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의 숨은 맥락

이 책을 다루겠다고 이야기하니 답이 없는 책이 아니냐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정답이 없는 게 1강에 나온 저자가 하는 말이기도 하고, 그렇게 보는 것이 맞다 생각하지만 저는 이 책의 숨은 맥락을 소개해드리려 해요. 제 글을 안 보셔도 책을 보는데 지장 없으시니, 굳이 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샌델은 행복(공리주의), 자유(주의), 미덕(공동체주의)을 통해 정의는 무엇인가 탐구하겠다고 하죠. 2-4강에서 공리주의의 특성과 한계를, 5-7강에서 공리주의를 비판하는 자유주의의 특성과 한계를, 8-10강에서는 앞선 두 사상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공동체주의를 제안합니다. 샌델은 자기 입장(공동체주의)을 강력히 주장하지는 않지만 논의의 마무리로 사용하고 이를 지지를 밝힙니다.

공리주의의 핵심명제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고, 샌델은 공리주의와 자유지상주의를 연결하죠. 벤담이 가정하는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하는 인간은 합리적·이기적이고 따라서 최상의 이해관계를 구성한다고 보았고 자유지상주의에 영향을 미칩니다. 샌델은 이 맥락을 소개하고 4강에서는 공리/자유방임주의의 한계를 보여주면서 이 맥락을 마무리합니다. 샌델이 보는 한 덩어리는 공리주의-자유지상주의입니다.

그 다음 샌델은 칸트를 소환합니다. 여기서 칸트는 정치적 자유주의의 창시자로서의 칸트죠. 칸트는 인격의 절대성, 개인, 근대적 이성을 가지고 공리주의를 비판하며 자유주의를 옹호하고, 한 편으로는 관념적 상황, 그러니까 경험(현실)적 자아가 아닌 선험(보편)적 자아를 통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정치적 이상을 구성하려 합니다. 롤즈는 이를 계승해 경험적인 행복의 문제는 합의가 어렵기에, 선험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정의’의 문제를 가지고 사회구성의 기본원리를 제안합니다. 그것이 ‘정의론’이죠. 롤즈는 보편성을 위해 추상화를 추구하고 사회계약을 가정해서 무지의 베일 속 개인들의 합의를 이론으로 내놓는데, 샌델은 7강에서 이 정치적 자유주의가 가진 한계를 지적하면서 8강으로 넘어갑니다.

자유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며 샌델이 소환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동체주의자 매킨타이어가 자유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다시 복권시킨 철학자이죠. 샌델은 이어지는 내용에서 지속적으로 공리주의와 자유주의의 한계를 지적합니다. 롤즈가 가정한 무지의 베일 속 개인들, 즉 무연고적 자아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토대를 무너뜨립니다. 동시에 샌델은 개인(자유)주의와 구별되는 공동체주의의 핵심가치인 공동선, 미덕, 연대, 도덕, 목적 등을 꾸준히 강조하고, 문제들을 다루며 책을 마칩니다.

이 책은 답이 없는 책인 것 같으면서 은밀히 답을 제시하는 책입니다. 샌델의 핵심저서 <정의의 한계(원제: Liberalism and the Limits of Justice)>는 현대의 가장 지배적인 두 사상, 공리주의와 자유주의의 한계를 겨냥하고 극복하기 위해 집필되었습니다. 그러니 <정의란 무엇인가>가 앞의 책에서 겨냥하는 두 사상을 다루고 공동체주의로 수렴되는 것이 그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대결이 끝난 세계에서 유일한 대결은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에 있죠. 현실적으로 사회변동을 위한 이론,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는 싸움은 자유와 공동체의 투쟁에 있을 겁니다. 이 책은 현실적으로 대안이 될 수 있는 사상의 논쟁을 다루는데 장점이 있고 동시에 이 때문에 다른 정치사상의 맥락(사회주의, 페미니즘, 아나키즘 등)을 삭제한 한계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책은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윤리 수준의 기초지식이 있으면 보다 읽기 편할 책입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함께 읽으며 토론하면 더 좋을 책입니다. 저는 교양을 위해 읽기 매우 좋고, 이런 사고훈련 자체가 민주사회에서 값지다 봅니다. 강연자로서 샌델도 매우 천재적이라고 생각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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