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간된 남자의 자리

 

“최근에서야 나는 소설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질적 필요에 굴복하는 삶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술적인 것, 무언가 흥미진진한 것 혹은 감동적인 것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나는 아버지의 말과 제스처, 취향, 아버지의 인생에 영향을 미쳤던 사건들, 나 역시 함께 나눴던 한 존재의 모든 객관적인 표적을 모아보려 한다.” 20p.

1. 자기분석: 우리에게 소설가로 유명한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작업을 ‘자전적 소설’이 아닌 부르디외적 의미에서의 ‘자기분석auto-analyse’으로 규정한다. 문학사회학자와의 대담에서 에르노는 “부르디외 이전엔 아무도 저에게 그와 같은 파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습니다. 다른 형태의 사회적 고찰에서는 그와 같은 것을 결코 발견할 수 없었어요. 그것은 크나큰 차이를 낳았습니다”라고 회고하며, 70년대 부르디외를 접한 에르노는 아버지의 삶을 써야겠다고 결심한다(오늘의 문예비평 2020 가을호 에르노와 샤르팡티에 대담, 박진수 역).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삶을 사회적 시선으로 분석하는 <남자의 자리>다.

2. 계급횡단자Les Transclasses: 책에서 볼 수 있듯, 에르노는 사회적 상승 이동을 경험한 계급횡단자(혹은 탈주자transfuge)이다. 가난한 집안 출신이지만, 교사의 지위를 획득하고 부르주아 남성과 결혼함으로써 상류층에 편입한다. 아버지의 죽음 뒤, 그의 자리를 반추하는 <남자의 자리>는 상승 이동을 경험한 에르노의 다양한 사회적 시선이 응축되어있다. 에르노가 목격하고 되새긴 아버지의 삶은 농장의 고된 노동에서 자연을 향유하는 것이 불가능한, “대지의 어머니의 장엄함”을 느낄 수 없는 삶이며, 동시에 프랑스 문학 속에 구현된 동시대 부르주아와는 다른 삶이었다. 그 속에서 에르노는 아버지에게 배운 언어를 학교 선생님에 의해 교정 당하고, 또 공부하며 새로운 지식을 배울 때마다 그와 벌어지는 사회적 거리를 느끼게 된다.

3. 사회적 폭력: 에르노는 아버지의 죽음 뒤 사진을 통해 그의 삶을 하나하나 짚어본다. 교양이나 지식이라는 여유와 거리가 멀었던 그의 삶은 무지에 의해 누군가에게 폭력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지배 문화에 의해 상처를 받기도 했다. 제대로 된 철자를 알지 못해 벌어진 해프닝 속에서의 부끄러움, 처음 딸을 데리고 간 도서관에서 겪었던 문화적 상처, 그 미묘하면서도 지성적인 폭력의 경험을 에르노는 이 책 안에 형상화한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눈치, 미묘한 시선, 작은 제스처를 통한 폭력, 그리고 그로 인한 ‘사회적 주눅’까지. 에르노는 “공부는 좋은 환경을 얻고 노동자와 결혼하지 않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이었다고 표현하는데, 그렇게 자신의 계급에서 횡단한, 혹은 탈주한 삶을 통해 에르노는 아버지의 삶을 다시 볼 수 있게 되고 그 기록이 바로 <남자의 자리>다.

4. 에르노와 함께: 나는 에르노는 읽는 한 방법으로 부르디외를 이야기했다. 말년의 그는 자신이 만든 자본, 하비투스, 장(field) 개념을 통해 자신의 삶을 분석했다. 그것이 유작 <자기분석을 위한 개요Esquisse pour une auto-analyse>이다. 부르디외는 사회적 삶을 이해하는 다양한 사고의 도구를 제공했고, 에르노 역시 이에 빚진 사람이다. 얼마 전에 출간된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 역시 이런 관점에서 극단까지 밀어붙인 자기분석의 결과이고, 에두아르 루이의 <에디의 끝> 역시 그렇다. 부르디외의 자기분석은 계급적 상황에 한정되었다면, 에르노, 에리봉, 루이를 통해 자기분석은 여성과 퀴어의 경험으로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에르노를 읽는 한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에르노는 에르노이기도 하다.

“물론 들었던 단어와 문장에 최대한 가깝게 써야 하는 이런 작업에서 글쓰기의 행복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때때로 볼드체로 강조했던 문장들은 독자들에게 중의적인 의미를 나타내거나, 내가 모든 형식에서 거부했던 향수, 감동, 조롱을 공모하는 쾌락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저 그 단어와 문장이 아버지가 살았던 세계이자 내가 살았던 세계이기도 한 곳의 한계와 색깔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어떤 단어를 다른 단어로 받아들이는 법이 없었다,” 40~4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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