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거르는 새움과 이정서

작년 2월에 이정서 역의 『이방인』에 대한 포스팅을 했습니다. 어쩌다 보니, 이정서 씨가 본인이 대표인 새움 출판사에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번역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저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생각했습니다. 또 ‘기존 번역은 엉터리고, 이 책을 오독하고 있다. 내 책만이 세밀한 뉘앙스까지 번역한 진짜 번역서다.’라고 마케팅하겠구나, 싶었습니다. 역시는 역시 역시였죠.

다른 SNS에 새움의 『동물농장』 홍보 게시물이 떴습니다. 이 책의 경우, 제가 서평을 쓰기 위해 역본을 2개 비교하고, 원서도 참고했기에 어느 정도 할 얘기가 있을 거라 봤는데, 처음부터 이상한 소리를 하더군요. 책의 처음에 나오는 ‘Manor farm’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여기서 manor는 장원에 딸린 영지를 말하는데, 민음사의 도정일 역은 이를 살리지 못했다는 겁니다. 저는 도정일 역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manor에서 오웰이 의미하고자 했던 바는 이정서의 주장이 맞을 겁니다. 그러면 제가 그 게시물을 보면서 무릎을 탁!치고 ‘이런 숨은 의미가! 당장 이정서 역을 봐야지!’라고 했을까요?

정답은 ‘아니다’입니다. 제가 참고했던 김욱동 역(비채)과 김기혁 역(문학동네)에서 이미 그에 대한 정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할 것도 없는 정보입니다. 위키백과에도, 꺼무위키라 불리는 나무위키에도 나오는 정보죠. 그런데 이정서 씨와 그가 대표인 새움 출판사는 이게 엄청난 정보인 양 포장해서 마케팅합니다. ‘기존 번역은 잘못됐고, 드디어 내가 온전히 이 책을 번역했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예전 이방인 포스팅에도 말했듯, 이정서 씨는 본인만이 『이방인』을 제대로 번역했다고 하면서 자기 책에 오역이 있으면 전량 폐기하겠다고 했습니다. 한 독자가 이정서의 번역을 프랑스의 카뮈학회(Société des Études camusiennes)에 문의했고, 프랑스카뮈학회장이었던 아녜스 스피켈(Agnès Spiquel)은 이정서의 번역이 오역이며 고쳐야 한다고 지적했고, 이방인 번역을 다룬 서울대 불어교육과 김진하 교수의 논문에서는 이정서의 번역이 『이방인』을 몰이해했다고 지적했음에도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죠. 당시 이정서 씨는 노이즈 마케팅에 역풍을 맞았고, 정당하게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을 “바퀴벌레”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버릇을 남 주지 못한다는 겁니다. 저는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서 이정서가 번역한 모든 책의 책 소개를 읽었는데, 그 책에는 “하나도 빠짐없이” 기존 번역은 오역이고, 나만이 제대로 된 번역을 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나 말고는 다 의역이고, 나만이 직역이다’라면서요. 이게 말이 됩니까? 제가 『동물농장』에 관해 더 화나는 건, 이정서의 주장이 조지 오웰의 글쓰기와 정확히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오웰은 생전에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쉬운 글쓰기를 표방하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오웰을 숱한 영문학자와 번역자는 이해 못 하고 본인만 이해한다? 오웰의 근본부터를 몰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이정서의 번역서가 계속 신경 쓰여도 참고 있었던 건 그런 거였습니다. 이정서 번역 읽으면 얼마나 틀리고 인생이 바뀌기야 하겠냐, 그런 생각이었죠. 그런데 지속되는 꼬락서니를 보니 문제가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전 이슈가 된 정육각의 초신선 삼겹살 같은 거죠. 이정서와 그가 대표인 새움출판사의 마케팅이 그와 다른가요? 완벽한 번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불어 완벽한 해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심지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로 원서를 본다고 해도 완벽하게 저자의 의도를 이해할 순 없습니다.

그런데 이정서는 사소한 꼬투리 몇 개로 기존 번역은 다 잘못되었다고 하는데, 정작 본인의 해석이 오류가 많고 치명적인, 재밌는 사람이죠. 저는 이런 근거 없는 비방이 기존 번역의 정당한 가치를 폄훼하고, 출판시장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봅니다. 그리고 기존의 것은 뭔가 미심쩍다는 한국사회 특유의 심성 역시 한몫하는 것 같습니다. 가짜뉴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처럼. 그러기에 저는 이정서와 새움의 책을 믿고 거릅니다. 저는 이 번역가와 출판사의 작업물과 마케팅이 한국 출판계의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랭스로 되돌아가다』

디디에 에리봉은 뛰어난 지성사가이자, 사회학자이며 동시에 노동계급의 배경을 지닌 성소수자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랭스로의 귀환: 에리봉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의 고향인 랭스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에게 프랑스의 지방, 랭스는 자신이 잊었던, 잊으려 애썼던 장소로 계급적 모욕과 게이로서 성적 모욕을 당한 장소다. 그는 그곳에서 지금껏 애써 부정하려 했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가족의 역사: 에리봉은 전형적인 노동계급 가족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노동계급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초등학교 졸업장조차 가지고 있지 못하고 있으며, 그의 어머니 역시 그와 비슷하다. 가족 중 유일하게 사회적 상승 궤적에 진입했던 에리봉에게 노동자 가정의 거칠고 투박한 문화는 용인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그는 그렇게 자신을 구성해온 정체성을 무시하며 부르주아의 세계를 열망하고, 그들과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개인을 만들어내는 사회적 환경의 힘을 자각하게 된 지금의 에리봉은 이제 가족의 역사를 들춰보며 자신에게 폭력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마저도 다른 폭력에 의한 삶임을 깨닫게 된다. 당시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했던 그는 관념 속에서 노동자 개념을 이해하기만 했을 뿐 정작 현실의 노동자인 자신의 가족은 부인했던 과거를 회고한다. 실제 노동자인 가족과는 유리된 채, 그는 부르주아로 주체화하기 위해 노동자 개념을 공부했다.

개인의 역사: 가족의 역사를 살펴본 그는 개인의 역사, 즉 자신의 역사로 시선을 돌린다. 그는 부르디외를 경유하며, 자신 역시 분열된 하비투스의 소유자임을 고백한다. 즉, 한편으로 그는 학교의 교육체계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임을 자각하고 이에 격렬하게 대항했고, 한편으로는 교육체계의 교양과 고급스러운 문화를 동경하기도 했다. 부르디외처럼 그 역시 상층계급 문화의 혐오와 동경 사이에 자신의 삶을 만들었음을 회고한다.

“랭스는 내게 모욕의 도시이기도 했다.” 성소수자로서 지방 랭스는 사회적 폭력과 사회적 수치심을 안겨준 장소였다. 그것이 게이로서 그가 랭스를 떠나 파리의 성소수자 커뮤니티에 속하게 한 이유이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을 한계 짓고, 결정지었던 계급 정체성을 다시금 되돌아본다.

노동계급의 가정을 떠나 지식인이 되기로 결심한 그였지만, 그에게 부족한 것은 경제자본뿐 아니라, 그 진로에 필요한 조언 몇 마디마저 부족했다. 지식인 세계에서 한계를 경험했던 그는 당시의 자신을 이렇게 회고하기도 한다. “나는 내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도망쳐 나왔지만, 내 출신에 다시 덜미를 잡힌 셈이었다. 나 자신과 관련해 그동안 부인해온 진실이 다시 떠올랐고, 그것의 법을 강제했다.”

나는 책의 서사를 중심으로 이야기했지만, 에세이 형식을 가진 이 책에는 많은 사회학적 개념이 응축되어 있다. 계급, 정체성, 하비투스, 궤적, 정당성, 계급정치는 물론이고, 역자이신 이상길 선생님이 쓰신 해제 역시 매우 유익하다. 이런 주제나, 사회학에 관심이 독자는 무조건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어제, 이 책을 통해 사회학 고전 독서회를 진행했다. 특별 게스트로는 현재 부르디외 학파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부르디외와 한국 문학장을 주제로 연구하고, 아니 에르노의 대담을 번역하고, 디디에 에리봉의 비판이론에 관한 글을 쓰고 계신 박진수 선생님께서 함께 해주셔서 책의 맥락에 관해 다양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또 모임원 모두 책을 재밌게 읽고 열띤 토론을 이어나갔다. 귀중한 시간이었다.

부르디외는 개인의 사회적 삶과 위치를 인식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했다. 그의 이론에 힘입은 이 사회학적 자기분석은 개인을 위치지우는 사회의 힘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해방을 제공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삶을 결정지은 조건을 보게 함으로써 자신의 삶과 화해를 제공하기도 한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 애써 부정하려 했던 고향으로 되돌아와, 자신을 되돌아본 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책을 끝맺는다.

“나는 왜 그를 이해해보려고 하지 않았던가. 과거에 나는 왜 그와 대화해보려고 하지 않았던가. 사회세계의 폭력이 그를 이겼던 것처럼, 나를 이기도록 내버려두었던 것을 후회했다.”

내일이면 5·18 광주 민주항쟁 기념일입니다. <5월 18일, 광주>의 저자 김영택 선생님은 5·18 광주 민중항쟁을 “신군부라는 마피아적 정치군인집단이 정권을 찬탈하기 위해 무고한 광주 시민을 희생양으로 삼아 벌인 살인극에서 빚어진 것이고, 이에 가만히 앉아서만 당할 수 없는 광주시민들이 생과 사를 초월해 저항한 투쟁”으로 정의합니다. 저는 5·18 광주 민주항쟁이 한국 사회의 민주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봅니다. 천안문 6·4 항쟁 이후, 민주주의의 열기가 이어지지 못했던 중국과 다르게 한국은 이 사건을 끊임없이 재전유함으로써 민주화를 이끌어냈습니다. 시대적으로도 이제 5·18 광주 민주항쟁은 다행히도 민주화 역사의 ‘정통’으로 자리 잡은 것 같습니다. 물론 제대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겠죠. 5·18 광주 민주항쟁에 관한 책을 소개합니다.

1. <5월 18일, 광주>, 김영택, 역사공간

이 책은 5·18 광주 민주항쟁을 주제로 최초의 박사 학위를 받은 김영택 선생님이 쓰신 책입니다. 5월 광주에 관한 가장 자세한 기록이 담긴 책으로, 저자는 광주항쟁 당시 기자로 그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이기도 합니다. 책은 당시에 있었던 일을 분 단위까지 기록하며 세세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저는 광주항쟁에 관한 최고의 책이라고 봅니다.

2.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엮음, 창비

광주항쟁의 기록인 이 책은 원래 금서였습니다. 이른바 <넘어 넘어>라고 불리던 이 책이 2017년 수정증보판으로 재출간되었습니다. 기존에 있던 기록을 검증하고, 내용을 추가했습니다. 이 책은 광주항쟁 당사자들의 기록입니다. 광주항쟁에 관해 단 한 권의 책만 추천한다면 저는 이 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 2권이 광주항쟁의 사실을 중심으로 쓰였다면, 나머지 책은 광주항쟁을 해석한 책이다.

3. <5·18 광주 커뮤니타스>, 강인철, 사람의무늬

이 책은 종교사회학자 강인철 선생님이 커뮤니타스, 리미널리티, 사회극이라는 개념으로 광주항쟁을 재해석하는 책입니다. <시민종교의 탄생>, <경합하는 시민종교> 등에서부터 이어지는 강인철 선생님의 시민종교 시리즈에 있는 책입니다. 광주항쟁 연구의 성과를 종합하면서도 또 커뮤니타스, 리미널리티, 사회극이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광주항쟁을 인류학으로 또 감정사회학으로 재해석하는 수작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광주항쟁의 해석 중에 가장 추천하고 싶은 책입니다.

4, <오월의 사회과학>, 최정운, 오월의봄

이 책은 광주항쟁에 관한 가장 유명한 책입니다. 광주항쟁의 고전인 책이죠. 사실 별다른 수사가 필요 없는 광주항쟁에 관한 고전입니다. 광주를 사회과학적으로 재해석한 시초가 되는 책입니다. 더불어서 매우 흥미롭습니다.

5. <철학의 헌정>, 김상봉, 도서출판 길

광주항쟁을 철학적으로 규정하기 위한 작업입니다. 김상봉 선생님 특유의 개념인 서로주체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광주항쟁을 공동체로 재해석하는데, 이 역시 수작입니다.

 

한 권 덧붙이자면, <김군을 찾아서> 역시 중요한 저작이다.

오세라비 글에 관한 생각

안티 페미니즘 담론을 분석하기 위해 오세라비의 책을 읽고 드는 생각을 공유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세라비의 주장은 전체적으로 실증/논거도 부족하고, 레퍼런스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내용이 빈약하고, 오세라비의 주장은 합리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안티 페미니즘의 정서와 진영 논리로 소비되고 있다고 저는 판단합니다.

어디에도 무결하고 오류가 없는 이론은 없습니다. 페미니즘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한국 페미니즘의 일면에는 본질주의라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여성을 단일 범주로 구성하는 문제점이죠. 사실 ‘여성’이라는 범주에는 일반화할 수 없는 엄청나게 다양한, 사회경제적 특성을 지닌 개인이 존재하는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교차성의 측면에서도 특히 계층/계급성을 간과할 여지가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한국 페미니즘 운동이 전부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일면에 그런 조류가 있다는 겁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 오세라비가 페미니즘을 비판하더라도 제대로 비판한다면 담론장에도, 사회에도, 그리고 심지어는 페미니즘 운동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일종의 성찰을 제공할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오세라비의 주장은 전혀 그러지 못하다는 게 제 평가입니다.

앞서 말했듯, 오세라비의 치명적인 약점은 실증/논거가 없다는 겁니다. 오세라비는 “법적, 사회적으로 가부장제는 이미 끝난 시대다.”라고 주장합니다. 저는 동의하지 않지만,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렇게 말하려면 그만큼의 증거를 제출해야 합니다. 하지만 오세라비는 전혀 그런 증거를 제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가부장제는 끝났다.’는 말을 논증하려면 그만큼 치열하게 준비하고 경험적으로 자료를 모아 논증해야 할 겁니다. 그런데 오세라비는 전혀 그런 논증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 훈련조차 안 된 사람 같고요.

그럼 어떤 효과가 발생할까요? 객관적인 자료가 하나도 없으니, 결국 저 문장을 읽은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할 겁니다. 그리고 기준 자체도 존재하지 않으니, 인식의 격차는 훨씬 더 벌어지겠죠. 이게 오세라비가 제대로 된 담론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닌, 안티 페미 정서를 등에 업은 장사꾼인 증거입니다.

다음으로는 레퍼런스 부족인데, 오세라비는 본인이 원조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는데 정작 책을 보면 나오는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는 아주 기초적인 수준입니다. 당장 페미니즘이 가진 논리의 핵심에 도달하지도 못할뿐더러, 급진 페미니즘이 해체주의로 간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도 합니다. 고작 레퍼런스라고 제시하는 건 진중권·서민 등의 인터넷 신문이 전부죠. 그런 식으로 가상의 적만 생산해 허공에 쉐도우 복싱을 합니다.

또 논리적으로도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세라비는 페미니즘의 일부 조류인 급진 페미니즘의 피해자주의를 전체 페미니즘으로 환원하고, 이를 비판하는데, 오세라비에게 정작 청년 남성은 모두 피해자입니다. 오세라비는 여성의 피해자주의는 비판하면서 정작 청년 남성의 피해자주의를 옹호합니다. 이거야 말로 자신이 비판하는 분리주의죠. 청년 남성 역시 동일한 범주로 보기 어려운 집단입니다. 다음으로는 세대론인데, 기성세대 남성과 젊은 남성을 비교합니다. 기성세대 남성 중 우리가 아는 586남성은 극소수일뿐더러 기성세대 남성 중 가부장제의 특혜를 받고도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남성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오세라비는 이것 역시 일반화하죠.

복지를 비판하는데 그냥 초보적인 수준입니다. 좋은 말은 누구든 할 수 있습니다. “복지 예산이 낭비되는 것을 막아야 하고, 복지 예산의 부정 수급을 막아야 한다” 이거 제가 금방 지어낸 말인데요, 이 정도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수준에서 뭐가 문제인지 분석해야 그게 제대로 된 비판이고, 논증이죠. 제가 느낀 오세라비의 전체적인 담론 수준은 학부생 1·2학년 정도 같습니다. 조롱이 아니라 진지하게 말하는 겁니다. 오세라비는 제대로 된 훈련이 전무해 보여요. 저 같으면 이 정도 글을 쓰고 출판한다? 개명하거나 아예 절필할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현실’이 아닌, ‘인식’으로서 자료를 취급하기 때문에, 서술이 현실과 부합하는지는 판단하지 않고, 그들이 가진 인식에 초점을 맞추니, 다 자료이긴 합니다. 다만 그들의 인식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어서 몇 자 적습니다.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에 대한 생각

최근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Apocalypse Never>이 번역되었다. 책이 나왔을 때부터 책의 목차를 살피고 출판사의 소개를 읽었다. 어떤 새로운 내용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후변화가 과장된 위협이라는 논의는 아마 기후변화라는 문제를 제기한 순간부터 이어졌을 것이고, 이 책 역시 그런 맥락에 있는 책이다. 이 책이 위치한 맥락과 이 책을 둘러싼 반응을 보고 글을 몇자 적는다.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은 출간된 이후 이 주제를 다루는 책 중에는 잘 팔리고 있는 것 같다. 출판사에서는 긴급 중쇄를 했다고 하고, 교보문고를 비롯한 인터넷 서점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교보에서는 정치/사회 분야 1위라고 한다. 이 책이 갑자기 각광 받는 이유가 여럿일 텐데, 첫째로는 ‘한국에 이런 담론이 제대로 수입되지 않아서’라고 생각한다. 기후변화를 극우적이거나 음모론적으로 비난하는 이른바 ‘트럼프식 담론’도 아닌, 환경운동가가 환경운동 담론을 비판하고,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한다는 게 이 책의 매력 포인트일 거다. 하지만 해외에서는 이런 담론은 이미 클리셰 중 하나가 된 것 같다.

두 번째로 눈에 띄는 것은 이 책을 정당화의 무기로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SNS에 이 책을 링크한 사람의 글을 읽으면 많은 사람이 내가 원하던 내용을 담은 책이 나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여기에서 세속적 부를 추구하라는 종교 서적이 베스트셀러였던 상황이 겹쳐 보인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은 이 책을 접할 때, ‘환경운동의 종말론적 담론, 극단적 메시지는 정확한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이 책을 기다리던 사람이 이 책을 읽는 이유는 그저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기 위한 무기인 것이다. ‘기후위기는 과장됐대, 새로 책 나온 거 보니까 그렇더라, 우리 그냥 이대로 살면 돼.’하며 귀찮음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정치/경제적 맥락 안에 존재한다. 이 책을 포함한 이런 부류의 책은 기업, 보수언론의 지지를 받는데, 이는 이 책에서 선언하는 메시지가 그들에게 친화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담론과 미국 기업/보수 정치의 연관성 역시 존재한다.

이 책에 대한 비판적 논평을 두 편 읽었다. 하나는 Peter H. Gleick이라는 학자의 비판인데*, 그는 태평양 연구소 명예 소장, 미국 국립 과학원 회원, 맥아더 펠로우 등을 역임했다. 이 사람의 논평은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에서 셸런버거가 가진 문제를 전반적으로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리고 가디언에 실린 Bob Ward의 논평은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과 비슷한 맥락의 <False Alarm>이라는 책을 함께 논평하는데**, Bob ward는 런던정경대학 기후변화환경연구소 소속이다. 이 기사에서는 셸런버거의 주장 중 타당한 부분을 일부 인정하지만, 내용을 비판하고, 전반적인 자료가 체리피킹 되었음을 지적한다.

셸런버거가 주장하는 내용이 일견 타당하다고도 생각한다. 환경을 위한 효율적인 길을 찾아야 한다. 단, 체리피킹은 안 되고. 또 어디든 극단주의자는 있기 마련이고, 그들의 과격한 주장에는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특히 한국의 경우 환경 근본주의자가 정책 입안에서 권력을 행사하거나, 환경 근본주의 정당이 유의미한 지지를 얻고 있는가? 당연히 아니다. 쉐도우 복싱, 허수아비 논증도 안 된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이 책에 전부 동의하게 되더라도, 한국에서 극소수의 환경 종말론자/근본주의자의 해악보다는 무관심한 절대다수의 해악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책은 그 절대다수에게 용기를 불어넣는다.

이런 문제는 왜 발생하는가? 환경 문제가 고도로 전문화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원전에 대한 제대로 된 지식은 소수의 전문인만 판단할 수 있다. 나 같은 사람은 눈 뜨고 코 베일 수 있다. 원전에 관해 하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민/관 차원에서 시민과학을 증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한다.

 

6월 18일 기준으로 이 책을 읽었다. 책을 안 읽고 글 쓰는 문제를 가지고 시비를 따지는 분들이 많으셔서 굳이 읽었다. 이에 관해 얘기해 보자.

 

내가 처음 이 글을 쓴 목적은 책보다는 책을 둘러싼 지형에 관해 이야기 하고 싶어서, 그런 이유였다. 그렇기 때문에 책보다는 책을 둘러싼 이야기를 사실에 기반해 글을 썼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책을 읽지 않았어도 문제는 되지 않는다.

 

두번째로는 이 책의 내용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 전문가의 비평을 인용했다. 한 사람은 태평양 연구소 명예 소장, 미국 국립 과학원 회원, 맥아더 펠로우 등을 역임한 피터 글릭이라는 학자고, 한 사람은 런던정경대학 기후변화환경연구소 소속의 밥 워드다. 나는 이들이 전문성을 가지고 공개적으로 게재한 비평을 신뢰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용을 인용해서 비판하는 부분, 그리고 출판사의 책 소개와 연관해서 책 내용의 간접적 비판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런 식으로 글을 써서 문제가 되는 경우는 내가 인용한 전문가의 인용과 비판 내용이 틀렸을 때 유효하다. 내가 인용한 리뷰가 책에 없는 내용을 인용해 비판했다면 진실성이 없으니 문제일 것이나, 나는 이 전문가와 그의 글을 신뢰한다. 만약에 밑에 첨부한 이들의 평가에 오류가 있다면 이 글을 수정할 것이다. 하지만 이를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뭐, 읽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끝으로 굳이 책을 읽었으니 하나만 지적하자. 책에서는 기후변화의 티핑포인트인 평균 기온 4도 상승을 문제 삼으면서, 기온 상승은 2~3도에 머물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이게 다분히 문제 있는 주장인 것은 평균의 함정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기후변화에 대한 데이터를 보면, 1도 상승은 단순한 1도 상승이 아니다. 기후변화가 발생하면서 극단값이 상승하고 있다. 그러니까 기온은 단순히 1도가 오를지 모르지만 혹한기가 더 추워지고, 혹서기는 더욱 더워지면서 기온은 서서히 상승한다. 더불어서 지구적 차원에서 봤을 때 이런 기후변화에 취약한 것은 한국 같은 중위도 지역의 사람이 아니라 극지방에 사는 사람들이다. 저자는 원주민은 정말 위한다고 하면서 이런 부분은 슬쩍 빼버린다. 스스로 환경전문가라고 자처한다면 이 정도는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아주 평범한 소시민인데도 알고 있는 사실인데 말이다.

 

이 책에 관한 독서를 마무리 하고도 결론은 뒤바뀌지 않는다. 저자의 주장에는 물론 유효한 지점이 존재한다. 극단적, 종말론적 환경주의자의 주장에는 문제점이 존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게 비효율적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리고 한국의 상황에서는 더더욱 종말론적 환경주의자보다 기후변화에 무관심한 대다수의 해악이 크다고 본다. 특히 이 책을 보면서 기후변화는 과장되었으니 앞으로 변화가 필요 없겠다는 냉소적 시각이 더 위험하다고 본다.

*Book review: Bad science and bad arguments abound in ‘Apocalypse Never’ by Michael Shellenberger

**False Alarm by Bjorn Lomborg; Apocalypse Never by Michael Shellenberger –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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