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적 역사 연구의 진일보 <임진왜란>

말 그대로 “압도적인”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이런 표현을 제가 즐겨쓰진 않는 걸 아실 겁니다. 화제의 책, 김영진 선생님의 『임진왜란 – 2년 전쟁 12년 논쟁』입니다. 한국인에게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적인 침략, 선조의 무능, 이순신을 포함한 국군의 선전, 의병의 봉기 정도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순신”으로 기억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 7년 전쟁에서 직접적 교전 기간은 그리 길지 않은 2년여의 기간이었으며 이 시기에 있었던 한·중·일의 군사적 대결을 넘어 외교와 정책 등의 비군사적 대치는 12년 정도였기에 이를 고려해 임진왜란을 국제관계의 측면에서 재해석합니다.

이 책이 흥미롭고, 또 제가 “압도적”이라고 한 이유는 저자가 ‘정치학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정치학과에서 방법론 수업을 들을 때 학위 논문 이야기를 하시면서 교수님은 이순신을 외교적으로 분석하려던 지도학생이 있었는데, 이순신으로 논문으로 쓰려면 당장 당시 조선의 1차 자료뿐 아니라 일본의 이순신 자료까지 읽어야 해서 그 주제로는 논문을 쓸 수 없다고 말했다고 얘기해주셨습니다. 게다가 16~17세기 자료는 근대 이후의 언어와는 차이가 있기도 하죠.

아무튼 사학자가 이 주제를 다룬다면 사료 분석 능력은 탁월하겠지만 사회과학만큼의 이론적 틀이나 해석이 범위는 비교적으로 제한될 것이고, 반대로 사회과학자가 다룬다면 이론적 틀, 해석의 범위는 비교적 풍부하겠지만 사료 분석 능력은 부족할 수밖에 없을 텐데, 김영진 선생님은 그 어려운 걸 해내신 겁니다. 그것도 참고문헌까지 1,000쪽 분량으로 묵직하고 성실하게요. 임진왜란은 한중일이 전면전을 벌인 유일한 사례이지만 한국, 중국, 일본의 원사료를 사용한 통사가 출판된 건 세계적으로 최초라고 합니다.

현재는 언제나 뜨거운 무엇입니다. 앞서 지적했듯, 기존까지의 임진왜란 연구는 각 나라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그래서 편중된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죠. 한국도 마찬가지였죠. 한편으로 타국의 연구는 패권주의인 시각에 긴박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영진 선생님께서는 자국 중심주의, 패권주의 등을 극복하기 위해 국수주의도 민족주의도 아닌 입장에서 균형 잡힌 임진왜란 12년의 통사를 재구성하기 시작합니다.

임진왜란을 한국의 측면에서, 군사적 측면에서만 본다면 전쟁의 신, 이순신이 남겠지만, 시각을 넓혀 국제정치적 측면에서, 비군사적 측면에서 본다면 이순신은 상대화될 수 있습니다. 책을 읽어나가면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의 전쟁이 아닌, 조선이라는 전장에서의 명과 일본의 전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외교적 측면에서 조선의 왕은 명의 차관급인 송응창같은 지위였고, 당연히 왕 이하의 모든 신하는 송응창의 부하였지, 대등할 수 없었습니다. 조선은 외교적 선택에 있어 명나라에 모든 걸 위임하려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조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조선의 국력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임진왜란을 한층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볼 수 있게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비군사적 측면에만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닙니다. 이순신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명 조정 역시 이순신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이순신의 승리가 국제관계에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었기 때문이죠.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의 승리로 인해 명나라는 자국의 해상 방어가 비교적 자유로워졌고 이를 통해 조선에 원활한 원군이 가능해졌습니다. 이 책은 군사적 요소 역시 국제관계의 측면에서 해석합니다.

저는 국제관계사 측면에서 역사를 접근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우리에게 이순신으로 표상되던 임진왜란을 보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게 해줍니다. 이런 사고의 전환 속에서 인식의 운신이 넓어지고, 사유의 폭이 깊어질 수 있습니다. 기존에 알았던 것을 극복하는 건 어떨 때는 괴로울 수도 있지만 그를 통해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16세기 역사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강대국의 세력 균형 사이에 있는 한국의 상황에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합니다. 관심 있는 분께 정말 추천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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