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문트 바우만의 Liquid Modernity

 

지그문트 바우만의 Liquid Modernity 번역에 관해
 
바우만은 최근 10년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회학자다. 바우만 컨텐츠의 매력과 이런 분위기에 부응하듯, 이일수 선생님의 번역으로 <Liquid Modernity>가 액체 “근대”가 아닌 액체 “현대”로 복간됐다. 이뿐만 아니라 윤태준 선생님이 번역하신 <유행의 시대>에서도 Liquid Modernity는 유동하는 “현대”로 번역됐다. 나는 이 번역이 아쉽게 느껴져 글을 쓴다.
 
이일수 선생님의 경우, Modernity란 19세기 서구 산업화 이후 오늘까지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며, 바우만이 과거의 Solid Modernity과 구별되는 오늘날의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만든 개념인 Liquid Modernity을 표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에 오늘날을 구분하는 의미에서 ‘현대’를 사용했다고 밝힌다. 윤태준 선생님은 더 단호한데, “‘modern’을 근대로 옮기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라고 말하며 바우만이 가리키는 근대성의 두 국면(Solid와 Liquid)에서 Solid를 가리킬 때만 Modernity는 근대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거다. 따라서 “‘액체’라는 표현은 절대로 ‘근대’라는 단어를 꾸미는 말이 될 수 없다.”라고도 말한다.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회학에서 근대성Modernity이라는 주제는 매우 각별하다. “사회학은 근대성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정의가 있을 정도로. 19세기 이후 근대성을 연구한 사회학은 20세기 중반 이후의 사회를 어떤 근대로 볼 것인지 고민하는데 하버마스는 근대를 미완의 기획으로 보면서 여전히 근대의 자원을 신뢰하고 료타르, 마페졸리, 보드리야르 등은 근대와의 급격한 단절을 설정하면서 국민-국가, 시민사회, 정당, 직업체계, 제도 등의 근대적인 것으로는 더는 사회를 설명할 수 없다고 본다. 이들은 포스트 모더니티 담론으로 분류된다.
 
반면 바우만은 이론은 후기 근대(Late Modenity)로 분류된다. 앞서 설명한 양자와 다르게, 19세기 후반과 20세기 후반 사회의 차이는 긍정하면서도 새로운 국면의 사회가 시작되었다고 보지 않으면서도 이런 문제를 미완의 기획이 아닌 ‘근대성’의 연속선상에서 파악하는 시도를 후기 근대론으로 분류하고, 대표적 학자로는 바우만, 기든스, 울리히 벡 등이 있다. 이들에게 중요한 점은 20세기 후반 사회가 분명 다르긴 하나, 이것이 급격한 단절 속 전례 없는 새로운 근대는 아니라는 거다. 지금 목도하는 사회 역시 이전 근대성의 결과다.
 
이런 근거에 따라 ‘Liquid Modernity’의 번역어는 ‘액체 근대’라고 생각한다. 바우만은 Solid Modernity와 Liquid Modernity의 차이를 이야기하지만, 근대성의 연속 속에서 급격한 단절이 있다거나 사회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고 보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도 포스트 모더니티에 관한 책을 내기도 한다. <액체 근대>(1999) 출판 훨씬 전인 1987년부터에. 하지만 이것은 건축양식, 예술 사조로서의 사상을 전유한 것이지 사회의 변동을 설명한 것은 아니고 자신을 탈근대론자로 분류하는 것에도 반대했다.
 
『액체 근대』가 출간된 후 한 대담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포스트 모더니티라는 어휘 자체가 목욕물(기존 근대에 관한 설명)를 버리며 아기(근대성)를 함께 버리는 것을 피하려 액체 근대를 조어했다고. 포스트 모더니티라는 단어는 근대성 이후를 암시하는 거라고 못 박으면서 말이다.
 

“21세기에 진입한 우리 사회는 20세기에 진입했던 과거 사회 못지 않은 ‘근대성’을 지닌다. 다만 좀 다른 방식의 근대라고 할 수 있겠다.”

지그문트 바우만. 2009. <액체 근대>. 이일수 역. 47p. 

 
모더니티를 현대로 옮길지, 근대로 옮길지는 여전히 합리적인 이견이 존재할 수 있는 사안이다. 더불어 다른 부분은 고려하더라도 여전히 중요한 것은 기존 번역이 좋은 번역이라는 것이고, 바우만의 어려운 논의를 번역하고 출간해주신 이일수, 윤태준 선생님, 그리고 필로소픽, 오월의봄 출판사에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다.
 
참고
김홍중. 2013. “후기근대적 전환.” 『현대사회학이론』. 한국사회학회. 다산출판사.
Bauman, Zygmunt and Tester, Keith. 2001. Conversations with Zygmunt Bauman. Cambridge: Polity Press.
Dawson, Matt. 2010. “Bauman, Beck, Giddens and our understanding of politics in late modernity.” Journal of Power. 3(2). 189–207.
Outhwaite, W. 2009. “Canon Formation in Late 20th-Century British Sociology.” Sociology. 43(6). 1029–1045.
Tester, Keith. 2004. The Social Thought of Zygmunt Bauman. London: Palgrave Macmillan.

 

지그문트 바우만(1925~2017)

보수 개신교에 관한 정교한 분석, <태극기를 흔드는 그리스도인>

2016년 박근혜 탄핵 정국을 거치면서 태극기는 보수 혹은 극우의 상징이 되었다. 그 이전만 하더라도 태극기는 한국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공유하는 상징이었으나, 2016년 박근혜 탄핵을 반대하는 집회와 문재인 정권 이후 문제가 된 태극기 집회의 연속 안에서 태극기는 이른바 태극기 부대와 함께 극우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먼저 이 책, <태극기를 흔드는 그리스도인>은 한국 교회의 보수 혹은 극우 개신교도에 대한 막연하고 추상적인 이해를 넘어 정교한 이래를 목표로 보수/극우 개신교에 대한 정치(精緻)한 분석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매우 다채로운 관점에서 이들을 다루고 있다.

우선 책의 가장 중심이 되는 내용은 보수 개신교인에 대한 사회조사다. 이 집단에 대한 사회조사는 2가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먼저는 ‘표적 집단 면접 조사’로, 태극기 집회에 참여했거나 (지방의 경우) 참여할 의향이 있는 사람을 20대부터 70세 미만까지 30여 명 선정하여 심층 면접을 진행한다. 다음으로는 설문 조사인데, 이 조사는 전국 19세 이상의 개신교인 중 보수적 성향을 가진 570명을 표본으로 진행된다. 이 조사를 중심으로 한 글 두 편이 책의 서두에 자리하고 있다.

이어지는 글은 극우 개신교에 대한 분석과 비평이 중심이다. 최경환 선생님은 공공신학과 교회의 정치에서 공공신학의 관점에서 극우 개신교의 정치 참여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개신교의 정치 참여가 지향해야 할 대안을 제시한다. 송인규 선생님은 ‘극우적 사고’에 초점을 맞춰 극우적 사고가 현실적, 종교적 차원에서 형성되는 과정을 추적하고 이를 복음주의의 관점에서 평가한다.

배덕만 선생님은 교회사학자답게 근본주의와 정치적 극우의 융합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시행한다. 미국의 근본주의와 한국 근본주의 접합, 그리고 한국의 근본주의자의 역사적 궤적을 추적한다. 김지방 선생님은 2000년대 교회의 정치 참여와 2020년의 교회의 정치 참여를 비교하면서 이 차이를 서술하고 한 편으로는 개신교 내부에서 새로운 시각에서 정교분리를 재고해야 함을 지적한다. 김현준 선생님은 호프스태더의 반지성주의 논의에 기대어 한국 개신교 내부에 극우파의 출현을 반지성주의라는 관점에서 분석한다.

이 책은 먼저 다채로운 시각에서 쓰였다는 장점이 있다. 사회학자, 기자, 신학자 등이 필진으로 참여해 다양한 관점에서 이 현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사실 정말 중요한 것은 글 서두에 2편이 다루고 있는 사회조사다. 표적 집단 심층 면접, 그리고 570명을 표본으로 하는 설문 조사는 그 자체로 보수 개신교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여러 측면에서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이들은 무엇 때문에 보수 개신교인으로서 자각이 시작되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게 도와준다. 정보량이 정말 많기에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한다.

사회조사에 대한 아쉬움이라면 심층 면접에 있어서 대졸자가 과잉 대표된 것 같다는 느낌이다. 30여 명 정도의 표본 중, 대졸 미만의 학력을 가진 사람이 4명에 불과했다. 이 부분은 확실히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저렇게 많은 비용이 들어간 사회조사를 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그리고 총 7장 중 4장 정도는 종교의 여부와 관계없이 극우/보수 개신교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읽어도 큰 무리가 없을 내용이고, 이 현상을 종교의 입장에서 다루는 장에서도 현실적 분석이 선행되기 때문에 얻을 정보가 많다는 말씀을 드린다. 책을 읽고 극우/보수 개신교에 대한 이미지가 기존보다는 구체적으로 잡히게 돼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문화 이론과 근대성의 문제, <문화사회학 이론을 향하여>

저번 주에 한 선생님께서 추천 도서를 물어보셔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오랜만에 <문화사회학 이론을 향하여>를 꺼내 읽게 되었다. 이 책은 학부 시절 비교문화론 시간에 교재로 쓰인 책이다. 오랜만에 책을 꺼내고 다시 읽으니 감회가 새롭다.

문화란 무엇인가, 이 문제에 쉽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좁은 의미의 문화는 예술에 국한되기도 하나, 넓은 의미에서는 ‘생활양식의 총체’로 정의되기도 한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문화의 범위를 설정하기보다는 문화의 성격을 규명하는, 문화 이론에 관심을 두는 책이다. 이 책의 원제는 ‘문화 이론과 근대성의 문제’인데 이 책은 ‘문화’, ‘근대성’ 단어만으로만 압도되어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문제를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저자인 앨런 스윈지우드가 문화와 근대성에 대한 이론들을 정리하고 여기에 비판적 논평을 덧붙여 기존 이론의 여러 난점을 극복하고 장점을 아우를 수 있는 문화사회학의 과제를 제시한다.

이 책은 여러 장점이 있다. 우선 이 책은 탁월한 교과서다. 이 책이 아우르는 지적 전통은 매우 다양하다. 마르크스에서 시작되어 그람시, 루카치, 프랑크푸르트 학파, 레이먼드 윌리엄스에 이르는 마르크스주의 문화이론은 물론이고, 베버, 뒤르켐, 짐멜, 파슨스까지의 사회학적 문화이론, 거기에 현대의 문화이론가라고 할 수 있는, 하버마스, 부르디외, 바흐친, 제임슨, 벨 등의 다양한 문화 이론, 근대성 이론을 비판적으로 비교/검토/정리하고 있다.

다음으로 이 책은 문화 이론을 비판적으로 재전유하고 있다. 스윈지우드는 단순히 문화 이론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문화 이론이 가지고 있는 한계, 구체적으로는 환원론을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마르크스주의의 토대와 상부구조 문제는 마르크스조차도, 결정론으로 해석될 때 이 문제에 한해서는 본인도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언급할 정도였는데, 스윈지우드는 이런 환원론의 문제를 베버와 같은 다른 문화사회학의 맥락에서 극복하고자 한다.

결국 스윈지우드는 문화의 복잡한 사회적 맥락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거시와 미시, 구조와 행위, 내부와 외부를 포괄할 종합적이면서도 유연한 사회학적 문화 이론의 구축을 과제로 삼는다. 이 책은 그런 스케일에 걸맞을 정도로 다양한 이론의 비판적 검토를 시도한다.

한 편으로는 영미학자 특유의 이론을 대하는 태도가 묻어나기도 하지만, 그를 감안해도 준수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다루는 이론의 범위도 매우 광범하다. 그리고 한국 사회학 번역에 있어 대체하기 어려운 작업을 하고 계신 박형신 선생님께서 공역하신 책이라 더 믿고 볼 수 있다. 사회학, 문화, 마르크스주의에 관심 있는 분들은 꼭 읽어보실 만한 책이라고 말씀 드린다.

『랭스로 되돌아가다』

디디에 에리봉은 뛰어난 지성사가이자, 사회학자이며 동시에 노동계급의 배경을 지닌 성소수자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랭스로의 귀환: 에리봉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의 고향인 랭스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에게 프랑스의 지방, 랭스는 자신이 잊었던, 잊으려 애썼던 장소로 계급적 모욕과 게이로서 성적 모욕을 당한 장소다. 그는 그곳에서 지금껏 애써 부정하려 했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가족의 역사: 에리봉은 전형적인 노동계급 가족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노동계급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초등학교 졸업장조차 가지고 있지 못하고 있으며, 그의 어머니 역시 그와 비슷하다. 가족 중 유일하게 사회적 상승 궤적에 진입했던 에리봉에게 노동자 가정의 거칠고 투박한 문화는 용인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그는 그렇게 자신을 구성해온 정체성을 무시하며 부르주아의 세계를 열망하고, 그들과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개인을 만들어내는 사회적 환경의 힘을 자각하게 된 지금의 에리봉은 이제 가족의 역사를 들춰보며 자신에게 폭력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마저도 다른 폭력에 의한 삶임을 깨닫게 된다. 당시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했던 그는 관념 속에서 노동자 개념을 이해하기만 했을 뿐 정작 현실의 노동자인 자신의 가족은 부인했던 과거를 회고한다. 실제 노동자인 가족과는 유리된 채, 그는 부르주아로 주체화하기 위해 노동자 개념을 공부했다.

개인의 역사: 가족의 역사를 살펴본 그는 개인의 역사, 즉 자신의 역사로 시선을 돌린다. 그는 부르디외를 경유하며, 자신 역시 분열된 하비투스의 소유자임을 고백한다. 즉, 한편으로 그는 학교의 교육체계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임을 자각하고 이에 격렬하게 대항했고, 한편으로는 교육체계의 교양과 고급스러운 문화를 동경하기도 했다. 부르디외처럼 그 역시 상층계급 문화의 혐오와 동경 사이에 자신의 삶을 만들었음을 회고한다.

“랭스는 내게 모욕의 도시이기도 했다.” 성소수자로서 지방 랭스는 사회적 폭력과 사회적 수치심을 안겨준 장소였다. 그것이 게이로서 그가 랭스를 떠나 파리의 성소수자 커뮤니티에 속하게 한 이유이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을 한계 짓고, 결정지었던 계급 정체성을 다시금 되돌아본다.

노동계급의 가정을 떠나 지식인이 되기로 결심한 그였지만, 그에게 부족한 것은 경제자본뿐 아니라, 그 진로에 필요한 조언 몇 마디마저 부족했다. 지식인 세계에서 한계를 경험했던 그는 당시의 자신을 이렇게 회고하기도 한다. “나는 내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도망쳐 나왔지만, 내 출신에 다시 덜미를 잡힌 셈이었다. 나 자신과 관련해 그동안 부인해온 진실이 다시 떠올랐고, 그것의 법을 강제했다.”

나는 책의 서사를 중심으로 이야기했지만, 에세이 형식을 가진 이 책에는 많은 사회학적 개념이 응축되어 있다. 계급, 정체성, 하비투스, 궤적, 정당성, 계급정치는 물론이고, 역자이신 이상길 선생님이 쓰신 해제 역시 매우 유익하다. 이런 주제나, 사회학에 관심이 독자는 무조건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어제, 이 책을 통해 사회학 고전 독서회를 진행했다. 특별 게스트로는 현재 부르디외 학파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부르디외와 한국 문학장을 주제로 연구하고, 아니 에르노의 대담을 번역하고, 디디에 에리봉의 비판이론에 관한 글을 쓰고 계신 박진수 선생님께서 함께 해주셔서 책의 맥락에 관해 다양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또 모임원 모두 책을 재밌게 읽고 열띤 토론을 이어나갔다. 귀중한 시간이었다.

부르디외는 개인의 사회적 삶과 위치를 인식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했다. 그의 이론에 힘입은 이 사회학적 자기분석은 개인을 위치지우는 사회의 힘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해방을 제공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삶을 결정지은 조건을 보게 함으로써 자신의 삶과 화해를 제공하기도 한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 애써 부정하려 했던 고향으로 되돌아와, 자신을 되돌아본 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책을 끝맺는다.

“나는 왜 그를 이해해보려고 하지 않았던가. 과거에 나는 왜 그와 대화해보려고 하지 않았던가. 사회세계의 폭력이 그를 이겼던 것처럼, 나를 이기도록 내버려두었던 것을 후회했다.”

<왜 잘사는 집 아이들이 공부를 더 잘하나?>

왜 잘사는 집 아이들이 공부를 더 잘할까? 이 질문에 굳이 답이 필요할까? 이 책은 저자 신명호 선생님의 박사 학위 논문을 출판한 책이다. 이 당연한 질문, 당연한 주제를 굳이 다룰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너무 당연하기에 이런 주제를 다룰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잘사는 집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는 건 기정사실인데, 그렇다면 왜 잘하는 걸까? 이걸 경험적으로 보여주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을 단적으로 말하자면, 학업성취의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부모의 교육 관여, 양육관행에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고학력 중산층 가정과 저학력 노동자층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한다. 고학력 중산층 가정의 부모는 자녀에게 끊임없이 학벌주의 가치관을 주입하고, 학업열의를 높이기 위해 일상적으로 의식화를 진행하고, 조기에 공부 습관을 들이고, 각종 생활을 통제하고 학업 전략을 수립해준다. 반면, 저학력 노동자층의 부모는 고학력 중산층 부모와는 상대적으로 낮은 교육열망을 보인다. 덧붙여 교육 관여에 있어서도 무관심에 가까운 양상을 보여준다.

이 책은 학위논문인 만큼 한편으로는 읽기에 딱딱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전에 있었던 학업성적의 결정요인에 관한 설명을 정리해주고, 이 사이에서 교육 관여, 양육관행, 교육열망 등이 학업성취도의 격차를 만들어낸다고 설명하는 부분은 유익했다. 책을 통해서 다양한 이론이 어떻게 교육 불평등을 설명해왔는지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본론에 해당하는 2장, 3장에는 인터뷰가 상당히 많이 들어있다. A의 엄마는 특정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인생이 망한다고 말한다든지, 그런 태도에 불안을 느끼는 학생의 이야기도 담고 있다. 그래서 그냥 재밌게 책을 보고 싶다면, 약간은 학술적인 1장을 건너뛰고 2장부터 읽어도 좋을 것 같다.

그저 잘사는 집 아이들이 공부를 더 잘하는 게 상식일 만큼 당연한 것이 되었지만, 이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제대로 알기도 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사회를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느낀 것 하나는 부모의 경험이 자녀에게 꽤 중요하다는 것이다. 책은 사회복지학 연구답게 정책적 제언도 잊지 않고 있지만, 책을 읽으며 다양한 생각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생존주의 근대성과 <사회학적 파상력>

 

지난 3월 사회학 고전 독서회 3번째 모임을 했다. 모임에서는 사회사상의 전통에 있는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을 토대로 김홍중 선생님의 <사회학적 파상력>에 수록된 7장 “서바이벌 생존주의, 그리고 청년세대”라는 논문을 봤다. 김홍중 선생님은 한국 청년세대의 세대심(世代心)을 생존주의로 규정하는데, 생존주의로 수렴되는 청년세대의 특징은 이들만의 특징이 아닌 한국 근대의 심층에 자리 잡은 생존경쟁으로 귀결되는 사회진화론의 사회적 상상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먼저 사회진화론을 알기 위해 허버트 스펜서를 다루게 됐다. 허버트 스펜서는 사회학사에서 오귀스트 꽁트와 함께 사회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사람이다. 스펜서는 경험과학적인 사회학을 구축하지는 못했지만, 특유의 사고로 후대에 영향을 미친다. 스펜서가 보기에 자연과 사회, 우주를 관통하는 제1원리는 다름 아닌 적자생존의 법칙이었다. 단순한 것이 복잡해지고, 열등한 것이 우등해지고, 그 과정에 적합하지 못한 것은 도태되는, 혹은 도태되어야만 사회가 문명화되는 과정을 상상했다. 이런 그의 생각은 ‘가난한 자’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지는데, 그에게 복지는 도태되어야 할 열등한 자를 살려내는, 즉 진화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이다.

스펜서의 사회사상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고 들불처럼 번졌다. 그의 책은 20세기 이전에만 약 37만 부가 팔렸다고 한다. 그의 사상은 특히 미국의 부유층에게 인기를 얻었고, 우리가 잘 아는 카네기도 스펜서를 초청해 강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스펜서는 미국 사회학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섬너(습속), 쿨리(거울자아)의 사회학을 자극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스펜서를 재평가하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가 우리가 인식하는 것 같은 악마적 사상가가 아니라는 것인데, 스펜서는 자신의 저작에서 충분히 오해를 살만한 표현을 넣었고, 당시 서구에 만연했던 우생학/사회진화론/문명론 등과 조응하며 자유방임, 침략·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스펜서의 사상은 미국, 일본(사회진화론은 social darwinism의 일본 번역어다), 중국을 통해 한국에도 전해졌다. 특히 개화파 지식인, 식민지 지식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미국에서 공부한 서재필, 윤치호, 일본에서 공부한 여러 지식인, 그리고 청(중국)을 통해 량치차오식 사회진화론이 한국에 유입된다. 당시 한 신문에 글을 올린 일본 유학생은 이런 표현을 쓰기도 한다. “이 세상에서 동물계부터 인간세계까지 남을 잡아먹지 못하면 도리어 잡아먹힌다. 우승열패(優勝劣敗) 적자생존은 만고의 정의다.”

제국주의 열강에 비해 너무나 열악한 환경에 있었던 모더니스트는 조선의 비참함 앞에 조선의 미개함과 근대를 이룩한 국가의 우등함을 비교하며 그 상황에 의미를 부여했다. 사회진화론이 독특한 것은 기득권 옹호의 논리임에도 이것이 당시에는 ‘과학’으로 포장되었기에 근대정신으로 지식인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는 것이다. 한국인은 식민지배, 한국전쟁, 군부독재, 냉전체제, IMF 이후 신자유주의화라는 생존을 강제하는 역사 속에서 생존경쟁, 약육강식의 마음을 체화할 수밖에 없었다. 생존은 한국 근대의 트라우마적 기원이 만들어낸 한국의 마음 심층에 자리한 원리가 된다.

그렇게 신자유주의화된 문제공간 속에서 청년세대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존주의 세대’로 변모한다. 생존주의 청년세대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생애과정 전체에서 진행되는 경쟁상황에서 도태·낙오되지 않는 상태가 생존이다. 둘째, 이 생존은 경쟁에서 이겨 그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상황을 연장하는 것이다. 셋째, 경쟁상황에서 서바이벌을 위해 개인은 자신의 모든 잠재적 역량을 자본화하는 자기통치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넷째, 생존은 특별한 성공이 아니라 평범함을 위한 분투다. 이런 진단과 함께 논문은 과연 생물학적 생존 정도로 삶의 의미가 축소된 현재 한국사회는 어떻게 성스러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지 질문하며 글을 마치고 있다.

이철승, <쌀 재난 국가>

화제의 책을 읽었다. 이철승 선생님의 <쌀 재난 국가>는 한국 사회의 현재적 문제의 기원을 찾는 책으로, 한국 사회의 많은 명암이 벼농사 체제에서 기원했음을 주장하는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목표하는 바는 단순히 한국이라는 근대국가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다. 한반도와 쌀이라는 동일한 ‘생태적 환경 공간과 먹거리’를 공유했던 선조의 삶과 오늘날 우리 삶의 패턴의 기저에 있는 공통의 구조에 주목하는 것인데, 이게 바로 벼농사 체제이다.

저자는 밀 농사권 지역과 벼 농사권 지역을 대비해 농업 체제에 따른 사회의 습속 차이를 설명한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집단 협업이 필요하지 않은 밀농사 지역에는 개인주의가 자리 잡고, 집단 협업이 중요한 벼농사 지역에는 집단주의가 자리 잡는다는 이야기다. 저자는 이런 구분 속에서 벼농사 체제가 남긴 7가지 유산을 이야기한다.

첫째, 벼농사 체제는 자연재해에 취약했기 때문에 동아시아 국가는 재난에 대비하는 재난 대비 구휼국가가 되었고 이는 코로나 상황에서도 작동했다. 둘째, 벼농사 체제는 공동생산(품앗이 등)을 위해 작동하는 협업 조직이었다. 이들은 모두의 논에서 공동의 생산을 위해 협력했으며 동시에 같은 노동을 들여도 생산량의 차이가 있었기에 경쟁도 체화했다. 셋째, 이런 집단 협업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 기술 표준화 시스템이 작동한다. 넷째, 벼농사 체제는 마을 단위 협업 시스템을 유지하는 위계 구조인데, 이는 현대의 연공서열제로 이어졌다. 다섯째, 벼농사 체제는 여성 배제의 사회구조로 이어졌다. 여섯째, 벼농사 체제는 선발체계(과거제)와 엮여 시험을 통한 선발 및 신분 상승으로 이어져 현대에는 시험의 숭배, 고용형태 차별로 이어졌다. 일곱째, 벼농사 체제는 땅과 자산에 대한 집착, 씨족 계보·혈연을 중심으로 한 사적 복지체제로 작용했다.

이 책은 이런 분석과 함께 문제의식으로 현재 한국의 불평등의 원인이 벼농사 체제에서 기인했음을 논증하고, 이를 위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에는 여러 장점이 있다. 먼저 책은 단순히 ‘근대국가’ 정도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한국, 또는 동아시아 문명의 기저에 있는 역사학의 교황 브로델의 용어로 ‘장기지속’을 밝혀내는 야심 있는 기획이다. 다음으로 이 책은 매우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생각지도 못한 벼농사에서 현대 한국의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고 있는데, 심지어는 그게 꽤 개연성 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탁월한 생각이라고 느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매우 평이하다. 그러니까 학술적 내용을 담고 있고, 한편으로 학술적 논증을 시도하고 있지만, 일반 독자가 읽고 이해하기에도 큰 문제가 없을 정도로 책이 잘 쓰였다.

하지만 아쉬움이 존재한다. 첫째, 과도한 일반화다. 이 책을 접하기 전 한 인터뷰에서 이철승 선생님은 베버를 호명하며 서양은 농업 생산물이 신과의 계약이기 때문에 한국과 다르다고 설명했는데, 과연 여기서 서양은 구체적으로 어디인가? 러시아와 터키는 서양인가, 아닌가? 1905년의 베버도 개신교 지역 일부를 선정해 연구를 진행했고, 일반화도 하지 않았는데, 지금 시대의 학자가 그 복잡한 양상의 문명을 단순/일반화하는 건 분명한 실수다. 물론 이 책은 동아시아와 한국을 설명하기에 저것과 상관은 없지만, 주제를 설명하는 저자의 태도는 비슷하다.

둘째, 책에는 한국의 벼농사 체제에 대한 1차 자료가 거의 없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도 벼농사가 아닌 지역도 있고, 혹은 농업이 아닌 지역도 있을 텐데, 거기에서도 작동하는 벼농사 체제의 부산물을 저자는 다루지도, 해명하지도 않는다. 벼농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현대에 연결되었는지를 1차 자료를 통해 제대로 논증하지 못하고 있다. 동아시아에 대한 실증도 부족해 보인다.

셋째, 저자가 끌고 오는 브로델은 역사학의 사회과학화로 설명되는 아날학파에 속해 있지만, 저자는 사회학자다. 책에서는 장기지속을 설명하기 위해 벼농사 체제를 고대부터 설명하는데 고대, 중세와 근대 이후의 사회는 아예 다르다. 그래서 지금의 시각에서 고대·중세에 적용해선 안 된다. 사료를 읽는 것부터 적용까지 역사학 방법론이 필요할 텐데 저자는 그 역시 제대로 다루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이 책은 문제 제기에 의의가 있다고 본다. 아직 이 책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이건 이 정도의 분량으로 해명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철승 선생님의 후속 작업을 기대하는 마음이며, 책은 매우 흥미롭다.

뒤르켐 이후, <자살의 사회학>

1. 마르치오 바르발리: 책의 저자 마르치오 바르발리는 피렌체, 볼로냐 등의 대학에서 공부한 이탈리아 사회학자다. 이탈리아어를 할 수 없어 접근하기 어렵지만, 그는 사회학 기초 과목의 교재를 작성한 학자이며, 저자 정보에 의하면, <이탈리아의 섹슈얼리티>라는 작업을 통해 반향을 일으켰고, 이 책 <세상과의 작별: 동서양의 자살(원제: Congedarsi dal mondo: Il suicidio in Occidente e in Oriente)>을 통해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탈리아 사회학자의 책이 번역되었다고 해서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중역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파레토 법칙의 파레토나, 지니계수의 지니는 이탈리아의 사회학자인데, 이탈리아의 사회학 역시 한국에 제대로 번역되어 한국 사회학의 기초가 튼튼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2. 뒤르켐 이후: 뒤르켐 <자살론>은 자살 연구의 준거가 되었다. 이 책은 뒤르켐부터 시작된다. 뒤르켐의 핵심은 사회의 통합과 규범에 있다. 통합이 적을 때 이기적 자살이, 과잉일 때 이타적 자살이, 규범이 없을 때 아노미적 자살이, 과도할 때 숙명적 자살이 발생한다. 하지만 그 연구는 개념 정의, 데이터의 측면에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뒤르켐은 죽었고 사회는 변했다. 뒤르켐은 개인의 종속이 약해지면서 이타적 자살이 드물어질 것이라고 보았고, 또 경제성장과 불황을 거듭하며 이기적·아노미적 자살이 크게 증가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정반대의 상황이 발생한다. 비서구권에서 이타적 자살이 중요성을 갖게 되고(예를 들면, 종교집단에서의 테러나 순교 등), 서유럽의 자살률을 꾸준히 감소했기 때문이다.

3. 한계: 바르발리가 보기에 뒤르켐은 유럽의 위기를 가정하고, 사회학이 학문으로서 인정받길 바라는 마음 때문에, 자살을 사회 위기의 징후로 파악하고, 또 다른 학문의 기여를 과소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바르발리는 뒤르켐의 한계 속에서 자살 빈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문화적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인지 도식, 분류 체계, 믿음과 규범, 의미와 상징 등으로 구성된다.

4. 뒤르켐의 자살 연구를 준거로 삼아 <자살의 사회학>은 뒤르켐 연구의 한계를 드러내고, 뒤르켐 이후 진행된 사회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경험적으로 자살의 사회학을 전개한다. 이 책 1부는 이른바 ‘서구사회’에서의 자살의 역사적 변동을 다룬다. 서구사회에서의 자살률의 변화와 그 기반에 있는 복잡한 규칙, 믿음, 해석 유형, 상징 등을 분석한다. 2부에서는 아시아와 중동지역을 다룬다. 아시아와 중동의 자살은 뒤르켐의 연구에서도 다루지 못한 것인데, 인도와 중국 등은 중심으로 자살과 연계된 문화적 레퍼토리를 분석한다. 아마도 뒤르켐이 후 가장 포괄적인 자살에 관한 사회학적 접근이 아닐까 한다. 책을 자세히 소개하지는 못하지만, 책은 뒤르켐의 한계를 적절하게 지적하고, 변화된 사회의 양상과 그에 대한 분석을 흥미롭게 풀어내고 있다.

5. 고전의 의미: 종종 철학과를 다니던 친구에게 농담으로 플라톤·아리스텔레스 같이 만물이 물, 불, 흙, 공기로 이루어졌다는 원시인 이야기를 뭘 배우냐고 농담하곤 했다. 그렇듯, 고전의 반열에 있는 책은 지금의 기준에서는 한계적인 도구와 재료로 쓰였기에 오류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저번 포스팅에서도 말했듯, 고전의 의미는 그것의 정답을 가르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당시의 시대적 맥락에서 구성된 방법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그에 준거해 이렇게 훌륭하게 비판하는 작업물 역시 고전을 비추는 빛이라 생각한다.

에밀 뒤르켐, <자살론>

1. 뒤르켐: 1858년 프랑스 에삐날에서 태어났다. 그의 원래 이름은 다비드-에밀 뒤르켐인데, 뒤르켐은 대대로 엄격한 유대교 집안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 역시 랍비였다. 뒤르켐도 가업을 이어 랍비가 되고자 했으나, 중학생 때 겪은 체험과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 불가지론자가 된다. 그러나 유년 시절의 강력한 종교 체험은 그의 인생에 중요한 테마로 잔존했다. 그는 보불전쟁에서 패배하고, 제3공화국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청년기를 보냈고, 그의 궁극적 목표는 프랑스 사회의 혼란을 잠재울 새로운 도덕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2. 사회학의 태동: 뒤르켐은 박사학위 논문 <사회분업론>을 통해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행되었음에도 어떻게 연대가 가능한지, 그리고 우리가 사는 분업 사회의 본질은 무엇인지를 분석하고, <사회학적 방법의 규칙들>을 통해서 새롭게 태동한 사회학은 어떤 고유의 인식대상과 방법론으로 연구해야 하는지를 밝히고 있다. 유기적 연대라는 시대 규정과 사회학적 방법, 규칙이라는 틀 속에서 뒤르켐이 먼저 연구한 것은 ‘자살’이라는 ‘사회적 사실’이었다. 뒤르켐은 <자살론> 서문에서 사회학이란 현실의 시급한 문제를 다루면서 이것을 실증적/경험 과학적으로 다룸으로써 문제해결에 기여하는, 문제해결의 과학이다.

“사회학자는 사회적 테마를 형이상학적으로 고찰하는 데 머물지 말고 명확하게 규정된 사실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이 사실은 쉽게 정의할 수 있고 분명한 한계가 있어야 하며, 사회학자는 여기에 엄격하게 집중해야 한다.” 10p.

3. 사회라는 힘: 뒤르켐은 자살을 설명했던 기존의 이론인 정신질환, 심리학, 환경적 요인, 모방 등의 주제를 다루며 통계를 통해 이런 설명에 반박한다. 뒤르켐이 주목한 것은 정신병리적인 것도, 생물학적인 것도, 심리적인 것도, 환경적인 것도, 모방도 아닌 ‘사회적인 것’의 힘이었다. 뒤르켐은 사회적인 것으로서 사회적 사실, 그것이 강제해내는 사회의 힘을 보았다. 사회적 사실이란 “개인에 외재하며 개인을 통제하는 강제력을 갖는 행위·사고·감정의 방식”으로 구성된다. 뒤르켐에게 사회란 “사회는 우리를 사회에 적합한 모습으로 만들며 종교적, 정치적, 도덕적 신념을 주입하고 이 신념은 우리의 행동을 통제”하는 것이다. 뒤르켐의 개인적인 것으로 치부되던 자살에 사회적 원인을 과학적이고, 실증적으로 부여한 최초의 인물일 것이다.

4. 자살의 유형학: 사회적 사실을 사회적 사실을 통해 설명해야 한다는 정식 속에서 뒤르켐은 자살을 유형화한다. 뒤르켐은 사회와 개인의 통합이 약화 되었을 때 나타나는 자살을 ‘이기적 자살’로 규정하는데, 사회 통합이 강한 가톨릭 지역보다 개신교 지역의 자살률이 높은 것이 예다. 반대로 개인이 사회에 과잉 통합되었을 때 나타나는 자살이 ‘이타적 자살’인데, 원시사회에서의 ‘순장’ 같은 사례를 들 수 있다. 뒤르켐이 가장 중요하게 다루었던 자살은 ‘아노미적 자살’이다. 아노미적 자살은 사회적 규제·규범이 적을 때 나타나는 자살로, 개인의 기대와 그것에 대한 만족 사이의 불균형 때문에 일어나는 자살이다. 급변한 사회는 자살의 원인을 제공하는데, 아노미적 자살은 개인의 기대와 욕망에 현실적인 제한을 강요하는 규칙이 무너질 때 발생한다. 이런 무규범의 상태에서 개인은 허무에 빠져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아노미적 자살과 반대로 나타나는 게 ‘숙명적 자살’인데, 이는 지나친 규제에 의한 자살로 강압적인 규율에 의해 미래가 무자비하게 제한되고 욕망이 난폭하게 제압당한 사람의 자살이다.

5. 뒤르켐의 <자살론>은 후대 사회학과 일반 학문에 큰 영향을 행사했다. 자살에만 한정한다면 뒤르켐 이후 자살 연구는 자살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원인을 다각적으로 탐구하게 되었다. 이는 사회학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여전히 고전이지만, 시대적 한계를 가지고 있는 책이다. 모든 고전이 그렇듯, 고전의 효과는 고전의 작가가 내놓은 해답이 오늘날에도 유효해서가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맥락에서 그 사람이 어떤 문제 의식을 가지고, 그가 가진 제한된 자료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작업을 구축했는지, 그 발견의 감각을 익히는 게 중요하다. 다음에는 뒤르켐의 테제를 비판하고 현대적으로 적용한 책을 소개할 생각이다.

여전히 기독교 서적을 보는 이유

사진은 예전에 처분한 기독교 관련 서적들, 책장 한 면을 차지할 정도로 책이 많았고, 사실 지금도 많다. 내가 산 것도 많았지만, 무교회주의자 교수님께서 주신 신학 및 성서 주석도 아직 상당하다. 몇백 권은 처분했는데, 아직도 몇백 권이 남았다. 한때 신학 덕질을 꽤 과하게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으면 정말 평생 공부 안 했을 영역이다. 교양으로서든, 지식으로서든 기독교를 공부하는 것은 굉장히 큰 도움이다. 서구 정신의 한 원형이기 때문이다. 나는 정통 기독교의 교리에 동의하지 않고, 기독교인도 아니지만, 기독교와 연관이 없다고 그 모든 전통을 등한시하는 것은 손해라고 생각한다.

내가 크게 관심 있는 주제는 그런 거다. “신정론과 근대성”, “구원/종말과 사회적 행위”, “기독교의 지식사회학” 같은 것들. 이런 주제는 이미 여러 사회학자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했고, 나는 사회학 이론의 가장 깊은 자리에는 ‘종교’가 있다고 생각한다.

신정론과 근대성: 신정론에 관해서는 여러 번 이야기했다. 신정론이란 전능하고도 정의로운 신과 그가 주관하는 세계의 비참과 고통의 역설을 설명하는 신학의 영역으로 신이 주관하는 세계에 정당하지 않은 고통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신정론에 관한 이해는 사회학의 핵심주제인 ‘근대성’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전통사회는 최종심급으로서 신과 종교적인 것으로 세계의 역설을 설명했다. 하지만 인간은 알 수 없는 고통을 이로써 더는 납득하지 못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1755년 리스본 대지진이다. 천주교 최고의 축일인 만성절에 일어난, 예배를 드리던 무죄한 자들에게 들이닥친 죽음과 비참,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전능한 신의 침묵, 그리고 인간 성취의 하릴없음은 신의 의로움과 인간 존재의 근본을 묻기에 충분했다. 아도르노가 지적하듯, 리스본 대지진은 볼테르에게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이라는 병을 제거하기 충분했다. 나는 이런 역설을 설명하는 데 전통 종교가 실패하면서 이를 합리성이 대체했고, 이로 인해 근대성의 맹아가 움텄다고 생각한다.

구원/종말과 사회적 행위: 기독교 전통적 교리의 주제 중에 내게 중요한 건 구원론과 종말론이다. 구원과 종말이 종교인의 사회적 행위/실천을 만들어내는 데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코로나와 함께 우리가 목도한 바와 같이 특정 종교집단의 행위, 그러니까 이런 시국에 몇백 명이 모여 집회를 하고 집단감염이 이루어지고, 또 그걸 조직적으로 은폐하는 행위의 근원에는 그들 특유의 구원/종말에 관한 인식이 자리한다. 그들은 이 세상의 종말이 임박해 있다. 당장 내일이라도 이 세상의 종말이 올 수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코로나에 걸리지 않아 정상적인 삶을 오랫동안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당장 언제 올지도 모르는 종말을 염두에 두고, 그에 긴박되어 그 불안 속에서 종교적 행위를 극단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종말 교리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행위다.

기독교의 지식사회학: 지식사회학이란 지식과 사회의 관계를 탐구하는 분야인데, “우리의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마르크스의 경전 같은 말이 이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니까 마르크스는 의식이 자유로운 무엇이 아닌, 계급에 의해 제한되는 무엇으로 보았던 것인데, 이는 기독교의 영역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우리는 잘 알지 못하지만, 중남미 아메리카의 근대사는 폭력의 역사이기도 한데, 이런 상황에서 움튼 것이 바로 마르크스주의와 함께 만들어진 ‘해방신학’이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설명할 신을 필요로 했고, ‘마르크스주의’를 접목해 신학을 만들어낸다. 기독교는 이렇게 탐구할 수도 있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종교가 사회를 이해하는 데 여전히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기독교를 여전히 읽고 공부한다. 한편으로 나는 성경에 나온 예언자나 예수의 말을 윤리적으로 존중하는 편이고, 이를 통해 내 삶의 일부가 형성되었다는 것도 정직하게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기독교를 공부하며 정신적으로 고양되는 것이 있다. 한편으로 나는 기독교인 중에 신과 함께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이끌며 사랑을 실천하는 분을 여전히 존경하기도 한다. 이것이 기독교에 관한 내 솔직한 입장이다.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오해와 진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하 신교 논문)은 사회학사와 인류 지성사에 있어 기념비적 작품이다. 이 책은 출간 이후 숱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러한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이 책은 명성만큼 크게 오독된 책이기도 하다. 베버는 우리가 흔히 아는 이 책을 두 편의 논문으로 작성한 것이고, 이후 논쟁 속에서 책의 내용과 자신의 주장에 대해 끊임없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이 책을 오독한 대부분은 제대로 베버를 공부하지 않고 책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해 1. 근대 자본주의는 칼뱅주의가 만들어냈다: 보통 많은 사람이 이렇게 도식적으로 이 책을 이해하곤 한다. 근대 자본주의는 칼뱅주의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베버가 이 책에서 실제로 논증하고 싶었던 것은 칼뱅주의와 자본주의의 기계적인 일대일 인과관계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구성 요소 중 하나인 ‘자본주의 정신’의 다양한 인과 요소 중 하나로 칼뱅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베버는 이 책의 연구대상인 사회/국가에서만 자본주의가 생겨났다고 하지도, 자본주의 정신이 칼뱅주의에서만 도출될 수 있다고 하지도 않았다.

오해 2. 베버는 이 책을 통해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싸우는 관념론자이다: 이 오해는 이 책보다 유명한 것 같다. 우선 베버(1864년 생)는 마르크스(1818년 생)가 중년일 때 태어났다. 베버와 마르크스는 동시대의 지식인은 아니었다. 베버는 마르크스의 『자본』을 발전된 과학의 업적으로 생각했으며, 동시에 이 시대 지성의 대부분이 마르크스와 니체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정직하지 못하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베버는 마르크스가 아닌 동시대의 지식사회에서 발생한 문제의식으로 이 책을 집필했고, 스스로가 생각 이상으로 유물론적임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물론 베버가 마르크스의 모든 걸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에 반대했다.

오해 3. 미국의 자본주의 발전에 감동해서 쓴 글이다: 베버는 1904년 미국에 다녀온다. 이 신교 논문은 1904, 1905년 두 해에 걸쳐나온 두 논문의 모음인데, 베버는 미국에 가기 전에 이미 1부의 원고를 투고한 상태였고, 2부는 미국에 다녀온 지 6개월 만에 출간됐다. 이 논문은 이미 미국 여행과는 상관없이 작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베버도 각주에 2번 정도 미국을 언급할 뿐이다. 다만 이후에 베버는 미국에서의 경험과 관련된 논문을 두 편정도 작성한다.

오해 4. 베버의 가족사가 연구에 영향을 미쳤다: 이 오해는 앞선 오해보다는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베버의 가족사를 알아야 하기 때문인데, 베버의 아버지는 방탕한 삶을 살던 부르주아였고, 어머니는 경건하고 엄격한 칼뱅주의자였다. 이런 개인적 영향으로 이 책이 쓰였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결정적으로 베버의 어머니는 근대 자본주의의 담지자 집단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주장은 설명력을 가질 수 없다. 베버의 어머니는 근대적 직업노동을 수행하던 시민계층이 아니다. 그것보다 베버는 당시 독일 지성계의 에버하르트 고트하인, 베르너 좀바르트, 게오르그 짐멜, 게오르그 옐리네크, 에른스트 트뢸치 등과의 교류 및 논쟁을 통해 문제의식을 형성시켜 작업했다는 것이 더 타당하다.

베버는 보통 이런 유치한 오해를 통해 소개된다. 이 책이 고난도이기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베버에 대한 한국어로 된 제대로 된 자료가 없었던 점에서도 일부 면죄부를 줄 수 있겠지만 이 책이 김덕영 선생님에 의해 제대로 번역된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그 이후에도 어떠한 갱신이 없다는 것은 지적으로 게으르다는 방증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을 땐, 가격이 부담되면 다른 번역본을 보더라도 가능하면 함께 김덕영 선생님이 쓰신 해제를 참고하라고 하는 편이다. 특히 우리가 아는 것과 달리 베버는 열린 사람이었다. 그는 학문의 목적이 끊임없는 진보임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학적 작업 역시 ‘탈주술화’될 것이며,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베버와 그의 사회학적 유산이 한국에 제대로 자리 잡길 바라고, 이를 기반으로 제대로 된 논의가 시작되길 바랄 뿐이다.

이 글은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도서출판 길, 2010에 실린 김덕영의 해제를 통해 작성되었다.

사회학자 김덕영과 막스 베버의 사진(출처: 경향신문)

김덕영, 『막스 베버』

“이미 명백해진 사실이지만 다음과 같은 말을 확실히 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즉 ‘베버의 업적은 사회과학의 역사 속에서 중요한 이정표다.’ 사회학은 베버 이전과 이후로 나뉠 수 있을 정도다. 당대의 사회학은 물론 현대사회학도 모두 그의 재능에 도움을 받고 있다.”
- 루이스 코저(Lewis Coser)

“내가 보기에는 막스 베버야말로 사회학자 중 가장 위대한 사회학자이며, 심지어 나는 그야말로 ‘진정한’ ‘유일한’ 사회학자라고 말하고 싶다.”
- 레이몽 아롱(Raymond Aron)

사회학, 그중에서도 사회학 이론을 공부하는 것은 과장을 보태 막스 베버를 공부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아직도 걸음마가 서툰 내가 이제 아장아장 사회학도로서 걷기 시작할 때, 어떤 사회학자를 공부하든, ‘막스 베버’로 수렴되곤 했다. 앞에 언급한, 코저나 아롱의 언급이 과하지 않을 정도로 베버는 언제나 대문자 사회학자, 단 한 명의 사회학자였다.

한국의 독서계와 지성계에서도 여전히 중심의 지위에는 철학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의 하늘을 수놓는 수많은 별 사이에서, 사회학에는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아우구스티누스도, 아퀴나스도, 칸트도, 헤겔도, 후설도, 하이데거도 없고, 사회학과 철학을 비교하는 자체가 꽤 부끄러운 일이지만, 시대적 근본 규정이라는 점을 비교할 때 사회학에는 뒤르켐과 베버가 또 루만과 부르디외가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특별히 여전히 ‘우리 시대의 사회학자’라고 할 수 있는 루만과 부르디외 역시 베버의 작업에 크게 빚지고 있다.

김덕영 선생님이 쓰신 『막스 베버』는 한국어로 쓰인 막스 베버 개론서이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듯, 1,000페이지 만으로는 도저히 베버의 지적 세계를 감당할 수 없었지만, 아마 한국어로 쓰인 베버에 관한 텍스트 중에 이와 비견될 만한 책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범위를 제한하자면, 연구서로서 전성우 선생님이 저술하신 『막스 베버 사회학』정도뿐이다.

이제 내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던 때, 아무것도 쌓인 것이 없어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도 모르겠던 시절, 김덕영 선생님의 『막스 베버』는 등대와 같은 책이었고, 한 번도 이 책을 보면서 후회한 적이 없다. 이 정도로 베버를 깊이 이해하면서, 한편으로는 베버의 세계를 망라하는, 그러면서도 비교적 쉽고 적확한 서술을 특징으로 하는 책이 한국어로 쓰였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내일부터는 김덕영 선생님과 사회이론강좌 나비를 통해 막스 베버 공부를 시작한다. 선생님 책을 본지 적어도 5년 정도는 되었던 시점, 2020년 4월 28일에 선생님과 처음으로 오랜 이야기를 나눌 자리가 마련되었다. 나는 내가 가진 20권도 넘는 김덕영 선생님 저작 중에 단 두 권, 『막스 베버』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들고 갔다. 이 책은 그만큼 내게 의미 있는 책이다. 더불어 현대 사회학은 물론이고, 우리가 사는 세계를 설명하는 데 큰 빚을 지고 있는, 사회학을 넘어 지성사의 거인인 베버에게 관심이 있는 분들께 이 책은 보물과 같으며, 베버에게 이르는 가장 신뢰할 만한 또 가장 바른 길임을 말씀드린다.

 

베버를 공부하면서 드는 의문들이 거의 모두 이 책을 통해 해결된다. 선생님께 감사드릴 따름이다.

김덕영의 『에밀 뒤르케임』

2월에 있을 사회학 고전 독서회를 위해 뒤르켐에 관한 저서를 읽고 있습니다. 가장 처음 읽은 책이 이 책, 『에밀 뒤르케임』입니다. 사회학 고전 독서회 2월의 책이 에밀 뒤르켐의 『자살』인데, 아무래도 모임의 목적이 사회학 고전과 그에 관한 맥락을 비교적 깊게 다루는 것이다보니 이것저것 봐야 할 자료가 많습니다. 저번 모임에서는 70쪽 남짓한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가지고 12페이지 정도의 발제문을 만들었는데, 이번에는 600쪽 정도 되는 책이라 읽고 공부할 게 많습니다. 어쨌든 모임의 목표 중 하나가 제가 게으르지 않게 공부하는 것이기도 한데, 그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에밀 뒤르켐은 막스 베버와 함께 사회학을 제대로 된 학문으로 정초한 학자입니다. 아마도 사회학의 역사에서 두 사람을 꼽으라면 예외 없이 뒤르켐과 베버를 꼽지 않을까 싶습니다. 뒤르켐은 그만큼 사회학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하지만 인문사회 분야 모든 사상가가 그렇듯 뒤르켐에 관한 자료 역시 매우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베버는 그래도 연구자가 여럿 계시고, 또 한 분이 압도적인 생산력을 보여주셔서 비교적 괜찮은 반면, 뒤르켐은 더욱 부족하죠.

그래서 뒤르켐은 꼭 한 번 공부해야 할 사상가이면서도, 자료가 많지 않기에 공부하기 너무 어려운 사상가이기도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2019년에 치유할 수 없는 베버주의자, 김덕영 선생님을 통해 『에밀 뒤르케임 사회실재론』이라는 뒤르켐 사상의 전반을 다루는 개론서가 나옵니다.

이 책은 뒤르켐 사상의 전반을 평이하게 다루고 있습니가. 뒤르켐의 생애부터, 그의 4대 저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분업론>, <사회학적 방법의 규칙들>, <자살론>, <종교생활의 원초적 형태들>을 중심으로 한 뒤르켐의 주요 주제부터, 지식사회학적 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 <분류의 원시적 형태들>이나 정치사회학까지 충실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좋은 개론서이자, 연구서라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 이 책이 지니는 차이는 이런 것들입니다. 뒤르켐을 프랑스 특유의 실증철학과 데카르트주의를 창조적으로 종합해 합리주의적 실증주의 사회학을 창안한 인물로 평가하거나, 뒤르켐의 개인 숭배 문제를 통해 한국 사회에 성찰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이 책은 <김덕영의 사회학 이론 시리즈 01>이라는 넘버링을 하고 있습니다. 단적으로 김덕영 선생님은 한국의 사회학 이론 구축, 한국 사회에서의 국가의 해체와 개인의 탄생이라는 두 가지 문제의식 속에서 학술작업을 이어가고 계시는데, 이 책은 그 두 가지 문제의식 속에서 만들어진 책이라는 것을 알고 보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뒤르켐은 독특한 사상가이기도 합니다. 개인에게 외재하지만, 개인을 구속하는 사회의 구속력을 강조하면서도 개인을 옹호한 사상가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김덕영 선생님은 문제의식에 맞게 그 부분을 설명하는 데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십니다. 사회학을 공부하는 분과 또 사회학에 관심 있는 독자께서 두루 읽으실 좋은 책입니다.

현대 사회이론의 다양한 맥락들, <오늘의 사회이론가들>

사회이론은 사회를 설명한다. 사회학의 장은 각기 다른 관점에서 사회를 설명하고 그 설명의 실효성과 정확성을 걸고 싸우는 일종의 각축장인데, 이 싸움에서 언제나 어떤 이론은 승리하고 어떤 이론은 패배한다. 이런 각축에서 승리하는 자들은 보통 ‘대가’의 위치를 선점하며, 사회이론이 교과서에 오르게 된다. 대가의 위치를 점하는 싸움에서는 이론의 내재적 힘뿐만 아니라, 이론 외적 요소 역시 중요하게 작용한다.

코로나19 이후, 기존의 사회이론에 대한 반성이 시작되었다. 공동체, 모임, 사회성, 친교 등의 긍정적 가치는 부정적 가치로 변모되었으며, 언택트의 사회성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사회가 바뀌면 당연히 사회를 설명하는 이론도 변해야 한다. 사회가 그것을 강제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백신과 치료제의 개발로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과거의 생활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만.

이 책, <오늘의 사회이론가>는 18명의 공동 저자가 참여한 저작으로 16명의 사상가를 다루고 있다. 큰 주제로 이 책은 1부 탈산업사회, 자본주의 세계체계, 2부 네트워크, 위험, 유동성, 3부 개인, 합리성, 소비, 4부 신화, 상징, 실재, 5부 몸, 일상, 감정으로 구성되어있고, 이 책에서 다루는 구체적 사회이론가는 다음과 같다. 다니엘 벨(탈산업사회)부터 리처드 세넷(자본주의와 불평등), 이매뉴얼 월러스틴(세계체계론), 마누엘 카스텔(네트워크 사회), 울리히 벡(위험사회), 지그문트 바우만(유동하는 근대), 니클라스 루만(체계이론), 제임스 콜만(합리적 선택이론), 레이몽 부동(일상적 합리성 이론), 조지 리처(맥도날드화), 질베르 뒤랑(신화방법론), 로버트 벨라(종교사회학), 피터 버거(실재의 사회적 구성), 도나 해러웨이(사이보그 페미니즘), 앨리 혹실드(감정노동), 에바 일루즈(감정 자본주의)까지.

이 책의 제목은 ‘오늘의 사회이론가’를 호명하고 있지만, 사실 여기에서 다루는 이론가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미 타계했거나, 한 분야의 권위자를 넘어 지긋한 시절을 보내고 있는 이론가가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이 책이 사회이론의 최신을 다루는 책은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하고 싶다. 하지만, 이 책의 가치는 이론이 척박한 한국 사회의 풍토에서 지금껏 사회학의 정전(canon)에 가려 쉽게 접하지 못했던 사회이론가의 사상을 접하는 데에 있다. 서두에 코로나19의 상황을 언급했기에 이 책이 지금 사회에 해답을 주는 이론으로 가득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 나온 이론은 대부분 20년 이상의 시차를 갖는 이론이다. 그런데도 이 책에서 다루는 이론가와 사상은 하나하나 적실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까닭에 더욱더 다양하게 사회를 조망하고 싶은 분들께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 중 하나는 내용이 굉장히 단단하다는 것이다. 18명의 필진이 참여했기 때문에, 한 사상가도 허투루 다루지 않고 사상가의 핵심을 밀도 있게 서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평소에 쉽게 접하기도, 또 일정 수준 이상으로 접하기도 어려운 다양한 사회이론가를 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가치가 있는 책이고, 사회를 보는 다양한 관점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진지하게 추천할 만큼 질을 담보할 수 있는 책이다. 나의 경우에는 몸, 일상, 감정을 주제로 다소 생경한 이론을 다룬 5부가 특히 흥미롭기도 했고, 이렇게 정리된 정보를 처음 접했기에 큰 도움도 되었다.

<쉽게 읽는 루만>

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은 결코 쉽게 읽을 수 없는 이론가이다. 그는 경제, 과학, 법, 예술, 정치, 교육, 종교 등으로 복잡하게 분화된 사회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거대 이론, 일반 이론을 구축하기에 힘쓴 사회학자로, 시스템·체계이론이 주는 경직적인 느낌, 보수주의적 혐의 때문에 대중적으로 알려진 이론가는 아니지만, 독일 사회학에서는 이미 일반 문법으로 자리한 학자이다.

“칸트의 가면을 쓴 니체”라는 한 선생님의 평가처럼, 그는 정치하고 정직하지만 한 편으로는 급진적이고 전복적인 이론가이다. 그는 플라톤에서부터 내려오는 유구한 서구의 존재론과 형이상학, 서구 근대의 주체 중심의 인식론과 계몽이라는 전통적 인식을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사이버네틱스, 인지생물학, 현상학 등의 여러 분과 학문의 성과를 사회학 이론에 포함하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이론을 구축한다.

루만에게 현대사회는 어떤 중심도, 정점도, 위계도 없는 하나의 복잡계로 인식된다. 복잡한 사회를 인식하고 이를 토대로 학문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복잡한 사회 이론이 요구된다. 사회를 설명했던 기존의 이론들, 계몽주의 철학, 근대 자연과학, 헤겔의 가족-시민사회-국가 도식, 맑스의 토대와 상부구조, 그람시의 국가-경제-시민사회 도식, 하버마스의 체계-생활세계의 도식 등은 루만에게 있어 더는 설명력을 갖지 않는 구(舊)유럽적 사고방식이기에 그는 이와의 단호한 결별을 선언한다. 그는 서구의 계몽이라는 미몽을 ‘계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계몽의 계몽’인 것이다.

루만은 복잡성이 점증하는 현대사회가 다면적이고, 예측 불가해졌음을 지적하며 복잡한 현대사회를 포착하고 설명할 이론으로 ‘체계이론’을 주창한다. 루만의 체계이론은 급진적 구성주의, 자동생산 체계이론, 인간 없는 사회 이론을 기본으로 한다. 그의 기획에 따르면, 사회는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으로 이루어져 있고, 커뮤니케이션이 발생할 때마다 현재화되는 사회적 체계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회는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껏 쓴 이야기는 루만에 관한 알맹이라기보다는, 루만에 대한 두서없는 사전정보에 가깝다. 이 책, <쉽게 읽는 루만>은 국내에 출간된 루만 입문서 중에는 가장 친절한 책으로, 루만의 생애와 인식론, 그리고 체계이론 일반과 사회적 체계 등의 아주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개념부터, 이런 기본 이론을 기반으로 매스미디어에 이를 적용시키는 실질적 분석도 함께 담고 있는 책이다. 루만의 이론은 그 추상성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는데, 이 책은 추상적 이론과 실질적 분석을 모두 담고 있기에 더욱더 좋은 입문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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