제가 가장 아끼는 출판사로, 5월 18일의 포스팅에 소개한 적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라겠습니다.

3. 저자: 책의 저자는 제가 정말 존경하는 사회학자 김덕영 선생님이십니다. 김덕영 선생님은 스스로를 치유할 수 없는 베버주의자로 소개하시죠. 독일에서 베버 연구로 사회학 학·석사 학위, 박사 학위, 교수자격까지 취득한 베버 전문가 중 전문가십니다. 김덕영 선생님을 직접 뵌 적이 있었는데, 독일에서 베버연구를 하겠다고 하니 독일인이 도서관 한 면을 가리키며 “이게 모두 베버 연구인데, 당신이 더 할 수 있는 게 있겠냐”고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독일에서 경험연구가 아닌 베버에 관한 순수 이론 연구로 성과를 내는 것은 어려운 작업입니다.

그런데 김 선생님은 단순히 베버로 학위만 마치신 것이 아니라, 독일의 권위있는 베버연구자들이 김 선생님의 연구를 인용함으로써 독일에서도 인정받는 베버 연구자가 되셨고요, 베를린자유대학에서 학위를 하신 저의 은사님께서도 김덕영 선생님의 업적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시고, 또 다른 베버 전문가이시자 선배연구자인 전성우 선생님도 김덕영 선생님을 “존경”한다고 직접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김덕영 찬가와 같은 저자 소개지만 그만큼 김덕영 선생님은 독보적인 저자십니다.

4. 내용구성: 총 10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1장에서는 지식인으로서 베버의 생애를, 2장에서는 베버가 진행한 역사적 연구를, 3장에서는 경험적 사회조사 연구를, 4·5장에서는 베버가 구축한 ‘문화과학과 사회과학’의 발전 과정, 논리적 기본 구조를, 6장에서는 방법론을, 7장에서는 베버와 마르크스를, 8장에서는 근대 세계의 발전 논리와 구조 원리를, 9·10장에서는 베버가 구축한 ‘사회학’을 다룹니다. 또 부록으로는 한국에서의 베버 수용 문제나, 김덕영 선생님 작업의 이정표들이 있어서 또 다른 재미가 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불충분한 설명인지 저도 알지만 이 많은 내용을 설명하기도 백과사전 같은 책을 소개하기도 참 어렵습니다. 저는 이 책을 백과사전처럼 베버에 관한 질문이 있을 때마다 펼쳐보곤 하는데, 웬만한 질문에는 거의 답이 가능한 것 같습니다.

5. 시사점: 이 책의 의도는 베버의 지적 세계를 전반적으로 소개하는 겁니다. 아마추어이지만 베버에 관한 한국어 출판물은 거의 가지고 있고, 영서나 독어 자료들도 조금이지만 본 입장에서 한국어로 베버를 이렇게 소개받을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워낙 저자께서 전문가시기에 방대하게 베버의 지적 세계를 잘 개괄하고 있고 어느 부분 하나 부족함 없이 밀도높은 서술을 자랑합니다. 저도 나중에 부르디외에 관해 이런 책을 써보는 게 꿈일 정도로 그렇습니다. 또 이 책을 통해 다른 베버의 저술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도 장점입니다. 책에 소개된 내용을 통해서 거기에서 다루는 내용으로 베버의 저술을 읽어보는 겁니다. 이 육중한 책에도 그의 모든 정신을 담을 수 없을만큼 베버는 큰 사상가이지만 한국어로 베버를 이해하기 위한 최선은 이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

사회학, 특별히 사회학 이론을 공부하게 되면 우회할 수 없는 이론가를 만나게 됩니다. 그게 바로 막스 베버입니다. 고전사회학사를 집필한 사회학자 루이스 코저는 사회학이 베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했습니다. 저 역시 베버를 대문자 사회학자, 단 한 명의 사회학자라고 생각합니다.

국제사회학회에서 선정한 사회학 명저 1위에는 베버의 <경제와 사회>가 4위에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만큼 베버의 저술은 사회학적 영감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베버의 생일입니다. 올해는 베버 사후 100주년이기도 해서 아마도 베버를 기리는 학술작업이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아마도 김덕영 선생님께서 1,000여 쪽에 달하는 막스 베버 <사회과학 방법론>을 번역 중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소박하게 베버를 기리는 차원에서 베버에 관한 포스팅을 해봅니다.

먼저 베버에 입문하기 바라는 분들께선 뒤르켐을 소개할 때도 말씀드렸던 김광기 선생님의 <뒤르켐&베버>를 보시는 걸 추천해드립니다. 김광기 선생님은 사회학 이론 전공이시기도 하셔서 쉬우면서도 정확한 해설을 보실 수 있으실 거예요. 그리고 노명우 선생님이 쓰신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 노동의 이유를 묻다>는 베버 책을 쉽게 설명하는 책입니다. 비교적 어려운 베버의 원저에 친근하게 접근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베버의 저작 중에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전성우 역), <소명으로서의 정치>(박상훈 역)을 읽어보시길 추천해드립니다. <직업으로서의 학문>은 이미 여러 번 포스팅해서 넘기고, <소명으로서의 정치>의 경우에는 저는 전성우 역을 좋아하지만, 교양을 위해 읽으시는 분께는 최장집 선생님의 해설이 보다 친절하게 느껴지실 것 같아서 추천해드립니다. 이 책은 근대 정치의 핵심을 말하는 고전입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같은 경우엔, 당연히 김덕영 선생님의 번역이 정말 최고의 번역이고, 뒤에 달린 해제 역시 한국어로 접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내용입니다. 하지만 가격이 부담되신다면, 문예출판사의 박성수 역이나, 현대지성의 박문재 역을 차선으로 보시는 걸 추천해드려요. 김덕영 역의 책은 못 사시더라도 도서관에 빌려서라도 해제는 읽어보시길 바랄게요. 이 책은 약간 교양 이상의 관심을 가지셨거나 고전에 대한 관심이 있으신 분이 보시면 좋을 거예요.

그리고 막스 베버에 관한 가장 좋은 개론서는 김덕영 선생님의 <막스 베버>입니다. 1,000여 쪽이 넘지만 이만한 수준의 개론서는 더는 없을 겁니다. 사회학 이론에 관심 있는 분들이나 공부하시는 분들께는 필독서입니다. 그리고 연구서로는 전성우 선생님의 <막스 베버 사회학>이 있고 이 역시 준수한 연구서입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베버 연구자는 전성우, 김덕영, 박성환 세 분이 있고, 가능하면 이 세 분의 저작을 중심으로 읽으시는 걸 추천해드립니다.

베버는 생전에 단행본보다는 논문 형태로 글을 썼습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경우의 1904, 1905년 두 차례 발표된 논문을 모은 형태죠. <경제와 사회> 역시 베버 미완의 작품이자, 논문 모음집입니다. 사회학 이론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당연히 보셔야 할 거예요. 이 책은 한국에 완역되지 못했고 부분으로 두 권 번역됐습니다. 그리고 안에 실린 논문들이 단행본의 여론 형태로 번역되곤 했는데, 중복되는 게 꽤 있습니다.

<도서출판 길>의 이승우 기획실장님의 말을 전하자면, 독일에선 1984년부터 2018년까지 총 41권(권수로 54권)의 베버 전집을 출간했습니다. 각 권은 30-50만 원을 호가합니다. 이 전집 사업에 재정지원을 한 게 우리도 잘하는 승강기 회사 티센(Thyssen)입니다. 각 권의 편집자는 모두 교수가 맡지만, 이들은 무보수로 봉사하고, 실질적 편집을 담당하는 연구자들에게만 재정을 지원한다고 합니다. 이런 문화가 참 부럽다는 사족을 달아봅니다.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

 

서평: 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학문(Wissenschaft als Beruf)』

 

 

일러두기

 

 

 

1) 본 서평은 “막스베버, 전성우 역, 2013,『직업으로서의 학문』, 나남출판”을 읽고 작성했다.

 

 

2) 이 글에서 별도의 표시 없이 본문의 괄호 속에 표시된 숫자는 앞서 언급한 책의 쪽수를 의미한다.

 

 

3) 본 서평은 『직업으로서의 학문』 내용을 재구성했기 때문에 실제 책의 순서는 이 글과 다르게 진행된다.

 

  이 책, <직업으로서의 학문>은 사회학의 창시자이자, 현대 사회학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근원적 사상가 막스 베버(Max Weber)가 1917년 11월 7일, 뮌헨대학의 진보적 학생단체인 자유학생연합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강연한 원고를 출간한 책이다. 이 역본의 역자이신 전성우 선생님에 의하면 이 강연이 있었던 시기는 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던 때로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고 있었고, 당시 학생들은 이러한 정신적 위기상황에서 이를 극복한 카리스마적 ‘예언자’나 ‘제사장’을 요구하고 있었다고 한다.

 

 

1. 들어가기에 앞서: ‘직업으로서의 학문’이라는 제목

 

 

  먼저 이 책의 원래 제목은 ‘Wissenschaft als Beruf’인데, 이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있어야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독일어 ‘Wissenschaft’는 ‘학문/과학’이라는 의미를, ‘als’는 ‘-로서’라는 의미를, ‘Beruf’는 ‘사명/소명/천직’, 또는 ‘직업’이라는 의미를 각각 가지고 있다. 여기서 Wissenschaft와 Beruf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독일어 Wissenschaft는 과학, 또는 학문을 의미하는데, 한국에서 ‘과학’은 보통 생물, 물리, 화학, 지구과학 등의 자연과학을 떠올리게 한다. 따라서 한국에서 통상적으로 과학이 의미하는 바는 (자연)과학이고, 여기서 베버가 의미하는 과학이란 근대적 학문이라는 의미의 ‘과학’이다. 굳이 과학과 학문이 구별되어야 하는 이유는 학문이 전근대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만 해도 학문이라는 어휘가 상당히 많이 사용된다. 그래서 Wissenschaft는 ‘근대적 학문’, 또는 독일적 맥락에서의 ‘과학’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Beruf에 관한 이야기이다. 독일어 동사 ‘berufen’은 ‘부르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의 명사형 Beruf는 ‘부름 받은 것’이 되는데, 서구 기독교 전통에서 직업은 신의 소명이자 사명으로 이해되었고 이를 통해 근대적, 전문적 직업윤리가 싹튼다는 것이 베버의 중요한 분석이다. 따라서 베버가 의도한 Beruf는 단순한 직업이라기보다는 천직, 소명으로 이해되어 전문적이고, 합리적으로 조직된 근대적 직업이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은 ‘소명으로서의 과학’ 또는 ‘천직으로서의 (근대적) 학문(또는 학술)’이 보다 더 정확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2. 탈주술화 과정(Entzauberungsprozeß)으로서의 근대와 가치 다신주의

 

  베버는 이 강연에서 우리 시대의 특징으로서의 탈주술화에 대해 직접적으로 설명한다.

 

 

합리화(Rationalisierung)와 주지주의(Intellektualisierung)화를, 특히 세계의 탈주술화(脫呪術化, Entzauberung)를 특징으로 하는 우리 시대에서는 바로 가장 숭고하고 궁극적인 가치들이야말로 공공의 장에서 물러나서 신비주의적 삶의 은둔의 세계로 퇴장했거나, 아니면 개인들 상호간의 직접적 형제애 관계 속으로 퇴장했습니다(88).

Es ist das Schicksal unserer Zeit, mit der ihr eigenen Rationalisierung Intellektualisierung, vor allem: Entzauberung der Welt, daß gerade die letzten und sublimsten Werte zurückgetreten sind aus der Öffentlichkeit, entweder in das hinterweltliche Reich mystischen Lebens oder in die Brüderlichkeit unmittelbarer Beziehungen der Einzelnen zueinander.

 

 

주지주의화와 합리화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라도 우리의 삶의 조건들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우리의 삶에서 작용하는 어떤 힘들도 원래 신비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힘들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모든 사물은 - 원칙적으로는 - 계산을 통해 지배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이 알고 있거나 또는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세계의 탈주술화를 뜻합니다. 그러한 신비하고 예측할 수 없는 힘의 존재를 믿은 미개인이 했던 것처럼 정령(精靈)을 다스리거나 정령에게 산청하고 그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주술적 수단에 호소하는 따위의 일은 우리는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령에게 부탁했던 일들을 오늘날은 기술적 수단과 계산이 대신해줍니다. 무엇보다도 이것이 주지주의화가 그 자체로서 의미하는 바입니다(45-46).

 

 

  탈주술화와 더불어 베버는 이 시대의 근본규정을 가치 다신주의라는 이름으로 명명한다. 근대의 니힐리즘을 지적한 니체의 세계상으로부터 베버는 큰 영향을 받는다.[각주:1] 베버는 니체의 “신은 죽었다”2]라는 선언에서 한 걸음 더 나가서 다음과 같은 선언을 한다.

 

 

옛날의 많은 신들은, 이제 그 주술적 힘을 잃어버리고 그래서 비인격적 힘의 모습으로, 그들의 무덤에서 기어 나와 우리 삶을 지배하고자 하며 또다시 서로간의 영원한 투쟁을 시작하고 있습니다(72).

 

 

삶이 어떤 형이상학적 또는 종교적 준거 없이 그 자체로서 존재근거를 가지고 있고 그 자체로서 이해되는 한, 삶은 오로지 저 신들 상호간의 영원한 투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기본상황 말입니다(80).

 

 

 

  이제 유일한 태양은 없고, 또 합리주의마저도 상대화될 수밖에 없게 된, 그래서 스스로는 자기에게 있어 무엇이 신이고 악마인지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모든 가치들이 서로 투쟁할 수밖에 없는 시대상을 지적한다. 절대적 가치를 잃고 이 니힐리즘 속에서 일상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 곧 우리시대 젊은이들의 피치 못할 운명이며, 가장 힘든 것임을 베버는 밝히고 있다.

 

3. 근대 학문의 지위와 그 의미의 문제

 

 

  베버는 학문연구가 본질적으로 진보(Fortschritt)에 예속되어 있으므로 학문은 시간이 지나면 낡아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쳐해 있고 이 자체가 학문의 목적임을 밝히면서 학문의 의미문제를 논한다. 다시 말해 학문 자체를, 즉 낡아버릴 수밖에 없는 작업을 업으로 삼는 학자들은 그것을 통해 어떤 의미를 취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베버는 톨스토이를 인용하며 우회한다. 과연 죽음은 의미 있는 현상인가? 베버는 사상, 지식, 또는 제반 문제들로 끊임없이 농축되어 가는 근대의 과정 속에 있는 근대 문화인(文化人, Kulturmensch)은 생의 포만감을 느낄 수 없다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근대 문화인은 ‘최종적인 것’이 아닌 끊임없는 진보 속에서 극히 작은 부분만을 낚아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근대인들에게 죽음은 의미 없는 것일 뿐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시조 아브라함이 삶에서 만족감을 느낀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의 생활 전체 속에서 학문의 소명은 무엇이며, 그것의 가치는 무엇인가?

 

  베버는 고대부터 중세까지 이어진 학문의 목적에 대해 서술하면서, 학문이 그 자체로서 의미를 부여하던 시기는 끝났음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중세의 곤충학자, 슈밤메르담(Jan Swammerdam)이 작은 곤충에도 존재하는 신의 섭리를 깨닫기 위해 학문을 선택했다면, 근대의 자연과학자들에게는 그런 의미부여가 없다는 것이다. 또 베버는 학문은 행복추구의 길이라는 선언도 니체를 인용하면서 그 자체로 의미가 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진정한 존재로의 길”, “진정한 예술로의 길”, “진정한 자연으로의 길”, “진정한 신으로의 길”, “진정한 행복으로의 길” 등 이전의 모든 환상이 무너져버린 지금, 학문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에 대해 베버는 학문연구에서 나오는 결과는 <알 가치가 있다wissenswert>는 의미에서 중요하다는 전제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한다. 이는 학문의 수단으로써 증명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더 중요하며 이는 궁극적 의미를 기준으로만 해석될 수 있는 해답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자연과학자들이 자연 법칙을 알 가치가 있다고 전제하는 이유는 그 지식으로 기술적 성과를 달성할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들이 학문은 <소명Beruf>으로 여긴다면, 이러한 <지식 자체를 위해서um ihrer selbst willen>이기도 하다.

 

4. 학문적 사실판단과 규범적 가치판단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책은 가치다신주의라는 시대규정 속, 구체적으로 1차 세계대전 막바지라는 장밋빛 미래를 꿈꾸기 난망한 상황에서 학자를 꿈꾸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다. 학생들은 누구보다도 자신들의 방황을 잠재워줄 ‘예언자’, ‘제사장’을 갈구하던 상황에 베버는 근대문화에서 학문이 차지하는 위치를 정직하게 선언하고, 학문과 정치의 관계를 분리시킨다. 베버는 정치는 강의실에서 배제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실천적-정치적 입장을 취하는 것과 정치구조 및 정당구도를 학문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구별된 사안임을 지적하는데, 이는 아마도 진보적 학생들에게는 신선한 발언이었을 것 같다.

 

 

만약 내가 대중 집회에서 민주주의에 대해 강연한다면, 나는 나의 개인적 입장을 숨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대중 집회에서는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도록 편을 드는 것이 연사의 마땅한 의무이며 책임입니다. 그러한 경우에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들은 학문적 분석의 수단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수단입니다. 이 말들은 관조적 사색의 토지를 일궈주기 위한 쟁기의 날이 아니라, 적에 대항하기 위한 칼, 즉 투쟁수단입니다(63).

 

 

  베버는 “사실확인, 수학적 및 논리적 사실들의 확인 또는 문화적 재화들의 내적 구조의 확인”과 “문화의 가치 및 그 개별적 내용의 가치에 대한 물음과 문화공동체 및 정치적 조직 안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대답하는 것”(64), 이 양자가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것을 통찰하는 지적 성실성을 학자에게 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강의실은 비판이 불가능한 공간이고, 더불어 이는 학문 발전의 저해 요소이기 때문이다. 베버는 이어서 신학자와 신자의 비유를 들어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구별한다. <전제 없는voraussetzungslos> 학문은 <기적Wunder>과 <계시Offenbarung>와는 상관이 없다. 근대학문은 궁극적 가치설정과 의미창출의 주체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자에게 기적과 계시를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학자는 기독교의 역사적 발생과정에 대해 기적과 계시 같은 초자연적인 원인들을 제거하고 인과적 요인들을 설명할 수 있다.

 

 

학문은 오늘날에는 <자기성찰Selbstbesinnung>과 사실관계의 인식에 기여하기 위해 전문적으로 행해지는 <직업Beruf>이지, 구원재(救援財, Heilsgüter)와 계시를 희사(喜捨, spendende)하는 심령가나 예언자의 은총의 선물이 아니며 또한 세계의 의미에 대한 현인과 철학자의 사색의 일부분도 아닙니다(81-82).

 

 

  학자가 강단에서 학문적 사실판단에 대한 권위를 규범적 가치판단의 영역으로 확대시킬 경우, 학자는 부유하는 근대인들에게 새로운 ‘유일신적’ 구원의 길이 있다고 장사하는 지적사기꾼이 될 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서로 싸우는 신들 중 어느 신을 섬겨야 하는가, 아니면 이들과는 전혀 다른 어떤 신을 섬겨야 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이 다른 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학문이 대답하지 못하는 이상, 그럼 누가 대답하는가?”라는 묻는다면, 이에 대해서는 예언자나 구세주가 대답할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언자가 없거나 또는 그의 예언이 더 이상 믿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수천 명의 교수들이 국록을 받거나 특권을 누리는 소예언자로서 강의실에서 예언자의 역할을 수임하려고 시도한다고 해도 결코 진정한 예언자가 지상에 다시 등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82).

 

 

 

  또한 이들이 자신의 실천적 입장은 학문적으로 옹호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세계는 다양한 가치질서들의 해소될 수 없는 상쟁(相爭)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가치 다신주의의 상황에서 이는 무의미한 것일 뿐이다.

 

5. 학자의 외적, 내적 조건과 소명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생각하는 젊은 학생들에게 학자의 외적, 내적 조건과 소명에 관해 이야기한다. 먼저 베버는 학자의 외적 조건에 관한 강연에서 직업으로서 학문을 즉 학자로서 안정된 미래를 보장받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임을 지적하면서 베버는 학자의 학자적 능력과 강사로서의 능력의 차이, 또 교수임용 과정에서 벌어지는 정치적인 외압 같은 예를 들면서 학자의 길은 거친 요행(Hazard)의 길이라고 선언한다. 이런 외적 조건을 다룬 뒤 베버는 이런 대화로 마무리를 한다.[각주:3]

 

 

“당신은 평범한 인재들이 해마다 당신보다 앞서 승진하는 것을 보고도 내적 비탄이나 파멸 없이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러면 우리는 매번 두말할 나위도 없이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듣게 됩니다. “물론입니다. 나는 단지 나의 <천직Beruf>을 위해 살 뿐입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나는 그들 가운데 내적 상처를 입지 않고 그것을 참아 내는 사람은 매우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32).

 

 

  이어지는 학자의 내적 조건에서 베버는 학자가 갖추어야 할 열정과 소명의식에 대해 언급하며, 굉장히 유명한 강연을 이어간다.

 

 

일단 눈가리개를 하고서, 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구절을 옳게 판독해 내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침잠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예 학문을 단념하십시오. 이런 능력이 없는 사람은 우리가 학문의 <체험Erlebnis>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결코 자기 내면에서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학문에 문외한 모든 사람들로부터는 조롱당하는 저 기이한 도취, 저 열정, “네가 태어나기까지는 수천 년이 결과할 수밖에 없었으며”, 네가 그 판독에 성공할지를 “또 다른 수천 년이 침묵하면서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은 학문에 대한 소명이 없는 것이니 다른 어떤 일을 하십시오. 왜냐하면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만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34).

 

 

  앞 서 베버는 학자로서의 길이 순탄하지 않다는 설명을 마치고 학생들에게 학자가 갖춰야 할 열정을 전달하고 있다. 이는 이 자체로는 학적인 열정에 대한 가슴 뛰는 설명이기도 한 동시에 분화된 근대사회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있다. 코린토스로 보내는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라고 설파한다. 이는 어떤 이에게는 절대적이고 숭고한 것이 다른 이에게는 무가치한 것일 수도 있다는 의미로, 베버 역시 어느 고대 필사본을 옳게 판독해 내는 데 자신의 영혼이 사로잡힌다고 하더라도, 이런 소명의식이 누군가에게는 조롱당하는 기이한 도취·열정에 불과할 것임을 암시한다. 부르디외가 말하듯 학문장(學文場)의 일뤼지오(illusio)에 사로잡힌 행위자들에게 학문적 성취는 지고한 가치이겠지만, 학문장 외부의 행위자들에게 고대 필사본의 판독해내는 것은 무가치한 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어서 베버는 비단 열정뿐 아니라 <영감Eingebung>, <혼Seele> 역시 학자의 전제조건임을 언급하며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실험실·통계실에서 제조되는 계산문제가 되어버린 현실을 개탄한다(영감의 문제를 다루는 서술에서 근대성과 행위자의 창조성에 관한 베버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어서 베버는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개성Persönlichkeit>, (가치 다신주의에 기반해 발생하는 (72))<체험>이 우상처럼 퍼져있다고 비판하면서 <개성>은 곧 학문영역에서 순수하게 자신의 주제에 천착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학문 진전에 힘쓰지 않는 호사가, 대중학자들을 비판하고 오직 자신의 과업에 내적으로 몰두하는 것이 학자의 길임을 힘 있게 논변하고 있다.

 

6. 결론

 

 

  문고판 번역본으로 약 70페이지, 독일어로 약 40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이 강의록에는 이렇게나 많은 내용들이 담겨있다. 베버는 소명으로서 학자라는 직업에 종사할 사람들의 외적·내적 조건과 근대 학문의 본질과 그 의미와 한계, 그리고 학문과 정치의 관계, 근대의 시대상에 관해 이 짧은 원고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은 큰 맥락에서 두 개의 맥락으로 읽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하나의 메시지로 읽는 것이고, 다른 것은 이 책을 막스 베버의 근대사회론에 포함시켜 읽는 것일 것이다. 해석의 독자의 몫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전자의 맥락에서 이 책을 읽곤 했는데, 요즘 들어서는 후자의 맥락에서 이 책을 읽고 있다.

 

  책의 역자이시고, 베버 전문가이신 전성우 선생님께서는 “이 강연에서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이라는 주제를 근대 문화 일반의 구조와 밀접히 연관시켜 가면서 논의하고 있습니다. 베버의 학문론뿐 아니라 근대성 이론 전반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필독”해야할 책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계시는데, 베버의 역사사회학 연구를 중점으로 하셨던 선생님께서 이 원고를 『‘탈주술화’ 과정과 근대』라는 제목의 선집으로 묶여 출간하셨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베버는 신이 죽고, 그 신들이 무덤에서 기어 나와 서로 투쟁하는 시대의 난망함과 서구 근대의 이중적 성격, 즉 ‘가치·의미해방’과 ‘새로운 예속’이라는 역설적 상황들을 그려낸다. 이 책 『직업으로서의 학문』은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주는 메시지이자, 근대인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하나의 단편이다.

 

  1. 니체와 베버의 관계에 관해서는 『막스 베버 사회학』, 전성우, 나남출판, 2013, 44p 이하 또는 『막스 베버』, 김덕영, 도서출판 길, 2014, 629p 이하를 참고할 것. [본문으로]
  2. 이제 하나의 경전처럼 여겨지는 이 경구는 니체의 『즐거운 학문』, 125절에 있다. [본문으로]
  3. 학자의 외적조건에서 베버는 수공 장인(匠人)이 생산수단을 직접 소유하듯, 학문적 수공업자(학자)의 노동수단의 첫 째로 장서(藏書)를 언급하기도 한다. [본문으로]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 1858년 3월 1일~1918년 9월 28일)



막스 베버 (Max Weber, 1864년 4월 21일 ~ 1920년 6월 14일)


짐멜이냐 베버냐? - 사회학의 인식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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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 분과과학은 고유한 인식대상과 인식방법을 갖추어야 한다. 게오르그 짐멜의 형식사회학과 막스 베버의 이해사회학은 사회학의 대상은 무엇이며, 방법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이다. 짐멜은 상호작용을, 베버는 사회적 행위를 사회학의 인식대상으로 삼았으며 이는 모두 사회적인 것의 증가라는 현대의 특유한 체험을 반영한다. 구체적으로 짐멜과 베버의 인식대상은 서구 시민계층의 생활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후에 다룰 내용들은 짐멜과 베버가 어떻게 국가와 사회로부터 사회적인 것으로 인식관심을 돌리게 되었는가를 간략하게 추적할 것이다.


1. 사회적인 것: 사회학 인식의 대상


짐멜과 베버 이전의 문화·사회과학은 국가나 사회를 실체로 간주하고 이에 대해 전체적이고 총체적으로 접근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짐멜과 베버는 이런 경향과는 전혀 새로운 과학적 기획으로 국가나 사회가 아닌 사회적인 것을 사회학의 인식대상으로 삼았다.


1) 국가와 사회로부터 사회적인 것으로


당시 독일의 지성계는 국가중심의 역사과학과 사회과학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나 짐멜과 베버의 사회학은 사회의 해체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베버는 국가가 어디까지나 “개별 인간들이 수행하는 특정한 행위의 과정과 연관관계”로 파악했고, 모든 사회적 관계나 질서는 개인들의 유의미한 행위로 소급할 수 있고, 소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베버에게는 그 어떤 행위하는 집합인격체도 존재하지 않고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짐멜에게 사회는 ‘규제적인 이념’으로 기능하며, 단순히 다수의 개인들 사이에 진행되는 상호작용의 합을 의미한다. 짐멜에게 사회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진행 중인 역동적인 사건이며, 서로의 숙명과 상태에 대해 영향을 주고받는 기능이다.

이들은 콩트나 스펜서 등의 고전사회학자들을 사회학의 선구자로 보지 않았으며 실체주의적인 사회, 총체적인 사회, 자연과학적 지향성을 가진 보편적 사회이론에서 거리를 둔다. 또 이들의 사회학 개념에 입각해본다면 앞에서 언급한 이전 사회과학에서의 국가나 경제조직 같은 거시적인 사회체들은 개인들 사이의 사회적 상호작용이 객관적 구조물로 응축되거나 결정된 결과라고 이해할 수 있다. 더불어 구조적인 것은 개별 인간들이 고립해서는 달성할 수 없는 목표와 목적을 위한 수단의 기능이다.


2) 게오르그 짐멜 : 상호작용과 그 형식


짐멜의 사회학은 다양한 사회적 현상과 과정을 개인들 사이에서 진행되는 상호작용의 형식이라는 형식적 관점에서 접근한다. 사회적 상호작용의 형식이란 “개인들의 존재를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 물론이지만, 이제는 개인들이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공존관계, 동시관계 및 상호관계라는 관점에서 인식된다.” 따라서 짐멜에게 사회학은 사유적으로 구성된 더 높은 차원의 단위를 근거로 모든 사회적 영역과 맥락에서 사회학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짐멜 사회학의 존재는 상호작용의 형식과 내용을 엄격히 구분함으로써 가능해진다. 두 범주의 분리는 내용의 추상화를 의미한다. 이것은 사회학의 탈역사화·몰역사화를 의미한다. 그럼에도 그의 사회학은 역사·시간을 순전히 형식주의적 측면에서만 다루는 것은 아니다. 그를 넘어서 역사적인 것을 포괄할 수 있다. 다양한 역사적 맥락에서 사회적 상호작용의 동일한 형식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짐멜의 사회학은 변증법적이고 관계론적이다. 이는 사회학적 인식에 대해 사유적으로 구성된 분석적이고 개념적인 우회로를 제공해준다. 이 우회로는 보편성을 띠는 순수한 형식을 거쳐 특정 현상에 이르는 길이다.

짐멜은 인격적·개인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은 분명히 “사회적 사건의 결과이자 원인으로서, 사회적 사건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이것들은 내적·본질적으로 사회적인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러한 견해에 근거해 짐멜은 인격과 문화, 그리고 사회의 범주를 구분한다. 인격이란 개별 인간이 지니고 있는 주관적이고 정신적인 특성과 특질 및 개성을 가리키고, 문화란 인간 영혼이 주체와 객체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에게서 출발해서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사회는 다수 개인들 사이의 상호작용의 총합으로 구성된다.


3) 막스 베버 : 사회적 행위


베버는 문화과학을 개념적·방법론적으로 구축하는 것을 임무로 생각했다. 문화과학은 어느 하나의 특정한 개별 분과과학이 아니라 역사학·경제학·사회학 등의 분과학문을 포괄하며 문화적 삶에 접근하는 새로운 경험과학의 유형을 가리킨다. 베버는 이우 더불어 현대세계 특유의 다양한 체험을 광범위하고 통일적인 방식에 의해 이론적이고 역사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인식유형을 구축하는 과제도 가지고 있었다.

베버에게 문화과학의 선험적 전제조선은 이 세상에서 주관적으로 입지를 정하고 행위하며 이 행위에 대해서 주관적 의미를 부여하는 의지와 능력을 소유한 문화인간이다. 이는 문화과학적 인간방법의 기초를 이룬다. 베버는 사건에 대해서는 결국 스스로 의미를 창출해야 그 의미를 알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는 과학자의 주관적이고 적극적인 인식행위를 의미한다. 베버는 자신의 주관적인 가치이념에 입각하여 사회적 현상과 역사적 과정에 문화의의를 부여하며, 그 가운데 특정한 단면들을 선별하고 사유적으로 정리하며 질서를 부여해서 개념과 이론을 구성한다.

베버에게 문화과학은 인간의 문화적 삶의 현재와 역사적 측면을 다루는 현실과학이다. 이런 관점에서 베버는 사회적인 것을 행위자의 주관적 의미차원으로 소급한다. 사회적 삶은 본질상 문화적이지만 보편적인 인간의 문화적 삶에서는 문화적인 것보다 협소한 무언가로서 일종의 제한된 과학적 의미와 지위를 닺는다. 사회적인 것은 문화적인 것의 부분에 해당한다. 베버는 사회과학의 인식관심의 출발점이 우리를 둘러싼 사회적 문화생활의 실재적인, 개별적인 형상임을 이야기한다. 구체적으로 베버는 사회과학 인식의 출발점으로 “문화적 삶이 지닌 보편적인, 하지만 조금도 덜 개별적이지 않은 연관관계”와 “이 문화적 삶이 다른 사회적 문화조건들에서 생성되어온 과정”을 이야기한다.

베버는 사회적인 것을 문화적인 것의 일부로 간주하고 사회과학을 사회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과의 연관성 속에서 고찰하는 사회경제학으로 간주한다. 사회·경제적인 것을 매개하는 문화적인 것이란 개인들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주관적으로 부여하는 의미성이다. 베버는 사회적 행위의 범주론 또는 유형학을 추구했으며 이것은 인간행위의 유의미성이라는 특정한 관점에서 그 자체로 총체적인 사회적 현상과 역사적 사건을 추상함으로써 얻어진 것이다.

후기에 베버는 사회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에 대한 분리를 시도했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현상과 과정에 대해 유형개념과 일반적인 규칙성을 구성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베버는 인간행위의 의미는 언제나 주관적이지만, 언제나 사회적으로 매개된 의미라는 사실에 근거해 문화의 보편사를 지향한다. 그에게 사회학적이란 것은 인간의 유의미한 행위에 입각해 특정한 역사적 맥락과 현실들을 초월해서 보평타당성을 지니는 개념과 이론들이 구성됨을 의미한다.

베버는 이 세상에서의 주관적 입지를 정하고 유의미하게 행위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이 모든 문화과학의 선험적 전제조건이라면, 개별 인간과 그의 행위야말로 사회학의 “가장 낮은 단위”를 구성하며 동시에 그 “상한선”을 구성한다. 따라서 사회학은 역사적 사건과 사회적 과정을 “‘이해가능한’ 행위로, 말하자면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인간의 공동체 생활에 참여하는 개별 인간들의 행위로 환원시켜야 한다.”


4) 짐멜과 베버의 차이점


짐멜에게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가 사회학의 기초문제가 되고, 베버는 개별 인간들의 행위에서 출발하여 사회학의 기초개념을 구성하려고 한다. 짐멜은 보편적 사회이론을 추구하지 않았다. 짐멜에게 사회학은 사회가 아닌 사회적인 것의 과학이라는 표상에 입각하여 상호작용과 그 형식, 또는 사회화와 그 형식에 의해서 사회를 해체시키기 위한 것이다. 짐멜에게 사회학의 인식대상은 전체로서의 사회 그 자체가 아니라 특정한 관점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선택되고 추상된 단편들이다. 베버는 사회를 문제삼은 적이 없다. 베버에게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베버 사회학의 기초개념들은 유의미한 인간행위를 토대로 구성되며 일관되게 행위에 근접해있다. 사회적인 것을 다루는 사회학은 언제나 개별 인간들의 유의미한 행위에 준거하고 거기에서 출발해야 하며 귀결되어야 한다. 베버는 의미와 무관한 자연세계에 반해 유의미한 사회세계의 특성을 강조했으며 이를 통해 짐멜 사회학의 인식대상인 상호작용을 비판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학적 인식을 자연과학적 인식과 구분하려 했던 짐멜의 견해를 간과한 것이다. 짐멜은 자연과학과 구분되는 3가지 사회학적 아프리오리(a priori)를 제시한다. 그것은 첫 째, “우리는 모두 단편들이다.”, 둘 째 “개인은 사회화된 존재인 동시에 비사회화된 존재이다.”, 셋 째 “사회는 불평등한 요소들로 이루어진 구조물이다.”이다.


2. 시민계층의 사회세계와 사회학


시민계층의 사회세계는 짐멜과 베버 사회학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짐멜은 지속적으로 대도시적 삶의 공간에서 직업적·정치적 의무와 과제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유희적이고 미학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부유한 인간집단의 사회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베버는 주체적으로 자아지배와 사회지배를 지향하는 금욕적이고 직업적인 시민계층의 사회세계로부터 사회학의 소재를 얻는다.


1) 대도시 시민계층의 친교와 상호작용


사람에서 사람으로 연결되는 순간적인, 지속적인, 의식적인, 무의식적인, 일시적인, 중차대한 무수한 관계들을 분석하려는 짐멜의 사회학은 인식기획과 방법론적 토대를 구성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대도시의 부유한 시민계층의 사회세계를 논의의 지평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짐멜은 사회에서 두 가지 범주를 설정하고 있다. 첫 째는 이해관계, 동기, 목적, 그리고 충동 등등을 지닌 개인들이고 둘 째는 개인들 사이에 진행되는 상호작용과 거기에서 생성되는 다양한 형식이다. 짐멜에게 사회를 사회로 만드는 것은 상호작용하는 개인들의 특정한 삶의 내용들이 아니라, 이들 내용의 생동감이 상호영향을 미치는 형식들 획득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그는 상호작용의 형식과 내용을 엄격하게 사유적으로 분리함으로써 사회학의 존립가능성을 찾는다.

이는 이론적으로 칸트의 철학·인식론적 원리를 사회세계에 적용하려는 짐멜의 방법론적 프로그램을 가리킨다. 짐멜은 부유한 대도시 시민계층의 상호작용이 순전히 유희적인 상호작용의 형식임을 관찰한다. 여기서 상호작용하는 개인은 실제적인 목적이나 이해관계를 갖지 않고 어떤 기능적 요구도 하지 않는다. 즉 사회에서 사회인 것은 그 무엇보다도 친교에서 명백하게 구현된다. 짐멜은 친교에서 사회적 현상과 과정에 대한 사회학적 인식을 위해서 일차적으로 요구되는 상호작용의 형식과 내용의 분리를 가장 전형적이고 순수하게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친교는 외적인 강제보다는 자유부동하며 상호작용하는 개인들의 관계이기 때문에 개인들의 연관관계가 더 강력하게 강조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개별 분과과학으로서 사회학을 추구하는 짐멜은 (형식, 내용) 분리의 과학외적·이론외적 전형을 국가나 경제 또는 종교 같은 사회가 아니라 전적으로 친교라는 사회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친교는 원칙적으로 모든 특수한 내용을 초월하는 형식을, 모든 내용들을 형식의 순수한 유희 속으로 용해시키는 추상적 형상으로 표현된다.

친교는 서구의 광범위한 사회·문화적 합리화와 분화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그 일부분이다. 친교는 현대적 경제와 사회질서 위에 존립하며, 시민계층의 세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생활양식이라는 점에서 문화의의를 지닌다. 덧붙여 짐멜은 친교라는 특수한 생활양식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의 경제적·사회적 요구와 강제에서 자아의 영혼을 구제하고 자아로 복귀하도록 교화시키려는 실천적 동기도 가지고 있었다.

짐멜은 경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구분한다. 짐멜에게 경제적인 것은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기에 낮은 수준의 사회적 상호작용이며 가장 비인격적이고 즉물적인 매체인 돈에 의해 조직되고 구조화되며 통제된다. 따라서 경제적 행위자들은 단지 특정한 기능이나 역할의 담지자로 사회적 상호작용을 할 따름이다. 반대로 사회적인 것은 적은 수의 사람이 참여하기에 높은 수준의 상호작용이며 이해관계가 아닌 전적으로 인간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에 전념한다. 짐멜에게 돈은 개인들이 다양한 사회적 관계와 영역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것이며 돈은 소유한 사람들로 하여금 물질적 요구와 강제에서 해방되어 유희적인 사회화 형식에 전념하도록 해준다.

결론적으로 친교는 정치·경제와 같은 실제·합리적 내용 및 강제에의 참여라는 하한선과 가장 순수하고 내적인 인격의 체험이라는 상한선의 사이에 존재하고 기능할 수 있는 사회적 상호작용 형식이다. 이 두 요소를 제거하면 친교에는 단지 인간에게서 보편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특성들만이 남게 된다. 친교는 종교·예술·사랑과 달리 사회학적 구성물이며 사회적 상호작용을 가리키기 때문에 개인의 순수한 인격에 관계하는 철학의 주제가 될 수 없다. 또한 각 영역에서 진행되는 상호작용은 사회학적 구성물인 친교에서 진행되는 것과 원칙적으로 대체하거나 분해할 수 없는 정체적인 인격들로 구성된다.


2) 합리적 경제행위와 사회적 행위


베버에게 문화과학은 선험적 전제조건은 문화인간이고, 이는 더 이상 소급하거나 환원할 수 없는 최종 단위이다. 문화인간은 문화과학의 존립과 의미의 근거가 된다. 문화인간은 서구의 근대 이후 주관적 인격과 합리적인 삶의 질서를 겸비한 인간유형으로 형성되었다. 더불어 베버는 문화인간과 더불어서 행위개념에 의지와 능력뿐만 아니라 행위의 목적을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는 데에 적합한 수단을 동원하고 실제적인 행위의 과정을 통제하고 결과를 평가하며 자신의 행위에 주관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의미와 능력을 덧붙인다. 또한 합목적적 행위의 담지자들은 외부세계 대상들의 행태와 다른 사람들의 행위에 대한 기대를 합리적으로 추구하고 고려한 성공적 결과로서의 자신의 목적에 대한 조건이나 수단으로 이용하는 인간의 유의미한 자아행태이며 사회학적 인식의 이념형으로 기능한다.

이런 베버의 행위유형은 연역이나 사변적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서구문화가 구축한 역사적 성과물이다. 목적합리적 행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문화사적 연구의 결과물이다. 베버는 서구 시민계층의 합리성이 전형적인 근대적 문화인간의 유형을 보여준다고 파악했으며 그 특유의 행위합리성을 서구 근대의 특이성과 보편사적 형성조건 및 발달경로를 분석하고 설명하는 과학적 작업을 위하 이론적 도구로 적극 활용하였다.

베버는 국가와 통치에서 시작되어 위로부터 내려오는 인식과 상승하는 계급들의 해방투쟁에서 비롯되어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당시 독일의 인식이 아닌 기민계층의 사회세계로 사회과학이 눈을 돌려야한다고 보았다. 베버 사회학의 기저를 이루는 것은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 시민계층이 자유로운 시장질서 속에서 기획하고 조직하며 영위한 경제행위이다. 서구 근대 초기의 경제 시민계층이라는 역사적 인간집단의 문화의의는, 이 집단이 근대적 자본주의 토대 위에서 삶과 행위의 합리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주체주의적인 정신을 창조함으로써 물질적·경제적 문화와 이상적·정신적 문화를 결합시켰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베버는 이 집단에서 시민계층적·자본주의적 사회관계와 사회질서에 적합한 합리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주체주의적인 행위모델과 가치모델을 발견한 것이다. 심화하여 합목적적이고 객과적인 사회관계와 사회질서가 전반적으로 관철되고 제도화된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베버의 문화사적 연구는 사회과학적 연구이다. 그는 관념철학이나 의식철학의 관점에서 개별적으로 고립된 인간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집단의 형성과 발달을 보았다.

베버가 제시한 계급과 신분, 경제적 질서와 사회적 질서의 차이점은 노동자와 시민계층(또는 부르주아지)를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다. 노동자의 삶은 철저히 경제적 질서에 의해 조건지어지고 결정되기 때문에 그들의 행위는 철저히 물질적 이해관계에 얽매여 있고 그들은 사회적 질서에 참여하는 것이 봉쇄되어 있다. 여기서는 유의미한 인간 행위가 나타날 수 없다. 반면 시민계층은 물질적 생존경쟁에서 해방되어 자신만의 고유한 인격을 창출하는데 전념하고 사회적으로 행위할 수 있게 해준다. 노동자들은 단지 실제적인 이해관계에 의해 지배받을 뿐이고, 사회적 질서에 참여하는 시민계층은 주관적 인격을 평준화하고 말살시키는 생존경쟁으로부터 구성원들을 보호해준다.

베버는 근대적 행위와 적합한 행위모델을 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서구 경제 시민계층에서 찾는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연구에서 이념형적으로 제시된 캘빈교도들의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행위유형과 생활양식은 베버 시대의 실제 독일 시민계층에게는 결여되어 있던 특성이다. 이들은 주체적인 행위자이기보다 귀족화를 지향하고 있었다. 반면 현대사회의 문화적·윤리적 토대를 구성하는 직업으로서의 자본주의, 직업으로서의 과학, 그리고 직업으로서의 정치, 바로 이것들이야말로 독일을 현대적인 시민계층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사회로 철저하게 탈바꿈시킬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베버는 확신했다.


3. 상호작용과 사회적 행위의 개념을 어디에서 왔는가?


1) 민족심리학과 원자론 그리고 상호작용


게오르그 짐멜은 사회적인 것에 대한 인식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민족심리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짐멜이 민족심리학에서 배운 초개체적인 것은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개별적인 것과 전체적인 것의 관계, 인간과 사회의 관계이다. 민족심리학의 창시자인 라차루스와 스타인탈은 개별과 전체,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상호작용”으로 파악한다. 민족심리학은 민족의 삶을 심리학적 근원으로 소급한다. 이런 이유로 민족심리학은 “민족의 정신적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과 법칙들에 대한 이론”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민족심리학은 집합주의적이고 유기체론적인 특성을 지닌다. 짐멜은 민족심리학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이와 거리를 두며 독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짐멜은 인류학적 연구도 가치가 있지만 두 가지 사회의 개념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 한계에 대해 지적한다. 첫 번째로 사회라는 개념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데, 이 개념은 개별 현상들을 분리해서 다룰 수 있는 능력이 부재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두 번째로 특별히 사회적인 에너지를 통해서 현상들을 결정하는 사회이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단순히 다향으로 발생하는 동일한 현상들을 가리켜서 사회적이라고 기술하며 통계적 동질성 및 동시성을 혼동한다. 181-182p.

짐멜은 사회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면서 자연과학적 세계관, 구체적으로 구스타프 테오도르 페히너의 사변적 원자론에 주목하게 된다. 짐멜을 이를 통해 사회세계와 자연세계 모두 요소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존재한다는 점을 파악한다. 베버는 이런 측면에서 자연과학에서 개념자원을 차용한 짐멜을 비판한다. 그러나 이것은 베버의 오해이며 짐멜은 사회과학적 인식은 자연과학과 근본적으로 다르게 선험적으로 개인의 영혼과 확고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강조한다. 이런 까닭에 사회과학의 기저에는 개념적으로 자아와 타자 사이의 상호작용이 깔려있다. 사회의 최고단위는 바로 이들 두 원천형상과 이들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 더불어 짐멜은 사변적 원자론을 통해 민족심리학의 집합주의·유기체론적 특성을 극복하고 사회를 “단위들로 구성된 단위”로 간주하는 사회학으로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사회의 영혼을 거기에 관여하는 사람들 사이에 진행되는 상호작용의 합으로 해체시키는 것은 다음과 같은 현대의 정신적 삶 일반이 보여주는 방향이다. 고정적이고 동일하며 실체적인 것을 기능, 에너지, 운동으로 해체하고 모든 존재에서 그것이 되어가는 역사적 과정을 인식한다. 우리가 사회라고 명명하는 것에서 부분들의 상호작용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집들을 가지고 집을 지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짐멜은 페히너의 원자론에 의존해서 사회를 다수의 개인들의 사호작용의 합으로 해체시킬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구체적인 정신적·사회적 현상과 과정을, 전체적이고 단일한, 또는 통일적인 영혼이나 사회의 구조 및 본질과 법칙으로 소급시키던 당시의 전신과학 및 사회과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식의 전략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2) 이론경제학과 사회적 행위


막스 베버는 오스트리아 한계효용학파의 이론경제학에서 문화과학과 사회학의 인식대상을 구축하는데 큰 영향을 받는다. 칼 맹거는 개인들의 합리적인 경제행위를 경제학의 인식대상과 기본단위로 규정한다. 경제란 그에게 다수 개별 인간들의 경제적 행위의 합과 다름없다. 이러한 맹거의 생각은 당시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의 집합주의적인 인식대상에 대한 비판이었으며 베버도 이에 큰 영향을 받는다.

막스 베버는 시장에서 진행되는 합목적적인 행위를 이념형적으로 이해하고, 그 위에 토대를 두는 사회질서를 행위론적으로 파악하는 인식의 범주를 한계효용학파의 행위개념에서 발견했다. 한계효용학파의 개념·이론 구성의 출발점은 목적과 수단을 지향하는 개별 인간의 행위이다. 이들에게 있어 서구 인간 유형의 경제적 성숙이란 구체적으로 주관적인 의미부여와 가치결단에 입각해 경제행위를 기획하고 조직하며 수행하는 인격체의 존재를 지칭한다. 베버는 문화과학과 사회학을 근대 서구 합리적인 인간유형과 행위유형의 토대 위에 구축한다. 즉 합목적성은 베버에게 방법론, 개념·이론의 구성, 실제적·역사적 연구, 그리고 실천의 문제에 대한 준거점이다. 또한 베버는 한계효용학파와 동일하게 근대 초기의 서구 경제 시민계층을 중심으로 근대적 삶의 개인·주체적인 토대가 마련되었음을 발견한다.

한계효용학파의 이론경제학이 현대 문화문제의 인식에 대해 지니는 이론적·문화사적 의미는 베버에게 개별 인간들의 유의미한 행위라는 범주를 좁은 경제영역의 테두리를 넘어서 인간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시키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그 결과 베버는 행위, 행위의 전반적인 전제조건, 그리고 행위가 객관화된 결과물의 합을 가리켜서 문화하고 정의한다.

베버에게 개별 인간이야말로 “유의미한 자아행태의 한계이다 유일한 담지자이다.” 따라서 사회학은 모든 사회구조물을 “‘이해할 수 있는’ 행위, 다시 말해서 단하나의 예외도 없이 관련된 개별 인간들의 행위로 환원시키는” 과제를 지닌다.


2017.가을



들어가기에 앞서


1. 본 서평은 "막스 베버. 김덕영 역. 2013.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도서출판 길."을 읽고 작성하였다.


2. 별도의 표시 없이 본문의 괄호 속에 표시된 숫자는 앞서 언급한 책의 쪽수를 의미한다.


Ⅰ. 서론


1997년, 국제사회학회(International Sociological Association)는 지난 세기의 사회학 유산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진행하기 위해 학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세기의 책을 조사했다. 구체적인 질문으로는 “사회학자로서 본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을 뽑아 달라”는 것이었다. 2785명 중 455명이 응답한 이 설문에서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11%의 지지를 받으며 4위를 차지했다. 이 책은 막스 베버의 핵심저서 중 하나로서 베버의 핵심적인 방법론과 사회학적 분석이 담겨있다. 베버는 이 저작을 통해 당시 독일 지성계에 격렬한 자본주의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고, 이러한 논쟁은 베버 사후에도 지속되어 종종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근대와 함께 탄생한 사회학은 다양한 사회현상들을 탐구해왔다. 그중에서도 전통사회에서 근대로 이행되는 근대화 과정을 탐구했던 학자들에게 ‘종교’라는 주제는 여전히 중요한 탐구 대상이었다. 특별히 사회학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오귀스트 꽁뜨(Aguste Comte)는 사회유기체로서의 사회적 단위체를 결합하는 핵심적인 정신적 요소로 종교를 채택하기도 했다. 꽁뜨는 공통의 언어가 인간공동체를 결합하는 불수불가결한 요소임에도 실질적인 요소라기보다는 매개적인 요소일 뿐이었다. 대신 통합된 원칙을 제공하는 종교가 사회적 연대를 증가시킨다고 보았다(루이스 코저, 2016). 꽁뜨 이후의 칼 맑스(Karl Marx), 에밀 뒤르켐(Émile Durkheim)과 같은 고전 사회학자들 또한 종교를 그들의 탐구대상으로 삼아 독창적인 종교사회학을 개척해나갔다. 앞서 언급한 칼 맑스, 에밀 뒤르켐을 포함해 사회학을 정초한 3대 거장 중 하나인 막스 베버 또한 종교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를 진행했다. 특별히 베버는 종교적 교리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행위’, 즉 종교의 실천적 영향을 그의 주된 인식대상으로 삼아 그의 연구를 진행해나간다(43). 이런 까닭에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를 읽는 것은 방대한 베버의 지적세계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며, 사회학사적으로도 가치 있는 일이다.

현대사회, 구체적으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와 인간의 노동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러나 “인간은 왜 노동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워커홀릭(workaholic)이라고 표현되는 한국인들이 적도 지역의 국가에 휴양을 가면 “그 나라 사람들은 게으르다.”라는 평가를 종종하고는 한다. 그들은 왜 게으른 것일까? 이런 두 질문에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는 내용이 바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담긴 막스 베버의 분석이다.


Ⅱ. 본론


1.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내용


(1) 『종교사회학 논총』 서문


종교사회학 논총 서문에서 베버는 본인의 종교사회학이 가진 궁극적 관심에 대해 문제제기한다. 그 문제제기는 곧 근대 서구의 역사적 특성과 그 역사적 형성조건과 발달과정, 병리적 현상에 대한 설명이다(11). 베버는 현전적(現前的) 이해를 통해 자신의 문제제기를 이어간다. 구체적으로 그 질문은 "오구 서구에만 우리가 오늘날 '타당하다'고 인정받는 발전 단계의 '과학'이 존재한다."(11)는 것이다. 베버는 인도‧중국‧바빌로니아‧이집트에도 고도로 정치(精緻)한 지식이 존재했으나 합리적인 실험이 부재했으며, 이외에 다양한 영역의 - 법체계, 음악체계, 건축체계, 출판체계, 관료제 등의 - 합리적 체계들이 서구의 근대에만 존재함을 지적한다(12-14). 베버의 질문의 종착점은 "우리 근대인의 삶의 운명을 가장 강력하게 결정하는 힘인 자본주의의 경우"에 도달하게 된다(15). 베버는 지속적으로 서구 근대의 특수성을 나열하면서 이것이 다른 문화권과 다르게 발생하게 된 원인을 추적하려고 한다. 일종의 비교방법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베버는 자본주의적 기업은 초(超)역사적으로 모든 문명에 존재했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자본주의가 발생한다(18). 베버는 이런 서구 자본주의가 발생하게 했던 주요한 원인으로 '합리주의'를 제시한다(26). 그래서 베버는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다시금 서구적 합리주의의, 그리고 그 테두리 안에서 근대 서구적 합리주의의 고유한 특성을 인식하고 이것을 발생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26)."라는 문제를 제시한다. 이어서 베버는 2편의 논문으로 구성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 논문들이 특정한 종교적 신앙, 즉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내용이 어떠한 경제적 신념의 발생 또는 어떠한 경제 형태를 지배하는 '에토스(ethos)'를 조건 짓는가를 밝히고자 한다는 구체적인 글의 목적을 제시한다(27). 에토스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온 개념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에토스를 습관에 의해 지성적 부분으로 변화되는 감정의 능력을 에토스라고 명했다. 베버는 에토스 개념을 계승‧발전하여 이를 육화된 윤리로 인간의 내면에서 일정한 행동양식을 추동하는 실천적 추진력으로 파악했다(임석진 외, 2012). 즉 베버는 경제 형태를 지배하는 개인에 내재되어 행위를 주조하고 실천을 만들어내는 에토스를 찾고자 한 것이다.


(2)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서문에서 절친한 동료였던 트뢸치의 저서 『기독교 교회와 집단의 사회 교리』를 언급한다. 베버는 이 책이 독창적이고 포괄적으로 서양 기독교 윤리의 보편사를 서술하고 있음을 밝히면서 "이 책의 저자(에른스트 트뢸치)는 교리를 중요시하는 데 비해, 나는 종교의 실천적 영향을 보다 중요시"함을 밝히고 있다(43). 이는 특별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신학과는 다른 사회학만의 인식대상을 환기하는 부분처럼 보인다.

먼저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구성을 살펴보면 이 저서는 제1장 '문제'와 제2장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직업윤리'라는 두 편의 논문으로 구성되어있다. 제1장 '문제'는 1. '신앙고백과 사회계층', 2. '자본주의 '정신'', 3. '루터의 직업개념: 연구과제'로, 제2장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직업윤리'는 1. '세속적 금욕주의의 종교적 토대', 2. '금욕주의와 자본주의 정신'으로 각각 구성되어 있다.


1) 제1장 문제


제1장 문제에서 신앙고백과 사회계층은 여러 가지 신앙고백이 혼재하는 지역의 직업통계를 소재로 논문이 시작된다. 주의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신앙고백(Konfession)은 단순한 개인의 신앙고백이 아니라 특정 분파(Sekte)와 관련된 신앙의 진술을 가리킨다는 것이다(알리스터 맥그래스, 2016). 베버는 기술‧상업적으로 고도의 훈련이 된 근대적 기업의 종사자들이 현저하게 프로테스탄티즘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언급한다(45). 더불어 베버는 부유한 16세기의 도시들 또한 프로테스탄티즘으로 개종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경제적으로 발전한 지역들과 종교개혁의 연관성에 대해 질문한다(47). 이러한 베버의 질문은 신앙고백에 따른 경제발전이라는 현상으로부터 시작된다. 베버는 종교개혁을 통해 오히려 교회의 지배가 증대된 사실을 지적한다. 종교개혁을 통해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던 교회의 지배는 오히려 세속적이고 공적인 삶까지 침투하게 된다(47). 다시 말해 종교개혁을 통해 유럽인들의 삶이 더 큰 종교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이에 따라 종교의 교리에 따른 생활양식을 주조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베버는 이어서 지속적으로 프로테스탄티즘의 분파들에게 나타나는 부(富)의 원천을 추적한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의 부의 원천이 상속에 의한 것이라는 설명은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다고 평가한다(49). 그러면서 베버는 카톨릭 교도와 프로테스탄트계의 차이를 분석한다.


종교

카톨릭

프로테스탄트

특징

상공업‧기술학교 진학률 낮음

영리사업 종사율 낮음

장인(Meister) 노동 선호

상공업‧기술학교 진학률 높음

영리사업 종사율 높음

노동 상층부, 경영관리인 선호


 막스 베버는 이러한 카톨릭 교도와 프로테스탄트계의 차이를 습득된 정식적 특성, 구체적으로는 고향과 가정의 종교적 분위기에 의해 조건 지어진 교육 방향이 그들의 직업 선택과 직업적 운명을 결정했다고 분석한다(51). 더불어 카톨릭 교도들은 역사와 정치적 변동이 있어도 영리적 사업을 추구하지 않고, 프로테스탄트들을 역사와 정치적 변동이 있어도 영리적 사업을 추구하는 역사적 사실을 제시하면 결국 이러한 상이한 태도의 원인을 내적특성에서 찾아야 함을 지적하고 각 신앙고백의 특성들 가운데 어떤 요소들이 행위에 작용하는지를 밝혀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52). 베버는 칼뱅주의와 상업계층의 결합 사례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분파들이 - 퀘이커 교도, 메노파 교도, 경건주의자 등의 - 지니고 있는 사업 감각을 기술한다. 그들은 베버 당시의 진보라고 부르는 것과 무관했고 근대적 삶과 적대적이기까지 했던 그들의 사상에서 근대 자본주의 문화 사이의 내적 친화성을 찾는 것으로 탐구범위를 좁히며 글을 마친다.

이어지는 제1장 문제 - 2. 자본주의 ‘정신’은 자본주의 정신(Geist)에 대한 개념정의의 문제를 다루며 시작된다. 여기서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개념을 구성하기 위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베버에게 역사적 개념은 역사적 현실에서 소여된 개별적인 구성요소들로부터 시작되어 점점 합성되는 것이고, 유(類)개념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색채를 갖는 구체적이고 발생연관적인 관계로 편입시키는 시도를 가리키는 것이다(72). 따라서 중요한 것은 개념적 정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정신이 잠정적이더라도 예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베버는 이러한 주장에 따라, 벤저민 프랭클린의 설교를 예로 자본주의 정신의 개념을 구성한다. 베버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설교에 “자기 목적으로 전제된 자본증식에 대한 관심을 개인의 의무로 여기는 사고방식”이 존재함을 밝힌다(75). 이는 처세술이 아닌 윤리(Ethik)인 점이 중요하다. 이를 거부하는 것은 처세술에서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부도덕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베버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설교는 하나의 에토스(ethos)이기에 중요하고 이러한 특성은 중국‧인도‧바빌로니아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관심을 가져야함을 피력한다(76).

프랭클린은 ‘왜 사람이 돈을 강박적으로 벌어야 하느냐’라는 질문에 성경의 구절을 빌려 대답한다(78). 그는 그가 효용성이라고 믿었던 미덕을 신의 계시로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직업 의무’라는 하나의 관념은 자본주의 문화의 사회윤리에 특징적인 부분을 담당하며, 개인이 자신의 직업적 활동을 의식적인 활동으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78). 베버는 프랭클린의 자본주의 정신이 자본주의 발전 이전에 존재했음을 지적하며 이러한 인과관계가 유물론적 관점의 상정하는 것과 상반된 결과임을 밝힌다(80).

이어서 베버는 “자본주의는 훈련되지 않은 ‘자유의지’의 원리를 실천하는 사람을 노동자로 사용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81). 자본주의는 단순히 역사발전의 단계나 물적토대의 발전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이를 위해서는 “인간집단에 의해 담지되는 세계관의 형태”로서의 자본주의 정신 또한 존재해야하는 것이다(79). 근대를 탄생시킨, 윤리의 옷을 입은 특정한 생활양식은 전통주의적 행동방식과 투쟁해야했다(82). 이를 위해 기업가들은 성과급을 인상하거나, 임금을 인하하지만 이들은 각각 자족하는 태도나 노동의 재생산을 만들어내지 못하며 자본주의를 창출하는 데 실패한다(83-84). 이런 전통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나 노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노동 자체가 절대적인 자기 목적 - ‘소명’ - 인 양 여기고 일하는 정신적 태도”이다(86). 전통주의적 노동 형태를 담지하는 대표적인 집단인 여성노동자들 중에서도 프로테스탄트계의 경건주의적 배경을 지닌 처녀들만 자본주의적 노동윤리를 지닌 경향이 발견되는데 이들은 노동을 의무로 여기며, 수입을 계산하는 엄격한 경제성, 작업 능력을 제고하는 냉철한 자기통제를 보인다(87). 이에 따라 베버는 전통주의적 구습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큰 요인으로 종교교육을 제시한다.

이에 따라서 베버는 잠정적으로 ‘근대 자본주의 정신’을 정의하는데, 이는 “직업적으로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정당한 이윤을 추구하는 정신적 태도”이다(89). 이는 근대 자본주의 기업에서 발견된 역사적 근거를 가진 개념이다.

베버는 근대 자본주의를 팽창시킨 원인으로 화폐가 아닌 자본주의 발전을 제시했다. 그는 자본주의 팽창의 문화적 원인으로서 자본주의 정신에 대해 이렇게 서술한다.

“먼저 오직 비범하게 확고한 성격만이 그와 같은 새로운 양식의 기업가들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냉정한 통제를 잃거나 도덕적‧경제적 파단에 빠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그리고 명석한 통찰력과 실행력은 물론이요, 특히 아주 확고하며 고도로 각인된 ‘윤리적’ 특성이야말로 그와 같은 혁신 과정에서 절대 불가결한 고객과 노동자의 신뢰를 제공하고 무수한 저항을 극복할 수 있는 활력을 유지해주며, 특히 이제부터 기업가에게 요구되고 안락한 삶의 향락과는 양립할 수 없는 이전보다 훨씬 더 높은 강도의 노동 수행을 전반적으로 가능케 했다 - 즉 이 모든 것은 바로 과거의 전통주의에 적합한 것과는 특별히 다른 종류의 윤리적 특성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처럼 외면적으로는 눈에 띄지 않지만 새로운 정신의 경제적 삶이 관철되는 데 결정적인 전환을 이룩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경제사의 모든 시기에 볼 수 있는 무모하고 파렴치한 투기꾼들이나 경제적 모험가들 또는 단순한 ‘대(大)금융업자들’이 아니라, 엄혹한 인생학교에서 성장하여 엄격한 시민계층적 관점과 ‘원칙’을 갖추고 신중하면서도 과감하게 그러나 무엇보다 냉정하고 부단하게, 면밀하고 철저하게 본분에 헌신하는 사람들이었다.(92-93)”

‘루터의 직업개념: 연구과제’에서 베버는 직업개념에 대한 일종의 개념사적 작업을 진행한다(김덕영, 2013). 베버는 Beruf(직업‧소명)라는 독일어 단어와 calling(직업‧소명)이라는 단어에 종교적인 표상이 존재하며 이는 카톨릭에는 찾아볼 수 없는 색채의 것임을 주장한다. 베버는 단순한 ‘일(work)’의 개념을 했던 원어들을 루터가 ‘직업‧소명(calling)’으로 번역함으로서 직업소명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프로테스탄트의 직업윤리는, 즉 그것을 신의 부르심으로 이해하는, 성서 원전이 아니라 번역자의 정신에서 기인했음을 밝힌다. 이는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산물이다. 따라서 이러한 신학적 근거들을 통해서 프로테스탄트는 세속적 직업의 의무를 자신의 도덕적 행위 중 최고의 내용으로 존중하게 되었다(121). 중세의 수도원 운동은 세속과의 분리이며 구별이었지만 프로테스탄트에게 세속적인 직업노동의 신적 계시의 일부인 이웃 사랑의 외적표현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서 세속의 직업은 “세속적 의무의 이행은 모든 상황에서 신을 기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고, 그것이 그리고 오직 그것만이 신의 의지이며, 따라서 허용된 모든 직업은 신 앞에서 절대적으로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 되었다(124). 오직 종교적인 봉사만이 성스럽고, 영적이며 이에 가치를 두는 것을 성속이원론이라고 하는데,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은 세속 직업활동에서의 부르심 또한 신의 소명으로 이해함으로써 종교적인 성스러움의 지평을 세속적 삶의 전체로 확장했다(김동춘, 2012). 베버는 이것이 “루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업적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하고 있다(124). 그러나 이어서 베버는 루터의 성과의 한계를 지적한다. 베버는 루터가 카톨릭의 견해와 대조적으로 세속적 노동에 종교적 보상을 증가시키긴 했지만 그에 불과했으며, 루터는 직업을 피조물적인 것으로 평가하고, 사도 바울의 종말론적 무관심처럼 전통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제부터 베버는 칼뱅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 분파들이 현저하게 자본주의 발달에 기여한 역할로 초점을 옮긴다. 베버는 칼뱅주의 윤리의 독특성을 지적한다. 그는 청교주의 문학인 밀턴의 실낙원을 예로 칼뱅주의에 있는 세계 지향성, 세속적 삶을 임무로 평가하는 태도에서 카톨릭‧루터와 구별되는 칼뱅주의 윤리를 서술한다.

그럼에도 베버는 결국 칼뱅과 칼뱅주의 그리고 다양한 프로테스탄트 분파들을 이끌었던 지도자들의 관심은 “영혼의 구원, 오직 이것만이 그들의 삶과 활동의 중심”이었음을 환기시킨다(137). 따라서 종교개혁의 문화적 영향은 정작 종교개혁자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또는 원치 않았던 결과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베버는 근대 자본주의 문화의 특징적 내용들 가운데 무엇이 종교개혁의 영향에 역사적 원인으로 귀속될 수 있는가를 탐구해야한다고 보았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베버는 “종교개혁을 ‘발전사적으로 필연적인 것’으로 연역할 수 있다는 견해에서 해방”되어야 함을 강조한다(138). 이와 관련된 내용이 극도로 복잡하기 때문에 먼저 일정한 형태의 종교적 신앙과 직업윤리 사이에 기계적인 인과성이 아닌 특정한 ‘선택적 친화력’이 인식될 수 있는지를 연구하고, 다음으로 앞선 탐구의 결과를 가지고 분석한다면 근대적 문화가 역사적 생성 과정에서 어느 정도까지 종교적 동기에 귀속될 수 있는지 또 어느 정도 다른 동기들에 귀속될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시도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예상하며 1장 문제를 마무리한다(139).


2) 제2장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직업윤리


2장의 첫 번째 내용은 ‘세속적 금욕주의의 종교적 토대’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베버는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담지자로 4개의 종류를 제시한다. 4개의 분파는 17세기의 칼뱅주의, 경건주의, 감리교, 재세례파 운동에서 발생한 분파들이다(167). 베버는 종교적 신앙과 그를 통해 이뤄지는 종교적 삶의 실천에서 형성되는 생활양식에 방향을 탐구하고 개인의 행위를 추동하는 심리학적인 동인을 찾아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베버는 이념형(Idealtypus)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불가피함을 밝힌다. 베버는 “역사적 현실에 경계를 두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가장 논리적으로 일관된 형태의 연구를 통해서만 그것이 역사적으로 끼친 특수한 영향에 접근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고 보았다(172). 베버는 칼뱅주의를 먼저 분석한다. 베버는 칼뱅주의 특유의 예정론을 중심으로 서술을 전개해나간다. 칼뱅주의는 TULIP교리라고 불리는 교리체계를 가지고 있다. TULIP이란 인간의 전적 부패(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이라는 5개의 교리의 앞 글자를 딴 것이다(가스펠서브, 2013). 이 중에 중요한 것은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신은 전적 주권을 가지고 구원 받을 자를 선악과 지위를 막론하고 무조건적으로 선택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칼뱅예정론은 이중예정론으로 인간을 위한 신의 구원 의지인 루터의 예정론과는 다르게 선택과 유기(遺棄)를 이야기했다. 즉 신에게로부터 버림받는 자도 정해진다는 것이다. 베버는 이 교리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단지 인간의 일부는 구원받을 것이고 나머지는 저주받을 것이라는 사실뿐이다.”라고 표현한다(181). 따라서 구원에 대한 표지를 상실한 인간은 각자 개인이 전대미문의 내적 고독감을 맞이하게 된다. 칼뱅은 신앙의 주관적인 ‘외적 보조 수단’을 제거했다. 그는 루터주의에서도 완전히 배제하지 못한 교회적‧성례전적 구원을 완전하게 폐지했다. 베버는 이를 “고대 유대교의 예언서로부터 시작되어 헬레니즘의 과학적 사고와 결합되어 모든 주술적 구원 추구 수단을 미신과 독신으로 비난했고, 이를 통해 세계의 탈주술화 과정이 완결되었다”고 평가한다(183). 청교도들은 주술적 방식의 구원 효과에 대해서는 어떤 신뢰도 하지 않았다. 더불어 이러한 인간의 내적인 고립은 모든 피조물이 절대적으로 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있고 절대적으로 무가치하다는 냉혹한 교리와 결합되어 다른 문화‧감각‧감정적인 요소에 부정적인 태도의 근거를 제공했다. 이를 통해 청교도들은 감정적으로 죄의식을 방출하는 수단이 제거되었다. 그들은 깊은 내적 고립 속에서 신과 소통했다. 그 고독 속에서 칼뱅주의자들은 “나는 선택되었는가?”를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구원의 확실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예정론이 재해석 또는 완화되어야 했다. 칼뱅주의자들은 두 가지를 통해 이를 극복하려고 했다. 먼저 자신이 선택되었다고 간주하고 일체의 의심을 악마의 유혹으로부터 물리치는 것이었고, 다음으로 자기 확신에 도달하기 위한 부단한 직업노동을 이야기했다.

구체적으로 칼뱅은 두 가지 극복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선택되었다는 확신을 얻으려고 할 때에 가장 좋은 순서를 따르려면 선택을 확실히 증명하는 표징들 즉 부수적인 표징들을 굳게 잡고 높이지 않아야 한다. … 중략 …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라면 나의 구원은 어디서 오는가? 내가 선택되었다는 어떤 계시가 있는가? 이런 생각을 자주 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한번 이런 생각이 들면 이것은 그 사람을 끊임없이 견딜 수없는 고민으로 불행에 빠지거나 압도하게 한다.(칼뱅, 200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택을 자신 안에 감추어두시지만, 부르심으로 그 선택을 나타내실 때에는 무차별적으로 하시지 않는다. 따라서 부르심은 선택의 “증거”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 중략 … 주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실 때에 이미 자녀로 정하셨으나, 그들이 부르심을 받지 않으면, 그 위대한 복을 소유하지 못한다. 반대로, 부르심을 받으면, 이미 선택에 어느 정도 참여한다.(칼뱅, 2008)

따라서 이런 교리로 인해 칼뱅주의자들은 스스로 자연 상태에서 은총 받은 상태로 승화시키기 위해서 매 순간 모든 행위에서 삶 전체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따라 이들의 삶은 내세를 지향했고 그러나 이 때문에 현세적 진행과정이 철저히 합리화 되었다. 이들은 개별적인 선행들이 아닌 체계로 고양된 행위구원주의를 요했고, 이를 통해 무계획적이고 비조직적인 성격을 벗어나 생활양식 전체를 일관되게 조직하게 된다(202).

이어서 2장 ‘금욕주의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베버는 이 저작이 탐구대상으로 삼고 있는 시기는 현대인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종교가 생활의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음을 지적한다(332). 앞서 벤저민 프랭클린의 설교를 분석했던 것처럼 베버는 청교주의 설교가인 리처드 박스터의 설교, 독일 경건주의를 대표하는 슈페너의 저술과 퀘이커교를 대표하는 저술로 바클레이의 저술을 설정한다. 박스터는 그의 설교에서 태만과 향락이 아닌 오직 행위만이 신의 영광을 증대하는 행위임을 천명한다(336). 박스터는 지속적으로 근대 자본주의에 적합한 직업윤리를 종교적 언어로 설파한다. 그에게 신이 원하는 바는 ‘합리적 직업노동’이다(341). 베버는 이런 청교주의가 “합리적인 시민계층적 기업과 합리적인 노동조직의 에토스를 담지”했다고 평가한다(345). 베버는 재산이 커질수록 그것을 보존하면서 부단한 노동을 통해 그것을 증식해야 된다는 책임감은 중세로 소급되어서도 연원을 찾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이것은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에 이르러서야 “논리적으로 일관된 토대”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평가한다(351). 이들은 획득한 부를 강박적인 금욕주의에 근거해 소비하지 않고, 투자 자본으로 사용하였다. 이에 따라서 자본은 확대 재생산된다. 결국 세속법적인 합법성만이 아닌 종교적 정당성이 확보되었을 때 비로소 시민계층적 직업 에토스가 탄생한다.

카톨릭 신학자인 한스 큉(2005)은 이런 베버의 테제를 명료하게 설명한다. 칼뱅은 직업을 신의 소명으로 파악하였고, 칼뱅에게 직업은 구원의 근거는 아니지만 명백한 외적 표지로서 작용한다. 칼뱅은 수도원에서 이루어졌던 일을 일상으로 끌어들였으며, 중세의 부유한 상인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까지 모은 재산을 자선사업에 사용하라고 교회에 기부한 반면 칼뱅파 상인들은 수익이 좋은 사업을 거리낌 없이 선택할 수 있었고, 낭비하지도 않았다고 평가한다.

베버는 논의를 정리해나가며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신의 나라에 대한 배타적인 추구, 다시 말해 오직 소명으로 주어진 노동의무를 이행함으로써 신의 나라에 도달하려는 시도와 교회규율이 당연지사지만 특히 무산계급에 강요한 엄격한 금욕이 자본주의적 의미에서의 노동 ‘생산성’을 강력히 촉진할 수밖에 없었음은 새삼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영리 활동을 ‘소명’으로 보는 것이 근대 기업가의 특징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을 ‘소명’으로 보는 것이 근대 노동자의 특징이 되었다(360).”

“근대 자본주의 정신,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근대 문화 일반의 본질을 구성하는 요소들 가운데 하나인 직업 관념에 기초하는 합리적 생활양식 - 바로 이것이 우리의 연구가 논증하려고 했던 것이다 - 은 기독교적 금욕주의 정신에서 탄생했다(363).”

베버는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이 근대 자본주의 문화를 형성에 미친 영향의 동기로 소급해서 밝히는 시도임을 언급한다. 더불어 베버는 역으로 프로테스탄티즘이 다른 물적‧관념적 토대로 받은 영향도 탐구 되어야함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일방적인 유심론적 인과해석으로 대체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2.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방법론적 의의


앤서니 기든스와 필립 서튼(2014)은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가지고 있는 이론적 사고에 대한 의의를 소개한다. 먼저 베버의 작업은 반(反)직관적이다. 베버는 그의 저작에서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연관이 없어 보이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과의 상관관계를 분석해낸다. 이는 기존의 관습과 상식을 극복하는 과학적 연구의 전범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베버의 분석은 왜 개인들이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하면서도 검소하게 살기 원하는지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상식적으로는 부를 축적하는 행동을 향락, 소비, 사치를 위한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베버는 검소와 부를 축적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상반되는 현상의 상관관계를 모색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다음으로 베버의 연구는 처음 그가 문제제기를 설정하고 해명하고자 했던 문제를 넘어서는 다양한 사태를 해명할 수 있게 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끝으로 베버의 이론은 단순히 한정적인 경험에서만 타당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론적 사유를 만들어내고 더욱 심화된 연구를 자극하는데 유용한 모습을 보인다. 이후에 다루게 될 내용은 베버의 저작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가지고 있는 사회학 방법론적 의의를 밝혀보고자 한다. 특별히 베버와 같은 사회학의 고전사상가들의 이론과 방법론은 오늘 날의 사회를 이해하고 적용하는 데에도 큰 유익을 줄 수 있다(김필동, 2017).


(1) 비교방법론


우선, 베버는 가장 기초적으로 비교의 방법을 통해 문제제기를 설정한다. 『종교사회학논총』의 서문에서 베버는 다른 문화권의 국가들과 서구 유럽을 비교하면서 서구만이 가지고 있는 ‘근대성’이라는 차이를 통해 방대한 연구의 의문을 제기한다. 제1장에서 다루듯이 베버는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비교를 시행한다. 카톨릭 교도들에게서 관찰되고 있는 사실과 프로테스탄트들에게서 관찰되는 사실을 파악하고 이들이 무엇인 다른지 그 원인은 무엇인지를 추적하면서 자신이 탐구해야할 가설을 명확화하고 있다. 더불어서 제2장에서는 같은 프로테스탄트 내에서도 분류 가능한 네 집단을 - 칼뱅주의, 경건주의, 감리교, 재세례파와 분파등 - 가지고 비교하면 연구를 진행한다.


(2) 이해사회학


“사회학은 사회적 행위를 해석하면서 이해하고 이를 근거로 사회적 행위의 과정과 그 결과를 인과적으로 설명하려는 학문이다(막스 베버, 2011)”


베버의 ‘사회학의 기초개념(Soziologische Grundbegriffe)’에서 가장 처음에 나오는 경구에서 알 수 있듯이 ‘이해’란 베버에게 있어서 핵심적인 개념이다. 베버 당시의 독일 지성계는 실증주의자와 관념론자로 양분되어 있었다. 전자는 설명은, 후자는 이해의 방법을 추구했다(김덕영, 2016). 베버는 그 양분된 지성계를 창조적으로 재구성했다. 그에 따라서 베버는 단순히 이해나 설명에만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이해하고 그 사회적 행위의 과정 및 결과를 설명하는 이해사회학을 구축하게 된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이런 베버의 이해사회학이 잘 드러난 저작이다. 베버는 이해를 현전적(現前的) 이해와 동기 이해로 구분한다(김덕영, 2014). 현전적 이해란 그 의미하는 바대로 행위를 목격하고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동기 이해(설명적 이해)는 현전적 이해로 파악할 수 있는 행위를 넘어 행위의 근거를 파악하는 것이다. 동기 이해를 통해서 행위의 내적인 동기를 파악할 수 있고, 이로 인해 개인의 외적인 행위를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이해와 관련해서 베버는 ‘의미복합체’라는 중요한 개념을 제시한다. 베버에게 설명은 의미 복합체를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의미 복합체 란 역사적‧사회적으로 매개된 의미이다. 개인이 행위하는 사회에서는 상호주관적 구속력을 갖는, 다양한 의미와 가치 설정이 존재하는데 개별 행위자와 사회 집단은 가치와 의미를 지향한다. 그리하여 개인과 집단이 추구하는 의미는 사회적 의미, 즉 다른 개인들과 집단들에 지향되고 사회적으로 매개된 의미가 된다. 이런 의미복합체의 예로는 종교, 윤리, 이데올로기 등이 있다(김덕영, 2014).

베버는 서구 근대 자본주의의 담지자들이 행위하는 합리적이고 조직적인 직업 활동을 목격한다. 이것은 현전적인 이해일 것이다. 베버는 이런 현전적 이해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가설을 설정하여 ‘이들은 왜 이렇게 노동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들의 행위를 동기적으로, 설명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결국 베버는 그들의 근대 자본주의적 노동의 동기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를 찾아낸다. 이를 통해 근대 자본주의 정신과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의 연관을 인과적으로 설명한다. 더불어 이들의 행위를 추동했던 프로테스탄티즘은 종교로 하나의 의미복합체이기도 하다.


(3) 이념형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자본주의 정신을 담지하는 프로테스탄트를 분석하기 위해 이념형의 방법을 쓰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피력한다(172). 이념형에 대한 베버의 자세한 논의는 그의 논문 “사회과학적 그리고 사회정책적 인식의 ‘객관성’(Die 'Objektivität' sozialwissenschaftlicher und sozialpolitischer Erkenntnis)”에서 주로 다루어진다. 구체적으로 베버는 “이념상은 역사적 삶에서의 특정한 관계들과 과정들을 하나의 세계로 종합하고 있는데 이 세계는 사고를 통해 형성된 연관맥락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자체가 모순 없는 세계이다. 내용적으로 볼 때 이 구성물은 하나의 유토피아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이 유토피아는 현실의 특정한 요소들이 사유과정에서 강조됨으로써 얻어진다(막스 베버, 2002).”라고 서술한다. 베버에게 이념형은 연구의 가설구성에 방향을 제시하고 현실을 그 자체로 모사한 것은 아니지만 현실 서술에 명료한 표현수단을 제공함으로써 사회학 연구에 방법론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베버는 현실을 관찰하기 위해 이념형이라는 일종의 관념적 구성물을 설정한다. 이는 사회현상의 “평균치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며, “일면적으로 강조된 관점들에 부응하는 일련의 개별현상들, 즉 곳에 따라 더 많이 또는 더 적게 분산되어 불명료하게 존재하거나 또 어떤 곳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개별현상들을 하나의 일관된 사유상으로 종합함으로써” 얻어지는 개념이다(막스 베버, 2002). 얻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념형은 현실의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유토피아적 상(像)이다. 베버는 이념형이 현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사용되어야 하나 이념형이 사회학 연구에 가지는 기여에 대해 강조한다(막스베버, 2002). 베버의 이념형적 방법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종교개혁 시기에 존재했던 프로테스탄트의 특성에 근거를 두고 프로테스탄트의 이념형을 구성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고, ‘자본주의 정신’을 이해하기 위해 잠정적으로 예시할 것을 밝히는 대목에서도 사용된다(72). 베버는 추상화의 정도에 따라 이념형을 ‘역사적인 특수성에 기초한 이념형’, ‘다양한 역사‧문화적으로 발견되는 이념형’, ‘특정 행위유형의 합리적 재구성으로서의 이념형’ 세 가지로 구분했다(루이스 코저, 2016). ‘자본주의 정신’과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앞의 서술에 기초했을 때 , 역사적인 특수성에 기초한 이념형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4) 탈주술화 과정


베버는 근대화의 과정을 합리성이 증대되는, 합리화 과정으로 파악했다. 특별히 베버는 “우리 시대의 운명은 합리화, 지성화 그리고 세계의 탈주술화로 특징지어진다”고 이야기했다. 사회학에서 합리화란 과정적 개념으로, “전통적 관념들과 신념들이 잘 짜인 규칙들과 공식적 도구적 사고로 대치되는” 장기적이고 누적적인 과정을 의미한다(앤서니 기든스, 2015). 베버는 합리화와 주술의 제거를 통해 합리화가 진전된다고 파악했다. 전근대 사회를 사로잡았던 종교적 신념, 주술적 신념이 파괴되고, 인간의 이성적으로 행위하며 자신의 행위를 행위 이전에 미리 파악하고, 체계화하며, 합리화하게 된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지속적으로 프로테스탄티즘이 촉진시킨 합리화 과정에 대해서 언급한다. 구체적으로 칼뱅주의를 언급할 때 베버는 칼뱅주의가 “고대 유대교의 예언과 헬레니즘의 과학적 사고와 결합되어 모든 주술적 구원 추구 수단은 제거함으로써 세계의 탈주술화를 완결”시켰다고 평가한다(183). 구체적인 종교의 내용을 파악했을 때, 카톨릭에서는 7성례(영세‧성체‧견진‧고해‧혼배‧신품‧종유)가 진행된다(배덕만, 2015). 이 각각의 성례는 외적 행동을 수반하면 성례를 행하는 신자로 하여금 외적인 안정감이나 종교적 성취감을 고양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카톨릭의 7성례에서 성찬과 세례만 성례로 인정하게 된다. 따라서 베버는 이를 통해 구원의 외적인 수단, 주술적 수단이 제거되고 종교가 합리화 되었다고 평가한다. 또한 외적으로 종교에 의지할 것이 없어진 칼뱅주의자들의 내적인 고립감이 강박적이고 극한의 행위능력을 추동하는 동인이라고 분석하기 한다.

더불어서 베버는 “우리 근대인의 삶의 운명을 가장 강력하게 결정하는 힘인 자본주의의(15)”라는 서술과 금욕주의가 세계를 변형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자본주의는 오히려 인간을 지배하는 쇠우리가 되었음(365) 언급한다. 이는 합리화 과정에 대한 베버의 분석과 비관적 인식이 드러나는 대목이며 동시에 칼 맑스의 소외론과도 유사한 동질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3. 칼 맑스와 막스 베버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출간하고 논쟁했던 것은 맑스가 아닌 당대의 지식인들이었다. 하지만 맑스와 베버라는 거대한 지적 조류는 사회학에 각각 맑스 패러다임, 베버 패러다임을 만들어내며 대립적으로 해석되어왔다. 예를 들면 베버의 이 저작 또한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의 반영이라는 맑스의 테제에 반박하기 위해 쓰였다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베버는 종교개혁과 연관된 문화적 가치가 근대 자본주의 문화를 팽창시킨 상관관계를 보여주었지만 그렇다고 해가 그가 맑스가 제시한 물적 요소들의 중요성을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 베버는 오히려 근대 사회의 발생과 관련된 구조적 요인들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맑스의 의견에 동의했다(조나단 터너, 2004).

더불어서 베버는 관념은 집단이익의 표현이라는 맑스의 생각에 영향을 받았다. 베버는 맑스의 학자적 소양을 칭찬했고, 독일의 관념론철학의 신비화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맑스의 태도를 높게 평가했다. 베버는 관념적 사고보다는 경험적으로 발견되는 구체적인 인간행위자들을 연구하는데도 동의했고 맑스의 일방적인 유물론은 비판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에 대한 존경을 나타냈다(루이스 코저, 2016).

구체적으로 베버는 맑스 분석한 근대진단, 노등의 문제와 계급분화적 생산관계에 동의하고 있고 노동과 생산이라는 관점의 그의 분석에 핵심개념으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경제 및 구조결정주의적 유물론자 맑스 대 행위이론적 관념론자 베버”라는 단순한 도식은 두 사상가의 거대한 지적 조류를 과하게 일반화시켰다. 맑스와 베버의 관계는 상호대립적이라기보다는 상호보완적인 관계이다. 다만 베버는 역사의 변동을 총체적인 추제에 기반해 역사철학적으로 연역해내는 데에 반대했다(전성우, 2013).

종합하여 봤을 때, 막스 베버의 저작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맑스의 유물론과의 대결을 위해 쓴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움이 존재하는 것 같다. “베버의 자본주의 이론은 마르크스 이론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새로운 이론을 내세우는 것이라기보다 맑스가 무시하거나 놓친 중요한 변수들을 끌어들여 포괄적인 이론을 건설한데에 있다.(오경환, 1990)” 베버는 오히려 맑스에게 받은 지적유산을 창조적으로 활용하여 맑스가 간과한 중요한 것들을 보완하며 연구를 진척해나간 것 같다.


Ⅲ 결론 : 비판 및 현대적 적용


1. 베버 테제(These)에 대한 비판


글을 서론에서 언급했듯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베버 당시의 지적세계와 현대까지도 광범(廣範)하고 격렬한 논쟁을 일으켜왔다. 대표적으로 베버는 당대의 역사철학자 카를 피셔, 역사학자 라흐팔, 신학자 트뢸치, 경제학자 좀바르트, 브렌타노와 이외의 많은 사람들과 다양하고 직‧간접적인 자본주의 논쟁을 벌였다(김덕영, 2013).

종교개혁과 관련해 저명한 교회사학자인 롤란드 베인턴(2009)은 그의 저서 『종교개혁사』에서 베버의 테제를 비판한다. 우선 막스 베버가 증거로 제시한 인용문들은 초기 대륙 칼뱅주의자들이 아닌 영국 청교주의에서 발췌된 것이다. 또 칼뱅으로 제한했을 때 칼뱅은 구원에 대한 의심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구원예정을 확인하기 위해 노동할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또한 칼뱅주의자들이 농업보다 상공업을 선호했던 것은 칼뱅주의자들이 거주했던 지역의 환경적 특성 때문이라고 반박한다. 이에 따라 베버의 분석은 매우 과장되었다고 비판한다.

오경환(1990)은 제네바, 네덜란드, 스코틀랜드에 존재한 초기 칼뱅 공동체들은 새로운 경제 윤리나 경제 조직의 발전을 반대했고, 그들의 태도는 천주교와 다르지 않았고 엄격히 통제되어 오히려 보수적이었음을 지적한다. 더불어 자본주의적 기업들이 이미 종교개혁 이전, 이탈리아 벨기에 독일에 존재했다고 한다. 또한 칼뱅주의 특유의 현세적 활동에 대한 관심은 종교의 내적 특정이 아닌 사회구조, 사회적 필요에 기인한 것이라는 반박을 제시했다. 또 현대적인 논의로 맑스-엥겔스 노선에서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가 자본주의를 촉진시켰기보다 부르주아의 종교로서 자본주의에 의해 프로테스탄티즘 윤리가 사용되었다고 보았다.


2. 탈종교 현상과 새로운 노동윤리의 탄생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당시 20세기 초반의 독일인들에게 “현대인(20세기 초의 독일인)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종교가 생활의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음” 이야기한다(332). 베버의 논문이 출간된 지 1세기가 지났고 그동안 현대사회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따라서 베버가 그 당시의 현대인들에게 했던 당부가 무색할 만큼 종교의 영향력이 감소된 지역들이 존재한다. 구체적으로는 서유럽국가의 경우이다. 사회적 행위를 주조했던 칼뱅주의와는 달리 사회에 대한 종교의 영향력은 감소했다. 이를 세속화 개념과 관련시킬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세속화란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믿음과 행위의 관점에서 종교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속화를 종교적 관심, 상징, 제도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 사회성원들의 사상과 행위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영복, 2000). 세속화를 측정하는 것은 보통 양적방법을 통해 진행된다. 단적으로 종교집회 참석률 감소를 파악하는 것 등이다. 실제로 영국‧프랑스‧네덜란드에서는 교회참석률 감소가 이전 세기 동안 꾸준히 증가했다. 현재는 총인구의 약 5퍼센트만 교회를 출석한다고 한다(앤서니 기든스, 2014). 독일의 한 매체는 루터가 뷔텐베르크에서 종교개혁을 시작한지 500년이 지난 현재 독일의 교회는 점점 사람이 없고 한산해지고 있는 현실을 전한다. 이렇듯 현대사회는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고 새로운 노동윤리와 주체들이 생겨났다.

우선 현대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2012)은 노동윤리가 근대 초기 빈곤을 감소시키고 노동자를 공장노동으로 유인하는 역할을 했음을 지적한다. 노동윤리는 사람들을 훈련시켜 공장제도에서도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을 하게 했으며 일하지 않는 것은 종교적인 규율을 어기는 것이며 부도덕한 것이었음을 서술한다. 근면한 노동자를 만들기 위해 노동윤리는 노동자들의 만족하는 태도, 게으른 태도를 악으로 규정한다. 이것이 초기 근대의 노동윤리이다. 하지만 2차 근대, 후기 근대,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노동자(생산자)가 아닌 소비자를 생산해낸다. 이제 사회는 베버가 제시한 ‘노동윤리’, ‘직업윤리’가 아닌 ‘소비미학’이 지배하는 사회로 변화한다. 이제 숭배의 대상은 부 그 자체이다.

또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로 현대 한국인에게는 새로운 에토스들이 형성된다. 대표적으로 김홍중(2009)은 현대인들이 신자유주의 이후 베버가 지적한 ‘근대 자본주의 정신’을 내면화한 프로테스탄트들 같이 신자유주의 윤리를 내면화한 주체로 변화했다고 평가한다. 신자유주의는 단순한 제도라기보다 특정한 주체를 생산해내는 일종의 사회적 에토스로 작용한다. 사회학자 김홍중은 이를 ‘육화된 신자유주의의 주체’라고 표현하며 이들의 도덕은 생존주의이다. 이 주체들은 사회·경제·생물학적 생존을 위해 도구적 성찰성을 극대화시키는 존재이다.

오찬호(2013)는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한다. 특별히 오찬호는 현대인들이 자신의 성공을 가지고 타인의 실패를 합리화하는 자기계발서의 논리를 내면화한 ‘자기계발주체’가 되었음을 지적한다. 이들은 사회·경제적인 생존성을 확보하기위해 비도덕적인 일도 거리끼지 않는 ‘괴물’이 될 수 있는 존재이다.

이외에도 서동진(2009)도 신자유주의 한국사회에서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탄생을 지적하고 있으며 한병철(2012)은 현대사회가 근대의 면역적 체계로부터 변화되어 부정성이 아닌 긍정성이 지배하는 사회로 변동되었고, 이에 따라 개인들은 자신은 긍정하는 성과주체로 변화한 모습을 지적한다. 이외에도 비노동윤리나 반노동윤리가 대두되고 있으며, 근대 자본주의 정신에서는 배척되어야 했었던 ‘게으름’도 사회가 다시 받아들이고 있다(노명우, 2016).


4. 재주술화의 문제와 종교의 영향력


사회에 대한 종교의 영향력은 일방적으로 감소했을까? 베버는 합리화 과정과 세계의 탈주술화를 예견했다. 그런데 현대의 일부 사회학자들은 종교가 쇠퇴하기보다 부흥하고 있음을 주장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종교 근본주의로 인한 테러부터 다양한 신흥종교의 탄생 같은 것들이다. 이것은 일종의 ‘세계의 재주술화’이다(앤서니 기든스, 2015).

그렇다면 이러한 세계의 재주술화는 마냥 베버의 테제들과 대치되는 것일까? 베버는 합리화과정과 탈주술화를 예견했지만 그의 인간론에 기반을 두고 세계의 재주술화를 파악하는 것을 타당성 있는 분석일 수 있다. 베버는 그의 주요한 인식대상으로서 ‘문화인간(Kulturmensch)’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문화인간이란 세계에 대해 의식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정립하고 세계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지닌 존재이다(막스 베버, 2011). 근대는 종교와의 급격한 단절을 선언했다. 맑스의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분석이나 니체의 ‘신의 사망선고’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러나 베버는 과학이 종교를 대체할 수 없다고 보았다. 문화적 존재로서의 문화인간은 삶의 궁극적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실존적 욕구가 있으며, 이것은 정신적 생존욕구, 구원욕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과학이 지배하는 현대사회 속에서도 종교를 통해 의미를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전성우, 2015).

이러한 문화인간의 의미추구, 정신적 생존욕구는 종교를 통해서 아니면 다른 것으로 대체된 종교성을 통해 현실세계에서 작동할 수 있다. 우선 프랑스의 포스트모던 사회이론가 마페졸리는 현대사회의 집단을 새로운 부족(neo-tribes)이라고 파악했다. 이들은 음악적 취향, 서로의 의견들. 소비 선호도 등의 취미활동을 중심으로 한 모임이다. 이들은 전근대사회가 그랬듯 공유된 동질성에 기초하며 개별적 존재라기보다는 묶인 존재이다. 마페졸리는 세속화에 대한 논의가 극단적이지 않아도 될 것이며 오래된 신은 사라지고 있어도 새로운 형태의 종교적 표현이 등장할 수 있다고 파악했다(앤서니 기든스, 2014). 마페졸리의 새로운 부족은 인간의 종교성이 다른 것으로 대체되어 현실에서 구현되는 사례로 파악할 수 있다.

반면, 근대화가 진행된 지금에도 여전히 종교를 통해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한국의 개신교 인구는 한국 인구의 27.6%를 차지한다. 한국 개신교의 70~80%가 근본주의적 종교인이라는 자료 또한 존재한다. 이들은 현재 어떠한 노동윤리를 추구하는지 살펴보기 위해 개신교계 베스트셀러 작가인 팀 켈러의 책을 찾아보았다. 팀 켈러는 뉴욕타임스가 성전한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미국 뉴스위크에서는 그에게 21세기의 C. S. 루이스라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그는 뉴욕에서 약 8,000여명이 출석하는 교회를 이끌고 있으며 그의 인터넷 설교는 3만 명이상이 시청한다고 한다. 그는 한국에서도 성공한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그는 구체적으로 책에서 “인간의 일이란 단순한 밥벌이가 아니라 소명이라는 관념을 회복하는 것”이 희망임을 이야기한다. 또 그는 죽음 뒤의 삶의 보상을 생각하며 현실에서의 노동을 버텨내야 한다고 설교하고 있다(팀 켈러, 2015). 이렇게 보면 여전히 종교의 가르침과 성향에 의한 노동윤리가 작동하고 있고 현대인들이 영향을 받는 것을 알 수 있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사회학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저작이다. 베버의 테제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뛰어난 작품이다. 다양한 비판과 반박에도 불구하고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는 유의미한 사회학적 통찰들이 풍부하게 존재하며, 여전히 현대사회를 분석하는 도구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고전(古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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