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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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간주되는 독일의 사회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29- )는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합리적인 정치참여(참여 민주주의)와 *공론장(Öffentlichkeit, public sphere)이론, 의사소통행위이론을 통해 숙의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장명학, 2003: 1). 하버마스의 사회이론은 숙의 민주주의와 참여 민주주의라는 정치사상과 친화성을 가지고 있으며, 하버마스 스스로도 공공연하게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을 자신의 작업과 이론에 표현해내고 있다. 그는 현대(comtemporary) 민주주의 구축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독일어 Öffentlichkeit는 공적 영역, 공론 영역, 공공성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이 글에서는 공론장의 구조변동으로 번역된 하버마스의 저서를 준거로 삼고, 이를 공론장으로 통일해서 사용할 것이다.


1. 하버마스의 이론 기획 : 2단계 사회이론과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 테제


  하버마스는 20세기 이후의 후기 산업사회에서의 경제적 분업관계에 기초한 통합은 체계통합으로 보고, 규범과 가치의 동의에 의한 상호 연관적 통합은 사회통합으로 보았다. 이러한 두 가지의 통합개념을 통해 하버마스는 2단계 사회이론, 즉 체계와 생활세계라는 이원적 사회관을 전개한다(정선기, 2011: 89). 하버마스(2016: 20)는 자신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의 기획 중 하나의 주제로서 생활세계와 체계의 패러다임을 결합하는 2단계 사회개념을 제시할 것을 언급한다.


  우선 하버마스에게 생활세계(Lebenswelt)란 상호주관적으로 공유된 것이며, “의사소통행위의 배경과 지평”을 이루는 개념이다(하버마스, 2016: 149). 하버마스의 생활세계 개념은 개인에게 소여된 것으로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생활세계의 자명성)이며 상징과 의미로 조직된 세계이고, 개인이 경계를 벗어나기 어려운 세계이다(발터 리제 쉐퍼 1998: 59-60). 이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하버마스의 이론에서 생활세계와 함께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념이 바로 체계(System) 개념이다. 하버마스(2015: 413-426)에 의하면 체계란 근대화 이후에 조정매체가 제도화되면서 발생하게 된 것으로 생활세계와 분리된 영역이다. 하버마스는 권력이라는 조정매체가 제도화된 정치체계와 화폐라는 조정매체가 제도화된 경제체계를 체계로 제안한다(김재현, 1996: 132).


  하버마스의 사회이론에서 2단계 사회이론, 즉 생활세계와 체계의 구분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이 이원적 구분은 그의 기획의 토대가 됨으로써 이를 배경으로 이해해야 이후에 진행될 하버마스의 정치사회학적 논의를 더욱 상세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먼저 두 개념을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버마스는 생활세계와 체계라는 이원적 구분을 토대로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킨다. 정치사회학의 맥락에서 2단계 사회이론이 갖는 시사점을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인데, 첫 번째는 생활세계의 식민화 테제이고, 두 번째는 생활세계가 가진 의사소통의 합리성에 관한 내용이다.


  먼저 다룰 내용을 생활세계의 식민화 테제이다. 이 논의에서 하버마스는 베버의 관료제 테제를 이어받은 듯하다. 경제적 논리, 자본주의적 원리로 작동하는 경제체계와 관료제화, 법제화라는 논리로 진행되는 정치체계는 생활세계에 침투하여 생활세계 고유의 의미와 상징의 논리를 무너뜨리고 생활세계를 경제‧정치체계의 식민지로 전락시킨다. 친밀성의 영역(생활세계)에서 다루어져야 할 문제들이 화폐를 매개로하는 자본주의의 논리로 치환되거나, 법제화되어 친밀성의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할 사회적 행위들이 법의 영향으로 제한된다면 이런 것들은 생활세계의 식민화 테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2014년 세월호 침몰사고 이후 세월호를 인양하는 문제에 있어, 당시 여당의 한 국회의원은 세월호 인양을 반대하는 논리로 비용의 문제를 지적한 적이 있다.* 세월호를 인양하는 문제는 생활세계에서의 생명이 가진 의미나, 생명의 존엄성, 국가가 국민을 책임지겠다는 일종의 상징의 문제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인양을 반대했던 국회의원은 이런 의미와 상징의 문제를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로 환원해버렸다. 이런 구체적인 사건은 최소투자 최대이익이나 이윤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경제체계의 논리가 상징와 의미의 영역인 생활세계의 논리에 침투한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생활세계의 식민지화를 사회병리적 현상으로 규정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한다(김덕영, 2016: 443).


  하버마스의 2단계 사회이론이 갖는 함의, 두 번째로 언급한 생활세계가 지닌 의사소통의 합리성에 관한 내용은 다음 단락의 주제와 연관되어 이어서 논의하겠다.


*이명희, 김진태, 세월호 인양 이래서 반대한다(3불가론), 경향신문, 2015.04.05. 참조


2. 하버마스의의 의사소통 합리성과 정치적 공론장을 통한 숙의 민주주의 논의


  하버마스는 계몽의 적자이다. 하버마스의 사회이론이 목표하는 것은 근대를 옹호하는 것(김덕영, 2016: 421)이며, 그는 1980년 9월에 있었던 아도르노상 수상 연설에서 모더니티(modernity)는 미완의 계획이라는 발표를 하기도 했다(김홍중, 2015). 하버마스는 양차 세계대전 이후 몰락했던 근대성, 합리성, 이성 등의 근대적 주제들을 다시금 사회이론의 지평으로 끌어들여 후기 산업사회가 가진 병폐를 정치적으로 극복하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하버마스의 노력은 생활세계가 지닌 의사소통 합리성을 일깨우는 대안으로 치닫게 된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생활세계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통용되는 세계이다. 생활세계 내에서의 의사소통행위는 성숙하고, 참여적이며, 이성적인, 비판적인 능력 내지는 의지를 지닌 개인들의 이해지향적 상호작용이다. 반면에 정치‧경제체계에서는 합목적적 합리성이나 도구적 합리성이 지배적이다(김덕영, 2014: 56-57). 하버마스(2015: 515)는 의사소통적 합리성만이, 생활세계의 자립화된 체계들의 고유역학에 의해 부속화되는 것에 저항할 때 분노만이 아니라 내적 논리를 제공해준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버마스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계승자답게 문화 영역에서의 식민화와 법제화를 통한 식민화를 다룬다. 이러한 권력조작적, 이데올로기적 식민화를 후기 산업사회의 특징으로 보았던 그는 이러한 식민화에 맞서 생활세계의 의사소통행위에 내재된 의사소통적 이성의 저항력을 근거로 시민사회가 활성화 된다면 의사소통적 이성의 해방적 능력이 실현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김재현, 1996: 138).


  다음으로 하버마스는 공론장 개념을 자신의 정치사회학에서 중요한 자리에 위치시킨다. 공론장에 의한 하버마스(2001)의 논의는 요약해보자면 이렇다. 우선 부르주아 공론장은 당시의 부르주아 계급들이 특정의 정치적 의제를 가지고, 전근대사회의 권위가 아닌 근대적 이성에 기반을 둔 토의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이러한 부르주아의 정치적 공론장은 시민들의 대화의 장이었고 영향력을 확대해나가며 시민혁명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후기 산업사회로 들어오면서 시장의 영역(경제체계)와 국가의 영역(정치체계)이 비대해지면서 정치적 공론장은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하버마스의 공론장에 관한 이론적 작업은 1961년에 출간되었고, 공론장에 관한 비관적인 인식은 약 30여 년을 시차를 두고 1992년 출간된 『사실성과 타당성(Faktizität und Geltung)』에서 이어진다. 하버마스는 이 저작에서 시민사회와 정치적 공론장에 관한 정치사회학적 작업을 시도한다(하버마스, 2010: 441이하). 장명학(2003: 18-21)은 하버마스의 정치적 공론장을 일반적으로 시민사회를 매개로 하여 생활세계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의사소통구조로 정의하고, 그 특징을 서술했는데, 그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공론장은 체계처럼 전문화가 진행되지 않고, 일상언어라는 매체로 작동한다. 둘째, 민주적 공론장에서의 의견 형성의 성공은 의사소통행위에 기반을 둔 담론의 수준에 의존한다. 셋째, 사회에 따라 권력화된 공론장, 즉 본래의 의미를 잃고 왜곡된 공론장도 존재한다. 넷째, 공론장에서도 영향력을 얻기 위한 투쟁이 존재한다. 다섯째, 공론장에서 형성된 의사는 권력행사로 이어지지 않는다.


  하버마스(2014: 16)는 생활세계에서 비롯된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통해 왜곡되지 않은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의사소통합리성에 의한 소통은 개인들 사이에 비강업적이고, 수평적인 관계에서 온전한 상호이해를 가능하게 하고, 개인의 정체성을 가능하게 한다고 판단한다. 또한 이러한 언어관계를 토대로 부르주아 공론장에서 시작된 공론장 담론을 생활세계와 정치적 담론장으로 확장시켜 민주주의의 정치사회학을 전개시킨다. 이러한 하버마스의 이론은 숙의 민주주의와 친화성을 갖는다.

하버마스(2010: 398-399)는 “토의정치의 절차가 민주주의 과정의 핵심을 형성”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어서 민주주의 과정에서의 규범적 내용들이 상호이해지향적 행위의 타당성의 기초,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언어적 의사소통의 구조와 의사소통적 사회구성의 대체할 수 없는 질서로부터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의사소통을 통한 시민들의 공론형성, 그리고 절차적 정당성을 민주주의의 중요한 기반으로 본 것이다.


“토의과정을 통해 걸러지는 정치적 의사소통은 이러한 생활세계의 자원들에, 그러니까 자유로운 정치문화와 계몽된 정치적 사회화, 그리고 무엇보다 형성하는 결사체들의 주도적 발의에 의존한다.”(하버마스, 2010: 405)


  하버마스는 지속적으로 계몽되고, 합리적인 시민들에 이루어지는 정치적 공론장에서의 숙의과정을 통해 생활세계의 비판적 잠재력을 일깨울 수 있으며, 이것을 현대 민주주의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임을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숙의 정치의 핵심은 정치‧사회적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하는 점에 있다(하버마스, 2010: 430).


“담론이론은 민주적 절차나 정치적 공론장들의 의사소통 네트워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상호이해 과정의 한 차원 높은 상호 주관성을 고려한다. 이 주체 없는 의사소통이 의회와 그 심의기구들의 내부와 외부에서 토의의 장을 형성하고, 이 토의의 장 속에서 사회 전체와 관련되고 규제를 필요로 하는 문제들에 관해 일정 정도 합리적인 의견형성과 의지형성이 일어난다.”(하버마스, 2010: 401)


  이 서술에서 하버마스는 정치‧사회적 문제의 해결로 심의기구와 그를 둘러싼 내부, 외부의 숙의 과정, 숙의의 장에 대해 언급하고, 이러한 숙의 민주주의적 요소로 합리적인 의견형성, 의지형성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본 바와 같이 하버마스는 자신의 사회이론의 특징인 의사소통행위와 공론장 개념을 중심으로 숙의 민주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 있고, 이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숙의 민주주의 정책과 친화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하버마스의 시민사회 이론과 참여 민주주의 논의


  하버마스는 합리적인 시민들의 자발적인 정치참여를 주장했던 이론가이다. 하버마스는 시민사회 개념을 정초하면서, 시장법칙의 익명적인 지배를 내재화해서 상호경쟁하는 개별주체를 상정하고 있는 의식철학적 패러다임과 결별을 고한다. 대신 하버마스가 제안하는 개별적 주체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찰하기 위해 목적합리적으로 행위하는 개인들이 아닌, 의사소통의 주체들이다(이진우, 1996: 183, 202).

특별히 참여 민주주의에 관한 하버마스의 담론은 ‘생활세계와 체계’라는 2단계 사회이론을 기저에 두고 진행되며, 앞서 다룬 의사소통행위이론, 정치적 공론장 개념과도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진행된다. 하버마스(2010: 401-402)는 시민사회를 자율적 공론장의 사회적 기초로 규정했다. 이 맥락에서 시민사회는 두 체계, 경제적 행위체계와 공정 행정으로부터 구별된 개념이다. 하버마스는 오직 의사소통적 행위에서만 사회통합의 힘이 자율적 공론장을 통해 제도화된 민주적 의견형성을 구성하고, 화폐와 권력을 매체로 운영되는 경제체계와 정치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내적 식민지화’에 대항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버마스는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내적 식민지화를 저지할 수 있는 역량을 시민사회와, 시민들의 참여 민주주의에서 찾았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들을 가지고, ‘신사회운동’으로 명명하고, 신사회운동은 종래의 초기 자본주의 사회와는 다르게, 탈물질적 가치를, 예를 들면 삶의 질이나 개인의 자아실현 등의, 중심으로 다루는 사회운동이다. 생활세계의 의사소통은 상호의 대상화, 물화(物化), 계량화가 일어나지 않은 의사소통으로서,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러한 의사소통 합리성을 가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위협받는 생활세계를 방어하고, 식민지화에 저항하는 것이 바로 핵심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본질적으로 성장 중심주의적 이념을 공유하지만 생활세계에서 발생한 의사소통은 대안적 제도들을 제시하고, 그것이 자리 잡을 환경도 제공할 수 있다(권용혁, 1996: 282-285).


  하버마스는 시민사회에 관련한 정치사회학 외에도 시민들의 참여 민주주의에 관한 논의나, 민주주의에서의 시민의 저항권에 대한 논의도 다루고 있다. 하버마스는 시민의 불복종이 헌법 자체에 근거를 둔 당연한 근대의 정치권임을 강조한다. 다만 그는 68혁명을 경험하면서, 비폭력 노선을 굳건하게 지지한다. 그럼에도 하버마스는 다양한 시위와, 집회 등의 시민의 참여 민주주의적 요소를 옹호한다. 숙의 민주주의와 절차적 정당성이 부여된 민주주의를 옹호했던 그도 이러한 과정이 제대로 진행되더라도 사회의 문제들은 완전히 해결될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시민들의 참여를 통해 정치가 이루어지는 점을 지적한다. 하지만 하버마스는 일방적이고, 정당하지 않은 정치참여에 관해 조심스러웠고, 정당성뿐만 아니라 근대 법치국가에서의 합법성 또한 고려할 것을 균형감 있게 제안했다(발터 리제-쉐퍼 1998: 127-130).


  정리해보자면 하버마스의 정치사회학은 미완의 근대를 완성시키려는 하나의 거대서사 속에 자리 잡고 있다. 하버마스는 계몽되고 합리적인 개인들이 근대의 문제를 정치적 공론장에서의 ‘의사소통행위’와 비판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시민사회 통해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 과정에서 이러한 정치사회학적 논의를 진척한 하버마스는 자연스럽게 ‘숙의 민주주의’와 ‘참여 민주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구축하였다.


참고문헌


권용혁, 하버마스와 한국, 이진우 엮음, 『하버마스의 비판적 사회이론』, 문예출판사, 1996.

김덕영, 『환원근대』, 길, 2014.

______, 『사회의 사회학』, 길, 2016.

김재현, 하버마스에서 공론영역의 양면성, 이진우 엮음, 『하버마스의 비판적 사회이론』, 문예출판사, 1996.

김홍중, 후기근대적 전환, 강정한 외, 『현대사회학이론 -패러다임적 구도와 전환』, 다산출판사, 2015.

발터 리제 쉐퍼, 『하버마스 - 철학과 사회이론』, 선우현 옮김, 거름, 1998.

위르겐 하버마스, 『공론장의 구조변동』, 한승완 옮김, 나남, 2001.

_______________, 『사실성과 타당성』, 한상진‧박영도 옮김, 나남, 2010.

_______________, 『의사소통행위이론 2 기능주의적 이성 비판을 위하여』, 장춘익 옮김, 나남, 2015.

_______________, 『의사소통행위이론 1 행위합리성과 사회합리화』, 장춘익 옮김, 나남, 2016.

이진우, 급진민주주의의 규범적 토대, 이진우 엮음, 『하버마스의 비판적 사회이론』, 문예출판사, 1996.

장명학,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과 토의민주주의, 『한국정치연구』 12(2), 2003.

정선기, 『문화사회학 가치의 제도화와 생활양식』, 충남대학교출판문화원, 2011.

프랑크푸르트학파 3세대로 분류되는 악셀 호네트(Axel Honneth, 1949년 7월 18일 - )


*이 글은 Axel Honneth. "The Fragmented World of Symbolic Forms: Reflection on Pierre Bourdieu's Sociology of Culture", Theory, Culture and Society, vol. 3, no. 3, 1986.를 요약한 글이다.


서론


부르디외는 사회적 삶을 통해 드러나는 상징적 형식들의 세계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정통 맑스주의자들이 단순히 경제적인 재생산을 이야기한 것과 다르게 문화적 관습, 상징적 형식들의 공간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맑스주의자로 남아있다. 그는 맑스주의를 가볍게 비판하지 않고, 계급투쟁 개념에 있어 맑스주의 이론과 논쟁적인 하나의 패러다임을 구축한다. 부르디외는 계급투쟁 개념을 기초로 하여 사회구조를 분석하는데, 이는 문화적 실재에 관한 연속적인 연구를 위한 것이었다. 부르디외는 이런 연구를 통해 전통적인 사회학에서는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를 하나로 결합하여 연구한다. 어떻게 두 요소가 통합될 수 있는지, 부르디외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상징적 형태로 문화를 어떻게 다루는 지에 대해 뒤이어 다룰 것이다.



부르디외의 『실천이론의 개요(Outline of a Theory of Practice, 1977)』은 1950-60년대 쓴 인류학 에세이의 모음집이다. 부르디외는 프랑스를 지배했던 레비스트로스로 대표되는 구조주의 인류학에서 벗어났다.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에서 인류학자로서 부르디외는 카바일(Kabyle)족의 신화와 결혼 의례를 폐쇄된 의미(기호)체계로서의 언어학의 모델로 해석했고, 이는 인간의 마음에 있는 구조적 법칙과 연관성을 가졌다. 부르디외는 이어지는 연구에서 레비스트로스의 이론과 연관된 몇 가지 연구사례를 제시한다. 그러나 부르디외는 레비스트로스주의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부족의 상징적 분류와 사회적 실재의 불일치를 발견한다. 친족관계 또는 부족의례의 언어적 표현은 레비스트로스의 주장처럼 보편적으로 엄격한 문법을 따르지 않았다. 이러한 경험적 반박은 구조주의자들의 기반을 흔들어 놓았다.


상징적인 것의 모호함을 설명하기 위해 부르디외는 원주민들의 사회를 예로 든다. 부르디외는 집합적으로 공유되는 체계가 집단의 계급적 이익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원주민들의 상징적 분류에서 나타난 차이들은 부족사회 내에서 경쟁하는 친족집단들 자신들의 위치를 상승시키기 위해 이해관계에 따라 상호주관적으로 기호체계를 다르게 해석하려 한다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부르디외는 상징적 형식들이 이해관계에 따른 투쟁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레비스트로스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무너뜨린 것 같다. 원주민이 현실에 질서를 부여한 상징체계는 인간 마음에 있는 논리의 산물이 아니라 사회적 집단들의 투쟁의 결과인 것이다. 이미 부르디외는 그의 인류학적 작업에서 구조주의에 대한 비판을 ‘실천의 경제학’이라는 개념을 통해 준비했고, 이는 “인간의 모든 행위는, 경제적 목적이 있든 아무런 목적이 없어서 경제적 동기가 없든, 배후에 경제적 동기를 품고 있다”라고 표현된다. 부르디외에게 인간의 모든 행위는 물질적·상징적 재화의 획득을 최대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부르디외는 경험적으로 인류학적 구조주의 비판을 조정하고, 상징적 실천을 실용주의 형식의 적용과 아비튀스 개념의 논리적 확장으로 이끈다. 아비튀스 개념은 무의식의 수준에서 집합적으로 담지되는 평가의 도식이다. 부르디외는 집단적 성향에서 기인하는 아비튀스 개념을 통해 개인의 지평을 뛰어넘는 사회적 실천·행위의 근원을 설명한다.



부르디외는 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행위의 ‘경제학’ 이론을 발전시킨다. 부르디외가 카바일족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본 것은 지위를 두고 벌어지는 끊임없는 친족집단 사이의 경쟁이었고 이것은 상징적 분류학(taxonomy)를 통해 이루어졌다. 부르디외는 사회적 투쟁의 장으로서 변환되는 상징적 형식들의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인류학적 연구를 진행했다. 친족집단으로 구성된 부족사회에서의 집단 간 경쟁은 직업집단으로 구성된 발전되 계급 구조화된 사회에서의 상징적·경제적 “자본”을 둘러싼 투쟁을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 복잡해진 현대사회를 설명하는 데 있어도 인류학적 연구에서 기원한 상징적 투쟁의 모델은 경유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인류학적 연구의 성과를 산업사회에 적용하는 것에는 몇몇 이론적인 차이가 요구된다. 상징적 형식들의 지위를 변화시키고, 제도적 장치의 역할을 첨가해야 한다. 부르디외는 근대화 이후의 사회에서는 “상징자본”을 둘러싼 투쟁이 더 이상 단순한 형태의 직접적인 경쟁의 양상을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고, 문화적 지식의 습득과 보유에 관한 투쟁의 형태를 취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러한 문화자본을 둘러싼 투쟁은 교육기관을 통해 이식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부르디외의 시각이 담긴 책이 『구별짓기』이고, 이는 부르디외 이론의 정수이다.



부르디외는 “구별짓기”에 관한 본인의 조사와 전통적 미학 비판을 결합한다. 미학적 판단은 다양한 계급들에 의해 구성된다. 예술작품에 대한 미학적인 인상은 몇몇 미학적인 인상들의 자발적이고 독립적인 판단이 아니라 교육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사회적 구성물임을 부르디외는 지적한다. 이러한 취향은 특정계급을 통해 교육된다. 부르디외는 이러한 관점을 비판적으로 발전시켜 칸트주의 미학을 비판하고 이것이 『구별짓기』의 부제인 “판단력 비판에 대한 사회적 비판”으로 이어진다. 그는 일반적인 미학장(場)을 사회학적으로 폐기시킨다. 예술에 대한 판단이 스포츠나 음식을 대하는 태도와 구별성을 갖지 못하게 되면 미학적 판단은 유효성을 잃게 된다. 부르디외의 미학 비판에 숨겨진 의도는 문화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하는 데 있다. 그는 식습관, 옷차림, 예술에 대한 판단 등에 교묘하게 숨겨진 법칙을 발견했고, 이러한 매일의 문화적 실천 속에서 그의 연구의 진정한 목적을 찾을 수 있다. 사회적 공간에서의 고급 취향은 특정 계급의 취향의 설득과 지배를 통해 구성된다. 부르디외는 현대사회의 문화 연구를 통해 자신의 인류학적 연구의 가설을 뒷받침한다. 다시 말해 특정 집단적으로 드러나는 사회적 습관, 생활양식은 사회적 투쟁의 전략이다.



사회적 행위의 유용성 개념은 부르디외 사회이론과 문화 분석의 토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집단들은 자신들의 더 좋은 사회적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한다. 부르디외는 이러한 사회의 모습을 설명하기 위해 사회적 행위자를 포커게임에 참여하는 선수에 비유하여 표현한다. 사회적 투쟁의 경기장에서 각기 사회적 집단에서 소유하게 된 다양한 사회적인 자본의 자원을 가지고 투쟁에 참여한다. 이 투쟁의 목적은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위한 것이다.


부르디외의 자본개념


경제 자본 : 여러 생산 요소들과 수입, 유산, 물질적 재화와 같은 경제적 재화의 총체로 구성된다.


문화 자본 : 학교제도에 의해 양산된 것이든 가족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든 지니고 있는 지적 자격의 총체에 상응한다. 이 자본은 첫째, 신체에 체화된 형태, 문화적 재산과 같은 객관적 상태(예술품, 도서), 사회적으로 제도화된 형태(학위·자격)로 존재한다.


사회 자본 : 기본적으로 개인 혹은 집단이 가진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이다. 이 자본을 소유한다는 것은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작업, 즉 초대, 공동 여가활동 등의 사교활동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르디외는 경험적인 연구의 목적을 위해 비교적 덜 까다로운 개념인 교육자본을 “문화적 자본의 공식적으로 인가된 부분”으로 정의하고, 교육과 문화적 자본 사이의 관계에 취득한 학위와 전문가의 직업에 가치를 부여한다.


부르디외는 경쟁적인 사회적 투쟁이 이러한 자원을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한 일련의 전략을 수반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미 다양한 사회적 집단들은 그를 위해 나름의 경제적 부나 문화적 자원들을 소유하고 있다. 부르디외는 사회적 배제 개념을 암묵적으로 사용하는데 이는 막스 베버의 계급 이론에서 기원한다. 여기서 “사회적 배제(social closure)”는 사회적 공동체들이 자신의 특권과 기회를 강화하거나 유지시키는 전략을 의미한다. 부르디외는 사회의 규모와 상관없이 이러한 투쟁이 실천적 요소로 사회에 일반적으로 발생한다고 보았고, 사회적 삶의 특정 측면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집합적인 사회적 투쟁, 장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고, 동시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것을 “사회구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영구적인 투쟁에 대한 방법론적인 의심은 부르디외의 저작에서도 나타난다. 부르디외는 방법론적 지위뿐 아니라 계급에 대한 이론적인 기준에 대해서도 평가한다. 『구별짓기』에서 경제·문화자본으로 프랑스 사회구조에서 객관적 계급을 측정한다. 부르디외는 맑스주의의 전통적 계급에 영향을 받았고 이것이 그의 사회적 분류의 기초가 된다. 부르디외는 생산수단의 소유여부로 계급을 구분하는 데에 동의한다. 그러나 상류계급은 경제적 부에 상응하는 문화자본도 소유해야 한다. 이러한 시도는 고전적 계급이론에 대한 부르디외의 도전이다. 다음 기준으로 부르디외는 사회적 구조, 즉 “복합 구조(composition structure)”에서의 객관적 계급을 측정하기 위해 개인의 자본이 특정 관계와 시간에서 다르게 평가받는 부분을 지적한다. 이를 통해서 부르디외는 사회집단들이 경제자본의 크기로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구조에 의해 분류되며 수직적이고, 수평적으로도 분류된다고 파악한다.


이러한 계급의 이차원적인 확장을 통해서 계급의 수직적 구조(경제자본)와 수평적 구조(문화자본)를 함께 고려할 수 있게 되었고, 동일 집단 안에서 이루어지는 투쟁에 대해서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계급이론의 수정은 부르디외 연구의 기초적인 것이다. 그의 행위이론은 사회계층의 분석에 기반을 둔다. 그의 이론은 사회적 불평등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하고, 특정집단에 관한 미시사회학의 이론틀을 제공하기도 한다. 부르디외는 방대한 사회조사를 통해 얻게 된 경험적 자료를 통해 “사회적 위치의 공간들”을 구성한다.


“구별짓기” 개념은 문화를 통한 일상적 계급지배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문화적으로 더 우월한 가치, 생활양식은 다른 문화적 가치나 생활양식을 대중적이고 통속적인 취향으로 구별한다. 이것은 상징적 지배이다. 하층계급은 예술작품에 있어 수수함이나 실용적인 기능을 찾는 경향이 존재한다. 낮은 사회계층의 아비튀스는 경제적으로 제한적이고 억압적인 실존적 상황의 어려움을 현실적 쾌락주의, 실용적 쾌락주의를 통해 해소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다. 사회의 일상적인 문화적 실천은 “지배계급”, “중간계급”, “하위계급”의 투쟁으로 점철된다. 이러한 세 집단 사이의 투쟁은 양식적 배제의 높은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부르디외의 작품 일부 구절에서 그가 제시하는 경험적 자료들은 오히려 그의 이론적 토대에 반대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부르디외 연구의 핵심에 놓인 오해이다. 부르디외는 ‘구별짓기의 표지’와 문화적 타당성에 대한 기준을 뛰어 넘는 사회의 경쟁을 연구하기 위해 “실천의 경제학”이라는 측면에서 사회집단의 전체적인 삶의 형태를 전체적으로 인식하는 접근법을 제시한다.



부르디외의 연구는 사회학적 계몽이 항상 추구해왔던 과학적 탈신화화의 과정으로 지속된다. 부르디외가 일상 문화에 대한 경험적 분석과 개념을 연결하는 부분은 모호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을 간과하더라도 부르디외의 이론은 내재적인 차별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부르디외는 맑스주의와 베버주의를 혼합하여 독창적인 결과물을 얻고, 이를 통해 계층화된 사회의 문화분석을 가능케 하는 미시사회학적 이론틀을 획득한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사회 집단의 위치와 삶의 기회를 경제·문화적 재화에 의해 측정하고 이것은 사회적 투쟁을 통해 경제적 부와 명예를 획득하게 해준다. 부르디외는 “제도화된 학력”이 돈에 버금가는 매체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재화들이 사회적 투쟁에서 집합적 생활양식에 작용하는 역할을 살펴보면 부르디외 사회학의 핵심 개념인 아비튀스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삶의 양형식과 타고난 기질의 취향은 각기 다른 사회 집단에서 다른 문화적 사회화를 통해 획득된다. 특정한 계급적 배경을 통해 개인은 무의식적으로 그들의 가치와 취향에 대한 판단에 적응하고 이를 가지고 사회적 위치의 상승을 위한 전략적 행위를 실천한다.


여기서 부르디외는 구조주의자들의 개념적 도식을 사용하는데, 그는 다른 집단과의 “차이”에 의해 결정된 사회적 집단의 “의미” 또는 “가치”를 사용한다. 사회적 집단들은 각기 다른 직업적 집단의 전략적 표현의 상징적 형식을 통해 자신들의 우월성을 주장하고, 그들의 집합적 정체성을 유지시킨다. 사회적 집단들은 상징적 구별직시를 통해 그들 스스로를 차별화한다. 부르디외에 의하면 각 사회적 집단들은 자신들이 가진 “구별짓기의 표지”를 다른 집단에 강조하기 위해 투쟁한다.


부르디외는 “계급투쟁의 잊힌 차원”으로서의 사회세계의 상징적 분류에 의한 투쟁을 주장하고, “계급투쟁의 잊힌 차원”은 사회의 문화적·도덕적 모델의 경쟁을 통한 집합적 생활양식의 경기장으로 수렴한다.


피에르 부르디외(1930-2002)

전수조사와 표본조사란?


일반적으로 통계조사는 전수조사(complete enumeration survey)와 표본조사(sample survey)로 구분된다. 전수조사란 연구에 있어, 관심의 대상이 되는 집단의 안의 모든 단위들을 빠짐없이 모두 다 조사하는 방법을 가리킨다. 5년마다 전국민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인구센서스, 정부의 인구주택총조사가 대표적인 전수조사의 예이다. 전수조사는 모든 대상을 조사하므로 막대한 경제적 지출이 소요된다. 그렇기 때문에 인구주택총조사와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 현대 사회과학에서 진행되는 대부분의 사회조사는 표본조사로 이루어진다.

표본조사는 연구의 관심이 되는 전체에서 일부의 부분 집단을 선택한(sampling) 후 그 일부 집단을 분석하고 이를 통해 모집단(전수)의 특성을 추정하는 방법이다. 표본조사의 장점으로는 첫째 비용 절감, 둘째 신속한 결과도출, 셋째 심도있는 조사가 가능하다는 점, 넷째 제대로 된 표본을 사용했을 때, 오히려 전수조사보다 정확도가 높다는 점 등이 있다. 반면에 표본조사의 단점으로는 잘못시행 됐을 경우 심각한 오차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과, 대상집단의 세부적인 특성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 등이 있다.

초점집단이란?


초점집단(focus group)이란 함께 모여 면접하는 피험자집단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들은 논의의 증진을 위해 일시적으로 소집된다. 초점집단은 주로 상품평가와 같은 소비자의 의견과 경향을 파악하기 위한 시장조사자가 사용하곤 한다. 이러한 초점집단 면접은 질적 연구방법의 하나로, 이는 구조화·준구조화·구조화 되지 않은 면접에 기초한다. 예를 들어 기업에서 새로운 상품을 판매하려고 시도할 때 이런 방법을 사용하고는 하는데, 구체적으로 새로운 전자기기가 특정의 기능을 가지고 특정한 시장판매가에 사용될 때 소비자들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이러한 예측을 하는 방법으로 자주 사용된다. 주로 초점집단은 5-15명으로 이루어지고, 이 방법은 실생활을 포착하는 것, 융통성, 타당도, 빠른 결과, 비용 등의 측면에서 장점을 지니고 반면에 통제하기 어려움, 분석의 어려움, 중재자에게 기술 요구, 집단 간 차이로 인한 어려움, 모집의 어려움, 토의 환경 조성 등의 문제를 가진다.

‘생태학적 오류’와 ‘개인주의적 오류’란?


생태학적 오류(ecological fallacy)란 집단을 관찰하여 얻을 사회과학적 결론을 개인에 적용하는 오류를 말한다. 여기서 생태학이라는 말은 집단, 무리(sets), 체제 등으로 지칭하는 말로서 개인이라는 단위보다 큰 특정의 것을 의미한다. 일례로 어떤 특정한 지역에서 한 정당이 우세한 득표율을 보인다고 해서 그 지역에 사는 개인이 꼭 득표율이 우세한 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또 사회학의 고전적인 연구인 뒤르켐의 『자살론』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 카톨릭 국가보다 개신교 국가의 자살률이 더 높다고 하더라고, 가톨릭 교도보다 개신교도들이 더 많이 자살했다고 결론을 내리기는 어려운 것이다.

반면에 개인주의적 오류(individualistic fallacy)도 주의해야 한다. 개인주의적 오류는 제비 한 마리가 날아온다고 봄이 오는 것은 아니라는 속담을 통해 이해하기 쉽다. 예를 들어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부유한 유권자를 발견했고, 이를 통해서 부유한 유권자는 진보정당을 지지한다는 결론을 내리면 이것은 개인주의적 오류를 범한것이다. 이러한 소수의 개별 사례를 발견했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담지되는 전체적인 경향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제 3장 진화 - 여덟 번째 강의


진화이론의 선택과 배제


특정 이론을 전제하는 것은 곧 다른 이론을 배제하는 것이다. 진화이론을 선택하게 된다면 창조이론과 역사이론(역사의 단계분할 구상)을 배제해야한다.


진화이론과 일반 형식


루만은 진화이론을 추상적 상태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반 형식이며 이는 다윈을 참조한 것이다. 진화의 일반 형식은 변이, 선택, 안정화로 이루어진다. 변이는 어떤 것이 달라짐을 의미하고, 선택은 변이된 사태들을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으로 붙잡음을 의미하며, 안정화는 선택이 성과를 가질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를 그 다음 나타남 속에서 원칙적으로 구별하는 것을 의미한다. 루만은 이를 토대로 변이, 선택, 재안정화의 3조로 구성된 구별을 제시한다. 특별히 재안정화는 어떤 특징들이 제안되고 변이되어 수용될 경우와 포기되는 두 경우 모두에서 필요하다. 이것은 혁신을 도입하지 않고 거부했을 때, 그것을 감내한다는 측면에서 중요하고, 또한 사회이론에서 중요한 논점이다.


진화이론과 우발성


변이, 선택, 재안정화 개념들의 차이는 전형적으로 우발 개념을 통해 표시된다. 이를 통해 진화이론은 비합리적인 면모를 지니게 되고, 이것은 진화가 예견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루만은 근대 인과이론과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우발을 “체계에 의해 조정되지 않은 모든 것”으로 정의한다. 이것은 변이·선택·안정의 도식을 수용할 때, 이 모든 것이 체계에서 발생하지만 체계는 그에 준비되어 있을 수 없다는 것, 또는 변이 역시 선택적으로 성과를 가지며 전체가 안정적일 수 있음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발이란 체계이론에 있어 체계가 완전히 고유한 것에서만 진화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지표이다.

발전이나 가능성들의 전개에는 내재적인 법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진화는 언제나 체계에 접한 부분에서, 체계 안에서 이루어지지만 환경에서도 발생한다. 체계가 환경을 완전히 흡수할 수 없기 때문에 우발의 효과가 나타난다. 이 경우에 변이·선택·재안정화의 통합의 부재가 존재한다.


진화이론과 두 가지 논점 : 진화이론의 목적과 방향


진화이론에 관한 첫 번째 논점은 진화이론을 무엇을 설명할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루만은 진화이론이 역사적 상태를 설명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역사학자의 작업을 이론의 형식으로 옮겨 그들이 설명하여 시도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 진화이론의 목적이 아닌 것이다. 루만에게 진화이론의 목적은 ‘계획되지 않은 구조변경’에 있다.

루만은 계획이론을 진화이론 속에서 검토한다. 우리의 편견과는 다르게 계획을 예견되거나 조정되지 않은, 우발의 효과를 지닌다. 그리고 계획은 이점에 있어서 다시 진화에 영향을 미치는 진화의 한 요인이다. 행위이론의 구상은 자원(自願)하지 않은 행위나 의도되지 않은 효과들이 발생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계획하고 그것이 어떤 것에 도달하든, 하지 못하든 진화는 존재한다. 체계는 계획될 것을 수용하며, 특정하면서도 고유한 방식으로 그렇게 되는 것에 저항하기도 한다. 더불어 체계는 사물들이 빗나가도록 만들고, 사람들이 다음 순간에 그들의 계획을 번복하도록 만들고, 충족된 기대들로부터 실망들을 만들어내는 등의 반응도 포함한다. 계획은 진화를 추진하는 요인들 가운데 하나이다.

진화이론의 두 번째 논점은 진화의 방향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진화이론은 역사의 진보모델에 대한 회의에서 시작되었다. 진화는 ‘가치중립적’이다. 허버트 스펜서의 경우 낙관적인 역사발전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사회학을 구조적인 노선으로 변화시켰고 이를 통해 진화는 거부되었으며 뒤르켐의 분업과 같은 구조의 질문들이 전면에 부상했다.

진화는 진보를 의미하지 않을 때에도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진화의 방향은 첫 째, 정상화를 증대시키거나, 비개연적인 것들을 개연성 있도록 만든다. 이것은 통계학적인 개연성의 개념은 아니다. 인류는 다양한 영역들을 제도화했다. 근대 세계는 개연적이지 않음에도 우리는 새로운 진화상 성취들을 구축했고 그것들을 비교적 정상적인 것으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 진화의 방향성에 복잡성 개념을 추가하고, 더 높은 복잡성 구출을 진화의 반향으로 간주한다면 다른 표현도 가능하다. 복잡성 개념은 그 즉시 수정을 필요로 하는 문제 있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항상 더 복잡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더 높은 복잡성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할 때, 그것은 모든 것이 점점 더 복잡해진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전제조건 없는 단순한 사회 형식과 복잡한 전제조건을 필요로 하는 사회에도 동시성이 존재한다. 여기서 자기생산 개념을 덧붙이면 자기생산이 붕괴하지 안흐면서 복잡성이 얼마나 높아질 수 있는지를 진화가 시험한다고 말할 수 있다. 고도로 복잡한 체계들이 환경에 대한 높은 민감성이나 교한 가능성에도 고유한 구단들을 갖고 여전히 자기생산적으로 재생산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자기생산이 붕괴하지 않는 조건에서 파괴적인 효과 없이 복잡성을 가능하게 한다는 진술은 진화이론에서 가치중립적인 방향 개념을 발견하려는 하나의 시도로 생각할 수 있다.


진화이론과 적응


루만은 다윈의 이론은 근본적으로 진보이론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포유류, 조류, 곤충 등의 상이한 종의 분화가 곧 진보가 아니듯, 진화이론도 진보이론이 아닌 것이다. 이와 관련해 루만은 ‘적응’개념을 중요하게 다룬다. 고전적 진화이론은 체계가 적응된다는 것을 많건 적건 도달될 수 있는 변수로 보았다. 그것은 복잡한 체계들이나 생존하는 체계들이 환경에 더 잘 적응되어 있는 것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이런 진술은 마투라나에 의해 반론을 받게 된다. 마투라나의 자기생산 개념은 앞선 고전적 진화이론을 대체하고, 루만은 이를 사회이론에도 접목하려고 한다.

자시생산 체계는 자기생산이 환경에 의해 관용되지 않으면, 더 이상 자기 생산을 해낼 수 없다. 환경은 방향을 제시하지 않으며, 명백하게 상이한 것을 허용하면서 진화가 막 시행되는 것을 시험해보도록 추동한다. 하지만 이것은 환경이 그 시점에 앞에 내어놓는 것, 이미 현실에서 실현된 것과의 관계에서 적합성이 있다는 전제조건에서만 그렇게 한다.

이와 비슷한 문제도 존재한다. 하나의 진화하는 체계가 있고, 다른 모든 것은 환경이며 지속적으로 환경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환경 안에 또 다른 진화하는 체계들이 있다고 말해야 하는 상황과 관계가 있다. 체계와 관경의 관계는 진화를 하나의 지점에서 추진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환경에도 마찬가지로 진화하는 체계들이 있다. 그리고 그렇기에 상호작용이 생성되며, 그것은 누가 누구에게 적응하는가 하는 질문을 만들기도 한다.


진화이론의 방향성 - 과정 범주


루만은 진화를 역사적 과정으로 보는 것을 정상으로 간주한다. 19세기 역사 이론에서 진화와 과정을 함께 나타난다. 우선은 헤겔을 통해 구축된 과정 범주는 하나의 역사적 과정이 존재한다. 개념사를 고찰하는 한, 과정의 보편사 모델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 복제되는 화학적 또는 법률적 절차가 있다. 그것은 선택적인 사건들이 서로 조정된 연속이다. 역사는 과정의 역사인가? 다른 한 편 다윈의 차이주의적 이론은 과정을 기술한다기보다는 종의 다양화라는 결과를 기술한다. 하지만 진화가 과정인지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앞 선 두 질문에 답하기 위해 관찰을 도입해야한다. 구체적으로 두 가지 상이한 관찰과 구별을 상정할 수 있다. 먼저 차이 도식을 활용한 과학적 진화이론이 있다. 루만의 경우에는 구조 변경을 변이와 선택을 갖고 설명하고자 할 때 진화이론을 사용한다. 이것은 관찰을 위한 도구이다. 루만은 역사를 이 구별들을 통해 관찰한다. 이것은 ‘특정한 구별들을 가진 관찰자로서 작업하는 과학철학 이론’으로 작업 범주화할 수 있다.

다른 관찰은 사회가 진화이론 자체를 통해 거의 이데올로기적으로 자신을 기술한다는 것이다. 사회 내에는 시점(時點)적 지향이 요구된다. 이 시점성은 진화이론을 통해 형성된다. 이에 의해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 입증된 자들의 선택의 역사 같은 맥락으로 보일 수 있고 이를 통해 사회의 자기기술 차원에서 이에 부합하는 귀결들을 초래하는 부분적인 측면을 지니게 된다. 그 귀결은 민족주의 또는 기업가 정신과 관련된 것이다. 특별히 19세기 말의 이데올로기적 기술은 이런 토대를 과장한다.

진화이론의 진술 능력을 제한하는 시도의 목록에서 마지막 관점은 19세기 진화이론이 오늘 더 이상 수용되지 않는 특정한 전설을 기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펜서는 진화가 진보, 복잡성, 사용될 수 있는 것, 능력 있는 것들을 구별함, 그것이 무엇이든 그 방향으로 점진적인 변화라고 보았는데, 이는 이제 기각될 주장이다. 역사에는 후퇴와 정체, 급격한 변화도 존재한다. 더불어 불연속성, 발생을 정확하게 확정할 수 없는 비약의 영역들도 존재한다. 그렇기에 루만은 비약성, 돌방성을 진화이론에 포함하여 이론을 구축할 때, 고전의 이론을 극복하고 이론을 계속 사용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또 다른 질문은 진화가 필연적이라는 의미에서 특정 역사적 법칙을 전제할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상이한 발전의 계기들이 있으면 결과가 생성되고, 그럼으로써 필연성이 진화에 덧붙여진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납득될 수 있는 확신이며, 이것은 등종국성이라는 표제어를 통해 입증될 수 있다. 등종국성은 상이한 출발점에서부터 같은 결과를 이룬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는 변이·선택·재안정화로 고려했을 때, 필연성을 의심할 수 있게 된다. 변이·선택·재안정화로 보면 분화가 어떻게 성립하는가를 묻게 되기 때문이다. 선택과 연관이 없고, 선택을 미리 형상화하지 않으며 단순히 발생하거나 발생하지 않는 변이들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이런 질문들이 진화적인 구별의 진화의 테제로 이끈다. 진화 자체가 진화의 결과이다. 진화는 모든 것이 우연적이라는 테제로 이끈다.


사회문화적 진화이론의 특수성


변이·선택·재안정화의 추상적인 표현들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것들은 어떻게 성립하는가? 생물학적으로 변이는 돌연변이가 담당한다. 변이는 유전적 구조에서의 화학적 변화이며 양성(兩性)에 의한 재생산을 통해 강화되었다. 선택은 성징(性徵)의 발전이나 재생산 능력에까지 이르는 생존이다. 한 유기체는 다신의 변이된 유전자를 가지고 다음 유전자를 전달할 때까지 생존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 환경이 작용한다. 안정화는 그것이 인구의 차원, 유전자 풀의 차원에서 완전히 분리될 때 나타난다. 이는 돌연변이가 어떤 특정 수준에서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물학적 범주의 수용에 대한 결정적인 이의 가운데 하나는, 앞서 언급한 것이 사회문화적 진화에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고, 부분적으로 여기서 하나의 목적론적 구조가 작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행위에는 어떤 지향적이 구조가 존재해서 변이·선택·안정화의 분리에 순응하지 않고, 성공하든 실패하든 이에 대응한다고 툴민은 사회문화적 진화이론 적응에 이의를 제기했다. 루만은 이 이의에서 언제나 예기치 않은 결과가 나타난다고 말함으로써 툴민의 주장이 반박될 수 있다고 한다. 행위이론, 주체이론, 기질주의적 접근은 예기치 못한 결과를 고려하지 못한다.

루만은 자신을 세포들, 유기체들, 인구들처럼 제한된 체계는 보는 것을 배제하는 지시구조의 문제가 “의미” 매체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의미를 지니는 지향은 그 자체 안에 공간 경계와 시간 경계를 갖지 않고, 그러한 관점은 기제들을 상이한 체계 층위에 배분하여 변이는 이 체계에서 일어나고 선택을 다른 체계가 책임지고, 재안정화는 또 다른 체계가 결정한다고 말하지 어렵게 한다. 이렇기 때문에 변이·선택·재안정화의 물질화나 어떤 기제들을 통해 사용되는지의 기본 질문에 대한 다른 해결책이 요구된다.

변이는 사회체계 안에서 요소들, 작동들, 사건들의 층위에서 발생한다. 어떤 것은 그 순간 달리 발생하고 다시 사라진다. 선택은 구조의 사안이 된다. 사건들의 연동을 위한 구조 형성은 어떤 구조가 사용될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에 관해 광범위한 선택 결정이 내려지는 지점이다. 그리고 재안정화를 위해서는 체계 형성 그 자체 또는 ‘체계-환경 차이’가 고려 대상이 된다. 선택된 구조가 안정적이 될 수 있는 것은 체계가 다른 구조들의 수많은 수정들을 통해, 그 변경이나 변경의 억압에 적응하여 ‘체계-환경 관계들’이 자기생산을 계속해서 관용하게 될 때일 것이다.

조금 더 심화해보면 변이를 작동의 층위, 즉 발생하고 그 즉시 다시 비현재화되는 소통들의 층위에서 관찰하면, 변이는 언어 코드의 부정적인 면의 사용으로 생각할 것이 추천된다. 어떤 기대가 있고 그 기대가 주도적이든 반응적이든 부인되면 이것은 기존의 기대 구조와 관련하여 변이이다. 이것은 개별 작동에서만 변이이다. 구조 변경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변이들은 많다. 그 다음에는 어떤 가속화 기제가 작동한다. 이는 양성적 재생산과 유사성을 생각해볼만하다. 소통 안에 아니오를 구축할 가능성은 진화의 결과로서 증가하고, 이제는 대향의 아니오들 대량의 부정들이 나타날 수 있고, 그것을 감당해낼 수 있을 구조들이 선택의 압력을 받게 된다는 의미에서 진화를 가속화한다.

이 개념의 측면에서 선택과 관련하여 문제는 구조들의 층위에 있다. 다시 말해 구조들이 변화할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사건들은 바뀔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 체계를 구성하는 “재료”는 불변의 성질이다. 변경 가능성을 구축하려면 시간 상수를 만들어야 한다. 구조의 층위에서만 변경 압력이 발생가능하다. 그리고 그 층위에서만 어떤 변경에 대해 예 또는 아니오를 말할 수 있다. 변경이 거부되더라도 이 또한 이전의 구조와는 다른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체계는 일정한 기억을 갖는다. 거부된 것은 조건이 바뀌고 새로운 생각들이 고려되면서 다시 나타나고 이것이 재안정화가 한 번 더 필요한 이유이다. 루만은 종교의 예를 들어 설명을 진행하고, 부분적으로 종교는 적응시키고 부분적으로 압력을 거부하고 더 큰 변이의 범위를 처리할 수 있는 결정 구조를 가지며 압력을 흡수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다음 단계는 ‘상징적으로 일반화된 매체’의 발전을 변이를 관철시키는 가능성으로 보는 것이다. 상징적으로 일반화된 매체를 통한 발전은 종교를 통한 변이와는 달리 반드시 규범적인 근거를 갖출 필요가 없는 변경 가능성들이 만들어진다. 매체 발전과 종교나 도덕의 발전 사이의 괴리는 근세에 이르기까지 전체적인 고도문명을 관통한다. 이에 따라 구조적인 선택성이 형성되자마자 종교를 통해서나 매체를 통해서 진행되며 비교적 유일신적 방식으로 대변되어야 할 것으로 제한할 수 있는 결과들을 가지게 된다. 아니라면 다양한 매체들의 관계들과 같은 상이한 매체들을 갖고 작업하고, 그 다음에 변이 제안들에 대한 반응의 범위 내에서 조정되지 않은 상태를 수용해야 한다.

루만은 이 고려를 진척시켜 안정화 또는 재안정화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루만은 체계 경계의 재생산 또는 체계의 자기생산 그 자체가 안정화나 재안정화의 기제라고 정의한다. 변이된 구조들과 관계를 갖게 될 때는 그것이 사회 내에서 어느 정도로 ‘체계-환경 관계들’을 수단으로 실행될 수 있는지를 질문하게 된다. 근대사회가 지금 그러한 정도에서, 선택적인 구조변경을 통해 변이들을 유효하게 하고, 이때 ‘체계-환경 관계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안정적일 수 있을지는 질문하게 된다. ‘체계-환경 개념’을 갖고 안정화 요소를 선택 과정으로부터 더 분명하게 분리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질문해야 한다. 이것은 근대의 특수성인지 질문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일차 기제의 이러한 이중 상황을 갖게 된다. 사회에 경계가 없다면 내적 분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적 분화를 통해 한 번 더 안정성을 위한 잠재력을 상승시킨다. 이것은 사회 차원의 조정을 포기한 가운데 일어나는 일이다. 예를 들어 청치체계들이 혼자 힘으로 안정화되고 자신들의 환경에서 좌초할 수 있는 문제들 스스로 조정해야 한다면, 그것을 통해 사회 차원의 질서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spurious relationship을

 나타내주는 그림

 

의사적 관계(spurious relationship)과 억압 관계(suppressor relationship)의 개념과 예시

 

 

 

사회학의 연구에 있어, 상관관계에서 인과관계를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구체적으로 ‘법칙정립적 설명’을 하는데 인과관계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특별히 중요하다. 연구자 또는 조사자가 특정한 사회현상에 대해 질문을 가지고 이를 탐구하며 두 변수 사이에 인과관계를 찾는 과정 속에는 몇몇 장애물들이 존재하고 그런 장애물을 통해 잘못된 관계들이 맺어지기도 한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들이 의사적 관계(spurious relationship)과 억압 관계(suppressor relationship) 같은 것들이다. 이후의 글에서는 이 두 개념의 의미와 예시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먼저 의사적(擬似的) 관계란 허위관계로 번역되기도 한다. 의사적 관계란 두 변수 사이에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을 때를 가리키며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변수 간에 우연히 발견되는 통계적 상관으로서, 어떤 제3의 변수에 의해 유발되는 것을 말한다. 다양한 예가 존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초등학생의 키와 수학(修學) 능력과의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 두 변수는 키가 클수록 수학능력이 증가하는 관계를 가질 것이다. 하지만 보통 초등학생들은 키가 클수록 고학년이고 나이가 많다. 따라서 키가 커서 수학능력이 좋은 것이 아니라 고학년이기 때문에 수학능력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진짜 인과관계는 학년과 수학능력의 관계에 있다. 다른 예로는 지역의 소(牛)의 수와 박사학위자의 수를 생각해볼 수 있다. 아마도 소의 수가 적은 지역일수록 박사학위자의 수가 증가할 것이다. 표면적으로 이 관계는 옳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실상은 도시와 농촌의 인구구성과 산업의 차이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연구자가 인과관계를 올바르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관찰한 상관관계에서 의사적인 관계로 설명할 수 있는 제3의 변수가 있는지 탐구해야한다.

다음으로는 억압 관계이다. 억압 관계란 실제로 두 변수 사이에 관계가 있음에도 제3의 변수의 존재로 인해 그 관계가 나타나지 않거나 약화되는 것을 가리킨다. 또한 두 변수 사이에 있는 관계를 없애는 제3의 변수를 억압변수 또는 억제변수(Suppressor Variable)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한 연구에서는 노조원의 ‘노조원이 된 기간(4년 기준)’과 ‘유대인을 노조위원으로 임명하는 것’에 대한 태도의 관계를 연구했다. 그 연구의 최초분석에서 연구자는 두 변수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조원들의 연령이 노조원이 된 기간과 유대인에 대한 태도 사이의 관계를 ‘연령’이라는 변수가 억압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대체로 젊은 노조원들이 나이 많은 노조원들에 비해 유대인에 호의적이었고, 이들은 노조의 가입한 기간이 길지 않았다. 그러나 특정 연령집단들 안에서는 노조에 가입한지 가장 오래된 사람들이 유대인 노조위원을 임명하는 데 가장 호의적이었다. 이런 경우 두 변수 사이에는 억압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고, 연령이 억압변수로 작용함을 알 수 있다. 다른 예로 교육과 소득 사이에는 양의 상관관계가 존재한다. 하지만 연령이라는 변수가 교육과 소득에 영향을 미쳐서 연령이 높을수록 교육 수준은 낮고, 소득 수준을 높을 수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연령은 교육과 소득이라는 변수 사이에 억압변수로 작용하며 이런 영향이 미쳤다면 이 관계는 억압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사회조사의 과정에서 앞서 언급한 관계들을 파악하고 이를 통제하거나 연구의 설계, 연구과정에 있어 이런 효과를 제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를 통해서만 제대로 된 상관관계, 인과관계를 탐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연구자는 사전에 이러한 개념들을 제대로 숙지할 필요가 있으면 연구에 임하면서도 꾸준히 이를 유념해두고 성찰하면서 연구를 진행시켜야, 비로소 ‘과학적인’ 연구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본 문서를 사용하실 때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참고문헌

 

John Scott 엮음. 2014. 『A Dictionary of Sociology 4 Revised Edition』. Oxford Univ Pr.

Earl Babbie. 고성호 등 역. 2013. 『사회조사방법론 13판』. Cengage Learning.

 


Chapter 6 - The Early Death of The Problem of The Social


이 장에서 저자는 20세기 후반 사회학과 사회학 이론이 “사회적인 것의 문제의 죽음(the death of the problem of the social)”을 목격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사회의 종말(the end of the social)”에 대한 이야기와는 다르다. 저자는 “사회적인 것의 문제의 죽음”의 책임을 일부 파슨스에게 부과하겠다고 이야기한다. 저자가 학생들에게 ‘사회학’과 ‘사회의 영역(the social realm)’을 정의하라고 요청했을 때, 그들의 답변은 비슷하며, 그들이 규범, 가치 및 사회 구조의 개념을 사회학 연구의 대상과 사회의 핵심으로 삼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고 한다. 그들의 정의는 보통 파슨스에 의존한다. 파슨스의 용어는 사회학적 사고에 영향력을 미쳤다. 그러나 주된 문제는 그것이 “사회적인 것의 소멸의 문제”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은 맑스, 뒤르켐, 베버의 각기 다른 접근을 혼란시키고, 사회학과 사회세계의 비효율적인 이해를 야기하기도 한다. 결국 사회학은 모든 사회적인 것을 연구하는 것 같아 보이게 된다. 사회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개념화할 때, 확신은 증발되는 것처럼 보이고, 논증은 순환된다. 사회적인 것, 사회적 세계, 그리고 사회적 영역을 연구하는 것이 사회학과 사회이론이다. 저자는 사회적인 것에 대한 개념의 명확성이 부족한 이유를 파슨스의 연구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파슨스는 ‘사회’와 ‘사회의 개념’을 논의하는 데 있어 계속되는 어려움 중 일부를 상징적으로 제시한다. 또한 그는 그 문제들에 직접적으로 직면한 맑스, 뒤르켐 및 베버의 텍스트로부터의 변화를 목격한다. 사회적인 것은 파슨스에게는 의심할 여지 없는 당연한 것처럼 보이며, 우리는 파슨스가 그런 문제에 관해 무엇을 말했는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파슨스의 주요저작에는 주목할 만한 추정과 빈틈이 존재한다.


The Structure of Social Action Volume Ⅰ: Durkheim


파슨스의 사회적 행위의 구조(The Structure of Social Action)가 담고 있는 첫 번째 요점은 그것이 “사회적” 행위가 아니라 “행위”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행위는 파슨스의 작업에서 핵심인데 이것은 “사회적” 행위가 아니다. 그의 목적은 “구체적인 행위자의 행위분석과 복수의 행위자를 포함한 전체 행위체계, 행위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었다. 이것은 개별행위자와 보다 일반적인 행위체계라는 두 단계로 작동한다. 파슨스는 개인의 행위를 전적으로 “사회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또한 이들의 큰 그룹을 “사회”라고 명명하지도 않았다. 구체적인 행위자는 “부분적으로 사회적 환경”에 있다.

파슨스의 사회적인 것의 개념의 사회성을 구성하는 요소는 이점에서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행위이론의 주관적 범주에 동물의 삶의 수준을 포함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확실히 이야기한다. 파슨스는 사회성이 인간의 특권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이것은 홉스, 먀셜 및 파레토에 대한 파슨스의 논의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파슨스는 사회적인 것에 대한 고심 없이 그 용어를 자유롭게 사용한다. 공하게 말했을 때, 이 지점에서는 파슨스가 자신의 입장을 지지하기보다는 홉스, 마셜, 파레토가 궁극적으로 자신의 행위이론으로 지향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파슨스는 뒤르켐에게 의지할 때, 그의 생각과 위치가 더욱 분명해졌다.

파슨스는 뒤르켐의 연구를 검토하면서 뒤르켐의 주요문제가 “사회집단에 대한 개인의 일반적인 관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뒤르켐의 논의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으로 보인다. 파슨스에 의하면 뒤르켐은 궁극적으로 복잡성의 증가, 분업 등의 문제가 사회적 요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그것은 인구증가에 의한 생물학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파슨스는 뒤르켐의 사회적인 것의 관찰이 무엇이든지 생물학적이고 자연적인 것과 구별된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파슨스의 논증이라기보다는 추측이다. 앞서 논한 바와 같이 뒤르켐은 사회가 자연스럽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파슨스는 본인 또는 뒤르켐이 사회적인 것에 대한 개인 행위자를 이야기 하는 것이 이러한 개인과 그들의 더 넓은 사회적 환경 사이의 관계와 동일하게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했다. 파슨스는 구체적인 개인은 개인적인 요소만으로 설명될 수 없고, 그의 퍼스낼러티에는 사회적 구성요소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앞선 통찰은 파슨스에게 뒤르켐이 “사회적 사실”이 의미하는 사실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도록 했다. 파슨스는 뒤르켐은 종종 사회적인 것에 대한 부정적인 개념정의를 제공했다고 본다. 파슨스는 사회라는 범주가 제거과정에 도달했고, 따라서 사회는 잔여범주이다. 이것은 “집합의식”이 어떻게 “사회적 사실”로 불릴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로 이어진다.

뒤르켐은 개인과 개인에 외재한 사회적 사실 사이의 거리에 대해 강조했다. 파슨스는 이에 대해 ‘사회적인 것’은 무엇인지 질문한다. 이는 사회적 사실의 행위자에 대한 외재성에 문제제기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회적 사실의 외재성은 어떻게 개인에게 사회성이 생겨났는지 설명하기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슨스는 뒤르켐의 논의 중에 뒤르켐이 연합(association)에 의존하는 측면을 긍정한다. 파슨스는 사회성에 대해 “사회적인 것의 요소는 집합생활에서의 연합의 사실에 기반을 둔 인간행위의 구체적 실재의 요소”라고 말했다.

파슨스는 자신의 행위이론의 핵심 요소 중 하나를 의지 또는 노력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규범을 따르려는 노력을 제외하고는 행위가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행동의 규범적 측면과 비규범적 측면을 노력이 매개하기 때문이다. 파슨스는 뒤르켐에게서 숨어있는 자원(自願)론적 요소를 찾았다고 믿는다. 파슨스에 의하면 뒤르켐의 분업론이나 사회적 사실의 영역은 완전히 사회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보완해줄 다른 요소가 필요했다. 그래서 뒤르켐은 종교생활의 원초적 형태에서 열정을 통해 “사회적 사실”에 대한 자신의 연구의 어려움을 암묵적으로 해소한다고 평가했다.


The Structure of Social Action Volume Ⅱ: Weber


파슨스는 베버에 대해 열정적이었다. 베버는 파슨스에게 행위의 개념을 제시했다. 이는 사회학적 사고 이전에 시도했던 많은 시도들을 결합하는 역할을 했고, 파슨스에게 자신의 행동 이론에 대한 근거를 제시했다. 그러나 어떤 인물에 대해 열정적인 것은 가끔 중요한 결점을 간과하게 한다. 우선 파슨스에게는 베버의 위치가 명확하지 않다. 베버는 파슨스가 파악한 것보다 합리성과 자유의 관계를 더 다양하게 서술했을 것이다.

베버는 “사회적 행위(Sozial Handeln)” 개념을 뒤늦게 언급했고, 그러한 행동은 사회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보다 더 복잡해 보인다. 파슨스는 책의 제목은 사회적 행위의 구조라고 했지만 그의 저작에서 사회적 행위라는 문구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파슨스는 베버의 사회적 행위 개념을 정의하려고 할 때 사회적 행위 개념을 사용하고 이후에는 행동에 대해 서술한다.

베버와 파슨스에 사회적 행위에 관한 이야기는 두 가지 문제점 때문에 개념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첫 번째는 베버가 공동체적 행위(Gemeinschafthandeln)대신 사회적 행위(sozial handeln)라는 단어를 삶의 끝자락에서 선택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파슨스가 뒤르켐과 달리 베버에게는 ‘사회성’의 정의에 대해 엄격하게 접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파슨스는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구체적인 사회생활과 행위”없이 사회성에 대해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베버의 ‘사회적’ 행위와 관련된 파슨스의 핵심 주장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구체적인 사회생활과 행위”에 관한 것이다. 파슨스에게 “구체적인 사회생활”의 구성 자체는 논의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파슨스는 맑스, 뒤르켐, 베버에게서 나타난 사회와 사회성을 구성하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서 탈피한 것으로 보인다. 사회생활은 주어진 것으로 가정되고, 이 사회성은 유전(생물학적인)과 환경(물질로 구성된 실재의 세계)과 구별되어야 한다.

그러나 파슨스는 “사회적” 행위의 개념에서 벗어나 행위의 일반적인 개념에 대한 논의로 돌아간다. 그러다 파슨스는 “The Structure of Social Action”의 마지막 장에서 마침내 사회적 행위에 대해 언급한다. 사회적 행위는 그가 권력의 문제로 돌아갈 때 다시 언급된다. 이 사회적 행위체계의 양면은 권력관계의 문제와 권력투쟁의 해결책으로 간주될 수 있는 질서로 구성된다. 또한 파슨스는 사회학을 “공통가치 통합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는 사회적 행위체계 분석의 발전을 시도하는 과학”이라고 정의했다. 파슨스는 “사회성”, “사회적” 또는 “사회적 행위”를 완전히 정의하지 않았고 파슨스는 사회적 행위에 대한 정의를 그렇게 늦게 남겼는지도 의문이다. 결론적으로 파슨스는 “The Structure of Social Action”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The Social System


1937년에 출간된 “The Structure of Social Action”과 1951년에 출간된 “The Social System”에서 파슨스의 사상은 발전되고 변화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사이에는 본질적인 유사성이 존재한다. 그 근본적인 유사성은 행위의 “사회적 체계 개념(the concept of social systems of action)”이다. 이 두 텍스트의 한 가지 차이점은 파슨스가 후기에 ‘과학적 의미의 시스템으로서의 상호작용 과정’을 다룰 때, 체계개념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파슨스 행위 개념의 핵심은 “준거틀이 다른 행위자를 포함하는 상황에 대한 한 명 또는 한 명 이상의 행위자(기본적으로 개별 상황에 있는 생물학적 유기체)의 지향에 관한 것이다.”라는 진술이다. 여기서 파슨스는 사회와 자연 사이에 구분을 설정하는데, 개별의 인간은 고립된 생물학적 단위인 동시에 더 넓은 사회체계 안에서 특정한 종류의 사회적 상호작용에 관여하는 “사회적” 행위자이다. 파슨스는 행위 측면에서 외부 대상의 세계를 ‘사회적’, ‘물리적’, ‘문화적’ 층위로 구분한다. 사회적인 것의 대상은 행위자이고, 물리적 대상은 자아 또는 상호작용하지 않는 경험적 실제이다. 문화적 대상은 상징요소나 가치양식이다. 파슨스는 이런 편의적 구분을 했음에도 여전히 ‘사회적’ 행위를 명백하게 정의하지 못했다.

파슨스는 ‘사회적인 것’을 구성하는 것에 대한 정의가 부족함에도 그는 문화를 구성하는 것에 대해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적 행위의 구조에서 보이는 그의 생각에서 또 다른 변화를 나타낸다.) 파슨스 논의의 출발점은 “사회적 상호작용이 있는 곳은 기호와 상징이 공통된 의미를 얻고 행위자들 사이의 의사소통 매체가 제공된다. 의사소통을 중재할 수 있는 상징체계가 드러날 때 우리는 그것을 문화라고 말할 수 있다.”라는 진술이다. 그의 진술에 따르면 ‘사회적’ 행위는 오직 ‘문화’가 확립되었을 때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세계에는 다양한 상호작용 형태가 존재하지만 이것은 오직 ‘공유된 상징체계’가 발전된 형태에서만 존재한다. 이런 관점에서 ‘문화적 전통’은 사회적인 것보다 먼저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러나 파슨스는 사회체계에 대한 정의를 제안할 때, 문화가 사회적인 것보다 앞에 놓인다는 주장과 거리를 둔다.

“사회체계 이론은 우리가 행위이론이라고 부르는 더 큰 개념체계의 일부분이다. 이와 같이 그것은 더 큰 개념 체계에서 구별된 세 가지 하위체계 중 하나이고, 다른 두 가지는 개인이론(the theory of personality)과 문화이론이다. 이 세 이론의 상호의존성은 전체분석의 주요주제를 구성한다.” 사회체계는 행위이론의 하위체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파슨스는 사회체계가 “사회적 행위의 완전하고 구체적인 체계”의 한 측면 일 뿐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나 파슨스는 이 세 개의 체계가 각각 “물리적 또는 환경적 측면”과 “문화적으로 구조화되고 공유된 상징체계”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그의 행위이론에는 개인적 요소, 문화적 요소, 사회적 요소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사회체계에서 사회적인 것은 무엇일까?

개인적인 것과 문화적 측면을 제거하면 만족을 최대화하려는 경향에 동기를 부여받는 행위자가 있다. 이것은 사회체계의 사회적 요소로 보인다. 파슨스는 행위를 묘사하는 데에 있어 동기부여를 핵심 요소로 둔다. 그러나 이런 분석도 사회적 행위라기보다 일반적 행위 묘사로 보이며, 파슨스의 행위이론의 한 측면이라는 점에서 사회적 체계로만 국한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파슨스는 ‘사회적 행위의 구조’에서 뒤르켐이 “사회적 사실”에 대한 부정적인 정의를 제공한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이 비판은 파슨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파슨스가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긍정적 요소는 “동기부여”이다. 파슨스의 동기부여의 핵심요소는 ‘가치 지향’이다. 그는 가치를 “다양한 지향 중에 선택을 위한 준거로 작용하는 공유된 상징체계의 한 요소”로 정의했다. 그러나 이 또한 사회적인 수준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는 이전에 문화에 대한 정의로 사용했던 공유된 상징체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에게 사회적인 것의 요소는 문화로부터 추출된다.

행위는 동기부여와 가치지향으로 구성된다. “구체적인 행위체계는 상황과 관련된 행위요소들의 통합적 구조이다. 이것은 동기 부여와 문화적 또는 상징적 요소의 본질적인 통합을 의미한다.” 저자가 강조하는 부분은 파슨스가 그의 이론에서 사회적 측면을 구성하는 것을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문화적 측면에 대해 정의할 수 있지만 사회적인 것을 명확히 정의하지 못한다. 그는 행위자(또는 행위자 집단)의 행위, 지향, 동기부여가 사회체계를 구성한다는 것을 당연시한다.

저자는 전반적으로 파슨스의 기여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파슨스는 사회적인 것(the social)에 대한 맑스, 베버, 뒤르켐의 연구보다 진보한 것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평가한다.

이어서 저자는 이 책의 실질적 분석이 왜 우리가 사회적인 것에 대한 문제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논증하는 것임을 밝히고 마지막 장에서는 이를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한다고 하면서 이 과정을 위해 이전 장의 일부 발견을 돌아본다고 이야기한다.

현대사회학 4장 세계화와 사회 변동


사회의 유형들


-사라지고 있는 세계 : 전근대사회의 유형 수렵·채집사회, 농경사회, 목축사회, 전통사회


-근대성과 산업화된 사회들 : 산업화 이후 산업사회의 출현은 인류 세계의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도시에서는 이전보다 사회생활이 비인격적이며 익명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인류 세계의 재형성


유형

기간

성격

선진국

18세기부터 현재

산업생산, 자유기업

다수가 도시 거주

계급이 불평등의 원천

서구 또는 일본 호주 등

개발 도상 사회

18세기(식민지)부터 현재

인구 대부분 전통 산업

농업생산물 세계 판매

자유기업과 계획경제

중국, 인도, 아프리카, 남미 등

신흥 공업국

1970년대부터 현재

대부분 산업생산 기반

다수가 도시 거주

계급 불평등이 선진국보다 큼

1인당 소득이 선진국보다 낮음

홍콩 한국 싱가폴 대만 브라질 멕시코

사회변혁


-경제 발전

-사회-문화적 변화 : 최소한 종교와 믿음, 의사소통 체계, 지도력의 변화 등

-정치조직


세계화


-세계화의 요소들 : 일부 사람들에게 세계화란 물건 살마 정보가 지구를 가로질러 다방면으로 더 많이 흘러가는 과정이다. 정보 통신 기술의 흐름, 경제적 세계화, 정치적 세계화


-회의적인 목소리들


초세계화론자

회의론자

변형론자

새로운 것

세계화 시대

무역 블록, 약해진 지역 거버넌스

전례없는 수준의 지구적 연결도

지배적인 양상

세계적 자본주의·거번넌스·시민사회

세계는 19세기보다 상호 의존적이지 않다.

두터운 세계화

국가의 힘

쇠퇴, 침식

증진·재강화

재구성, 재구조화

세계화 추동의 힘

자본주의와 기술

정부와 시장

근대화의 복합적 힘

계층의 패턴

구위계질서의 침식

남반부의 주변화 증진

새로운 세계 질서 구축

지배적인 모티프

맥도날드, 마돈나

국인

정치공동체의 변환

세계화의 개념

인강 행위 틀의 재구성으로서의 세계화

국제화와 지역화로서의 세계화

지역 간 관계와 원거리 행위의 재구성으로서 세계화

역사적 궤적

세계문명

지역블록/문명의 충돌

불명확 : 지구적 통합과 파편화

주장의 요약

민족국가 종언

국제화는 정부의 승인과 지원에 달림

세계화는 정부 권력과 세계정치 변화


-세계화의 결과 : 세계화와 지구 문화, 개인주의의 등장


결론: 글로벌 거버넌스를 향해서?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기존의 정치 구조와 모형들이 국경을 넘는 사회적 문제에 접합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그래서 글로벌 이슈를 다루는 데 효과적인 글로벌 거버넌스를 요구하게 된다.

현대사회학 2장 사회학적으로 묻고 답하기



연구 대상으로서의 인간과 윤리적 문제


인간은 다루는 모든 연구는 윤리적 딜레마에 봉착할 가능성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험프리스의 게이 연구가 있다.


사회학적으로 질문하기


사실적 질문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영국에서 몇몇 남성들이 동성 성적 파트너를 찾고 있다고 보고되었다.

비교 질문

이러한 현상은 모든 곳에서 일어났는가?

이는 만연한 것인가, 영국에서만 일어나는가, 게이들만 하는가.

발생적 질문

이러한 현상은 통시적으로 일어났는가?

과거에는 게이들이 파트너 매칭을 어떻게 했는가, 그 방법들은 지금과 내적으로 동일한가, 다른가.

이론적 질문

이러한 현상의 기저에 무엇이 존재하는가?

왜 남성들은 과거의 방법들보다 온라인 채팅을 이용하는가?


- 사회학은 과학적인가


과학적 연구는 특정 주제에 관한 지식 체계를 발전시키기 위한 경험적 조사, 자료 분석과 이론적 사고 및 주장에 대한 논리적 평가라는 체계적 수단을 포괄한다. 하지만 사회학의 연구대상인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고 지각하는 존재이다. 단순한 물리세계의 연구대상과는 다르다.


사회학의 연구 과정


연구 질문 정의 - 모든 연구는 연구 질문 혹은 연구 문제로부터 출발한다.

기존 논거 검토 - 연구 질문이 확정된 다음에는 보통 그 분야에서 찾을 수 있는 기존 논의를 살핀다.


질문 구체화하기 - 처음의 질문과 기존의 문헌을 보고 어떻게 그게 접근해야하는지 고민해서 명료하고 정확한 언어로 질문을 다듬는다.


연구 설계 - 연구자는 자료를 어떻게 수집할지 결정한다.


연구 수행 - 연구의 계획을 실질적으로 실행하는 단계이다.


결과 해석 - 발견한 의미를 다시 연구 질문에 연관시켜야 한다.


연구과정의 단계


문제 정의→문헌 조사→문제 정교화하기→연구 설계의 선택→연구 수행→결과 해석→연구 결과 보고→반복


원인과 결과 이해하기 - 인과성과 상관성


상관성은 두 종류의 사건들 혹은 두 변수 사이에 규칙적인 관계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독립·종속변수 사이의 상관관계가 인과성을 가지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변수를 통제해야 한다.


연구 방법을 통해 사회학적으로 답하기


연구 방법

장점

단점

현지 조사

다른 방법보다 깊고 풍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집단이나 사회에 사용할 수밖에 없다.

민속지학은 사회화 과정을 이해하는 게 보다 폭 넓은 도움을 준다.

연구 결과는 조사 대상인 집단 혹은 사회에만 적용될 가능성이 있다. 단 한 번의 현지 조사를 바탕으로 일반화시키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설문 조사

수많은 개인들에 대한 자료를 효율적으로 수집할 수 있다.

수집된 자료는 피상적일 수 있다. 지나치게 표준화된 설문지는 응답자 간의 차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지 못할 수 있다.

연구 대상의 응답을 정밀하게 비교할 수 있다.

응답은 사람들이 실제로 믿는 것이기 보다 믿는다는 주장하는 것일 수 있다.

실험

연구자에 의해 특정 변인/변수가 통제될 수 있다.

사회생활의 많은 부분은 실험으로 삼기 어렵다.

동일한 방식으로 연구를 반복하는 것이 가능하다.

실험 상화에 따라 연구 대상의 반응이 달라질 수 있다.

문헌 조사

문헌 종류에 따라 깊이 있고 방대한 연구가 가능하다.

현존하는 문헌만을 참고할 수 있으므로 불완전한 연구가 될 수도 있다.

역사적인 분석이 필요한 연구에서 필수적일 때가 많다.

공식 통계에 나타나는 문제와 같이, 실제적인 경향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지 확신할 수 없다.


-민족지학 : 참여관찰, 인터뷰, 현지조사 등.


-생애사 연구 : 사회과학만의 연구법. 특정 개인이 자신의 삶을 회상한 자전적인 요소로 구성. 개인뿐 아니라 사회적인 자료도 사용.


-비교연구


-역사적 분석


-비교역사 연구


-시각적 사회학 : 시각적 자료를 연구대상으로 삼는 사회학 방법


-연구 도구로서의 인터넷


실제 세계에서의 연구


모든 연구 방법은 장단점이 존재하기에 하나의 연구를 수행해도 여러 가지 방법을 함께 사용하기도 한다. 이것은 삼각측량이라고 한다. 자료의 삼각측량은 자료가 서로 다른 시점에 모아졌을 때나 같은 연구에서 다른 표집 방법을 사용했을 때 생긴다. 연구자 삼각측량은 한사람의 연구자가 아니라 여러 명의 연구자가 현장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다. 이론적 삼각측량은 자료를 해석할 때 몇 가지 이론적 접근을 사용하는 것이다. 방법론적 삼각측량은 한 가지 이상의 연구 방법을 적용하는 것이다.


-사회학은 당연한 것을 그럴 듯하게 말하는 것에 불과한가?


사회학의 연구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사실에 깊은 이해를 시키거나 상식을 뒤집기도 한다.


-사회학의 영향


사회학 연구의 영향은 사회 전체에 확산된다. 연구 결과는 그 사회의 지속적인 삶을 위한 중요한 요소이다. 사회학은 연구 대상이 되는 인간과 성찰적 관계를 맺고 있다. 성찰서이란 사회학 연구와 인간 해우이 사이의 교환을 의미한다.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 1927년 12월 8일 ~ 1998년 11월 6일)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의 사회이론에서의 의미와 관찰


1. 서론


루만의 이론체계에 있어 의미(Sinn)는 핵심적인 개념이다. 사회학의 전통에서 의미는 중요한 개념이며 고전사회학자 베버 또한 의미를 기본개념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루만은 자신의 이론체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설명하는데 큰 비중을 두었지만 그럼에도 루만은 인문·사회계열의 학문 뿐 아니라 과학을 포함한 다양한 분과학문의 성과를 수용하여 의미의 개념을 구축했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루만의 체계이론은 구(舊)유럽적 사고로 표현되는 주체철학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되고, 그는 후설의 선험적 현상학에 영향을 받아 의식 층위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사회적 층위로 옮겨 놓은 듯하다. 이어지는 내용은 루만 체계이론을 사회학적 전통의 경계 안에서 조망함으로써 루만 이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전통적 사회학의 비판적 기능과 사회학적 실천에 대한 루만의 입장을 서술한다.


2. 의미와 행위


루만에 의하면, 파슨스의 학문적 이력은 초기부터 마지막까지 일관되게 베버의 사회학적 제안을 발전시키려고 고민했던 것이라고 한다. 파슨스가 베버를 수용한 것과 같이 루만 또한 파슨스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했으며 사회적 행위에 대한 인식론적 통찰을 제공하는 독일의 학문적 전통을 통해 파슨스의 구조 기능주의를 교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루만은 의미와 행위의 관계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의미를 주체의 관점에서만 보는 기존의 사고를 비판한다. 전통적인 접근에서 의미는 주체의 입장에서만 논의할 수 있다. 하지만 루만은 이것을 비과학적인 것이라고 보았고, 의미를 주체와 분리시켜 처리하면서 보편적인 의미를 도출할 수 있다고 보았다. 루만은 역으로 의미를 통해 주체를 규정할 것을 제안한다. 이 지점은 루만의 체계이론의 출발점이자, 의미와 행위 관계의 전회를 의미한다. 루만에게 의미를 생성하는 주체는 행위자가 아닌 의미를 사용하는 체계이다. 역으로 체계 자체에 대한 해명이 곧 행위에 대한 설명이 된다. 따라서 사회체계는 의미로 확인되고 의미를 경계로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파슨스의 체계이론은 사회구조의 분석이자 동시에 사회적 행위를 설명하는 이론이며, 루만은 파슨스가 의미의 매체적 특성에 주목해서 베버가 제기했던 의미문제를 발전시켜 이론화했다고 평가한다.

베버의 사회학 프로그램은 스스로 이야기하듯 미완의 기획이며, 그 작업의 목표는 사회학이라는 분과학문을 정초하는 데에 있었다. 베버가 제안하는 행위자는 의미를 구성하는 주체이다. 베버에게 의미는 언제나 행위를 통해 규정되며 행위자가 주관적으로 부여한 것이다. 그러나 베버의 설명은 여기서 종결되지 않고 확장된다. 베버는 행위자가 의미를 부여했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가 상대방에 의해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지적하며 의미가 주관적으로 생성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모든 의미가 주관적으로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행위가 역으로 의미를 통해서 규정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베버는 ‘주관적’ 의미를 ‘객관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와 구분한다.

베버에게 있어 객관적 의미는 관찰자의 해석과 이해를 통해 형성된다. 여기에서 행위 주체의 의미 구성 과정을 배제한다. 행위자가 관찰자와 전달하는, 스스로 의도한 의미 또한 상호의 해석도식(의미연관)을 공유하며 의도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전적으로 사적인 의미가 아니다. 주관적 의미는 그것이 생성되는 과정을 환원해서 이해할 수 있지만 객관적 의미는 그러한 성취와 무관하게 이해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베버는 주체의 자의성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의미의 사회적 형성을 설명할 단초를 마련하기도 한다. 객관적 의미는 관찰자가 주관적으로 의도한 의미에 의해 개념적으로 구성된 순수한 유형의 의미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행위자가 스스로 의도한 의미의 개념이 실제 행위로부터 분리되고, 그 핵심은 실제 행위자 대신에 유형으로 이해되는 행위자가 들어선다는 것이다. 사회학의 임무는 실제적인 행위자가 아닌 행위자를 유형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베버는 방법론적 개인주의에 국한되지 않으며 주관적/객관적 의미의 구분을 통해 주관적인 의도가 담긴 의미를 탈주체화하고 사회적 의미의 생성을 설명한다. 또한 베버는 행위이론적 관점에서 주관적/객관적 의미의 차이를 ‘사회적 행위’로 개념화한다. 사회적 행위란 행위자가 의도한 의미에 따라 타인의 행동과 연관되고 그 과정에서 타인의 행동을 지향하는 행위로 정의된다. 행위가 유의미한 관계를 매개로 실현될 때, 그것은 유의미한 행동으로서의 사회적 행위이며 의도한 의미의 특성으로 인해 여타의 유의미한 행위와 구별된다. 타인의 행동을 지향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베버는 직접적인 답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추론해본다면 사회적 행위는 어떤 타인, 즉 언어와 행위 역량을 가진 다른 주체를 상정함으로써 가능하다. 다시 말해 타인을 지향한다는 것은 어떤 행위가 타인의 행동을 통해 조건화되고, 그 진행 과정에서 타인의 행동을 통해 함께 규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회적 행위는 현실 행위, 이론적으로 구성된 개인의 행동, 그리고 잠재적인 타인의 행동까지 포함한다. 덧붙여 행위자가 상대방을 표상하는 것만으로도 타인을 지향한다고 가정하면 이는 특정 행동에 대한 기대도 사회적 행위의 구조에 속하는 것이 될 수 있다.

베버는 사회적 행위의 중요한 ‘표준적인’ 요소는 타인의 특정 행동의 기대에 대한 유의미한 지향을 형성한다고 지적한다. 개별 행위자들은 사회적 행위에서 타인의 유의미한 행위를 기대한다. 개별 행위자들이 서로의 행위를 함께 기대하면서 구조, 즉 사회적 관계에서 '기대의 기대'를 가진다. 이는 의미 내용에 따라 서로를 향하고, 그를 통해 지향된 다수의 행동을 의미한다. 베버에 의하면 서로 지향하는 참여자의 행위를 말하기 위해서는 상호작용의 성원이 동일한 태도를 가질 필요는 없다. 상호작용에 참가하는 서로가 서로를 전제하고 기대를 지향한다면 둘 또는 그 이상의 행위자들이 서로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모든 참여자의 사회적 관계에 행위자와 파트너가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서로를 지향한 쌍방향적 행위, 사회적 관계가 기대의 상호작용하는 성찰성에 연계된다. 이는 ‘기대의 기대’이기에 기대의 성찰성이다. 요컨대, 베버에서 사회적 관계란 행위의 기대구조, 다른 말로 상호작용적인 기대의 성찰성으로 인해 구축된 사회적 관계이다.


3. 매체로서의 의미


전통적으로 의미 개념은 체험하는 주체의 반성적 해명이 가능한 체험구조의 실행을 통해 표현된다. 그러나 루만은 이런 사후적 구분이 아닌 사전적 의미와 의식의 관계를 설명할 것을 요청한다. 유의미하게 구성되는 것은 이미 의미를 전제로 하기에 의미개념이 우선적이며 그것은 주체와 무관하게 정의되어야 한다.

첫째, 의미는 개별 행위자가 아닌 체계 스스로 구성하는 형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물론 모든 의미·체험·행위는 신체와 의식을 전제로 하며 사태(Sache)는 체험을 통해 의식에 주어진다고 해도 이것은 의식이나 의사소통을 통해 비로소 심리적·사회적 범주가 된다. 둘째, 의미는 세계의 복잡성을 행위로 하여금 체험의 과부하를 처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수단이다. 루만의 이러한 의미의 특성은 후설의 선험적 현상학, 지향성 개념과 큰 연관을 가진다. 의식의 체험은 항상 '어떤' 것에 대한 체험이고, 의식은 항상 '어떤' 대상을 지향한다. 항상 의식은 ‘어떤 것’을 지향함으로써 여타의 부분은 배후의 지평을 물러난다. 이는 대상으로서의 체계, 지평으로서의 환경의 차이를 허용해줌으로써 체계이론의 기본 논리를 제공한다. 지향을 통해 대상과 지평의 차이가 생기고 체계가 생성된다. 현재화된 체계는 항상 잠재화된 환경을 전제로 한다. 지평 개념은 체험이 더 이상 처리할 수 없는 것들을 지평으로 남김으로써 논리적으로 복잡성의 축소를 허용한다. 의식(심리체계)이 지향하여 대상을 현재화하면 동시에 다른 부분들은 잠재화된다. 어떤 것에 대한 지향은 다른 것에 대한 부정이다. 현상학적 시간 개념이 도입됨으로써 잠재화된 지평도 다시 현재화될 수 있는 구조적 동학이 마련된다. 체계/환경이 반복되면 과정적 재귀의 동학이 허용된다. 심리/사회 체계를 포함한 체계는 연쇄적인 계기적 사건, 행위·의사소통으로서 재귀적 작동을 허용하는 능동성·우연성·지속성·창발성을 가능하게 한다. 의식의 지평 개념은 모든 관찰에 불가피하게 맹점을 수반시킨다. 이는 모든 관찰에 어떤 위계적 우선성도 허용하지 않는 수평적 다원성과 체계의 성찰성 테제를 가능하게 한다. 또한 체계와 환경의 개념을 통해서 인과적 설명이 불필요한 의식의 폐쇄적 작동 개념을 얻음으로써 객관주의적 사유인 인과성의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또한 ‘체험’과 ‘행위’를 구분해야만 의미개념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 체험은 현재화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가능성을 감당한다. 이런 체험의 과부하는 복잡성과 우연성이라는 이중의 구조를 가진다. 전자는 실천적 선택을 강요하고, 우연성은 실망의 위험을 허용한다. 여기서 우연성이란 체험의 지평에서 통보되는 가능성이 후속 체험과 행위에서 기대한 것과는 다르게 현재화될 수 있음을 말한다. 요컨대 체험의 통보는 현존하지 않거나 기대하는 방식으로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지시하거나 기대했던 것이 그간의 사건들에 의해 실현이 불가능하게 되어 실망을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의식의 체험은 복잡성과 우연성을 의미의 형식, 곧 지시적 방식으로 선택적인 처리를 함으로써 과부하는 조절하고, 선택되지 않은 잔여 또한 보존시켜 남겨둔다.

체험의 과부하를 처리하는 형식이 바로 '의미'이다. 루만에 따르면 의식은 경험에 대한 선택으로 구성되며, 항상 외부세계에 대해 비대칭적으로 투입되어 세계 복잡성의 문제를 사고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의식은 세계의 압력에 대한 내적 처리이다. 의미는 어떤 사태의 내용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성을 축소하고 체험을 처리하는 기능의 수단이며, 복잡성의 축소를 일으키는 매체이다. 체험처리는 의미를 통해 복잡성을 축소시키고, 보존하며 실현한다. 의미를 통한 복잡성의 축소는 체험에 관한 ‘세계 자체’와 행위에 관한 ‘세계 내의 특정 체계’, 이중의 방식으로 구성되며 체계로 수행된다. 체험과 행위의 구분은 복잡성의 축소와 의미규정에 의해 정의된다. ‘체험된’ 의미는 타자에 의한 축소로, ‘행위’는 체계 고유의 성취로 이해되고 처리된다. 또 다른 의미의 중요 기능은 체험되지 않은 잠재성을 지시와 이해를 통해 도입시키는 것이다. 의미는 다수의 의식체계로 구성된 세계에서 인지의 내용을 계속 변화시키며 선택의 규칙으로 기능한다. 세계는 의식을 통해 들어오고 의미의 통해 다른 가능성들로부터 선택, 해석됨으로써 정보가 된다.

루만에게 체험과 행위는 구분은 체계 연관적인 개념화이다. 서로 다른 폐쇄적 심리체계는 체험으로부터 통보된 복잡성을 축소하여 통보하고 재통보하는 과정이며 이 의사소통 과정은 의미를 통한 세계의 구성을 매개한다. 즉 사람들은 체험, 행위를 통해 의미를 구성된 것으로 체험하고 그것을 상황에 따라 다르게 처리한다. 체험과 행위는 체계연관적인 개념이기에 사회체계에 따라 유동적이다.


4. 기대구조와 의사소통


사회구조는 ‘기대의 기대’ 형식을 지닌다. 루만에 의하면 타인과 연관된 모든 체험과 행위는 자신과 타인에 동시에 의존한다. 자신이 타인에게 통보한 기대는 서로의 기대에 대한 전제를 구성하고 그 조건이 반성되어 복수의 사람이 함께 기대할 때 실현 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타인의 자유 규정을 자신의 기대구조에 산입해야 되기 때문에 자신뿐 아니라 타인의 기대를 기대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여기서 이중의 우연성 문제가 두드러지는데, 루만은 상호주관성을 부정하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사회적인 것’, ‘사회체계’가 생성될 수 있다고 본다.

루만에게 의사소통은 적어도 한 사람 이상의 참여자에게 의미를 공동으로 현재화하는 것이며 서로 새로운 것을 조절할 수 있도록 의미구조가 작용하는 것이다. 의미를 전제로 새로운 것을 표현할 수 있고, 의사소통은 언제나 의미토대 위에 구축된다. 정보는 특정 시점의 사건으로 동일성을 가지는 것이기에 어떤 정보도 전달하지 않는다. 의사소통에서는 새로운 것의 생성이 중요하다. 의사소통은 타인이 유의미한 체험에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상황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비언어적 표현도 의사소통의 한 요소이고, 언어는 부차적이지만 의사소통 과정의 높은 전문화를 통해 진화한 것이며 의사소통을 구분하도록 하며 사람들의 실천에서 타인에게 정보를 줄 행동방식을 증가시킨다. 언어는 기능적으로 의사소통 과정의 선택강화로, 의사소통은 인지과정의 선택강화로 정의 가능하다.

의사소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의미와 정보의 구분이 필요하고 이는 실천적인 측면에서 분명해진다. 동일한 의미를 지녔다고 해도 정보는 수용자의 상이한 여건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더불어 정보와 관련해 의미는 체험처리의 전제로 작용한다. 의미를 매개로 복잡성을 축소하는 과정은 선택되지 않은 것을 배제하는 부정의 과정이다. 이 부정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고 시간의 변화에 따라 부정의 부정을 통해 현재화 가능하다. 루만에게 부정의 개념은 배제와 선택의 행위이며 보편적 포함을 의미한다. 미래는 행위자가 스스로 자신의 방향을 선택하면서 움직이는 열린 지평이다. 체험되는 현실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회적 교류를 위해 사전 상호교류가 없어도 응답을 기대하고 실수를 보호받을 수 있는 의미의 유형과 규칙을 발전시킨다. 이를 위해 의미 자체에 이미 실망하는 경우의 예방수단이 삽입되어 있고, 그것은 사람들이 ‘기대’, ‘기대의 기대’에 대해 실망하는 경우 그것을 견딜 수 있는 행동 원칙을 갖게 한다. 기대구조는 반성적 기대에 기초해 통합/유지 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의미의 사회성이란 의도한 의미의 인지가능성, 그 인지가능성이 타인의 기대를 설명해주는 구조적 적합성이 있다. 따라서 기대의 기대는 의사소통의 부담을 감소시키고, 무엇보다 의견 검증에 나타날 수 있는 갈등을 피하게 해준다.


5. 관찰과 계몽


루만은 현상학의 판단중지를 가져와 연구 대상에 대한 모든 관심을 배제하고 연구자는 객관적인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루만은 후설의 지향성 개념을 통해 자연에 포함된 주체에 판단 중지를, 세계의 상호주관적 통용을 괄호 안에 넣어 사회학의 고유한 연구 영역을 확보한다. 루만은 근대사회 일반의 가능성 조건, 사회의 근본적인 과정을 기술하려고 한다. 루만의 목적은 체계구성을 통해 이론적, 실천적으로 세계의 복잡성을 파악하고 축소하는 인간 잠재력을 고양하는 데 있다. 루만은 경험적 현실에 거리를 두고, 관찰자로서 현실 뒤에 존재하는 사회의 구조와 과정을 포착하려고 한다.

루만은 후설에 의한 소여를 통해 사회학을 발전시켰지만 동시에 이와의 차이점도 가지고 있다. 루만은 선험과 구유럽적 사고를 거부하며, 관찰자를 통한다 하더라도 관찰된 모든 것은 체계로서 수행되어야 하고 그렇기에 관찰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경험적/선험적인 것을 폐기함으로 2차질서의 관찰 개념을 도입할 수 있고, 체계의 다양성이 구축 가능해 진다.

첫째, 루만은 현상학이 전제하는 선험적 주체 대신 재귀적으로 환경을 가지는 사회체계를 마련한다. 루만은 심리체계로 시작해 사회체계는 자기지시적인 자동생산 체계들로 파악하고, 사회가 다수의 사회체계들로 구성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는 이론의 출발점으로 자동생산체계의 하나인 의식을 상정하고 경험/선험의 이분법도 이를 위해 폐기시킨다. 이는 근대사회의 끊임없는 재귀기술을 제공하는 회귀적 과정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둘째, 루만은 후설의 선험적 의식 성취에 의한 반성을 자기지시적인 자동생산 체계가 상호적으로 관찰되는 2차질서의 관찰이론으로 대체한다. 이는 선험적 현상학의 주관적 기술이 자기기술하는 체계이론으로 대체된 것이다. 모든 관찰은 맹점을 가지며, 관찰의 모든 위계적 질서는 부정된다. 셋째, 체계이론의 관점에서 사회학적 연구 또한 언제나 고유의 맹점을 지닌 다양한 관찰 중 하나이다. 관찰은 연쇄적인 작동이며 재귀적 관찰은 개별 관찰이 아닌 수많은 의사소통에 의해 재귀적으로 작동하는 체계의 성취로 나타난다.

루만은 2차관찰을 통해 의식에게만 부여되었던 반성의 능력을 사회체계들에 부여했다. 관찰의 작동과 관찰의 관찰을 사회체계의 의사소통적 작동으로 보고 이는 사회의 자기관찰과 자기기술이라고 한다. 루만은 학문적 관찰 또한 여타의 의사소통 행위와 같이 복잡성을 축소하는 심리체계의 선택적 작동과 통보를 통해서 다른 심리체계의 반응에 초래하는 일종의 창발적 사건이다. 루만은 상호주관성을 배제함으로써 체계의 창발성을 확보한다.

루만은 구조적 과정과 변동 개념을 창조적으로 정의한다. 먼저 루만에게는 어떤 사건의 연속체가 선택성을 강화하는 특징을 충족하는 경우에만 과정이 될 수 있다. 또 기대의 기대로 구조 변화가 적용이나 통제되지 않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강하게 구조변동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에 지속적으로 좌절이 수반된다고 본다. 루만은 기대의 기대로서 구조의 변화는 자기 유지를 전제로 하고, 이에 따라 변화와 유지는 보수/진보 양자를 함께 다루어야만 한다고 본다. 새로운 것은 사회적인 것의 문제가 전체의 수준이 아니라 재생산이 유지되거나 그러지 못하는 계기적 사건들 사이의 관계 수준에 있다는 것에 대한 통찰이다. 기존 기대구조 내의 접속 행위, 벗어나는 기대구조에 기초한 접속 행위, 중간이 있음을 의미한다는 3중의 차이가 모든 상황에 존재한다. 루만에게 구조변동은 상황적으로 확신해야만 가능하다. 먼저 후속 행위가 가능해야 하고 이후에 그것이 구조적 가치를 가지고, 기대를 만드는지를 알 수 있다. 따라서 루만은 과정의 범주가 구조의 변동을 주체화하는 필수적이라고 보지 않는다. 자기준거적 체계는 독립적으로 자신에게 포함된 요소를 통해 자신의 구조변동을 생산한다는 의미에서 폐쇄체계이다. 체계는 자기 구조에 인과성을 부여하고 인과성은 스스로 부여하는 것이다.


6. 결론


루만의 논의는 베버가 제안한 프로젝트와 많은 부분을 공유한다. 루만에게 의사소통이란 사건이 선행한 사건을 다른 가능성의 지평에서 선택적으로 이해함으로써 행위가 선행한 행위를 이해하는 지속적인 해석과정으로 구축된다. 베버가 제안한 원인과 결과에 대한 사회적 기대·추론이 루만에 의해 사회학의 연구대상이 될 수 있다. 루만은 인과적 설명을 거부하고 우연, 차이, 선택에 기초한 사회이론을 제안하지만 그럼에도 베버와 공유되는 지점이 많이 존재한다.

첫째, 베버와 같이 루만의 사회학도 이론적 관점의 개방성을 허용한다. 의미의 문제를 제기하는 사회학은 탈도그마를 포함하고 모든 관찰은 맹점을 지니기 때문이다. 둘째, 루만은 의미를 사회학의 중심으로 두지만 행위를 연구대상으로 보는 데 부정적이다. 루만에게 행동을 행위로 해석하는 것은 체험과 행위를 통해 이해 가능한 다양한 형태 중 하나를 제시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만은 체험과 행위를 구분하면서 의사소통 개념을 상세히 제시하는데 이런 개념은 베버의 사회학 프로젝트에 기여할 수 있다. 셋째, 베버의 전통에서 전형적인 인간행위를 경험적으로 연구하려면 합목적적 행위와 우연적인 것을 인과적으로 연계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사이에서는 행위자가 스스로 원하던 목표와 결과 사이에 인과성을 적합하게 추체험해야 한다. 루만은 실제로 이러한 사례에 대한 경험적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 넷째, 루만에게 오늘의 사회이론은 사회가 마주한 문제점을 극복할 가능성에 대해 대처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루만은 고전사회학의 주제들이 추상적으로 구상된 통합적 이론내로 다시 수용되어야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다섯째, 루만은 사회학의 영역과 대상을 정초했던 베버의 문제의식을 계승한다. 루만은 타분과의 성과를 수용함으로써 오히려 사회적인 것의 영역을 확보하고 사회학의 이해의 폭을 확장한다. 여섯째, 베버의 합리화과정에 대한 이해처럼 루만에서도 사회의 재귀적 자기지시는 스스로 생성하는 출구없는 체계 작동이다. 선과 악은 허용되지 않으며 인간은 이미 탈출구 없는 사회에 존재론적으로 묶인 세계 내적 존재이며 루만은 뒤를 보면서 미래를 향한다.

오늘날 일상화, 점증하는 무관심, 불확실성의 확산은 현대사회의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이런 변화는 점점 더 예측하기 어려운 과제가 되고 있다. 고도의 복잡성으로부터 발생하는 합리적 선택의 요구는 오직 구조적 성취를 위해 충족되고 우연성이 감지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복잡성, 우연성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복잡하게 구성된 제도적 해법이 필요하다.


본 글은 정선기. 2017. “Luhmann의 사회이론에서의 의미와 관찰.” 『사회과학연구』 28(4). 를 요약한 것입니다.


2018.3.21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 1858년 3월 1일~1918년 9월 28일)



막스 베버 (Max Weber, 1864년 4월 21일 ~ 1920년 6월 14일)


짐멜이냐 베버냐? - 사회학의 인식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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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 분과과학은 고유한 인식대상과 인식방법을 갖추어야 한다. 게오르그 짐멜의 형식사회학과 막스 베버의 이해사회학은 사회학의 대상은 무엇이며, 방법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이다. 짐멜은 상호작용을, 베버는 사회적 행위를 사회학의 인식대상으로 삼았으며 이는 모두 사회적인 것의 증가라는 현대의 특유한 체험을 반영한다. 구체적으로 짐멜과 베버의 인식대상은 서구 시민계층의 생활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후에 다룰 내용들은 짐멜과 베버가 어떻게 국가와 사회로부터 사회적인 것으로 인식관심을 돌리게 되었는가를 간략하게 추적할 것이다.


1. 사회적인 것: 사회학 인식의 대상


짐멜과 베버 이전의 문화·사회과학은 국가나 사회를 실체로 간주하고 이에 대해 전체적이고 총체적으로 접근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짐멜과 베버는 이런 경향과는 전혀 새로운 과학적 기획으로 국가나 사회가 아닌 사회적인 것을 사회학의 인식대상으로 삼았다.


1) 국가와 사회로부터 사회적인 것으로


당시 독일의 지성계는 국가중심의 역사과학과 사회과학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나 짐멜과 베버의 사회학은 사회의 해체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베버는 국가가 어디까지나 “개별 인간들이 수행하는 특정한 행위의 과정과 연관관계”로 파악했고, 모든 사회적 관계나 질서는 개인들의 유의미한 행위로 소급할 수 있고, 소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베버에게는 그 어떤 행위하는 집합인격체도 존재하지 않고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짐멜에게 사회는 ‘규제적인 이념’으로 기능하며, 단순히 다수의 개인들 사이에 진행되는 상호작용의 합을 의미한다. 짐멜에게 사회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진행 중인 역동적인 사건이며, 서로의 숙명과 상태에 대해 영향을 주고받는 기능이다.

이들은 콩트나 스펜서 등의 고전사회학자들을 사회학의 선구자로 보지 않았으며 실체주의적인 사회, 총체적인 사회, 자연과학적 지향성을 가진 보편적 사회이론에서 거리를 둔다. 또 이들의 사회학 개념에 입각해본다면 앞에서 언급한 이전 사회과학에서의 국가나 경제조직 같은 거시적인 사회체들은 개인들 사이의 사회적 상호작용이 객관적 구조물로 응축되거나 결정된 결과라고 이해할 수 있다. 더불어 구조적인 것은 개별 인간들이 고립해서는 달성할 수 없는 목표와 목적을 위한 수단의 기능이다.


2) 게오르그 짐멜 : 상호작용과 그 형식


짐멜의 사회학은 다양한 사회적 현상과 과정을 개인들 사이에서 진행되는 상호작용의 형식이라는 형식적 관점에서 접근한다. 사회적 상호작용의 형식이란 “개인들의 존재를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 물론이지만, 이제는 개인들이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공존관계, 동시관계 및 상호관계라는 관점에서 인식된다.” 따라서 짐멜에게 사회학은 사유적으로 구성된 더 높은 차원의 단위를 근거로 모든 사회적 영역과 맥락에서 사회학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짐멜 사회학의 존재는 상호작용의 형식과 내용을 엄격히 구분함으로써 가능해진다. 두 범주의 분리는 내용의 추상화를 의미한다. 이것은 사회학의 탈역사화·몰역사화를 의미한다. 그럼에도 그의 사회학은 역사·시간을 순전히 형식주의적 측면에서만 다루는 것은 아니다. 그를 넘어서 역사적인 것을 포괄할 수 있다. 다양한 역사적 맥락에서 사회적 상호작용의 동일한 형식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짐멜의 사회학은 변증법적이고 관계론적이다. 이는 사회학적 인식에 대해 사유적으로 구성된 분석적이고 개념적인 우회로를 제공해준다. 이 우회로는 보편성을 띠는 순수한 형식을 거쳐 특정 현상에 이르는 길이다.

짐멜은 인격적·개인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은 분명히 “사회적 사건의 결과이자 원인으로서, 사회적 사건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이것들은 내적·본질적으로 사회적인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러한 견해에 근거해 짐멜은 인격과 문화, 그리고 사회의 범주를 구분한다. 인격이란 개별 인간이 지니고 있는 주관적이고 정신적인 특성과 특질 및 개성을 가리키고, 문화란 인간 영혼이 주체와 객체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에게서 출발해서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사회는 다수 개인들 사이의 상호작용의 총합으로 구성된다.


3) 막스 베버 : 사회적 행위


베버는 문화과학을 개념적·방법론적으로 구축하는 것을 임무로 생각했다. 문화과학은 어느 하나의 특정한 개별 분과과학이 아니라 역사학·경제학·사회학 등의 분과학문을 포괄하며 문화적 삶에 접근하는 새로운 경험과학의 유형을 가리킨다. 베버는 이우 더불어 현대세계 특유의 다양한 체험을 광범위하고 통일적인 방식에 의해 이론적이고 역사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인식유형을 구축하는 과제도 가지고 있었다.

베버에게 문화과학의 선험적 전제조선은 이 세상에서 주관적으로 입지를 정하고 행위하며 이 행위에 대해서 주관적 의미를 부여하는 의지와 능력을 소유한 문화인간이다. 이는 문화과학적 인간방법의 기초를 이룬다. 베버는 사건에 대해서는 결국 스스로 의미를 창출해야 그 의미를 알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는 과학자의 주관적이고 적극적인 인식행위를 의미한다. 베버는 자신의 주관적인 가치이념에 입각하여 사회적 현상과 역사적 과정에 문화의의를 부여하며, 그 가운데 특정한 단면들을 선별하고 사유적으로 정리하며 질서를 부여해서 개념과 이론을 구성한다.

베버에게 문화과학은 인간의 문화적 삶의 현재와 역사적 측면을 다루는 현실과학이다. 이런 관점에서 베버는 사회적인 것을 행위자의 주관적 의미차원으로 소급한다. 사회적 삶은 본질상 문화적이지만 보편적인 인간의 문화적 삶에서는 문화적인 것보다 협소한 무언가로서 일종의 제한된 과학적 의미와 지위를 닺는다. 사회적인 것은 문화적인 것의 부분에 해당한다. 베버는 사회과학의 인식관심의 출발점이 우리를 둘러싼 사회적 문화생활의 실재적인, 개별적인 형상임을 이야기한다. 구체적으로 베버는 사회과학 인식의 출발점으로 “문화적 삶이 지닌 보편적인, 하지만 조금도 덜 개별적이지 않은 연관관계”와 “이 문화적 삶이 다른 사회적 문화조건들에서 생성되어온 과정”을 이야기한다.

베버는 사회적인 것을 문화적인 것의 일부로 간주하고 사회과학을 사회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과의 연관성 속에서 고찰하는 사회경제학으로 간주한다. 사회·경제적인 것을 매개하는 문화적인 것이란 개인들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주관적으로 부여하는 의미성이다. 베버는 사회적 행위의 범주론 또는 유형학을 추구했으며 이것은 인간행위의 유의미성이라는 특정한 관점에서 그 자체로 총체적인 사회적 현상과 역사적 사건을 추상함으로써 얻어진 것이다.

후기에 베버는 사회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에 대한 분리를 시도했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현상과 과정에 대해 유형개념과 일반적인 규칙성을 구성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베버는 인간행위의 의미는 언제나 주관적이지만, 언제나 사회적으로 매개된 의미라는 사실에 근거해 문화의 보편사를 지향한다. 그에게 사회학적이란 것은 인간의 유의미한 행위에 입각해 특정한 역사적 맥락과 현실들을 초월해서 보평타당성을 지니는 개념과 이론들이 구성됨을 의미한다.

베버는 이 세상에서의 주관적 입지를 정하고 유의미하게 행위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이 모든 문화과학의 선험적 전제조건이라면, 개별 인간과 그의 행위야말로 사회학의 “가장 낮은 단위”를 구성하며 동시에 그 “상한선”을 구성한다. 따라서 사회학은 역사적 사건과 사회적 과정을 “‘이해가능한’ 행위로, 말하자면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인간의 공동체 생활에 참여하는 개별 인간들의 행위로 환원시켜야 한다.”


4) 짐멜과 베버의 차이점


짐멜에게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가 사회학의 기초문제가 되고, 베버는 개별 인간들의 행위에서 출발하여 사회학의 기초개념을 구성하려고 한다. 짐멜은 보편적 사회이론을 추구하지 않았다. 짐멜에게 사회학은 사회가 아닌 사회적인 것의 과학이라는 표상에 입각하여 상호작용과 그 형식, 또는 사회화와 그 형식에 의해서 사회를 해체시키기 위한 것이다. 짐멜에게 사회학의 인식대상은 전체로서의 사회 그 자체가 아니라 특정한 관점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선택되고 추상된 단편들이다. 베버는 사회를 문제삼은 적이 없다. 베버에게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베버 사회학의 기초개념들은 유의미한 인간행위를 토대로 구성되며 일관되게 행위에 근접해있다. 사회적인 것을 다루는 사회학은 언제나 개별 인간들의 유의미한 행위에 준거하고 거기에서 출발해야 하며 귀결되어야 한다. 베버는 의미와 무관한 자연세계에 반해 유의미한 사회세계의 특성을 강조했으며 이를 통해 짐멜 사회학의 인식대상인 상호작용을 비판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학적 인식을 자연과학적 인식과 구분하려 했던 짐멜의 견해를 간과한 것이다. 짐멜은 자연과학과 구분되는 3가지 사회학적 아프리오리(a priori)를 제시한다. 그것은 첫 째, “우리는 모두 단편들이다.”, 둘 째 “개인은 사회화된 존재인 동시에 비사회화된 존재이다.”, 셋 째 “사회는 불평등한 요소들로 이루어진 구조물이다.”이다.


2. 시민계층의 사회세계와 사회학


시민계층의 사회세계는 짐멜과 베버 사회학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짐멜은 지속적으로 대도시적 삶의 공간에서 직업적·정치적 의무와 과제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유희적이고 미학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부유한 인간집단의 사회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베버는 주체적으로 자아지배와 사회지배를 지향하는 금욕적이고 직업적인 시민계층의 사회세계로부터 사회학의 소재를 얻는다.


1) 대도시 시민계층의 친교와 상호작용


사람에서 사람으로 연결되는 순간적인, 지속적인, 의식적인, 무의식적인, 일시적인, 중차대한 무수한 관계들을 분석하려는 짐멜의 사회학은 인식기획과 방법론적 토대를 구성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대도시의 부유한 시민계층의 사회세계를 논의의 지평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짐멜은 사회에서 두 가지 범주를 설정하고 있다. 첫 째는 이해관계, 동기, 목적, 그리고 충동 등등을 지닌 개인들이고 둘 째는 개인들 사이에 진행되는 상호작용과 거기에서 생성되는 다양한 형식이다. 짐멜에게 사회를 사회로 만드는 것은 상호작용하는 개인들의 특정한 삶의 내용들이 아니라, 이들 내용의 생동감이 상호영향을 미치는 형식들 획득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그는 상호작용의 형식과 내용을 엄격하게 사유적으로 분리함으로써 사회학의 존립가능성을 찾는다.

이는 이론적으로 칸트의 철학·인식론적 원리를 사회세계에 적용하려는 짐멜의 방법론적 프로그램을 가리킨다. 짐멜은 부유한 대도시 시민계층의 상호작용이 순전히 유희적인 상호작용의 형식임을 관찰한다. 여기서 상호작용하는 개인은 실제적인 목적이나 이해관계를 갖지 않고 어떤 기능적 요구도 하지 않는다. 즉 사회에서 사회인 것은 그 무엇보다도 친교에서 명백하게 구현된다. 짐멜은 친교에서 사회적 현상과 과정에 대한 사회학적 인식을 위해서 일차적으로 요구되는 상호작용의 형식과 내용의 분리를 가장 전형적이고 순수하게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친교는 외적인 강제보다는 자유부동하며 상호작용하는 개인들의 관계이기 때문에 개인들의 연관관계가 더 강력하게 강조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개별 분과과학으로서 사회학을 추구하는 짐멜은 (형식, 내용) 분리의 과학외적·이론외적 전형을 국가나 경제 또는 종교 같은 사회가 아니라 전적으로 친교라는 사회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친교는 원칙적으로 모든 특수한 내용을 초월하는 형식을, 모든 내용들을 형식의 순수한 유희 속으로 용해시키는 추상적 형상으로 표현된다.

친교는 서구의 광범위한 사회·문화적 합리화와 분화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그 일부분이다. 친교는 현대적 경제와 사회질서 위에 존립하며, 시민계층의 세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생활양식이라는 점에서 문화의의를 지닌다. 덧붙여 짐멜은 친교라는 특수한 생활양식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의 경제적·사회적 요구와 강제에서 자아의 영혼을 구제하고 자아로 복귀하도록 교화시키려는 실천적 동기도 가지고 있었다.

짐멜은 경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구분한다. 짐멜에게 경제적인 것은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기에 낮은 수준의 사회적 상호작용이며 가장 비인격적이고 즉물적인 매체인 돈에 의해 조직되고 구조화되며 통제된다. 따라서 경제적 행위자들은 단지 특정한 기능이나 역할의 담지자로 사회적 상호작용을 할 따름이다. 반대로 사회적인 것은 적은 수의 사람이 참여하기에 높은 수준의 상호작용이며 이해관계가 아닌 전적으로 인간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에 전념한다. 짐멜에게 돈은 개인들이 다양한 사회적 관계와 영역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것이며 돈은 소유한 사람들로 하여금 물질적 요구와 강제에서 해방되어 유희적인 사회화 형식에 전념하도록 해준다.

결론적으로 친교는 정치·경제와 같은 실제·합리적 내용 및 강제에의 참여라는 하한선과 가장 순수하고 내적인 인격의 체험이라는 상한선의 사이에 존재하고 기능할 수 있는 사회적 상호작용 형식이다. 이 두 요소를 제거하면 친교에는 단지 인간에게서 보편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특성들만이 남게 된다. 친교는 종교·예술·사랑과 달리 사회학적 구성물이며 사회적 상호작용을 가리키기 때문에 개인의 순수한 인격에 관계하는 철학의 주제가 될 수 없다. 또한 각 영역에서 진행되는 상호작용은 사회학적 구성물인 친교에서 진행되는 것과 원칙적으로 대체하거나 분해할 수 없는 정체적인 인격들로 구성된다.


2) 합리적 경제행위와 사회적 행위


베버에게 문화과학은 선험적 전제조건은 문화인간이고, 이는 더 이상 소급하거나 환원할 수 없는 최종 단위이다. 문화인간은 문화과학의 존립과 의미의 근거가 된다. 문화인간은 서구의 근대 이후 주관적 인격과 합리적인 삶의 질서를 겸비한 인간유형으로 형성되었다. 더불어 베버는 문화인간과 더불어서 행위개념에 의지와 능력뿐만 아니라 행위의 목적을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는 데에 적합한 수단을 동원하고 실제적인 행위의 과정을 통제하고 결과를 평가하며 자신의 행위에 주관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의미와 능력을 덧붙인다. 또한 합목적적 행위의 담지자들은 외부세계 대상들의 행태와 다른 사람들의 행위에 대한 기대를 합리적으로 추구하고 고려한 성공적 결과로서의 자신의 목적에 대한 조건이나 수단으로 이용하는 인간의 유의미한 자아행태이며 사회학적 인식의 이념형으로 기능한다.

이런 베버의 행위유형은 연역이나 사변적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서구문화가 구축한 역사적 성과물이다. 목적합리적 행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문화사적 연구의 결과물이다. 베버는 서구 시민계층의 합리성이 전형적인 근대적 문화인간의 유형을 보여준다고 파악했으며 그 특유의 행위합리성을 서구 근대의 특이성과 보편사적 형성조건 및 발달경로를 분석하고 설명하는 과학적 작업을 위하 이론적 도구로 적극 활용하였다.

베버는 국가와 통치에서 시작되어 위로부터 내려오는 인식과 상승하는 계급들의 해방투쟁에서 비롯되어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당시 독일의 인식이 아닌 기민계층의 사회세계로 사회과학이 눈을 돌려야한다고 보았다. 베버 사회학의 기저를 이루는 것은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 시민계층이 자유로운 시장질서 속에서 기획하고 조직하며 영위한 경제행위이다. 서구 근대 초기의 경제 시민계층이라는 역사적 인간집단의 문화의의는, 이 집단이 근대적 자본주의 토대 위에서 삶과 행위의 합리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주체주의적인 정신을 창조함으로써 물질적·경제적 문화와 이상적·정신적 문화를 결합시켰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베버는 이 집단에서 시민계층적·자본주의적 사회관계와 사회질서에 적합한 합리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주체주의적인 행위모델과 가치모델을 발견한 것이다. 심화하여 합목적적이고 객과적인 사회관계와 사회질서가 전반적으로 관철되고 제도화된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베버의 문화사적 연구는 사회과학적 연구이다. 그는 관념철학이나 의식철학의 관점에서 개별적으로 고립된 인간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집단의 형성과 발달을 보았다.

베버가 제시한 계급과 신분, 경제적 질서와 사회적 질서의 차이점은 노동자와 시민계층(또는 부르주아지)를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다. 노동자의 삶은 철저히 경제적 질서에 의해 조건지어지고 결정되기 때문에 그들의 행위는 철저히 물질적 이해관계에 얽매여 있고 그들은 사회적 질서에 참여하는 것이 봉쇄되어 있다. 여기서는 유의미한 인간 행위가 나타날 수 없다. 반면 시민계층은 물질적 생존경쟁에서 해방되어 자신만의 고유한 인격을 창출하는데 전념하고 사회적으로 행위할 수 있게 해준다. 노동자들은 단지 실제적인 이해관계에 의해 지배받을 뿐이고, 사회적 질서에 참여하는 시민계층은 주관적 인격을 평준화하고 말살시키는 생존경쟁으로부터 구성원들을 보호해준다.

베버는 근대적 행위와 적합한 행위모델을 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서구 경제 시민계층에서 찾는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연구에서 이념형적으로 제시된 캘빈교도들의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행위유형과 생활양식은 베버 시대의 실제 독일 시민계층에게는 결여되어 있던 특성이다. 이들은 주체적인 행위자이기보다 귀족화를 지향하고 있었다. 반면 현대사회의 문화적·윤리적 토대를 구성하는 직업으로서의 자본주의, 직업으로서의 과학, 그리고 직업으로서의 정치, 바로 이것들이야말로 독일을 현대적인 시민계층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사회로 철저하게 탈바꿈시킬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베버는 확신했다.


3. 상호작용과 사회적 행위의 개념을 어디에서 왔는가?


1) 민족심리학과 원자론 그리고 상호작용


게오르그 짐멜은 사회적인 것에 대한 인식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민족심리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짐멜이 민족심리학에서 배운 초개체적인 것은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개별적인 것과 전체적인 것의 관계, 인간과 사회의 관계이다. 민족심리학의 창시자인 라차루스와 스타인탈은 개별과 전체,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상호작용”으로 파악한다. 민족심리학은 민족의 삶을 심리학적 근원으로 소급한다. 이런 이유로 민족심리학은 “민족의 정신적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과 법칙들에 대한 이론”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민족심리학은 집합주의적이고 유기체론적인 특성을 지닌다. 짐멜은 민족심리학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이와 거리를 두며 독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짐멜은 인류학적 연구도 가치가 있지만 두 가지 사회의 개념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 한계에 대해 지적한다. 첫 번째로 사회라는 개념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데, 이 개념은 개별 현상들을 분리해서 다룰 수 있는 능력이 부재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두 번째로 특별히 사회적인 에너지를 통해서 현상들을 결정하는 사회이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단순히 다향으로 발생하는 동일한 현상들을 가리켜서 사회적이라고 기술하며 통계적 동질성 및 동시성을 혼동한다. 181-182p.

짐멜은 사회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면서 자연과학적 세계관, 구체적으로 구스타프 테오도르 페히너의 사변적 원자론에 주목하게 된다. 짐멜을 이를 통해 사회세계와 자연세계 모두 요소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존재한다는 점을 파악한다. 베버는 이런 측면에서 자연과학에서 개념자원을 차용한 짐멜을 비판한다. 그러나 이것은 베버의 오해이며 짐멜은 사회과학적 인식은 자연과학과 근본적으로 다르게 선험적으로 개인의 영혼과 확고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강조한다. 이런 까닭에 사회과학의 기저에는 개념적으로 자아와 타자 사이의 상호작용이 깔려있다. 사회의 최고단위는 바로 이들 두 원천형상과 이들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 더불어 짐멜은 사변적 원자론을 통해 민족심리학의 집합주의·유기체론적 특성을 극복하고 사회를 “단위들로 구성된 단위”로 간주하는 사회학으로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사회의 영혼을 거기에 관여하는 사람들 사이에 진행되는 상호작용의 합으로 해체시키는 것은 다음과 같은 현대의 정신적 삶 일반이 보여주는 방향이다. 고정적이고 동일하며 실체적인 것을 기능, 에너지, 운동으로 해체하고 모든 존재에서 그것이 되어가는 역사적 과정을 인식한다. 우리가 사회라고 명명하는 것에서 부분들의 상호작용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집들을 가지고 집을 지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짐멜은 페히너의 원자론에 의존해서 사회를 다수의 개인들의 사호작용의 합으로 해체시킬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구체적인 정신적·사회적 현상과 과정을, 전체적이고 단일한, 또는 통일적인 영혼이나 사회의 구조 및 본질과 법칙으로 소급시키던 당시의 전신과학 및 사회과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식의 전략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2) 이론경제학과 사회적 행위


막스 베버는 오스트리아 한계효용학파의 이론경제학에서 문화과학과 사회학의 인식대상을 구축하는데 큰 영향을 받는다. 칼 맹거는 개인들의 합리적인 경제행위를 경제학의 인식대상과 기본단위로 규정한다. 경제란 그에게 다수 개별 인간들의 경제적 행위의 합과 다름없다. 이러한 맹거의 생각은 당시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의 집합주의적인 인식대상에 대한 비판이었으며 베버도 이에 큰 영향을 받는다.

막스 베버는 시장에서 진행되는 합목적적인 행위를 이념형적으로 이해하고, 그 위에 토대를 두는 사회질서를 행위론적으로 파악하는 인식의 범주를 한계효용학파의 행위개념에서 발견했다. 한계효용학파의 개념·이론 구성의 출발점은 목적과 수단을 지향하는 개별 인간의 행위이다. 이들에게 있어 서구 인간 유형의 경제적 성숙이란 구체적으로 주관적인 의미부여와 가치결단에 입각해 경제행위를 기획하고 조직하며 수행하는 인격체의 존재를 지칭한다. 베버는 문화과학과 사회학을 근대 서구 합리적인 인간유형과 행위유형의 토대 위에 구축한다. 즉 합목적성은 베버에게 방법론, 개념·이론의 구성, 실제적·역사적 연구, 그리고 실천의 문제에 대한 준거점이다. 또한 베버는 한계효용학파와 동일하게 근대 초기의 서구 경제 시민계층을 중심으로 근대적 삶의 개인·주체적인 토대가 마련되었음을 발견한다.

한계효용학파의 이론경제학이 현대 문화문제의 인식에 대해 지니는 이론적·문화사적 의미는 베버에게 개별 인간들의 유의미한 행위라는 범주를 좁은 경제영역의 테두리를 넘어서 인간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시키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그 결과 베버는 행위, 행위의 전반적인 전제조건, 그리고 행위가 객관화된 결과물의 합을 가리켜서 문화하고 정의한다.

베버에게 개별 인간이야말로 “유의미한 자아행태의 한계이다 유일한 담지자이다.” 따라서 사회학은 모든 사회구조물을 “‘이해할 수 있는’ 행위, 다시 말해서 단하나의 예외도 없이 관련된 개별 인간들의 행위로 환원시키는” 과제를 지닌다.


2017.가을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1925년 11월 19일 - 2017년 1월 9)


소외와 빈곤, 그리고 청년노동



Ⅰ. 서론


근대와 시작된 사회학의 주된 관심 중 하나는 ‘자본주의’라는 주제였다. 대표적으로 사회학을 정초했다고 평가받는 칼 맑스(Karl Marx), 에밀 뒤르켐(Èmile Durkheim), 그리고 막스 베버(Max Weber)의 관심 또한 자본주의와 그로 인한 사회변동에 있었고 그들은 이를 통해 자신들의 업적을 이어나갔다. 구체적으로 칼 맑스의 경우, 그는 자신의 저작 『자본(Das Kapital)』을 통해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설명한다. 그 저작들에서 맑스는 자본가의 이윤은 어디서 오는지, 자본의 유통과정과 자본의 형태변화, 자본주의의 생산과정을 밝힌다(김수행, 2015: 11-13). 이어서 뒤르켐의 경우에도 자본주의를 연구했는데 그의 관심은 보통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분석이라기보다는 근대로 이행된, 자본주의로 이행된 사회의 분업과 병리적 사회현상을 진단하는 일이었다(앤서니 기든스, 2008: 411). 베버는 “우리 근대인의 삶의 운명을 가장 강력하게 결정하는 힘인 자본주의”(막스 베버, 2013: 15)라고 평가하며 자본주의가 근대인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해 평가했다.

이렇듯 ‘자본주의’는 줄 곧 사회학의 중심적인 주제 중 하나였다. 사회학은 자본주의를 탐구하기도 했으며 동시에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삶에 대해 연구하고 서술해나갔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사회적 삶’들은 ‘장밋빛 인생’으로 그리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근대 자본주의로 이행하면서 스스로 합리적인 노동의 형태를 조직한 프로테스탄티즘에게 영웅의 모습을 읽고 있는 막스 베버도 자본주의는 이제 인간의 영향력을 떠나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힘으로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다”(막스 베버, 2013: 365)고 평가하고 있다. 뒤르켐 또한 기계적 연대에서 유기적 연대로 변화된 사회를 이끌 새로운 도덕에 관심을 가졌지만 그의 ‘아노미(anomie)’ 이론을 근대사회의 병리적 현상에 초점을 둔 분석이었다. 이중에도 자본주의의 사회적 모순에 대해 가장 날카롭게 분석한 것은 아마도 맑스일 것이다. 맑스는 소외(Entfremdung) 개념을 통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의 삶의 형태를 보았다. 그리고 이 소외의 개념은 근대사회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데 여전히 유용한 도구이다(앤서니 기든스, 2008: 411).

고전 사회학자들의 분석뿐 아니라 20세기 중반 이후의 사회는 다시금 다양하게 사회학을 통해 포착되기 시작한다. 현대사회학자들 또한 그들의 저작에서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삶의 형태와 그 모순에 대해 연구하고 서술했다. 그 중에 후기 근대(late modern)에서의 새로운 빈곤(new poor)의 양태를 그려낸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의 논의는 지금의 한국사회의 형태와 사회적 삶을 분석하는 데도 여전히 유용한 도구이다.

본 보고서는 칼 맑스의 소외론과 지그문트 바우만의 빈곤에 대한 논의를 토대로 이 논의들을 한국 청년세대에 적용시켜 분석해보고자 한다. 또 이를 통하여 현재 한국의 청년세대들의 소외와 빈곤에 대해 탐구해보고 이에 대한 의의와 결론을 내려보고자 한다.


Ⅱ. 본론


1. 이론적 검토


1) 소외와 빈곤


칼 맑스는 노동에서의 소외가 네 측면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인간은 그가 생산한 생산물에서, 생산의 과정에서, 스스로에게서, 그리고 인류로부터 소외된다.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산출된 대상에서 소외되고, 또 생산의 과정과 생산행위로부터 소외되고, 그 자신에게서도 소외되고, 다른 인간에게서도 소외되게 된다(루이스 코저, 2016: 93-94).

소외에 대한 더 중요한 초점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통제력이 상실된다는 측면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야 한다. 그러나 노동자는 소외로 인해서 “자기 노동생산물을 통제할 수도, 자신의 노동 자체를 통제할 수도 없게 된다”(알렉스 캘리니코스, 2002: 99)는 점이 중요하다. 노동에서 소외를 경험한 인간은 다른 사회적 영역에서도 주체성과 창조성을 부여받지 못할 경향성이 크다. 맑스주의를 비판적으로 계승했다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마르쿠제에 따르면 개인이 합리적인 작업, 노동에 참여할수록 헛된 합리성에 굴복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순응의 역학’이 노동과 작업장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질서에도 확장된다고 보았다. 구체적으로 사무실, 학교, 상점 등의 다양한 생활세계에서도 소외는 이어진다(한국철학사상연구회, 1995: 195).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소외란 단순히 노동자의 작업장의 삶에서만 이루어지는 사건이 아니다. 소외란 사회적 삶에서의 소외이며, 주체성의 박탈이라고 볼 수 있다. 맑스의 인간론으로 보았을 때 인간은 호모 파베르(Homo Faber), 즉 도구의 인간, 작업인이다. 맑스는 역사가 인간의 자기실현 과정이라고 보았다. 역사는 인간의 노동과 생산을 통한 자기창출 과정이다(에리히 프롬, 1983: 40). 이런 까닭에 소외가 증대할수록 인간은 세계창조적 또는 세계형성적 주체에서 박탈된다. 그들은 운명을 스스로 만들 수도 없으며 하루하루 운명을 잠식당해가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요컨대, 소외와 빈곤은 단순히 경제적인 영역에 국한되어서 적용될 수 있는 개념뿐 아니라 사회·문화를 포괄하는 영역에서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2) 후기 근대사회와 새로운 빈곤


이러한 소외·빈곤 논의를 20세기 중반 이후의 현대사회(comtemporary society)에서 새롭게 이어나간 이론가로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사회의 병폐들을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천착해온 사회학자이다. 그의 이론은 후기 근대(late modern)이라는 시대적 진단의 지평 위에서 전개되었다. 먼저 후기 근대라는 시간설정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고전 사회학자들이, 앞서 언급한 맑스, 뒤르켐, 베버 등, 보았던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사회와 20세기 중반 이후의 사회는 변화가 있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근대와의 급격한 단절을 선언했다. 또 하버마스로 대변되는 측면에서는 근대를 미완의 기획으로 판단했다. 이 둘 사이에서 양자를 비판적으로 지양하면서 발생한 이론이 후기 근대론이다. 김홍중(2015: 154-157)에 의하면 후기 근대론은 20세기 중반 이후의 세계가 20세기 초반, 19세기 후반의 세계와 상이한 구성을 하고 있음에 동의한다. 이들은 복지국가의 와해, 금융 자본주의의 등장, 정치적 참여의 쇠락, 이데올로기의 사회동원력 약화,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의 새로운 사회문제에 주목한다. 이들의 주된 입장은 이렇다. 첫 째, 후기 근대는 초기 근대성이 단절된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아니라, 초기 근대가 성숙하고 발전된 재귀적(再歸的) 형태이다. 둘 째, 후기 근대는 초기 근대에 자명하게 여기던 것들이 붕괴와 파산된 상황이다. 셋 째, 20세기 후반의 사회상황을 긍정적으로 인식했던 포스트모던 사회이론과 달리 후기 근대론은 현대사회는 해결해야하는 문제들의 집합으로 파악한다. 정리하자면 후기 근대론적 사회이론은 초기 근대와 달라진 20세기 중반 이후의 세계의 변화를 관찰한다는 측면에서 포스트모던 사회이론과 공유하는 지점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은 극단적 단절이 아니라 근대의 연속성 위에서 현대세계를 파악하고 있다. 그렇지만 하버마스처럼 근대성과 이성을 문제해결의 실마리로 보지 않는다.

바우만의 논의 또한 이런 연결성 상에서 파악해야 한다. 바우만은 복지국가의 와해와 이데올로기의 동원력 약화, 정치참여의 쇠락, 노동시장의 유연화,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라는 특징을 가진 20세기 후반의 사회를 관찰했다. 바우만은 새로운 근대성을 ‘액체근대(liquid modern)’라고 명명한다. 액체 근대는 포스트모던 사회이론처럼 해체적이다. 우선 견고한 사회적 형식들이 소멸했다. 그리고 국민국가(national state)의 기능과 권력이 약화되고 국가기관의 기능들이 외주화된다. 덧붙여 공동체는 액화되어 해체되어 네트워크화 된다. 또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삶이 프로젝트나 에피소드로 분할된다. 끝으로 개인이 이 모든 불확실의 책임을 갖게 된다(김홍중, 2015: 166).

지그문트 바우만(2012)이 펼친 다양한 논의를 보면 어느 정도 중첩되는 부분들이 존재한다. 먼저는 ‘노동윤리의 변화와 생산자 사회에서 소비자 사회로의 이행’이다. 다음으로는 ‘복지국가의 몰락과 사회의 배제’이다. 마지막으로는 ‘새로운 빈곤층의 출현과 이들의 의미변화’이다. 물론 이것들을 작위적으로 구분했지만 이 논의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우만의 논의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자 한다. 첫 번째로 바우만은 노동윤리의 변화와 생산자 사회에서 소비자 사회로의 이행을 이야기한다. 막스 베버의 경우 근대 자본주의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안분지족하는 전통주의적 생활양식이 파괴되고 합리적으로 자신의 노동을 조직화하고 금욕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형태의 노동윤리가 필요하다고 보았다(막스 베버, 2013). 바우만 또한 노동윤리가 근대 초기에 빈곤층을 공장으로 유인하는 원인으로 작용했음을 주장한다. 바우만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근대 초기의 ‘노동윤리’가 ‘소비미학’으로 대체되었음을 주장한다. 사회는 더 이상 생산자를 필요로 하지 않고, 소비자를 만들어 낸다. 소비하는 것이 최선의 것이며 부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 되어버린다(지그문트 바우만, 2012). 소비자를 만드는 사회에서 모든 매체들은 “행복에 이르는 길을 쇼핑”, 소비가 행복임을 주입시킨다(지그문트 바우만, 2014: 71).

두 번째로 바우만은 복지국가의 몰락과 사회의 배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앞서 언급한 소비미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빈곤층은 더 이상 체계에 포용되지 못한다. 초기 근대의 산업사회에서는 그들을 산업예비군으로 명명하며 체계 안으로 끌여들였지만 소비미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들은 쓸모 있는 역할이 주어지지 않는다(지그문트 바우만, 2012: 9). 복지국가는 해체되고 쇠락하고 있다. 결국 국가의 의미는 ‘개인 안전 국가(personal safety state)’정도로 전락한다. 국가는 더 이상 사회적 국가(social state)가 아니며 사회적 삶의 공포로부터 국민을 지켜주지 않는다. 단순히 범죄자로부터 개인의 삶을 지켜낼 뿐이다(지그문트 바우만, 2010a: 29). 고체근대(solid modern)에서 액체근대로의 이행은 이를 더 가속화시킨다. 고체근대는 무거운 자본주의였으며 이들은 상호의존성으로 결합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육중한 공장 안에 자본과 노동을 묶어뒀다. 노동자가 어떤 상태에 있든 그들을 결속시켜 두었다(지그문트 바우만, 2010b: 233). 하지만 복지국가는 해체되었고 이들의 빈곤한 삶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게 되었다. 이들은 이제 체제 밖으로 밀려나 유동하는 공포 속에 부유하는 존재이다.

세 번째로 바우만은 새로운 빈곤층의 출현과 이들의 의미변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앞서 언급했듯 초기 근대의 자본주의는 노동자를 체제 안으로 결속시켰다. 하지만 다양한 사회적 변화로 인해 새로운 빈곤으로서 최하층계급이 발생했다. 이들이 최초로 대중의 관심 속에 드러난 것은 1977년 타임지의 커버스토리를 통해서인데 미디어는 이들을 단지 ‘가난한 사람’, ‘경제적으로 궁핍한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이들은 정상의 범주에 있지 않으며, 이질적이고 통제할 수 없는 ‘배제되어 마땅한’ 존재로 규정된다(지그문트 바우만, 2012: 135). 소비사회에 소비력이 없는 가난한 이들은 배제되어 ‘쓰레기’가 되었다. 실업은 노동윤리를 통해 의미론적으로 비정상적인 삶을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이 잉여로 규정된 것은 그들이 버려져도 무방한 존재임을 나타냈다. 그들은 ‘잉여’, ‘쓰레기’, ‘불합격품’, ‘폐기물’, ‘찌꺼기’와 같은 의미론적 공간을 공유하는 존재이다(지그문트 바우만, 2008: 29-32). 결속들은 해체되기 시작했고 탈규제와 개인화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체제가 끌어안아야 할 존재가 아니다. 계급 바깥에 버려졌고 회생이 불가능하다. 더 이상 재사회화를 통해 정상적인 사회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추방되어야 할 없어져야 할 존재이다. 이들에 대한 배제는 의미론적인 배제 뿐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이루어졌다. 생계수단이 없는 이들은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로 강제로 추방되어 분리구역으로 몰려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제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분리되었다(지그문트 바우만, 2010a: 111-120).



2. 청년세대와 소외와 빈곤


1) 프레카리아트(precariat) 그리고 권위주의와 소외


프레카리아트라는 단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 단어는 ‘불안정한’이라는 의미의 프레카리오(Precario)와 ‘무산계급’을 의미하는 프롤레타리아토(Proletariato)를 결합해 만들어진 조어이다. 이 말은 2003년 이탈리아 거리의 낙서로 시작되어 이제 불안정한 노동을 의미하는 단어로 자리매김했다(아마미야 가린, 2011: 23). 이 프레카리아트라는 단어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분석했던 20세기 중·후반의 세계의 특성과 친화성을 갖고있다. 바우만은 “이제 상황은 변했고, 다방면의 변화에서 핵심적 요소는 ‘장기적’ 마음가짐을 대체하게 된 새로운 ‘단기적’ 마음가짐이다. … 중략 … 최근의 계산에 따르면 보통 정도의 교육을 받은 젊은 미국인은 그의 노동인생에서 최소 열한 번쯤 직업을 바꾼다고 한다. 그 변화와 속도와 빈도는 현 세대의 노동인생이 끝나기 전에 더욱 증가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 오늘날의 슬로건인 ‘유연성’을 노동시장에 적용하면 이는 ‘우리가 알던 일’에 종말이 오고 있다는 것, 대신 계약서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단기계약과 ‘다음번 통고까지’라는 불안정한 지위가 도래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우리의 일하는 삶은 불확실성으로 가득하다.”(지그문트 바우만, 2010b: 237)라고 말했다. 이것이 이 시대 특별히 청년들 노동의 특성이다.

청년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청년세대를 규정하는 다양한 담론지형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는 우석훈·박권일(2007)의 ‘88만원 세대’와 ‘삼포세대’(경향신문, 2011.5.11)가 있다. 이는 모두 2000년대 중반 이후 청년들의 경제적 삶을 특징으로 나타낸 신조어들이다. 삼포세대는 원래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세대라는 의미의 조어였지만 지금 와서 청년들은 너무나 포기할 것이 많아 ‘N포세대’로 불리기도 한다. 이전 한국의 청년세대의 표상이었던 386세대의 주체적이고 참여적인 이미지는 더 이상 청년의 표상이 아니다. 청년들은 스스로를 규정하지 못하며, 단순히 ‘N포 세대’라고 불릴 뿐이다. 청년세대를 규정하는 언어담론의 지형에서부터 청년들은 스스로를 스스로의 성격으로 규정할 수 없다.

비정규직이 다수를 차지하는 청년노동시장에서 갑은 커녕 을도, 병도 아닌 ‘정(丁)’이다. 이들에게 회사에 남아 노동하는 것은 생존의 문제이다. 한 청년의 자기기술을 보면 스스로를 “갑을병정의 정정정정”이라고 평가한다. 그 청년은 자신의 회사에서의 노동에 대해 기술하면서 자신이 갑을병정 중, 정의 위치, 즉 최하위층에 있었는데 어떻게 하다보니 맡게 된 조금 더 높은 지위에 일을 수행하자 같은 정들에게 받은 따돌림을 이야기하면서 정의 세계에도 서열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한다. 또 한국의 자본주의는 유교 자본주의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데 이런 유교적 가부장적 질서는 회사의 사무적 관계에 수직적 서열화를 가속화시키고, 더불어 성(gender)에 의한 가부장적 차별을 심화하는데 이 청년의 자기기술에는 그러한 상황들도 적혀있다. 이 청년은 “업무 처리에 뛰어나고 성실한 사람도, 하루 열여섯 시간씩 일하고도 야근 수당을 받지 않는 사람도 얼마든지 해고 대상자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김송희, 2017: 64-78). 이것을 보면 청년노동은 경제적으로도 최하층이며 동시에 작업장 내에서의 지위도, 사무직, 생산직, 서비스직을 포함해, 낮고 그 안에서 유교적 권위주의와 서열문제로 가장 밑단의 ‘정(丁)중의 정’의 역할을 수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청년세대는 스스로를 규정할 힘도 또 작업장 내에서 스스로의 존재에 참여하기도 어려운 존재의 특성을 지닌다.


2) 노동윤리의 이중성 - 극단화와 이탈


다음으로 볼 청년세대의 특성의 노동윤리의 이중성이다. 청년세대는 노동윤리를 극단적으로 내재화하거나 아니면 노동윤리에서 이탈하는 특성을 보인다. 먼저 바우만의 논의에 따르면 노동윤리는 일하는 삶이 경제적으로 우월하다는 것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함을 내세웠다(지그문트 바우만, 2012: 27). 따라서 청년세대는 한 편으로는 극단적으로 노동에 집착하여 노동하기 위해, 즉 사회의 정상적인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의 행위 능력을 극한으로 이끌어 스스로의 삶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주체로 탄생했다.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의 공간을 채우는 많은 일명 ‘합격 수기’의 이념형(Idealtypus)은 “공부에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을 절제하고”, “명문대 또는 대기업에 들어가고”, “노력하고”, “극적인 성과 성장을 이루는” 모습들을 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들을 가진 합격수기들은 넘쳐나고 사람들은 이를 칭송하는데 여념없다. 특별히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합격에 ‘노력’이라는 가치가 첨가되는 것인데, 이를 통해 불합격한 삶들은 노력하지 않은, 사회적으로 선망의 대상이 될 가치가 없는 삶으로 전락해버린다. 많은 청년세대들은 이런 인식을 공유하고 있으며 이런 삶은 자기계발서의 논리와 유사성을 갖는다. 오찬호(2014: 33-34)는 자기계발 담론은 내면화한 청년세대가 이를 통해 성공한 자기계발서 주인공의 한 사례를 모든 사람이 누구나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일반화시키는 현실을 지적하기도 했다. 자기계발담론은 소수의 극적인 성공 드라마를 통해서 다수가 가진 현실적 조건과 비참함을 정당화시키는 폭력성을 내재한다.

한편으로 청년들은 노동윤리에서 이탈되기도 한다. 이들은 “돈 많은 백수”를 꿈꾼다. 하지만 이것은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노동을 해야 한다는 전제를 공유한다. 그렇지만 굳이 노동하는 삶이 더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청년세대들은 “일은 왜 열심히 해야 하나요”라고 반문하기 시작했다(김송희, 2017: 84). 노동은 소명(Beruf)라고 보다 ‘먹고사니즘’이다. 먹고 살기위해, 또는 소비하고 즐기기 위한 화폐를 모으는 것이 곧 노동이다. 이렇게 내재적으로 공유되는 노동윤리에서의 이탈을 포착할 수 있는 것은 ‘헬요일’ 같은 단어이다. 헬요일은 월요일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말 그대로 월요일은 휴식이 끝나는 지옥(hell)같은 날이라는 뜻이다. 또 ‘월요병’이라는 단어도 이를 지지해줄 수 있다.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월요일에짖는개’라는 닉네임을 가진 유저가 2015년부터 약 2년 동안 일요일 저녁이면 월요일을 알리며 “월월월”짖는 내용의 게시물을 올렸다. 이 게시물은 헬요일, 월요병 등으로 인식되는 월요일을 알리는 내용으로 거부를 해도 오는 월요일을 재치 있게 표현한 형태로 유저들에게 인기를 얻기도 했다.


3) 생존과 일하는 삶, 그리고 잉여


앞서 말한 대로 청년들의 노동윤리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노동윤리에서 이탈하는 현상이 발생해도 소비미학 때문에 청년들은 노동해야 한다는 전제는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생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김홍중(2016: 289)은 한국 근대의 사회적 상상을 자유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화주의, 합리주의가 아닌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에 근접해 있다고 평가한다. 한국 근대의 사회적 상상은 ‘생존주의’와 연결된다. 김홍중(2009)은 이미 현대의 주체들을 ‘육화된 신자유주의의 주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신자유주의는 단순한 제도라기보다 특정한 주체를 생산해내는 일종의 사회적 에토스(ethos)로 작용한다. ‘육화된 신자유주의의 주체’는 생존자로 명명가능하며, 이들의 도덕은 생존주의이다. 이 주체들은 사회·경제·생물학적 생존을 위해 도구적 성찰성을 극대화시키는 존재이다. 이러한 이론적 배경에서 21세기 한국의 청년세대는 “생존에 대한 불안이라는 기조감정과 서바이벌을 향한 과열된 욕망, 그리고 경쟁에서의 승리를 위한 자기 존재의 가능성들을 전략적으로 계발하려는 집요한 계산으로 특징지어지는 독특한, 마음의 역동”을 보여주며, 생존주의를 통해 행위와 실천을 이끌어내는데, 생존주의는 “개인의 인생에서 다양한 퍼포먼스를 통해 자신의 수월성을 증명함으로써, 패배와 그 결과 주어지는 사회적 배제로부터 스스로를 구제하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믿는 21세기 청년들의 세대심”이라고 정의한다(김홍중, 2016: 263). 그들은 스스로 스놉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공격적 생존’과 ‘세속적 성공’을 이루기 위한 적합한 주체의 형태이기 때문이다(김홍중, 2013: 81).

청년세대는 실패하지 않는 삶을 살기위해 노력한다. 정부의 영역과 대중매체는 청년실업 문제에 대해 대대적으로 ‘문제 상황’을 규정하고 있다. 청년들은 당연히 ‘일해야 하는 그래야만 하는’ 존재이다. 이런 사회구조적 압력은 개인의 생활세계(Lebenswelt)에 침투한다. 개인들은 이 문제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의심하지 못한다. 취업하지 못하는 삶은 상상할 수 없는, 상상해서는 안 되는 삶이며 실패한 삶인 것이다. 이것은 취업에 실패한 청년에게는 비정상의 스티그마로 작용한다. 이 실패는 사실 부유한 삶에서의 이탈이나, 정말 괜찮은 삶을 영위하기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생물학적 몸의 생존이 달리 문제이기도 하다. 헬조선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비정규직 일자리라도 구하지 못하는 삶은 사회적 삶에서의 배제와 박탈을 의미한다. 먼저 대기업에 정규직으로 입사한 청년들은 이 위계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고급 공무원과 공기업 공사에 취직한 청년들은 다음 위계이다. 그 밑으로 비정규직 일자리, 사회적 지위와 선망의 대상이 되지 않는 누군가 욕망하지 않는 노동자가 되는 것은 실패이고 생존의 문제가 달린 일이 된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논의처럼 청년들은 스스로의 삶을 ‘잉여’라고 명명하기 시작했다. 『월간 잉여』라는 잡지를 창간한 최서윤(2017: 166-168)은 스스로를 “대한의 ‘잉여’”라고 명명한다. 본인은 산업 역군으로도 쓰일 수 없는 존재이다. 스스로를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평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제가 쇠락하면서, 잉여인력이 급증했고 청년세대는 체념과 자학이 몸에 뱄다. 그런 세대를 위해 잉여에 의한, 잉여를 위한 잡지는 창간했다고 이야기한다. 이외에도 한윤형의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최태섭의『잉여사회』, 가스카 다케히코의『별 볼 일 없는 인생 입문』김상민 등의『속물과 잉여』등의 책은 청년세대와 잉여를 연결시키고 있는 책들이며 이것들이 바로 한국사회의 자기기술의 결과이다. 열악한 노동의 형태나, 신자유주의적 삶에서 이탈한 형태를 잉여라 명명한다.


Ⅲ. 결론 및 한계


이영자(2015)는 프랑스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와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논의를 가지고 현대 자본주의를 분석한다. 그에게 있어 현대 자본주의는 신화이며 독사(doxa)이다. 먼저 신화는 바르트의 개념인데, 이는 자연의 외피, 즉 거짓자연의 옷을 입고 자연으로 위장하여 자연의 본성을 보증한다. 자본주의로부터 파생된 이데올로기와 문화들을 자연스러운 또 초역사적인 것으로 당연시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부르디외에 있어서 독사는 그 인위적 질서를 숙명적인 체계, 사회적 본질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부르디외에게 사회구조는 아비튀스(Habitus)를 통해 생활세계에 침투한다. 독사 또한 자본주의적 질서, 인류 역사에 몇 백년도 되지 않은 역사를 초역사적이고 자연스러운, 생득적인 질서로 오인하게 만든다. 자본주의적 질서와 체계, 문화, 그것이 생성하는 에토스는 생활세계에서 의심할 필요 없이 당연하게 육화된다. 지그문트 바우만 또한 파편화된 개인들의 경쟁이 사회적 선, 공익을 증진시킨다는 프로파간다를 비판하고, ‘사회적 불평등’이 자연스러움이 된 현실을 비판한다(지그문트 바우만, 2014: 11, 87). 지그문트 바우만이 새로운 빈곤에서 지적하듯 자본주의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언어를 잠식하며 스스로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인간은 왜 일을 해야 할까?”, “일하지 않는 삶은 부도덕한 삶일까?”, “현재 한국사회의 질서는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인가?” 이러한 다양한 질문들이 시작되며 성찰이 시작되는 것이 한국 청년세대의 소외와 빈곤 문제에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소외와 빈곤이 너무나 당연한 생활세계를 살고 있는 한국인의 노동자들은 “기이한 환몽”에 사로잡힌 것을 아닐까? 이러한 열정들이 오히려 “생명력을 소진”하고 있지는 않을까? 현실을 문제시하고 성찰하면서 게으를 수 있는 권리와 대안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폴 라파르크, 2014: 27-28).

피에르 부르디외(2002: 1524-1525)는 사회학이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구조를 제대로 인식한다고 해서 그 구조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서술한다. 그러나 사회학이 갖는 사회적 효과가 미미할지라도 사회학의 역할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들로 하여금 고통의 책임을 사회적 원인에서 찾을 수 있게 함으로써 그들의 무죄를 입증”해주고 은폐된 불행의 출처를 드러내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지그문트 바우만(2010b: 343) 또한 부르디외의 앞 선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더 이상 대안이 없다”는 주문을 외우며 양심의 가책을 달래는 것은 그 불행의 공범일 뿐임을 지적한다. 이 또한 도덕적으로 유죄이다. 칼 맑스로부터 시작되어 20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지그문트 바우만을 거쳐 지금 한국의 소외와 빈곤이 현실 속에 이루어지고 있다. “소외는 역사 속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가는 힘없는 사람들의 실천적인 고통이며 구체적인 일상사이다.”(김호기, 1986: 1)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과연 자유주의, 자본주의 문명을 뛰어넘는 사회적 상상이 가능한지 가끔 묻는다. 긍정적인 대답이 나오지는 않지만 이런 삶에 의문을 제기하고 성찰하는 것이 조금의 대안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피에르 부르디외는(2013: 13) 프랑스 국립과학 연구원 금메달 수상 연설에서 사회학은 제국에 대항할 수 있는 하나의 대항권력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연설 끝에 이런 이야기를 덧붙인다.


“마지막으로 성찰성의 원칙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이 말을 빠뜨려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요컨대, 저는 오늘 이 연설의 결과에 대해서 어떤 환상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 연설을 하게 된 상황이 워낙 엄숙하다보니, 저도 엄숙한 어조를 취할 수밖에 없었고, 바로 그 이유로 제 이야기는 실현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희망한다는 것, 그것은 결코 금지되어 있지 않습니다.”


보고서를 쓰면서 한계를 느꼈던 부분은 청년세대의 자기기술을 근거로 경험적인 분석을 할 때였다. 헬조선과 흙수저 담론이 한참 유행하던 시절 웹사이트 디시인사이드 흙수저 갤러리에는 ‘가난그릴스’라는 닉네임의 유저가 생존법을 공유한 적이 있다. 가난그릴스란 생존왕 ‘베어그릴스’를 패러디해 자신의 정글이 아닌 가난 속에서 생존하고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의 생존정보들은 인터넷에 공유되었고, 그 삶은 정말 빈곤하고 소외된 삶으로 그려졌다. 그의 삶에는 취업 같은 단어도 허락되지 않는 것 같았다. 지금의 출간된 청년담론들은 수도권, 인서울대학 출신 대졸자, 활동가, 사무직을 중심으로 기술되어있다. 따라서 정말 배제되고 열악한 환경에 있는 비수도권, 고졸 이하, 생산직, 육체노동자인 청년들의 담론을 이끌어 오기 어려웠다. 루만에 의하면 사회가 생산해내는 다양한 담론들은 복잡한 현대사회가 스스로를 자기관찰하는 형식들이다. 그런데 정말 배제된 존재들의 자기기술을 찾지 못한 것이 아쉽고, 이를 계기로 추후에 관련된 연구를 진행하면 그런 청년들을 사례 기술하는 연구를 진행해보고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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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겨율


모멸감

모멸 권하는 사회와 해법에 관하여


1. 모멸감 요약


모멸감(侮蔑感)이란 무엇일까? 모멸이란 단어는 낯설지 않지만 딱히 익숙하지 않은 단어이기도 하다. 보통의 사람들은 모멸에 대해 막연한 느낌은 받지만 뜻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생각한다. 같은 이름의 ‘모멸감’이라는 책에서 저자인 사회학자 김찬호는 모멸감이란 감정의 사회성과 파괴적 속성에 대해 논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책을 내놓는다. 모멸감이란 모멸스러운 느낌을 뜻하고 모멸이란 업신여기고 얕잡아 본다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일종의 무시·굴욕·모욕을 당할 때 느끼는 감정이라고 한다. 책에서 저자는 사회학자답게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모멸감이라는 감정을 개인의 심리상태에만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감정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소통되는지 그 감정이 생성된 사회문화적 배경과 역사적 맥락을 파악하는 데 노력한다. 특히 한국은 정동적(情動的) 요소가 많은 나라로서 사회에서의 감정의 위상을 강조하기도 한다. 책에서는 모멸감에 대한 연구는 전무하다고 밝힌다. 책에서의 내용으로는 모멸감은 우리사회에서 꽤나 큰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이지만 연구가 전무하다는 것이 참 아쉬웠다. 책은 우선 감정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특히 도미니크 오미시의 감정의 지정학을 예로 들며 이슬람권의 굴욕감이라는 코드는 세계적인 공격성의 발로가 되었다. 이는 상당히 흥미로운 분석이었다. 저자의 말대로 이슬람권은 항상 유럽보다 강한 국가였다. 하지만 근대화 이후 앞서가는 서양에 굴복감을 느끼는 이슬람권의 굴욕감에 대한 논거는 흥미롭다. 다음 장에서는 한국사회의 정서적 지형을 전체적으로 바라본다. 한국사회에서의 감정의 특수성과 문화로 모멸을 풀어나가고 요점은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위신을 확인하려는 문화관성은 있는데 오히려 공동체는 붕괴되며 위태로운 상태에 있는 한국인의 정서지도를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에서는 인간세계의 7가지 방식의 모멸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비하, 차별, 조롱, 무시, 침해, 동정, 오해로 우리사회에 공공연하게 일어나는, 밀접한 사례들을 들어 이를 제시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인간적인 사회’라는 대안을 제시한다. 인간적 사회의 조건들은 품위와 타인에 대한 감수성, 생리·환경적 조건, 개인 간의 유대관계, 시장가치를 넘어선 가치관, 안정의 공동체 등이다. 또 저자는 모멸에 대한 내성을 키울 것은 강조한다. 이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노력이다. 모멸에 대한 내성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를 생각해보길 권한다. 또한 내면이 강해져야 궁극적으로 진정한 자존감의 회복이 일어난다고 보고 있다. 감정에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감정을 운용할 것을 당부한다. 끝으로 맺음말에서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것은 무엇인가, 모멸감에 취약한 까닭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명예와 품위에 대해서 의미를 다시 다져보고 스스로 돌아보고 사회적 안정망을 확충할 수 있는 사회로의 전환과 깊은 내면의 성숙을 가진 개인으로의 전환을 촉구하며 책을 마친다.


2. 한국 정서의 역사적 구성과 모멸감


책에서 작가는 한국의 정서적 상황에서 모멸이란 특수성을 지적한다. 모멸이라는 단어가 다른 문화권 언어에는 생소하다는 점이 주목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언어는 그 사회를 대변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사회는 모멸감에 취약하다. 나는 그 민감한 이유가 체면을 중시하는 사회적인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나는 그 원인을 한국 사회의 정체성과 가장 밀접한 연관이 있는 문화인 유교에서 파생된 성리학 문화에서 찾고 있다. 성리학은 대한민국은 전신인 조선의 500년 통치 사상이었다. 지금은 성리학적 질서가 많이 와해됐다고 한다. 하지만 당장 자본주의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가치인 화폐만 봐도 성리학자만 2명이다. 유교적 관념으로 현모양처인 신사임당도 5만원권의 주인공이다. 모멸감의 저자는 가끔 모멸의 해법으로 유교적 내용을 인용하여 유교적 가치를 제고한다. 하지만 나는 입장이 조금 다르다. 유교는 타종교들에 비해 두드러지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유교 자체의 엘리트주의이고 그것은 큰 폐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유인자(惟仁者) 능호인(能好人), 능오인(能惡人)’이라는 말을 한다. 풀이 하자면 오직 인자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고 또한 미워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유교사상을 풀어나가는 데에 있어 인(仁)의 개념은 중요한 것이다. 공자는 인자, 즉 일정 수준 이상의 사람만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설파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은 불성(佛性 즉 부처의 성품)을 지닌 존재’라고 하며 평등을 외쳤던 불교의 창시자 고타마 싯다르타나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했던 예수의 아가페적 주장과는 상반된 입장에 있다. 유교는 도덕적 타락이 심한 대상을 윤리의 고려범주로 삼지 않는다. 일정 수준 이상의 사람만 사람으로 취급한다. 이것은 유교의 엘리티즘적 특징이다. 이러한 유교의 일련의 수직적 윤리 구조는 성리학으로 수용·심화되며 이기론(理氣論)으로 확장된다. 이기론은 모든 사물의 원리인 리(理)는 같지만 타고난 기질인 기(氣)의 탁함에 따라 물질에 따라 동물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구별 짓기를 불러왔다. 당시 조선사회는 이기론을 사상적 기반으로 양반은 맑은 기질을 상인은 탁한 기질을 타고 태어나 생득적으로 양반이 우월한 존재라는 하나의 헤게모니로 이용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리학과 조선시대 전기와 후기로 갈리는 임진왜란 때의 조선의 사회문화의 변화의 관계이다. 이는 양반들의 정체성 혼란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사회는 성문화(成文化)된 양천제의 사회였다. 양반과 중인 양민을 모두 포함한 개념의 양인과 천민의 구분만이 있을 뿐이지 후기보다는 양반의 권력집중이 낮았다. 하지만 문제는 임진왜란이었다.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은 약 200년간의 황금기를 누린 세대였다. 큰 사회적 문제가 없었다는 뜻이다. 임진왜란은 한국역사에 큰 전쟁으로 조선의 사회상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특히 사회가 피폐해졌고 그 증거로는 언어생활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조선시대 전기만 해도 한글에는 거센소리나 된소리가 없었다. 이런 언어현상이 나타난 것들은 임진왜란 이후에 일이다. 거센소리나 된소리가 들어가지 않은 욕설은 많지 않다. 그리고 당시 절대적인 지배의 상징이었던 왕은 궁을 떠나 의주로 떠났고 지역사회에서 명망 높던 양반들 또한 자기 목숨을 챙기기에 바빴다. 임진왜란으로 통치의 권위를 인정받던 왕과 양반세력들은 권위를 잃었다. 따라서 책에서 언급한 근대 이후 세계사의 주도권을 빼앗긴 이슬람의 굴욕의 코드라든가 마뉴엘 카스텔이 정체성 권력에서 말한 알 카에다 엘리트들의 정체성의 위기가 폭력으로 촉발하는 일들이 조선사에도 일어난다. 조선 후기 17세기 조선의 사회에서 신분제는 동요하기 시작했고 마을공동체의 중심이 되던 양반은 몰락하여 잔반이 되기도 하는 등 큰 변화들이 일어난다. 이러한 경향에 반동적으로 조선 후기는 성리학의 절대화 경향이 일어난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의 명분론이 절대화 되고 성리학을 만든 주자의 해석외의 해석을 하면 사문난적으로 몰려 극단적인 경우 처형을 당하기도 한다. 과부에게 재가를 금지하고 부계중심의 가족제도와 장자에게 상속권을 주는 등의 가부장적 제도의 연원은 사실 조선 초기부터 이루어진 전통이 아닌 조선후기 일어난 양반층의 몰락에 대한 지배세력의 반동이었다. 불교국가였던 고려는 재혼은 물론 여자가 상속을 받았고 이런 경향은 조선 초에도 이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민족적 질서가 깨진 것은 앞서 다룬 것과 같이 사회의 혼란으로 인한 지배계층의 정체성의 위협으로 지배계층은 경직되고 수직적인 사회사상을 생산해냈다. 이런 성리학의 교조화는 ‘체면’을 중시하는 사회의 문화적 기반이 되기 충분했다. 이런 사상의 흐름으로 후기 조선은 크게는 중국과 사대주의 외교를 했고 명분론을 앞세우다 병자호란 때는 삼전도에서 왕이 치욕을 당하기도 한다. 작게 보아서는 사회에서 내면의 도덕성으로 양반으로 칭송 받는 것이 아니라 돈을 주고 신분을 사는 문화가 만연했다고 한다. 이런 까닭들로 인하여 우리나라는 수직적인 문화가 자리를 잡고 자연히 체면을 중시하는 사회가 되었다. 다양성을 추구하기보다는 획일성에 중점을 두었다. 문제는 이런 체면중심의 사회는 실수와 타인의 시선에 관용적이지 못했다. 책에서 저자는 사학자나 사회과학자들이 신분제의 와해가 크게 이루어진 때는 6·25 전쟁이라고 한다. 아쉬운 것은 다른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는 신분적 질서를 타파하는 데 사회구성원의 성찰과 참여가 부족했다. 책의 예시처럼 비교적 현대에 와서도 신분제의 변화를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례로 이어졌고 나름 와해되기 했지만 지금도 자신이 속한 가문의 시조나 본적을 모르는 가문은 없으며 ‘족보’ 없는 집안이 없는 사회로 이어지고 있다. 아직도 예의가 없는 사람들을 기성세대들은 ‘족보 없는 놈’이나 ‘못 배운 놈’이라고 욕한다. 주목할 점은 보통 기성세대가 말하는 예의도 유교적 질서에 가깝고 못 배운 놈이 배우지 못한 지식도 유교적 교육에 가까운 것들이다.


3. 현대의 사회양상과 모멸감


그렇다면 지금을 사는 우리사회의 모멸의 모습은 어떨까? 스무 살이 된 어느 날 아버지께서 나에게 해주신 말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고 잊어야 행복하다.”라는 말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직업여건 상 아버지와 자주 만나지 못하는 현실에서 아버지께서 굳이 아들에게 하신 말씀이 ‘잊어라’라는 것이 참으로 의아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어릴 적 우리 동네에서 일어났던 살인 사건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이야기의 대강은 이렇다. 어렸을 때 A와 B는 동급생이었고 A가 B를 괴롭혔다고 한다. 나중에 성인이 되어 두 사람은 다시 만났는데 A는 B를 여전히 무시했고 B는 그것을 참지 못해 살인을 했다고 한다. 모멸감이라는 책은 읽기 시작하고 아버지가 그때 해주신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사실 주고받는 말 몇 마디와 비언어적 표현 몇 가지로 한 사람은 생명을 잃었고 한 사람은 살인자가 되었으며 그 두 사람이 속한 가족공동체는 복구하기 힘든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헝그리 사회에서 앵그리 사회가 되었다는 작가의 말이 절실히 느껴지는 사례이다. 이러한 부정적 감정은 한국사회의 변화들 앞에 더욱 증폭될 가능성이 있다. 지금 50대 이상의 세대들은 농업사회에서 태어나 산업사회에 젊음을 살고 정보화시대에 중년이나 노년을 맞이한 세대들이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본인의 정체성을 지키기는 꽤나 힘들었을 것이다. 사회사상도 유교의 완고한 가치 속에서 유년을 보내고 자유주의와 민주화 속에 청년을 보내고 이제는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여생을 보낸다. 한국은 이 세대들의 황혼 자살률이 가장 높은 국가이다. 박완서의 ‘황혼’이라는 소설을 보면 전통적 가치를 지난 시어머니와 현대적 가치를 지난 며느리의 갈등양상을 나타내는 소설이다. 소설 속에서 정(情)이 그리웠던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명치를 쓰다듬어 달라고 한다. 이에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성적(性的) 욕구가 비정상적으로 표출된다고 생각하여 시어머니를 병원에 보낸다. 결국 작품 속 늙은 여자는 자신의 삶이 무가치함을 느끼며 작품이 마무리된다. 현대에 있어 기성세대들은 자신의 신념과 급변하며 하루가 다르게 다른 모습으로 변해가는 사회에서 박탈감을 느낄 것이다. 이제 고작 20대 중반인 나도 종종 ‘나 때는 안 그랬는데’라는 말을 한다. 기성세대들은 얼마나 큰 부조화를 느낄지 생각해본다. 그리고 경제체제의 변화도 기성세대의 부조화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미래학자로 불리는 앨빈 토플러는 정보화시대의 혁명이 일어나면, 유산계급인 브루주아가 경제의 기득권을 얻었다면 정보화 사회에서는 유식계급인 코그니타리아트(Cognitariat)가 경제적 기득권을 장악할 것을 예고했다. 경제체제의 변화 특히 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농업사회에서 정보화 사회까지의 변화를 겪은 베이비부머 세대들은 이런 사회변동에 적응을 못하여 소외되기도 한다. 이러한 소외는 무시·굴욕 등의 감정과 뒤섞이어 파괴적 감정으로 나타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이에 반해 기성세대에 비해 나름 현대적 가치관 속에 사는 젊은 세대들은 보통 경제적인 상황에서 불안을 느끼고 이것이 삶에 여러 부분과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자본주의 사회이다. 일찍이 사회학자 칼 맑스는 물화(物化)라는 개념을 사회에 내놓은 적이 있다. 물화란 자본주의의 생산과 소비 같은 개념들이 인간의 영역에도 침범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사는 사회구성원들은 책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전자기기의 사양을 의미했던 'Specification'이라는 단어는 흔히 스펙이라고 불리며 사람사용설명서가 되었다. 인간의 삶이 수치화되어 평가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수단이 되는 사회에서 사람은 존엄성을 잃기 쉽다. 존엄성의 부재는 모욕이나 무시로 이어지기 쉽고 이것이 모멸감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의 일이다. 우리는 평가가 만연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인기 있는 프로그램들은 사람들의 재능에 점수를 부여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은 공영방송 모두 편성되어있다. 그리고 가깝게는 진리의 상아탑인 대학교도 평가와 순위로 학문을 평가받는다. 학생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에 와서까지 언제나 평가의 대상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서로를 너무나 쉽게 평가하고 쉽게 판단한다. “인격을 수단으로 삼지 말고 목적으로 삼으라.”라고 했던 도덕주의자 칸트가 현대사회를 본다면 개탄할 일이 아닌가 싶다. 나는 충대신문 대덕울림에 ‘당신의 인생 제 점수는요’라는 글을 게재한 적 있다. ‘우리사회는 거대한 오디션 프로그램이 되었고 삶을 점수로 평가받는다. 학력은 음역이 되고 학점은 음색이 되며 토익은 외모가 된다.’라고 말했다. 책에서는 소중한 것들은 돈으로 살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는 재능을. 나아가 인격을 평가받으며 살고 있고 규격화된 평가 앞에서 개개인의 삶의 영역을 침범을 당한다. 또한 경제체제의 직접적 영향으로 불안정 노동 상황이 있다. 현재 신자유주의 체제의 경제체제에서 고용은 늘 불안하다. 특히 불안정한(precarious)과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합성어인 프레카리아트는 불안정 노동계층을 말한다. 인간이 최소한의 삶을 살기위해 필요한 경제적 토대들의 불안함은 개인의 감정을 풍전등화로 만들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이런 경제 상황은 개인의 삶을 비참하게 하기 좋다. 아르바이트생들의 고충은 커뮤니티 사이트의 단골 글감이다. 그런 경향이 얼마나 심하면 엔젤리너스라는 프랜차이즈 커피점에서는 손님이 아르바이트생의 이름을 부르며 존댓말로 주문을 하면 할인을 해주는 일까지 있을까? 재미있는 것은 자신이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도 쉽게 경제적 여건 때문에 일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조선시대에는 혈통과 지식으로 계급사회를 이루었다면 현대의 우리는 학벌과 경제력으로 계급사회 아닌 계급사회를 만들어 살고 있다. 책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한국에서 잘산다는 것의 의미는 행복하게 즐겁게 사는 것이 아니라 부유한 삶을 말한다는 것이 애석하다. 책에서 나오는 브랜드 재킷을 가리키는 시가 절적한 예인 것 같다. 나를 나의 인격으로 평가받기 보다는 나의 겉치레로 평가받길 원하고 다국적 브랜드나 기업들의 제품이 한국에만 오면 비싸게 판매된다는 이야기는 더 이상 가설이 아니라 일반론에 가까운 사회현상이 되었다. 그리고 모멸감에 대한 연구도 전무하고 품위에 대한 논의도 없는 것은 부정적 상황을 악화하는 데에 한 몫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는 대개 타의적으로 이루어졌다.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독립도, 민주주의도, 한국전쟁도 모두 우리사회는 우리가 주체가 아닌 외세로부터 변화를 받아들였다. 이성과 지식에 대한 논의는 많이 이루어지지만 기초교육과정에서 감정과 심리에 대해 다루는 과목은 희소하거나 거의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인간의 심리에서 타자로 활동하는 감정의 작용들에 대한 무지는 우리가 감정의 주인이 아니라 감정의 노예로 이끌려 다니는 데에 큰 역할을 한다. 책의 인디언의 말처럼 내가 먹이를 주면 자라나는 감정이라는 늑대에게 먹이 주는 법을 몰라 늑대에게 삶을 잠식당한다.


4. 모멸주지 않고 모멸 느끼지 못하는 유토피아는 가능한가?


나는 그래도 해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모멸감의 저자 김찬호는 모멸사회에 대해 사회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의 해법을 제시한다. 사회적 해법의 주요 내용은 제도적 차원에서 경제적 안정성을 보장하고 불평등을 개선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또한 문화적으로 다원주의를 중심으로 사회적 가치관을 다시 확립할 것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개인적 차원에서는 내면의 힘을 키우는 방법을 제시한다. 나는 이런 대안들의 현실가능성에 대해 숙고하고 개인적 차원에서 내가 먼저 바꾸어 나갈 수 있는 현실에 대해 생각해봤다. 우선 제도적인 측면에서 경제적 안정성 보장은 사실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현 정부의 경제부총리인 최경환은 비정규직 근무연수를 늘리겠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물론 사회적으로 불안 노동에 대한 논의들이 이루어지고 있어 정규직의 임금 인상을 없애고 일자리를 늘린다거나 정규직 채용을 전제로 비정규직을 채용한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하지만 가까운 예로 충남대학교 병원은 국립병원임에도 불구하고 올해부터 무기한 계약직으로 간호사를 채용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개개인들은 고용의 안정과 불평등의 타파를 이야기하고 논의해야 한다. 당장은 실현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포기해서는 안 되고 지속적으로 조금 더 개선될 사회를 위해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문화적 차원의 변화는 인식변화에 중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원주의 문화모델에는 용광로(Melting Pot) 모델과 샐러드 그릇(Salad Bowl) 모델이 있다. 한국 사회는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나라이기 때문에 보통 모든 가치규범이 하나의 사회규범에 녹아드는 용광로 모델을 지향한다. 그렇지만 현재는 우리 사회는 다문화가정이 사회의 주요한, 다수의 현상이 되고 한국은 유례없는 다민족사회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모두가 전체의 가치를 하나로 획일화하는 용광로 모델보다는 부분적 동일성과 다양성을 전제로 하는 샐러드 접시 모델로 변화해야 한다. 가까운 나는 교회의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 중인데 우리 초등부에 1학년의 다문화가정 아이가 왔다. 어머니가 몽골인이라고 한다. 몽골민족과 한민족의 외형적 차이는 크게 없으나 그 아이는 아이들이 뱀파이어 같다고 아이들이 꺼려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이들이 괴롭히는 것은 아니지만 기피한다는 것에 마음이 아팠다. 아이들에게 다양성에 대해 어떻게 가르칠지 고민이 된다. 적어도 다양성에 대한 관용을 지닌 사회라면 사회 곳곳에 산재하는 이러한 갈등이나 소외가 덜어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또한 이 사회를 변화시킬 정말 의미 있는 것은 개인의 변화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개인적 차원의 의미 있는 변화들이 때로는 사회의 거시적 변화를 가지고 온다고 생각한다. 특히 내면적인 힘을 키우고 주변에 있는 타인들에게 이런 삶을 나누며 주변인을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의사인 박경철이 쓴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1’에서 그 적절한 예를 찾을 수 있다. 그녀의 미니스커트라는 제목의 글인데 당시 병원에 있던 저자는 응급환자가 생겨 진료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때에 온 환자는 20대 후반의 여성이었고 교통사고를 심하게 당하여 다리를 절단해야 될 상황이었다고 한다. 간신히 죽음의 고비를 넘긴 여자는 사실 27세에 외국계 은행에서 근무하는 직장인이고 능력을 인정받아 다음 달이면 해외로 MBA 과정을 수료하기 위해 유학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한다. 탄탄대로였던 그녀의 삶에 다리절단과 복부의 30cm의 흉터, 옆구리에 끼워진 4개의 호스는 그녀의 삶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고 한동안 그녀는 비관에 잠겨 살았다고 한다. 정신질환을 앓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신과적 치료와 약혼자의 정성어린 노력으로 그녀의 상태는 좋아졌고 퇴원을 한다. 그래도 마음 한 켠의 어둠까지는 걷히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도 약혼자는 사고를 당한 그녀와의 결혼을 택하고, 그녀는 수술 담당의사에게 청첩장을 전하러 병원에 왔는데 그때 그녀는 ‘미니스커트’를 입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저자는 이렇게 서술한다. ‘아름다운 자태가 돋보이는 고운 왼쪽다리는 스커트 아래에서 길게 뻗어 땅을 디디고 있었지만, 사라진 오른쪽 다리는 당연히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사라진 오른쪽 다리가 다시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착각이 될 정도로 눈부신 아름다움을 느꼈다.’ 이 이야기는 일상생활에 적용 될 수 없는 극적인 이야기를 다루어 현실성이 없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충분히 내면의 변화와 타인으로서 한 사람을 위하는 모습이 모범적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인 그녀는 비극적 상황을 희망과 자신감으로 전환시켰다. 모멸감에서 다루었던 많은 사례들과는 전혀 다른 대안을 내세웠다. 그녀가 그녀의 삶에 가장 큰 상처일 수 있는 절단된 오른쪽 다리를 오히려 미니스커트를 입음으로써 그녀 내적 성숙의 자신감으로 변모시킨다. 또한 약혼자 또한 외모와 경제여건 등 삶의 외형적인 토대가 하루아침에 바뀐 그녀의 곁을 지킨다. 이것은 그 약혼자가 그녀의 외형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녀를 인격적으로 정서적으로 사랑했다는 방증이라고 생각한다. 대중적 심리학 서적이 된 ‘미움 받을 용기’라는 책은 트라우마란 허상이며 타인의 기대에 젖어 사는 것이 아니라 행복해질 용기, 평범해질 용기, 그리고 미움 받을 용기를 가지고 살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모멸감이라는 책에서 말하는 대안은 사실 막연하고 뜬구름 잡는 소리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있듯 개인 삶의 내면적 변화와 안전한 관계성,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믿을 수 있는 공동체 조성이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삶의 큰 변화를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이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는 것은 물론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영역들로부터 모멸 없는 사회로의 작은 실천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2015.여름


지금 한국사회, 무엇이 필요한가?

- 근대국가, 자본주의, 그리고 민주주의를 묻다.


1. 서론


오늘 날의 한국사회, 안녕하십니까?


지금 한국사회에는 무엇이 필요할까? 한 때 영화관에서 영화를 기다리며 광고를 보고 있으면 이런 문구를 가진 광고가 나왔다. “국민의 90%가 국기를 가지고 있는 나라, 세계 빈곤 국가 중 하나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된 나라, 기름범벅이 된 바다를 위해 100만 명의 자원봉사자가 달려가는 나라, 반세기만에 GDP를 750배 성장시킨 나라, 700만이 광장에 모여도 단 한 번의 사고도 없던 나라, 당신이 살고 있는 나라는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낸 유일한 나라. 대한민국입니다. Only one KOREA.”(CJ, Only one Korea 광고 중) 이 광고의 내용은 거의 다 사실에 가까운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이 광고에 따라 한국은 불과 몇 십 여년 만에 한강의 기적을 이루며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한국의 성공신화는 지금 한국의 기성세대들에게는 하나의 자부심으로 남아있고 다른 여러 경제발전을 꿈꾸는 나라들에게는 근대화, 그 중에서도 경제 발전의 한 모델로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사회는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던 ‘발전’과 ‘근대’의 아름다운 모습일까? 당장 한국을 사는 사람들에게 한국사회는 ‘헬조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더 나아가서는 헬조선의 헬(Hell)을 의미하는 지옥은 오히려 잘못된 사람이 벌을 받지만 한국사회는 잘못된 사람이 잘사는 나라라 지옥만도 못하다는 과격한 이야기도 형성되어 있고 또한 조선(朝鮮)은 500년을 버틴 나라인데 겨우 정부수립이(남한 단독 정부수립을 기준으로) 70년도 안된 나라에게 조선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오히려 조선을 격하하는 것이라는 내용의 이야기들이 형성되기도 한다. 한국사회 구성원의 일부들은 한국이 지옥만도 못하고 전통사회를 대표하는 조선만도 못했던 나라로 인식되고 있다. 물론 앞서 말한 두 이야기들이 한국사회에서 공공연한 이야기들은 아니지만 분명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일정부분 공감을 얻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분명 단기간에 근대화를 이루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며 적어도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경계에 있다고 평가되고 있는 한국사회의 문제는 무엇일까? 한국전쟁 이후 사람들이 꿈꾸었던 밥 안 굶고 등 따뜻한 삶을 어느 정도 이루고 있으며 절대적 빈곤문제가 많이 해결되고 상대적 빈곤으로 고민하고 있는 나름의 ‘발전’된 사회인 한국은 왜 헬조선이 되었을까? 지금 한국사회에는 무엇이 필요할까?


2. 본론


1) 폭력을 독점한 국가, 과연 정당한 폭력을 사용하고 있는가?


1)독일의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Max Weber)는 근대국가의 질서 유지를 이해하기 위해 폭력을 독점한 국가의 역할에 대해 역설했다. 막스 베버는 근대국가의 정의를 “정당한 물리적 폭력 행사의 독점을 실효적으로 요구하는 인간 공동체”라고 정의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적용시켰을 때, 근대국가는 국가 이외의 사적(私的) 폭력을 최소화한 상태이다. 근대국가의 폭력은 일종의 ‘정당성’을 갖는다. 이렇게 간주되는 까닭은 근대국가가 시행하는 폭력이 국가의 구성원들인 시민의 동의에 기초해 행사되기 때문이다.(김준석, 2011)

지금의 한국은 폭력을 독점한 근대국가의 역할에 대해, 특히 국가폭력의 정당성에 의문을 가져야한다. 헬조선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따라붙는 것은 ‘죽창’이다. 수렵, 채집시대도 아닌 정보화 시대의 한국사회에서 죽창이 왜 거론되는가? 가상의 단체인 대한죽창연합회, 죽창당이 내걸고 있는 슬로건은 “죽창 앞에서는 공평하게 너도 한방, 나도 한방”이다. 물론 이들이 실질적으로 활동하는 단체들은 아니지만, 폭력을 독점한 국가권력의 폭력에서 정당성과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죽창이 담고 있는 의미는 단순하다. ‘공평함’이다. 여러 언론이나 미디어에서 나오는 ‘있는 자’들인 경제사범들은 대개 휠체어를 타고 나오며 죄에 대응하는 대가를 치르지 못하는 모습들을 많이 이야기한다. 이것은 국가의 폭력이 정당하게 사용되지 못하고 있음을 국민으로 하여금 느끼게 하고 적어도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는 단순한 상식애서 조차 벗어난 것이다. 대중들은 여기서 일종의 감정의 해소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죽창은 이런 국가의 폭력과는 다르게 평등과 정의를 말하는 폭력이다. 2015년 가장 흥행한 영화는 ‘베테랑’과 ‘암살’이다. 여기서도 한국사회가 원하는 일종의 상(像)을 유추해볼 수 있다. 일단 베테랑이라는 영화는 대기업의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재벌 2세의 부조리를 경찰 권력이 시원하게 해결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는 폭력적으로 진행된다. 한국사회에 대중들은 부조리한 또는 부조리하다고 느껴지는 현실에서 국가 권력의 폭력이 정당하게 집행되어서 사회의 악(惡)을 처단하는 내용에서 일종의 시원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베테랑보다 조금 더 일찍 개봉한 암살에서도 이런 대중들의 열망은 공유되는데, 암살은 근대국가의 형성 조건 중 하나인 민족주의를 건드림과 동시에 아직 청산되지 않은 과거를 나름대로 청산해내며 정의를 실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암살은 독립 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다루며 독립 운동가들이 결국 원하던 목적을 달성하고 나중에는 독립군의 스파이까지 처단하며 영화는 결말을 맺는다. 이 영화들은 대중들이 원하는 정의를 구현해내며 역대 한국 박스오피스 3위, 7위를 각각 차지하며 한국사회를 읽을 수 있는 ‘폭력’이라는 키워드의 단초를 제공했다.

하지만 현실은 영화와 달랐다. 베테랑의 모티프가 되는 ‘있는 자’들의 범죄는 정당한 폭력의 대가를 받지 못했다. 경제사범들이 광복절 특사로 ‘경제’를 살리기 위한 명목으로 풀려났다. 그렇다면 암살의 친일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한국정부는 일제강점기 때 제국주의 일본의 만행들을 담은 기존의 역사교과서가 좌편향 되었다고 주장하며 교과서를 국정화 하자고 나섰으며 특히 국가원수인 대통령은 이미 오래전부터 뉴라이트 대안교과서를 높이 평가했고 집권당의 대표는 친일인명사전에도 반민족행위자임이 입증되고 있다. 또한 국가권력은 근대국가 형성의 중요한 기반 중 하나인 시민의 불복종과 저항권을 인정하지 않으며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위해 거리에 나온 시민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데에 이르렀고 거리에 나와 자신의 뜻을 밝히는 시민들을 ‘IS’와 비교했다. 지금 한국사회는 정당한 폭력을 원하고 있지만 폭력을 독점한 국가, 특히 시민의 동의를 기반으로 폭력의 정당성을 얻은 국가는 그 폭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오용(誤用)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이 가져야할 발전적 아젠다 중 하나는 ‘과연 국가의 폭력이 정당한가?’에 대해 논의해야하고 현대가 아닌 근대적 국가의 모습부터 다시 숙고해야한다.


2) 한국을 지배하는 자본주의, 대안이 있을까?


ㄱ. 자본주의 문명, 뛰어넘을 수 있는가?


보통 ‘근대’를 이야기할 때, 정치적 근대로서 민주주의를 경제적 근대로서 자본주의를 제시한다. 아마 자본주의는 세계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동력 중에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칼 맑스(Karl Marx)는 자본주의의 원리가 경제와 상품을 넘어 다른 영역까지 침투할 것을 예견했다. 그는 그런 사회현상을 물화(物化)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2)칼 맑스의 물화란 대상화라고도 표현된다. 여기서 말하는 물화란 인간의 노동이나 정신활동들이 객관적인 대상으로 구체화된 것을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 모든 것은 매매의 대상이 되어 인간의 노동력은 물론이고 다른 능력도 하나의 ‘상품’이 된다. 자본의 논리가 사회의 모든 것들을 하나의 물(物), 즉 대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임석진 외, 2009)

여기에 덧붙여 이매뉴얼 월러스틴에 분석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단순히 생산 활동을 하고 거기에서 발생하는 잉여가치를 축적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역사적 자본주의’란 전통사회에서 ‘시장’이란 하나의 경제적 활동의 장(場)을 거치지 않고 처리되어 왔던 교환과정 뿐만 아니라 생산과정, 분배과정, 그리고 투자과정 등을 모두 포함한 모든 과정들의 상품화를 가져왔다고 정의했다. 그리고 자본가들은 더 많은 이익, 즉 자본 축적을 추구하는 과정동안 이런 자본주의의 논리는 경제생활의 전 분야를 넘어 더욱더 많은 사회의 영역들을 상품화했다고 분석했다. 또한 윌러스틴에 의하면 그가 명명한 역사적 자본주의는 구체적이 현실 속에서 시공간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하나의 장이며 끝이 없는 자본의 추구가 기본적인 경제활동을 지배하고 통제해온 경제적 목적인 동시에 하나의 ‘법칙’이라고 말한다.(이매뉴얼 월러스틴, 1993)

한국사회는 앞에서 언급한 역사적 자본주의 문명 아래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한국 역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들이 점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우선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본주의는 광범위한 상품화를 수반한다. 특히 한국사회는 ‘스펙(Specification)’이란 하나의 광풍(狂風)에 휩쓸리고 있다. 본래 스펙을 의미하는 ‘Specification'이라는 단어는 제품의 ‘사양’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그러나 현재 국어사전에는 제품의 사양설명서를 가리키던 이 단어가 ‘직장을 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학력, 학점, 토익 점수 따위를 합한 것을 이르는 말’이라고 의미가 밝혀있다. 상품인 물체를 거래하던데 쓰이던 용어가 인간을 사용하기 위해 보는 인간 사양설명서가 되어버린 것이다. 인간의 대상화는 ‘인간 존엄성’이라는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무너뜨리기 좋은 하나의 현상이다. 인간 존재에 대한 물화는 인간 가치를 하락시키며 인간성 자체도 소비될 수 있는 하나의 물(物)로서 인식될 가능성을 내포한다.

또한 자본주의의 문명이 사회에 다른 영역으로 침투하면서 경제적 자본은 사회적 자본이나 문화 자본에 영향을 끼치며 사회적 불평등을 촉진시키는 하나의 기제(mechanism)가 되었다. 현재 한국사회의 경제적 불평등은 여러 지표를 통해 입증되고 있다. 양극화는 심화되고 있고 보수언론으로 대표되는 조선일보에서 조차 한국의 소득 불평등과 절대빈곤층의 증가에 대해 지적한 적이 있다. 한국사회는 이런 빈곤층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이 빈약한 형편이다. 여기에 자본의 논리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사회적 영역에서도 침투하여 갑(甲)질은 한국사회의 화두(話頭)가 되기도 한다. 경제적 격차가 사회에 침투해 기본적인 권리들까지 침해하고 있는 것이다. 양극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위협 등에 관한 문제들은 자본주의를 관통하는 문제점들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대한 그렇다할만한 대응도 없는 실정이다. 자본주의는 분명 현대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기존체제에 내재된 모순이 ‘진보’를 가지고 온다는 변증법적 역사발전은 과연 이루어질까? 인류는 자본주의를 벗어날 수 있을까? 전통사회의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상상했을까? 자본주의는 분명 변화해야할 당위성을 주는 모순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한국사회는 자본주의 문명에 대해 묻고 대안을 모색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어쩌면 항상 문명의 변두리, 역사 변동의 주변에 존재했던 한국을 인류역사 변동의 주인공으로 변모시켜주지는 않을까 생각해본다. 탈자본주의에 대해 논해야 한다.


ㄴ. 신자유주의, 언제까지 유효한가?


‘경제 불평등’이란 키워드는 한국사회를 관통하는 키워드이다. 어쩌면 한국을 넘어 전 지구적인 문제로 파악할 수도 있는 일종의 메가트렌드(Megatrends)일 수도 있다. 자본주의 역사를 설명할 때 최초의 고전파 경제학 자본주의를 ‘자본주의 1.0’이라고 명한다. 여기서의 자본주의는 자유방임주의의 성격을 보인다. 그 이후 고전파 경제학이 학문의 시장에서 밀리게 된 것은 세계 경제대공황(Great Depression, 1929) 때문이었다. 이런 세계 경제대공황 이후 새로운 경제학의 주류는 ‘자본주의 2.0’, 즉 수정 자본주의이다. 수정 자본주의 아래의 국가들은 케인지안 복지국가라는 하나의 모델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은 비교적 큰 정부를 지지하며 완전 고용과 지속적 경제성장, 사회경제적 평등과 안전을 제도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석유파동 이후로 다시 대응이 빠른 시장의 자율성에 경제를 맡기자는 신자유주의가 대두된다. 이것을 ‘자본주의 3.0’이라 부르고 이런 자본주의 경향은 공공부문들을 민영화하고 시장중심의 경제로 회귀하려는 레이거노믹스나 대처리즘 같은 국가 모델이 제시된다. 거시적으로 보았을 때, 현대사회는 아직 자본주의 3.0 단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자본주의 3.0의 단계에서 시장주의 경제정책들은 경제 불평등을 야기했다. 특히 한국의 경우 신자유주의 정책이 국민의 정부 때 도입되었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일부 경제성장률과 시장경제를 활성화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2008 금융위기와 ‘MB노믹스’로 불리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지지했던 보수정당의 집권 이후 대기업 중심의 경제정책은 경제적 불평등을 가속화했다. 그리고 특히 ‘경제적 불평등 완화’라는 목표인 경제민주화를 정책의 최우선으로 내세웠던 박근혜 정부에서도 불평등은 심화되었다. 국내총생산 중 10대 재벌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계속 증가했으며 최근에는 1인당 GDP가 6년 만에 감소하고 경제지표들이 사상 최저를 기록한다는 전망까지 나타났다.

실제로 한국사회는 경제적 불평등이 OECD 국가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국가로 분류된다. 요즘 중요한 문제로 급부상하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1997년 IMF 구제 금융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당시 한국경제는 어려웠고 이로 인해 제 2의 건국이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사회 조합주의를 표방했던 노사정위원회에서는 이런 분위기의 여파로 구조조정에 대해 동의했다. 여기서 대량해고 사태가 벌어지고 이후 고용의 유연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버렸다. 신자유주의 하에서의 노동은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는 불안정 노동 계급을 형성했다. 고용에 있어 한국사회는 불안사회이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노동자에 비해 턱없이 낮은 임금으로 노동하고 있다. 이 외에도 한국의 유교 자본주의의 특징 중 하나인 세습 자본주의 경향은 경제적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한 가지 요인으로 작용한다. 분명 자본주의는 현재 신자유주의 하에 놓여있다. 신자유주의에서 심화되고 있는 불평등에 대해 경각심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은 많으며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한 때, 아나톨 칼레츠키의 ‘자본주의 4.0’이 상생의 자본주의, 따뜻한 자본주의라는 미명(美名)으로 제시된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최초의 고전파 자유주의, 시장실패에 대응한 수정 자본주의, 국가실패에 대응한 신자유주의에 대항할 만한 강력한 동력이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말 그대로 허울뿐이었다. 고전파 자유주의, 수정 자본주의, 신자유주의는 모두 강력한 동기와 시대적 요청으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4.0은 기존의 신자유주의에 대응할만한 강력한 동기나 동력이 없다고 판단된다. 자본주의 문명 자체를 뒤흔들만한 변동은 차치해두더라도 당장에 산재되어 있는 신자유주의 하의 불평등을 완화시켜야 한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경쟁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었다. 베를린예술대학의 교수 한병철은 그의 저서 ‘피로사회’에서 면역적 체계의 인식이 무너지고 긍정사회가 주는 ‘자기착취’에 대해 그의 책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또한 계원디자인예술대의 서동진 교수도 그의 저서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에서 신자유주의 아래에서의 자기계발 문화의 생성과 성장과정을 다루면서 개인이 신자유주의 권력에 연결되는 구조를 지적한 바 있다.

현재를 살고 있는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은 ‘피로감’을 공유하고 있다. 이것은 언제나 나의 생활이 어려워 질 수 있다는 불안감, 경쟁사회 속에서 항상 성장해야하는 주체, 타인의 삶을 돌볼 수 없는 상태에 대한 회의로 나타난다. 경쟁과 자율이라는 토대에 기반을 둔 신자유주의를 불평등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구성원들의 부정적 감정으로 작용한다.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불평등의 상황에서 뿐만 아니라 정서적 상태를 위해서도 분명히 한국사회가 넘어서야할 체제이며 이념이다. 한국사회는 끊임없이 약육강식을 권하는 사회가 되었다. 한국사회는 이런 신자유주의가 언제까지 유효할 것인지 물어야 한다.


4) 정치적 근대화, 민주주의는 언제?


ㄱ. 만들어진 전통, 성리학적 전통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사회는 경제적 근대화인 자본주의가 정착되었다. 한국은 자본주의 사회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정치적 근대화인 민주주의도 자리 잡았는가? 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존재한다. 이것은 한국 특유의 교조화된 성리학 문화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성리학은 대한민국은 전신인 조선의 500년 통치 사상이었다. 지금은 성리학적 질서가 많이 와해됐다고 한다. 하지만 당장 그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이나 대상들이 들어가는 지폐의 경우만 해도 한국에는 성리학자가 2명, 또 그 성리학자를 잘 키운 어머니가 지폐에 들어가 있다. 한국사회의 성리학적 전통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사회에 자리잡은 유교적 전통에 대해 살펴보겠다. 유교는 타종교들에 비해 두드러지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유교 자체의 엘리트주의이고 그것은 사회의 큰 폐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유인자(惟仁者) 능호인(能好人), 능오인(能惡人)’이라는 말을 한다. 풀이 하자면 오직 인자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고 또한 미워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유교사상을 풀어나가는 데에 있어 인(仁)의 개념은 중요한 것이다. 공자는 인자, 즉 일정 수준 이상의 사람만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설파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은 불성(佛性 즉 부처의 성품)을 지닌 존재’라고 하며 평등을 외쳤던 불교의 창시자 고타마 싯다르타나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했던 예수의 아가페적 주장과는 상반된 입장에 있다. 유교는 도덕적 타락이 심한 대상을 윤리의 고려범주로 삼지 않는다. 일정 수준 이상의 사람만 사람으로 취급한다. 이것은 유교의 엘리티즘적 특징이다. 이러한 유교의 일련의 수직적 윤리 구조는 성리학으로 수용·심화되며 이기론(理氣論)으로 확장된다. 이기론은 모든 사물의 원리인 리(理)는 같지만 타고난 기질인 기(氣)의 탁함에 따라 물질에 따라 동물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구별 짓기를 불러왔다. 당시 조선사회는 이기론을 사상적 기반으로 양반은 맑은 기질을 상인은 탁한 기질을 타고 태어나 생득적으로 양반이 우월한 존재라는 하나의 헤게모니로 이용했다. 양반의 이러한 이분법적이고 수직적인 세계관은 양반계급 스스로를 하나의 약자로 인식하게 하는 기제로도 작용하는데 그것은 바로 사대주의(事大主義)로 나타난다. 5천 원 권에 있는 대표적 성리학자 율곡 이이는 기자실기(箕子實記)라는 책을 통해서 조선의 뿌리가 중국임을 주장하는 책을 쓰기도 했다. 성리학적 수직적 권위주의로 인한 헤게모니가 조선사회의 지배자를 또 다른 사회의 피지배자로 재생산해낸 것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성리학과 조선시대 전기와 후기로 갈리는 임진왜란 때의 조선의 사회문화의 변화의 관계이다. 이는 양반들의 정체성의 위기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사회는 성문화(成文化)된 양천제의 사회였다. 양반과 중인 양민을 모두 포함한 개념의 양인과 천민의 구분만이 있을 뿐이지 후기보다는 양반의 권력집중이 낮았다고 평가 받는다. 하지만 문제는 임진왜란이었다.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처럼 약 200년간의 황금기를 누린 시대였다. 딱히 큰 사회적 문제가 없었다는 뜻이다. 임진왜란은 한국역사에 큰 전쟁으로 조선의 사회상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특히 사회가 피폐해졌고 그 증거로는 언어생활의 변화로 나타난다. 조선시대 전기만 해도 한글에는 거센소리나 된소리가 없었다. 이런 언어현상이 나타난 것들은 임진왜란 이후에 일이다. 거센소리나 된소리가 들어가지 않은 욕설은 많지 않다. 그리고 당시 절대적인 지배의 상징이었던 왕은 궁을 떠나 의주로 떠났고 지역사회에서 명망 높던 양반들 또한 자기 목숨을 챙기기에 바빴다. 임진왜란으로 통치의 권위를 인정받던 왕과 양반세력들은 권위를 잃었다.

임진왜란이라는 사건으로 인해 기존의 엘리트인 양반계급은 사회적 지위가 격하되었고 이에 반동적으로 대응한다. 조선 후기 17세기 이후, 조선의 사회에서 신분제는 동요하기 시작했고 마을공동체의 중심이 되던 양반은 몰락하여 잔반이 되기도 하는 등 큰 변화들이 일어난다. 이러한 경향으로 인해 조선 후기는 반동적으로 성리학의 절대화 경향이 일어난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의 명분론이 절대화 되었고 이들은 성리학을 만든 주자의 해석외의 해석을 사문난적으로 몰아세웠다. 이에 따라 극단적인 경우 사문난적으로 몰린 이에게는 처형이 부과되기도 한다. 과부에게 재가를 금지하고 부계중심의 가족제도와 장자에게 상속권을 주는 등의 가부장적 제도의 연원은 사실 조선 초기나 그 이전의 중세나 고대부터 이루어진 전통이 아닌 조선후기 일어난 양반층의 몰락에 대한 지배세력의 반동이었다. 불교국가였던 고려는 재혼은 물론 여자도 상속을 받았고 이런 경향은 조선 초에도 이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민족적 질서가 깨진 것은 앞서 다룬 것과 같이 사회의 혼란으로 인한 지배계층의 정체성의 위협으로 지배계층은 경직되고 수직적인 사회사상을 생산해냈다. 이런 사상의 흐름으로 후기 조선은 크게는 중국과 사대주의 외교를 했고 명분론을 앞세우다 병자호란 때는 삼전도에서 왕이 치욕을 당하기도 한다. 이런 까닭들로 인하여 한국사회는 수직적인 문화가 자리를 잡고 다양성을 추구하기보다는 획일성에 중점을 둔 사회가 되었다.

이러한 성리학적 전통은 한국사회의 수직적 권위주의와 획일성이라는 유산을 남긴다. 4)이에 따라서 한국은 정치의 중앙 집중화를 초래했고 이로 인해 한국사회는 엘리트중심의 지배체제를 구축했다. 또한 국가관료체제는 이와 함께 강력하게 성장했다.(최장집, 2005) 광복과 함께 미군정이 들어오면서 민주주의가 시행되었던 한국은 사실 ‘수입 민주주의’ 국가였다. 민주주의는 제도가 아닌 하나의 문화라고 주장했던 정치학자 알렉시 드 토크빌의 입장에 빗대어 봤을 때 한국의 민주주의는 초기에 제도일 뿐이었다. 한국은 정확하게 통치자가 곧 피치자인 민주주의를 한국사회 구성원들의 노력으로 일구어내지 못했다. 이것은 한국 민주주의에 치명적인 요소일 것이다. 한국은 신분제도가 한국전쟁 이후 거의 타파되었다고 평가받는데 이런 신분제도의 타파도 주체적으로 이루었다기보다 외부적 요소를 통해 이루어졌고 민주주의 또한 ‘수입’ 민주주의로 이루어졌다. 한국사회는 능동적 정치행위자가 빈곤한 형편이다. 이런 수입 민주주의의 한계는 제 1공화국으로 시작되는 비민주적 권위주의 정부와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부독재체제로 이행된다. 이 과정에서 헌법적 가치들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닌 사람들은 고난을 겪었고 이들은 마침내 1987년 제도적 민주주의를 이루는 데 성공하고 여기서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은 수입 민주주의가 아닌 한국의 민주화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한국의 민주화는 1789년 발생한 프랑스 혁명이나(물론 이후에 왕정으로 복고가 되기도 하지만) 서구의 선진 민주주의에 비하면 시간적으로 짧은 민주주의의 경험을 했으며 아직도 당면한 과제들이 남아있다.


ㄴ. 근대를 넘어 현대로, 현대적 민주주의, 시민사회, 거버넌스, 그리고 직접 민주주의


한국사회는 제도적 민주주의를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의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힘으로 이루어냈다. 이것은 세계사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한국에 제도적 민주주의가 이루어진 것은 1987년의 일이지만 한국사회는 이미 1960년 4월 항쟁을 통해 이승만 정권을 타도한 적이 있고 박정희 정권으로 이어지는 제 3공화국에서도 꾸준히 민주세력들이 존재했고 이후 새로 난립한 전두환 정권 또한 1980년의 광주 민주항쟁으로 대응하는 시민세력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서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한국은 민주화를 이룬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의 민주주의라는 문화가 뿌리내리기에는 아직 부족한 측면들이 있다.

사회계약설을 통해 근대국가의 이념적 초석을 다진 루소의 표현을 빌리자면 루소는 “선거는 4년이나 5년에 한 번씩 투표할 때만 주인과 자유인이 되고 선거만 끝나면 다시 노예로 돌아가는 제도이다.”라는 말을 남긴 적이 있다. 최근의 한국을 살펴보면 대통령은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직권상정을 국회의장에게 종용하며 3권 분립의 원칙을 파행하고 있으며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사태를 보면 많은 시민들의 저항과 불복종 또한 전문성을 가진 사학계 교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통령과 집권 여당은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간접 민주주의의 한계점과 민주성 결핍이다. 또한 성리학적 권위주의의 유산으로 많은 기성세대들은 국회를 대통령의 보조적 역할로 인식하거나, 아직도 대통령을 임금에, 총리를 재상에 빗대는 언어들이 사용되고 있다.

다시 앞서 언급한 루소의 말을 환기해보자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문화적 민주주의라기보다는 아직 제도적 민주주의의 측면이 강한 것 같다. 국가의 정치적 의제들 자체가 엘리트들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엘리트와 국가관료 중심의 대의제 민주주의는 민주성의 결핍을 수반한다. 이런 까닭에 한국 민주주의는 앞으로 이를 보완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하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이 문제를 해결해나갈 단초를 제공할 키워드는 ‘시민사회’, ‘거버넌스(governance, 협치 : 協治)’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한국의 시민사회 권력은 분명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대중적인 지지기반이나 인지도가 비교적 약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사회의 시민사회는 발전해왔지만 그래도 아직 역사적으로 깊게 문화로 뿌리내린 선진적 시민사회 권력보다는 다소 약하지 않나하는 의문이 있다. 그리고 거버넌스 체제의 방식도 아직 우리 생활에 깊게 뿌리내리지는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한국은 앞으로 시민사회 권력을 더욱 두텁게 형성해야한다. 또한 이를 통해 거버넌스 체제를 구축해나가면서 점점 더 대의 민주주의의 민주성 결핍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 그것이 한국 정치사회가 끌어안고 가야할 하나의 의제일 것이다.


ㄷ. 고착화된 보수양당 체제, 그리고 레드 컴플렉스


한국의 정당체제는 소선거구 단순다수대표제로 인해 양당제가 성립된 특성이 있다. 또한 냉전 반공주의와 맞물려 한국의 거대 양당은 보수기반의 보수파와 개혁파로 나뉠 뿐 진정한 의미의 진보정당이 정치적인 토대를 마련하기 힘든 정치적 정서를 가지고 있다. 노동자들의 정치세력화는 민주노동당 이후 그렇다할만한 성과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다. 최근 서울의 K대학교에서 김수영 시인의 “김일성 만세”라는 시가 대자보로 붙으며 참여시인 김수영의 표현의 자유라는 의제가 다시금 대학가에서 하나의 화두로 자리매김했다.

아직 한국은 국가보안법의 존재로 인해 완전한 표현의 자유가 이루어지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런 국가보안법은 항상 헌법에서 보장되는 표현의 자유보다 상위법인가하는 논쟁을 항상 수반해왔다. 물론 형식상으로 한국은 헌법이 실정법보다 상위법인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적 스펙트럼을 좁은 각을 가지고 있다. 우리 안의 파시즘의 서술에 따르면 5)“나는 해외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제 3세계, 특히 북한과 쿠바의 사회주의 발전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또 귀국해서 항상 그 쪽 얘기나 발표 끝에 두 정권 및 체제의 부정적인 특징을 애써 강조하고 끝내는 버릇을 갖게 되었다. 주변의 부담스러운 시선 때문에 갖게 된 필요 이상의 피해 의식에서 나오는 이 버릇은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와 그것의 문제점을 객관적으로 밝혀내는 학술적 자세와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권혁범, 2000)

알바를 알선하는 사이트에서 광고에 출연하는 걸그룹 걸스데이의 이혜리의 경우 해당 업체에서 최저임금을 지키지 않는 업체를 퇴출하고 알바들이 당연하게 보장받아야할 권리들을 함께 지키자는 내용의 광고를 촬영했다. 이 광고가 텔레비전에 나오자, 이혜리라는 연예인은 칼 맑스와 아이돌의 합성어인 ‘맑스돌’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사실 단순히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에게 보장된 법을 지키자는 취지의 광고를 하는 연예인에게 칼 맑스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과연 적절한 선택일까 의문이 든다. 이렇듯 한국사회는 사회주의 노선의 정당을 찾아보기도 힘들고 일전에 노무현 대통령이 공산주의 정당이 있어야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가 정착된다고 했던 발언은 두고두고 비판을 넘어선 비난을 받는 실정이다. 한국 사회는 이념이 과도하게 경직되어있고 앞서 말한 책의 사례처럼 레드 콤플렉스는 한국사회의 하나의 통과의례이다. 어쩌면 레드 컴플렉스는 한국사회에서 다수가 공유할 수 있는 이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사상들에 정답은 없다. 개인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들을 개진할 수 있어야하며 다양한 생각들이 공론장으로 나와 서로 갈등하고 투쟁하고 보완하며 하나의 고결한 담론으로 형성되는 그런 한국사회의 풍토를 상상해본다. 한국사회는 진정한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 고착화된 보수 양당체제와 레드 콤플렉스에 대해 재고해야하며 사회 여러 부분에서 이것들을 두고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이다. 개인의 자유는 보장 되어야하며 이런 자유로움 속에서 사회발전과 변동의 원동력이 발생하고 한국사회는 더욱 성숙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3. 결론


한국사회를 발전사회학의 측면에서 조망해보았다. 크게 근대를 대표하는 체제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국사회를 보았을 때, 한국사회는 분명히 자본주의가 자리 잡은 사회이며 사회구성원들의 힘으로 민주화를 이루어낸 사회이다. 한국사회를 설명하기에 좋은 발전사회학 이론은 ‘근대화 이론’인데 근대화 이론은 경제적 근대화인 자본주의가 정치적 근대화인 민주주의보다 선행되며, 이에 따라 자본주의가 이루어지면 민주주의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근대화 이론이 완만하게 생각했던 자본주의 체제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과정에서 상당한 진통을 겪어야만 했다.

현재 한국사회는 근대화를 달성한 나라이다. 하지만 압축적 또는 선택적 근대화의 부작용으로 인해 한국사회는 아직도 식민지배와 농경사회, 전쟁과 반공주의, 군부독재와 산업화, 그리고 민주화와 정보화 사회를 경험한 다양한 구성원들이 존재하는 사회이다. 이런 까닭에 갈등이라는 것이 조금은 불가피하고 이 과정에서의 진통들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더욱 성숙해지기 위해서 분명히 세대적인 갈등과 문화적인 갈등 그리고 경제, 사회, 정치 전반에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나가야 할 것이다. 한국사회의 이런 다방면적 갈등양상은 한국사회에 근대사회에서 탈근대적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한국사회는 여러 질문들을 던져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주체적으로 이런 문제들을 더욱 해결해나갈 수 있는 지를 고민해야 한다. 크게 한국사회는 국가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한다. 한국의 근대적 민족국가 개념은 식민지의 침략과 외세의 개입 중에 형성되어왔고 정작 국가의 구성원들이 국가의 의미를 구하는 성찰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또한 한국사회를 넘어 어쩌면 현재 인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상태이다. 한국사회는 자본주의 문명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이루고 있는 신자유주의에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또한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에 대해 묻고 생각해야한다. 한국사회는 구성원들의 힘으로 진정한 민주주의를 구축했으며 2번의 독재자를 전복시킨 경험이 있는 나라이다. 한국은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를 이뤄낼 만한 소양이 있는 사회이다. 그러니 이제는 더 나은 사회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해야한다.

지금의 한국사회는 이제 ‘발전’이라는 이미지가 사회구성원들의 절대다수의 지지를 받는, 가슴이 뛰는 이미지는 아닐 것이다. 이제 한국사회는 ‘성숙’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사회가 참여해야하지 않나 생각해본다. 물론 새로운 역사의 물꼬를 틀만한 강력한 이념이나 제 3의 길이 제시될 수도 있지만 한국사회는 지금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의 진정한 의미와 대안을 모색하며 보다 더 성숙한 사회로의 발전을 목표 삼아야 될 것이다.


참고문헌

1) 김준석, 『근대국가』, 책세상, 2011, p. 16~20

2) 임석진 외, 『철학사전』, 중원문화, 2009, 네이버 지식백과 ‘물화’ 항목

3) 이매뉴얼 윌러스틴, 나종일·백영경 역, 『역사적 자본주의 / 자본주의 문명』, 창작과비평사, 1993, p. 16~19

4)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05, p. 60

5) 임지현 외, 『우리 안의 파시즘』, 삼인, 2000, p.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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