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철호 교수의 인간의 본격적인 서평에 들어가기 앞서, 신학 책을 사랑하는 독자로서 느끼는 두 가지 문제의식을 공유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로는 한국에 한정했을 때, 그동안 한국에 출판된 책들 중에 인간을 주제로 다룬 신학서적이 다른 주제를 다룬 신학서적에 비해 현저하게 적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기독교 신학에서 다룰 인간이라는 주제는 다른 신학의 주제들인 신, 그리스도, 성령과 같은 주제에 비해 현대과학과 문명의 발달, 분과학문의 발달로 인해 가히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조직신학에는 다양한 주제들이 존재한다. 전통적으로 다루어지는 주제들에는 보통 신론과 인간론 또는 인죄론, 그리스도론, 성령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의 내용이 존재한다. 이렇게 다양한 주제들 가운데서도 어쩌면 가장 외면당한 주제는 이 책 윤철호 교수의 인간이 다루는 인간론 또는 인죄론이라고 불리는 주제일 것이다. 한국의 상황에 한정했을 때, 신론, 그리스도론, 성령론, 교회론 등의 조직신학 주제들을 다루는 책들은 이미 다양한 신학적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서적들, 여러 양질의 번역서들, 한국학자들에 의해 쓰인 학술적 서적들이 존재한다. 그에 반해 인간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이해를 다룬 책들은 다른 조직신학 주제들에 비해 너무 적다. 또 다루는 책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부 “-주의를 표방하는 일부 신학적 입장을 대변할 뿐이라, 풍성한 논의를 얻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근대 이후의 과학의 발전과 분과학문의 발달로 인해 고전적인 학문들은 혁명적인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 신학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다양한 주제들 중에서도 아마 인간에 관한 이해가 가장 혁명적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과학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으며 이러한 충격은 신학뿐만 아니라 근대 이후의 학문인 사회과학 같은 분과학문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생물학에서는 이미 유전자를 통해 인간 개인의 행위를 설명하고 진화의 메커니즘을 통해 인간의 집단행위에 대한 설명도 시도하고 있다. 이것은 사회과학의 역할까지 과학이 담당하게 될 수 있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또 사회과학 내에서도 반() 과학이라는 평가를 받고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에 한 발씩 걸치고 있는 심리학의 인간 이해 또한 괄목할 발전을 이루어왔다. 이러한 과학과 분과학문들의 혁명적 발전으로 인한 도전에 성서 텍스트에서 이해를 시작하는 신학의 인간 이해는 어떤 응전을 펼칠 수 있을까?

 

이런 문제의식에 답할 수 있는 기독교적 응답, 또는 응전이 윤철호 교수의 인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책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 중인 윤철호 교수의 저작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를 전방위적으로 풀어나간다. 이 책은 종적으로나 횡적으로나 굉장히 포괄적인 서술을 특징으로 한다. 이 책은 우선 현대와 최신의 인간에 대한 논의뿐 아니라 성서와 기독교의 전통에서 나타난 고전적인 인간 이해를 1부에서 충실히 다룬다는 의미에서 종적으로 포괄적이고, 다음으로 이 책은 신학적 스펙트럼에 있어서 다양한 전통들을 다루고 있으며, 동시에 학제적 연구에 있어서도 다양한 분과학문을 다루어 논의를 진전시킨다는 의미에서 횡적으로 포괄적이다. 앞선 문장에 대해 조금 더 상술하자면, 이 책은 고전 신학의 관점을 다룰 때도 희랍철학에 있어서의 인간론을 배제하지 않으며 동시에 책의 2부인 현대신학의 인간론을 다룰 때도 칼 바르트, 판넨베르크, 폴 틸리히와 같은 대가들과 함께 기독교 윤리가로 분류할 수 있는 라인홀드 니버나 비교적 현대의 학자들인 스탠리 그렌츠와 개혁주의 전통의 마이클 호튼도 다루고 있다. 더불어서 이 책은 3부 학제적 관점에서 진화론·생물학·신경과학·심리학·생태학에서부터 정신분석학은 물론이고 불교의 인간 이해까지 다루는 방대함을 보여준다. 이 책은 신학적으로 학제적으로나 편협하지 않으며 광범한 주제를 다룬다.

 

4부에서는 오늘날의 기독교 인간론의 초점들이라는 주제를 통해 최신 논의들을 이끌어 나간다. 이 부분에서는 특별히 세 가지의 오늘날에 대한 초점이 나타나는데, 이는 신학적 오늘이며 사회적 오늘이며 과학적 오늘이다. 먼저 저자는 페리코레시스적 관계성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주제로 삼위일체, 기독론과 대상관계 이론을 통해 인간의 본질이 페리코레시스, 공감적 사랑, 공감적 이해에 있음을 제시한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신학적 개념 자원과 과학의 결과를 통해 논지를 강화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더불어 이런 주장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당위적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어서 저자는 생태학적 기독교 인간론에 대한 조직신학적 고찰을 통해 이원론적 인간론을 극복하고 만유재신론을 통해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비전에 동참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낸다. 이것이 저자의 신학적 오늘에 대한 응답이다. 저자의 사회적 오늘은 차별과 평등이란 제목의 16장에서 가장 부각된다. 저자는 전세계적으로 일어나는 각종 혐오, 배제, 그리고 차별의 사건들을 다루며 이런 사회문제를 신학적 인간론이 돌파할 수 있음을 설득한다. 저자의 사회에 대한 관심은 이 장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책의 여러 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어서 저자는 과학적 오늘을 다룬다. 신학자인 저자는 포스트 휴머니즘과 기독교 신앙이라는 장에서 포스트 휴머니즘과 인공지능 시대의 기독교 신앙에 대해 서술하며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고, 수호해내는 주장을 이어간다.

 

특별히 내가 주의 깊게 보았던 부분은 현대신학에서의 인간 이해이다. 나는 신학이 아닌 다른 영역에 있기 때문에 학제적 연구보다도 기독교 신학에서의 인간 이해에 관심이 갔다. 특별히 책에서 다루는 현대신학자들 중에서도 칼 바르트와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의 인간론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우선 20세기 신학의 교부라 일컬어지는 칼 바르트의 인간론은 교의학적·관계론적 인간론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칼 바르트 인간론의 핵심은 하나님 말씀으로부터의 인간론이다. 바르트는 특유의 신학적 입장과 같이 인간의 실재에 관심을 가지고 진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교의학적 인간론 밖에 없다는 주장을 하며, 인간론을 삼위일체론에 근거해서 설명하고 기독론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재구성한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 이성 내지는 영혼이라는 고전 신학의 실체론적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과의 관계성으로 정의한 데에 있어 신학적 진보를 가지고 왔다. 바르트는 의외로 철학적 인간론에 대해는 반대했지만 인간의 개별적 속성에 대해 연구하는 다양한 분과학문의 결과를 존중해야 한다고도 주장했지만 실질적으로 다른 분과학문과의 대화를 이루내지는 못한다.

 

반면 또 다른 20세기의 거장인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는 칼 바르트와 대비되는 관점에서 인간론을 전개해나간다. 판넨베르크의 방법론은 전체적으로 변증적·교의학적 인간론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판넨베르크는 기독교의 교의학적 전제로부터 인간론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기초신학적”(fundamental-theological) 인간론을 전개한다. 그는 학제적 관점에서 생물학·심리학·문화인류학·사회학 등의 다양한 분과학문들이 다루는 인간 실존의 현상에 직접적인 관심을 기울인다. 또한 그는 이 학문들이 일구어낸 학문적 성과들에서 종교와 신학의 함의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오직 계시로만 인간론을 말할 수 있다던 바르트와 달리 판넨베르크는 과학적 연구와 계시된 말씀에 기초하여 신학적 인간 이해 사이의 연결점을 찾으려 부단히 노력한다. 판넨베르크의 인간론은 세속학문과 연결점을 찾는다는 측면에서 타협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는 오히려 기독교 인간론의 고립성을 극복하고 일반학문과 대화하면 세속적 비판에 변증하기 위한 작업이다.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의 형상을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종교성에 초점을 맞춰 해석한다. 판넨베르크는 특별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연결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바르트의 견해를 비판한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 창조의 의도와 함께 인간에게 존재론적으로 내재되었다고 파악한다. 판넨베르크는 고유의 인간론을 전개하는데, 그중에서도 인간의 운명과 종말론적 완성이 독특하게 느껴진다. 판넨베르크에게 인간의 본질은 곧 종말론적 운명이며 동시에 역사이다. 일간 운명적 본성의 목표는 하나님 형상의 구현,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인간이 역사라는 판넨베르크의 의견은 인간이 세계 개방성을 가진 존재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그에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완성된 형태로 소유하고 있지 않다. 인간은 역사적 과정을 거쳐 종말론적 미래에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에 열린 존재로서 운명의 성취를 향한 과정 속에 존재하는 역사적 존재이다. 판넨베르트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인간의 운명이 선취적으로 실현되었음을 주장한다. 그는 개인의 종말을 개인적 구원의 차원에서만 설명하지 않는다. 판넨베르크에게 인간의 운명과 종말이란 여러 종말론적 주제들이 통합되어 하나님의 영원한 삶에 참여되는 것을 의미하며, 인간 사회와 인류의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는 사건이다. 그는 하나님이 통치하실 때에, 비로소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불의가 종식되고 인류의 사회적 운명이 성취된다고 본다.

 

윤철호 교수의 인간은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두 가지 문제의식을 해결할만한 훌륭한 책이다. 또한 저자의 능력과 출판사의 편집 능력도 탁월한 것 같다. 일단 저자는 굉장히 난해하고 어려울 수 있는 신학적 내용들을 저자는 이해하기 쉽고, 평이한 문장으로 표현해낸다.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저자는 가끔씩 어떠한 학자나 관점의 의견에 개입해서 본인의 판단을 서술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칼 바르트는 삼위일체의 확고한 기반 위에서 인간론을 세우려고 했다는 문장 뒤에 삼위일체 신학은 다양한 양태와 논쟁을 가지고 있음을 기억하라는 논평을 덧붙인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의 판단을 독자에게 맡기는 것을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존재하기도 한다. 또한 책 외적으로 이와 비교할만한 국내 학자의 인간론 저술이 많지 않은 것이 아쉽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서술과 방향성에 대해 동의하지만 이 책을 계기로 더욱 풍성하고 수준 있는 논의들이 진척되었으면 좋겠다.

 

유물론 철학자인 포이어바흐는 그의 저서 기독교의 본질에서 인간은 기독교의 신이고 인간학은 기독교 신학의 비밀이다.”라는 이야기를 했다. 이것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지만 헤겔 전통의 관념적인 신 개념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이라는 기치를 걸어두고 교계가 각종 행사로 종교개혁에 대한 재조명으로 시끄럽다. 그런데 이 책 인간500년 전의 종교개혁의 관념과 아이디어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도 이 땅을 밟고 살아가는 인간들에 대한 적극적인 이해를 담고 있는 책이다.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신학적 논의도 필요하겠지만 이 책과 함께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에 대해 고민해보는 것은 어떨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공감적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한 희망의 빛을 밝혀야 한다.” 윤철호 인간, 60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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