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

 

서평: 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학문(Wissenschaft als Beruf)』

 

 

일러두기

 

 

 

1) 본 서평은 “막스베버, 전성우 역, 2013,『직업으로서의 학문』, 나남출판”을 읽고 작성했다.

 

 

2) 이 글에서 별도의 표시 없이 본문의 괄호 속에 표시된 숫자는 앞서 언급한 책의 쪽수를 의미한다.

 

 

3) 본 서평은 『직업으로서의 학문』 내용을 재구성했기 때문에 실제 책의 순서는 이 글과 다르게 진행된다.

 

  이 책, <직업으로서의 학문>은 사회학의 창시자이자, 현대 사회학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근원적 사상가 막스 베버(Max Weber)가 1917년 11월 7일, 뮌헨대학의 진보적 학생단체인 자유학생연합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강연한 원고를 출간한 책이다. 이 역본의 역자이신 전성우 선생님에 의하면 이 강연이 있었던 시기는 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던 때로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고 있었고, 당시 학생들은 이러한 정신적 위기상황에서 이를 극복한 카리스마적 ‘예언자’나 ‘제사장’을 요구하고 있었다고 한다.

 

 

1. 들어가기에 앞서: ‘직업으로서의 학문’이라는 제목

 

 

  먼저 이 책의 원래 제목은 ‘Wissenschaft als Beruf’인데, 이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있어야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독일어 ‘Wissenschaft’는 ‘학문/과학’이라는 의미를, ‘als’는 ‘-로서’라는 의미를, ‘Beruf’는 ‘사명/소명/천직’, 또는 ‘직업’이라는 의미를 각각 가지고 있다. 여기서 Wissenschaft와 Beruf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독일어 Wissenschaft는 과학, 또는 학문을 의미하는데, 한국에서 ‘과학’은 보통 생물, 물리, 화학, 지구과학 등의 자연과학을 떠올리게 한다. 따라서 한국에서 통상적으로 과학이 의미하는 바는 (자연)과학이고, 여기서 베버가 의미하는 과학이란 근대적 학문이라는 의미의 ‘과학’이다. 굳이 과학과 학문이 구별되어야 하는 이유는 학문이 전근대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만 해도 학문이라는 어휘가 상당히 많이 사용된다. 그래서 Wissenschaft는 ‘근대적 학문’, 또는 독일적 맥락에서의 ‘과학’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Beruf에 관한 이야기이다. 독일어 동사 ‘berufen’은 ‘부르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의 명사형 Beruf는 ‘부름 받은 것’이 되는데, 서구 기독교 전통에서 직업은 신의 소명이자 사명으로 이해되었고 이를 통해 근대적, 전문적 직업윤리가 싹튼다는 것이 베버의 중요한 분석이다. 따라서 베버가 의도한 Beruf는 단순한 직업이라기보다는 천직, 소명으로 이해되어 전문적이고, 합리적으로 조직된 근대적 직업이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은 ‘소명으로서의 과학’ 또는 ‘천직으로서의 (근대적) 학문(또는 학술)’이 보다 더 정확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2. 탈주술화 과정(Entzauberungsprozeß)으로서의 근대와 가치 다신주의

 

  베버는 이 강연에서 우리 시대의 특징으로서의 탈주술화에 대해 직접적으로 설명한다.

 

 

합리화(Rationalisierung)와 주지주의(Intellektualisierung)화를, 특히 세계의 탈주술화(脫呪術化, Entzauberung)를 특징으로 하는 우리 시대에서는 바로 가장 숭고하고 궁극적인 가치들이야말로 공공의 장에서 물러나서 신비주의적 삶의 은둔의 세계로 퇴장했거나, 아니면 개인들 상호간의 직접적 형제애 관계 속으로 퇴장했습니다(88).

Es ist das Schicksal unserer Zeit, mit der ihr eigenen Rationalisierung Intellektualisierung, vor allem: Entzauberung der Welt, daß gerade die letzten und sublimsten Werte zurückgetreten sind aus der Öffentlichkeit, entweder in das hinterweltliche Reich mystischen Lebens oder in die Brüderlichkeit unmittelbarer Beziehungen der Einzelnen zueinander.

 

 

주지주의화와 합리화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라도 우리의 삶의 조건들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우리의 삶에서 작용하는 어떤 힘들도 원래 신비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힘들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모든 사물은 - 원칙적으로는 - 계산을 통해 지배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이 알고 있거나 또는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세계의 탈주술화를 뜻합니다. 그러한 신비하고 예측할 수 없는 힘의 존재를 믿은 미개인이 했던 것처럼 정령(精靈)을 다스리거나 정령에게 산청하고 그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주술적 수단에 호소하는 따위의 일은 우리는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령에게 부탁했던 일들을 오늘날은 기술적 수단과 계산이 대신해줍니다. 무엇보다도 이것이 주지주의화가 그 자체로서 의미하는 바입니다(45-46).

 

 

  탈주술화와 더불어 베버는 이 시대의 근본규정을 가치 다신주의라는 이름으로 명명한다. 근대의 니힐리즘을 지적한 니체의 세계상으로부터 베버는 큰 영향을 받는다.[각주:1] 베버는 니체의 “신은 죽었다”2]라는 선언에서 한 걸음 더 나가서 다음과 같은 선언을 한다.

 

 

옛날의 많은 신들은, 이제 그 주술적 힘을 잃어버리고 그래서 비인격적 힘의 모습으로, 그들의 무덤에서 기어 나와 우리 삶을 지배하고자 하며 또다시 서로간의 영원한 투쟁을 시작하고 있습니다(72).

 

 

삶이 어떤 형이상학적 또는 종교적 준거 없이 그 자체로서 존재근거를 가지고 있고 그 자체로서 이해되는 한, 삶은 오로지 저 신들 상호간의 영원한 투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기본상황 말입니다(80).

 

 

 

  이제 유일한 태양은 없고, 또 합리주의마저도 상대화될 수밖에 없게 된, 그래서 스스로는 자기에게 있어 무엇이 신이고 악마인지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모든 가치들이 서로 투쟁할 수밖에 없는 시대상을 지적한다. 절대적 가치를 잃고 이 니힐리즘 속에서 일상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 곧 우리시대 젊은이들의 피치 못할 운명이며, 가장 힘든 것임을 베버는 밝히고 있다.

 

3. 근대 학문의 지위와 그 의미의 문제

 

 

  베버는 학문연구가 본질적으로 진보(Fortschritt)에 예속되어 있으므로 학문은 시간이 지나면 낡아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쳐해 있고 이 자체가 학문의 목적임을 밝히면서 학문의 의미문제를 논한다. 다시 말해 학문 자체를, 즉 낡아버릴 수밖에 없는 작업을 업으로 삼는 학자들은 그것을 통해 어떤 의미를 취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베버는 톨스토이를 인용하며 우회한다. 과연 죽음은 의미 있는 현상인가? 베버는 사상, 지식, 또는 제반 문제들로 끊임없이 농축되어 가는 근대의 과정 속에 있는 근대 문화인(文化人, Kulturmensch)은 생의 포만감을 느낄 수 없다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근대 문화인은 ‘최종적인 것’이 아닌 끊임없는 진보 속에서 극히 작은 부분만을 낚아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근대인들에게 죽음은 의미 없는 것일 뿐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시조 아브라함이 삶에서 만족감을 느낀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의 생활 전체 속에서 학문의 소명은 무엇이며, 그것의 가치는 무엇인가?

 

  베버는 고대부터 중세까지 이어진 학문의 목적에 대해 서술하면서, 학문이 그 자체로서 의미를 부여하던 시기는 끝났음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중세의 곤충학자, 슈밤메르담(Jan Swammerdam)이 작은 곤충에도 존재하는 신의 섭리를 깨닫기 위해 학문을 선택했다면, 근대의 자연과학자들에게는 그런 의미부여가 없다는 것이다. 또 베버는 학문은 행복추구의 길이라는 선언도 니체를 인용하면서 그 자체로 의미가 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진정한 존재로의 길”, “진정한 예술로의 길”, “진정한 자연으로의 길”, “진정한 신으로의 길”, “진정한 행복으로의 길” 등 이전의 모든 환상이 무너져버린 지금, 학문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에 대해 베버는 학문연구에서 나오는 결과는 <알 가치가 있다wissenswert>는 의미에서 중요하다는 전제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한다. 이는 학문의 수단으로써 증명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더 중요하며 이는 궁극적 의미를 기준으로만 해석될 수 있는 해답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자연과학자들이 자연 법칙을 알 가치가 있다고 전제하는 이유는 그 지식으로 기술적 성과를 달성할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들이 학문은 <소명Beruf>으로 여긴다면, 이러한 <지식 자체를 위해서um ihrer selbst willen>이기도 하다.

 

4. 학문적 사실판단과 규범적 가치판단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책은 가치다신주의라는 시대규정 속, 구체적으로 1차 세계대전 막바지라는 장밋빛 미래를 꿈꾸기 난망한 상황에서 학자를 꿈꾸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다. 학생들은 누구보다도 자신들의 방황을 잠재워줄 ‘예언자’, ‘제사장’을 갈구하던 상황에 베버는 근대문화에서 학문이 차지하는 위치를 정직하게 선언하고, 학문과 정치의 관계를 분리시킨다. 베버는 정치는 강의실에서 배제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실천적-정치적 입장을 취하는 것과 정치구조 및 정당구도를 학문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구별된 사안임을 지적하는데, 이는 아마도 진보적 학생들에게는 신선한 발언이었을 것 같다.

 

 

만약 내가 대중 집회에서 민주주의에 대해 강연한다면, 나는 나의 개인적 입장을 숨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대중 집회에서는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도록 편을 드는 것이 연사의 마땅한 의무이며 책임입니다. 그러한 경우에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들은 학문적 분석의 수단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수단입니다. 이 말들은 관조적 사색의 토지를 일궈주기 위한 쟁기의 날이 아니라, 적에 대항하기 위한 칼, 즉 투쟁수단입니다(63).

 

 

  베버는 “사실확인, 수학적 및 논리적 사실들의 확인 또는 문화적 재화들의 내적 구조의 확인”과 “문화의 가치 및 그 개별적 내용의 가치에 대한 물음과 문화공동체 및 정치적 조직 안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대답하는 것”(64), 이 양자가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것을 통찰하는 지적 성실성을 학자에게 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강의실은 비판이 불가능한 공간이고, 더불어 이는 학문 발전의 저해 요소이기 때문이다. 베버는 이어서 신학자와 신자의 비유를 들어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구별한다. <전제 없는voraussetzungslos> 학문은 <기적Wunder>과 <계시Offenbarung>와는 상관이 없다. 근대학문은 궁극적 가치설정과 의미창출의 주체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자에게 기적과 계시를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학자는 기독교의 역사적 발생과정에 대해 기적과 계시 같은 초자연적인 원인들을 제거하고 인과적 요인들을 설명할 수 있다.

 

 

학문은 오늘날에는 <자기성찰Selbstbesinnung>과 사실관계의 인식에 기여하기 위해 전문적으로 행해지는 <직업Beruf>이지, 구원재(救援財, Heilsgüter)와 계시를 희사(喜捨, spendende)하는 심령가나 예언자의 은총의 선물이 아니며 또한 세계의 의미에 대한 현인과 철학자의 사색의 일부분도 아닙니다(81-82).

 

 

  학자가 강단에서 학문적 사실판단에 대한 권위를 규범적 가치판단의 영역으로 확대시킬 경우, 학자는 부유하는 근대인들에게 새로운 ‘유일신적’ 구원의 길이 있다고 장사하는 지적사기꾼이 될 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서로 싸우는 신들 중 어느 신을 섬겨야 하는가, 아니면 이들과는 전혀 다른 어떤 신을 섬겨야 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이 다른 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학문이 대답하지 못하는 이상, 그럼 누가 대답하는가?”라는 묻는다면, 이에 대해서는 예언자나 구세주가 대답할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언자가 없거나 또는 그의 예언이 더 이상 믿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수천 명의 교수들이 국록을 받거나 특권을 누리는 소예언자로서 강의실에서 예언자의 역할을 수임하려고 시도한다고 해도 결코 진정한 예언자가 지상에 다시 등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82).

 

 

 

  또한 이들이 자신의 실천적 입장은 학문적으로 옹호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세계는 다양한 가치질서들의 해소될 수 없는 상쟁(相爭)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가치 다신주의의 상황에서 이는 무의미한 것일 뿐이다.

 

5. 학자의 외적, 내적 조건과 소명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생각하는 젊은 학생들에게 학자의 외적, 내적 조건과 소명에 관해 이야기한다. 먼저 베버는 학자의 외적 조건에 관한 강연에서 직업으로서 학문을 즉 학자로서 안정된 미래를 보장받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임을 지적하면서 베버는 학자의 학자적 능력과 강사로서의 능력의 차이, 또 교수임용 과정에서 벌어지는 정치적인 외압 같은 예를 들면서 학자의 길은 거친 요행(Hazard)의 길이라고 선언한다. 이런 외적 조건을 다룬 뒤 베버는 이런 대화로 마무리를 한다.[각주:3]

 

 

“당신은 평범한 인재들이 해마다 당신보다 앞서 승진하는 것을 보고도 내적 비탄이나 파멸 없이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러면 우리는 매번 두말할 나위도 없이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듣게 됩니다. “물론입니다. 나는 단지 나의 <천직Beruf>을 위해 살 뿐입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나는 그들 가운데 내적 상처를 입지 않고 그것을 참아 내는 사람은 매우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32).

 

 

  이어지는 학자의 내적 조건에서 베버는 학자가 갖추어야 할 열정과 소명의식에 대해 언급하며, 굉장히 유명한 강연을 이어간다.

 

 

일단 눈가리개를 하고서, 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구절을 옳게 판독해 내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침잠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예 학문을 단념하십시오. 이런 능력이 없는 사람은 우리가 학문의 <체험Erlebnis>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결코 자기 내면에서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학문에 문외한 모든 사람들로부터는 조롱당하는 저 기이한 도취, 저 열정, “네가 태어나기까지는 수천 년이 결과할 수밖에 없었으며”, 네가 그 판독에 성공할지를 “또 다른 수천 년이 침묵하면서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은 학문에 대한 소명이 없는 것이니 다른 어떤 일을 하십시오. 왜냐하면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만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34).

 

 

  앞 서 베버는 학자로서의 길이 순탄하지 않다는 설명을 마치고 학생들에게 학자가 갖춰야 할 열정을 전달하고 있다. 이는 이 자체로는 학적인 열정에 대한 가슴 뛰는 설명이기도 한 동시에 분화된 근대사회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있다. 코린토스로 보내는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라고 설파한다. 이는 어떤 이에게는 절대적이고 숭고한 것이 다른 이에게는 무가치한 것일 수도 있다는 의미로, 베버 역시 어느 고대 필사본을 옳게 판독해 내는 데 자신의 영혼이 사로잡힌다고 하더라도, 이런 소명의식이 누군가에게는 조롱당하는 기이한 도취·열정에 불과할 것임을 암시한다. 부르디외가 말하듯 학문장(學文場)의 일뤼지오(illusio)에 사로잡힌 행위자들에게 학문적 성취는 지고한 가치이겠지만, 학문장 외부의 행위자들에게 고대 필사본의 판독해내는 것은 무가치한 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어서 베버는 비단 열정뿐 아니라 <영감Eingebung>, <혼Seele> 역시 학자의 전제조건임을 언급하며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실험실·통계실에서 제조되는 계산문제가 되어버린 현실을 개탄한다(영감의 문제를 다루는 서술에서 근대성과 행위자의 창조성에 관한 베버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어서 베버는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개성Persönlichkeit>, (가치 다신주의에 기반해 발생하는 (72))<체험>이 우상처럼 퍼져있다고 비판하면서 <개성>은 곧 학문영역에서 순수하게 자신의 주제에 천착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학문 진전에 힘쓰지 않는 호사가, 대중학자들을 비판하고 오직 자신의 과업에 내적으로 몰두하는 것이 학자의 길임을 힘 있게 논변하고 있다.

 

6. 결론

 

 

  문고판 번역본으로 약 70페이지, 독일어로 약 40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이 강의록에는 이렇게나 많은 내용들이 담겨있다. 베버는 소명으로서 학자라는 직업에 종사할 사람들의 외적·내적 조건과 근대 학문의 본질과 그 의미와 한계, 그리고 학문과 정치의 관계, 근대의 시대상에 관해 이 짧은 원고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은 큰 맥락에서 두 개의 맥락으로 읽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하나의 메시지로 읽는 것이고, 다른 것은 이 책을 막스 베버의 근대사회론에 포함시켜 읽는 것일 것이다. 해석의 독자의 몫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전자의 맥락에서 이 책을 읽곤 했는데, 요즘 들어서는 후자의 맥락에서 이 책을 읽고 있다.

 

  책의 역자이시고, 베버 전문가이신 전성우 선생님께서는 “이 강연에서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이라는 주제를 근대 문화 일반의 구조와 밀접히 연관시켜 가면서 논의하고 있습니다. 베버의 학문론뿐 아니라 근대성 이론 전반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필독”해야할 책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계시는데, 베버의 역사사회학 연구를 중점으로 하셨던 선생님께서 이 원고를 『‘탈주술화’ 과정과 근대』라는 제목의 선집으로 묶여 출간하셨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베버는 신이 죽고, 그 신들이 무덤에서 기어 나와 서로 투쟁하는 시대의 난망함과 서구 근대의 이중적 성격, 즉 ‘가치·의미해방’과 ‘새로운 예속’이라는 역설적 상황들을 그려낸다. 이 책 『직업으로서의 학문』은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주는 메시지이자, 근대인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하나의 단편이다.

 

  1. 니체와 베버의 관계에 관해서는 『막스 베버 사회학』, 전성우, 나남출판, 2013, 44p 이하 또는 『막스 베버』, 김덕영, 도서출판 길, 2014, 629p 이하를 참고할 것. [본문으로]
  2. 이제 하나의 경전처럼 여겨지는 이 경구는 니체의 『즐거운 학문』, 125절에 있다. [본문으로]
  3. 학자의 외적조건에서 베버는 수공 장인(匠人)이 생산수단을 직접 소유하듯, 학문적 수공업자(학자)의 노동수단의 첫 째로 장서(藏書)를 언급하기도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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