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읽는 루만>

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은 결코 쉽게 읽을 수 없는 이론가이다. 그는 경제, 과학, 법, 예술, 정치, 교육, 종교 등으로 복잡하게 분화된 사회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거대 이론, 일반 이론을 구축하기에 힘쓴 사회학자로, 시스템·체계이론이 주는 경직적인 느낌, 보수주의적 혐의 때문에 대중적으로 알려진 이론가는 아니지만, 독일 사회학에서는 이미 일반 문법으로 자리한 학자이다.

“칸트의 가면을 쓴 니체”라는 한 선생님의 평가처럼, 그는 정치하고 정직하지만 한 편으로는 급진적이고 전복적인 이론가이다. 그는 플라톤에서부터 내려오는 유구한 서구의 존재론과 형이상학, 서구 근대의 주체 중심의 인식론과 계몽이라는 전통적 인식을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사이버네틱스, 인지생물학, 현상학 등의 여러 분과 학문의 성과를 사회학 이론에 포함하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이론을 구축한다.

루만에게 현대사회는 어떤 중심도, 정점도, 위계도 없는 하나의 복잡계로 인식된다. 복잡한 사회를 인식하고 이를 토대로 학문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복잡한 사회 이론이 요구된다. 사회를 설명했던 기존의 이론들, 계몽주의 철학, 근대 자연과학, 헤겔의 가족-시민사회-국가 도식, 맑스의 토대와 상부구조, 그람시의 국가-경제-시민사회 도식, 하버마스의 체계-생활세계의 도식 등은 루만에게 있어 더는 설명력을 갖지 않는 구(舊)유럽적 사고방식이기에 그는 이와의 단호한 결별을 선언한다. 그는 서구의 계몽이라는 미몽을 ‘계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계몽의 계몽’인 것이다.

루만은 복잡성이 점증하는 현대사회가 다면적이고, 예측 불가해졌음을 지적하며 복잡한 현대사회를 포착하고 설명할 이론으로 ‘체계이론’을 주창한다. 루만의 체계이론은 급진적 구성주의, 자동생산 체계이론, 인간 없는 사회 이론을 기본으로 한다. 그의 기획에 따르면, 사회는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으로 이루어져 있고, 커뮤니케이션이 발생할 때마다 현재화되는 사회적 체계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회는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껏 쓴 이야기는 루만에 관한 알맹이라기보다는, 루만에 대한 두서없는 사전정보에 가깝다. 이 책, <쉽게 읽는 루만>은 국내에 출간된 루만 입문서 중에는 가장 친절한 책으로, 루만의 생애와 인식론, 그리고 체계이론 일반과 사회적 체계 등의 아주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개념부터, 이런 기본 이론을 기반으로 매스미디어에 이를 적용시키는 실질적 분석도 함께 담고 있는 책이다. 루만의 이론은 그 추상성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는데, 이 책은 추상적 이론과 실질적 분석을 모두 담고 있기에 더욱더 좋은 입문서라고 생각한다.

전면재번역된 루만의 <사회적 체계들>

<사회적 체계들>이 출간된 다음 해, 루만은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껏 제가 집필한 모든 것은 이론 생산의 0-시리즈였습니다. 최근에 출간된 사회적 체계들을 제외하고요.

 

Was ich bisher geschrieben habe, ist alles noch Null-Serie der Theorieproduktion

— mit Ausnahme vielleicht des zuletzt erschienenen Buches “Soziale Systeme”(AuW: 142).


 

사상사가 오카모토 유이치로는 사회학의 패러다임이 “프랑스의 뒤르켐이냐, 독일의 베버냐”에서 “프랑스의 부르디외냐, 독일의 루만이냐”로 옮겨갔다고 평가한다. 생소하지만, 니클라스 루만은 사회학의 연구 대상으로서 ‘사회적 체계’를 제시함으로써 자신만의 독자적인 학문 세계를 구축한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사회학자이다. 빌레펠트 대학에 임용될 때 그는 “연구대상: 사회이론, 연구 기간: 30년, 비용: 없음”이라는 내용의 연구계획서를 제출하는데, 그는 평생 15,000쪽에 달하는 70권 이상의 저서와 450편 이상의 학술 논문을 남겼고, 이 <사회적 체계들>은 이 방대한 학술세계에서도 중핵에 해당하는 저작이다.

 

루만이 독일에서 일반 문법이 될 정도로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는데도 명성이 부족한 이유는 그가 사회를 비판하는 사회학이 아니라, 사회를 기술하는 사회학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루만은 프랑크푸르트 학파 2세대의 대표주자이자, 근대를 미완의 기획이라고 규정한 계몽의 적자 하버마스와의 논쟁을 통해 이름을 알린다. 하버마스는 진보·이성·계몽·비판의 전통으로 수놓아진 독일의 철학적 전통 위에서 루만의 이론을 ‘사회공학’이라고 규정하며 질 수 없는 싸움을 시작하는데, 루만은 이에 담담히 자신의 이론을 설명할 뿐이며, 이는 루만의 승리로 마무리된다.

 

이론적 명제를 정치적 명제로 치환하지 않고자 했던 그는 학자로서 사회적 체계 개념을 통해 서구 철학·이론 전통의 고색창연한 가정을 가장 급진적으로 전복시킨다. 그는 스펜서-브라운의 형식논리학, 폰 푀르스터의 급진적 구성주의, 마투라나의 인지생물학, 후설의 현상학, 파슨스의 사회적 체계, 사이버네틱스, 그리고 무엇보다도 베버의 사회학을 통해 독창적 사회학을 구축한다. ‘체계’가 주는 경직적 이미지와는 다르게, 루만은 체계에 이미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도 부르는) 포스트 구조주의에서 중요한 ‘차이’에 대한 개념을 68 이전에 선취한다.

 

행정 관료로 활동하던 루만은 지금껏 사회 현실을 설명했던 방식이 잘못되었으며, 구유럽적인 방식이라는 판단과 함께 복잡성이 갈수록 증대하고 있는 현대사회를 설명한 개념 도구로 ‘체계’를 창안한다. 체계란 환경(정의되지 않은 모든 것)의 복잡성이 감축되어 창발하는 것으로 환경과의 차이·구별을 통해 나타난다. 루만의 사회적 체계는 인간이 아닌 ‘소통’으로 구성되는데, 사회적 체계란 인간 사이에 소통이 발생할 때 그때그때 현재화된다. 체계는 실체가 아닌 작동이며, 소통과 차이의 연속이다. 체계는 자기준거적으로 구별된 자신 고유의 소통을 이어가면서 사회에서의 고유한 기능을 수행해낸다. 루만은 이러한 체계라는 개념을 통해 사회의 정치·종교·법·경제·교육체계 등을 일관되게 분석하는데(사진 2), 사회를 분석하는 일반이론으로서 체계를 제안하는 것이 이 책, <사회적 체계들>이며 이 이론은 높은 완결성을 갖는 이 시대의 마지막 일반이론이자, 거대이론이다.

 

이 책은 이미 <사회체계이론>이라는 이름을 번역된 바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지금껏 제대로 인용된 적이 없었다. 그만큼 문제적이었다. 루만에게 사회체계(Gesellschaftssystem, Societal System)와 사회적 체계(Soziales System, Social System)은 다른 개념인데, 이전 번역은 그것을 살리지 못했다. 이제 ‘사회적 체계들(Soziales Systme, Social Systems)’이라는 이름으로 정확히 번역되었다. 루만의 <사회이론 입문>에서는 한 ‘한국인 제자’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바로 노진철 선생님이다. 이 책은 2010년대부터 적극적으로 루만 연구를 진행 중이신 이철 선생님과 박여성 선생님의 번역과 더불어 노진철 선생님이 3년간 진행한 강독을 통해 번역된 책으로 믿고 볼 수 있는 번역이다.

 

루만의 방대한 이론 세계를 설명하기에는 분량이 부족하다. 이 책은 인류 지성사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책이며, 사회(학) 이론이 도달한 가장 높은 고봉으로 이를 직접 응시하기 위해서라도 직접 읽어야 할 책이다.

 


정치체계


기능적으로 분화되고, 중심이 없는 사회에서 정치체계는 사회의 핵심적인 기능체계가 아니라 단순히 하나의 기능체계일 뿐이다. 이러한 루만의 시각은 기존에 국가·정치를 사회 조종의 핵심과 중심으로 파악했던 한나 아렌트와 같은 학자들의 입장과 대립된다(서영조, 2008: 50). 루만에게 있어서 국가는 정치체계의 한 요소일 뿐이다(루만, 2011: 341). 사회에 있어 정치의 힘을 회의하고, 정치가 사회를 조종한다는 의견에 부정적인 루만의 시각은 ‘조종 비관주의’라고 불리기도 한다(서영조, 2011: 16). 결국 루만에게 있어 정치는 다양하게 분화된 사회의 특정 기능을 담당할 뿐이다.


루만은 막스 베버의 권력 개념을 계승한다. 루만 역시 권력의 근원은 궁극적으로 물리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데 있다고 서술한다(발터 리제 쉐퍼, 2002: 95). 정치체계에는 매체로서 권력이 작용하고, 이는 ‘집합적인 구속력을 가진 결정’을 위한 것이다(루만, 2014a: 146). 루만에게 권력은 지배나, 억압의 수단이 아니라 하나의 소통의 수단으로 기능한다. 권력을 통해서 비로소 ‘정치적인 것’에 대한 커뮤니케이션이 정치체계로 분화될 수 있다(서영조·김영일, 2009: 17).


루만(2014b: 577)은 정치체계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코드화가 필요함을 환기시키면서, 이 코드는 “우월한 권력(공권력)”과 이에 “복종하는 자의 구별(통치자/피통치자) 및 공권력을 여당/야당 도식”으로 조건화된다고 지적한다. 권력의 우세와 열세는 차이, 아마도 최초의 차이는 무력으로 결정되었을 것이고,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평화를 요구 받고 무력과는 다른 안정적인 수단을 모색하는 것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필요에 의해 공직이 발명되고, 이를 통해 공직에 통치자/피통치자의 차이가 재규정된다. ‘공직’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통해 정치체계는 한층 더 탈인간화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근대 정치의 출현으로 인해 정치는 다시 한 번, 여당/야당으로 재코드화된다(서영조, 2013: 279-280).


체계이론 일반에서 다루었듯 체계에서 코드는 불변적 속성을 가지고, 프로그램을 가변적 속성을 갖는다. 루만의 상이한 코드와 프로그램의 개념을 통해, 전자의 기능으로 복잡성을 축소하고, 후자의 기능을 통해 체계의 유연성을 확보한다. 예를 들어 여당/야당이라는 이항코드는 불변의 것이다. 하지만 집권을 하느냐/하지 못하느냐는 정치체계의 프로그램에 달린 결과이다. 따라서 문제는 어떤 정치적 세력이 특정의 정치체계의 프로그램을 결정하느냐에 달리기도 한다. 이런 까닭에 정치체계의 프로그램은 체계의 밖에서 일어나는, 즉 환경에서의 커뮤니케이션에 반응한다. 루만은 프로그램을 “출입문”에 비유하고 있으며, 이는 환경과의 접촉을 통해 배제된 것을 다시 체계 안으로 ‘재진입’시키는 기능을 수행한다(서영조, 2013: 289).


루만에게 있어 정치체계의 기능과 구체적인 특성을 4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첫째, ‘정치적인 것’을 주제로 발생하는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결정’이라는 형태로 압축된다. 정치적 커뮤니케이션은 항상 결정과 연관을 갖는다. 둘째, 정치적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결정은, 의문 없이 다음 결정을 이어지는, ‘구속적인 성격’을 갖는다. 셋째, 이러한 구속은 ‘집합적인’ 성격을 지닌다. 여기서 집합적이라는 것은 결정이 그 체계에 포함된 모든 구성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치체계는 결정들의 사실적 연속성, 결정의 여부와 상관없이도 언제라도 결정하는 있는 능력과 연관된다.


참고문헌


서영조, "니클라스 루만의 정치체계론", 『한국시민윤리학회보』 21(1), 2008.

______, "정치와 사회 조종 - 루만의 “조종 비관주의”를 중심으로", 『현상과인 식』, 35(1/2), 2011.

______, "자기생산체계로서의 정치체계 - 루만의 새로운 정치이해", 『사회와 철 학』 (25), 2013.

서영조·김영일, "니클라스 루만의 권력이론: 소통수단으로서의 권력", 『21세기정치 학회보』 19(2), 2009.

니클라스 루만, 『사회체계이론 2』, 박여성 옮김, 한길사, 2011.

_____________, 『예술체계이론』, 박여성·이철 옮김, 한길사, 2014a.

_____________, 『사회의 법』, 윤재왕 옮김, 새물결, 2014b.

발터 리제 쉐퍼, 『니클라스 루만의 사상』, 이남복 옮김, 백의, 2002.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 1927-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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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 1927-1998)은 독일의 사회학자로서 사회학에만 국한되지 않는 여러 분과학문의 성과들을 수용하여, 자신만의 독창적인 체계이론을 구축했다. 루만의 체계이론은 사회과학에서 체계이론이라는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자리잡았고, 이로 인해 루만은 현대 사회학의 대표적인 학자로 자리매김하였다. 루만은 1970년대 벌어진 하버마스와의 『사회이론이냐 사회공학이냐-체계연구는 무엇을 수행하는가?』라는 논쟁을 통해 독일 사회학계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 두 이론가의 논쟁은 독일 전후 사회학계의 대표적인 대논쟁으로 손꼽힐 만큼 큰 파급력을 불러일으켰다(김덕영, 2003: 340-341).


1. 체계이론


  루만은 1969년 설립된 빌레펠트 대학에 임용될 때, “연구대상: 사회이론, 연구 기간: 30년, 비용: 없음”이라는 연구계획서를 제출했다(루만, 2014a: 21). 루만은 학자생활동안 새로운 패러다임을 통해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을 이루기 위해 일관되게 체계이론에 천착했다. 루만은 주체철학으로 대변되는 서구의 근대적 전통을 구(舊)유럽적 사고라고 지칭하며, 기존의 패러다임과 결별을 선언한다. 루만은 포스트모던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근대의 다양한 성취들은 유지되고 있으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제안하는 거대서사의 해체는 결국 그 자체로 ‘거대서사의 해체’라는 하나의 메타서사가 되었다는 것이 루만의 판단이다(루만, 2014b: 1305-1307).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만이 하버마스처럼 근대를 미완의 기획으로 보았던 것은 아니다. 그는 기존의 근대적인 사고와 결별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더불어서 루만은 정치적 진보를 추구하지 않았으며, 어떤 이상을 추구하며 하는 학문에도 회의를 가졌고, 실재를 정직하게 바라보자고 제안했다. 또한 루만은 고전 사회학의 효과에 회의적이었으며, 고전사회학적 패러다임에 집착하다보면, 현실은 가볍게 달아난다고 평가한다(루만, 2015: 27, 45-46).

  부르디외는 현대사회를 "계급이 분화된 사회"로 보았다면 루만은 그와 시각을 달리한다. 루만에게 근대사회는 "기능적으로 분화된 세계로서, 분절적으로 분화되거나 중심과 주변에 따라 분화되거나 계층적으로 분화된 전근대사회와 결정적으로 구분"된 사회이다(김덕영, 2014: 57-58). 이러한 연유로 루만의 사회이론을 '기능구조주의'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사회가 계급구조로 인해 수직적으로 구성되어있다고 보았던 부르디외와 다르게, 독특하게도 루만에게 근대사회의 분화된 체계들에는 중심이나, 위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루만, 2001:29). 현대사회를 탈중심화된 사회라고 파악하는 이러한 루만의 시각은 하버마스의 분석과도 일치한다.


<그림 1 - 체계의 개념적 도식(루만, 2010: 60)>


*루만에게 있어서, 사회체계와 사회적 체계를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사회’는 독일어로 ‘Gesellschaft’, 영어로는 ‘societal’에 가까운 의미이고, ‘사회적’은 독일어로 ‘sozial’, 영어로는 ‘social’에 가까운 의미이다. 루만에게 사회적 체계는 상호작용과, 조직, 사회(전체사회)를 포함하는 개념이고, 사회적 체계로서의 사회는 기능 분화된 정치체계, 경제체계, 종교체계 등의 기능체계를 포함한 개념이다(김덕영, 2016: 449).


  루만의 사회학에서 체계는 각각 기계, 유기체, 사회적 체계, 심리적 체계를 포함한다. 기계체계는 고유한 작동, 고유한 경계 작동상의 폐쇄성을 가지고 있지만 자기생산을 이루어내지는 못하는 체계이다. 다음으로는 유기체를 볼 수 있는데, 생물학적 유기체가 대표적인 예이다. 생물학적 유기체는 특정한 신체적인 경계를 가지고, 자기생산을 이루어내는 체계이다. 이러한 심리적 체계와 사회적 체계는 작동상의 폐쇄성, 자기생산 등의 체계의 공통점을 공유한다. 하지만 기계, 유기체와는 다르게 심리적 체계와 사회적 체계는 의미체계이며, 의미를 경계로 구분된다(김덕영, 2016: 452).


  루만에 의하면 그의 이론기획에서 중요한 것은 ‘체계’ 자체가 아니라 체계(System)와 환경(Umwelt)와의 구분, 관계이다(루만, 2010: 327; 2015). 루만의 체계이론에서 가리키는 ‘환경’은 흔히 사용되는 환경운동에서 가리키는 자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세계는 체계와 환경으로 분할된다. 체계는 경계를 갖는 복잡한 구조이다. 이러한 체계에서, 정의(definition)된 부분을 제외한 모든 것, 체계가 아닌 모든 것은 환경이 된다(루만, 2015: 73). 체계와 환경의 구분은 루만의 이론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개념이며, 체계를 스스로 작동하면서 환경과 구별된다. 이 구별 속에서 체계가 구성된다. 체계와 환경의 구별은 체계의 자기생산, 즉 체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루만, 2014c: 120). 요약하자면 체계는 환경과의 구별을 통해 경계를 형성해내고, 이를 통해 자기생산, 유지, 기능하는 폐쇄적·자율적·통일적 단위이다(김덕영, 2014: 228). 체계의 기본단위는 인간, 주체가 아닌 ‘커뮤니케이션’이다.


  체계와 환경의 이분법적 도식은 현상학자 후설(Edmund Husserl)의 대상과 지평의 이분법적 도식과도 조응한다. 후설의 선험적 현상학에서 지향성(Intentionalität) 개념은 주체가 받을 수 있는 체험의 과부하를 처리할 수 있도록 해주는 하나의 매체로 작용한다. 루만 또한 ‘의미(Sinn)’를 중심으로 ‘대상으로서의 체계’, ‘지평으로서의 환경’의 도식을 만들어, 세계의 복잡성을 축소하려 처리하려는 기획을 보여준다(정선기, 2017: 331-332). 루만은 복잡하게 분화된 현대사회에서, 세계로부터 통보되는 다양한 복잡성을 포착·축소시켜, 처리하는 것을 체계이론과 그의 사회학의 목표로 삼았다(김종길, 1993: 45-46).


  체계는 고유한 매체, 코드, 프로그램을 통해서 고유한 기능을 담당한다. 고유한 코드와 프로그램은 기능 체계들의 결과이며, 조건이다(루만, 2014a: 655). 이 코드는 이항코드로서, 긍정값 내지는 부정값이 할당된다. 이러한 할당이 제대로 구성되는 지를 정하는 기준이 ‘프로그램’이다. 체계에서 “구조적으로 결정적인 것은 고정된 코드와 가변적인 조건화(프로그램)의 차이”이다. 이러한 코드화는 한 매체가 다른 매체들과 구별, 분화, 독립, 특수화되는 것을 보장한다(루만, 2014a: 426-427, 443). 현대사회의 각각의 기능 체계들은 코드로 인해 고유한 자기생상으로 작동하며, 이로 인해 비로소 독립분화를 - 예를 들면 정치체계, 경제체계, 법체계, 과학체계 등의 - 이룰 수 있다(루만, 2014b: 863).


기능체계

코드

프로그램

매체

기능

경제

소유/비소유

희소성/가격

화폐·소유·권력

물질적 재생산

합법/불법

법, 질서

법·의사결정

안전, 갈등 해결

과학

진리/거짓

연구

과학적 인식

새로운 인식 생산

정치

여당/야당

정치사상, 이데올로기

권력 경쟁

집합적 의사 결정의 산출

대중 매체

정보/비정보

전달

커뮤니케이션 매체·언어·영상

정보·대화

도덕

존경/멸시

가치관

가치 판단

하위 제도적 정향·규제

윤리

정의/불의

실천 철학

도덕

도덕 성찰·논증·규제

<표 1 - 기능체계의 도표(발터 리제 쉐퍼, 2002: 184-185)>


  분화된 기능체계들은 체계 작동상의 폐쇄성을 갖는다. 체계는 전적으로 자기준거에 기반을 두고 내재적으로 작동한다(루만, 2014c: 121). 즉 기능체계들은 서로에게 닫힌 체계로서 작동하며, 따라서 서로는 서로에게 환경이다. 경제체계는 ‘소유/비소유’라는 고유한 이항코드, ‘희소성/가격’이라는 조건화, 즉 프로그램, ‘화폐·소유·권력’이라는 매체를 가지고 사회에 ‘물질적 재생산’이라는 기능을 수행한다. 다른 예로 정치체계는 ‘여당/여당’이라는 고유의 이항코드, ‘정치사상과 이데올로기’라는 프로그램, ‘권력(경쟁)’이라는 매체에 근거해 ‘집합적 의사 결정의 산출’이라는 기능을 수행하고, 과학체계는 ‘진리/거짓’이라는 고유의 이항코드, ‘연구’라는 프로그램, ‘과학적 인식’이라는 매체에 근거해 ‘새로운 인식 생산’이라는 기능을 수행한다. 루만(2014a: 443)은 “이론은 법률이 아니고, 연애관계에 투자하는 사람은 기업가처럼 행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특정한 체계가 다른 체계에 대해 일정한 폐쇄성을 가진, 닫힌 체계라는 것, 즉 체계 간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설명해 근대의 분화된 특정한 기능체계들의 고유의 기능을 설명하는 것이다.


  기능적 분화들에 의해 구성된 사회에서 각각의 부분체계들은 체계 사이의 독립성과 의존성이 함께 증가한다(루만, 2014b: 696, 856). 왜냐하면 모든 체계들이 작동상으로는 서로에게 폐쇄적이지만, 모든 기능체계들은 구조적 결합을 통해 체계 간의 결합이 진행되어, 사회 내부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법체계와 정치체계의 예를 들 수 있다. 법과 정치는 헌법을 통해 규제된다. 헌법은 정치체계를 법에 결속시키고, 이 때문에 위법은 정치체계에서의 실패로 산출될 수 있다. 헌법은 또 다른 한 편으로 정치적인 동기에 의해 입법과정을 거치고 이 과정에서 법체계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것이 기능적으로 분화된 체계들 사이의 의존성에 대한 설명이다(루만, 2014b: 892-896).


참고문헌 


김덕영, 『논쟁의 역사를 통해 본 사회학』, 한울아카데미, 2003.

______, 『환원근대』, 길, 2014.

______, 『사회의 사회학』, 길, 2016.

김종길, "니클라스(N. Luhmann)의 일반 체계이론 - ‘복잡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 도’", 『한국사회학』 27(SUM), 1993.

니클라스 루만, 『복지국가의 정치이론』, 김종길 옮김, 일신사, 2001.

_____________, 『사회체계이론 1』, 박여성 옮김, 한길사, 2010.

_____________, 『사회의 사회 1』, 장춘익 옮김, 새물결, 2014a.

_____________, 『사회의 사회 2』, 장춘익 옮김, 새물결, 2014b.

_____________, 『체계이론 입문』, 디르크 베커 편집, 윤재왕 옮김, 새물결, 2014c.

_____________, 『사회이론 입문』, 디르크 베커 편집, 이철 옮김, 이론출판, 2015.

정선기, "Luhmann의 사회이론에서 의미와 관찰", 『사회과학연구』 28(4), 2017.


제 3장 진화 - 여덟 번째 강의


진화이론의 선택과 배제


특정 이론을 전제하는 것은 곧 다른 이론을 배제하는 것이다. 진화이론을 선택하게 된다면 창조이론과 역사이론(역사의 단계분할 구상)을 배제해야한다.


진화이론과 일반 형식


루만은 진화이론을 추상적 상태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반 형식이며 이는 다윈을 참조한 것이다. 진화의 일반 형식은 변이, 선택, 안정화로 이루어진다. 변이는 어떤 것이 달라짐을 의미하고, 선택은 변이된 사태들을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으로 붙잡음을 의미하며, 안정화는 선택이 성과를 가질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를 그 다음 나타남 속에서 원칙적으로 구별하는 것을 의미한다. 루만은 이를 토대로 변이, 선택, 재안정화의 3조로 구성된 구별을 제시한다. 특별히 재안정화는 어떤 특징들이 제안되고 변이되어 수용될 경우와 포기되는 두 경우 모두에서 필요하다. 이것은 혁신을 도입하지 않고 거부했을 때, 그것을 감내한다는 측면에서 중요하고, 또한 사회이론에서 중요한 논점이다.


진화이론과 우발성


변이, 선택, 재안정화 개념들의 차이는 전형적으로 우발 개념을 통해 표시된다. 이를 통해 진화이론은 비합리적인 면모를 지니게 되고, 이것은 진화가 예견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루만은 근대 인과이론과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우발을 “체계에 의해 조정되지 않은 모든 것”으로 정의한다. 이것은 변이·선택·안정의 도식을 수용할 때, 이 모든 것이 체계에서 발생하지만 체계는 그에 준비되어 있을 수 없다는 것, 또는 변이 역시 선택적으로 성과를 가지며 전체가 안정적일 수 있음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발이란 체계이론에 있어 체계가 완전히 고유한 것에서만 진화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지표이다.

발전이나 가능성들의 전개에는 내재적인 법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진화는 언제나 체계에 접한 부분에서, 체계 안에서 이루어지지만 환경에서도 발생한다. 체계가 환경을 완전히 흡수할 수 없기 때문에 우발의 효과가 나타난다. 이 경우에 변이·선택·재안정화의 통합의 부재가 존재한다.


진화이론과 두 가지 논점 : 진화이론의 목적과 방향


진화이론에 관한 첫 번째 논점은 진화이론을 무엇을 설명할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루만은 진화이론이 역사적 상태를 설명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역사학자의 작업을 이론의 형식으로 옮겨 그들이 설명하여 시도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 진화이론의 목적이 아닌 것이다. 루만에게 진화이론의 목적은 ‘계획되지 않은 구조변경’에 있다.

루만은 계획이론을 진화이론 속에서 검토한다. 우리의 편견과는 다르게 계획을 예견되거나 조정되지 않은, 우발의 효과를 지닌다. 그리고 계획은 이점에 있어서 다시 진화에 영향을 미치는 진화의 한 요인이다. 행위이론의 구상은 자원(自願)하지 않은 행위나 의도되지 않은 효과들이 발생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계획하고 그것이 어떤 것에 도달하든, 하지 못하든 진화는 존재한다. 체계는 계획될 것을 수용하며, 특정하면서도 고유한 방식으로 그렇게 되는 것에 저항하기도 한다. 더불어 체계는 사물들이 빗나가도록 만들고, 사람들이 다음 순간에 그들의 계획을 번복하도록 만들고, 충족된 기대들로부터 실망들을 만들어내는 등의 반응도 포함한다. 계획은 진화를 추진하는 요인들 가운데 하나이다.

진화이론의 두 번째 논점은 진화의 방향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진화이론은 역사의 진보모델에 대한 회의에서 시작되었다. 진화는 ‘가치중립적’이다. 허버트 스펜서의 경우 낙관적인 역사발전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사회학을 구조적인 노선으로 변화시켰고 이를 통해 진화는 거부되었으며 뒤르켐의 분업과 같은 구조의 질문들이 전면에 부상했다.

진화는 진보를 의미하지 않을 때에도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진화의 방향은 첫 째, 정상화를 증대시키거나, 비개연적인 것들을 개연성 있도록 만든다. 이것은 통계학적인 개연성의 개념은 아니다. 인류는 다양한 영역들을 제도화했다. 근대 세계는 개연적이지 않음에도 우리는 새로운 진화상 성취들을 구축했고 그것들을 비교적 정상적인 것으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 진화의 방향성에 복잡성 개념을 추가하고, 더 높은 복잡성 구출을 진화의 반향으로 간주한다면 다른 표현도 가능하다. 복잡성 개념은 그 즉시 수정을 필요로 하는 문제 있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항상 더 복잡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더 높은 복잡성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할 때, 그것은 모든 것이 점점 더 복잡해진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전제조건 없는 단순한 사회 형식과 복잡한 전제조건을 필요로 하는 사회에도 동시성이 존재한다. 여기서 자기생산 개념을 덧붙이면 자기생산이 붕괴하지 안흐면서 복잡성이 얼마나 높아질 수 있는지를 진화가 시험한다고 말할 수 있다. 고도로 복잡한 체계들이 환경에 대한 높은 민감성이나 교한 가능성에도 고유한 구단들을 갖고 여전히 자기생산적으로 재생산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자기생산이 붕괴하지 않는 조건에서 파괴적인 효과 없이 복잡성을 가능하게 한다는 진술은 진화이론에서 가치중립적인 방향 개념을 발견하려는 하나의 시도로 생각할 수 있다.


진화이론과 적응


루만은 다윈의 이론은 근본적으로 진보이론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포유류, 조류, 곤충 등의 상이한 종의 분화가 곧 진보가 아니듯, 진화이론도 진보이론이 아닌 것이다. 이와 관련해 루만은 ‘적응’개념을 중요하게 다룬다. 고전적 진화이론은 체계가 적응된다는 것을 많건 적건 도달될 수 있는 변수로 보았다. 그것은 복잡한 체계들이나 생존하는 체계들이 환경에 더 잘 적응되어 있는 것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이런 진술은 마투라나에 의해 반론을 받게 된다. 마투라나의 자기생산 개념은 앞선 고전적 진화이론을 대체하고, 루만은 이를 사회이론에도 접목하려고 한다.

자시생산 체계는 자기생산이 환경에 의해 관용되지 않으면, 더 이상 자기 생산을 해낼 수 없다. 환경은 방향을 제시하지 않으며, 명백하게 상이한 것을 허용하면서 진화가 막 시행되는 것을 시험해보도록 추동한다. 하지만 이것은 환경이 그 시점에 앞에 내어놓는 것, 이미 현실에서 실현된 것과의 관계에서 적합성이 있다는 전제조건에서만 그렇게 한다.

이와 비슷한 문제도 존재한다. 하나의 진화하는 체계가 있고, 다른 모든 것은 환경이며 지속적으로 환경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환경 안에 또 다른 진화하는 체계들이 있다고 말해야 하는 상황과 관계가 있다. 체계와 관경의 관계는 진화를 하나의 지점에서 추진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환경에도 마찬가지로 진화하는 체계들이 있다. 그리고 그렇기에 상호작용이 생성되며, 그것은 누가 누구에게 적응하는가 하는 질문을 만들기도 한다.


진화이론의 방향성 - 과정 범주


루만은 진화를 역사적 과정으로 보는 것을 정상으로 간주한다. 19세기 역사 이론에서 진화와 과정을 함께 나타난다. 우선은 헤겔을 통해 구축된 과정 범주는 하나의 역사적 과정이 존재한다. 개념사를 고찰하는 한, 과정의 보편사 모델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 복제되는 화학적 또는 법률적 절차가 있다. 그것은 선택적인 사건들이 서로 조정된 연속이다. 역사는 과정의 역사인가? 다른 한 편 다윈의 차이주의적 이론은 과정을 기술한다기보다는 종의 다양화라는 결과를 기술한다. 하지만 진화가 과정인지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앞 선 두 질문에 답하기 위해 관찰을 도입해야한다. 구체적으로 두 가지 상이한 관찰과 구별을 상정할 수 있다. 먼저 차이 도식을 활용한 과학적 진화이론이 있다. 루만의 경우에는 구조 변경을 변이와 선택을 갖고 설명하고자 할 때 진화이론을 사용한다. 이것은 관찰을 위한 도구이다. 루만은 역사를 이 구별들을 통해 관찰한다. 이것은 ‘특정한 구별들을 가진 관찰자로서 작업하는 과학철학 이론’으로 작업 범주화할 수 있다.

다른 관찰은 사회가 진화이론 자체를 통해 거의 이데올로기적으로 자신을 기술한다는 것이다. 사회 내에는 시점(時點)적 지향이 요구된다. 이 시점성은 진화이론을 통해 형성된다. 이에 의해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 입증된 자들의 선택의 역사 같은 맥락으로 보일 수 있고 이를 통해 사회의 자기기술 차원에서 이에 부합하는 귀결들을 초래하는 부분적인 측면을 지니게 된다. 그 귀결은 민족주의 또는 기업가 정신과 관련된 것이다. 특별히 19세기 말의 이데올로기적 기술은 이런 토대를 과장한다.

진화이론의 진술 능력을 제한하는 시도의 목록에서 마지막 관점은 19세기 진화이론이 오늘 더 이상 수용되지 않는 특정한 전설을 기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펜서는 진화가 진보, 복잡성, 사용될 수 있는 것, 능력 있는 것들을 구별함, 그것이 무엇이든 그 방향으로 점진적인 변화라고 보았는데, 이는 이제 기각될 주장이다. 역사에는 후퇴와 정체, 급격한 변화도 존재한다. 더불어 불연속성, 발생을 정확하게 확정할 수 없는 비약의 영역들도 존재한다. 그렇기에 루만은 비약성, 돌방성을 진화이론에 포함하여 이론을 구축할 때, 고전의 이론을 극복하고 이론을 계속 사용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또 다른 질문은 진화가 필연적이라는 의미에서 특정 역사적 법칙을 전제할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상이한 발전의 계기들이 있으면 결과가 생성되고, 그럼으로써 필연성이 진화에 덧붙여진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납득될 수 있는 확신이며, 이것은 등종국성이라는 표제어를 통해 입증될 수 있다. 등종국성은 상이한 출발점에서부터 같은 결과를 이룬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는 변이·선택·재안정화로 고려했을 때, 필연성을 의심할 수 있게 된다. 변이·선택·재안정화로 보면 분화가 어떻게 성립하는가를 묻게 되기 때문이다. 선택과 연관이 없고, 선택을 미리 형상화하지 않으며 단순히 발생하거나 발생하지 않는 변이들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이런 질문들이 진화적인 구별의 진화의 테제로 이끈다. 진화 자체가 진화의 결과이다. 진화는 모든 것이 우연적이라는 테제로 이끈다.


사회문화적 진화이론의 특수성


변이·선택·재안정화의 추상적인 표현들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것들은 어떻게 성립하는가? 생물학적으로 변이는 돌연변이가 담당한다. 변이는 유전적 구조에서의 화학적 변화이며 양성(兩性)에 의한 재생산을 통해 강화되었다. 선택은 성징(性徵)의 발전이나 재생산 능력에까지 이르는 생존이다. 한 유기체는 다신의 변이된 유전자를 가지고 다음 유전자를 전달할 때까지 생존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 환경이 작용한다. 안정화는 그것이 인구의 차원, 유전자 풀의 차원에서 완전히 분리될 때 나타난다. 이는 돌연변이가 어떤 특정 수준에서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물학적 범주의 수용에 대한 결정적인 이의 가운데 하나는, 앞서 언급한 것이 사회문화적 진화에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고, 부분적으로 여기서 하나의 목적론적 구조가 작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행위에는 어떤 지향적이 구조가 존재해서 변이·선택·안정화의 분리에 순응하지 않고, 성공하든 실패하든 이에 대응한다고 툴민은 사회문화적 진화이론 적응에 이의를 제기했다. 루만은 이 이의에서 언제나 예기치 않은 결과가 나타난다고 말함으로써 툴민의 주장이 반박될 수 있다고 한다. 행위이론, 주체이론, 기질주의적 접근은 예기치 못한 결과를 고려하지 못한다.

루만은 자신을 세포들, 유기체들, 인구들처럼 제한된 체계는 보는 것을 배제하는 지시구조의 문제가 “의미” 매체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의미를 지니는 지향은 그 자체 안에 공간 경계와 시간 경계를 갖지 않고, 그러한 관점은 기제들을 상이한 체계 층위에 배분하여 변이는 이 체계에서 일어나고 선택을 다른 체계가 책임지고, 재안정화는 또 다른 체계가 결정한다고 말하지 어렵게 한다. 이렇기 때문에 변이·선택·재안정화의 물질화나 어떤 기제들을 통해 사용되는지의 기본 질문에 대한 다른 해결책이 요구된다.

변이는 사회체계 안에서 요소들, 작동들, 사건들의 층위에서 발생한다. 어떤 것은 그 순간 달리 발생하고 다시 사라진다. 선택은 구조의 사안이 된다. 사건들의 연동을 위한 구조 형성은 어떤 구조가 사용될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에 관해 광범위한 선택 결정이 내려지는 지점이다. 그리고 재안정화를 위해서는 체계 형성 그 자체 또는 ‘체계-환경 차이’가 고려 대상이 된다. 선택된 구조가 안정적이 될 수 있는 것은 체계가 다른 구조들의 수많은 수정들을 통해, 그 변경이나 변경의 억압에 적응하여 ‘체계-환경 관계들’이 자기생산을 계속해서 관용하게 될 때일 것이다.

조금 더 심화해보면 변이를 작동의 층위, 즉 발생하고 그 즉시 다시 비현재화되는 소통들의 층위에서 관찰하면, 변이는 언어 코드의 부정적인 면의 사용으로 생각할 것이 추천된다. 어떤 기대가 있고 그 기대가 주도적이든 반응적이든 부인되면 이것은 기존의 기대 구조와 관련하여 변이이다. 이것은 개별 작동에서만 변이이다. 구조 변경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변이들은 많다. 그 다음에는 어떤 가속화 기제가 작동한다. 이는 양성적 재생산과 유사성을 생각해볼만하다. 소통 안에 아니오를 구축할 가능성은 진화의 결과로서 증가하고, 이제는 대향의 아니오들 대량의 부정들이 나타날 수 있고, 그것을 감당해낼 수 있을 구조들이 선택의 압력을 받게 된다는 의미에서 진화를 가속화한다.

이 개념의 측면에서 선택과 관련하여 문제는 구조들의 층위에 있다. 다시 말해 구조들이 변화할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사건들은 바뀔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 체계를 구성하는 “재료”는 불변의 성질이다. 변경 가능성을 구축하려면 시간 상수를 만들어야 한다. 구조의 층위에서만 변경 압력이 발생가능하다. 그리고 그 층위에서만 어떤 변경에 대해 예 또는 아니오를 말할 수 있다. 변경이 거부되더라도 이 또한 이전의 구조와는 다른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체계는 일정한 기억을 갖는다. 거부된 것은 조건이 바뀌고 새로운 생각들이 고려되면서 다시 나타나고 이것이 재안정화가 한 번 더 필요한 이유이다. 루만은 종교의 예를 들어 설명을 진행하고, 부분적으로 종교는 적응시키고 부분적으로 압력을 거부하고 더 큰 변이의 범위를 처리할 수 있는 결정 구조를 가지며 압력을 흡수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다음 단계는 ‘상징적으로 일반화된 매체’의 발전을 변이를 관철시키는 가능성으로 보는 것이다. 상징적으로 일반화된 매체를 통한 발전은 종교를 통한 변이와는 달리 반드시 규범적인 근거를 갖출 필요가 없는 변경 가능성들이 만들어진다. 매체 발전과 종교나 도덕의 발전 사이의 괴리는 근세에 이르기까지 전체적인 고도문명을 관통한다. 이에 따라 구조적인 선택성이 형성되자마자 종교를 통해서나 매체를 통해서 진행되며 비교적 유일신적 방식으로 대변되어야 할 것으로 제한할 수 있는 결과들을 가지게 된다. 아니라면 다양한 매체들의 관계들과 같은 상이한 매체들을 갖고 작업하고, 그 다음에 변이 제안들에 대한 반응의 범위 내에서 조정되지 않은 상태를 수용해야 한다.

루만은 이 고려를 진척시켜 안정화 또는 재안정화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루만은 체계 경계의 재생산 또는 체계의 자기생산 그 자체가 안정화나 재안정화의 기제라고 정의한다. 변이된 구조들과 관계를 갖게 될 때는 그것이 사회 내에서 어느 정도로 ‘체계-환경 관계들’을 수단으로 실행될 수 있는지를 질문하게 된다. 근대사회가 지금 그러한 정도에서, 선택적인 구조변경을 통해 변이들을 유효하게 하고, 이때 ‘체계-환경 관계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안정적일 수 있을지는 질문하게 된다. ‘체계-환경 개념’을 갖고 안정화 요소를 선택 과정으로부터 더 분명하게 분리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질문해야 한다. 이것은 근대의 특수성인지 질문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일차 기제의 이러한 이중 상황을 갖게 된다. 사회에 경계가 없다면 내적 분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적 분화를 통해 한 번 더 안정성을 위한 잠재력을 상승시킨다. 이것은 사회 차원의 조정을 포기한 가운데 일어나는 일이다. 예를 들어 청치체계들이 혼자 힘으로 안정화되고 자신들의 환경에서 좌초할 수 있는 문제들 스스로 조정해야 한다면, 그것을 통해 사회 차원의 질서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 1927년 12월 8일 ~ 1998년 11월 6일)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의 사회이론에서의 의미와 관찰


1. 서론


루만의 이론체계에 있어 의미(Sinn)는 핵심적인 개념이다. 사회학의 전통에서 의미는 중요한 개념이며 고전사회학자 베버 또한 의미를 기본개념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루만은 자신의 이론체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설명하는데 큰 비중을 두었지만 그럼에도 루만은 인문·사회계열의 학문 뿐 아니라 과학을 포함한 다양한 분과학문의 성과를 수용하여 의미의 개념을 구축했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루만의 체계이론은 구(舊)유럽적 사고로 표현되는 주체철학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되고, 그는 후설의 선험적 현상학에 영향을 받아 의식 층위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사회적 층위로 옮겨 놓은 듯하다. 이어지는 내용은 루만 체계이론을 사회학적 전통의 경계 안에서 조망함으로써 루만 이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전통적 사회학의 비판적 기능과 사회학적 실천에 대한 루만의 입장을 서술한다.


2. 의미와 행위


루만에 의하면, 파슨스의 학문적 이력은 초기부터 마지막까지 일관되게 베버의 사회학적 제안을 발전시키려고 고민했던 것이라고 한다. 파슨스가 베버를 수용한 것과 같이 루만 또한 파슨스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했으며 사회적 행위에 대한 인식론적 통찰을 제공하는 독일의 학문적 전통을 통해 파슨스의 구조 기능주의를 교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루만은 의미와 행위의 관계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의미를 주체의 관점에서만 보는 기존의 사고를 비판한다. 전통적인 접근에서 의미는 주체의 입장에서만 논의할 수 있다. 하지만 루만은 이것을 비과학적인 것이라고 보았고, 의미를 주체와 분리시켜 처리하면서 보편적인 의미를 도출할 수 있다고 보았다. 루만은 역으로 의미를 통해 주체를 규정할 것을 제안한다. 이 지점은 루만의 체계이론의 출발점이자, 의미와 행위 관계의 전회를 의미한다. 루만에게 의미를 생성하는 주체는 행위자가 아닌 의미를 사용하는 체계이다. 역으로 체계 자체에 대한 해명이 곧 행위에 대한 설명이 된다. 따라서 사회체계는 의미로 확인되고 의미를 경계로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파슨스의 체계이론은 사회구조의 분석이자 동시에 사회적 행위를 설명하는 이론이며, 루만은 파슨스가 의미의 매체적 특성에 주목해서 베버가 제기했던 의미문제를 발전시켜 이론화했다고 평가한다.

베버의 사회학 프로그램은 스스로 이야기하듯 미완의 기획이며, 그 작업의 목표는 사회학이라는 분과학문을 정초하는 데에 있었다. 베버가 제안하는 행위자는 의미를 구성하는 주체이다. 베버에게 의미는 언제나 행위를 통해 규정되며 행위자가 주관적으로 부여한 것이다. 그러나 베버의 설명은 여기서 종결되지 않고 확장된다. 베버는 행위자가 의미를 부여했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가 상대방에 의해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지적하며 의미가 주관적으로 생성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모든 의미가 주관적으로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행위가 역으로 의미를 통해서 규정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베버는 ‘주관적’ 의미를 ‘객관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와 구분한다.

베버에게 있어 객관적 의미는 관찰자의 해석과 이해를 통해 형성된다. 여기에서 행위 주체의 의미 구성 과정을 배제한다. 행위자가 관찰자와 전달하는, 스스로 의도한 의미 또한 상호의 해석도식(의미연관)을 공유하며 의도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전적으로 사적인 의미가 아니다. 주관적 의미는 그것이 생성되는 과정을 환원해서 이해할 수 있지만 객관적 의미는 그러한 성취와 무관하게 이해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베버는 주체의 자의성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의미의 사회적 형성을 설명할 단초를 마련하기도 한다. 객관적 의미는 관찰자가 주관적으로 의도한 의미에 의해 개념적으로 구성된 순수한 유형의 의미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행위자가 스스로 의도한 의미의 개념이 실제 행위로부터 분리되고, 그 핵심은 실제 행위자 대신에 유형으로 이해되는 행위자가 들어선다는 것이다. 사회학의 임무는 실제적인 행위자가 아닌 행위자를 유형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베버는 방법론적 개인주의에 국한되지 않으며 주관적/객관적 의미의 구분을 통해 주관적인 의도가 담긴 의미를 탈주체화하고 사회적 의미의 생성을 설명한다. 또한 베버는 행위이론적 관점에서 주관적/객관적 의미의 차이를 ‘사회적 행위’로 개념화한다. 사회적 행위란 행위자가 의도한 의미에 따라 타인의 행동과 연관되고 그 과정에서 타인의 행동을 지향하는 행위로 정의된다. 행위가 유의미한 관계를 매개로 실현될 때, 그것은 유의미한 행동으로서의 사회적 행위이며 의도한 의미의 특성으로 인해 여타의 유의미한 행위와 구별된다. 타인의 행동을 지향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베버는 직접적인 답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추론해본다면 사회적 행위는 어떤 타인, 즉 언어와 행위 역량을 가진 다른 주체를 상정함으로써 가능하다. 다시 말해 타인을 지향한다는 것은 어떤 행위가 타인의 행동을 통해 조건화되고, 그 진행 과정에서 타인의 행동을 통해 함께 규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회적 행위는 현실 행위, 이론적으로 구성된 개인의 행동, 그리고 잠재적인 타인의 행동까지 포함한다. 덧붙여 행위자가 상대방을 표상하는 것만으로도 타인을 지향한다고 가정하면 이는 특정 행동에 대한 기대도 사회적 행위의 구조에 속하는 것이 될 수 있다.

베버는 사회적 행위의 중요한 ‘표준적인’ 요소는 타인의 특정 행동의 기대에 대한 유의미한 지향을 형성한다고 지적한다. 개별 행위자들은 사회적 행위에서 타인의 유의미한 행위를 기대한다. 개별 행위자들이 서로의 행위를 함께 기대하면서 구조, 즉 사회적 관계에서 '기대의 기대'를 가진다. 이는 의미 내용에 따라 서로를 향하고, 그를 통해 지향된 다수의 행동을 의미한다. 베버에 의하면 서로 지향하는 참여자의 행위를 말하기 위해서는 상호작용의 성원이 동일한 태도를 가질 필요는 없다. 상호작용에 참가하는 서로가 서로를 전제하고 기대를 지향한다면 둘 또는 그 이상의 행위자들이 서로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모든 참여자의 사회적 관계에 행위자와 파트너가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서로를 지향한 쌍방향적 행위, 사회적 관계가 기대의 상호작용하는 성찰성에 연계된다. 이는 ‘기대의 기대’이기에 기대의 성찰성이다. 요컨대, 베버에서 사회적 관계란 행위의 기대구조, 다른 말로 상호작용적인 기대의 성찰성으로 인해 구축된 사회적 관계이다.


3. 매체로서의 의미


전통적으로 의미 개념은 체험하는 주체의 반성적 해명이 가능한 체험구조의 실행을 통해 표현된다. 그러나 루만은 이런 사후적 구분이 아닌 사전적 의미와 의식의 관계를 설명할 것을 요청한다. 유의미하게 구성되는 것은 이미 의미를 전제로 하기에 의미개념이 우선적이며 그것은 주체와 무관하게 정의되어야 한다.

첫째, 의미는 개별 행위자가 아닌 체계 스스로 구성하는 형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물론 모든 의미·체험·행위는 신체와 의식을 전제로 하며 사태(Sache)는 체험을 통해 의식에 주어진다고 해도 이것은 의식이나 의사소통을 통해 비로소 심리적·사회적 범주가 된다. 둘째, 의미는 세계의 복잡성을 행위로 하여금 체험의 과부하를 처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수단이다. 루만의 이러한 의미의 특성은 후설의 선험적 현상학, 지향성 개념과 큰 연관을 가진다. 의식의 체험은 항상 '어떤' 것에 대한 체험이고, 의식은 항상 '어떤' 대상을 지향한다. 항상 의식은 ‘어떤 것’을 지향함으로써 여타의 부분은 배후의 지평을 물러난다. 이는 대상으로서의 체계, 지평으로서의 환경의 차이를 허용해줌으로써 체계이론의 기본 논리를 제공한다. 지향을 통해 대상과 지평의 차이가 생기고 체계가 생성된다. 현재화된 체계는 항상 잠재화된 환경을 전제로 한다. 지평 개념은 체험이 더 이상 처리할 수 없는 것들을 지평으로 남김으로써 논리적으로 복잡성의 축소를 허용한다. 의식(심리체계)이 지향하여 대상을 현재화하면 동시에 다른 부분들은 잠재화된다. 어떤 것에 대한 지향은 다른 것에 대한 부정이다. 현상학적 시간 개념이 도입됨으로써 잠재화된 지평도 다시 현재화될 수 있는 구조적 동학이 마련된다. 체계/환경이 반복되면 과정적 재귀의 동학이 허용된다. 심리/사회 체계를 포함한 체계는 연쇄적인 계기적 사건, 행위·의사소통으로서 재귀적 작동을 허용하는 능동성·우연성·지속성·창발성을 가능하게 한다. 의식의 지평 개념은 모든 관찰에 불가피하게 맹점을 수반시킨다. 이는 모든 관찰에 어떤 위계적 우선성도 허용하지 않는 수평적 다원성과 체계의 성찰성 테제를 가능하게 한다. 또한 체계와 환경의 개념을 통해서 인과적 설명이 불필요한 의식의 폐쇄적 작동 개념을 얻음으로써 객관주의적 사유인 인과성의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또한 ‘체험’과 ‘행위’를 구분해야만 의미개념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 체험은 현재화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가능성을 감당한다. 이런 체험의 과부하는 복잡성과 우연성이라는 이중의 구조를 가진다. 전자는 실천적 선택을 강요하고, 우연성은 실망의 위험을 허용한다. 여기서 우연성이란 체험의 지평에서 통보되는 가능성이 후속 체험과 행위에서 기대한 것과는 다르게 현재화될 수 있음을 말한다. 요컨대 체험의 통보는 현존하지 않거나 기대하는 방식으로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지시하거나 기대했던 것이 그간의 사건들에 의해 실현이 불가능하게 되어 실망을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의식의 체험은 복잡성과 우연성을 의미의 형식, 곧 지시적 방식으로 선택적인 처리를 함으로써 과부하는 조절하고, 선택되지 않은 잔여 또한 보존시켜 남겨둔다.

체험의 과부하를 처리하는 형식이 바로 '의미'이다. 루만에 따르면 의식은 경험에 대한 선택으로 구성되며, 항상 외부세계에 대해 비대칭적으로 투입되어 세계 복잡성의 문제를 사고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의식은 세계의 압력에 대한 내적 처리이다. 의미는 어떤 사태의 내용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성을 축소하고 체험을 처리하는 기능의 수단이며, 복잡성의 축소를 일으키는 매체이다. 체험처리는 의미를 통해 복잡성을 축소시키고, 보존하며 실현한다. 의미를 통한 복잡성의 축소는 체험에 관한 ‘세계 자체’와 행위에 관한 ‘세계 내의 특정 체계’, 이중의 방식으로 구성되며 체계로 수행된다. 체험과 행위의 구분은 복잡성의 축소와 의미규정에 의해 정의된다. ‘체험된’ 의미는 타자에 의한 축소로, ‘행위’는 체계 고유의 성취로 이해되고 처리된다. 또 다른 의미의 중요 기능은 체험되지 않은 잠재성을 지시와 이해를 통해 도입시키는 것이다. 의미는 다수의 의식체계로 구성된 세계에서 인지의 내용을 계속 변화시키며 선택의 규칙으로 기능한다. 세계는 의식을 통해 들어오고 의미의 통해 다른 가능성들로부터 선택, 해석됨으로써 정보가 된다.

루만에게 체험과 행위는 구분은 체계 연관적인 개념화이다. 서로 다른 폐쇄적 심리체계는 체험으로부터 통보된 복잡성을 축소하여 통보하고 재통보하는 과정이며 이 의사소통 과정은 의미를 통한 세계의 구성을 매개한다. 즉 사람들은 체험, 행위를 통해 의미를 구성된 것으로 체험하고 그것을 상황에 따라 다르게 처리한다. 체험과 행위는 체계연관적인 개념이기에 사회체계에 따라 유동적이다.


4. 기대구조와 의사소통


사회구조는 ‘기대의 기대’ 형식을 지닌다. 루만에 의하면 타인과 연관된 모든 체험과 행위는 자신과 타인에 동시에 의존한다. 자신이 타인에게 통보한 기대는 서로의 기대에 대한 전제를 구성하고 그 조건이 반성되어 복수의 사람이 함께 기대할 때 실현 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타인의 자유 규정을 자신의 기대구조에 산입해야 되기 때문에 자신뿐 아니라 타인의 기대를 기대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여기서 이중의 우연성 문제가 두드러지는데, 루만은 상호주관성을 부정하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사회적인 것’, ‘사회체계’가 생성될 수 있다고 본다.

루만에게 의사소통은 적어도 한 사람 이상의 참여자에게 의미를 공동으로 현재화하는 것이며 서로 새로운 것을 조절할 수 있도록 의미구조가 작용하는 것이다. 의미를 전제로 새로운 것을 표현할 수 있고, 의사소통은 언제나 의미토대 위에 구축된다. 정보는 특정 시점의 사건으로 동일성을 가지는 것이기에 어떤 정보도 전달하지 않는다. 의사소통에서는 새로운 것의 생성이 중요하다. 의사소통은 타인이 유의미한 체험에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상황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비언어적 표현도 의사소통의 한 요소이고, 언어는 부차적이지만 의사소통 과정의 높은 전문화를 통해 진화한 것이며 의사소통을 구분하도록 하며 사람들의 실천에서 타인에게 정보를 줄 행동방식을 증가시킨다. 언어는 기능적으로 의사소통 과정의 선택강화로, 의사소통은 인지과정의 선택강화로 정의 가능하다.

의사소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의미와 정보의 구분이 필요하고 이는 실천적인 측면에서 분명해진다. 동일한 의미를 지녔다고 해도 정보는 수용자의 상이한 여건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더불어 정보와 관련해 의미는 체험처리의 전제로 작용한다. 의미를 매개로 복잡성을 축소하는 과정은 선택되지 않은 것을 배제하는 부정의 과정이다. 이 부정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고 시간의 변화에 따라 부정의 부정을 통해 현재화 가능하다. 루만에게 부정의 개념은 배제와 선택의 행위이며 보편적 포함을 의미한다. 미래는 행위자가 스스로 자신의 방향을 선택하면서 움직이는 열린 지평이다. 체험되는 현실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회적 교류를 위해 사전 상호교류가 없어도 응답을 기대하고 실수를 보호받을 수 있는 의미의 유형과 규칙을 발전시킨다. 이를 위해 의미 자체에 이미 실망하는 경우의 예방수단이 삽입되어 있고, 그것은 사람들이 ‘기대’, ‘기대의 기대’에 대해 실망하는 경우 그것을 견딜 수 있는 행동 원칙을 갖게 한다. 기대구조는 반성적 기대에 기초해 통합/유지 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의미의 사회성이란 의도한 의미의 인지가능성, 그 인지가능성이 타인의 기대를 설명해주는 구조적 적합성이 있다. 따라서 기대의 기대는 의사소통의 부담을 감소시키고, 무엇보다 의견 검증에 나타날 수 있는 갈등을 피하게 해준다.


5. 관찰과 계몽


루만은 현상학의 판단중지를 가져와 연구 대상에 대한 모든 관심을 배제하고 연구자는 객관적인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루만은 후설의 지향성 개념을 통해 자연에 포함된 주체에 판단 중지를, 세계의 상호주관적 통용을 괄호 안에 넣어 사회학의 고유한 연구 영역을 확보한다. 루만은 근대사회 일반의 가능성 조건, 사회의 근본적인 과정을 기술하려고 한다. 루만의 목적은 체계구성을 통해 이론적, 실천적으로 세계의 복잡성을 파악하고 축소하는 인간 잠재력을 고양하는 데 있다. 루만은 경험적 현실에 거리를 두고, 관찰자로서 현실 뒤에 존재하는 사회의 구조와 과정을 포착하려고 한다.

루만은 후설에 의한 소여를 통해 사회학을 발전시켰지만 동시에 이와의 차이점도 가지고 있다. 루만은 선험과 구유럽적 사고를 거부하며, 관찰자를 통한다 하더라도 관찰된 모든 것은 체계로서 수행되어야 하고 그렇기에 관찰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경험적/선험적인 것을 폐기함으로 2차질서의 관찰 개념을 도입할 수 있고, 체계의 다양성이 구축 가능해 진다.

첫째, 루만은 현상학이 전제하는 선험적 주체 대신 재귀적으로 환경을 가지는 사회체계를 마련한다. 루만은 심리체계로 시작해 사회체계는 자기지시적인 자동생산 체계들로 파악하고, 사회가 다수의 사회체계들로 구성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는 이론의 출발점으로 자동생산체계의 하나인 의식을 상정하고 경험/선험의 이분법도 이를 위해 폐기시킨다. 이는 근대사회의 끊임없는 재귀기술을 제공하는 회귀적 과정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둘째, 루만은 후설의 선험적 의식 성취에 의한 반성을 자기지시적인 자동생산 체계가 상호적으로 관찰되는 2차질서의 관찰이론으로 대체한다. 이는 선험적 현상학의 주관적 기술이 자기기술하는 체계이론으로 대체된 것이다. 모든 관찰은 맹점을 가지며, 관찰의 모든 위계적 질서는 부정된다. 셋째, 체계이론의 관점에서 사회학적 연구 또한 언제나 고유의 맹점을 지닌 다양한 관찰 중 하나이다. 관찰은 연쇄적인 작동이며 재귀적 관찰은 개별 관찰이 아닌 수많은 의사소통에 의해 재귀적으로 작동하는 체계의 성취로 나타난다.

루만은 2차관찰을 통해 의식에게만 부여되었던 반성의 능력을 사회체계들에 부여했다. 관찰의 작동과 관찰의 관찰을 사회체계의 의사소통적 작동으로 보고 이는 사회의 자기관찰과 자기기술이라고 한다. 루만은 학문적 관찰 또한 여타의 의사소통 행위와 같이 복잡성을 축소하는 심리체계의 선택적 작동과 통보를 통해서 다른 심리체계의 반응에 초래하는 일종의 창발적 사건이다. 루만은 상호주관성을 배제함으로써 체계의 창발성을 확보한다.

루만은 구조적 과정과 변동 개념을 창조적으로 정의한다. 먼저 루만에게는 어떤 사건의 연속체가 선택성을 강화하는 특징을 충족하는 경우에만 과정이 될 수 있다. 또 기대의 기대로 구조 변화가 적용이나 통제되지 않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강하게 구조변동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에 지속적으로 좌절이 수반된다고 본다. 루만은 기대의 기대로서 구조의 변화는 자기 유지를 전제로 하고, 이에 따라 변화와 유지는 보수/진보 양자를 함께 다루어야만 한다고 본다. 새로운 것은 사회적인 것의 문제가 전체의 수준이 아니라 재생산이 유지되거나 그러지 못하는 계기적 사건들 사이의 관계 수준에 있다는 것에 대한 통찰이다. 기존 기대구조 내의 접속 행위, 벗어나는 기대구조에 기초한 접속 행위, 중간이 있음을 의미한다는 3중의 차이가 모든 상황에 존재한다. 루만에게 구조변동은 상황적으로 확신해야만 가능하다. 먼저 후속 행위가 가능해야 하고 이후에 그것이 구조적 가치를 가지고, 기대를 만드는지를 알 수 있다. 따라서 루만은 과정의 범주가 구조의 변동을 주체화하는 필수적이라고 보지 않는다. 자기준거적 체계는 독립적으로 자신에게 포함된 요소를 통해 자신의 구조변동을 생산한다는 의미에서 폐쇄체계이다. 체계는 자기 구조에 인과성을 부여하고 인과성은 스스로 부여하는 것이다.


6. 결론


루만의 논의는 베버가 제안한 프로젝트와 많은 부분을 공유한다. 루만에게 의사소통이란 사건이 선행한 사건을 다른 가능성의 지평에서 선택적으로 이해함으로써 행위가 선행한 행위를 이해하는 지속적인 해석과정으로 구축된다. 베버가 제안한 원인과 결과에 대한 사회적 기대·추론이 루만에 의해 사회학의 연구대상이 될 수 있다. 루만은 인과적 설명을 거부하고 우연, 차이, 선택에 기초한 사회이론을 제안하지만 그럼에도 베버와 공유되는 지점이 많이 존재한다.

첫째, 베버와 같이 루만의 사회학도 이론적 관점의 개방성을 허용한다. 의미의 문제를 제기하는 사회학은 탈도그마를 포함하고 모든 관찰은 맹점을 지니기 때문이다. 둘째, 루만은 의미를 사회학의 중심으로 두지만 행위를 연구대상으로 보는 데 부정적이다. 루만에게 행동을 행위로 해석하는 것은 체험과 행위를 통해 이해 가능한 다양한 형태 중 하나를 제시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만은 체험과 행위를 구분하면서 의사소통 개념을 상세히 제시하는데 이런 개념은 베버의 사회학 프로젝트에 기여할 수 있다. 셋째, 베버의 전통에서 전형적인 인간행위를 경험적으로 연구하려면 합목적적 행위와 우연적인 것을 인과적으로 연계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사이에서는 행위자가 스스로 원하던 목표와 결과 사이에 인과성을 적합하게 추체험해야 한다. 루만은 실제로 이러한 사례에 대한 경험적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 넷째, 루만에게 오늘의 사회이론은 사회가 마주한 문제점을 극복할 가능성에 대해 대처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루만은 고전사회학의 주제들이 추상적으로 구상된 통합적 이론내로 다시 수용되어야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다섯째, 루만은 사회학의 영역과 대상을 정초했던 베버의 문제의식을 계승한다. 루만은 타분과의 성과를 수용함으로써 오히려 사회적인 것의 영역을 확보하고 사회학의 이해의 폭을 확장한다. 여섯째, 베버의 합리화과정에 대한 이해처럼 루만에서도 사회의 재귀적 자기지시는 스스로 생성하는 출구없는 체계 작동이다. 선과 악은 허용되지 않으며 인간은 이미 탈출구 없는 사회에 존재론적으로 묶인 세계 내적 존재이며 루만은 뒤를 보면서 미래를 향한다.

오늘날 일상화, 점증하는 무관심, 불확실성의 확산은 현대사회의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이런 변화는 점점 더 예측하기 어려운 과제가 되고 있다. 고도의 복잡성으로부터 발생하는 합리적 선택의 요구는 오직 구조적 성취를 위해 충족되고 우연성이 감지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복잡성, 우연성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복잡하게 구성된 제도적 해법이 필요하다.


본 글은 정선기. 2017. “Luhmann의 사회이론에서의 의미와 관찰.” 『사회과학연구』 28(4). 를 요약한 것입니다.


2018.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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