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에게 과거의 그리스도를 소개하여 준다해도 아무런 감격을 줄 수 없으며 그렇다고 미래의 그리스도를 전하기에는 그들의 현재가 너무도 급박했읍니다.” ⠀ 조용기, <삼박자 구원> 중
헌책방에 가서 <생산적 믿음>이라는 책을 구했다. 누가 봐도 조용기가 쓴 책이다. 단적으로 한국의 기독교는 조용기주의이다. 조용기에 관한 평가와는 무관하게도 그렇다. 종교사회학을 염두에 두면서, 조용기의 책들 <삼박자 구원>, <가난해야 좋은 신자인가>, <꿈과 성취>를 읽은 적이 있다(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책을 빌려준 신학생 동생에게 감사하다). ⠀ 그 책에는 한국 개신교가 들어있었다. 자기계발적 신앙, 물질세계를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경제적 삶의 성공을 신앙의 성공으로 연결하는 지극히 세속적인 종교성, 그러면서도 근대화에 관해 반지성주의적으로 점철되는 반세속주의의 역설, 문자주의까지. 이것이 한국 교회의, 한국 기독교의 이념형이 아닐까. ⠀ 여러 사회학자가 조용기를 구조 형성적 행위자로, 박정희, 정주영과 함께 한국 근대화에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로 규정하는데, 이것이 과도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미 웃음거리가 된 그에게 그런 평가는 과분하게 느껴지겠지만, 조용기는 신앙을 형성하기 위해 굉장히 능동적이고, 절절하게, 진정성 있게 분투한 사람이었다. 그를 나처럼 관찰하든, 아니면 비판하든, 극복하든, 계승하든 어떤 과정에 있더라도 읽을수록 그가 그냥 지나칠 인물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책은 가끔 이렇게도 읽는다. 자료로서, 관찰로서의 독서다. 언제나 판단자인지, 관찰자인지 그 사이를 갈등하지만, 관찰로서의 독서로 이런 책을 읽곤 한다. 앞으로는 이런 자료로서, 관찰로서의 독서와 그 비평, 또는 관찰도 나눌 예정이다.
이 책, 『음모론의 시대』는 음모론에 대한 문화사회학적 분석이 담긴 책이다. 사회학자 전상진 선생님의 책으로 이 책은 본격적인 학술서적이라기보단 교양서적에 가까운 책 같다. 책에서 음모론은 ‘정치적’ 음모론에 초점을 맞추어 때로는 저항의 불쏘시개이면서 때로는 저항의 분쇄를 정당화하는 음모론의 역설적인 ‘효용’을 분석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책에서 저자는 음모론의 진위를 가르는 심판자가 아닌 음모론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실재들을 다루는 관찰자로서 음모론을 다룬다. 책 자체가 크게 어렵지 않고, 또 많은 예시를 통해 이루어졌기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큰 진입장벽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고, 추천하는 책이다.
오늘은 책 자체보다 책의 프리퀄에 해당할 수 있는, 베버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보려고 한다. 우선 이 책은 베버의 종교사회학, 그중에서도 ‘신정론’을 다룬 이론을 토대로 음모론을 분석해간다. 음모론은 오늘날의 신정론의 모습이기도 하다.
교회용어사전에 의하면 신정론이란, “‘신’(神, 데오스)과 ‘의’(義, 디케)를 뜻하는 두 헬라어의 합성어로서,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고통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을 변호하려는 시도. 일명 '신의론'(神義論)이라고 한다. 즉, 하나님이 존재하시는데 세상이 이처럼 모순투성이인지, 왜 계속 죄악이 맹위를 떨치는지, 그렇다면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 맞는지 등의 문제를 다루는 신학적 입장”이다.
근대 사회를 분석하는 학문적 구상으로서 ‘문화과학’을 제시했던 베버에게 문화과학의 선험적 전제가 되는 조건은 “주관적으로 입지를 정하고 행위하며 이 행위에 대해서 주관적 의미를 부여하는 의지와 능력을 소유한 문화인간”이었다. 베버에게 인간은 “인식의 나무를(선악과) 먹은, 문화시대의 숙명을 공유”하는 인간이다. 이 인간은 본질적으로 끊임없이 ‘의미’를 추구한다.
욕망과 현실, 기대와 결과 사이의 간극에서 인간은 이런 부조화를 견뎌낼 합리적인 의미를 추구한다. 예를 들어 착하게 살면 보상을 받는다고 믿는 사람이 착하게 살아도 보상을 받지 못할 때, 성서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달리 악인이 형통할 때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인간은 이 간극을 견디기 위해 합당한 설명을 필요로 했다. 언제나 고통은 그 자체로서 괴로운 것이 아니라, 이유가 없고 설명할 수 없을 때 그렇듯, 고통과 불평등한 복의 분배는 설명을 필요로 했다. 인간은 행복보다는 의미를 먼저 추구한다. 그런 간극을 설명하는 정당화하는 역할로서 신정론이 작용했다고 베버는 분석한 것이다. 베버는 이러한 합리적 이유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뿌리뽑을 수 없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 책에서는 신정론의 자리에 음모론을 적용한다. 우리가 어떤 고통을 설명할 때, 이전에는 신정론이 그런 역할(동양에서는 업보가 그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을 했지만, 근대 사회에서는 정치 이데올로기와 음모론이 기대와 현실의 간극과 고통을 설명하는 이론으로써 작용하는 것이다. 이 책은 칼 포퍼처럼 음모론을 심판하거나 편집증적 인간의 이야기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잔존하는 종교의 ‘사회적 쓸모’를 관찰한 베버처럼 음모론의 사회적 쓸모와 이것의 사회적 효용을 재밌게 풀어쓴 책이다.
이 책은 세월호라는 비극과 그 사건의 간극 속에서 의미를 추구하며 이를 이해하고자 했던 사회의 분위기에서 쓰인 책이다. 저자는 그 사건을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지만, 그때의 사회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게 글을 쓴 것 같았다. 6년이 지난 오늘 사람들은 오늘날 벌어진 기대와 현실의 간극 속에서 이 사건의 괴리감을 해결할 새로운 책임자과 희생양을 색출하고 있다. 지금의 사회적 맥락에서 이 책을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자끄 엘륄(Jacques Ellul)은 프랑스의 법학자, 사회학자, 개신교 신학자다. 아마 생소한 분이 많을 텐데, 부족하게나마 사회학자로서의 엘륄을 소개해보려 한다.
1. 프랑스 지성계에서의 엘륄
생전 엘륄은 보르도와 프랑스 남부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학문적 작업을 진행했기에 거장들의 각축장이었던 20세기 프랑스의 지성사에서 중심적 위치를 점하지는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엘륄은 제자들의 권유로, 프랑스의 중심 출판사인 쇠이유(Seuil) 출판사에서 책을 출간하기도 했지만,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고, 이런 사실에 대해 엘륄은 “프랑스 지식사회 특유의 파리문화중심주의”에서 기인하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르몽드는 엘륄이 언제나 프랑스보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더 인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서술한다. 하지만 이어지는 학자들의 인용과 평가, 사후의 관심으로 프랑스 지식사회에서 엘륄은 재평가 되고 있다. 맑시스트이자 작가인 기 드보르,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에 의해 엘륄의 소외 문제는 중요하게 언급되었다. 이반 일리치 역시 기술사회에 대한 엘륄의 사상에 찬사를 보냈고, 또한 과학인류학/사회학자 또는 과학철학자로 유명하며, 근대성 논쟁을 촉발한 브뤼노 라투르가 엘륄의 작업을 높이 평가하면서 엘륄은 프랑스 학계에서 본격적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사건들과 맞물려 엘륄 탄생 100주년인 2012년을 기점으로 프랑스에서도 지속적으로 입문서, 연구서, 미출간 원고들이 비교적 활발하게 생산되고 있다고 한다.
2. 엘륄의 사회학적 주제들과 사회학적 위치
엘륄의 기술, 프로파간다, 소외에 관한 이론으로 유명하다. 비판이론가이자, 기술철학자인 텍사스대학의 크레이그 행크스(Craig Hanks)는 엘륄이 “위르겐 하버마스, 마르틴 하이데거, 질베르 시몽동, 앙드레 르르와 구란(Andre Leroi-Gourhan), 귄터 앤더스(Gunther Anders)와 함께 기술에 대한 주요한 사상가”라고 평가했다. 이에 대해 엘륄은 자신과 시몽동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은 “철학적 자신감에서 기인한 너무 추상적인 사람들”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런 비교를 통해 엘륄 작업의 위치를 조금이나마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또 엘륄의 중요한 주제인 기술사회, 소외의 문제, 기술의 신성화(이데올로기화), 정치적 프로파간다와 구별되는 사회학적 프로파간다에 관한 작업은 그 작업 자체로도 유의미하지만, 크레이그 행크스의 규정처럼 과학기술 사회학, 또는 철학 작업과 비교해보는 것이 엘륄의 작업을 위치지우면서도 장점을 살릴 수 있는 방법같고, 사회학적 프로파간다의 문제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작업과 연관시켜볼 수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현대사회에서의 구체적인 소외의 문제도 그렇고, 지배/피지배 도식과 프로파간다 개념 역시 이미지, 상징, 미디어 정치와 연관해서 생산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만듦새에 아쉬움은 있지만,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대장간> 출판사가 뚝심있게 그의 총서를 발간 중이다. 엘륄에 대한 사회학적 입문서로는 컴북스이론총서로 나온 하상복 선생님의 <자크 엘륄>을, 신학을 포함한 그의 사상 전모를 소개하는 책으로는 프레데릭 호뇽의 <자크 엘륄, 대화의 사상>을, 가장 평이한 입문서로는 손화철 선생님이 쓰신 김영사 지식인 마을 시리즈 <토플러 & 엘륄>을 추천해 드린다.
자의성(arbitraire)은 모든 장(champ)들, 예술적 혹은 과학적인 것들과 같은 가장 순수한 장들의 원칙에도 자리 잡고 있다. 이 장들 각각은 ‘자신의 근본적인 법’, 자신의 노모스(노모스는 보통 ‘법’으로 번역되고 있으나, 자의적인 제정 행위를 상기시키는 ‘구성(constitution)’으로 번역하거나 어원과 보다 가까운 ‘시각 및 구분의 원리’로 번역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를 가지고 있다.1) 파스칼의 말대로 “법은 법이고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이 법에 대해 말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법은 예외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경우 동어 반복을 통해서만 진술된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고 나뉠 수 없는 그것은, 다른 장의 법과 이 다른 장이 강제하는 진리의 제도(régime)에 결부될 수 없다. 이런 점은 특히 예술의 장에서 가시적이다. 예술의 장이 내세우는 노모스는, 19세기 후반에 주장된 바,(‘예술을 위한 예술’)대로 본다면 경제의 장이 내세우는 노모스(‘장사에는 인정사정 없다’)의 반전(inversion)이다. 바슐라르2)가 주목하고 있는 바와 같이 ‘법률적 정신’과 ‘과학적 정신’ 사이에도 동일한 양립 불가능성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모든 어림셈(approximation)을 거부하는 것, 소송의 원천인 모호함을 없애기 위한 의지는 법률가에게 한 평의 땅의 값을 정확하게 평가하도록 이끄는데, 이것은 학자의 눈에는 터무니없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이 말하는 것은 하나의 장을 형성하는 관점이 일단 받아들여지게 되면, 이 장에 대해 다른 외부의 관점을 채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노모스는 결코 그런 식으로 위치될 수 없기에 반박될 수 없고, 안티테제도 가질 수 없는 테제이다. 사고할 수 있는 것과 사고할 수 없는 것, 규정된 것과 금지된 것은 규정하는 구분의 정당한 원리로서 그것은 존재의 모든 근본적 측면에 적용될 수 있으며 이것은 사유되지 않은 채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모든 타당한 문제들의 모태로서 그것을 문제로 요구하는 문제들을 생산할 수 없다.
그리하여 각각의 장은 파스칼의 범주처럼 자신의 고유한 내기물(내기에 건 돈, enjeux)들 속에 행위자들을 가둔다. 이 내기물들은 다른 관점, 다시 말해 다른 게임의 관점에서 보면 눈에 띄지 않거나 적어도 무의미하며, 심지어 헛되다. “위대함이 드러내는 모든 광채는 정신의 탐구 속에 있는 자들에게는 빛이 없다. 재치 있는 사람들의 위대함은 왕·부자·장군 등 육체적으로 위대한 그 모든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지혜의 위대함은 ···중략··· 관능적인 자들과 재치 있는 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종류가 다른 세 범주이다.”3) 파스칼의 명제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각각의 장들에 의해 제안된 내기물들과 이윤들이 어디에서 지각되고 끌어당기는 것을 멈추는지 관찰하면 충분하다. (이것이 장들의 경계를 시험하는 방법들 가운데 하나이다.) 예를 들어 고위 공무원의 직업적 야망은 연구직 종사자를 무심하게 만들 수 있고, 예술가의 무모한 투자나 ‘1면’을 차지하기 위한 기자들의 투쟁은 은행가들이 보기에는(예술가들과 작가들이 부르주아 아버지와 일으키는 갈등은 성인 연구의 단순한 주제topos가 아니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없이, 아마 장 외부에 무관한 모든 사람들에게, 다시 말해 아주 흔히 피상적인 관찰자들이 보기에 그것은 대체적으로 여전히 의미를 알 수 없는(inintelligible) 것이다.
*해당 글은 국역된 부르디외의 『파스칼적 명상』Méditation Pascaliennes, 김웅권 역, 동문선, 2001, 141-143p.를 기준으로 영역된 『Pascalian Meditations』, tran. Richard Nice, Stanford, 2000과 비교하고, 몇몇 개념어는 원서인 『Méditation Pascaliennes』, Seuil, 1997과 비교해서 본문을 수정해본 원고이다.
1) 나는 향후의 연구에서 장 이론을 보다 체계화적으로 설명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당장, 독자들은 나의 책 『예술의 규칙』Les Règles de l'art : genèse et structure du champ littéraire, Paris: Éditions du Seuil. 특히 254-259p.를 참고하길 바란다.
사회학자와 역사학자, 피에르 부르디외 로제 샤르티에 저, 이상길 배세진 역, 킹콩북, 2019
피에르 부르디외는 20세기 최고의 사회학자 중 한 명입니다. 또 부르디외는 가장 많이 인용되는 사회학자이기도 한데,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글로벌 지식 장에서 위치하는 그의 자리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부르디외의 사회학은 그만큼 매력적이기도 하고, 그만큼 적실성을 갖추고 있기도 한데 이 매력과 적실성만큼이나 그를 입문하는 데는 여러 어려움들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그의 책들의 문장이 난해하다는 것이고, 부차적으로는 한국의 번역서들의 번역의 질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보통 한국의 부르디외 서적들은 사회학자가 아닌 불문학자들이 번역한 것이 대부분이라 더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회학자와 역사학자>는 앞서 언급한 두 가지 문제점과는 연관이 없는 책입니다. 우선 부르디외의 서술을 장황하고 난해합니다. 한국어 역본뿐 아니라 그의 영역본들을 봐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부르디외 특유의 난해함이 없어서 가독성이 매우 좋습니다. 아무래도 대담집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덧붙여 설명하자면 부르디외는 <말한 것들>, <성찰적 사회학으로의 초대>, <Satz und Gegensatz> 등의 대담집을 통해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는 이론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대담이라는 형식이 그의 이론을 전달하는데 좋은 형식일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 책은 한국의 대표적인 부르디외 연구가이신 이상길 선생님과 현재 파리에서 정치철학 박사과정에 계신 배세진 선생님의 공역으로 믿고 볼 수 있는 역본입니다. 역어 하나하나가 적확한 것이라고 신뢰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서 번역은 한국어로서의 자연스러움도 필요한데 문장도 유려해 가독성도 좋습니다. 그리고 대담집의 특성상 부가적인 설명이 필요한 부분에서 적절하게 역자들의 부연설명이 있어서 더 내용을 쉽게 이해하기에 좋습니다.
책 내용으로 들어가보면 이 책의 제목은 <사회학자와 역사학자>이지만, 사회학자에 방점이 찍혀있습니다. 샤르티에가 인터뷰어에 가깝고, 부르디외가 인터뷰이라서 그럴 것입니다. '사회학자의 직능', '성찰성', ‘환상과 인식’, '구조와 행위의 극복', '하비투스', '장(場)'과 같은 부르디외 사회학의 핵심적인 개념들을 그의 입을 통해 단순하고 명료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핵심 개념과 함께 부르디외가 연구하고 있었던 마네, 플로베르, 미슐레, 하이데거 등의 인물을 통해 장(場)에 관한 경험적인 연구 과정과 결과들을 서술하는 마지막 장도 그의 이론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대담이다 보니 설명들이 문어(文語)만큼 체계적이지 않은 단점이 존재하긴 하지만 어떤 입문서들보다도 편하게 부르디외의 이론을 이해할 수 있는 장점이 존재합니다. 초심자께서는 이 책 이후에는 <성찰적 사회학으로의 초대>(또는 <부르디외, 커뮤니케이션을 말하다>) 부록에 있는 이상길 선생님이 작성하긴 부르디외 사회학의 주요 개념을 참고하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더불어, 인터뷰어에 가까운 로제 샤르티에 역시 ‘대가’답게 부르디외의 이론을 아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고, 그의 이론에서 명확치 않았던 부분들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질문함으로써 답변을 유도하고, 가려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실력을 발휘합니다.
이 책에서는 아마도 부르디외 학문의 절정기라고 볼 수 있는 1988년 부르디외의 어떤 이론적인 야망과 자신감, 그리고 한 편으로는 ‘인간’ 부르디외의 고뇌와 발랄함도 엿볼 수 있습니다. 모쪼록 부르디외에 관심이 있는데, 섣불리 입문하시지 못하셨던 초심자분들, 또 부르디외 사회학을 그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받고 싶으신 분들께 강력하게 추천드리는 책입니다.
1) 본 서평은 “막스베버, 전성우 역, 2013,『직업으로서의 학문』, 나남출판”을 읽고 작성했다.
2) 이 글에서 별도의 표시 없이 본문의 괄호 속에 표시된 숫자는 앞서 언급한 책의 쪽수를 의미한다.
3) 본 서평은 『직업으로서의 학문』 내용을 재구성했기 때문에 실제 책의 순서는 이 글과 다르게 진행된다.
이 책, <직업으로서의 학문>은 사회학의 창시자이자, 현대 사회학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근원적 사상가 막스 베버(Max Weber)가 1917년 11월 7일, 뮌헨대학의 진보적 학생단체인 자유학생연합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강연한 원고를 출간한 책이다. 이 역본의 역자이신 전성우 선생님에 의하면 이 강연이 있었던 시기는 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던 때로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고 있었고, 당시 학생들은 이러한 정신적 위기상황에서 이를 극복한 카리스마적 ‘예언자’나 ‘제사장’을 요구하고 있었다고 한다.
1. 들어가기에 앞서: ‘직업으로서의 학문’이라는 제목
먼저 이 책의 원래 제목은 ‘Wissenschaft als Beruf’인데, 이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있어야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독일어 ‘Wissenschaft’는 ‘학문/과학’이라는 의미를, ‘als’는 ‘-로서’라는 의미를, ‘Beruf’는 ‘사명/소명/천직’, 또는 ‘직업’이라는 의미를 각각 가지고 있다. 여기서 Wissenschaft와 Beruf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독일어 Wissenschaft는 과학, 또는 학문을 의미하는데, 한국에서 ‘과학’은 보통 생물, 물리, 화학, 지구과학 등의 자연과학을 떠올리게 한다. 따라서 한국에서 통상적으로 과학이 의미하는 바는 (자연)과학이고, 여기서 베버가 의미하는 과학이란 근대적 학문이라는 의미의 ‘과학’이다. 굳이 과학과 학문이 구별되어야 하는 이유는 학문이 전근대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만 해도 학문이라는 어휘가 상당히 많이 사용된다. 그래서 Wissenschaft는 ‘근대적 학문’, 또는 독일적 맥락에서의 ‘과학’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Beruf에 관한 이야기이다. 독일어 동사 ‘berufen’은 ‘부르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의 명사형 Beruf는 ‘부름 받은 것’이 되는데, 서구 기독교 전통에서 직업은 신의 소명이자 사명으로 이해되었고 이를 통해 근대적, 전문적 직업윤리가 싹튼다는 것이 베버의 중요한 분석이다. 따라서 베버가 의도한 Beruf는 단순한 직업이라기보다는 천직, 소명으로 이해되어 전문적이고, 합리적으로 조직된 근대적 직업이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은 ‘소명으로서의 과학’ 또는 ‘천직으로서의 (근대적) 학문(또는 학술)’이 보다 더 정확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2. 탈주술화 과정(Entzauberungsprozeß)으로서의 근대와 가치 다신주의
베버는 이 강연에서 우리 시대의 특징으로서의 탈주술화에 대해 직접적으로 설명한다.
합리화(Rationalisierung)와 주지주의(Intellektualisierung)화를, 특히 세계의 탈주술화(脫呪術化, Entzauberung)를 특징으로 하는 우리 시대에서는 바로 가장 숭고하고 궁극적인 가치들이야말로 공공의 장에서 물러나서 신비주의적 삶의 은둔의 세계로 퇴장했거나, 아니면 개인들 상호간의 직접적 형제애 관계 속으로 퇴장했습니다(88).
Es ist das Schicksal unserer Zeit, mit der ihr eigenen Rationalisierung Intellektualisierung, vor allem: Entzauberung der Welt, daß gerade die letzten und sublimsten Werte zurückgetreten sind aus der Öffentlichkeit, entweder in das hinterweltliche Reich mystischen Lebens oder in die Brüderlichkeit unmittelbarer Beziehungen der Einzelnen zueinander.
주지주의화와 합리화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라도 우리의 삶의 조건들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우리의 삶에서 작용하는 어떤 힘들도 원래 신비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힘들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모든 사물은 - 원칙적으로는 - 계산을 통해 지배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이 알고 있거나 또는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세계의 탈주술화를 뜻합니다. 그러한 신비하고 예측할 수 없는 힘의 존재를 믿은 미개인이 했던 것처럼 정령(精靈)을 다스리거나 정령에게 산청하고 그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주술적 수단에 호소하는 따위의 일은 우리는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령에게 부탁했던 일들을 오늘날은 기술적 수단과 계산이 대신해줍니다. 무엇보다도 이것이 주지주의화가 그 자체로서 의미하는 바입니다(45-46).
탈주술화와 더불어 베버는 이 시대의 근본규정을 가치 다신주의라는 이름으로 명명한다. 근대의 니힐리즘을 지적한 니체의 세계상으로부터 베버는 큰 영향을 받는다.[각주:1] 베버는 니체의 “신은 죽었다”2]라는 선언에서 한 걸음 더 나가서 다음과 같은 선언을 한다.
옛날의 많은 신들은, 이제 그 주술적 힘을 잃어버리고 그래서 비인격적 힘의 모습으로, 그들의 무덤에서 기어 나와 우리 삶을 지배하고자 하며 또다시 서로간의 영원한 투쟁을 시작하고 있습니다(72).
삶이 어떤 형이상학적 또는 종교적 준거 없이 그 자체로서 존재근거를 가지고 있고 그 자체로서 이해되는 한, 삶은 오로지 저 신들 상호간의 영원한 투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기본상황 말입니다(80).
이제 유일한 태양은 없고, 또 합리주의마저도 상대화될 수밖에 없게 된, 그래서 스스로는 자기에게 있어 무엇이 신이고 악마인지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모든 가치들이 서로 투쟁할 수밖에 없는 시대상을 지적한다. 절대적 가치를 잃고 이 니힐리즘 속에서 일상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 곧 우리시대 젊은이들의 피치 못할 운명이며, 가장 힘든 것임을 베버는 밝히고 있다.
3. 근대 학문의 지위와 그 의미의 문제
베버는 학문연구가 본질적으로 진보(Fortschritt)에 예속되어 있으므로 학문은 시간이 지나면 낡아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쳐해 있고 이 자체가 학문의 목적임을 밝히면서 학문의 의미문제를 논한다. 다시 말해 학문 자체를, 즉 낡아버릴 수밖에 없는 작업을 업으로 삼는 학자들은 그것을 통해 어떤 의미를 취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베버는 톨스토이를 인용하며 우회한다. 과연 죽음은 의미 있는 현상인가? 베버는 사상, 지식, 또는 제반 문제들로 끊임없이 농축되어 가는 근대의 과정 속에 있는 근대 문화인(文化人, Kulturmensch)은 생의 포만감을 느낄 수 없다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근대 문화인은 ‘최종적인 것’이 아닌 끊임없는 진보 속에서 극히 작은 부분만을 낚아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근대인들에게 죽음은 의미 없는 것일 뿐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시조 아브라함이 삶에서 만족감을 느낀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의 생활 전체 속에서 학문의 소명은 무엇이며, 그것의 가치는 무엇인가?
베버는 고대부터 중세까지 이어진 학문의 목적에 대해 서술하면서, 학문이 그 자체로서 의미를 부여하던 시기는 끝났음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중세의 곤충학자, 슈밤메르담(Jan Swammerdam)이 작은 곤충에도 존재하는 신의 섭리를 깨닫기 위해 학문을 선택했다면, 근대의 자연과학자들에게는 그런 의미부여가 없다는 것이다. 또 베버는 학문은 행복추구의 길이라는 선언도 니체를 인용하면서 그 자체로 의미가 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진정한 존재로의 길”, “진정한 예술로의 길”, “진정한 자연으로의 길”, “진정한 신으로의 길”, “진정한 행복으로의 길” 등 이전의 모든 환상이 무너져버린 지금, 학문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에 대해 베버는 학문연구에서 나오는 결과는 <알 가치가 있다wissenswert>는 의미에서 중요하다는 전제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한다. 이는 학문의 수단으로써 증명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더 중요하며 이는 궁극적 의미를 기준으로만 해석될 수 있는 해답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자연과학자들이 자연 법칙을 알 가치가 있다고 전제하는 이유는 그 지식으로 기술적 성과를 달성할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들이 학문은 <소명Beruf>으로 여긴다면, 이러한 <지식 자체를 위해서um ihrer selbst willen>이기도 하다.
4. 학문적 사실판단과 규범적 가치판단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책은 가치다신주의라는 시대규정 속, 구체적으로 1차 세계대전 막바지라는 장밋빛 미래를 꿈꾸기 난망한 상황에서 학자를 꿈꾸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다. 학생들은 누구보다도 자신들의 방황을 잠재워줄 ‘예언자’, ‘제사장’을 갈구하던 상황에 베버는 근대문화에서 학문이 차지하는 위치를 정직하게 선언하고, 학문과 정치의 관계를 분리시킨다. 베버는 정치는 강의실에서 배제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실천적-정치적 입장을 취하는 것과 정치구조 및 정당구도를 학문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구별된 사안임을 지적하는데, 이는 아마도 진보적 학생들에게는 신선한 발언이었을 것 같다.
만약 내가 대중 집회에서 민주주의에 대해 강연한다면, 나는 나의 개인적 입장을 숨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대중 집회에서는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도록 편을 드는 것이 연사의 마땅한 의무이며 책임입니다. 그러한 경우에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들은 학문적 분석의 수단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수단입니다. 이 말들은 관조적 사색의 토지를 일궈주기 위한 쟁기의 날이 아니라, 적에 대항하기 위한 칼, 즉 투쟁수단입니다(63).
베버는 “사실확인, 수학적 및 논리적 사실들의 확인 또는 문화적 재화들의 내적 구조의 확인”과 “문화의 가치 및 그 개별적 내용의 가치에 대한 물음과 문화공동체 및 정치적 조직 안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대답하는 것”(64), 이 양자가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것을 통찰하는 지적 성실성을 학자에게 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강의실은 비판이 불가능한 공간이고, 더불어 이는 학문 발전의 저해 요소이기 때문이다. 베버는 이어서 신학자와 신자의 비유를 들어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구별한다. <전제 없는voraussetzungslos> 학문은 <기적Wunder>과 <계시Offenbarung>와는 상관이 없다. 근대학문은 궁극적 가치설정과 의미창출의 주체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자에게 기적과 계시를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학자는 기독교의 역사적 발생과정에 대해 기적과 계시 같은 초자연적인 원인들을 제거하고 인과적 요인들을 설명할 수 있다.
학문은 오늘날에는 <자기성찰Selbstbesinnung>과 사실관계의 인식에 기여하기 위해 전문적으로 행해지는 <직업Beruf>이지, 구원재(救援財, Heilsgüter)와 계시를 희사(喜捨, spendende)하는 심령가나 예언자의 은총의 선물이 아니며 또한 세계의 의미에 대한 현인과 철학자의 사색의 일부분도 아닙니다(81-82).
학자가 강단에서 학문적 사실판단에 대한 권위를 규범적 가치판단의 영역으로 확대시킬 경우, 학자는 부유하는 근대인들에게 새로운 ‘유일신적’ 구원의 길이 있다고 장사하는 지적사기꾼이 될 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서로 싸우는 신들 중 어느 신을 섬겨야 하는가, 아니면 이들과는 전혀 다른 어떤 신을 섬겨야 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이 다른 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학문이 대답하지 못하는 이상, 그럼 누가 대답하는가?”라는 묻는다면, 이에 대해서는 예언자나 구세주가 대답할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언자가 없거나 또는 그의 예언이 더 이상 믿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수천 명의 교수들이 국록을 받거나 특권을 누리는 소예언자로서 강의실에서 예언자의 역할을 수임하려고 시도한다고 해도 결코 진정한 예언자가 지상에 다시 등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82).
또한 이들이 자신의 실천적 입장은 학문적으로 옹호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세계는 다양한 가치질서들의 해소될 수 없는 상쟁(相爭)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가치 다신주의의 상황에서 이는 무의미한 것일 뿐이다.
5. 학자의 외적, 내적 조건과 소명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생각하는 젊은 학생들에게 학자의 외적, 내적 조건과 소명에 관해 이야기한다. 먼저 베버는 학자의 외적 조건에 관한 강연에서 직업으로서 학문을 즉 학자로서 안정된 미래를 보장받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임을 지적하면서 베버는 학자의 학자적 능력과 강사로서의 능력의 차이, 또 교수임용 과정에서 벌어지는 정치적인 외압 같은 예를 들면서 학자의 길은 거친 요행(Hazard)의 길이라고 선언한다. 이런 외적 조건을 다룬 뒤 베버는 이런 대화로 마무리를 한다.[각주:3]
“당신은 평범한 인재들이 해마다 당신보다 앞서 승진하는 것을 보고도 내적 비탄이나 파멸 없이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러면 우리는 매번 두말할 나위도 없이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듣게 됩니다. “물론입니다. 나는 단지 나의 <천직Beruf>을 위해 살 뿐입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나는 그들 가운데 내적 상처를 입지 않고 그것을 참아 내는 사람은 매우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32).
이어지는 학자의 내적 조건에서 베버는 학자가 갖추어야 할 열정과 소명의식에 대해 언급하며, 굉장히 유명한 강연을 이어간다.
일단 눈가리개를 하고서, 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구절을 옳게 판독해 내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침잠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예 학문을 단념하십시오. 이런 능력이 없는 사람은 우리가 학문의 <체험Erlebnis>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결코 자기 내면에서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학문에 문외한 모든 사람들로부터는 조롱당하는 저 기이한 도취, 저 열정, “네가 태어나기까지는 수천 년이 결과할 수밖에 없었으며”, 네가 그 판독에 성공할지를 “또 다른 수천 년이 침묵하면서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은 학문에 대한 소명이 없는 것이니 다른 어떤 일을 하십시오. 왜냐하면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만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34).
앞 서 베버는 학자로서의 길이 순탄하지 않다는 설명을 마치고 학생들에게 학자가 갖춰야 할 열정을 전달하고 있다. 이는 이 자체로는 학적인 열정에 대한 가슴 뛰는 설명이기도 한 동시에 분화된 근대사회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있다. 코린토스로 보내는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라고 설파한다. 이는 어떤 이에게는 절대적이고 숭고한 것이 다른 이에게는 무가치한 것일 수도 있다는 의미로, 베버 역시 어느 고대 필사본을 옳게 판독해 내는 데 자신의 영혼이 사로잡힌다고 하더라도, 이런 소명의식이 누군가에게는 조롱당하는 기이한 도취·열정에 불과할 것임을 암시한다. 부르디외가 말하듯 학문장(學文場)의 일뤼지오(illusio)에 사로잡힌 행위자들에게 학문적 성취는 지고한 가치이겠지만, 학문장 외부의 행위자들에게 고대 필사본의 판독해내는 것은 무가치한 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어서 베버는 비단 열정뿐 아니라 <영감Eingebung>, <혼Seele> 역시 학자의 전제조건임을 언급하며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실험실·통계실에서 제조되는 계산문제가 되어버린 현실을 개탄한다(영감의 문제를 다루는 서술에서 근대성과 행위자의 창조성에 관한 베버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어서 베버는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개성Persönlichkeit>, (가치 다신주의에 기반해 발생하는 (72))<체험>이 우상처럼 퍼져있다고 비판하면서 <개성>은 곧 학문영역에서 순수하게 자신의 주제에 천착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학문 진전에 힘쓰지 않는 호사가, 대중학자들을 비판하고 오직 자신의 과업에 내적으로 몰두하는 것이 학자의 길임을 힘 있게 논변하고 있다.
6. 결론
문고판 번역본으로 약 70페이지, 독일어로 약 40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이 강의록에는 이렇게나 많은 내용들이 담겨있다. 베버는 소명으로서 학자라는 직업에 종사할 사람들의 외적·내적 조건과 근대 학문의 본질과 그 의미와 한계, 그리고 학문과 정치의 관계, 근대의 시대상에 관해 이 짧은 원고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은 큰 맥락에서 두 개의 맥락으로 읽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하나의 메시지로 읽는 것이고, 다른 것은 이 책을 막스 베버의 근대사회론에 포함시켜 읽는 것일 것이다. 해석의 독자의 몫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전자의 맥락에서 이 책을 읽곤 했는데, 요즘 들어서는 후자의 맥락에서 이 책을 읽고 있다.
책의 역자이시고, 베버 전문가이신 전성우 선생님께서는 “이 강연에서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이라는 주제를 근대 문화 일반의 구조와 밀접히 연관시켜 가면서 논의하고 있습니다. 베버의 학문론뿐 아니라 근대성 이론 전반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필독”해야할 책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계시는데, 베버의 역사사회학 연구를 중점으로 하셨던 선생님께서 이 원고를 『‘탈주술화’ 과정과 근대』라는 제목의 선집으로 묶여 출간하셨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베버는 신이 죽고, 그 신들이 무덤에서 기어 나와 서로 투쟁하는 시대의 난망함과 서구 근대의 이중적 성격, 즉 ‘가치·의미해방’과 ‘새로운 예속’이라는 역설적 상황들을 그려낸다. 이 책 『직업으로서의 학문』은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주는 메시지이자, 근대인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하나의 단편이다.
니체와 베버의 관계에 관해서는 『막스 베버 사회학』, 전성우, 나남출판, 2013, 44p 이하 또는 『막스 베버』, 김덕영, 도서출판 길, 2014, 629p 이하를 참고할 것. [본문으로]
이제 하나의 경전처럼 여겨지는 이 경구는 니체의 『즐거운 학문』, 125절에 있다. [본문으로]
학자의 외적조건에서 베버는 수공 장인(匠人)이 생산수단을 직접 소유하듯, 학문적 수공업자(학자)의 노동수단의 첫 째로 장서(藏書)를 언급하기도 한다. [본문으로]
『불평등한 어린 시절 -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불평등의 대물림(Unequal Childhoods: Class, Race, and Family Life)』(2003)의 원본 표지.
들어가면서
전통사회에서 사회의 재생산은 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귀족의 자식도 귀족이 되는 것은 사회적 합의를 거쳐 승인된 특정한 과정을 성취해서가 아니라 혈통에 의한 것이었으며 혈통을 통해 권위(이는 카리스마 또는 상징권력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를 얻을 수 있었다.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를 통해 발현된 근대사회에서는 단순히 혈통만으로 권위를 얻을 수 없게 되었고, 사회의 재생산은 근대적 교육제도를 통해 이루어졌다. 근대사회에서 권위를 얻기 위해서는 사회를 통해 합리적이라고 승인된 제도를 통해 특수한 능력들을 습득해야했다. 단순히 혈통이 아닌 능력에 따라 사회가 재생산되는 것은 근대사회가 가진 하나의 특징이다. 이것은 하나의 진보였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있었음에도 사회의 재생산은 여전히 신분제처럼 재생산된다는 문제의식을 갖은 학자들은 교육 불평등에 관한 연구를 진행해왔고, 지금 다룰 아네트 라루(Annette Lareau)의 『불평등한 어린 시절 -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불평등의 대물림(Unequal Childhoods: Class, Race, and Family Life)』도 근대사회에서의 사회적 재생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책이다.
아네트 라루(annette lareau, 1952-)
이 책의 저자 아네트 라루는 U.C. 버클리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한 학자이고, 메릴랜드대학교와 템플대학교 사회학 교수를 거쳐, 현재 펜실베니아대학교에서 사회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자는 2003년에 출간된 『불평등한 어린 시절』을 통해서 미국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2004년 미국사회학회에서 ‘윌리엄 J. 구드 가족사회학 최우수도서상’, ‘문화사회학 부문 최우수도서상’, ‘아동·청년기 부문 공로상’과 2003년 미국교육학회의 비평가상을 수상하고, 2004년 사회문제연구학회의 C. 라이트 밀스 상(C.Wright Mills Award) 최우수상 후보에도 올랐다고 한다.
책의 구성과 내용
이 책이 목표하는 바는 교육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회적 불평등의 재생산을 실증하는 것이다. 그를 위해 라루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재생산 이론을 모델로 미국사회에 적용시켜 질적 연구를 진행한다. 이 책 서론에서 저자가 겨냥하는 것은 바로 ‘아메리칸 드림’, 즉 내가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사회적 믿음이다. 아네트 라루는 아메리칸 드림의 신화를 비판하면서 부모의 지위가 자식의 지위로 대물림되는 사회현상을 증명하고자 한다.
먼저 라루는 계급(class)과 인종(race) 변수를 중심으로 표본을 범주화하는데, 계급은 ‘중산층’, '노동자 계급[각주:1]', ‘빈곤층’으로 계급을 범주화한다. 중산층 가정은 부모 중 한 명 이상이 관리직으로 재직 중이거나, 고급 교육과정을 이수해야 재직할 수 있는 전문직 종사자인 경우이다. 노동자 계급 가정은 부모 중 주요 관리직에 종사 중인 사람이 없고, 고급 교육 과정을 이수 받지 못한 가정, 그리고 하위 화이트칼라 노동자를 포함한 범주이다. 마지막으로 빈곤층 가정은 부모에게 안정적인 직업이 없고, 공공복지를 통해 생계를 이어가는 가정을 가리킨다. 여기에 인종변수로 ‘백인’과 ‘흑인’을 추가했고 혼혈의 경우 흑인으로 범주화 된다.[각주:2]
이 책에서는 실질적으로는 ‘중산층’과 ‘노동자·빈곤층’을 중심으로 범주화해서 각각 사회적 계급의 일상생활의 구성, 언어 사용(의 계급적 차이), 가족과 기관 사이의 상호작용이라는 세 가지 경로를 통해 계급적으로 어떻게 아이와 가족의 사회적 삶이 형성되는 지를 서술한다. 1부 사회적 계급의 일상생활 구성은 3장으로, 2부 언어 사용은 2장으로, 가정생활과 공공 기관은 4장으로 각각 구성되어 있고, 각 장마다 한 가정의 사례를 서술하고 있다.[각주:3]
라루는 계층을 ‘중산층’, ‘노동자 계층’, ‘빈곤층’으로 조작화하지만 연구에서 실질적으로는 노동자·빈곤계층을 묶어서 범주화시키고 이에 중산층을 구분해서 연구를 진행한다. 중산층의 교육관행을 ‘집중양육’으로, 노동자·빈곤계층의 교육관행을 ‘자연적 성장’으로 개념화한다. 집중양육은 중산층 교육관행의 특징으로 자녀의 여가생활 및 교육생활을 부모가 조직함으로써 자녀의 능력이 집중적으로 향상되도록 하는 교육의 방법이다. 이에 반해 노동자·빈곤계층은 아이의 생존에 직접적으로 관여되는 일 외에는 아이의 여가나 교육생활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방임하는데, 라루는 이를 ‘자연적 성장’으로 표현한다.
아동 양육 방식
집중양육 방식
자연적 성장을 통한 성취
주요 특징
자녀의 재능과 의견 및 능력을 평가하고 지원하려는 부모의 능동적인 노력
자녀의 성장에 관심을 갖고 노력을 기울임
일과구성
아이들이 어른의 관리를 받으며 다양한 활동에 참여
아이들이 주도하는 ‘놀이’, 주로 가족들 간에 이루어짐
사용하는 언어
·설득/지시
·어른의 발언에 대한 아이들의 능동적 대응
·어른과 아이들 간의 장기적인 의견조율
·지시
·어른의 발언에 대한 질문이나 대응을 거의 하지 않음
·어른의 지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임
학교교육 참여
·아이의 상활을 대변한 비평과 개입
·이러한 역할을 아동에게 위임하기도 함
·의존적 태도
·불만과 무기력
·가정과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아동 양육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갈등
결론
아동의 권리의식 향상
제약에 대한 의식 발달
<표 1> 아동 양육의 유형 분류(라루, 2012: 66)
라루는 집중양육을 하는 중산층과 자연적 성장을 하는 노동자·빈곤계층의 특성이 어떻게 다른 사회적 삶을 구성하고, 또 부모의 지위를 대물림하는 지를 경험적 연구를 통해 보여준다. 중산층과 노동자·빈곤계층이 이런 특징을 가지고 각각 사회에서 상호작용하는 내용을 ‘일상생활의 구성’, ‘언어 사용’, ‘가족과 기관 사이의 상호작용’이라는 주제로 파악한다.
먼저 ‘일상생활의 구성’에서는 중산층 백인 아이, 노동자 계층 흑인 아이, 그리고 빈곤층 백인 아이를 사례로 계층에 따라 이들의 일상생활이 어떻게 다르게 구성되는 지를 다룬다. 중산층 백인 아이는 빈틈없이 계획된 일정 속에서 일상생활을 보냈다. 이들의 일상생활을 재능개발을 목적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다양하게 조직된 사회경험을 통해서 평가받는 방식에 익숙해지고, 부모들 또한 독서하는 문화자본을 아이에게 전이시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독서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에 반해 노동자·빈곤층 가정의 아이들에게는 최소한의 일과가 주어지고 나머지는 모두 아이들이 스스로 만들어나가게 된다. 특히 노동자·빈곤층의 부모들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자녀들의 교육에 신경을 쓸 수 없었으며 따라서 아이들은 여가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했고, 이들은 일정 수준의 문화자본을 체득하는 기회를 갖기도 어렵다.
다음으로 ‘언어 사용’에서는 일상생활 구성의 차이가 언어 사용과 어떤 연관을 맺는지를 설명하면서 중산층 흑인 아이, 빈곤층 흑인 아이의 사례를 통해 계층별로 어떻게 다른 언어능력, 언어 사용의 차이가 나타나는 지를 나타낸다. 중산층과 노동자·빈곤계층의 언어 사용의 가장 큰 차이점은 토론의 존재여부에 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자연스러운 토론이 이루어지는 중산층 가정의 아이는 이를 통해서 어휘구사, 추론, 협상 등의 가치, 즉 일종의 언어자본을 체화시킨다. 라루는 이것을 계층 간 차이를 만들어내는 핵심적인 요소로 평가한다. 반면에 노동자·빈곤계층의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토론보다는 부모의 일방적인 명령이 대화의 주를 이루고 또 이들은 중산층 가정에서는 볼 수 없는 체벌을 통해 아이들을 양육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자란 아이들은 중산층 아이들이 습득한 언어자본을 가질 수 없었고, 비교적 수동적인 태도와 어른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 어른에 대한 공포로 인해 노동자·빈곤층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예의바른 모습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가족과 기관 사이의 상호작용’에서는 아이의 교육에 관여하고 관리하는 부모의 방식이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데, 중산층 흑인 아이와 중산층 백인 아이, 노동자 계층의 백인 아이 둘을 사례로 보여준다. 우선 중산층 부모들은 아이가 다니는 학교와 관계를 맺는 데에 스스럼이 없었으며 학업성취 향상을 위해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들은 가정에서 자녀의 교육을 지도하는 부분에서도 능숙했다. 또 중산층 부모들은 선생님과 관계를 맺을 때도 대등하거나 우월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부모가 외부기관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통해 아이들은 관계형성의 방법을 습득하게 된다. 반면에 노동자·빈곤계층의 부모는 자신이 학교와 관계를 맺으며 혹시 ‘잘못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부모들은 학교나 교직원들이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지는 않을까, 자신들의 교육관행(방임)을 신고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자녀들은 부모가 학교에서 관계 맺는 방식을 보고 또 그런 양육방식이 잘못됐다는 규정을 받기도 하면서 상징폭력을 경험하게 된다.
나오면서
이 책의 목적은 서론에서도 언급했듯, 개인의 능력이 순전히 개인'만'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을 실증하는 데에 있다. 이 책에 이론모델로 삼고 있는 부르디외의 『재생산』 역시 사회적으로 세습되고 상속된 개인의 학업능력이 순전한 개인의 능력으로 신성화(자연화)되는 것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다양한 사회적 삶의 공간, 개인이 위치해 있는 공간들의 차이와 양육방식의 차이, 그리고 그에 의한 격차를 살펴보면 라루는 책의 목적을 어느정도 달성한 듯하다. 또한 라루는 책의 3부 12장 '사회계층의 힘과 한계'에서 이런 교육 불평등 문제에 관한 나름의 해답을 내놓고 있고, 중간중간 들어있는 서술들에서도 저자가 연구대상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떻게 예민하게 다루고 있는지도 알 수 있다. 이 책은 충분히 흥미롭고, 훌륭한 책인 것 같다.
이제 문제는 한국 사회학자들의 손에 달려있는 것 같다. 피에르 부르디외, 아네트 라루의 선행연구를 가지고 교육 불평등에 관한 연구를 어떻게 성찰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책은 그에 대한 여러가지 참조점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교육 불평등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라루의 연구에는 없는 성별변수도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라루는 노동자, 하층민 가정의 아이들이 토론문화에 익숙하지 않고, 그렇기에 어른에게 공손하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한국적 상황에서는 오히려 토론을 시도하는 것보다 어른에게 공손함이 학교의 교육과정에서 이점으로 작용할 여지도 존재한다.
이외에도 라루는 부록으로 현장연구에서 겪을 수 있는 시행착오에 대해 상세하게 적어둔 방법론에 관한 내용, 피에르 부르디외의 작업에 관한 내용, 그리고 연구에 사용된 자료들을 소개하는 내용도 책에 첨부해뒀다. 굉당히 친절하고 도움되는 부록이다. 그리고 번역의 가독성도 좋은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문장이 부자연스럽거나,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크게 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이런 주제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사회학에 관한 사전지식 없이 무난하게 읽을 수 있는 좋은 책이다.
반면에 아쉬움들도 존재하는데, 먼저는 책 구성에 관한 문제이다. 책 편집에서 의도적으로 가독성을 위해 각주들을 뒤에 배치한 것 같았는데, 이 부분들이 꽤 아쉽게 느껴졌다. 다음으로는 번역어에 관한 아쉬움이다. 전문번역가의 번역이라서 책의 가독성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훌륭하지만, 아쉽게도 몇몇 사회학적 개념어들의 번역에서 아쉬움을 느꼈다. 예를 들어 책에서는 계급·계층이 혼용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계급과 계층은 사회학적으로 분명 다른 개념어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설명을 해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그래서 번거롭더라도 원본을 참고해야할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부르디외 사회학의 핵심개념어인, 하비투스(habitus), 장(場, champ, field)를 각각 '습관', '현장'으로 옮겼는데 이 부분은 매우 아쉽다. 물론 라루가 일반독자들을 위해 사회학적 용어 사용을 지양했다고 해서 저렇게 번역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하비투스는 '사회적 습관'으로 옮긴 뒤 각주로 '집단·계급적으로 형성되는 사회적 습관'정도로 설명해주면 되지 않았을까, 장은 '사회적 삶의 공간', 또는 '사회 공간'정도로 옮겼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래도 출판기획 자체가 일반독자를 염두에 둬서 이렇게 번역된 것 같은데, 이런 식으로 번역했다면 일반독자들의 보다 더 깊은 이해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다. 모쪼록 이 책은 주변에 교육에 종사하고 있는 지인들에게 추천하고, 교육 불평등에 관심있는 지인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좋은 책이다.
부르디외는 하비투스, 자본, 그리고 장과 같은 기본개념들을 도구로 사용하여 프랑스 사회의 교육에 대한 연구를 이어나갔다. 이 때문에 부르디외는 미국에 수용될 때 교육학자로 소개되기도 했다. 부르디외는 1964년, 학업성취도의 격차를 낳는 주요 원인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자본의 결과임을 『상속자들(Les héritiers)』을 통해 논증한다. 이어서 1970년, 부르디외는 1960년대에 시행했던 교육사회학 연구들을 종합해 『재생산(La reproduction)』이라는 저작을 출간한다. 재생산에서 부르디외는 상징폭력의 일반이론을 구축하면서 교육을 하나의 상징폭력으로 규정하며 교육이 사회질서의 유지에 기능하는 점을 지적한다. 부르디외의 교육과 지식사회, 엘리트주의 등에 관한 연구는 끊임없이 그의 작업 속에 이어졌고, 내용은 조금씩 다르나 『국가귀족(La noblesse d’État)』과 같은 연구 역시 교육체계와 지식인 사회에 관한 연구를 담고 있다(이상길, 2018: 55-71).
교육에 관한 부르디외의 작업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작업은 『재생산』에 담겨있다. 부르디외의 재생산은 1997년 국제사회학회에서 진행된 설문조사에서 사회학자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사회학 도서 48위에 자리매김 했으며 단 권으로만 약 20,000회 이상 인용된 저작이기도 하다. 부르디외의 재생산 이론의 핵심을 두 가지로 파악할 수 있는데, 첫 째, 사회화 과정에서 상속받은 문화자본의 차이가 ‘학업성취의 격차’로 이어진다는 것이고, 둘 째, 교육과정을 통해 ‘불평등한 사회적 질서가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기존에 한국에서 수용된 재생산 이론 연구는 문화자본에 의한 ‘학업성취의 격차’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하지만 부르디외의 재생산 이론은 이러한 결과적 평등뿐만 아니라 그 격차를 통해 불평등한 사회질서가 정당화되는 과정을 중점적으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부르디외 재생산 이론이 가지는 두 가지 함의를 구분해서 설명할 것이다. 먼저 재생산 이론이 설명하는 교육 불평등에 대해 다루고, 이어서 교육과정 자체가 지닌 불평등의 정당화 과정에 대해 서술할 것이다.
1) 재생산 이론의 함의: 문화자본에 의한 학업성취의 격차
악셀 호네트(1986: 6-7, 55-57)에 의하면 인류학적 작업을 통해 전통사회에 가까운 부족사회들을 연구했던 부르디외는 한 사회에서 집합적으로 공유되는 관념적인, 상징적인 질서는 사회적 집단의 계급이익에 따른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부르디외는 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상징체계가 사회집단들의 투쟁 산물임을 주장한다. 이런 까닭에 어떤 한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지배적인 상징질서는 곧 투쟁에서 승리한 특정 집단의 상징체계인 것이며, 이는 이 자체로서 상징권력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이행은 부족집단이 상징권력을 두고 투쟁했던 시기와는 다르게 단순한 형태의 직접적인 상징투쟁이 아닌 문화적 지식의 습득과 보유에 관한 투쟁의 형태를 취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근대사회에서는 이러한 문화자본을 둘러싼 투쟁이 세련된 형태인 교육으로 나타나고, 교육기관을 통해 이 질서가 주입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부르디외에게 학교로 대표되는 교육체계는 사회적으로 중립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장소가 아니다. 학교에서는 오히려 특정한 (지배집단의) 문화의 전달되며, 그렇기 때문에 학교는 “문화적 신성화의 장소”, “문화적 전횡의 장소”, “문화적 전횡이 생산되는 장소”, 이에 따라 “기존질서가 재생산되는 장소”이다(앙사르, 1994: 203). 이에 따르면 학교는 지배집단의 상징적·문화적 질서가 이미 자리 잡은 장소이다. 다시 말해 교육의 장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사회공간이 아니라 이미 사회에 지배계급이 상징권력을 획득해 상징질서를 구축해놓은 공간인 것이다. 사회적 행위자는 각기 다른 계급의 하비투스를 체화하고, 자신이 온축(蘊蓄)한 다양한 형태의 자본을 가지고 교육의 장에 참여한다. 교육의 장에는 이미 지배계급을 중심으로 구축되어있는 사회질서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 장에 게임의 규칙에 적합한 지배계급의 하비투스를 체화하고 사회적 위치공간에서 그 계급에 적합한 자본을 가지고 장에 참여하는 행위자와 민중계급의 하비투스를 체화하고 그에 따른 자본을 가지고 장에 참여하는 행위자는 교육의 장에서 전혀 다른 수행성을 보일 것이고, 이는 ‘선별과 배제’로 이어진다.
부르디외(2003: 175-203)는 프랑스 교육체계에서 ‘시험’의 중요성과 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선별과 배제’에 대해 서술한다. 프랑스 교육체계 내에서 시험은 고등교육제도를 지배한다고 평가한다. 특히 부르디외가 설명하고 있는 프랑스 교육체계의 특징은 엘리트교육기관부터 실업학교까지의 위계가 명확하다는 점과 정성(定性)평가가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교육을 질적으로 평가하는 프랑스 교육은 평가자의 가치와 주관이 개입할 특성이 커지는데 이는 시험의 기준으로 작용한다. 이에 따라 시험응시자의 논구술·대면평가에서의 어조, 어투, 어휘구사력, 논술평가에서의 문체나 문장력 등의 언어능력은 물론이고 자세나 몸짓, 복장, 스타일 등도 평가에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부르디외가 관심을 가졌던 하나의 부분은 바로 계급 하비투스로 체화된 언어(의사소통)능력이었는데, 부르디외에게 언어능력은 계급 하비투스를 보여주는 각별한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계급의 하비투스 전체는 언어적 하비투스를 통해 드러난다고 말하기도 한다(부르디외, 2014: 99). 따라서 중립적인 것 같은 시험에서도 계급의 체화된 자본은 평가에 반영될 수밖에 없으며, 지속적인 선별과정(시험)에서 민중계급 출신이 좋은 성적을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부르디외는 이야기한다.
이런 선별과정을 거쳐 학업성취, 그리고 학위를 소유하게 된 사람들은 더 큰 특권을 부여받는다. 이들이 가진 능력은 지극히 사회적이고 상속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생득(生得)적인 것으로 자연화(본성화)된다(부르디외, 2006: 135). 학교는 교육과정의 승리자들을 천부적인, 타고난 ‘재능’이라는 이데올로기로 포장하고 사회질서의 재생산을 정당화시킨다(부르디외, 2003: 239).
2) 재생산 이론의 함의: 불평등의 정당화 과정으로서의 교육과정
“상징폭력을 행사하는 권력은 모두 자신의 힘의 토대인 권력관계를 은폐한 채 의미를 부여하고, 거기에 다시 정당성을 부여하는 권력이다. 이 권력은 이를 통해서 권력관계에 자신의 고유한 힘인 상징권력을 추가한다.”(부르디외, 2003: 20)
부르디외 『재생산』에서 가정 처음에 나오는 명제는 상징폭력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 사회의 불평등한 지배질서가 어떻게 유지되는지에 중점을 두었던 부르디외의 사회학에서 상징폭력은 핵심적인 개념이다. 부르디외는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에서 지배관계를 설명했던 이데올로기(ideologie)를 ‘상징적 지배(symbolic domination)’, ‘상징권력(symbolic power)’, 또는 ‘상징폭력(symbolic violence)’으로 대체하고자 했다(Bourdieu‧Eagleton, 1994: 265).
부르디외의 상징지배에 관한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베버의 사회학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베버는 종교가 사회의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기능에 대해 설명하는데, 사회의 불평등한 복(자본)의 분배는 단순히 복, 그 자체로서의 효과를 가질 수 없고 그 불평등한 분배가 정당하다는 승인을 필요로 했다. 이에 따라서 전능하고 정의로운 신과 세계의 비참이라는 모순을 설명했던 것이 종교에서의 신정론(神正論)[각주:1]의 역할이었다(베버, 2015a: 134). 신정론은 사회의 불평등을 해명하는 역할로 기능했던 것이다. 이런 베버의 아이디어를 차용해서 부르디외(Bourdieu, 2011: 57)는 “신정론은 언제나 사회신정론(社會神正論)이다”라고 서술하는데, 이는 세속화된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자의 성공과 그 결과의 차이를 정당화하는 기제를 설명한 것이다. 직접적으로 부르디외(2003: 239-240)는 교육과정에서 일어나는 사회신정론의 효과, 즉 불평등의 정당화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렇듯 부르디외의 상징지배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적 불평등의 정당화 기능이다. 앞선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 지배관계는 지배관계 자체로서 기능할 수 없고, 그것을 피지배계급이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부르디외(2013: 28)는 상징자본[각주:2]을 베버의 카리스마의 변형된 형태로 이해했다. 베버에게 카리스마란 정당한 지배, 즉 피지배자에게도 정당성을 획득한 지배의 신성한 근거이다(베버, 2015b: 413-414). 상징권력은 곧 상대에게서 인정(정당화)받을 수 있는 권력이며, 지배계급의 문화적 자의성(un arbitraire culturel)과 폭력성을 오인(méconnaissance)[각주:3]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이다. 상징폭력은 오인으로 인해 피지배계급이 사회질서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될 때 발생하는 비가시적 폭력을 의미한다(이상길, 2015: 496-497).
부르디외(2003)는 교육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교육행위’ 자체가 문화적 자의성을 주입하는 과정이며 이는 곧 상징폭력이라고 규정한다. 교육행위는 ‘교육적 권위’를 부여받은 것으로서 오인을 생산해 교육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이는 의사소통을 통해 전달된다. ‘교육작업’은 교육행위가 중단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지배관계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하비투스를 형성할 만큼 오랜 시간 지속되어야 하는 주입작업이다. ‘교육체계’는 문화적 자의성을 재생산(문화재생산)하면서 동시에, 사회계급을 재생산(사회재생산)한다. ‘학교의 권위’는 교육적 권위를 제도화시킨 형태로서 교육의 장에 있는 행위자들에게 끊임없이 권위를 위임받고, 교육제도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제도 자체를 완성도 높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참고문헌
강창동, “학교교육의 상징적 폭력 작용에 관한 이론적 고찰”, 『한국교육학연구』, 15(2), 2009.
막스 베버, 『종교사회학 선집』, 전성우 옮김, 나남, 2015a.
_________, 『경제와 사회·1』, 박성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5b.
이상길, “부르디외 사회학의 주요 개념”, 피에르 부르디외·로익 바캉, 『성찰적 사회학으로의 초대』, 그린비, 2015.
______, 『아틀라스의 발』, 문학과지성사, 2018.
피에르 부르디외, 『재생산』, 이상호 옮김, 동문선, 2003.
_______________,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上』, 최종철 옮김, 새물결, 2006.
Bourdieu, Pierre. “Genese und Struktur des religiösen Feldes”, in Pierre Bourdieu Religion Schriften zur Kultursoziologie 5. Suhrkamp, 2011.
Bourdieu, Pierre ‧ Eagleton, Terry. “Doxa and Common Life: An interview”, in Savoj Zizek (ed.), Mapping Ideology, London: Verso, 1994.
Honneth, Axel. “The Fragmented World of Symbolic Forms: Reflection on Pierre Bourdieu’s Sociology of Culture”, Theory, Culture and Society, vol. 3, no. 3, 1986.
“‘신’(神, 데오스)과 ‘의’(義, 디케)를 뜻하는 두 헬라어의 합성어로서,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고통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을 변호하려는 시도. 즉, 하나님이 존재하시는데 세상이 이처럼 모순투성이인지, 왜 계속 죄악이 맹위를 떨치는지, 그렇다면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 맞는지 등의 문제를 다루는 신학적 입장”(출처 : 교회용어사전, 생명의말씀사, 2013) [본문으로]
상징자본이란 어떤 유형의 자본일지라도 그 자본을 통해 사회적 인정을 얻게 되면 기능할 수 있는 자본을 의미한다(이상길, 2015: 518). 존경·명예 등은 상징자본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상징자본은 사회적 행위자에게 위임된 하나의 인정으로서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자본을 소유한 사회적 행위자는 상징자본의 소유자가 될 수도 있으며, 자본은 단순히 물질적인 영향력뿐만 아니라 상징적인 효과를 만들기도 한다. [본문으로]
‘오인’이란 “신비화된 인식으로서의 인정”(이상길, 2015: 510)을 가리키는 말로 역사적이고 구성적인 현실을 자연화하고 신비화하고 절대화해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본문으로]
맑스 탄생 200주년인 올해 개인적으로 꼭 사고 싶었던 두 권의 책을 감사하게도 역자이신 배세진 선생님께 선물 받았다. 배세진 선생님께서는 한국에서부터 일관되게 맑스주의를 전공하시고, 지금도 파리7대학 박사과정에서 푸코, 알튀세르, 발리바르에 관한 연구를 하고 계시다.
맑스만큼 유명한 사상가는 없을 것이다. 다만 맑스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로 얼룩진 사상가도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들이 더 의미있고 값지게 느껴진다.
우선 <마르크스주의 100단어>는 맑스주의에서 중요한 100가지의 단어를 소개하고 입문하게끔 하는 목적을 가진 책이다. 맑스주의를 공부하시는 분들께는 부끄러운 정도지만 나도 맑스주의를 공부하면서 몇몇 사전들을 참고하곤 했다. 오늘 받아서 전체를 보지는 못했지만 관심있는 몇몇 표제어들을 보니 설명이 핵심에 정확히 다가가면서도 명료하고 친절하다. 다른 맑스사전들에 비해 이 책이 가진 선명한 장점이다. 맑스에 관심이 있었지만 선뜻 다가가지 못한 분들께, 또 맑스주의를 조금 더 정확하게 정리하고 싶은 분들께는 더할 나위없이 좋은 책 같다.
다음으로 <마르크스의 철학>은 넓은 의미로 맑스주의 전통에 있다고 볼 수 있는 사상가 에티엔 발리바르의 책이다. 이 책은 한국어판 부제인 "마르크스와 함께, 마르크스에 반해"에서도 알 수 있듯, 맑스의 사상의 정수를 다루면서도 맑스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재구성하고 있다. 200년 전 맑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맑스의 '현재성'을 끊임없이 복원하고자 하는, 맑스를 생산적으로 점유하는 책인 것이다. 책 내용과 관련된 발리바르의 네 편의 논문을 추가적으로 싣어 맑스주의에 관한 깊은 이해를 돕고 있고, 맑스, 알튀세르, 발리바르에 정통하신 진태원 선생님의 해제도 담고 있다.
역자 배세진 선생님께서는 '입문 총서'라는 이 책의 본래 의도에 알맞게 문장을 가독성있게 번역하신다고 했는데, 조금만 읽어봐도 문장이 유려하고 읽기 편하게 번역됐다는 걸 알 수 있다. 책의 면면들이나 '옮긴이 일러두기', '옮긴이 후기'를 읽어보면 책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신 흔적들이 보이는데 이 대목에서 선생님의 작업에 대한 애정과 전문가 의식을 느낄 수 있다.
1. 부르디외 사회학의 기본개념: 하비투스(habitus), 자본(capital), 그리고 장(champ, 場)
“요약하자면 부르디외의 일반적인 개념도식은 다음과 같다. 사회적 행위자가 가진 특정 자원(자본)은 특정한 사회적 게임(장)의 맥락에서 특정한 종류의 실천을 생산해내는 특징적 구조(하비투스)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상황은 견고하게 재생산되는데, 이는 자본, 하비투스, 장을 함께 연결하는 이 과정이 기존의 불평등한 자원의 분배를 정당화하는 것을 돕는 일상적인 이해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왜곡되기 때문이다. 부르디외는 이 개념들을 계층화, 재생산, 그리고 사회이동에 대한 설명을 발전시키기 위해 사용한다.”(Riley, 2017: 111-112)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다양한 철학적, 사회과학적 성과를 수용하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관점으로 구축된 하비투스는 부르디외 사회학 이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다(Loïc Wacquant, 2016). 사회적 행위자의 실천을 설명하는 하비투스는 ‘체화(體化)된 사회적 습관’으로 이해할 수 있다.[각주:2]
“아비튀스는 일종의 버릇이다. 버릇은 실천을 낳는다. 그런데 그 버릇은 사회적이다. 사회적이라는 것은 집단적이라는 것이며, 계급적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성적 주체가 아니며, 나의 행위 역시 합리적 선택이 아니다. 나라는 존재와 나의 행위는 오랜 역사 속에서 형성된 버릇에서 비롯되었다. 이 사회적 버릇은 개인으로서 나와 계급을, 행위와 구조를 매개한다.”(김동일, 2016: 1)
앞선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 하비투스는 일종의 습관이다. 부르디외는 이 습관을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사회적이고, 계급적이고, 집단적이고, 역사적인’ 개념으로 구성한다. 개인은 이러한 계급적이고, 사회적인 습관인 하비투스를 체화한 존재이다. 이 습관을 기초로 하여 개인의 사회적 실천이 발생한다. 부르디외의 관점에서 개인의 사회적 실천은 자신의 이성과 주체적인 판단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계급과 집단에서 체화된 사회적 습관, 즉 집단적·계급적 무의식으로부터 발생한다. 하비투스는 특정한 의식적인 목표지향을 하지 않으면서도, 목표를 위한 실천을 만들어내, 조직하는 원칙이다(Bourdieu, 1990a: 53). 하비투스는 무의식적인 행위틀(frame)이며, 선반성적인(pre-reflective) 실천지향이다(정선기, 1999a: 57).[각주:3]
더불어 하비투스는 기존 사회과학에서 대립하고 있던 미시적 행위(실천)와 거시적 구조 사이에서 양자를 매개하는 역할로 기능한다. 하비투스는 사회적 실천과 그 사회적 실천의 지각(知覺)을 구성하는 ‘구조화하는 구조’인 동시에 구조, 그리고 체계들의 구조 기능을 담당하는 ‘구조화된 구조’이기도 하다(Bourdieu, 1990a: 53; 부르디외, 2006: 312). ‘구조화된 구조’로서 하비투스는 사회와 행위자에게 구조화된(체화된) 구조이다. 사회의 거시적이고 객관적인 구조는 하비투스는 생산하는 사회적 조건인 동시에 행위자에 내면화되어 구조화된 구조로 작용한다. 또한 하비투스는 ‘구조화하는 구조’이기도 하다. 하비투스를 통해 만들어진 사회적 행위자들의 실천들은 이전 사회적 구조의 산물이지만 개인과 집단의 사회적 실천을 다시 재생산(구조화)하는 기능을 담당하기도 한다. 새로운 상황과 마주한 사회적 행위자들의 사회적 실천은 지속적으로 실천을 갱신하며 새로운 사회적 실천을 통해 새롭게 변화된다(정선기, 1999a: 57). 하비투스는 다양하고 새로운 사회적 상황을 접해도 일정한 수준의 사회적 실천을 조직하는 일종의 사회적 함수(function)와 같은 개념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요컨대 하비투스는 체화된 성향, 인지, 판단 및 행위의 지속적이고 전이가 가능한 체계, 도식(schème), 또는 틀(frame)이다. 유의할 것 중 하나는 행위자가 하비투스의 꼭두각시가 아니라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하비투스가 열린 성향의 체계임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하비투스는 행위자의 육체에 잠재하다가, 사회적 실천이 발생할 때 그때 그때 현재화되며 매번 새롭게 갱신되는 개념이다(부르디외·샤르티에, 2019: 99-101).
오카모토 유이치로(2016)에 의하면, 부르디외는 현대사회를 ‘계급 분화된 사회’로 파악했다. 부르디외에게 사회적 행위자는 구조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전략적인 실천을 만들어내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계급 하비투스는 개인의 사회적 실천에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
“동질적인 생활조선 속에 위치한 행위자들 전체로 나타나는 이 계급(classe objective)은 동질적인 조건화를 부과하고 유사한 실천을 생성해낼 수 있는 동질적인 성향체계를 생산해내며, 또 일련의 공통 특성 즉 흔히 (재화나 권력의 소유처럼) 법적으로 보장되거나 또는 계급의 아비튀스(특히 분류도식 체계)처럼 육화(肉化)된 객체화된 특성을 소유한다.”(부르디외, 2006: 197)
“(계급은) 유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유사한 조건에 위치하고 있으며, 유사한 유형의 상황 속에 종속되어 있어서, 유사한 성향과 이해 관심을 가지고, 유사한 실천을 생산하며, 유사한 자세를 취하는 온갖 기회를 갖는, 행위자들의 집합이다.”(Bourdieu, 2001; 김동일, 2016: 8에서 재인용)
부르디외의 계급론이 독특한 지점은 부르디외는 단순히 계급은 객관적인 지표로만 설명하는 것뿐만 아니라 계급이 공유하는 동일한 행위틀과 계급 안에서 발생하는 동일한 사회적 실천으로 계급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앞서 구조와 행위를 매개하는 구조로서 하비투스를 설명했듯, 거시적 구조의 수준에서 존재하는 계급구조는 계급 하비투스를 통해 행위자에게 내화(內化)되어, 사회적 행위자의 사회적 실천·행위를 조직하고 발생시킨다. 계급으로 묶인 각기 다른 개인들은 집단적으로 투영된 계급 하비투스를 매개로 “일련의 공통 특성”, “동질적인 성향체계”를 가지고 계급적 실천을 사회세계에 만들어낸다. 개인의 사회적 실천은 계급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며 지극히 계급적인 것이다(부르디외, 2006: 21). 계급별로 만들어지는 상이한 실천양식, 사회적(문화적) 실천을 중심으로 연구는 『구별짓기(La distinction)』에 나타난다. 예를 들어 상류층이 요트(yacht)같은 여가생활을 선호하는 것이나 중산층이 축구를 좋아하는 것은 그 계층이 가진 경제적·물질적 조건에 의한 계급적 무의식이기도 하다.
하비투스를 요약하자면, 하비투스는 사회적 행위자의 사회적 실천·행위는 집단적이고 계급적이고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적 습관에 제약과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구체적으로 현대사회는 계급 분화된 사회로 파악하는 부르디외에게 하비투스는 결국 사회적 행위자의 사회적 실천·행위에는 구조적 제약이 있음을 드러내준다. 더불어서 이 구조적 제약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는 바로 계급구조로, 각기 다른 계급마다 상이한 사회적 실천을 발생시킨다.
2) 자본(capital)
부르디외에게 자본은 “희소재 및 그와 관련된 이윤을 전유할 수 있는 능력”(이상길, 2015: 518)이며, “물질의 형태로든 또는 내화되고 체화된 형태로든 모든 축적된 노동”(정선기, 1999a: 63)을 포함하는 것으로 개념화된다. 부르디외의 자본 개념은 스스로 증식한다는 측면에서 마르크스적인 자본의 의미를 가지고(김동일, 2016: 48), 베버적인 의미의 자산(asset)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이상길, 2015: 518). 개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본을 가지고 사회공간에서 사회적 실천과 상징 투쟁에 참여한다. 즉 자본을 통해 사회적 행위자들은 사회공간 안에서의 희소가치를 두고 투쟁하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자본 개념을 경제적 영역에만 국한시키지 않았으며 그는 자본의 개념을 보다 더 넓은 사회적 영역에 적용시켰다(보네위츠, 2000: 64; 김홍중, 2017: 6). 이를 통해 부르디외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자본론을 전개 시킨다. 1983년, “경제자본, 문화자본, 사회(관계)자본(Ökonomisches Kapital, kulturelles Kapital, soziales Kapital)”[각주:4]이라는 논문을 통해서 자본의 세 가지 기초 유형에 대해 제시한다.
“자본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초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경제자본(eoconomic capital)은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화폐로 태환(兌換)가능하며, 재산권과 같은 형태로 제도화될 수 있다. 문화자본(cultural capital)은 특정한 조건에서 경제자본으로 태환가능하며, 교육적 자격과 같은 형태로 제도화될 수 있다. 사회(관계)자본(social capital)은 사회적 의무(연줄)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정한 조건에서 경제자본으로 태환가능하며, 귀족의 칭호로 제도화될 수 있다.”(Bourdieu, 1986: 47)
경제자본은 아마도 기존에 통용되던 자본의 의미와 가장 밀접한 관련을 가진 의미일 것이다. 경제자본은 ‘화폐’라는 형태로 객관화된, 또 외부에 축적되는 자본으로서, 여러 생산 요소들(부동산·노동·공장), 수입, 물질적 재화와 같은 경제적 재화를 포괄한 총체로 구성된 자본이다(김동일, 2016: 29; 보네위츠, 2000: 64-65).
사회(관계)자본은 “상호간의 친분 또는 인정을 통해 제도화된 관계나 지속적으로 유지가능한 사회적 관계망에 속하게 됨으로써 소유할 수 있는 실질적이거나 잠재적인 자원의 집합"(Bourdieu, 1986: 51)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것은 한국적 맥락에서 ‘인맥’과 비슷한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한 개인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는 부르디외의 자본론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자본이다. 부르디외에 의하면 문화자본이란 세 가지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Bourdieu, 1986: 48-51).
첫째, 문화자본은 ‘체화된(embodied) 상태’로 나타날 수 있는데, 체화된 문화자본은 경제자본이 외부에 축적된 자원인 점과는 다르게 소유에서 존재로 전이된 자본을 가리킨다. 체화된 문화자본은 사회화 과정에서 내화되며, 신체와 결합된 성향으로 체화된 개인의 능력이다. 이를 통해 개인은 취향과 교육의 정도, 몸짓 등의 다양한 모습을 보일 수 있다.
둘째, 문화자본은 ‘객관화된(objectified) 상태’로 나타난다. 객관화된 상태의 문화자본은 문화적 생산물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물질적인 문화적 재화를, 예를 들면 회화·문학작품·도서·기념물 같은, 의미한다. 이는 경제자본과 같이 개인의 신체 외부에 하나의 대상물로서 존재하며 교환하거나 상속가능한 문화자본이다.
셋째, 문화자본은 ‘제도화된(institutionalized) 상태’의 문화자본은 특정한 문화적 능력을 제도적으로 증명한 학문적 자격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국가공인 자격증이나 학위 같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제도화된 상태의 문화자본은 학위와 같은 학력자본을 제도화하여 이 자본이 가진 경제적 가치를 유지시킨다.
구분
문화자본
유형
체화된
객체화된
제도화된
토대
인지: 역량 미학: 취향
지식
교육
양식
문화선호
문화상품
문화제도
속성
육체적
문화상품의 양도성
자격증
과정
내면화 사회화
대상화 생산
제도화 재생산
유연성
위임불가능
접근의 개방/폐쇄
경제자본을 보장하는 자격증
소멸위험성
습득한 자본의 구식화
·
인플레이션
가치척도
특징
문화적 정통성
부족성
<표 1> 문화자본의 유형(한스-페터 뮬러, 미출간)
앞서 다룬 자본과 함께 부르디외의 자본론에서 중요한 자본으로는 상징자본(symbolic capital)이 있다. 상징자본이란 어떤 유형의 자본일지라도 그 자본을 통해 사회적 인정을 얻게 되면 기능할 수 있는 자본을 의미한다(이상길, 2015: 518). 예를 들어 경제자본을 축적한 거부(巨富), 문화자본이 많은 예술인, 사회(관계)자본을 통해 다양한 유명인들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유명인 등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존경·명예 등은 상징자본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상징자본은 사회적 행위자에게 위임된 하나의 인정으로서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자본을 소유한 사회적 행위자는 상징자본의 소유자가 될 수도 있으며, 자본은 단순히 물질적인 영향력뿐만 아니라 상징적인 효과를 만들기도 한다.
자본형태
경제자본
사회(관계)자본
문화자본
상징자본
토대
화폐
관계
지식
자본의 사회적 인지: 특권
객체화
자본
연결망
문화상품·지식
제도화
소유권
·개인적 속성으로 귀족·관료 ·집단으로서 신분·직업
개인적 속성으로 학위
체화
·
·
교육·취향
전이성
높음
낮음(불안정)
중간(교육 및 직종, 자본의 크기에 따라 다름)
소멸위험
사회변동(전쟁·금융위기 등)
·배은망덕 ·불균형적 호혜 ·기만
·교육팽창 ·지식의 구식화
손실범주
·인플레이션 ·박탈
·관계 ·지위
·하비투스의 구식화
<표 2> 자본형태의 논리: 현상형태와 재생산 방식(한스-페터 뮬러, 미출간)
이외에도 부르디외의 자본론이 가진 특성이 두 가지 존재한다. 먼저는 자본의 태환(conversion)에 관한 것이다. 앞서 본 바와 같이 부르디외에 있어 다양한 자본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연관되며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자본의 총량을 증식한다(김동일, 2016: 52).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제도화된 문화자본으로서의 학위는 문화자본의 경제자본으로의 태환을 공증(公證)하는 역할로 작용한다. 또한 사회(관계)자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자본들 또한 자본의 태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부르디외 자본론이 갖는 특성은 자본 개념의 유연성에 있다. 김홍중(2017: 8)에 의하면 부르디외의 자본 개념은 특정한 사회공간에서 특유의 자본의 형식이 어떤 효과를 가지고 구성되었는지에 따라 새로이 적용 가능한 개념으로, 부르디외는 “문학자본”, “과학자본”, “법-경제적 자본”, “정치자본”, “인격자본”, “명망자본”, “신체자본”, “윤리적 자본”, “지적 자본” 등 자본을 다양한 사회적 맥락에서 적용시켜 개념을 구성했고, 다른 연구자들 또한 “매력자본”, “젠더자본”, “정체성 자본”, “감정자본” 등으로 부르디외의 자본을 다양한 맥락에서 구성하여 사용했다.
3) 사회공간과 장(champ, 場)
부르디외는 사회를 3차원의 “복합 구조(composition structure)”로 파악하고자 했다.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이 수직적인 차원에서 계급적 구성으로 사회공간을 개념화했다면 부르디외는 여기에 문화적 차원을 더하여 사회공간을 다차원적으로 확장시킨다. 이를 통해 사회공간은 경제자본의 크기로 수직적 구조를 이루고 동시에 문화자본의 양에 따라 수평적인 구조로도 위치하게 된다(Honneth, 1986: 9). 즉 부르디외는 자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직업집단의 투쟁을 수직적인 차원에서 구성하고, 동시에 사회적 장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사회의 수평적 분화까지 설명한다(정선기, 2011: 143).
부르디외(2006: 219이하)는 사회적 행위자들을 사회공간 안에 분포시킨다. 이상길(2018: 201)은 부르디외의 이론에서 사회공간을 구성하는 세 가지 축에 대해 설명한다. 부르디외의 사회공간을 구축하는 첫 번째 축은 행위자들이 소유한 자본의 총량에 의해 위치된다. 두 번째 축은 전체자본에서 자신들이 소유한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의 상대적인 비중에 따라 사회적 위치가 각기 다르게 분포하게 된다. 세 번째 축은 행위자들의 사회적 궤적에 따라 결정되는데, 이는 행위자들이 소유한 자본의 총량과 구조가 겪은 통시적 변화에 의해 정의된다. 이 세 가지 좌표축을 중심으로 행위자들의 사회적 위치공간이 구성된다.
결국 부르디외에게 사회공간은 다양한 형태의 자본들로 구조화된 공간이며, 동시에 하비투스의 의해 구성된 공간이다(부르디외, 2006: 311). 사회공간에서 사회적 행위자들이 위치한 자리는 그들이 스스로 소유하고 있는 자본의 총량과 구조에 의해 종속되어있다(보네위츠, 2000: 64-65). 부르디외에게 사회란 3차원으로 이루어진 복합구조의 공간이었고, 장은 이런 사회공간에서 분화된 하위공간이자 개인들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회적 실천이 일어나는 공간이다.
(2) 장의 기원
앞서서 다룬 하비투스, 자본과 마찬가지로 장 이론은 부르디외 사회학에서의 핵심개념이다(부르디외, 2005: 8). 근대사회와 함께 탄생한 사회학은 ‘분화’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졌고, 에밀 뒤르켐의 『사회 분업론』같은 저작 역시 근대사회의 분화에 대한 하나의 연구를 담고 있다. 부르디외의 장 개념 역시 분화된 근대사회의 구별된 사회공간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장이란 앞서 살펴본 사회공간이라는 하나의 대우주 속에 상대적으로 자율성을 가진 공간적으로 분화된 소우주를 가리킨다(부르디외, 2002: 20).
부르디외의 장 개념은 고전 사회학자 베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부르디외는 직접적으로 예술사회학에 대한 연구와 베버의 『경제와 사회』의 종교사회학 부분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이야기한다(Bourdieu, 1990b: 22). 먼저 부르디외는 베버의 종교분석틀을 장에 적용시킨다. ‘장’은 베버가 종교를 분석할 때 사용했던 분석틀인, 공급·수요·자본·이익·경쟁·독점 등의 경제학적 개념들을 사회의 하위공간으로 확장시킨 개념이다(현택수, 2010: 278; 이상길, 2018: 229). 다음으로 부르디외는 베버의 사회분화 양식인 다양한 영역에서의 ‘가치의 제도화’ 테제를 차용한다. 베버는 근대사회의 이행 과정을 연구하면서 점진적으로 종교 영역이 다양한 가치의 영역으로 제도화되는 현상에 주목했다. 각각의 가치영역은 독자적인 가치이념(객관적 의미체계)를 기반으로 발전해 일정한 분화 수준에서 지식인 집단의 출현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근대사회는 분화되었고, 가치가 제도화된 영역들은 독립적인 가치체계를 구축하며 발전한다(정선기, 2011: 143).
(3) 장의 일반적 속성과 종합
부르디외(2004: 125)는 복수의 장의 가지고 있는 일반법칙이 존재한다고 서술한다. 이상길(2002: 189-190)에 의하면 근대사회의 분화된 사회적 소우주를 가리키는 장 개념은 다섯 가지의 일반적인 속성들을 공유한다.
첫째, 장은 사회공간의 소우주들로서 사회공간은 ‘예술장’, ‘정치장’, ‘경제장’, ‘학문장’ 등 위계적으로 구성된 장에 의해서 구조화된다. 이 장들은 고유한 내적 논리와 ‘구조적 동형성’을 가지며 서로에 대해 ‘상대적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
둘째, 장은 위치 공간으로서 객관적인 위치들 사이에 구조화된 공간이다. 위치는 장 내부에 불평등하게 분포된 다양한 자본의 양과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 이 구조는 장 내부의 개인, 기관들 사이의 세력관계에 의해 위치된다.
셋째, 장은 투쟁공간으로서 각각의 장은 특수한 내기물(stakes)과 게임의 규칙을 가진다. 각각 장의 고유한 내기물과 게임의 규칙은 다른 장의 것들로 환원불가능하다. 장은 장 고유의 자본의 정당한 독점 또는 자본의 재정의에 관한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사회적 행위자들의 투쟁의 공간이다. 이들은 서로 투쟁하더라도 장 내부에 있는 공통의 이해관계를 공유한 존재들이다.
넷째, 장에서는 하비투스·전략·일루지오(illusio)가 작동한다. ‘일루지오’란 장 내부에서 게임과 내기물의 신성한 가치를 향한 집단적 신념을 의미한다. 이는 게임의 조건이며 산물이다. 장 내부의 사회적 행위자들은 특정한 이해를 만들어내는 위치, 하비투스, 그리고 장의 역사 속에서 한 개인이 점유하고 있는 ‘사회적 궤적’에 의해 규정된다. 사회적 행위자들이 투쟁을 위해 사용하는 전략은 ‘위치’, ‘하비투스’, ‘사회적 궤적’ 이 세 가지 요인에 영향을 받는다. 장에서는 기존 세력관계를 이어가고자 하는 지배자(정통)의 보존전략과 그 관계를 뒤집으려고 하는 피지배자(이단)의 전복전략 사이에 근본적인 갈등이 존재한다.[각주:5]
다섯째, 장이 하나의 객관적인 ‘위치공간’이라고 본다면, 각기 다른 위치들은 그에 대응하는 입장을 가지면서 위치 공간에 대응하는 ‘입장 공간’이 발생한다. 위치와 입장 사이의 조응은 기계적 결정론이 작용하지 않으며, 사회적 행위자들의 하비투스와 ‘가능성의 공간’에 의해 매개된다.
부르디외(2004: 126)는 “학문장(學文場)과 같은 하나의 장은 다른 장에 고유한 이해관계와, 내기물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한 내기물과 특수한 이해관계를 정의함으로써 그 스스로를 정의한다. (지리학에서 거는 내기물을 걸고 철학자로 하여금 일하게 할 수는 없다.) 장에 고유한 내기물과 특수한 이해관계는 장에 입장하도록 만들어지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인식되지 않는다. (각각의 이해관계의 범주는 다른 이해관계, 다른 투자에 대한 무관심을 내포한다. 따라서 다른 이해관계들과 다른 투자들은 부조리하거나 상식 밖의 것으로, 혹은 이해관계를 초탈한 지고한 것으로 간주된다.) 하나의 장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내기물들과 유희를 할 준비가 된 사람들, 즉 유희의 내재적 법칙들과 내기물들에 대한 지식, 그리고 내기물들이 지닌 사회적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하비투스의 보유자들을 필요로 한다.”라고 서술하며 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막스 베버(2013: 34)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통해 “눈가리개를 하고 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구절을 옳게 판독해 내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침잠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예 학문을 단념하십시오.”라고 서술한다. 이는 근대사회에서 가치가 제도화된 학문장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하나의 학문장에서 각각의 하비투스를 체화한 장의 참여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다양한 자본을 가지고 ‘전문적 지식’이라는 상징자본을 얻기 위해 학문적 실천을 통해 투쟁에 참여한다. ‘전문적 지식’은 학문장 고유의 자본이다. 학문장에서는 ‘연구’라는 고유한 게임의 논리가 공유된다. 이 전문적 지식을 소유한 사회적 행위자는 장 안에서 ‘인정’이라는 상징권력을 얻게 되고 이를 통해 ‘정통’의 지위를 얻어 지배자로 군림할 수 있게 된다. 기존의 지배적 학술담론에서 벗어난 피지배자들은 학문장의 전복을 위해 새로운 지식을 가지고 투쟁에 참여할 것이다.
이런 학문장에서의 상징자본과 게임의 논리는 스포츠의 장이나 경제장에서는 환원될 수 없는 자본이다. 뛰어난 육체적 퍼포먼스를 수행할 수 있는 육체자본이나 천문학적인 경제자본은 학문장 고유의 상징자본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전문적 지식 또한 스포츠의 장에서 핵심적인 자본으로 작용하기는 어렵다. 이렇게 각각의 장은 서로에게 독립적이며 상대적 자율성을 갖는다. 하지만 장은 구조적 상동성과 자본의 태환 가능성 때문에 서로 완전히 독립적이지 않으며 상호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이상길, 2018: 218-219). 장 내부에서 자신의 하비투스, 자본을 가지고 보전과 전복을 위해 투쟁한다는 상동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스포츠의 논리로 봤을 때 고대 필사본에 목숨을 거는 행위는 무가치한 행위이며 일종의 환상(illusion)으로 보일 것인데 학문장 내부에서는 그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는다. 이를 일루지오로 볼 수 있다.
부르디외에게 사회는 온정적이고, 협동적인 공간으로 연대가 일어나는 장소가 아닌 적자생존적 긴장감과 자본의 축적을 위한 투쟁이 지배하는 공간이며, 부르디외에게 행위자란 언제나 사회적 삶에서 ‘실천적 위급함’ 해결하기 위해 힘쓰는 전투적인 존재이자 자기보존에 힘쓰는 코나투스적(conatic) 주체들이다(김홍중, 2017: 5-6). 부르디외는 ‘실천’을 “[(하비투스) (자본)] + 장 = 실천”(부르디외, 2006: 196)이라고 정식화한 바 있다. 결국 구체적인 실천이란 하비투스와 자본을 가진 행위자가 장에 참여할 때 발생하는 것이다. 사회적 공간인 장에서 개인들은 자신들이 체화시킨 계급 하비투스를 준거로 지각하고 판단하며, 집단적인 투쟁공간인 장에 참여한 행위자들을 끊임없이 분류·평가하고 구별짓는다(이상길, 2018: 204). 자본은 “실제로 이용가능한 자원과 권력의 총체”(부르디외, 2006: 220)이며, 장에서의 무기이자, 투쟁의 내기물이다(부르디외·바캉, 2015: 176). 행위자들은 자신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자본을 동원해서 장의 투쟁에 참여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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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bitus’는 국내에 아비투스, 아비튀스, 하비투스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는데, 이 글에서는 habitus의 역사성을 고려하고, 또 이를 강조하기 위해 이 단어를, 이 단어가 유래한 라틴어 발음인, ‘하비투스’로 역어를 선택했다(이상길, 2011: 275). [본문으로]
‘habitus’는 부르디외 사회학 이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개념어이다. 구체적으로 부르디외는 원래 이 개념을 베버가 사용했던 에토스(Ethos)로 사용하다가, 에르빈 파노프스키의 『고딕건축과 스콜라 철학』을 번역하면서 ‘habitus’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부르디외의 이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헥시스(Hexis)부터 중세철학, 현대 철학·사회과학 등의 다양한 논의를 거쳐 구성된 개념이다. [본문으로]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것은 부르디외가 단순히 사회적 행위자를 구조의 허수아비로만 파악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기존의 레비-스트로스나 알튀세르 같은 구조주의자들이 행위자는 너무 단순하게 폐기 시켰다고 지적하면서 기존 구조주의자들이 등한시했던 생활세계(Lebenswelt)의 행위자를 다시금 사회학에 위치시키고 구조적 영향력 아래에서도 사회적 행위자들이 단순하게 구조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전략적으로 실천을 만들어가는 부분과 우연성을 자신의 이론에 추가함으로써 더 깊은 설명력과 사회변동의 가능성을 제시한다(Bourdieu, 1990b: 9). [본문으로]
독일어가 원본인 이 논문은 1986년, “The Forms of Capital”로도 출간되었다. [본문으로]
장 내부에서의 보전/전복, 정통/이단과 관련된 메커니즘 역시 베버 종교사회학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베버는 전문가 집단이 출현해서 각각의 사회적 공동체에 합리적인 설명을 제공한다고 파악했다. 이러한 체계화가 이루어지면 정설(Orthodoxie)이 이설(Heterodoxie)에 의해 공격받을 수 있다(정선기, 1999b: 82). [본문으로]
부르디외와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신 홍성민 선생님은 부르디외가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다는 걸 느꼈다고 이야기하셨다. 부르디외와 푸코의 비교연구를 하기도 하셨던 선생님은 푸코가 '권력'이라고 하는 것을 부르디외는 '폭력'이라고 부른다고, 푸코와 그의 차이는 아마 폭력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 같다고 덧붙이셨다.(부르디외는 폭력과 구별되는 권력 개념도 사용한다.)
은폐된 사회의 지배구조를 폭로함으로써 지배당하고, 고통받는 자들로 하여금 무죄를 입증한다는 목적을 가진 부르디외 사회학은 '지배의 사회학'이며 무엇보다도 '폭력'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장 이론이 세계의 근원적인 폭력성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담고 있다는 이상길 선생님의 규정은 부르디외 사회학의 핵심을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사회 내에서의 불평등한 지배질서를 유지시키는 역할은 부르디외에게 '상징폭력'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된다. 상징폭력이란 피지배자가 지배계급의 자의성을 오인함으로써 그것을 정당화시키고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되어 발생하는 비가시적 폭력을 의미한다. 폭력이라는 부르디외 사회학의 핵심적인 개념과 전체적인 세계상을 생각해봤을 때, 베버가 부르디외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는 것을 갈수록 느낀다.
[세계종교와 경제윤리]라는 베버의 유명한 종교사회학 논문에서 그는 사회적 불평등을 종교가 정당화하는 과정에 대해 다룬다. 원시적이고 주술적인 관념들이 제거될수록 전능하고 정의로운 신의 세계에는 부당한 고통이 너무나 많았기에 이는 설명을 필요로 했고, 불평등한 복의 분배는 정당한 것이 되어야 했다. 신정론은 세계의 비참의 원인과 사회의 불평등한 복의 분배가 정당한 것임을 설명하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했다.
이런 맥락에서 부르디외는 [종교장의 기원과 구조]라는 논문에 "신정론은 언제나 사회신정론이다"라고 서술하는데, 이 대목은 세속화된 사회에서 사회적인 성공과 성공한 자의 복, 자본의 불평등한 분배를 포함한 모든 수준의 정당화를 다뤄야하는 사회학의 기능에 대한 서술일 것이다. 또 이는 부르디외가 "베버는 종교사회학이 권력사회학의 한 장(章)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라고 평가하면서 상징자본을 개념화할 때 베버의 카리스마 개념을 기반으로 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부르디외가 문화사회학을 오늘날의 종교사회학이라고 명명한 것은 곧 문화사회학이 권력사회학이며, 지배의 사회학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외에도 베버는 종교 영역이 점증적으로 다양한 가치영역으로 제도화·전문화 되는 과정(근대화)에 주목하면서, 분화가 진행중인 근대사회에서 각각의 독립적인 가치이념이 객관적 의미체계를 구축하고 일정한 분화수준에서 전문가 집단의 출현을 통해 구성되는 공동체의 교조적 원리의 체계화를 설명한다. 부르디외의 장 이론은 이 베버의 다양한 가치의 제도화라는 생각에 빚지면서 동시에 전문가 집단의 체계화된 도그마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정설(Orthodoxie)과 이설(Heterodoxie) 대결, 정통/이단의 대결이라는 베버의 아이디어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에서 지배관계를 설명했던 이데올로기를 대체할 상징권력, 상징폭력, 상징지배 개념의 기저를 이루는 독사(Doxa) 개념을 이끌어낸다.
이런 부르디외 사회학의 결정적인 세계상과 더불어 부르디외 사회학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 하비투스는 베버의 에토스를, 자본은 베버의 자산(asset)을 기반으로 발천시킨 개념이며 부르디외의 계급론 또한 베버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이상길 선생님의 부르디외 연구서 <아틀라스의 발>을 처음 봤을 때 들었던 의문은 제목이 왜 '아틀라스의 발'일까하는 의문이었다. 일단 책 서문을 보면서 이 의문은 풀리게 되었고, 지난 9월 27일에 있었던 푸른역사아카데미 <아틀라스의 발> 서평회에 참여하면서 '아틀라스와 부르디외'에 관한 저자 이상길 선생님의 해석도 들을 수 있었다.
먼저 (일전에 포스팅한 적도 있지만) 책 제목이 <아틀라스의 발>인 이유는 이것이 부르디외가 콜레주드프랑스 마지막 강의 때 사용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상길 선생님께서 인용하신 대로, 캐나다 사회학자인 마르셀 프루니에에 의하면 부르디외는 자신의 콜레주드프랑스 마지막 강의에서 “성찰성이란 세계를 자신의 어깨에 짊어진 나틀라스의 두 발이 어디를 딛고 있는지 질문하는 일”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부르디외의 이 비유는 이 책의 부제인 "포스트식민 상황에서 부르디외 읽기"를 함축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제목인 것이다.
다음으로는 아틀라스와 부르디외에 관한 이상길 선생님의 해석인데, 선생님께서는 부르디외가 아틀라스를 언급했지만 이 이미지를 발전시킨 것은 아니라고 하시면서 이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덧붙이셨다. 하늘을 이고 있는 아틀라스는 땅, 그러니까 현실을 딛고 있는 존재이다. 반면에 아틀라스와 형제인 프로메테우스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이며 티탄족과 올림푸스족의 전쟁에서도 미래를 예견해 벌을 받지 않았다. 아틀라스는 미래를 예견하지도 못해 형벌을 받는 존재로 대비된다.
프로메테우스는 미래를 예견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인류에 불을 가져다주고 진보를 상징하는, 구체적이고 진보적인 수단을 제공하는 존재이다. 맑스는 그런 프로메테우스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파리신문이 폐간될 때 자신을 나타내는 이미지로 쓰곤 했다. 아틀라스의 이미지는 그런 프로메테우스적 지식인의 이미지와 대비될 수 있다. 아틀라스에게는 프로메테우스 같은 신적인 능력이 없이 세상을 짊어지는 형벌을 받는 존재이다.
이런 내용을 토대로 이상길 교수님께서는 "말년의 부르디외는 어쩌면 그저 세계 전체를, 세계의 비참을, 현실을 짊어지고 관점들에 대한 관점을 확보하려고 노력하는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이 딛고 있는 땅을 성찰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 그런 이미지를 사용하지 않았을까"하는 해석을 이야기 해주셨다.
기능적으로 분화되고, 중심이 없는 사회에서 정치체계는 사회의 핵심적인 기능체계가 아니라 단순히 하나의 기능체계일 뿐이다. 이러한 루만의 시각은 기존에 국가·정치를 사회 조종의 핵심과 중심으로 파악했던 한나 아렌트와 같은 학자들의 입장과 대립된다(서영조, 2008: 50). 루만에게 있어서 국가는 정치체계의 한 요소일 뿐이다(루만, 2011: 341). 사회에 있어 정치의 힘을 회의하고, 정치가 사회를 조종한다는 의견에 부정적인 루만의 시각은 ‘조종 비관주의’라고 불리기도 한다(서영조, 2011: 16). 결국 루만에게 있어 정치는 다양하게 분화된 사회의 특정 기능을 담당할 뿐이다.
루만은 막스 베버의 권력 개념을 계승한다. 루만 역시 권력의 근원은 궁극적으로 물리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데 있다고 서술한다(발터 리제 쉐퍼, 2002: 95). 정치체계에는 매체로서 권력이 작용하고, 이는 ‘집합적인 구속력을 가진 결정’을 위한 것이다(루만, 2014a: 146). 루만에게 권력은 지배나, 억압의 수단이 아니라 하나의 소통의 수단으로 기능한다. 권력을 통해서 비로소 ‘정치적인 것’에 대한 커뮤니케이션이 정치체계로 분화될 수 있다(서영조·김영일, 2009: 17).
루만(2014b: 577)은 정치체계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코드화가 필요함을 환기시키면서, 이 코드는 “우월한 권력(공권력)”과 이에 “복종하는 자의 구별(통치자/피통치자) 및 공권력을 여당/야당 도식”으로 조건화된다고 지적한다. 권력의 우세와 열세는 차이, 아마도 최초의 차이는 무력으로 결정되었을 것이고,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평화를 요구 받고 무력과는 다른 안정적인 수단을 모색하는 것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필요에 의해 공직이 발명되고, 이를 통해 공직에 통치자/피통치자의 차이가 재규정된다. ‘공직’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통해 정치체계는 한층 더 탈인간화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근대 정치의 출현으로 인해 정치는 다시 한 번, 여당/야당으로 재코드화된다(서영조, 2013: 279-280).
체계이론 일반에서 다루었듯 체계에서 코드는 불변적 속성을 가지고, 프로그램을 가변적 속성을 갖는다. 루만의 상이한 코드와 프로그램의 개념을 통해, 전자의 기능으로 복잡성을 축소하고, 후자의 기능을 통해 체계의 유연성을 확보한다. 예를 들어 여당/야당이라는 이항코드는 불변의 것이다. 하지만 집권을 하느냐/하지 못하느냐는 정치체계의 프로그램에 달린 결과이다. 따라서 문제는 어떤 정치적 세력이 특정의 정치체계의 프로그램을 결정하느냐에 달리기도 한다. 이런 까닭에 정치체계의 프로그램은 체계의 밖에서 일어나는, 즉 환경에서의 커뮤니케이션에 반응한다. 루만은 프로그램을 “출입문”에 비유하고 있으며, 이는 환경과의 접촉을 통해 배제된 것을 다시 체계 안으로 ‘재진입’시키는 기능을 수행한다(서영조, 2013: 289).
루만에게 있어 정치체계의 기능과 구체적인 특성을 4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첫째, ‘정치적인 것’을 주제로 발생하는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결정’이라는 형태로 압축된다. 정치적 커뮤니케이션은 항상 결정과 연관을 갖는다. 둘째, 정치적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결정은, 의문 없이 다음 결정을 이어지는, ‘구속적인 성격’을 갖는다. 셋째, 이러한 구속은 ‘집합적인’ 성격을 지닌다. 여기서 집합적이라는 것은 결정이 그 체계에 포함된 모든 구성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치체계는 결정들의 사실적 연속성, 결정의 여부와 상관없이도 언제라도 결정하는 있는 능력과 연관된다.
하버마스 정치사회학의 핵심은 비판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생활세계의 왜곡되지 않고, 강압적이지 않은 ‘의사소통행위’를 중심으로 제안하고, 이러한 의사소통행위는 정치적 공론장에서 이루어지는 절차적 정당성을 갖춘 숙의 과정을 통해 근대 대의 민주주의에 대안이 될 수 있는, 하나의 숙의 민주주의 모델을 제시한다.
부르디외는 그러한 하버마스의 논의에 정면으로 반박한다. 먼저 부르디외에게 장에 참여하는 개인은 “실천적인 위급함” 안에서 사회적 삶에서 마주하게 되는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투쟁하는 존재이다. 이들은 수직적으로 구성된 사회세계에서 상승과 지배를 원하고 상징투쟁에서 기존의 체제에 도전하고 장의 전복을 꿈꾸는 코나투스적(conatic) 주체들이다(김홍중, 2017: 5-6). 사회세계를 살아가는 개인들은 자기보존을 위해 투쟁하는 존재이며, 이런 까닭에 부르디외는 생활세계에서의 비판 잠재력을 기대하지 않는다.
이러한 인간론적 전제 아래에서 부르디외는 자신의 언어(소통)이론을 전개시킨다. 실천과 구조가 만나는 장은 경제적 이해관계의 성격을 공유하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언어관계 또한 경제적인 관계로 유추될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장에서의 언어실천은 다양한 형태의 자본을 축적하기 위한 경쟁으로 특징지어지고, 이를 토대로 하버마스가 언급한 “왜곡되지 않은 의사소통”, 즉 합리적 의사소통·의사소통행위는 현실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예이며, 하버마스가 제안한 소통은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특별한 노력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는 것이다(Bourdieu ‧ Eagleton, 1994: 270). 그렇기 때문에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이론적 토대로 구축된 숙의 민주주의의 언어관에는 성찰이 필요해진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조금 더 지식이 있다면 어떤 일들을 확실히 더 잘 이해할 텐데. 그게 전부예요. 내가 더 지식을 갖게 되면 일은 많이 달라질 텐데. … (중략) … 그러나 나는 정말 시간이 없어요. 조금만 시간이 더 있다면, 나는 그것에 관여하고 무언가 더 알려고 시도하고 그 흐름을 더 깊이 따라갈 텐데. 다시 말해서 조금 더 지식이 있다면 누군가와 더 많이 토론할 수 있고, 많이 알지 못할 때는 격리된 채로 남아 있게 되지요.” (가정부)*
*해당 인용문은 부르디외가 구별짓기 8장 문화와 정치에서 사용한 한 가정부의 이야기이다.
부르디외가 관심을 가졌던 하나의 부분은 바로 계급 아비튀스로 체화된 언어능력이었다. 부르디외에게 언어능력은 계급 아비튀스를 보여주는 각별한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계급의 아비튀스 전체는 언어적 아비튀스를 통해 드러난다고 말하기도 한다(부르디외, 2014: 99). 부르디외가 구별짓기에서 인용한 학력자본이 낮고, 여성인 가정부는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싶어도 지식이 없기 때문에 정치적 토론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증언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이 정치적 의견을 소유한다”는 일종의 선험적인 토대를 지지하는데, 부르디외의 분석은 오히려 반대로 치닫게 된다. 부르디외는 하층 계급에서는 생활에 기능하는 것들 외에 생활과 동떨어진 정치적 의제에 대한 의견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부르디외, 2006: 722-731).
계급 아비튀스로 육화된 언어의 사회적 용법들은 고유한 의미를 지니는 사회적 가치들을 통해 일종의 격차들의 상징적 질서과 사회적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담당한다(부르디외, 2014: 55).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아비튀스를 체화하고 정치의 장에 참여하는 시민들은 정치의 장에서 일어나는 숙의과정에서도 각자 가진 자본을 통해 자유로울 수 없으며, 상징적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정치 엘리트들이 만들어 놓은 의제를 소비하는 주체로 전락할 뿐이다. 이런 까닭에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급일수록 정치적 장에서 통용되는 게임의 논리와 그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는 자본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고, 소유하기도 어려운 실정에 놓여 결국 ‘정치적 소외’를 경험하게 된다(김태수, 2008: 116).
부르디외는 근대 민주주의에 맹점을 자신의 이론적 토대인 아비튀스, 장 개념으로 지적해낸다. 특별히 부르디외의 언어적 아비튀스 이론은 하버마스의 핵심개념인 합리적 의사소통과 소통관계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부르디외(2001: 123)는 오히려 합리적 의사소통을 통해 권력이 행사된다고 보았다. 예를 들면 다른 장들에 비해 합리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학문의 장에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조차도 그 관계 배후에 존재하는 사회계층적 구조와 특권들로 배제를 포함하고 있다(부르디외, 2001: 32). 이러한 부르디외 정치사회학의 개념은 자칫 숙의와, 절차적 정당성으로 포장되어 이상(理想)으로 여겨질 수 있는 숙의 민주주의에 비판적 성찰을 제공한다.
참고문헌
김태수, "부르디외 정치사회학을 통한 대의민주주의 성찰", 『사회와이론』 13, 2008.
김홍중, "부정자본론 - 사회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한국사회학』 51(3), 2017.
피에르 부르디외,『파스칼적 명상』,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1.
_______________,『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下』, 최종철 옮김, 새물결, 2006.
_______________,『언어와 상징권력』, 김현경 옮김, 나남, 2014.
Bourdieu, Pierre ‧ Eagleton, Terry. "Doxa and Common Life: An interview", in Savoj Zizek (ed.), Mapping Ideology, London: Verso, 1994.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 1927-1998)은 독일의 사회학자로서 사회학에만 국한되지 않는 여러 분과학문의 성과들을 수용하여, 자신만의 독창적인 체계이론을 구축했다. 루만의 체계이론은 사회과학에서 체계이론이라는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자리잡았고, 이로 인해 루만은 현대 사회학의 대표적인 학자로 자리매김하였다. 루만은 1970년대 벌어진 하버마스와의 『사회이론이냐 사회공학이냐-체계연구는 무엇을 수행하는가?』라는 논쟁을 통해 독일 사회학계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 두 이론가의 논쟁은 독일 전후 사회학계의 대표적인 대논쟁으로 손꼽힐 만큼 큰 파급력을 불러일으켰다(김덕영, 2003: 340-341).
1. 체계이론
루만은 1969년 설립된 빌레펠트 대학에 임용될 때, “연구대상: 사회이론, 연구 기간: 30년, 비용: 없음”이라는 연구계획서를 제출했다(루만, 2014a: 21). 루만은 학자생활동안 새로운 패러다임을 통해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을 이루기 위해 일관되게 체계이론에 천착했다. 루만은 주체철학으로 대변되는 서구의 근대적 전통을 구(舊)유럽적 사고라고 지칭하며, 기존의 패러다임과 결별을 선언한다. 루만은 포스트모던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근대의 다양한 성취들은 유지되고 있으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제안하는 거대서사의 해체는 결국 그 자체로 ‘거대서사의 해체’라는 하나의 메타서사가 되었다는 것이 루만의 판단이다(루만, 2014b: 1305-1307).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만이 하버마스처럼 근대를 미완의 기획으로 보았던 것은 아니다. 그는 기존의 근대적인 사고와 결별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더불어서 루만은 정치적 진보를 추구하지 않았으며, 어떤 이상을 추구하며 하는 학문에도 회의를 가졌고, 실재를 정직하게 바라보자고 제안했다. 또한 루만은 고전 사회학의 효과에 회의적이었으며, 고전사회학적 패러다임에 집착하다보면, 현실은 가볍게 달아난다고 평가한다(루만, 2015: 27, 45-46).
부르디외는 현대사회를 "계급이 분화된 사회"로 보았다면 루만은 그와 시각을 달리한다. 루만에게 근대사회는 "기능적으로 분화된 세계로서, 분절적으로 분화되거나 중심과 주변에 따라 분화되거나 계층적으로 분화된 전근대사회와 결정적으로 구분"된 사회이다(김덕영, 2014: 57-58). 이러한 연유로 루만의 사회이론을 '기능구조주의'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사회가 계급구조로 인해 수직적으로 구성되어있다고 보았던 부르디외와 다르게, 독특하게도 루만에게 근대사회의 분화된 체계들에는 중심이나, 위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루만, 2001:29). 현대사회를 탈중심화된 사회라고 파악하는 이러한 루만의 시각은 하버마스의 분석과도 일치한다.
<그림 1 - 체계의 개념적 도식(루만, 2010: 60)>
*루만에게 있어서, 사회체계와 사회적 체계를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사회’는 독일어로 ‘Gesellschaft’, 영어로는 ‘societal’에 가까운 의미이고, ‘사회적’은 독일어로 ‘sozial’, 영어로는 ‘social’에 가까운 의미이다. 루만에게 사회적 체계는 상호작용과, 조직, 사회(전체사회)를 포함하는 개념이고, 사회적 체계로서의 사회는 기능 분화된 정치체계, 경제체계, 종교체계 등의 기능체계를 포함한 개념이다(김덕영, 2016: 449).
루만의 사회학에서 체계는 각각 기계, 유기체, 사회적 체계, 심리적 체계를 포함한다. 기계체계는 고유한 작동, 고유한 경계 작동상의 폐쇄성을 가지고 있지만 자기생산을 이루어내지는 못하는 체계이다. 다음으로는 유기체를 볼 수 있는데, 생물학적 유기체가 대표적인 예이다. 생물학적 유기체는 특정한 신체적인 경계를 가지고, 자기생산을 이루어내는 체계이다. 이러한 심리적 체계와 사회적 체계는 작동상의 폐쇄성, 자기생산 등의 체계의 공통점을 공유한다. 하지만 기계, 유기체와는 다르게 심리적 체계와 사회적 체계는 의미체계이며, 의미를 경계로 구분된다(김덕영, 2016: 452).
루만에 의하면 그의 이론기획에서 중요한 것은 ‘체계’ 자체가 아니라 체계(System)와 환경(Umwelt)와의 구분, 관계이다(루만, 2010: 327; 2015). 루만의 체계이론에서 가리키는 ‘환경’은 흔히 사용되는 환경운동에서 가리키는 자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세계는 체계와 환경으로 분할된다. 체계는 경계를 갖는 복잡한 구조이다. 이러한 체계에서, 정의(definition)된 부분을 제외한 모든 것, 체계가 아닌 모든 것은 환경이 된다(루만, 2015: 73). 체계와 환경의 구분은 루만의 이론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개념이며, 체계를 스스로 작동하면서 환경과 구별된다. 이 구별 속에서 체계가 구성된다. 체계와 환경의 구별은 체계의 자기생산, 즉 체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루만, 2014c: 120). 요약하자면 체계는 환경과의 구별을 통해 경계를 형성해내고, 이를 통해 자기생산, 유지, 기능하는 폐쇄적·자율적·통일적 단위이다(김덕영, 2014: 228). 체계의 기본단위는 인간, 주체가 아닌 ‘커뮤니케이션’이다.
체계와 환경의 이분법적 도식은 현상학자 후설(Edmund Husserl)의 대상과 지평의 이분법적 도식과도 조응한다. 후설의 선험적 현상학에서 지향성(Intentionalität) 개념은 주체가 받을 수 있는 체험의 과부하를 처리할 수 있도록 해주는 하나의 매체로 작용한다. 루만 또한 ‘의미(Sinn)’를 중심으로 ‘대상으로서의 체계’, ‘지평으로서의 환경’의 도식을 만들어, 세계의 복잡성을 축소하려 처리하려는 기획을 보여준다(정선기, 2017: 331-332). 루만은 복잡하게 분화된 현대사회에서, 세계로부터 통보되는 다양한 복잡성을 포착·축소시켜, 처리하는 것을 체계이론과 그의 사회학의 목표로 삼았다(김종길, 1993: 45-46).
체계는 고유한 매체, 코드, 프로그램을 통해서 고유한 기능을 담당한다. 고유한 코드와 프로그램은 기능 체계들의 결과이며, 조건이다(루만, 2014a: 655). 이 코드는 이항코드로서, 긍정값 내지는 부정값이 할당된다. 이러한 할당이 제대로 구성되는 지를 정하는 기준이 ‘프로그램’이다. 체계에서 “구조적으로 결정적인 것은 고정된 코드와 가변적인 조건화(프로그램)의 차이”이다. 이러한 코드화는 한 매체가 다른 매체들과 구별, 분화, 독립, 특수화되는 것을 보장한다(루만, 2014a: 426-427, 443). 현대사회의 각각의 기능 체계들은 코드로 인해 고유한 자기생상으로 작동하며, 이로 인해 비로소 독립분화를 - 예를 들면 정치체계, 경제체계, 법체계, 과학체계 등의 - 이룰 수 있다(루만, 2014b: 863).
기능체계
코드
프로그램
매체
기능
경제
소유/비소유
희소성/가격
화폐·소유·권력
물질적 재생산
법
합법/불법
법, 질서
법·의사결정
안전, 갈등 해결
과학
진리/거짓
연구
과학적 인식
새로운 인식 생산
정치
여당/야당
정치사상, 이데올로기
권력 경쟁
집합적 의사 결정의 산출
대중 매체
정보/비정보
전달
커뮤니케이션 매체·언어·영상
정보·대화
도덕
존경/멸시
가치관
가치 판단
하위 제도적 정향·규제
윤리
정의/불의
실천 철학
도덕
도덕 성찰·논증·규제
<표 1 - 기능체계의 도표(발터 리제 쉐퍼, 2002: 184-185)>
분화된 기능체계들은 체계 작동상의 폐쇄성을 갖는다. 체계는 전적으로 자기준거에 기반을 두고 내재적으로 작동한다(루만, 2014c: 121). 즉 기능체계들은 서로에게 닫힌 체계로서 작동하며, 따라서 서로는 서로에게 환경이다. 경제체계는 ‘소유/비소유’라는 고유한 이항코드, ‘희소성/가격’이라는 조건화, 즉 프로그램, ‘화폐·소유·권력’이라는 매체를 가지고 사회에 ‘물질적 재생산’이라는 기능을 수행한다. 다른 예로 정치체계는 ‘여당/여당’이라는 고유의 이항코드, ‘정치사상과 이데올로기’라는 프로그램, ‘권력(경쟁)’이라는 매체에 근거해 ‘집합적 의사 결정의 산출’이라는 기능을 수행하고, 과학체계는 ‘진리/거짓’이라는 고유의 이항코드, ‘연구’라는 프로그램, ‘과학적 인식’이라는 매체에 근거해 ‘새로운 인식 생산’이라는 기능을 수행한다. 루만(2014a: 443)은 “이론은 법률이 아니고, 연애관계에 투자하는 사람은 기업가처럼 행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특정한 체계가 다른 체계에 대해 일정한 폐쇄성을 가진, 닫힌 체계라는 것, 즉 체계 간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설명해 근대의 분화된 특정한 기능체계들의 고유의 기능을 설명하는 것이다.
기능적 분화들에 의해 구성된 사회에서 각각의 부분체계들은 체계 사이의 독립성과 의존성이 함께 증가한다(루만, 2014b: 696, 856). 왜냐하면 모든 체계들이 작동상으로는 서로에게 폐쇄적이지만, 모든 기능체계들은 구조적 결합을 통해 체계 간의 결합이 진행되어, 사회 내부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법체계와 정치체계의 예를 들 수 있다. 법과 정치는 헌법을 통해 규제된다. 헌법은 정치체계를 법에 결속시키고, 이 때문에 위법은 정치체계에서의 실패로 산출될 수 있다. 헌법은 또 다른 한 편으로 정치적인 동기에 의해 입법과정을 거치고 이 과정에서 법체계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것이 기능적으로 분화된 체계들 사이의 의존성에 대한 설명이다(루만, 2014b: 892-896).
참고문헌
김덕영, 『논쟁의 역사를 통해 본 사회학』, 한울아카데미, 2003.
______, 『환원근대』, 길, 2014.
______, 『사회의 사회학』, 길, 2016.
김종길, "니클라스(N. Luhmann)의 일반 체계이론 - ‘복잡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 도’", 『한국사회학』 27(SUM),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