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라스와 부르디외, 한 지식인의 초상

이상길 선생님의 부르디외 연구서 <아틀라스의 발>을 처음 봤을 때 들었던 의문은 제목이 왜 '아틀라스의 발'일까하는 의문이었다. 일단 책 서문을 보면서 이 의문은 풀리게 되었고, 지난 9월 27일에 있었던 푸른역사아카데미 <아틀라스의 발> 서평회에 참여하면서 '아틀라스와 부르디외'에 관한 저자 이상길 선생님의 해석도 들을 수 있었다.

먼저 (일전에 포스팅한 적도 있지만) 책 제목이 <아틀라스의 발>인 이유는 이것이 부르디외가 콜레주드프랑스 마지막 강의 때 사용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상길 선생님께서 인용하신 대로, 캐나다 사회학자인 마르셀 프루니에에 의하면 부르디외는 자신의 콜레주드프랑스 마지막 강의에서 “성찰성이란 세계를 자신의 어깨에 짊어진 나틀라스의 두 발이 어디를 딛고 있는지 질문하는 일”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부르디외의 이 비유는 이 책의 부제인 "포스트식민 상황에서 부르디외 읽기"를 함축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제목인 것이다.

다음으로는 아틀라스와 부르디외에 관한 이상길 선생님의 해석인데, 선생님께서는 부르디외가 아틀라스를 언급했지만 이 이미지를 발전시킨 것은 아니라고 하시면서 이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덧붙이셨다. 하늘을 이고 있는 아틀라스는 땅, 그러니까 현실을 딛고 있는 존재이다. 반면에 아틀라스와 형제인 프로메테우스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이며 티탄족과 올림푸스족의 전쟁에서도 미래를 예견해 벌을 받지 않았다. 아틀라스는 미래를 예견하지도 못해 형벌을 받는 존재로 대비된다.

프로메테우스는 미래를 예견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인류에 불을 가져다주고 진보를 상징하는, 구체적이고 진보적인 수단을 제공하는 존재이다. 맑스는 그런 프로메테우스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파리신문이 폐간될 때 자신을 나타내는 이미지로 쓰곤 했다. 아틀라스의 이미지는 그런 프로메테우스적 지식인의 이미지와 대비될 수 있다. 아틀라스에게는 프로메테우스 같은 신적인 능력이 없이 세상을 짊어지는 형벌을 받는 존재이다.

이런 내용을 토대로 이상길 교수님께서는 "말년의 부르디외는 어쩌면 그저 세계 전체를, 세계의 비참을, 현실을 짊어지고 관점들에 대한 관점을 확보하려고 노력하는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이 딛고 있는 땅을 성찰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 그런 이미지를 사용하지 않았을까"하는 해석을 이야기 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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