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은 결코 쉽게 읽을 수 없는 이론가이다. 그는 경제, 과학, 법, 예술, 정치, 교육, 종교 등으로 복잡하게 분화된 사회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거대 이론, 일반 이론을 구축하기에 힘쓴 사회학자로, 시스템·체계이론이 주는 경직적인 느낌, 보수주의적 혐의 때문에 대중적으로 알려진 이론가는 아니지만, 독일 사회학에서는 이미 일반 문법으로 자리한 학자이다.
“칸트의 가면을 쓴 니체”라는 한 선생님의 평가처럼, 그는 정치하고 정직하지만 한 편으로는 급진적이고 전복적인 이론가이다. 그는 플라톤에서부터 내려오는 유구한 서구의 존재론과 형이상학, 서구 근대의 주체 중심의 인식론과 계몽이라는 전통적 인식을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사이버네틱스, 인지생물학, 현상학 등의 여러 분과 학문의 성과를 사회학 이론에 포함하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이론을 구축한다.
루만에게 현대사회는 어떤 중심도, 정점도, 위계도 없는 하나의 복잡계로 인식된다. 복잡한 사회를 인식하고 이를 토대로 학문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복잡한 사회 이론이 요구된다. 사회를 설명했던 기존의 이론들, 계몽주의 철학, 근대 자연과학, 헤겔의 가족-시민사회-국가 도식, 맑스의 토대와 상부구조, 그람시의 국가-경제-시민사회 도식, 하버마스의 체계-생활세계의 도식 등은 루만에게 있어 더는 설명력을 갖지 않는 구(舊)유럽적 사고방식이기에 그는 이와의 단호한 결별을 선언한다. 그는 서구의 계몽이라는 미몽을 ‘계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계몽의 계몽’인 것이다.
루만은 복잡성이 점증하는 현대사회가 다면적이고, 예측 불가해졌음을 지적하며 복잡한 현대사회를 포착하고 설명할 이론으로 ‘체계이론’을 주창한다. 루만의 체계이론은 급진적 구성주의, 자동생산 체계이론, 인간 없는 사회 이론을 기본으로 한다. 그의 기획에 따르면, 사회는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으로 이루어져 있고, 커뮤니케이션이 발생할 때마다 현재화되는 사회적 체계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회는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껏 쓴 이야기는 루만에 관한 알맹이라기보다는, 루만에 대한 두서없는 사전정보에 가깝다. 이 책, <쉽게 읽는 루만>은 국내에 출간된 루만 입문서 중에는 가장 친절한 책으로, 루만의 생애와 인식론, 그리고 체계이론 일반과 사회적 체계 등의 아주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개념부터, 이런 기본 이론을 기반으로 매스미디어에 이를 적용시키는 실질적 분석도 함께 담고 있는 책이다. 루만의 이론은 그 추상성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는데, 이 책은 추상적 이론과 실질적 분석을 모두 담고 있기에 더욱더 좋은 입문서라고 생각한다.
영국의 한 TV쇼에서 정감 가는 깡패 둘이 방금 석방된 지인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한 명은 그 친구가 복역중에 공부를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됐다고 말한다. “그래, 이제 방송통신대 학위까지 있다니까. 사회학 전공이래.” 다른 한 명이 묻는다. “그럼, 도둑질은 그만둔 거야?” 그러자 먼저 이야기를 떠냈던 친구가 말한다. “아니지! 하지만 이젠 왜 자기가 도둑질을 하는지 알게 됐어!” 8p.
교유서가의 첫단추 시리즈에 『사회학』을 읽었다. 이 시리즈는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사에서 나오는 A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를 번역한다. 해당 책의 원서가 2018년에 나왔고, 책이 2019년에 번역되었으니, 매우 빠른 번역이다. 책에서 저명한 종교사회학자인 스티브 브루스는 사회학은 무엇인지, 연구대상을 어떻게 보는지, 세계에 대해 사회학은 어떤 시각을 취하는지, 사회학은 어떻게 과학일 수 있는지를 실제 연구 예와 다룬다.
내가 재미있게 본 건 마지막 장, “사회학이 아닌 것”이었다. 저자는 사회학이 아닌 것, 처음으로 “개선하려는 사람과 몽상가”를 꼽는다. 고프먼이 『수용소』라는 책을 쓸 당시, 정신과 의사를 비판하는 데에 골몰했다면 사회학의 무수한 성과는 없어졌을 것이라고 하며 말이다. 다음은 당파주의자다. 이데올로기에 오염된 사람이 “당파주의자”이고, 이에 반대되는 부류는 포스트모더니티를 주장하는 “상대주의자”이다. 오류로부터 진실을 구별해낼 수 없다는 포스트모너니스트를 비판하며, 그들은 그런 생각에 기반을 두면서 왜 타인을 설득하려고 하느냐 질문한다.
다음은 “통계공포증 환자”다. 수치화, 계량화를 통한 통계적 분석이 없이는 사회를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시대정신 철학자”, 구체적으로는 주디스 버틀러, 미셸 푸코, 에드워드 사이드를 예로 들면서 이들은 충분한 경험적 연구로 뒷받침한 일반화가 아닌 포괄적 일반화의 우를 범하고 있다고 본다. 마지막은 “종속된 사회학자”이다. 예를 들어 종교에 대한 사회학과 종교적인 사회학은 다른 것이다. 종교를 과학적 방법으로 연구하는 것과 종교적 교의를 실천하고 종교 운동을 장려하기 위한 사회학은 사회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스티브 브루스가 설명하는 사회학은 영미 중심의 사회학이다. 그리고 사회학은 복수의 과학이며, “과학성”을 규명하는 과정 역시 복수이다. 물론 이 시각이 한국에서는 가장 지배적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더불어 사회학입문시리즈, 연재 시작하고 1년이 지난 이 시리즈 연재도 앞으로 3~4권 더 읽고 정리할 요량이다.
이 책, 『그러니까, 이것이 사회학이군요』는 일본의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가 일본의 사회학자 12명에게 “사회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이에 대한 해답과 또 해당 사회학자와 연관된 주제의 인터뷰로 구성된 책이다.
저자가 독자로 설정하고 있는 사람은 “사회학이라는 단어에 조금이라고 흥미가 있는 사람,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는 사람, 사회학자로 활동하지만 아직 사회학이 뭔지 모르겠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이보다는 조금은 높은 선을 정해야 하지 않나 싶었다. ‘사회학을 진로로 정해볼까?’라는 사람이 읽으면 더 좋을 책 같다.
이 책을 보면서 두 가지를 얻은 것 같다. 하나는 일본은 1세계구나, 그리고 한국과는 굉장히 큰 차이가 있구나, 했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학을 공부하는 데 필요한 이런저런 팁이었다.
2015년은 기점으로 한국 사회학의 종속성 문제가 대두된 적이 있다. 세계적인 수준의 한국 사회학을 위해서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 미국 종속성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런 이야기가 오고 갔다. 내 개인적 평가는 그렇다. 뭐든 세계시장에서 통하려면 독립된 시장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 책에서 본 일본 사회학에는 그런 시장이 존재했다. 일본 사회학만의 스타가 있었고, 그때그때 시장의 유행과 부흥을 이끈 스타 학자와 공통의 자원이 존재했다. 스타로서는 미야다이 신지, 오사와 마사치 같은 학자가 있고, 이치노카와 야스타카의 『사회』 같은 책은 일본 사회학의 수준이 세계적 깊이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하는 책이기도 했다. 한 편으로 얻은 건 그런 것들이다. 사회학과 실천과의 관계. 그리고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이론 공부의 의미와 쓸모, 계량 연구의 필요성 같은.
책을 다 읽으며 책에서 인터뷰하고 또 언급된 많은 인물을 알라딘에 한 명, 한 명 검색해봤다. 아쉽게도 제대로 번역된 책이 거의 없다. 일본이면 정말 가깝고 또 번역하기에 비교적 용이한 언어임에도.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나 같이 막 걸음마를 떼고 있는 사람에게는 “전통”으로 사유할 기반이 너무나 빈약하기에.
1. 핵심: 이 책, 『현대 사회이론의 모든 것』은 현대 사회이론에 쉬우면서도, 포괄적이고,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책은 가능한 많은 전통을 간결하게 다루면서도 핵심을 잡고, 비판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 동시대 사회이론을 다룬다는 측면에서 현대 사회 이론의 많은 진전을 다루기도 합니다.
2. 저자·역자: 이 책의 저자는 앤서니 엘리엇입니다. 앤서니 엘리엇은 남호주대의 사회학과 교수이자 호주 최대의 사회과학 센터의 소장이며 호주사회과학학술원의 회원이기도 한 저명한 학자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앤서니 기든스로부터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 책의 역자는 김봉석, 박치현 선생님이십니다. 김봉석 선생님은 번역사회학을, 박치현 선생님께서는 파슨스를 전공하시며 대학구조에 관한 연구를 하고 계십니다. 두 분 모두 번역어나 번역에 대한 장인 정신이 있으신 분들이라, 믿고 볼 수 있는 번역이었습니다.
3. 내용: 이 책, 『현대 사회이론의 모든 것』의 원제는 “Contemporary Social Theory: An introduction”입니다. 이 책은 그만큼 동시대의 사회이론을 다루는 데 목적을 둔 책으로, “사회란 무엇인가”라는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질문으로 시작해, 고전 사회학, 프랑크푸르트 학파, 구조주의, 포스트구조주의, 구조화 이론, 현대 비판이론, 페미니즘과 포스트페미니즘, 포스트모더니티, 네트워크·위험·유동성, 지구화 등의 11가지 주제로 현대 사회이론이 도달한 전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책은 사회학 이론이 아닌, “사회이론”을 다루는 책이기 때문에, 넓은 범위에서 사회철학까지 다루는 망라적인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넓은 시각에서 사회를 볼 수 있는 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유연한 관점에서 현대의 철학 역시 사회이론으로 포괄하기 때문에 교양으로 책을 읽을 분께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각 장에서는 해당 주제의 흐름과 함께, 그 주제의 중심되는 학자를 다룹니다. 핵심 개념, 중요한 주제, 비판, 요약 및 토론 등의 형식으로 장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회이론이 낯선 분께서도 비교적 편하게 책에 접근하실 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4. 대상 독자: 이 책은 개론서이기 때문에, 이해하시기에 어렵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그래서 관심이 가시는 분께 추천해 드리고, 사회학에 입문하고 사회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쉽게 시작하지 못했던 분께도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제게 사회이론을 가르쳐주시던 교수님께서는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이론은 기본기이자, 사회학을 하지 않을 사람에게도 사회는 보는 눈을 제공해주는 영역이라고. 그래서 책을 통해 사회를 보는 새로운 눈, 사람들을 통해 정교한 시각으로 인정 받은 그 관점을 느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더불어 함께 공부해가며 읽어도 좋을 책입니다.
5. 느낌: 아무래도 사회이론보다는, 사회학 이론을 중심으로 공부하다 보니 조금은 경직되었던 시각이 이 책을 통해 약간 바뀌게 된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포스트모더니티, 페미니즘과 포스트페미니즘, 지구화를 다루는 내용은 제가 공부가 부족해서 새롭게 알게 된 게 많았습니다. 그래서 해당 주제나 학자를 통해 여러 주제로 뻗어 나갈 수 있게 될 것 같습니다.
요사이 이른바 기독교 빌런 독서를 좀 했다. 그중에는 비교적 최근에 <복있는사람>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낸시 피어시의 『네 몸을 사랑하라』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대강 사회변화, 그것도 성(性)문화 변화에 따른 보수 기독교의 대응이다. 저자 낸시 피어시는 한국에서 잠시 유행했던 기독교 세계관 맥락의 있는 사람으로 성서학을 전공했다고. 대체로 스스로를 꽤 상식적인, 수준 높은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수준 높게 소개한다고 자위할 때 좋아하는 작가. 교회 밖에서는 아는 사람이 없고, 그런.
그래서 이 책은 포르노그래피, 동거, 이혼, 동성애와 성전환, 낙태 등의 문제를 기독교 특유의 시각에서 보수적으로 다루는 책이다. 저자는 몸과 영혼의 이원론적 세계관이 문제라 이런 안 좋은 사회현상(위에 열거한 프로노, 동거, 이혼 등)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원론적 세계관을 타파하기 위해 무려 끌고 오는 게 기독교 세계관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고, 저자의 스승이기도 한 “프란시스 쉐퍼”. 아마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기독교인을 포함해도 태반은 누군지도 모를 사람. 어쨌든 저자는 지속적으로 이런저런 이야기하면서 주저리주저리 그럴싸한 척, 굉장히 뭔가 있고 고상한 척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책을 나중에 조용기 책처럼 한 번 제대로 읽고 ‘보수 기독교의 성 담론’으로 정리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가볍게 말하자면 “저런 식으로 하니까 망하지” 정도로 정리된다. 저자 주장의 타당함은 그만 알아보기로 하자..
이런 말만 할 거면 도대체 글은 왜 쓰는 거냐. 단순하다. 그냥 기독교계가 구려서 써본다. 나야 기독교를 탈출한 지 꽤 됐지만, 그 바닥 돌아가는 생리는 대충 안다. 내가 흥미로운 건 이 책이 그래도 복음주의 계열에서 어느 정도 수준 있는 책이나, 진보적인(?) 책을 출간하는 <복있는사람>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왔다는 것. 책의 추천사를 보니 이찬수를 필두로 한 보수 기독교의 지원이 있었던 것 같다. 찾아보니 이찬수 목사 교회에서 이 책으로 행사도 했다.
복음주의 기독교계, 그중에서도 진보적 복음주의로 묶일 수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동성애에 보수적인 사람을 비판하는 게 일상이다. 아마 이번에 대형교회 목사들이 차별금지법에 관해 개소리하는 기사 링크도 하나씩 공유해가며 페이스북으로 욕했을 텐데, 이 책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안 하는 듯. 왜 그럴까? 공공연하게 서로들 아는 사이니까 그럴 거다. 자기들끼리 서로서로 빨아주다가 막상 이런 책 나오면 함구하는 그런 거. 그러니까 이런 쓰레기 같은 책이 나와도 “너나들이하는 사이”니까, 서로는 비판을 안 한다. 아마 이런 책이 조금만 자기들 기준에 수준 낮다고 여겨지거나, 지들이랑 안 친하거나, 보수적인 출판사에서 나왔으면 까고 조롱하느라 정신없었을 거다. 참 판 자체가 더러운 판이다. 이 책의 운명이나 그들의 운명이나 비슷할 것.
이 정도로 중립을 유지하지 못한 글이 거의 없었는데, 글이 질 나빠서 이 글을 읽으신, 내용에서 비판하는 책 또는 일군의 무리와는 아무 상관 없으실 일반 독자께 진심으로 죄송하다. 기독교판이 너무 구려서, 주체를 못해 죄송한 마음이다.
1. 자기계발서와 사회학: 이 책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하고 싶은 말은 책이 자기계발서라는 겁니다. 평가와 무관하게 자기계발서는 보통 좋은 이야기를 하고 그걸 긍정적으로 따르다 보면 삶이 개선될 가능성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모든 일은 사바사, 케바케이기에 이 책이 누군가에겐 인생의 책이 될 수 있겠고,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책의 가치가 정해질 것 같습니다.
2. 핵심: 이 책은 부르디외의 사회학을 사용해 최상층으로 가는 법을 말합니다. 부르디외가 말한 사회적/계급적 습관인 아비투스 개념, 그리고 자본 개념을 통해서 최상층의 사람은 어떤 자본과 아비투스를 지녔으며 어떻게 해야 그들처럼 될 수 있는지를 말합니다. 이후에는 제가 본 이 책과 부르디외의 사회학의 차이를 3개 이야기하겠습니다.
3. 아비투스: 저자는 우리 삶의 모든 행동의 근원이 되는 원리인 아비투스 개념을 설명하고, “아비투스를 바꾸는 건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를 열린 개념으로 보기는 하지만, 이것을 전혀 쉽게 바꿀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유년 시절의 사회적 배경에서 습득한 아비투스를 1차 아비투스라고 하고, 그 이후에 습득한 아비투스를 2차 아비투스라고 합니다. 저자의 말은 2차 아비투스에 관한 것인데, 1·2차 아비투스를 모두 상류층에서 습득한 사람과 서로 다른 배경에서 습득한 사람은 본질적으로 다르고, 오히려 상승이동으로 다른 아비투스를 습득한 사람의 그것은 분열된 아비투스입니다.
4. 문화자본: 책에 제시된 자본의 대부분은 문화자본 개념에 포함되는 개념입니다. 문화자본은 논쟁적인 개념입니다. 부르디외는 프랑스 사회를 연구해서 문화자본 개념을 만들어냈지, 한국 사회를 보고 만들지 않았죠. 한국에서도 문화자본이 계급을 구별하는 데 큰 영향을 줄까요? 어느 쪽에서는 한국에는 계급문화가 자리 잡지 못했기 때문에 문화자본의 영향이 미약하다고 하기도 하고, 한 편에서는 부르디외가 연구한 당시와 다르게 문화자본의 배타성이 감소하고 대중은 문화를 잡식으로 소비한다고 보기도 하고, 다른 한 편에서는 부르디외의 이론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판단하기도 합니다. 책에서 다룬 유럽과 한국은 다른 사회이고 문화자본도 다른 맥락에서 쓰일 겁니다. 저도 문화자본이 한국에선 프랑스만큼 계급 구별의 효과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보는 편입니다. 곁가지로 저는 한국이 시험/고시 자본주의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5. 숙명론: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3부는 이 책이 다루는 내용에 대한 부르디외의 답변을 간접적으로 싣고 있습니다. 지배계급은 자신의 문화적 특성을 아주 자연스럽게 향유하죠.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그 특성이 마치 본능인 것마냥 보여주며, 나는 너희와 다르다는 걸 보이는 겁니다. 반면 지배계급으로의 상승지향을 꿈꾸는 중간계급을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그것을 쟁취하려 하죠. 이 책에서 말하는 게 그겁니다. 하층민의 억척스러움이 아닌, 지배층의 자연스럽고 즐기는 태도, 즉 아비투스를 가지라는 거죠. 암울하게도 부르디외는 이런 중간계급의 도전이 보통 실패로 돌아간다고 분석합니다. 그래서 동시대에 사회학자는 부르디외에게 숙명론자라는 낙인을 찍죠. 부르디외가 이야기한 것은 언제나 작은 기회일 뿐입니다.
6. 다시 자기계발서와 사회학: 부르디외는 신이 아니고, 당연히 이 책을 통해 지위 상승을 이루고, 상류층의 아비투스를 갖추는 데 성공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부르디외는 숙명론자가 아님에도, 사회학은 현실과학이자 경험과학이기 때문에 사회의 불평등을 저렇게 분석합니다. 당장 이 글을 읽고 일상을 사는 우리에게, 신빙성은 떨어지지만 변화의 가능성을 긍정하며 열심히 살라고 하는 책과 현실적이지만 상승이동은 어렵다고 말하는 사회학 책 중에 무엇이 더 유익할까, 저는 이게 고민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계발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두 책의 성격을 이해해주시고, 저는 앞선 이유로 이 책보다는 다른 자기계발의 방법을 찾으시는 걸 추천하고 싶습니다.
『세대란 무엇인가?』 ⠀ 1. 세대라는 문제: 1962년, 한국전쟁의 상흔과 박정희의 통치가 막 자리잡고 있던 격동의 틈바구니 속에서 조지훈은 “당신들 세대만이 더 불행한 것은 아니다. 불운의 3대에 보내는 공개장”이라는 글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 “우리 세대가 가장 불행하니 동정하고 이해해 달라면 문제는 없다. 그러나, 가장 불행하니 가장 고생을 했고 가장 올바른 경험을 쌓았으며 올바로 보았으니 우리 세대 주장만이 관철되어야 하고 우리 세대가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고 고집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 여기서 불운의 3대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 및 갑오경장 세대, 1914년 일제강점기 세대, 1934년 태평양전쟁 및 이념대립 세대를 의미한다. 조지훈의 문장을 우리시대에 그대로 옮겨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근대 이후 세대는 언제나 뜨거운 문제다. 민음사 한편의 첫 기획이 『세대』였던 것도 그 방증이며, 사회는 “××세대”라는 표현으로 가득하고, 언제나 담론의 각축이 벌어진다. 하지만 세대에 대한 관심에 비해 정교한 개념은 부족한 편이다.
2. 만하임의 ‘세대’: 사회학자 칼 만하임은 1928년 『세대 문제』라는 저작을 통해 출생 시기 같은 객관적 기준으로 세대를 파악한 실증주의와 지나치게 주관적 기준으로 세대를 파악하던 역사주의, 양자를 비판적으로 극복하며 세대 개념을 정립해 세대 개념의 저작권을 얻는다. 그는 특정한 지향을 가진 연령 집단이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목도하며 세대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그는 단순히 세대를 하나의 연령 집단으로 본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객관적 규정과 함께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공동운명을 가졌음을 각성하고 이것이 특정한 참여, 연대로 이어지는 과정을 포착했다.
3. 핵심: 이 책, 『세대란 무엇인가?』는 세대 개념의 빈곤과 만하임 이후 세대 개념의 발전이라는 두 문제의 해결을 돕는 책이다. 만하임 이후 세대 담론의 계보학을 추적하고, 한 편으로는 세대 담론은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며 이것의 현재적 맥락을 제안하는 총체적인 세대 개론서이다. 더불어 이 책은 역사학, 사회학, 심리학, 문화학, 문예학 등의 다양한 관점에서 세대 담론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다채로운 책이기도 하다.
4. 저자: 이 책은 역사학자, 울리케 유라이트와 미하엘 빌트를 중심으로 편집된 책이다. 구체적으로 역사학자 7명, 사회학자 3명, 심리학자 1명, 문화학자 1명, 문예학자 1명이 필진으로 참여한 책이다. 책의 번역은 한독젠더문화연구회의 공역으로, 연구회에서 공부를 위해 번역한 문서라 번역이 매끄럽고, 가독성도 좋다.
5. 내용: 책은 총 4부로 이어졌는데, 책 1부 ‘세대에 대한 개념적 논의’는 세대 개념에 대한 논쟁을 다루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독일의 역사적 경험이 만든 세대 개념을 언급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논의하며, 새대 담론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2부 ‘세대-계보-성’에서는 세대를 정신분석학의 측면에서 분석하고, 가족과 세대의 연관성에 주목하여, 독일의 과거사 극복 정치가 반영되는 내용, 세대 담론의 젠더 문제 등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3부 ‘영웅적 세대와 탈영웅적 세대’는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미쳤던 세대의 영웅적 집단으로 인식되던 시기의 담론을 분석하고, 상상된 공동체로서 ‘세대 신화’의 문제를 언급하며 세대 개념을 회의하거나 한 편으로는 영웅적 세대와 대비되는 탈영웅적 세대의 출현도 바라본다. 마지막 ‘세대와 집단적 소통’은 공통운명을 인식한 기억의 공동체인 세대가 과거를 추념하는 방식, 대중매체가 세대를 현재화 하는 방식 등을 통해 세대의 기억의 정치를 다루고, 감정공동체로서의 세대가 이미지를 통해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 들을 설명한다.
6. 대상 독자: 인문사회 분야의 독서가 된 분이라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7. 느낀 것: 이 책은 독일의 역사와 사회 속에서 세대를 다루는 책이다. 책을 보며 독일의 역동적인 현대사와 그로부터 파생된 세대 담론은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느꼈다. 이 책은 ‘세대’와 ‘세대 현상’에 관한 정교한 이해를 돕고, 한 편으로는 한국의 세대와 비교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1. 세속화 이론: ‘세속화’라는 말이 낯선 분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세속화 자체가 종교, 특별히 기독교의 영향력에 관한 것이라 그렇습니다. 종종 모슬렘을 중심으로 연구되기도 하는데, 세속화 이론 자체는 근대화 이후 기독교, 또는 종교의 변화를 탐구했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세속화의 정의는 “사회 일반에 있어 종교의 영향력이 감소하는 현상 및 추세”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권과 왕권이 경쟁하던 중세사회와는 다른 현대 종교의 모습을 다루는 것입니다.
2. 핵심: 이 책, 『현대세속화이론』이 가진 시사점은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먼저는 세속화에 있어서 가장 지배적이었던 단일한 이론과 가정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면서, 세속화 이론이 가진 총체성, 복수성, 그리고 역동성을 경험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며, 기독교 문화 자체를 근대성 일부로 포함한다는 점입니다.
3. 저자: 이 책의 저자 데이비드 마틴은 종교사회학 분야에서 권위 있는 학자로, 영국 런던정경대학교(LSE) 사회학과에서 교수 생활을 했으며, 오랜 시간 종교사회학, 그리고 세속화라는 주제에 천착한 인물입니다. 저자의 이력과 이전 저작 역시 매우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한국종교사회학회에서 함께 공역한 결과물입니다. 그래서 책의 장마다 어느 정도 차이가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좋은 번역이었습니다.
4. 내용: ‘종교’는 사회학이 탄생하면서부터 매우 중요한 연구 대상이었습니다. 종교를 인민의 아편 내지는 진통제로 생각했던 맑스와 다르게 사회학의 다른 시조인 베버와 뒤르켐을 종교를 삶의 어떤 상수로 보기도 했죠. 특별히 베버는 근대화를 탈주술화 과정으로 예견했습니다. 탈주술화란 “우리는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라도 우리의 삶의 조건들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우리의 삶에서 작용하는 어떤 힘들도 원래 신비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힘들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모든 사물은 - 원칙적으로는 - 계산을 통해 지배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이 알고 있거나 또는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인데요, 이런 베버의 테제를 이어받은 사회학자들에게 세속화, 즉 종교의 쇠퇴는 사회학의 상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진 않았습니다. 이 책에서도 주로 다루듯, 세속화 이론이 진전된다는 것은 어떤 과학적 인식이라기보다는 어떤 계몽주의 중심의 선입견이 작용한 것이라는 반론이 20세기 중반 이후부터 제기되기 시작합니다. 유럽 중심의 세속화 이론은 “맞는 말”이었을지 모르겠지만,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등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기독교의 부흥은 세속화로 설명하기 어려웠던 겁니다. 총 4부로 이뤄진 이 책은 1부에서 세속화의 일반 이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서론에 해당하며 책의 논점을 밝히고, 이어지는 2부에서는 다양한 사회에 국가에서의 종교를 경험적으로 살핍니다. 어쩌면 세속화가 유럽 중심주의이자, 유럽의 예외주의일 수 있음을 지적하고, 3부에서는 세속화와 성령강림운동(20세기 이후 가장 뜨거운 종교운동)을 다루며 이를 점검하고, 마지막 4부에서는 이뤄진 작업에 대한 저자의 논평을 다루고 있고, 이 부분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5. 대상 독자: 이 책은 현대 사회에서의 종교, 기독교의 변화 양상과 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이런 문제에 고민하는 분들께 좋은 책입니다. 종교와 사회과학을 좋아하시는 독자와 함께, 신학·종교학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께도 흥미롭게 느낄 책입니다.
6. 감상: 근대화 이후 종교의 귀추를 주목하는 시선은 많았습니다. 책의 추천사에서 찰스 테일러가 지적하듯, 한 편에서는 서유럽의 예로 종교의 죽음과 계몽주의의 승리를 속단하기도, 한 편에서는 아시아, 아프리카에서의 기독교의 성장을 예로 종교의 새로운 승리를 점치기도 했죠. 그러나 사회학은 짜지 않고 싱겁고 담백하게 이 주제를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 책이 정직하다고 느꼈습니다. 이러한 논의를 기반으로 새로운 변화 역시 주시해야 할 거라 느꼈습니다.
전태국 선생님의 『지식사회학』을 읽었습니다. ‘지식사회학’이라는 사회학의 분야와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이데올로기’를 설명하는 것으로 서평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1. 지식사회학: 이 주제는 굉장히 낯선 개념일 겁니다. 지식사회학이란 사상과 사회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며 지식의 여러 가지 사회적·존재적 조건을 탐구하는 사회학의 한 영역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맑스는 “인간의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결정한다”고 하죠. 지식사회학을 사회학의 한 분야로 정립한 칼 만하임 역시 지식의 존재구속적 성격을 주장합니다. 쉽게 말해, 우리의 생각과 사회의 사상 등의 ‘지식’은 사물의 본질, 순전한 사유와 논리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담론 바깥의 상황과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구성된다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지식사회학은 지식의 타당성과 사회와의 관계를 성찰한다는 측면에서 “사회학의 사회학”이기도 합니다.
2. 이데올로기: 사회학의 역사 속에서 다채롭게 정의되었던 이 개념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상황에 영향을 주는 사상의 역량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곤 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이데올로기의 부정적 측면에 주목합니다. 이데올로기는 진리를 왜곡하는 허위의식이며, 지배층의 기만과 지배욕망을 은폐하는 역할을 합니다. 맑스는 한 사회의 지배적인 사상은 언제나 그 사회 지배계급의 사상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 지배계급의 사상, 특별히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사회적 존재와 생산 관계에도 침투해 현실의 관계를 뒤바꾸는 허위의식으로 작용합니다.
3. 저자: 전태국 선생님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공부하신 분으로 일평생 고전 사회학과 지식사회학에 천착하신 분입니다. 일찍부터 칼 만하임에 관한 연구를 하신 분이고, 독일에서 강의하실 정도로 독일 사회학에 정통한 분으로, 이 책은 그런 강점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4. 핵심과 내용: 이 책은 지식사회학의 역사를 맑스주의 전통에서 조망하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의 지식사회학의 대상은 곧 이데올로기이며, 지식사회학은 이데올로기 비판을 수행하는 학문입니다. 책의 궁극적 목적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리와 허위를 혼동하게 하는 원인인 특정한 인식, 이념,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폭로하고 비판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책은 맑스주의 전통의 지식사회학을,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다루는 책입니다.
책에서는 5가지 지식사회학의 전통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계몽주의에서의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베이컨, 헬베티마우스·홀바하, 트라시, 나폴레옹·콩트, 포이에르바하 등의 인물을 다루며, 근대적 이데올로기론을 다룹니다. 둘째는 가장 중심이 되는 맑스·엥겔스의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책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입니다. 그 다음에는 맑스주의 지식사회학의 계보로 레닌, 루카치, 그람시의 이론을 조망합니다. 이어지는 전통은 맑스 전통 바깥에 있는 독일 지식사회학을 다루는데 지식사회학을 이데올로기 비판이 아닌 존재와 사고의 가치중립적 관계로 파악하려고 한 막스 셸러와 칼 만하임을 다룹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을 중심으로 논의를 이어나가고, 하버마스를 다루며 논의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5. 느낌: 책 자체가 굉장히 밀도 있고 농축되어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만큼 충실한 책이고, 이런 단행본을 출간하신 저자께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부분은 부르디외나 루만 등의 맑스 전통에 속하지 않은 지식사회학 작업이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건데요, 이는 책에서 목표한 바가 아니었기에 책의 흠결이 되진 않을 것 같습니다.
6. 대상 독자: 이 책은 난도가 높은 편으로, 해당 주제에 독서가 된 독자께서 읽는 걸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론적 훈련을 원하는 독자나, 맑스주의를 좋아하시는 분들께도 추천합니다.
1. 핵심: 이 책, <윤치호와 김교신>은 저자 양현혜 선생님의 도쿄대학교 종교학과 박사 논문을 출판한 것으로, 양현혜 선생님은 서구 근대문명으로 대표되는 ‘기독교’와 근대 조선이 만나 벌어진 서구 기독교의 수용 양상을 윤치호, 김교신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분석한다. 요컨대, 윤치호와 김교신을 통해 본 근대 조선에서의 민족적 아이덴티티와 기독교의 관계 양상을 파악하는 책이다.
2. 저자: 양현혜 선생님은 이화여대 기독교학부 교수로 재직 중인 분으로, 도쿄대학교 대학원에서 종교학을 전공하시고, “동아시아 문명의 전환기에 기독교가 만들어온 역사 인식과 그 사회적 기능을 검토하는 연구”를 꾸준히 하신 분으로, 일본과 한국의 근대 초기 기독교에 대한 전문가이시다. 또한 무교회주의와 김교신 연구의 권위자이시기도 하다.
3. 내용: 이 책은 언급한 대로 윤치호와 김교신이라는 인물을 통해 조선인이 수용한 기독교의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내 주관을 들여 이야기해보자면, 윤치호와 김교신의 가치는 다르다.
우선 윤치호는 한국 보수·극우 개신교의 원류·효시에 가까운 인물로 그가 근대적 지식인으로서 기독교 신앙을 탈신화화하여 수용한 것 이외에 그의 개신교 사상은 한국 주류 보수 개신교의 원형이 된 것 같다.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 윤치호는 일본을 통해 근대화/산업화에 대한 열망과 사회진화론을 체화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기독교를 수용한 그는 식민지배를 신의 뜻으로 성화시켰다. 그의 사상에는 ‘산업문명국=선자=영원한 지복, 비산업 야만국=약자=영원한 멸망’이라는 세계관이 자리했다. 그에게 기독교의 신은 근대 산업 문명을 수호하는 신이며, 적자생존의 원리에 따라 강자에 의한 약자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신이다. 이런 그의 기독교 이해는 ‘열등한 조선’이라는 아이덴티티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반면, 김교신이 수용한 기독교는 독특한 것이었는데, 그는 우치무라 간조를 필두로 한 일본 무교회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는다. 김교신은 기독교 신의 사랑과 정의에 초점을 맞추어 이를 통해 민족의 고난을 회복할 구상을 만들게 된다. 죽음과 싸워 이긴 그리스도로 인해 죄로서의 세계 역사는 종결되고, 신의 나라가 도래하기 시작한다. 이 역사의 변화는 점진적으로 부정의를 정의로 대체하는 역사인데, 이를 통해 그는 민족의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희망과 기대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그는 기독교인이 창조적으로 역사를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주창한 ‘조선산 기독교’는 역사 형성을 위한 주체적·창조적 신앙의 자세이며, 불의에 의해 잃어버린 민족의 역사를 창조적으로 극복하려는 다른 민족적 아이덴티티의 구상이었다.
4. 감상: 윤치호와 김교신에 대한 감상은 달라야 할 것이다. 윤치호의 개신교 수용은 근대 한국 개신교의 사상을 넘어 한국의 사회사상을 형성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윤치호의 개신교 이해 및 수용을 통해서는 사회진화론, 발전주의로 대표되는 한국 근대 사회사상을 엿볼 수 있다. 반면, 김교신의 경우, 그가 가진 실질적인 사상사적 영향은 작은 편이다. 한국에서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는 맥이 아주 소수에게만 전해졌기 때문이다. 윤치호는 한국 보수 개신교를 표상하지만, 김교신이 진보 개신교를 표상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의 진보적 개신교는 1970년대 이후 영미 신학을 통해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김교신은 사상 내재적인 가치가 충분하다. 그는 1970년대 이후 구성된 진보적 개신교 사상을 이미 20세기 초반에 선취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신의 나라(하나님 나라) 신학이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을 때, 윤치호는 한국 개신교의 심층과 사상사적 영향을 이해하기 위해 보면 좋을 것이고, 김교신은 사상 내적인 성취를 중심으로 보면 좋을 것이다.
<시민종교의 탄생>은 시민종교란 무엇이며, 한국에서 식민성, 전쟁을 통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추적했다면, 이 책 <경합하는 시민종교들>은 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부터, 문재인 정부까지 시민종교가 어떤 변화양상을 거쳤는지를 연대순으로 조망하는 책이다. 이 책은 태극기와 촛불로 양분된 두 개의 대한민국의 계보학을 다룬다.
책의 1부 시민종교의 형성에서는 한국 시민종교의 신념체계를 구성하는 민족주의, 반공주의, 발전주의, 친미주의, 민주주의의 문제를 다룬다. 해방을 통해 만들어졌던 집합적 열광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열광은 국가 폭력에 의해 차갑게 사그라지게 된다. 국가는 애국심을 끌어내기 위한 의례, 상징을 창출하며 통치를 공고화하고, 이 시기에는 독립운동과 관련된 성지·영웅과 반공 성지·영웅의 경합이 일어난다.
‘식민지엘리트’ 세력으로 구성된 한국의 지배층은 이런 경합에서 자신의 반민족주의적 과오 때문에 반공주의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사용해야 했다. 김구, 이봉창, 윤봉길, 이동녕, 안중근(가묘) 등이 안장되어있던 민족적 성지 효창공원에 이승만 정부는 축구장을 만들고, 박정희 정부는 테니스장·위락시설을 만들며 성지의 성스러움을 오염하는 것이 대표적 예다.
2부부터 다루는 전쟁은 한국의 시민종교가 반공·친미주의로 중심화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전쟁 이후 반공·친미주의는 대중에게도 내면화된다. 국가 역시 다양한 전적비, 국립묘지, 현충일, UN참전기념물 등의 기념물, 의례, 기념일 등을 만들어내며 반공·친미의 가치를 성스러운 것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한다. 한국의 반공주의는 미국·영국식 자유주의적 반공주의가 아닌, 일본·독일식 국가주의적 반공주의라는 것이 중요한데, 반공주의가 급부상한 시민종교 체제는 이 성스러움에 반대되는 것을 낙인하고, 배제하고, 폭력하는 것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60년의 4·19 혁명은 다시 해방 시기의 집합적 열광, 대중적 열광을 끌어내기에는 충분했으나 혁명은 부유하게 되고, 쿠데타가 일어나게 된다. 3부는 박정희 이후 시민종교를 다룬다. 박정희 정부는 민족주의와 복잡한 관계를 맺었는데, 그는 경제·반공·스포츠 민족주의 등 지배에 도움이 될 민족주의를 잘 활용하며 시민종교를 사용한다. 이 시기의 영웅은 대부분 전장영웅이 자리하는데, 박정희는 병영사회 건설을 위해 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국난의 극복으로서 역사 서사를 만들어낸다. 또한 시민종교의 5대 교리 중 하나인 민주주의를 전면으로 비판하며 반공-국가주의의 시민종교를 창출해내고, 유신체제 이후에는 이에 대항하는 예언자 진영이 만들어진다.
막스 베버는 종교지도자를 사제, 예언자 등으로 구분하는데, 사제적 종교지도자는 초월적 존재로부터 오는 지지와 위로를 제공하며 기존의 가치를 성화하는 역할을 한다. 예언자적 종교지도자는 기존의 가치규범을 전복하며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다. 유신체제 이후 한국의 시민종교에는 민주-공화주의를 중심으로 한 예언자 진영이 만들어지고, 광주항쟁 이후 균열이 본격화 된다.
이 책 마지막은 민주화 이후 시민종교를 다룬다.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의 시민종교는 한의 시민종교로 통합될 여지도 가지고 있었지만, 민주화와 과거사청산을 통해 양분되는 경향으로 이어진다. 저항적 시민종교가 급속도로 발전하고, 지배적 시민종교이자, 시민종교의 사제적 진영의 영웅 박정희, 전두환 등은 조롱과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런 저항적 시민종교의 출현은 김대중-노무현의 정권 창출로도 이어지는데, 48년부터 김대중이 임기를 시작한 98년까지 약 50년 동안 흔들리지 않았던 한국의 지배층은 이에 반격을 시작하고 예언자 진영 역시 재반격을 가하면서 반공-자유를 중심으로 한 시민종교와 민주-공화를 중심으로 한 시민종교의 대립이 극심해진다. 이것이 태극기와 촛불로 표현된 현재의 갈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강인철 선생님은 20세기 한국사를 이해할 때 필수적인 연구를 이어오고 계시며 출판된 책만 거의 1만 페이지에 달하지 않을까 싶다. <시민종교의 탄생>은 세종도서로, <경합하는 시민종교들>은 대학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와 한국사회사학회에서 1회 최재석학술상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지금 태극기와 촛불로 분할된 두 개의 대한민국의 심층에 있는 종교적이고 열광적인 무언가를 확인할 수 있는 책. 굳이 아쉬움이라면 ‘시민종교 정치가’로 표현된 문재인의 정권이 임기 중이라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2016년 이후, 대한민국은 태극기와 촛불로 나뉘게 되었다. “그들은 왜 태극기/촛불을 들게 되었을까?”에 관한 많은 설명이 제시되었는데,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설득력 있게 느낀 것은 바로 이 책, <시민종교의 탄생>에서 제시되어있다.
시민종교란 “한 사회를 통합하고, 도덕적으로 결속시키며, 그 구성원들에게 안정적이고 긍정적인 정체성을 제공하는, 그러면서 어느 정도 성스럽게 여겨지거나 최소한 존중의 대상이 되는, 폭넓게 공유되고 합의된 가치 및 신념 체계 그리고 그와 연관된 상징, 신화, 의례, 실천, 장소, 인물들의 체계”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세속국가에서 국가는 성스러운 후광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 왕권신수설로 정당화된 서구의 절대왕정도, 황제를 천자(天子), 곧 하늘의 아들로 규정하여 지배를 신성화했던 통치도 불가능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는 통치를 정당화하고 권력에 신성한 후광을 부여할 문화적·종교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을 필요로 하게 된다. 국가는 합리적 권위 이면에 있는 종교적이고 열광적이고 비이성적인 충성심을 끌어내는 ‘무엇’을 만들어야 했다.
국민 마음의 종교적 충성심을 끌어내기 위해 국가는 종교처럼 고유의 신념체계, 축제, 의례, 노래, 상징, 영웅, 성인, 성소, 숭배대상을 구축한다. 예를 들어,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이라는 의례, 현충일이라는 국가 기념일과 이를 비롯한 행사, 독립운동가라는 영웅, 독립운동 유적지라는 성소, 애국가 등은 합리적 지배 이면에 있는 유사종교적인 충성심을 만드는 시민종교의 요소이다. 이런 논의를 통해 저자는 한국 시민종교를 분석한다.
책에서는 한국의 시민종교를 주조한 세력으로 ‘식민지엘리트’ 세력을 지목하며, 식민지 경험, 한국·베트남전쟁이 이를 구축하는 중심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식민지엘리트 세력이란, 식민지시기 근대적 교육을 통해 근대적 직업인으로 활동했던 세력으로 이들 안에는 반일적인 개인도 존재했지만, 이들은 집단 수준에서 반민족적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객관적 위치에 있었고, 조선인이라는 민족보다 일본의 민족 이익을 우선했던 세력이다.
문제는 ‘해방’이었다. 민족지도자이자, 민족의 선각자였던 그들은 해방 후 민족주의를 중심으로 한 대중에 의해 과거사 청산의 대상이 되며 생명과 재산에 위협을 받게 되며 한순간에 반민족행위자로 전락한다. 과거사 청산에 관한 대중적 열기가 있었는데도, 미군정은 이 요구를 무시했고, 결국 식민지엘리트는 일제강점기에 이어 대한민국 정부의 지배 세력으로도 자리매김한다.
이들은 대중의 민족주의적 열망에 응답할 수 없는 반민족주의적 지배 세력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지배의 정당성을 끌어내기 어려운 환경에서 시민종교를 강제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이 한국전쟁이었다.
식민성과 전쟁의 상흔 속에서 식민지엘리트가 주도한 한국의 시민종교는 민족주의, 반공주의, 발전주의, 친미주의, 자유 민주주의라는 5대 교리로 발현한다. 민족주의는 과거사 청산, 통일 등의 위험한 민족주의가 아닌 스포츠 민족주의로 대변되는 건전한 민족주의로 변모하고, 반공주의는 전쟁을 통해 대중의 몸 속 깊이 자리하게 되며, 근대화·경제발전으로 나타나는 발전주의 역시 전쟁이 만든 절대 빈곤 속에서 각인되고, 식민지엘리트의 생존 자구책에 불과했던 친미주의 역시 전쟁을 통해 내면화되고, 자유 민주주의는 북한 체제에 대항하는 허울의, 명목의 교리로 작용한다.
한국의 시민종교는 전쟁을 통해 반공주의를 중심으로 재편된다. 이 책에서는 48년 체제 전후 한국 시민종교의 형성기를 주로 다룬다. 지배 세력이 구축한 한국 시민종교의 5대 교리는 국가에 의해 전사자 숭배, 각종 기념물, 행사 등을 통해 성스러운 가치로 변모하고, 그 안에서 교리의 수호자와 이탈자를 구별해 성과 속, 포함과 배제의 기준으로 작용하며 폭력을 정당화하게 된다. 이 책은 한국 현대사 특유의 폭력성도 이런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지금껏 제가 집필한 모든 것은 이론 생산의 0-시리즈였습니다. 최근에 출간된 “사회적 체계들”을 제외하고요.
Was ich bisher geschrieben habe, ist alles noch Null-Serie der Theorieproduktion
— mit Ausnahme vielleicht des zuletzt erschienenen Buches “Soziale Systeme”(AuW: 142).
사상사가 오카모토 유이치로는 사회학의 패러다임이 “프랑스의 뒤르켐이냐, 독일의 베버냐”에서 “프랑스의 부르디외냐, 독일의 루만이냐”로 옮겨갔다고 평가한다. 생소하지만, 니클라스 루만은 사회학의 연구 대상으로서 ‘사회적 체계’를 제시함으로써 자신만의 독자적인 학문 세계를 구축한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사회학자이다. 빌레펠트 대학에 임용될 때 그는 “연구대상: 사회이론, 연구 기간: 30년, 비용: 없음”이라는 내용의 연구계획서를 제출하는데, 그는 평생 15,000쪽에 달하는 70권 이상의 저서와 450편 이상의 학술 논문을 남겼고, 이 <사회적 체계들>은 이 방대한 학술세계에서도 중핵에 해당하는 저작이다.
루만이 독일에서 일반 문법이 될 정도로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는데도 명성이 부족한 이유는 그가 사회를 비판하는 사회학이 아니라, 사회를 기술하는 사회학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루만은 프랑크푸르트 학파 2세대의 대표주자이자, 근대를 미완의 기획이라고 규정한 계몽의 적자 하버마스와의 논쟁을 통해 이름을 알린다. 하버마스는 진보·이성·계몽·비판의 전통으로 수놓아진 독일의 철학적 전통 위에서 루만의 이론을 ‘사회공학’이라고 규정하며 질 수 없는 싸움을 시작하는데, 루만은 이에 담담히 자신의 이론을 설명할 뿐이며, 이는 루만의 승리로 마무리된다.
이론적 명제를 정치적 명제로 치환하지 않고자 했던 그는 학자로서 사회적 체계 개념을 통해 서구 철학·이론 전통의 고색창연한 가정을 가장 급진적으로 전복시킨다. 그는 스펜서-브라운의 형식논리학, 폰 푀르스터의 급진적 구성주의, 마투라나의 인지생물학, 후설의 현상학, 파슨스의 사회적 체계, 사이버네틱스, 그리고 무엇보다도 베버의 사회학을 통해 독창적 사회학을 구축한다. ‘체계’가 주는 경직적 이미지와는 다르게, 루만은 체계에 이미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도 부르는) 포스트 구조주의에서 중요한 ‘차이’에 대한 개념을 68 이전에 선취한다.
행정 관료로 활동하던 루만은 지금껏 사회 현실을 설명했던 방식이 잘못되었으며, 구유럽적인 방식이라는 판단과 함께 복잡성이 갈수록 증대하고 있는 현대사회를 설명한 개념 도구로 ‘체계’를 창안한다. 체계란 환경(정의되지 않은 모든 것)의 복잡성이 감축되어 창발하는 것으로 환경과의 차이·구별을 통해 나타난다. 루만의 사회적 체계는 인간이 아닌 ‘소통’으로 구성되는데, 사회적 체계란 인간 사이에 소통이 발생할 때 그때그때 현재화된다. 체계는 실체가 아닌 작동이며, 소통과 차이의 연속이다. 체계는 자기준거적으로 구별된 자신 고유의 소통을 이어가면서 사회에서의 고유한 기능을 수행해낸다. 루만은 이러한 체계라는 개념을 통해 사회의 정치·종교·법·경제·교육체계 등을 일관되게 분석하는데(사진 2), 사회를 분석하는 일반이론으로서 체계를 제안하는 것이 이 책, <사회적 체계들>이며 이 이론은 높은 완결성을 갖는 이 시대의 마지막 일반이론이자, 거대이론이다.
이 책은 이미 <사회체계이론>이라는 이름을 번역된 바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지금껏 제대로 인용된 적이 없었다. 그만큼 문제적이었다. 루만에게 사회체계(Gesellschaftssystem, Societal System)와 사회적 체계(Soziales System, Social System)은 다른 개념인데, 이전 번역은 그것을 살리지 못했다. 이제 ‘사회적 체계들(Soziales Systme, Social Systems)’이라는 이름으로 정확히 번역되었다. 루만의 <사회이론 입문>에서는 한 ‘한국인 제자’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바로 노진철 선생님이다. 이 책은 2010년대부터 적극적으로 루만 연구를 진행 중이신 이철 선생님과 박여성 선생님의 번역과 더불어 노진철 선생님이 3년간 진행한 강독을 통해 번역된 책으로 믿고 볼 수 있는 번역이다.
루만의 방대한 이론 세계를 설명하기에는 분량이 부족하다. 이 책은 인류 지성사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책이며, 사회(학) 이론이 도달한 가장 높은 고봉으로 이를 직접 응시하기 위해서라도 직접 읽어야 할 책이다.
*본 글은 Robert N. bellah의 논문 Civil Religion in America, 1967을 요약한 것으로, 당시의 구체적 사회적 상황에 기인한 본문보다는, 현재에도 의미있는 내용에 주안점을 두고 그를 중심으로 정리한 글이다. 로버트 벨라의 시민종교 연구는 현대 시민종교 연구의 중요한 이론적 자원이다.
미국의 시민종교(Civil Religion in America, 1967)
로버트 N. 벨라(Robert N. Bellah)
요약: 로버트 벨라의 논문, 미국의 시민종교는 케네디의 연설문 분석을 통해, 정치적 언명 배후에서 정치 권력을 성화(聖化)하는 종교적 차원을 부상시키며, 이를 시민종교로 명명한다. 시민종교를 주제로 벨라는 미국의 독립과 건국 과정에서 형성된 시민종교와 남북전쟁을 통해 전사자 숭배로 공고화된 시민종교의 양상을 기술한다. 이후에는 시민종교의 정치적 동원력이 가지고 있는 양가적 속성을 언급하면서, 당시 미국이 당면한 과제(베트남 전쟁)에서 시민종교 역할의 재고를 주장하며 글을 마친다.
초록: 개신교가 국교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교회와 유대교 회당이 오직 “미국식 생활양식”이라는 보편화 된 종교를 기린다는 사람도 있지만, 실제로 미국에는 정교하고, 제도화된 시민종교가 교회와 구별되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거의 없다. 이 논문에서는 시민종교가 존재할 뿐 아니라, 이 종교는 그 자체의 진지함, 진실성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종교와 같은 동일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1. 케네디 취임식과 시민종교
시민종교, 케네디의 예시
“내가 여러분과 전능하신 신 앞에서 우리 선조들이 거의 175년 전에 규정한 것과 똑같은 엄숙한 선서를 했기 때문입니다. … 인간의 권리는 국가의 관대함에서가 아니라 신의 손에서 나오는 것 … 신의 축복과 도움을 청하면서 … 신이 하시는 일은 틀림없이 여기 지상에서 진실로 우리의 일이 된다는 것을 알고서 우리가 사랑하는 대지를 이끌어 나아갑시다.”(1961년 존 F. 케네디의 대통령 취임식)
존 F. 케네디는 대통령 취임사에서 3번 신을 언급한다. 이러한 언급은 엄숙한 국가 행사에서 미국의 다른 대통령에게서도 거의 변함없이 발견되는 것인데, 엄숙한 행사에서 발언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깊이 자리 잡은 가치와 약속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정치권력의 종교적 정당화
미국은 정교분리 국가이고 종교는 사적인 것이 되었지만, 대다수의 미국인이 공유하는 종교적 지향의 공통적인 요소도 존재한다. 이런 종교적 지향은 미국의 설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정치를 포함한 미국의 생활양식 전반에 여전히 종교적 차원을 제공한다. 공공의 종교적 차원은 미국의 시민종교라고 정의한 일련의 믿음, 상징, 그리고 의례의 조합으로 표현된다. 대통령 취임식은 시민종교에서 중요한 의례적 행사로, 최고 정치적 권위의 종교적 정당성을 재확인한다. 취임 선서는 헌법적 의무를 확인하는 것인데, 케네디는 그것을 국민(people)과 신에게 맹세함으로써, 대통령의 의무는 헌법을 넘어 국민뿐 아니라 신에게까지 도달한다. 주권이 신에게 속한다는 것 역시 이를 신성화하며, 대통령의 의무를 확장한다.
정치적 동원의 종교적 정당화
케네디가 인식한 정치에서의 종교적 차원은 인간의 권리에 대한 종교적 차원의 신성한 근거를 제공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정치 과정을 위한 초월적인 목표를 제공하기도 한다. 지상에서 신의 뜻을 이행해야 하는 개인적, 집단적 의무를 부여한다. 이런 정신은 미국의 건국이념과 같으며, 미국 설립의 모티프로서 이후 모든 세대에 존재하는 정신이다.
2. 시민종교라는 발상(idea): 미국 시민종교의 기원와 특징
‘시민종교’라는 단어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최초로 사용됐지만, 18세기 미국 국부의 사상에서도 종교, 도덕, 통합에 관한 시민종교의 개념을 엿볼 수 있다. 조지 워싱턴은 “인간사를 경영하는 그 보이지 않는 손을 인정하고 경배해야 할 의무를 합중국의 국민보다 더 많이 진 국민은 없습니다. 합중국 국민이 독립국의 지위로 나아갔던 한 걸음 한 걸음이 신의 섭리를 보여주는 어떤 징표를 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취임사에서 연설하는데, 이러한 종교적 언명은 단순히 그치는 것이 아니라, “추수감사와 기도의 날”과 같은 국가 기념일으로 지정되었다. 미국 초기 국부의 언급과 행동을 통해 시민종교의 기조와 형태가 주조되었다.
미국의 시민종교는 기독교에서 선택적으로 파생되었지만, 기독교와 같지는 않다. 시민종교의 신은 초월적 신으로서, 구원과 사랑보다는 질서, 법, 권리와 관련이 있었고, 그 신은 미국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미국 역사에 참여하는 신이다. “미국 이스라엘(America Israel로 의역하자면 미국 선민사상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의 사상은 빈번했는데, 이는 유럽을 이집트로, 미국을 언약의 땅으로 상정한 일종의 미국식 선민사상이었다. 시민종교는 국부의 사적 견해뿐 아니라, 공공의 관점이 반영되어 만들어졌다. 정교분리라는 역사적 합의와 계몽주의, 여러 종파의 개신교가 지배하는 문화적 배경에도 시민종교는 종교와는 다른 기능을 수행하며 살아남았다.
3. 남북전쟁과 시민종교: 남북전쟁을 통한 미국 시민종교의 성립과 전사자 숭배
남북전쟁 이전의 미국 시민종교는 독립(출애굽)이 중심이 되었다. 남북전쟁은 미국의 국가적 자기 이해에 두 번째로 중요한 사건이다. 전쟁은 국가의 의미에 가장 심층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그 의미를 정식화하고, 상징한 사람은 링컨이었다. 그의 주된 관심은 국부가 제시한 건국이념에 있었다.
남북전쟁 함께 죽음, 희생, 부활이라는 새로운 테마가 시민종교에 합류한다. 이것은 링컨의 삶과 죽음에서 상징화된다. 게티스버그 연설은 시민종교의 경전으로 이런 주제가 생생하게 드러난다. 미국의 시인 로버트 로웰은 게티스버그 연설은 상징적이고, 성사(聖事)적인 행동이었으며, 링컨의 죽음 역시 상징적이었다고 본다. 이어서 로웰은 미국인과 미국을 위한 그의 죽음은 자유와 평등에 대한 제퍼슨의 이상을 죽음과 부활이라는 기독교적 희생 제의로 완결한 것이다. 이것은 종파나 종교를 넘어선 숭고한 가치로서 미국의 일부가 된다.
기독교적 원형을 배경으로 ‘우리의 순교한 대통령’ 링컨은 전사자, 즉 ‘최후까지 모든 헌신을 바친 자’와 연결됐다. 희생의 테마는 시민 종교에 잊힐 수 없이 기록되었다. 이 새로운 상징은 육체적·의식적 표현으로 만들어졌고, 이것은 전사자를 위한 국립묘지 건립으로 이어졌다. 전사자를 안치한 국립묘지는 가장 성스러운 기념물이 되었다.
남북전쟁과 함께 확대된 전사 장병 추모일(현충일)은 논의해온 주제를 의례적으로 표현했다. 현충일 기념행사는 순교한 전사자 숭배, 희생정신, 미국의 비전을 포함하는 사회 전체를 위한 주요 행사이다. 추수감사절이 가족을 시민종교에 통합하듯, 현충일은 지역사회를 국가 숭배로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 독립기념일, 보훈의 날, 워싱턴·링컨의 생일을 포함한 국가 기념일은 시민종교의 의례적 기념일을 제공하고, 공교육 제도는 시민 의례의 종교적 기념을 위한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한다.
4. 오늘의 시민종교: 시민종교의 정치적 동원력이 지닌 양가성
미국 초기 역사에서 미국의 종교와 정치변화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교회는 혁명이나 민주제도 반대하지 않았다. 미국의 시민종교는 종교적 전통을 선별적으로 차용하였다. 이렇게 시민종교는 국가적 연대의 강력한 상징인 교회와 반목 없이 구축되었고,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깊은 차원에서 개인의 동기부여를 동원할 수 있었다. 미국의 시민종교는 여전히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불과 3년 전에도 암살된 대통령의 장례식과 희생의 테마가 재현되기도 했고, 린든 존슨은 “오늘 밤 우리가 이 자리에서 시작하는 일을 주님이 정말로 이해하시고 정말로 좋아하실 것으로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시민종교의 자원을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민종교가 언제나 대의를 위해 사용되지는 않았다. 미국 안에서 신-국가-국기를 융합한 보수집단은 비국교도나 자유주의자를 공격하기도 했다. 세계에서의 미국의 역할과 관련하여, 시민종교의 왜곡의 위험은 더 크다. ‘미국 이스라엘’이라는 주제는 인디언에 대한 부끄러운 처리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고, 제국주의적 행동과도 암묵적으로 연계될 수 있었다. 국제 관계에서 미국은 자유 세계의 수호자인 미국과 미국의 도움의 필요로 하는 모든 정부를 동화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남베트남을 피로써 수호하는 것은 새 예루살렘 미국의 역할이며, 여기서 발생하는 죽음은 희생이라는 테마를 통해 성화(聖化)될 수 있다.
5. 세 번째 시험: 시민종교에 대한 염려
미국 시민종교의 첫 번째 시험대는 독립전쟁이었고, 두 번째 시험대는 남북전쟁이었다. 현재 미국의 시민종교는 세 번째 시험에 도달했다. 이 세 번째 시험에서 미국의 시민종교가 패권주의적으로 발현되는 것(베트남 전쟁)을 경계해야 한다. 미국의 시민종교는 미국이라는 국가가 아닌, 궁극적이며, 보편적 실재에 비추어 본 미국의 경험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에, 새로운 상황에 수반되는 미국 시민종교의 연속성을 유지해야 한다.
시민종교의 이면에는 성서적 원형이 존재한다. 탈출(출애굽), 신의 선민(選民), 약속의 땅, 새로운 예루살렘, 희생적 죽음, 그리고 부활. 하지만 시민종교는 순수하게 미국적이고 새롭다. 시민종교는 그 자체의 예언자, 순교자, 신성한 사건, 성지(聖地), 신성한 의례와 상징을 가지고 있다. 시민종교는 양가적 속성을 지니기 때문에, 미국이 신의 뜻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사회가 되고, 모든 국가에 빛이 되는 것은 우려되는 일이며, 주의를 필요로 할 일이다.
1. 핵심: 이 책, <인생의 특별한 관문>은 미국의 대입제도, 대학교육구조와 그와 관련된 학생, 교육기업, 대학, 연구자 등의 관계와 입장을 전방위적으로 분석한 미국 교육 불평등의 보고서입니다. 이 책은 일종의 사회과학 저널리즘으로 볼 수 있는데요, 저자는 학자들의 연구성과는 물론이고 저널리스트답게 실제 학생, 교육사업가, 대학관계자, 학자들과 인터뷰, 자료조사를 통해 다채롭게 책을 채워나가고 있습니다.
2. 저자: 책의 저자 폴 터프는 뉴욕타임스, 뉴요커 등의 언론매체에서 활동해온 저널리스트인 동시에 27개국에 번역된 책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교육에 대한 강연을 하는 강연자이기도 합니다.
3. 내용: 이 책은 총 9장입니다. 1장 ‘꿈의 대학’에서는 능력과 노력을 가지고 교육을 통해 사회의 상승이동을 꿈꾸는 삶을 보여주며 미국에서 대학의 중요성을 환기함과 동시에 이미 불평등해진 미국의 대학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이어지는 2장 ‘대학으로 들어가는 좁은 문’에서는 대학입시기회의 불평등을 다루고 계층에 따라 대학에 갈 기회가 산술적으로만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행동양식(집안의 분위기 등) 수준에서도 어려워진다는 것도 지적해줍니다.
이어지는 ‘대학 입학시험과 입시 사교육: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는 미국 대학 입학에 필요한 표준화된 시험 SAT를 대상으로 내용을 전개하는데, SAT도 부유층에게 유리한 것이 밝혀지며 공신력을 잃고 사업의 위기가 오자 공정한 시험이라는 이미지 메이킹(빈곤층 대상 교육사업 등)과 진실이 은폐된 통계를 통해 위기를 타계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4장 ‘캠퍼스 문화 충격: 엘리트 대학의 빈부격차’에서는 출신계층의 구성이 극단적으로 나뉘고 있는 아이비리그 대학 안에서 빈곤층이 받는 차별을 보여주고 덧붙여 빈곤층 내부에서도 특혜/이중 빈곤층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생동감 있게 전합니다.
다음 ‘대학입학전형의 이상과 현실’에서는 미국 대학의 운영구조를 보여줌으로써 미국대학이 영리사업으로 전락하게 된 이유와 그로인해 돈 많은 학생을 선호하고 유치하는 불평등이 공고화되는 과정을 그립니다. 6장 ‘대학에서 살아남기’에서는 명문대와 비명문대의 졸업률 격차 문제를 다루면서, 대학과 졸업의 문제를 심도있게 다룹니다.
7장 ‘대학 졸업장의 가치’에서는 대학교육을 받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교육 복음’의 실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교육 복음을 가지고 빈곤층을 포섭하는 불량대학의 모습이 나옵니다. 8장 ‘우등생과 낙제생’은 대학 내부의 교육격차로 인한 낙인을 이야기하고, 마지막 ‘누구를 위한 대학인가: 교육 불평등 유감’에서 저자는 과거 미국의 역사에 따라 “공교육을 활성화하면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단순한 해결책으로 돌아가서 미국 교육의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것을 촉구하며 책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4. 감상: 저자는 아이비리그 대학의 2/3는 부유층이고 겨우 4%만이 빈곤층임을 밝히면서 이것이 21세기 귀족제라 합니다. 그렇지만 저자는 암울한 현실상만을 보여주진 않습니다. 미국 내부의 개선의 움직임과 교육을 사명으로 불평등을 완화하려는 많은 사람들 역시 진솔하게 그려냅니다. 아직 한국은 미국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한국 역시 미국의 사례를 참고하고 교훈으로 삼지 않으면 교육 불평등은 더욱 심화될 것입니다.
한국은 표준화된 시험에 대한 맹신이 있는데, 실제로 저소득층 합격은 ‘학종’이 오히려 수능보다 높다는 결과가 나왔죠. 정치스캔들 때문에 공교육이 평등/탁월성을 지향할 것인지, 입시제도는 정시/수시가 공평한 것인지 논의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이 책을 매우 유익하게 읽었습니다. 미국의 영향이 가장 강한 한국인만큼 미국교육을 아는 것은 중요한데 이 책은 미국 현실을 총체적으로 그려냅니다. 많은 사람이 읽고 논의했으면 하는 책입니다.
잡감: 나는 이 책이 조금 더 반향을 일으켰으면 했는데 좋은 출판사에서 나왔음에도 그런 반향이 없었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전 법무부장관 조국 때문일 것이다. 그때 서평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잠깐 하긴 했지만, 조국이 어그로를 끄는 바람에 한국 교육개혁 자체가 역행하기 시작했다.
정유라가 받았던 지원은 말도 안 되고, 정도가 엄청 심했던 반면, 정유라 케이스는 사회의 집단적인 일탈이 되기는 어려웠다. 대신 조국 딸의 경우는 다르다. 정도가 정유라만큼 심하지는 않았지만, 조국 딸의 케이스는 한국 사회 상류층 자녀들의 모습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그들이 아무렇지 않게 느끼던 집단적 특혜를 드러냈기 때문이고, 문제가 그 집단적 특혜를 없애는 차원이 아니라 조국 개인에 대한 비난으로 수렴되었기 때문에 본질에서는 점점 멀어졌다.
교육부에서는 저소득층 합격자는 학종이 더 많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한국의 교육사회학자들 역시 한국에서는 수시가 정시보다 저소득층에 유리하다는 발표를 해왔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 방향 역시 처음에는 그렇게 흘러갔지만, 조국 스캔들 덕에 정책 방향이 한 방에 역행했다. 교육 불평등을 연구하시는 사회학자들께서는 여전히 이 문제를 더 상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했지만, 정부는 정시 확대를 기조로 바꿔버렸다.
사실 나도 항상 정시가 수시보다 공정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사례를 가지고 직접 따지고, 한 개씩 세어본 사람들은 그게 아니라고 했다. 적어도 한국적 상황에서는 생각보다 수시가 저소득층에게 유리하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예를 들 수 있겠다. 시골학교에서는 전교 1등이 수능 모든 과목에서 2등급 2개가 안 나와서 수시 최저에 떨어지기도 한다. 다만 그 친구는 시골 아이들과 경쟁하기에 내신은 1등급이다. 반면 특목고에서는 수재끼리 경쟁하기에 내신은 낮아도, 수능은 시골학교 1등을 몇십 점 앞서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덧붙여, 서울 강남의 한 학원에서는 수능출제위원에 들어간 교수 명단을 확보해서 그들의 전공을 분석해 예상 문제를 만든다고 한다.
내가 이 책을 기대했던 것은 첫째, 한국이 그렇게 선망의 대상으로 꿈꾸는 미국 사회의 교육제도가 가진 모순을 드러내기 때문이었다. 한국은 어떻게든 미국을 모방하지 못해 안달이기에 이 책을 보면서 미리 이런 문제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 둘째, 이 책은 표준화된 시험인 SAT가 가진 불평등과 통계조작도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다. 한국은 표준화된 시험, 수능에 대한 맹신이 있기에 그에 대한 성찰의 계기로도 매우 좋은 책이다. 그런데 논란이 되지 못했다. 조국 한 명 덕분에.
사람들에게 왜 수능이 더 공정한 시험이냐, 물으면 그저 자신의 믿음, 신념, 합의된 실재에 기대 이야기할 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직접 수시가 공정한지 정시가 공정한지 따질 수 있도록 자료에 접근할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육부는 그걸 할 수 있다. 또 교육사회학자에게 그 자료를 공개해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료와 실제의 경험적 자료에 기반해 나온 결론을 과학이라고 하고, 믿음, 신념, 합의된 실재가 아닌 과학적인 근거로써 정책을 수립해야 하는 게 정부의 역할이다.
얼마 전 문재인 정부의 교육부는 정시 비중을 확대한 대학 70개교에 10억씩, 700억을 쐈다. 교육 질을 높였거나, 학생 복지를 확대했거나, 연구에 투자한 것도 아니고, 그저 지들 입맛에 맞게 입시를 바꾸니 돈을 뿌린 거다. 박근혜 시절, 대학구조개혁평가에서 지방대가 살아남기 위해 교육부 출신 관료를 총장, 부총장에 앉히며 “똥꼬쇼”를 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 문재인 정부는 이와 뭐가 다를까. 교육에 있어 참 무책임하고 비겁한 정권이다.